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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集 書 「答成浩原 夜來淸況如何」의
<理通氣局>과 <氣發而理乘> 論註
兩白山人 朴喜鎔
[解題]
1968년에 민족문화추진회가 간행한 『栗谷集』書에는 율곡 李珥(1536~1584)가 지기들과 주고받은 34편의 편지글이 있다. 그 중에서 율곡이 19세 때인 1554년부터 서거 1년 전인 48세 1583년까지 成渾(1535~1598. 자는 浩原, 호는 牛溪)에게 보낸 書는 27편으로 전체의 79%로 4/5을 차지한다. 27편 중 答하는 것이 25편, 與하는 것이 2편으로 성호원이 주로 율곡의 학설에서 의문 나는 점을 묻고 율곡이 그에 대해 논리를 궁구하며 辯釋하고 있다. 10여 년 동안 자문자답하듯이 필담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언어와 논리가 발전되어 초기엔 뼈대만 세워졌던 율곡철학이 비로소 건물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시대 문집에서 賦, 詩, 疏, 啓, 議, 策, 雜, 論 등은 각각 글의 특징을 가지며 필자의 사상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것들은 용도와 독자를 의식하여 공인의 입장에서 공적인 관점으로 쓴 것들이기 때문에 조탁, 가공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書는 흉금이 통하는 지기지우를 상대로 사적인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필자의 생각과 감정이 날것으로 들어있어서 사상의 심층을 파악하는 기초 자료가 된다. 또 출판이나 담화를 통해 자기의 사상을 전파하기 매우 어려운 시대 조건 하에서 書는 받는 당사자에게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 사회에서 구술이나 필사본 등의 형태로 널리 알려지는 중요한 학문적 전파도구였다. 더불어 書는 논리 단련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私的 試論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書를 통해서 자기 논리를 시험할 수도 있었고, 발표한 학설에 대한 위험부담이 적었다.
이 書 「答成浩原 夜來淸況如何」는 혈기 울울한 37세인 壬申年 1572년에 쓴 것으로, 32세인 156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계와의 성리학 토론 왕복 書 중에서 백미를 이룬다. 율곡의 공부를 보면 이 書를 기점으로 해서 自得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 5년 동안의 12편은 주로 선현의 학설에 대하여 자기가 공부한 바를 답하는 형식을 빌려 표현한 것이었다면, 이후의 10여 년 동안의 15편은 自得한 바를 자신 있게 얘기하고 의문에 답한 것이 13편, 우계에게 되짚어 질문한 것이 2편이다.
율곡은 이 書에서 지금까지 20년 동안 자기가 주자성리학에 대하여 공부한 요점을 <理通氣局>, <道心本然之性>, <氣發而理乘>이란 말에 농축하였다. 이 세 개념은 율곡철학을 구성하는 벼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 書에서 발아한 이것들은 10여 년 동안 우계와의 토론을 통해 깊이와 무게를 더해갔다. 특히 ‘理發不可’라 하여 퇴계의 핵심 학설인 ‘互發論’을 비판함으로서 영남, 기호 두 학파의 분기점을 이루어서 조선성리학을 풍성하게 동시에 치열한 양파 간의 논리 대립을 초래하였다. 율곡이 쉰을 못 넘기는 바람에 이 세 개념의 발육이 정지되고 말았지만, 그가 일이십 년을 더 살아 완숙한 노년기가 있었다면 많이 변화되어 또 다른 면모를 보였을 것이다.
인용한 원문은 이 書의 연역적 서론으로서 율곡철학과 朝鮮後期史를 이해하는 데에 벼리의 손잡이처럼 중요하다. 율곡철학이 17세기 이후의 조선사에서 중요성을 갖는 까닭은 주류 위정자들 대부분이 그의 철학을 계승하여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퇴계철학은 남인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권력의 중심에 들지 못하고 산림학문에서 맴돌았지만, 율곡철학은 서인-노론에 의해 줄곧 계승되어 권력 중심에 서서 위정자들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상,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중추 역할을 한 것은 기호학파들이었고 그들의 사고는 율곡철학에 기반하였다. 이런 면에서 <理通氣局>과 <氣發而理乘>은 율곡철학을 떠받치는 두개의 큰 기둥이요 이해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리기론이 중요한 까닭은 인성과 사회에 대한 동양적 인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자아와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마음을 안정되게 잘 다스리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음 수양, 즉 이론 탐구보다는 실천을 중요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듣고 의지하는 타력신앙이다. 그것은 소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부지런히 소를 잘 먹이는 것과 같다. 凡人들에게는 信仰이 필요하지만 智者라면 실천에 앞서 마음을 정돈해야 하고, 마음 정돈에 앞서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앞서 그 마음의 구성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지행합일을 실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知이다. 알고 난 다음에 그 앎에 맞도록 실천하는 것이 지행합일이다. 그래서 리기론은 자기 마음의 구성을 알아 다른 마음을 이해하고, 나아가 사회와 우주의 구성과 변화를 탐구하는 초점이 된다.
원문 속에 들어있는 율곡의 생각을 정확하게 짚어내어 중의를 파악하며, 그것이 갖고 있는 미흡한 부분이 무엇인지 추출하는 것은 율곡철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류철학이면서도 왜 조선을 망국 지경에 빠지도록 할 수밖에 없었던 논리적 결함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함으로서 리기론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原文]
答成浩原 夜來淸況如何
理通氣局四字 自謂見得 而又恐珥讀書不多 先有此等言而未之見也 以道心爲本然之氣者 亦似新語 雖是聖賢之意而未見於文字 兄若於此言不疑怪而斥之 則無所不合矣
理氣元不相離 似是一物 而其所以異者 理無形也 氣有形也 理無爲也 氣有爲也 無形無爲而爲有形有爲之主者理也 有形有爲而爲無形無爲之器者氣也 理無形而氣有形 故理通而氣局 理無爲而氣有爲 故氣發而理乘
[音讀]
답성호원 야래청황여하
리통기국사자 자위견득 이우공이독서불다 선유차등언이미지견야 이도심위본연지기자 역사신어 수시성현지의이미견어문자 형약어차언불의괴이척지 즉무소불합의
이기원불상리 사시일물 이기소이이자 이무형야 기유형야 리무위야 기유위야 무형무위이위유형유위지주자리야 유형유위이위무형무위지기자기야 리무형이기유형 고리통이기국 리무위이기유위 고기발이리승
[국역]
'리통기국' 네 글자는 내가 발견하여 얻은 것이라고 여기지만, 내가 독서가 많지 않아 벌써(이미) 이런 말이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나 싶습니다. 도심을 '본연지기'라고 한 것도 역시 (내가 발견한) 새로운 말인 것 같습니다. 비록 성현의 뜻이기는 하나 아직 문자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형이 만약 이 말에 대하여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겨 배척하지 아니하면 (나의 견해와) 합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떠나지 아니하여 흡사 한 물건과 같으나 그것들이 서로 다른 까닭은, 리는 무형이고, 기는 유형이며, 리는 무위이고, 기는 유위이기 때문입니다. 무형무위하여 유형유위의 주인이 된 것은 리요, 유형유위하여 무형무위의 器가 된 것은 氣입니다. 리는 무형이요 기는 유형이므로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 것이며, 리는 무위요 기는 유위이므로, 기가 발하면 이가 타는 기발리승입니다.
[論註] 理通氣局, 氣發理乘에 나타난 율곡의 생각
여기서 율곡이 말하는 有形이란 氣가 눈에 보이도록 응집한 현상적 존재, 즉 물질의 구성 재료와 그 구성체를 의미하고, 有爲란 氣가 形迹을 이루는 능력(이것이 발현되도록 하는 주인은 無爲인 理), 즉 물질의 구성 과정을 의미한다. 氣가 有形이란 말은 원소 상태에서나 물질 상태에서나 실재하는 부피와 질량이 있다는 것이고, 有爲란 말은 할 수 있다, 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局’자를 써서 한정된 실재를, ‘發’자를 써서 氣가 에너지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理의 無形無爲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지는 할 수 있는 각각의 이치로서, 理一分殊하여 상대적 존재인 물질의 원소들을 움직여 한 형태를 이루도록 하여 존재하도록 하고 운용되도록 하는, 즉 氣가 有形有爲토록 하는, 사물과 현상마다 이미 내재하고 있는 절대적 법칙을 의미한다.
氣의 有爲 上에서, 理가 총론 격으로 작용하는 게 무생물이고, 각론 격으로 작용하는 게 생물이다. 무생물에서는 理가 오묘하면서도 단순한 법칙인 종합적 섭리로 은미하게 나타나고 생물에서는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법칙인 분석적 생리로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 생리 현상의 총화는 생명의지이다. 무생물은 물질의 섭리라는 큰 틀의 변화의지에 따라 성실하게 성주괴공을 되풀이하지만, 생물은 생명의지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변화 모습을 보인다. 모든 생물이 가진 물질적 생리-물리, 화학, 생물, 에너지, 환경-는 기본적으로 같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각양각색의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명의지 또한 개체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율곡은 不離不雜論에 대한 이해에서 전래의 학설 그대로 리를 主로, 氣 -존재론적 실체인데도 불구하고-를 종속으로 보았기 때문에 理通氣局은 그가 自謂見得한 것이기 보다는 기존 理主氣從觀의 답습일 뿐이다. 그러나 ‘器者氣’라 하여 리와 기의 관계를 단순한 주종으로 보지 않고 인과의 관계로 본 점, 기를 리의 구현으로 본 점, 리를 초점으로 하여 그 논리를 전개한다면 분명히 理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氣란 말을 앞세워 氣發理乘을 말한 점은 기존의 주자학설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존의 不離不雜說과 무위유위론을 논거를 삼아 理發氣從을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논리나 현상에서 당위성이 미흡한 점을 율곡은 인지하였기 때문에 기의 유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리의 주재성을 강조한 氣發理乘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乘이란 말로 리가 主宰者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혹자들은 율곡철학이 主理論이라 하지만, 自動力을 의미하는 發이란 말을 氣에 붙여서 氣의 실재성과 유위성을 인정한 점을 중심으로 해서 主氣論이라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개념 정의에서 글자 한자마다의 순서에 따라 의미가 다른데, 理通氣局에선 리가 앞이고 기가 뒤지만 氣發理乘에선 기가 앞이고 리가 뒤인 점을 보더라도 율곡이 氣發에 대해 확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이 리기론에서 리와 기의 관계를 말과 騎手로 자주 비유하는데, 기수의 신호와 통제를 받아서 출발하는 말도 많지만 기수 없이도 말이 출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氣의 자발성은 譬證된다. 율곡의 氣發理乘論에는 무위무형한 리가 發하지 못한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유형유위한 기가 자발성을 갖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發하도록 하는 주체를 당시 학자들이 비천하다고 치는 氣에 두기보다는 숭고한 理에 두고자 하여 乘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고민이 들어있다. 물론 그 고민의 깊이만큼 논리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또, 말이 출발할 때 기수가 함께 타고 있는 것이 정상이듯이 기가 발할 때 리도 함께 발한다 하면 될 것을, 즉 理氣兼發說을 말하면 될 것을, 리와 기의 發處가 각기 다르다는 퇴계의 理氣互發說을 부정하는 입장을 강조하다보니 ‘乘’이란 말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兼’字를 사용하기 난처했으면 ‘乘’字 대신에 ‘道’나 ‘導’, ‘統’,이나 ‘御’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理貴氣賤 사상이 투철하여, 理發은 道心으로 존귀하므로 군자와 양반의 것이고, 氣發은 人心으로 비천하므로 상민의 것이라는 퇴계학의 宗旨와는 애초에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청년 율곡은 노숙한 퇴계를 찾아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心腹하여 따르는 스승으로는 끝내 모시지 않았다. 즉 젊은 율곡의 흉중에는 互發은 아니라는 생각이, 理通氣局은 인정하면서도 무위인 理가 스스로 發한다고 볼 수는 없어서 유위인 氣의 에너지를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율곡의 고민이 들어있었다.
이렇듯이 理通氣局에서는 분명 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氣發理乘에서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뜻이 담겨 있는 듯하여 후학들로 하여금 율곡철학의 근본이 주기론과 주리론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수백 년 간 토론이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퇴계는 리와 기의 개념을 인성론과 경세론에까지 이끌어 들이려다 보니 互發論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不離不雜의 원칙에도 교묘하게 어긋난다. 율곡은 주자학의 종지에 따라 理를 主로 하면서도 氣發을 중요시하게 봄으로써 비교적 원칙에 근접하려고 하였다.
일부 후학들은, 퇴계의 호발론은 근원은 같으면서도 발하는 방법이 다름을 말함이요, 율곡의 기발리승론은 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주기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가 리의 통제를 받아 발하는 주리론을 말함이라는 절충론을 편다. 그러나 아주 작은 각도의 차이로 초점에서 발한 빛이 나중엔 영영 다른 곳으로 가듯이 학문에서 가장 예민한 논점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절대성을 가지기 때문에 절충론이란 말은 진지한 학문의 논점을 흐리게 할 수가 있다. 절충론으로 두 선현의 학설을 모호하게 할 일이 아니라, 우주자연과 인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사회와 시대 문제 해결을 위한 사유의 초점인 不離不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개념 정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율곡은 不離不雜이란 개념의 논거로 무형무위와 유형유위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 말들이 관념적 추론 면에서는 일견 타당성을 가질지 몰라도 실험적 검증 면에서는 허점 및 약점이 많다. 물론 과학적 지식과 추론이 활발하지 못한 시대적 한계가 있었지만, 학문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소위 성리학 분야 선현들의 학설만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지고지선의 목표로 삼고, 학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는 살고 있는 현실 분석을 도구로 하기보다는 관념과 사색을 도구로 하고, 학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자기가 추종한 한두 명 선현을 논거로 삼아 일체의 타설을 용납하지 않는 현상이 누적되면서 기초적인 개념 정리부터 모호성을 띄게 되었다.
율곡이 주자학설에 순종하여 理를 主로 보면서도 끝내 氣를 잊지 못하여 氣發理乘을 말한 연유는 젊었을 때 잠시 입산수도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절에 그런 경험이 없는 일반 성리학자들은 철저한 주리론자인 주희의 학설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랜 학습을 통해 이미 의식구조와 사유방법이 굳어져 버렸다.
주자학의 적통인 퇴계로 대표되는 주리론, 주리기종론, 존리천기론, 신분론, 리기호발론, 도심인심론, 사칠론 등은 시대적, 정치적 상황 면에서 뿐만 아니라, 논리적 모순의 극복과 관념적 구조의 안정 면에서도 不離不雜과 무형무위, 유형유위에 대해 분명한 이분법을 적용하여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주자학자들이 기를 천하게 본 것과 달리, 율곡이 당연히 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기를 무겁게 생각한 듯한 氣發理乘론은 진일보 한 것이다. 그렇지만 기가 분명 무언가 아주 중대한 의미가 들어있음을 통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氣論을 전개하지 못한 것은 그 당시의 학문적, 정치적 환경 때문도 있지만 不離不雜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미흡했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不離不雜이 갖는‘似是一物’과 ‘其所以異’ 사이의 간격을 무형유형과 무위유위로는 모두 채워 넣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理通氣局과 氣發理乘은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의 범위를 생물 차원을 넘어 무생물 차원까지 확대해서 본다면 氣가 큰 틀의 실재이고 理는 작은 틀의 허상 -그래서 무형무위한-임을 알 수 있다. 무형무위한 리의 지시에 따라 기가 응집하여 사물과 현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실체적 현실인 기를 중심으로 본다면 氣本理客 -기가 본바탕이고 리는 상황에 따라 오가는 객-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지의 출처인 생리는 氣의 응집인 물질에 바탕 하기 때문에, 비록 氣가 理에 의해 조종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나름대로의 존재성과 고유성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理를 무형무위라 하면서도 절대성을 갖도록 하는 논리적 가설 -이론물리학의 원형 또는 가상의 神性 -보다는, 현대물리화학이 검증한대로 氣가 갖는 운동성과 물질이 갖는 속성, 더구나 여러 종류의 물질들이 적층 결합하였을 때 나타나는 현란한 변화성을 고려한다면, 氣란 理가 의도한 바에 따라 수동적으로 작용하기만 하는 종속물이라고 할 수 없다.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 확장해서 고려해 보면 오히려 氣가 중심이고 理가 종속임을 알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지구 그리고 우주를 자연이라는 한 마디 말로 압축하면 크게 생물과 무생물로 이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물은 무생물에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무생물의 속성을 생물에 적용해도 된다. 물론 생물은 생물 나름대로의 존재성과 고유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 뿌리는 무생물일 수밖에 없으므로 무생물의 섭리, 즉 理와 氣의 적용 대상이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는 물질이다. 물질은 수많은 氣, 즉 원소들의 결합체이다. 氣는 기대로, 물질은 물질대로의 구성과 작용의 원리가 있다. 그 원리를 따로 떼 내어 理라는 말로 표현하여 절대성을 부여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이미 氣에 필연적으로 내장된 속성일 뿐만 아니라 氣의 운동성을 표현하는 의미를 가진 말일뿐이다. 바위가 부서지고 수증기가 증발하고 별이 불타고 식고 파멸하고 응축하는 등 자연의 무생물적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카오스이면서도 일견 ‘정형화된 흐름’ -현대물리학 이론-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생물적 현상들의 ‘정형화된 흐름’은 생물 현상에서도 볼 수 있다. 생물의 원초적인 생리현상과 생명의지가 그것이다. 생리는 철저히 물질적 욕구의 표출이고 생명현상 역시 그 생리를 존재토록 하기 위한 맹목적 추구이다.
理가 氣의 속성이고 운동성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면, 큰 理가 만물과 만상에 잘게 나누어져 있다는 理一分殊란 말과, 큰 氣가 만물과 만상에 잘게 고루 나누어져 있다는 말은 언어 표현만 다를 뿐이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 理一分殊와 氣一分殊는 같은 의미이므로 理와 氣를 별개로 여겨 다투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리와 기를 볼 때는 큰 틀과 작은 틀로 구분해야 한다. 理一分殊에서 사물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큰 리, 개별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작은 리라 하고, 氣一分殊에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큰 틀과 작은 틀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돈할 때 논리적 착종 현상이 생긴다. 리와 기는 모든 경우의 절대성과 상징성만 갖는 게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대성과 다양성을 갖기 때문에 만물과 현상을 볼 때엔 두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한다.
율곡 등 모든 조선주자학자들이 그토록 숭상한 理가 한갓 저급한 氣의 異名이라면 과거나 현재의 많은 학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토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는 바, 氣의 실재와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게 무릇 학자 된 자의 기본이요, 나아가 경세제민 하는 사고와 행위의 기축이 된다.
氣를 욕망, 人欲, 七情의 근거로 보아 억압하는 것은 굽은 화살을 쏘거나 영점이 잘못 조준 된 총을 쏘는 것과 같다. 바른 화살이라야 과녁에 정확하게 맞을 수 있다. 氣는 실재하며 바로 우리들 가까이, 아니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런 氣를 천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천시함과 진배없다.
욕망은 생리와 생명의지가 부르는 절대적 명령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체로서는 절대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상대적인 것이다. 동물세계에서는 욕망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생명의지의 강력한 표현인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방법론을 리와 기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이 무한하여 자유자재 하다고, 소중한 내 생명을 위한 욕망의 노출은 당연하다고, 즉 내 氣만이 氣이고 내 理만이 理라고 고집해선 다른 사람의 것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이 서로 상생공존하기 위해선 氣의 큰 틀 속에서 理와 氣가 不離不雜하여 理通氣局하고 氣發理乘하는 理一分殊, 즉 氣一分殊의 의미와 상관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不離不雜을 알면서도 理主氣從을 강변하는 理의 홍수 속에서, 氣發을 말하며 氣의 가치를 보호하려고 노력한 율곡의 뜻이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氣는 호연지기이고, 변화이고, 변법이고, 융통이며 소통으로 인성의 변화와 사회 발전에 원동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리의 엄격함을 강요하는 양반문화의 통제로 인해 주눅이 들고 말았다. 젊은 율곡이 반대한 퇴계철학의 주리론과 호발론 못지않게 율곡철학의 주기론과 기발리승일도론은 후세로 내려갈수록 본래의 의미를 잃고 주리론, 일원적이원론이란 말로 분식되고 말았다. 화담의 주기론을 일정 부분 이해하며 기를 리와 대등한 위치에 놓은 율곡의 생각은 산림처사들의 소유를 벗어나 고관대작들의 전유물이 되면서 기는 탈색되고 말았다. 바탕인 기를 상실한 리는 마른 꽃이 되어 조선 후기 내내 탐관오리들의 가슴을 장식하였다.
자연에 묻어 흔적 없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고루한 후학들에 의해 호화롭게 치장된 산소의 석물과 같은 존재로 화한 것이 理이다. 무형무위로 이미 기 속에 들어 있다가 발하여 유형유위한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리를 구태여 기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관습적인 학풍 때문에 가깝게는 조선인의 인성이, 멀게는 조선 사회가 왜곡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생물들은 백 년 동안의 시련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율곡이 쉰을 넘겨 이순, 고희까지 살았다면 분명 ‘리통기국’과 ‘기발리승’ 속에 들어있는 논리적 모순을 보완하면서 주기론을 심화하여 뚜렷한 주기론자로 섰을 것이다. 氣가 제 가치를 찾아 세상에 반듯하게 섰을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理의 질곡에서 벗어나 호연탕탕하였을 것이다.
[原文]
理通者 何謂也 理者無本末也 無先後也 無本末無先後 故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程子說 是故乘氣流行 參差不齊 而其本然之玅 無乎不在 氣之偏則理亦偏而所偏非理也 氣也 氣之全則理亦全而所全 非理也 氣也 至於淸濁粹駁糟粕煨燼糞壤汚穢之中 理無所不在 各爲其性 而其本然之玅 則不害其自若也 此之謂理之通也
[音讀]
리통자 하위야 리자무본말야 무선후야 무본말무선후 고미응불시선 이응불시후정자설 시고승기유행 참치부제 이기본연지묘 무호부재 기지편즉리역편이소편비리야 기야 기지전즉리역전이소전 비리야 기야 지어청탁수박조박외신분양오예지중 리무소부재 각위기성 이기본연지묘 즉불해기자약야 차지위리지통야
[字義]
參差不齊 참치부제 : 길고 짧거나 또는 서로 드나들어서 가지런하지 않음.
參 : 삼)석, 셋. 참)참여할, 가지런하지 못할, 떨기로 설 叢, 빽빽이 들어설.
差 : 차)어기어질, 가릴, 다를. 치)층날, 어긋날, 오르락내리락 할 燕飛.
參差 : 가지런하지 아니함, 흩어진 모양, 연이은 모양.
玅 묘 : 현묘할 糟 조 : 지게미 粕 박 : 재강, 깻묵, 비지
煨 외 : 불에 묻어 구울 燼 신 : 불탄 깜부기, 나머지, 불똥, 재난의 뒤
漠 막:아득할 고요할 맑을 사막 駁 박 : 얼룩말, 섞일, 논박할.
[국역]
리통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리는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습니다.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으므로 아직 감응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도 앞인 것이 아니며 이미 감응하였을 때에도 뒤인 것이 아닙니다 (감응, 사물 현상이 나타나기 전이라 하여 먼저가 아니고 나타났다고 해서 나중이 아니라 리는 時空을 초월해서 항상 존재). 정자(程子)의 설.「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에 ‘漠無離 萬象森然已具 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 이러한 까닭으로 (리는) 기를 타고 유행하여 흩어져 고르지 아니하나 그 본연의 현묘함은 (현묘한 리는) 없는 데가 없습니다. 기가 치우치면 (雜濁하면) 리도 역시 치우치게 되나 그 치우친 바는 리가 아니라 기이며, 기가 온전하면 (淸粹하면) 리도 역시 온전하나, (그) 온전한 바는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섞인 것과 찌꺼기, 재, 거름, 오물 가운데에 이르기까지 리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각각 그 性이 되지만 그 본연의 묘리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리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論註] 理通 偏全의 錯綜 현상
율곡의 논리를 通貫하면 기가 곧 리이고, 그것의 顯現이 물질의 성이란 말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론과 분자론의 소박한 모습으로, 원자를 기라 하면 그 기가 갖고 있는 구성원리를 리라 하고, 그 둘을 함께 말하여 性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생각은 한 세대 앞 화담철학의 정수인 물질불멸론에 기반 한 주기론의 계승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과학적인 분석과 검증을 할 수 없는 지식의 시대적 한계가 있었지만, ‘本然之玅’라는 추상적인 말로 理通을 장식할 것이 아니라 생활과 경험, 자연에서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증을 이끌어서 리통론을 전개했다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기의 偏全이 곧 리의 편전이란 말은 발이 없어 걷지 못하는 리가 걸을 수 있는 기에 의존한다는 말, 따라 움직인다는 말로서 기와 리가 같은 것인데 단지 기가 선이고 리가 후란 말, 기가 주이고 리가 종이란 말에 다름 아니다. 기를 중심으로 본다면 기가 기관차가 되고 리는 객차가 되어 리가 기의 종속이므로 주기론이 되고, 리를 중심으로 본다면 하드웨어, 그릇, 껍질인 기보다 소프트웨어, 알맹이인 리가 더 실효성을 가지므로 주리론이 된다. 비유하여 기를 그릇으로 리를 물로 본다면, 그릇 없는 물은 담길 수 없으며 물이 담기지 않은 그릇은 의미가 없다. 물과 그릇, 기와 리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마다 경직된 사유의 틀 속에서 어느 한쪽만을 절대시하여 고집하면 종내엔 큰 다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율곡은 理通論에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 바, ‘而其本然之玅 則不害其自若也’에서 말하는 ‘리의 순수한 완전성’은 원자가 물질계 어디에서나 그 본연의 모습을 갖는다는 뜻으로, 현대 실험물리학이 검증한 바를 4백 여 년 전에 직관적 사유로 통찰한 이론물리학이라 할 수 있다. 순수 원소들이 그 자체의 구성원리에 따라 움직여 물질을 이루고, 여러 물질들의 구성원리가 다양하게 결합, 이산함으로서 만물이 생성, 변화, 소멸한다는 오늘날의 과학 상식은 조선 성리학에서 말하는 理一分殊와 氣一分殊의 원리와 같은 의미이다.
기본 원소를 기로, 구성원리를 리로 본다면 구성원리에 의해 원소가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 원소가 이미 구성원리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주리론자들의 주장대로 물질인 기는 정신인 리의 지배를 받는다 하더라도 율곡의 말대로라면 ‘氣之偏則理亦偏’하고 ‘氣之全則理亦全’하기 때문에 일단 리가 기의 틀 속에 들어있음은 분명하다.
리는 ‘不害自若’하므로 순수성은 가지나 스스로 發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에 乘하여 ‘亦偏亦全’한다. 리가 자기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선 기에 乘할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리 앞에서 ‘自偏自全’하며 리의 순수성을 乘으로 제한하는 기가 논리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리는 언제 어디서나 ‘不害自若’하므로 기를 먼저 알고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율곡이 말하는 리는 순수성을 갖고 언제 어디에나 상존한다. 그러나 그것이 全理일 때는 문제가 없지만 偏理가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율곡은 편리를 전리로 하는데 있어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기라고 하였다. 리기론을 인성과 도덕의 문제로 확대할 때, 화평한 인성과 올곧은 도덕인 전리를 누구나 알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까닭은 개인마다의 기질의 문제, 즉 기가 ‘亦偏亦全’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퇴계와 다른 점이라면 퇴계가 전리를 군자의 전유물로, 편리를 소인의 것으로 여겨 그 경계를 엄격히 하였지만 율곡은 수양을 통해서 기를 全氣化 함으로서 편리가 전리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율곡의 ‘氣之偏則理亦偏’과 ‘氣之全則理亦全’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리를 지나치게 수동적인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도 퇴계학파로부터 주기론자라는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율곡은 선악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고 단일한 것으로 본다. 선은 전기전리 하고 악은 편기편리한 것이나 편전은 기의 문제, 인위적인 기질의 차이 때문이기에 선악의 출처는 기 한 곳, 즉 개인의 기질 한 곳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그래서 기질의 편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퇴계는 기를 다스리는 개인적 수양론도 중요하지만 리의 발현인 도덕과 예의를 강조하였고, 율곡은 초기엔 개인적 기의 편전문제 해결을 강조하며 기론을 심화하였지만 벼슬이 높아진 마흔 이후엔 사회적 강제인 규율과 경세론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편이든 전이든 선이든 후든 리는 항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퇴계가 항상 온전한 리의 발현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율곡은 편전하는 리를 변화와 융통의 길에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율곡의 말대로 리의 편전에 앞서 기의 인위적 편전이 문제이기 때문에 도덕은 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의 문제이다. 지식과 교양이 대단하면서도 위선에 능한 사람과 추호의 죄책감도 없이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갖는 의식구조와 가치관을 편기와 편리의 소치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偏이란 全을 지향하는 말이기 때문에 改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위선자와 악독자는 편기편리라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흉포한 동물성만 충일해 있기 때문에 歪氣, 歪理 또는 邪氣, 邪理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선악의 문제를 단순하게 기의 偏全 여부 문제로만 여길 수 없다. 성선설에 뿌리 둔 恒全理論만으로 복잡다단한 인성과 도덕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이다.
율곡이 인성과 도덕의 문제에서 편기와 전기를 말한 것은 현실 세계를 통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인성이 근본적으로 선한데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악이 나타나는 것을 논리화 하려다 보니 만들지 않을 수 없는 논리였다. 그러다 보니 리가 독립성을 잃고 기에 의해 조절되는 것으로 정의되어 리를 존중하는 후학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편전이라는 말보다는 완전이란 말만을 썼더라면 오히려 논리가 뚜렷하였을 것이다. 즉 리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완전한 모습을 갖고 있으나 기질이 혼탁하여 어둡기 때문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氣發理乘一途’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氣發理乘殊途’라고 했다면 훨씬 사유가 확장될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기의 發性도 살고 리의 순수성도 살리면서 세상의 다양한 변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이미 기속에 내재된 리는 물질의 원리 역할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거기에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리를 정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物質理를 精神理化 하여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리기론을 논구할 때도 물질의 이치와 인간사회의 이치를 분별하여 기본인 물질리의 순수성을 존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확대 해석하거나 왜곡하면서 절대시하는 동시에 기의 실재를 간과하였다. 관념으로서의 기와 리 개념과 응용으로서의 기와 리 현상을 혼동하였다. 그러한 착종이 인성론이나 사회론에 투사되면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여파로 조선 문화의 생명력이 손상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문화가 생명력을 잃도록 한 조선유학의 가장 큰 오류는 리기를 구분하여 차별하고, 리기를 우주론, 인성론, 경세론 등에 각기 달리 적용해야 했는데 일괄하여 적용하고, 이것을 현실에 응용한 신분제도이다. 조선의 생명력을 저상시킨 신분제도를 지탱하는 논리적 근거로서 기와 리가 이용당한 것이다.
格物致知에서, 인간과 사물을 개체별로 하나하나 분별하여 사유하는 것은 靜觀法이고,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종합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動觀法이다.
정관법에서 본 리기는 동관법에서 작용하는 리기와 다르다. 원자의 결합과 분리에 따라 새로운 성질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혼자일 때의 인간과 둘 이상일 때의 인간이 다르고 혼자일 때의 사물과 혼합되었을 때의 사물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관과 동관의 구별 없이 정관만을 일률적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에 개체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뿐만 아니라, 율곡의 말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기와 리의 근본이 같다 하더라도 일단 리일분수한 이상은 각기 다른 모양을 띄는 바, 근본 되는 리와 기가 본래대로의 모습을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근본 리기와 유행 리기를 분별하여 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만을 고집한 것은 결국 리기의 원활한 유행을 방기한 것이다. 즉 개인적 자아의 독립성이 지나치게 사회적 자아의 성장을 통제함으로서 사회 구조와 소통이 왜곡되었다. 그러한 왜곡이 심화됨으로서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개인적 자아의 독립성조차 증발하고 말았다.
리기론은 수양론의 수준에서 마쳐야 했다. 경세론과 치국론은 기존의 리기론을 바탕으로 하여 동관법의 취지에 맞게 새로운 이론을 세워야 했다. 신분제도에서, 정관법으로 보면 과부가 되더라도 일부종사함이 마땅하지만 동관법으로 보면 개인이 원한다면 개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얼금고법이 개개 가문 기준에 따른 정관법에서는 당연한 윤리이지만 국가 인재 발탁이란 동관법으로 보면 국가적 손실인 것이다.
정관과 동관 구별 없이, 리와 기가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리존기천이라 하여 차별한 자들에 의해 신분제도를 지탱하는 근본 이론으로 된 것은 리기론이 교묘하게 이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봉건시대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지만, 진실로 격물치지를 통해 리기를 바로 본 사람이라면 신분제도라는 최대의 위선을 거부했어야 했다. 공자, 맹자, 주희 시대의 봉건성과 퇴계, 율곡 시대의 봉건성이 동일하여서 그들의 후학들이 태생적으로 봉건적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조선 후기의 학자라면 그러한 태생적 한계를 탈피해 새로운 학문의 영역을 개척했어야 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자들이 학문을 함에 태극론과 리기론에 대하여 정관과 동관을 구별하여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이 불안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결국 국가가 망하고 말았다. 고려 말에 수입되었으나 주류학문이 되어 조선의 건국이념이 된 유학에 따라 조선 초기에 반상의 신분제도를 법제화 한 것은 할 수 없다 해도, 서얼금고법과 과부개가금지법을 만든 것은 공맹의 학문에도 없는 천하의 악법으로서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유학의 본향인 중국에도 없는 악법을 임의로 만든 것은 정도전 등속의 관학파들이 자행한 큰 죄업이자 조선 유학이 병들어 간 단초가 아닐 수 없다. 修己論 까지만 적용해야만 할 리기론을 治人論에 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서 리기론의 허상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주자학은 망해가는 나라를 염려하는 宋儒들의 자존심이었고, 다음엔 오랑캐 元의 조정에 출사하는 殘儒들의 자존심의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에 굴복한 고려의 학자들은 문화적 자존심 때문에 잔유, 그들에게서 주자학을 배워 수입하였다. 이미 그 시대가 원을 구축하고 새로 일어선 명이 이미 주자학의 질곡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추구하는 동양문화의 변곡기 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전에 망한 송의 학문인 주자학을 새 학문으로 착각하여 때늦게 받아들여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마침내 조선의 사상계를 지배하도록 한 것은, 이제현, 안향, 이색, 정몽주, 김종직,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등이 그들 당대의 학문 연찬과 사회적 교화에 충실한 것은 큰 공으로 남는다 해도, 미래를 향해 흐르는 시대의 흐름을 잘못 짚고 과거 시대의 학문에만 집착한 知性史的 착오가 아닐 수 없다. 한물 간 과일이 부패를 시작하듯 한물 간 학문이 수입 초기엔 신선한듯해도 곧 한계를 노출하고 마는 것이다.
그 오류의 초점은, 주자학의 정수인 태극론, 리기론, 사단칠정론이 갖는 철학성이 고려불교의 타락에 회의하면서도 불교가 갖는 오묘한 논리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존 유학의 한계를 일거에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러한 자신감이 지나치다보니 그 세 이론이 갖는 철학성에 대한 궁구에만 집착하게 되어 마침내 주자학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16세기 초까지는 관학파들의 주도로 다양한 학문이 병립하였으나, 정변과 사화를 겪으면서 사회적으로 지조와 절의를 숭상하는 기풍이 조성되고, 고려조 충신 목은 이색의 학풍을 이은 사림파들이 자신들이 공감하는 주자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한 세대가 지나자 주자학이 주류가 되었다. 특히 사림파들이 뿌린 주자학의 씨앗이 크게 자란 16세기 중엽 사상의 르네상스기를 통해 화담, 퇴계, 율곡 등의 걸출한 학자들이 수입 주자학의 조선화를 완성하면서 주자학이 학문의 전부로 고착되었다.
이황과 이이는 오늘날까지 大儒로 공인받고 있는데, 그들이 이룬 학문적 업적이야 물론 위대하지만,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학문의 자유야 말로 문화의 정수임에도 불구하고 주자학 이외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고 후학들로 하여금 배우길 금지한 것은 통섭적인 학자의 태도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불인정 차원을 넘어 자기의 학문에 반하는 자는 모조리 사문난적으로 매도하고 私感까지 얹어 탄압한 송시열은 積功이 많은 훌륭한 경세가이지만, 사상과 학문의 자유 면에서 보면 조선의 미래를 망친 學寇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타학문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삼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주자학 전공자라 하여도 자기의 논리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공격하였다. 그래도 스승 급의 대유들은 서로 경원하는 정도였지만 대를 이어 후학들이 퍼져갈수록 스승의 학문만을 숭상하고 다른 학파들은 무조건 배척하는 정도가 심해져서 마침내는 원수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학문에 대한 관점이 달라 시비가 생겨나 경쟁한 것까진 좋았는데, 벼슬과 재물, 명예가 개입되면서 학문이 생존경쟁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것이 사색당쟁의 형태로 고착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동력을 갉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 시발점이 바로 태극론이고, 그 구체적 연습장이 리기론이고, 본격적 격투장이 사단칠정론이다.
태극론은 화담이 태극의 원형인 无極에 대하여 잠시 관심하였을 뿐, 모든 학자들이 주희의 논리에 따랐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문적 성과로 보면 태극론 이전에 无極論이 있어 훨씬 의미심장함을 알 수 있다. 비유한다면 태극론이 지구나 태양 같은 행성이라면 무극론은 그것들을 내포하는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주희는 지식의 시대적 한계에 따라 사유가 태극론 정도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태극론에 기반하여 입론 된 리기론과 사칠론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리기론과 사칠론을 갖고 수백 년 동안 논쟁한 학자들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학자들에 의해 영도된 조선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봉건적 사고와 제도는 다양성과 발전성이 거부하였다.
리기를 봄에 있어 어디에 관점을 두느냐에 따라 주기론과 주리론, 이 둘을 함께 보는 절충론 등 세 관점이 있는데, 율곡이 기발리승론에서 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리가 스스로 발하지 못함을 말한 논리를 살펴보면 율곡은 분명한 주기론자이다. 반대로 퇴계는 호발론에서 리도 발하여 기의 主가 된다고 하였으므로 주리론자이다. 이 둘에 비해 절충론은 논리적 허구일 뿐이다.
주리론도 리가 발하느냐 안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다. 율곡이 ‘亦偏亦全’을 말함으로서 주기론 쪽으로 무게 중심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일부 문하생들에 의해 주리론자로도 불린 까닭은 비록 리가 발하지는 못하지만 기를 승하여 그것을 통섭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리발을 인정하는 철저한 주리론자들인 퇴계의 후학들은 기발만을 인정하는 율곡을 주기론자로 낙인 하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호발론은 치명적인 논리상의 허점을 갖고 있다. 율곡의 기발리승일도론이 철학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반하여 퇴계의 호발설은 실천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사단칠정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이다. 퇴계가 사단을 귀하게 여기다보니 귀한 리발에 붙이지 않을 수 없었고, 칠정은 절제하고 억제해야할 것으로 치부하다보니 기발에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리든 기든 모두 인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출처인 인심은 하나이지 두 개가 아니다. 사람이 어찌 두 마음을 갖는가. 생활에서 두 마음을 갖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본 마음을 감추고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지 본래부터 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發’하는 곳은 한 군데이지 두 군데일 수 없다. 발하는 곳은 하나이나 상황에 대처하는 기질의 차이일 뿐이다. 기질지성을 혼탁하게 보는 퇴계로서는 사단을 기질지성에, 즉 기발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리의 無形無爲를 말하는 율곡으로서는 리가 발한다는 말은 리가 유형유위하다는 말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퇴계의 호발론이 갖는 현실적인 목적은 인정하였지만 학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리발은 가상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퇴계가 리발과 기발을 함께 인정하고 리발은 純善, 기발은 雜善으로 규정한 까닭은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사회 교화와 예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고, 나아가 신분제도와 군주제라는 국가의 근간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퇴계의 호발론은 봉건제의 정당성에 대한 굳건한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퇴계는 세상에 악이 아직도 횡행하는 까닭을 순선의 리가 ‘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질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질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양론과 공경과 예의를 통한 사회교화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살아서 펄펄 뛰는 동물을 우리에 가두어 두려는 것이다. 그러한 무리보단 산야에 무제한 방목할 지경이 아니라면 일정한 경계를 지은 넓은 들에 방목하는 것이 동물에게 유익할 것이다. 더구나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기르려는 것은 한때는 편하더라도 멀리 보면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단과 칠정 모두 기발이되, 사단은 純氣에서 발하여 곧바로 順理로 가거나 混氣에서 발하더라도 거름 장치를 통과하면서 정화된 기가 순리로 가는 것이다. 일러서 上善과 中善이라 할 수 있다. 칠정은 순기에서 발하여 곧바로 가거나 혼기에서 발하여 곧바로 가는 것이다. 仁義禮智信이 上善, 喜樂愛는 中善, 哀悲는 下善, 怒惡欲憎嫉驕는 中惡, 盜殺은 下惡이다.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은 하늘에서 저절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다양한 색깔과 소리이다. 그 중에서 곱고 순한 것들은 도심과 사단이고 어둡고 거친 것들은 인심과 칠정이다. 칠정은 색깔과 소리가 거름 없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고 사단은 몇 번 걸러져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유기물과 무기물의 조합인 생명체가 갖는 의식의 結晶이다. 생명체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인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하여 의식을 형성한다. 형성된 의식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여 가장 적당한 대처 방안을 강구한다. 그러한 의식이 진화하여 사고력을 갖춘 것이 마음이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분석하여 리와 기의 합일체라고 한다.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리는 원래부터 온전한 모습 그대로이므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지만, 기는 淸濁粹駁하기 때문에 사회적 上善을 지향하기 위해선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기의 淸粹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생명체의 구성 조합 방법과 재료들을 새롭게 해야 한다. 양질의 유기물과 무기물을 섭취하여 재료로 삼고, 많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새로운 조립 방법을 숙달함으로써 기질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
리기론이 지식인들의 관념상에서만, 학문상에서만 궁구되고 토론되었으면 되었는데 범주를 벗어나는 바람에 많은 부작용이 생겼다. 주리든 주기든 절충이든 관념상의 문제로서 어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밖에 없다. 자기는 만족하는 논리이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허점과 함정이 많지 않을 수 없다. 태산의 동서남북에서 각기 보고는 자기가 본 태산민이 진면목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 주장이 지나쳐 고집이 되면 결국 싸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율곡의 주기론이 그의 후학들에 의해 변질되어 주리론화 하고, 퇴계학파의 호발론이 리와 기의 형평성보다는 리발 한쪽을 강조하면서, 리만을 신성시하여 양반계급의 상징으로 하고, 기는 혼탁하여 악하므로 천박한 상민의 것이라 못 박게 되면서 조선 사회는 성장을 멈추고 말았다.
유학은 확실히 봉건학문이다. 성리학은 그 봉건학문의 정수였다. 외연을 거부하고 질곡만 파고 든 결과로 성리학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생물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피가 돌고 살이 붙고 숨을 쉬기 때문이다. 그래서 氣가 중요하다. 추위를 막기 위하여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옷을 입는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남루한 옷보다는 좋은 옷을 걸치길 원한다. 그래서 理가 필요하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동양의 봉건학문을 어떻게 마감하고 새로운 수천 년을 위한 학문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야 말로 오늘날의 중요한 학문적 話頭이다. 봉건학문이라고 해서 모두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溫故而知新, 봉건학문 속에는 새로운 학문을 위한 넉넉한 양분이 들어있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것도 話頭이다.
[原文]
氣局者何謂也 氣已涉形迹 故有本末也有先後也 氣之本則湛一淸虛而已 曷嘗有糟粕煨燼糞壤汚穢之氣哉 惟其升降飛揚 未嘗止息 故參差不齊而萬變生焉 於是氣之流行也 有不失基本然者 有失其本然者 旣失其本然則氣之本然者已無所在 偏者偏氣也 非全氣也 淸者淸氣也 非濁氣也 糟粕煨燼 糟粕煨燼之氣也 非湛一淸虛之氣也 非若理之於萬物 本然之玅 無乎不在也 此所謂氣之局也
[音讀]
기국자하위야 기이섭형적 고유본말야유선후야 기지본즉담일청허이이 갈상유조박외진분양오예지기재 유기승강비양 미상지식 고참치부제이만변생언 어시기지유행야 유부실기본연자 유실기본연자 기실기본연즉기지본연자이무소재 편자편기야 비전기야 청자청기야 비탁기야 조박외신 조박외신지기야 비담일청허지기야 비약리지어만물 본연지묘 무호부재야 차소위기지국야
[字義}
涉섭: 물 건널, 지날, 돌아다닐.
湛담: 즐거울. 침)빠질, 젖을. 잠)이슬모양, 맑을, 빠질, 편안할.
湛然담연: 물이 괴어 있는 모양, 침착하고 고요한.
湛一淸虛담(잠)일청허: 맑게 한데 어울리어 맑게 텅 비어 있다
曷갈: 어찌, 어찌 아니 하리요, 그칠, 벌레이름 嘗상: 맛볼, 시험할, 일찍
局국: 마을, 방, 판, 굽힐, 거리낄, 말릴, 줄 縮, 局限: 범위를 일정 부분에 한정함
[국역]
氣局이란 (자유로운 리통에 비하여 기는 구속되었다 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기는 이미 돌아다니며 형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유행하여 이미 여러 가지 형적으로 나타났기에)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습니다. 기의 본체는(본래 모습은) 담일청허할 뿐이니 (따름이니), 어찌 애초부터 조박외신분양오예의 기가 있겠습니까. 오직 (다만) 그것이 (기가) 승강비양하여 애초부터 그치거나 쉬지 않기 때문에 참치부제하여 만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기가 유행할 때에 그 본연을 잃지 않는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어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이미 그 본연을 잃어버리면 기의 본연은 이미 있는 데가 없습니다. 치우친 것은 편기요 온전한 기가 아니며, 맑은 것은 청기요 탁한 기가 아니며, 조박외신은 조박외신의 기요 담일청허의 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리가 만물에서 그 본연의 묘리가 없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만물 어디에나 리가 있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의 국한이란 것입니다.
[論註] 湛一淸虛와 內觀法
리는 변하지 않으나 기는 변한다. 리는 만물만사 어디에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그 본연의 무형무위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유형유위한 기는 본래는 담일청허하나 升降飛揚 未嘗止息 유행하여 변화하면 그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하지만 잃으면 이미 본래의 기가 아니다. 본래의 담일청허한 모습이 아니라 혼탁하고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에 本然氣라고 부를 수 없다. 그래서 본연을 지키지 못하고 이미 편, 탁, 조박외신이 된 것은 따로 일러서 편탁조박외신기이다. 유행하되 본연을 유지하면 淸全氣요 본연을 유지하지 못하면 濁偏氣로서 기는 두 가지 이상의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그러므로 리는 항상 本然을 유지하기 때문에 通이고 기는 유행하면서 본연을 유지하기도 하고 잃기도 하기 때문에 각 부분으로 나누어진 局이다. 즉 리는 常本이나 기는 常變이다.
율곡은 기의 본연은 담일청허하나 ‘升降飛揚 未嘗止息’하는 유동성 때문에 본연을 잃고 참치부제하여 편기가 되고 탁기가 된다고 말한다. 편잡된 기는 허상이기 때문에 기 본연의 담일청허한 모습을 중심으로 사물과 현상을 본다. 기를 본연과 변화의 두 가지 모습으로 보며, 편기와 잡기를 극복하고 전기와 청기를 말한다. 편잡된 기를 지양하여 도덕적 순결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기 본연지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상계에선 본연과 유동성은 서로 상반된 관계이기 때문에, 기의 유동성을 인정하면서도 담일청허만을 기라하고 편탁조박외신은 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순수성만 잣대로 한 편벽된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의 두 가지 모습 중, 본연의 기는 물질과 정신의 원형이라 할 수 있고 유행하는 기는 물질과 정신이 각양각색으로 변화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본연의 기를 정신기, 변화한 기를 물질기라고 할 수 있다. 물질 면에서 보면 기가, 즉 원자들이 승강비양 미상휴지하는 변화의 동력이 참치부제하여 만변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 면에서 보면 기가, 느낌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여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율곡이 리통과 기국을 말하는 까닭은 물질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문제 때문으로 인성 수양과 도덕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질계에선 기가 유행하여 변화한 모든 만물은 담일청허하든 편탁조박외신하든 나름대로의 존재의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非氣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서 발생한 다양한 모습의 생각은 다양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 선악의 정도에 따라 본연기와 비기로 나누어진다. 조박외신분양오예의 비기란 추악을 의미하고 담일청허의 본연기는 완전한 도덕을 말한다. 그러므로 추악을 지양하고 도덕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기의 덩어리인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升降飛揚 未嘗止息’의 동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의 본이 오직 담일청허할 뿐, 조박외신분양오예의 기가 어찌 있겠는가 하면서 현실에서 편기와 잡기기가 나타나는 원인을 ‘升降飛揚 未嘗止息’으로 치는 것은 논리적 편견이다. 물론 마음에서 보면 ‘升降飛揚 未嘗止息’이란 감정의 굴곡과 완급이 되지만, 그것이 왜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 필요하다. 또한 기의 본이 반드시 담일청허하다고 할 수는 없다. 기가 본래 담일청허하다면, 문제는 유행에 있다. 본연을 잃게 하는 원인, 잃지 않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본연기는 담일청허 무형으로 通이고 유행기는 편탁오예 무형으로 局이란 것은 이분법적 발상이다. 已涉形迹하기 때문에 기를 局으로 하면서 그 이전이라고 해서 본연을 담일청허로 하는 것은 유와 무의 경계를 임의로 드나드는 이중의 논리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 자유로이 通하지만 기의 편전에 따라 사물에 갇히어 편전이 되는 리야 말로 오히려 局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논리적 모순을 벗어나기 위하여 리의 무형무위를 말하는 것은 지나친 관념적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비기라 치지만 조박외신분양오예의 기가 있다는 말은 조박외신분양오예의 리가 있다는 것으로, 기의 상대성과 함께 리의 상대성을 말하고 있다. 리의 무형무위 통하는 절대성을 주장한다 해도 기의 본연이 담일청허하므로 기도 순수성, 절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이 리통기국론에서 의도하든 하지 않든 리와 기의 본연의 모습은 담일청허한 공통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즉 기가 리이고 리가 기인 것이다. 단지 리는 기가 변화하든 안하든 기에 실리어 변화 없이 그대로 옮겨갈 뿐이다.
리기를 말하는 목적은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추론하여 萬物之性을 알고, 그것을 연장하여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마음을 알아 자아와 타아가 함께 바로 사는 방법을 입론하자는 것이다.
도덕적 근본주의자들은, 리는 어느 때 어디에서나 항상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가지나 인성이 偏濁한 까닭은 기가 편탁하기 때문이므로, 인성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의 수양, 즉 몸의 섭생과 마음을 잘 다듬어 간직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을 들여다보는 內觀보다는 일시적 꾸미기인 外觀이다. 왜냐하면 무소부재하여 각위기성한 것이 리의 본연지묘이므로, 인성의 편전청탁 정도를 결정하는 소이로는 실어 나르는 도구 역할을 하는 기보다는 주인 행세를 하며 실려 와서 직접 영향을 미치는 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성의 출처인 마음이란 각위기성 한 것들이 수북이 들어있는 기의 그릇이다.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잘 관리할 필요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겨있는 각각의 性들이다.
리란 사물이나 현상에 내재하는 이치, 원리와 풀이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비유하면 압축내용과 압축풀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어떤 제재에 대한 압축내용과 압축풀기는 보편성을 갖는다. 그런데 압축내용은 절대성을 갖지만 압축풀기는 상대성을 갖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사물과 현상에 대응하는 방법의 차이-편전, 청탁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 압축풀기 방법의 상대적 차이가 바로 인성의 차이, 개성으로서 편전청탁의 관건이 된다. 리는 항상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따르지 않는 것은 리가 갖는 내용과 형식 중 형식을 모르는 오류 때문이다. 즉 리의 부분 고장이 편전청탁의 갈림길이다. 일상사에서 제기되는 여러 상황에 적응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방법을 뻔히 알면서도 자칫 어긋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바로 압축풀기의 문제, 리의 장애 때문인 것이다.
편탁에서 전청으로 가기 위해선 인성의 그릇에 담긴 각각의 性들을 어떻게 간직하고 어떻게 상황에 따라 방출할 것인가 하는 점, 압축풀기의 방법 수정이 중요하다. 그것은 고도의 지적 훈련에 의해 길러진 분별력으로 가능하다.
나의 마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도 담긴 각각의 性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인성을 전청으로 향하도록 하는 지표가 된다. 율곡은 본연지묘한 리가 수송도구인 기에 실려 만물에 깃들어 있는 상태를 性이라 한다. 그러므로 性 역시 본연지묘하고 그러한 性들의 모둠인 마음은 더욱 본연지묘하다. 마음의 표현인 인성 역시 본연지묘하므로 인성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다. 미발인 마음에서나 기발인 행위에서나 천편일률적인 잣대를 적용할 수 없다. 편잡이라 해서 반드시 악한 것이 아니고 전청이라 해서 반드시 선한 것이 아닌 것이 생생지리에 따라 생활하는 인간사회이 본모습이다. 선악은 상대적인 것으로, 나에게는 선이 상대에게는 악이 될 수 있고 나에게는 이익인 것이 상대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원초욕구로서는 食慾, 性慾, 生命慾이 있고 일차욕구로서는 睡眠慾, 休息慾, 遊戱慾 所有慾이 있고 이차욕구로는 知識慾, 名譽慾, 安定慾 등이 있는데 양상을 달리할 뿐 모두 생물 원리에 뿌리 한 것들로 리와 기의 유행 産物이다. 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욕구들도 리와 기의 원형에 인위가 가공한 것이다. 모든 욕구를 분석해보면 인간 역시 철저한 물질적 존재란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생물 중에서 가장 고도의 물질 조합을 한 존재이다. 무생물이란 물질 원소들의 단순한 조합이고 식물은 복잡한 조합이지만 동물은 훨씬 복잡한 조합이다. 동물 중에서도 인간동물은 물질들이 가장 복잡하게 조합된 존재이다. 가만히 둔 한 물질에서도 변화가 발생하는데, 하물며 여러 물질이 조합을 거듭한 복합체에서는 매우 다양한 변화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들의 온축 효과에다가 촉매와 효소 등의 작용이 더해지면서 신경과 감각기관이 생기고 마침내 의식 작용이 이루어진다. 唯神論이 인간의 종교성 때문에 양지에 놓이고 唯物論은 현실성 코뮤니즘 때문에 음지에 놓여 있지만, 정신이 물질보다 존귀성을 가지는 까닭은 그 특유의 思惟力이 있기 때문이지 물질 보다 본래부터 등급이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물질을 알아야 하고, 물질을 알기 위해서는 물질의 구성 요소인 리와 기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차의 문화적 욕구들은 자기 통제와 사회 통제를 받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 될 게 없지만, 원초욕구와 일차욕구는 그러한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 먹이를 탐하고 성욕을 채우고 편히 쉬고 살려고 하다 보면 타인의 이익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여기에서 나의 편리를 도모하는 것은 나에겐 최선이지만 타인이 보기엔 악이 된다. 하지만 나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성욕을 채우지 않으면 번식을 할 수 없는 人性의 원리에 충실하였을 따름이다. 타인의 것을 빼앗아 먹거나 싫어하는 상대를 강제로 겁탈한 경우 같이 사회적으로 죄악시 되는 행위라 할지라도 인간 개체 면에서 보면 자기 인성의 원리인 性, 리와 기의 유행에 충실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죄악이 되는 것은 사회적 강제 때문이 것이다. 그래도 일차욕구는 자기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원초욕구는 양호한 조건에서는 자기 통제와 사회적 강제에 억압 받다가도 절박한 순간에는 모든 강제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자기 개체 내부의 욕구대로 행동하는 동물성이 폭로된다.
인간은 물질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정신의 집을 지은 복합적 존재이다. 물질은 밭이고 정신은 곡식이다. 곡식을 기르지 않는 밭은 존재 의미가 없고 밭 없이는 곡식이 자랄 수 없다.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해서는 인간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은 상호보완적 존재이고 나아가 일심동체이다. 하지만 원초욕구와 일차욕구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곡식 없이 밭만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 생물적 원리만 강조되고 문화는 무시되어 동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원초욕구와 일차욕구를 무시하고 문화욕구, 정신적 가치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밭 없이 곡식만 비비는 일로서 물질적 기초를 무너뜨림으로서 개체 생존에서 위기를 부르는 것이다.
리의 무형무위와 전청지묘가 기를 타고 유행하여 비로소 물질의 性으로 나타나므로, 그러한 性의 표현인 원초와 일차욕구뿐만 아니라 문화적 욕구, 정신적 가치 역시 물질적 욕구의 소산이다. 원초적 욕구는 복합물질 특유성의 표현으로 자기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강제인 도덕과 법률로서 통제하면 되나, 일차욕구와 문화욕구는 사회적 통제를 덜 받아 자기통제에 의존하나 그것이 비교적 느슨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한다.
마음은 물질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마음의 편탁을 지양하고 전청을 지향하기 위해선 마음을 구성하는 성들의 근저인 리와 기를 알아야 하고, 그 중에서도 리의 풀림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선 그 그릇이자 촉매인 기를 알아야 한다. 기를 알기 위해선 인체에 들어오는 물질을 알아야 한다.
인체에 들어오는 음식, 물, 공기는 인체를 조합하고 유지한다. 그 조합의 효과가 감각이 되고 생각이 되고 사고가 된다. 조합이 잘못되거나 유지되지 못하면 물질복합체인 몸이 붕괴하면서 사고-생각-감각이 해체된다. 그러므로 인체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음식, 물, 공기를 적절하게 섭취해야 한다. 리의 풀림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선 생각을 변화시켜야 하고,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몸을 변화시켜야 하고 몸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기초 물질인 음식물을 변화시켜야 한다.
外觀法으로 禮樂이나 명상 등의 수양을 통해 정신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효과를 내기보단 형식적 효과를 낼뿐이다. 하지만 수양을 마치면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곧 수양의 효과가 소실되기 십상이다. 內觀法으로, 겉으로는 음식물 섭취와 운동을 통해 몸을 단련하고 안으로는 리의 정당한 풀림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하는 내공, 지적 단련을 통해 전청을 향한 좀더 지속가능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물론 지적 단련의 기초는 格物致知이다.
[原文]
氣發而理乘者何謂也 陰靜陽動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也 故朱子曰太極者本然之玅也 動靜者所乘之機也 陰靜陽動其機自爾 而其所以陰靜陽動者理也 故周子曰太極動而生陽 靜而生陰 夫所謂動而生陽 靜而生陰者 原其未然而言也 動靜所乘之機者 見其已然而言也 動靜無端陰陽無始則理氣之流行 皆已然而已 安有未然之時乎 是故天地之化吾心之發 無非氣發而理乘之也 所謂氣發理乘者 非氣先於理也 氣有爲而理無爲 則其言不得不爾也 夫理上不可加一字 不可加一毫修爲之力 理本善也 何可修爲乎 聖賢之千言萬言 只使人撿束其氣 使復其氣之本然而已 氣之本然者 浩然之氣也 浩然之氣 充塞天地 則本善之理 無少掩蔽 此孟子養氣之論所以有功於聖門也 若非氣發理乘一途而理亦別有作用 則不可謂理無爲也 孔子何以曰人能弘道非道弘人乎 如是看破則氣發理乘一途 明白坦然 而或原或生 人信馬足馬順人意之說 亦得旁通而各極其趣 試細玩詳思 勿以其人之淺淺而輒輕其言也
[字義]
氣기: 날씨, 기후, 숨 息, 공기, 힘 活動力, 생기, 정기. 發발: 일어날 起, 찾아낼, 일으킬, 펼 舒, 열 開, 밝힐 明,
理리: 다스릴 治, 바를 正, 성품 性, 이치, 도리.
理氣: 리는 우주의 본체, 기는 그 현상.
理氣合一 : 리는 기의 條理이고 기는 리의 운용이어서, 그 보는 점에 따라 오직 이름은 다르나 근원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설.
理性: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는 능력. 사람이 본디 타고난 세 가지 정신 능력, 곧 知, 情, 意 중의 知的 능력. 良心.
理致: 사물의 정당한 조리. 도리에 맞는 취지.
條理: (어떤 일, 말, 글 등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조리: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조러한 모양.(우리말)
理學: 宋代에 리기의 설을 주창한 학문. 자연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의 총칭. 생물학, 물리학 따위.
乘승: 탈, 오를, 올릴. 爾이: 너 汝, 어조사, 가까울, 말 而已, 그 其.
機기: 고동(發動所由), 기미, 기틀(運動之變化), 기계, 베틀, 天眞, 기회.
機微: 만물의 미묘한 기틀, 낌새.
未然미연 : 아직 현상화(現象化)되고 있지 않은 상태로서 이것은 언표상(言表上)의 논리.
已然이연 : 이미 그러한 것으로서 현상화(現象化)되고 있는 상태.
浩然之氣호연지기 :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 상편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그 기 됨은 지극히 크고 굳센데 곧게 길러서 미흡한 점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 그 기 됨은 정의와 정도를 짝하는 것으로, 정의와 정도가 없으면 기가 허해진다. 호연지기는 단련된 정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정의가 밖에서 갑자기 와서 잡아내는 것이 아니다. 坦然탄연 : 마음이 안정되어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하다. 餒 뇌 : 굶길, 주릴.
旁通방통 : 자세하고 분명하게 앎. 輒첩 : 문득, 번번이, 오로지, 똑바로 설.
或原或生說혹원혹생설 : 중용장구에서 七情을 말하는 人心과 四端을 말하는 道心으로 나누어, 인심이 혹생(或生)하는 것을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 하고, 도심이 혹원(或原)하는 것을 이발이기승지(理發而氣乘之)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율곡은 或生의 氣發而理乘之를 강조한다.
人信馬足馬順人意之說인신마족마순인의지설 : 사람이 말 다리를 믿고 말은 사람의 뜻에 순종한다는 비유. 人은 理이고 馬는 氣로서 주체인 리가 객체인 기를 주관, 통제한다는 의미.
[音讀]
기발이리승자하위야 음정양동기자이야 비유사지자야 양지동즉리승어동 비리동야 음지정즉리승어정 비리정야 고주자왈태극자본연지묘야 동정자소승지기야 음정양동기기자이 이기소이음정양동자리야 고주자왈태극동이생양 정이생음 부소위동이생양 정이생음자 원기미연이언야 동정소승지기자 견기이연이언야 동정무단음양무시즉리기지유행 개이연이이 안유미연지시호 시고천지지화오심지발 무비기발이리승지야 소위기발리승자 비기선어리야 기유위이리무위 즉기언부득불이야 부리상불가가일자 불가가일호수위지력 리본선야 하가수위호 성현지천언만언 지사인검속기기 사복기기지본연이이 기지본연자 호연지기야 호연지기 충새천지 즉본선지리 무소엄폐 차맹자양기지론소이유공어성문야 약비기발리승일도이리역별유작용 즉불가위리무위야 공자하이왈인능홍도비도홍인호 여시간파즉기발리승일도 명백탄연 이혹원혹생 인신마족마순인의지설 역득방통이각극기취 시세완상사 물이기인지천천이첩경기언야
[국역]
氣가 발하면 理가 乘한다는(올라탄다)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하는 것은 기틀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동하면 곧 리가 동에 승하는 것이지 리가 동하는 게 아니고 음이 정하면 곧 리가 정에 승하는 것이지 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朱子가 이르기를 태극은 본연의 묘이며, 동정은 이것이 승하는 기틀이라 하였다(太極理也 陰陽氣也 動靜者 所乘之機也, 氣行而理亦行 二者常相依 而未嘗相離也).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하는 그 기틀은 스스로 그리되는데 그 음이 정하고 동이 양하도록 하는 그러한 소이를 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周子가 이르기를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고 하였다.
대저 소위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는 말은 원래 그것이 미연일(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를 근원하여 한 말이고, 동정은 승하는 기틀이란 말은 그것이 이연일(이미 나타났을) 때를 보고서 한 말이다(태극이 동하여 양이 되고 정하여 음이 되는 것은 미연이고, 그 음정양동이 승하는 기틀은 이연일 때이다). 동정은 끝이 없고 음양은 시초가 없은즉 리기의 유행은 모두 이미 이연일 때이지 어찌 미연일 때에 있을 것인가(동정과 음양은 무단무시하고 무형무위한 것이므로 미연의 것이나, 리기의 유행은 유단유시하고 유형유위 함으로 이연의 것이다. 즉 乘機하기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이러한 까닭으로 천지의 조화와 (사람의) 마음의 발동은 기발하여 리승이 아닌 것이 없다. 소위 기발리승이라 하는 것은 기가 리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기는 유위하고 리는 무위한 즉슨 그 말이 부득이 그러하다(꼭 기가 선이고 리가 후란 말이 아니라 기는 유위요 리는 무위이기 때문에 기발을 앞자리에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리가 기 보다 하위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대저 리 위에 한 자도 보태도 안 되고 한 오라기라도 수양의 힘을 더해서는 안 된다. 리가 본래 선하니 어찌 수양이 가능하겠는가(리는 이미 절대선인데 거기에 또 무슨 선을 보태려고 수양할 것인가). 성현의 천언만언이 오로지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를 검속토록 하고 그 기의 본연을 회복하도록 할 따름이다.
기의 본연은 호연지기이다. 호연지기가 천지에 가득 차면 본래 선한 리는 조금도 가리거나 감추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이것은 맹자의 양기론이 성인의 문호에 공이 있는 소이이다(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수양을 통해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공이 있다). 만약에 기발리승일도(기가 발하고 리가 승하여 한 길로 나간다)가 아니라 리 역시 별도의 작용이 있다면 리는 무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공자가 왜 사람이 능히 도를 펼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였는가. 이와 같이 본즉 기발리승일도는 명백탄연하여 혹원혹생설과 인신마족마순인지의설에도 역시 널리 통하여 역시 각 극(두 설))의 취지를 다 알 수 있으니, 자세히 음미하고 상세히 생각하여 그 사람이 천박하다고 그 말까지 가볍게 여기기 말기 바란다.
[論註] <氣發理乘一途說> 분석과 비판
주자는 ‘太極理也 陰陽氣也 動靜者 所乘之機’에서 리를 太極으로 보았다. 그러나 율곡은 ‘陰靜陽動其機自爾 而其所以陰靜陽動者理‘에서 리를 ‘其所以로 보고, 또 주자의 말 첫머리 ‘太極理也’를 ‘太極者本然之玅也’로 바꾸어서 리를 ‘本然之玅’로 보기도 한다. 즉 주자의 리는 별도의 존재성을 가지는 구체적 태극 개념이나 율곡의 리는 전자의 ‘其所以’과 후자의 ‘本然之玅’의 성격을 가지는 추상적 태극 개념이 되었다. 주자는 태극, 음양, 동정을 理, 氣, 機로 명확히 구분하나 율곡은 ‘玅’와 ‘機’라는 말로 태극, 음양, 동정을 두루 감싸서 구분이 흐릿하다. 또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이므로 陽陰動靜과 리는 차와 운전수라는 연계성은 갖지만 엄밀히 구분한다면 별도의 개념이다. 더불어 리는 운전수가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해야만 차가 가듯 陽陰動靜의 所以然이므로 리가 主이고 陽陰動靜이 客이 된다. 또 차 자체가 없으면 운전수도 무용지물이듯 음정양동이 중심이 될 수 있다.
율곡의 리는 주자의 리에 근본 하지만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주자가 리는 태극이라고 못 박음으로서 리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확보하는 평면 설계도를 그렸으나, 율곡은 태극의 리를 존중하되 태극의 ‘본연지묘’와 陰靜陽動하게 하는 소이인 機를 활성화시킴으로서 입체 설계도를 그렸다. 그래서 亞朱子인 퇴계는 主理論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고 율곡은 기의 활동성이 보장되는 主氣論에 경사하면서도 ‘所以然’인 리를 중심에 둘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자는 ‘機’를 리인 태극이 生陽生陽하는 한 과정, 동정이 所乘하는 기틀로 보았으나 율곡은 ‘陰靜陽動其機自爾’라 하여 ‘機’란 이미 ‘陰靜陽動’ 그 자체에 스스로 들어있는 것, 즉 陰靜陽動이 ‘機’라고 한다. 나아가서 ‘而其所以陰靜陽動者理也’에서 ‘其所以’가 곧 리이므로, 陰靜陽動 = 機 = 其所以’ = 理의 등식이 성립한다. 또 주자가 ‘太極理也 陰陽氣也’라 하였으므로 앞의 등식과 연결하면 理 = 氣, 즉 태극 = 음양이 된다.
이와 같은 등식을 적용하면 리와 기가 불상리불혼잡 하면서도 一物이란 뜻이 명료해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愚拙한 후학들이 리와 기를 별도로 나누어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것은 태극-음양-동정의 연계성에 대한 이해가 미흡함에도 리기론이 갖는 현실적 필요성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논리 면에서, 주자와 퇴계가 갖는 분명성에 비하여 율곡은 약간의 모호성을 갖는다. 그 모호성은 本然之玅와 機에서 출발한다.
율곡은 “음양은 기이고 동정하는 기틀은 스스로인데 그렇게 되도록 하는 소이는 리이다. 그러므로 음양동정의 機인 기발과 소이연인 리의 乘이 합하여 유행 변화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행변화에 앞서 음정양동 하도록 하는 機에 대한 규명이 꼭 필요하다. ‘機’의 개념을 좀더 명확히 하여 논리적 모호성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는 현대과학의 양자론과 항성에 의한 우주 온도론, 물질 간의 역학론, 磁氣論 등이 있다. 그 시대에 이와 같은 이론과학과 실험검증이 있었다면 율곡의 사색이 훨씬 깊어져서 모호성이 말끔히 소제되었을 것이다.
율곡은 理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기발하면 그 옆에 있던 리가 곧 그 기발에 승한다고 한다. 율곡이 말하는 리는 곧 사물과 현상의 조리, 그것이 되도록 하는 원리와 이치를 말하는데, 그 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理本善也’한 제 모습을 간직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에서 나타나는 리의 왜곡현상을 기의 편잡 탓으로 돌리는 단순함을 보이고 있다. 또 ‘氣之本然者 浩然之氣也’이며 浩然之氣의 특성을 ‘至大至剛 配義與道’라고 정의하면서도, 진주에 오물이 묻어 비록 추하게 보이지만 진주 자체의 영롱함은 그대로 있듯이 리가 편잡한 것은 유행시켜주는 기가 편잡 때문으로 치부하는 것은 흑백 이분법적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앞의 리통론에서 사물과 현상이 잘못될 경우라도 리는 무형무위이므로 아무 잘못이 없고 오로지 유형유위한 偏雜氣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리의 순수성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리의 순수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원래 至大至剛하고 配義與道한 浩然之氣가 왜 편잡하게 되는 가에 대한 설명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연에서의 리는 고정된 한 모습일지라도 이연에서의 다양한 사물과 현상 속에 들어있는 리의 모습은 간단하게 기의 편잡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즉 미연에서의 리와 이연에서의 리는 적어도 현상 면에서는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미연에서는 호랑이나 토끼나 포유류 동물이라는 속성을 갖지만 이연에서는 호랑이는 호랑이의 기질과 생리로 살아가고 토끼는 토끼의 기질과 생리로 살아간다. 그러한 여러 가지 기질과 생리를 율곡의 말대로 각각의 편기에 따른 각각의 편리라고 붙일 수는 있지만, 미연에서의 리와 이연에서의 리가 본래의 진주와 흙 묻은 진주처럼 겉보기 순수성 면에서는 분명히 차이를 보이므로 미연의 리와 이연의 리를 반드시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다. 기가 변화하였듯이 리도 이미 변화한 것이다. 물질인 기의 표상대로 호랑이와 토끼의 겉모습이 다르듯이 호랑이와 토끼의 몸을 구성하여 유지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발하여 행위 하도록 하는 리가 호랑이, 토끼, 사람의 마음마다 각기 따로 있다. 즉 호랑이는 호랑이대로의 리가 있고 토끼는 토끼대로의 리가 있다. 뱀이 사악하고 여우가 교활하지만 뱀에게는 뱀대로 여우에게는 여우대로의 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리에 대한 평가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뱀과 여우의 리는 나름의 고유성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과 현상마다 갖는 특유의 독자적 원리를 통틀어서 變理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변리의 가능성을 수용하여 리의 개념을 넓게 본다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율곡이 리의 개념을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는 도덕성을 띤 올바른 이치 하나만으로 경직되게 말했다면 리가 갖는 本然之玅와 機의 확장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논변이 아닐 수 없다. .
‘夫所謂動而生陽 靜而生陰者 原其未然而言也 動靜所乘之機者 見其已然而言也’에서 미연과 이연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所乘之機’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動而生陽 靜而生陰’은 ‘所乘之機’가 없기 때문에 미연이라고 하나 ‘而生’한 것은 분명하다. 이연, 즉 유행이후의 것이 현실성을 갖는다하여 ‘所乘之機’를 氣發의 출발 논거로 삼는 것은 작위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기발을 말하면서도 ‘機’의 유무, 즉 리의 유무에 의존한 것으로, 주자의 태극-음양-동정의 所乘之機 과정에 의부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기와 리가 근원에서부터 동일할 뿐만 아니라 결과에서도 동일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기발리승일도설’보다는 ‘主機說’이 더 적당한 개념어일 것이다. 리나 기 어느 한 쪽을 강조하여 논변함으로서 발생하는 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리와 기의 작용 면이나 결과 면에 초점을 맞춘 개념어 수립이 필요하다.
‘只使人撿束其氣 使復其氣之本然而已 氣之本然者 浩然之氣也 浩然之氣 充塞天地 則本善之理 無少掩蔽’에서 말하는 기 본연은 浩然하다. 호연의 모습은 ‘至大至剛配義與道’하다.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론의 기본요소인 기는 두 가지 개념을 중층으로 갖고 있다. 하나는 천지간에 가득한 물질적인 기를 말함이고 또 하나는 인성의 機를 말한다. 전자가 외연을 말함이라면 후자는 내연을 말하는 것으로, 외연인 자연은 호연지기로 충만하여 언제나 至大至剛配義與道함에도 불구하고 내연인 인간은 끊임없이 결핍과 옹졸 속에서 분잡스러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맹자의 고뇌와 인식이 들어있다. 또한 율곡은 ‘充塞天地 則本善之理 無少掩蔽’라 하여 全氣에 승한 全理로 호연지기를 리와 연계하고 있다. 즉 언어 표현만 다르지 호연지기가 곧 리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점에서 율곡에게서 重理論의 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리통기국설에서 나타났듯이 리의 온전성을 담보하는 전제가 기의 온전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보고 氣發을 말한 율곡은 역시 重氣論을 자기 철학의 기반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 유학의 실질적인 종조는 퇴계와 율곡으로서, 오늘날 그들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어는 주리론과 주기론이다. 퇴계는 호발설을 바탕으로 한 주리론자로서 정의되고 율곡은 기발리승일도설을 바탕으로 한 주기론자로 대별되고 있다. 그런데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은 그들이 만든 말이 아니라 후학들이 규정한 말이다. 그들이 한창 성리학에 집중할 때에 사용한 말은 호발설과 기발리승설로서 둘 다 리와 기 어느 한쪽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차원이 아니라 리와 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작용점을 중심하느냐 아니면 과정을 중심 하느냐의 관점의 차이일 뿐이었다. 퇴계는 기발을 근간으로 하되 그 기를 기 되게 하는 리발을 따로 인정하는 호발설을 강조함으로서 인성의 良性을 고취하여 세상을 합리화 하려고 했으며, 율곡 역시 리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하나 그의 무형무위성 때문에 리발은 인정하지 않고 기의 유형유위성을 근거로 하여 기가 발할 때 리가 스스로 실리는 기발리승설을 강조하였다.
주자의 ‘太極理也 陰陽氣也 動靜者 所乘之機也’라는 말을 근거로 보면 퇴계의 호발론은 태극도 발하고 음양도 발한다는 것이다. 태극이 음양을 이미 포함하는 개념, 즉 태극이 곧 음양이지만 그래도 태극이 상위개념이고 음양은 하위개념이다. 퇴계가 말하는 호발은 상위와 하위 개념이 동시에 발하긴 하되 상위 먼저 하위 다음 순으로 서열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호발’이란 명칭에도 불구하고 주기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를 깊이 들여다보는 율곡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태극인 리는 무형무위하고 음양인 기는 유형유위하여 리는 발하지 못하고 기만 발하는 데도 불구하고 퇴계가 리발을 말한 것은 논리상의 오류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학인 율곡의 비판이 논리상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도 영남학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게 된 까닭에는 여러 가지 점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이 주기론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율곡의 논리에서 ‘陰靜陽動 = 機 = 其所以’ = 理‘를 추론할 수 있으므로, 주자의 ‘太極理也 陰陽氣也 動靜者 所乘之機也’라는 논리와 접목시켜 본다면 곧 理 = 氣가 되어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이 곧 ‘리발승기일도설’이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불 때 씨앗이 실려 가는 것이나 씨앗이 바람에 실려 가는 것이나 말의 순서가 다를 뿐 같은 의미이므로,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이나 리가 발하여 기에 실리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퇴계가 리를 중시하여 ‘리발기발’이라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의 발성을 존중하여 ‘호발’이라하고 , 율곡이 리를 중시하되 유행의 본류인 기를 중시하여 ‘기발’을 ‘리승’ 앞에 놓은 차이일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기통리국설’에 나타났듯이 율곡 역시 리의 절대성을 확실히 인식하고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주기론자라는 족쇄를 씌워 압박하려는 영남학파들의 태도도 문제이지만, 주자의 ‘太極理也 陰陽氣也 動靜者 所乘之機也’에서 보듯 상위개념인 태극은 하위개념인 음양이 ‘所乘之機也’인 동정에 따라 발할 때 동시에 이미 발하는데도 불구하고 리의 무형무위성만을 논거로 삼아 퇴계의 리발을 인정하지 않고 학자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인 학문적 오류로 몰아세우는 기호학파들의 태도도 문제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자가 분명하게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태극, 음양, 동정, 機의 개념을 불분명하게 자의적으로 사용한 면이 있기도 하다.
한 세대 앞 사람인 퇴계는 율곡의 학문적 성취를 보지 못하였으나, 율곡은 퇴계의 학문적 성취를 충분히 보고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퇴계의 호발설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여러 번 표현하였다. 이후에 후학들이 호발설을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의 두 편으로 갈라져서 두 선현의 학설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스승의 학설만을 옹호하게 되었다. 심지어 치열한 이론 투쟁을 통해 正不眞假 문제까지 거론되는 학문적 갈등이 심화되고, 그 학문적 갈등을 이용해 상대학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정치 투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둘의 공통점이라면 리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한 것이고, 차이점이라면 리가 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본질인 리를 중요시하여 현상인 기를 천하게 여기고, 율곡은 본질인 리보다 현상인 기에 중점을 두었다는 후학들의 평가는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후학들이 만든 주리론과 주기론이란 족쇄가 더욱 견고해지면서 성리학이 파행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 족쇄를 이용하여 타 학파, 학설을 억압하여 학문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소인배들이 다수 출현하게 되어 조선이 시대가 흐를수록 피폐하게 되었다.
성리학이 본연의 호연한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풀어야 할 것은 주리론과 주기론이라는 족쇄이다. 그 족쇄를 풀어버리고 ‘互發說’과 ‘氣發而理乘一途說’의 원형을 회복하여야만 제대로 된 퇴계철학과 율곡철학의 정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기의 호연지기와 리의 광명정대가 비로소 한 몸이 되어 건강해지고 그의 학문인 성리학이 사람 사는 세상의 生生之理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다.
[原文]
道心原於性命而發者氣也 則謂之理發不可也 人心道心俱是氣發 而氣有順乎本然之理者 則氣亦是本然之氣也 故理乘其本然之氣而爲道心焉 氣有變乎本然之理者 則亦變乎本然之氣也 故理亦乘其所變之氣而爲人心而或過或不及焉 或於纔發之初已有道心帝制而不使之過不及者焉 或於有過有不及之後 道心亦帝制而使趨於中者焉
氣順乎本然之理者 固是氣發而氣聽命於理 故所重在理而以主理言 氣變乎本然之理者 固是原於理而已非氣之本然 則不可謂聽命於理也 故所重在氣而以主氣言 氣之聽命與否 皆氣之所爲也 理則無爲也 不可謂互有發用也 但聖人形氣無非聽命於理 而人心亦道心 則當別作議論 不可滾爲一說也
且朱子曰心之虛靈知覺一而已矣 或原於性命之正 或生於形氣之私 先下一心字在前 則心是氣也 或原或生 而無非心之發 則豈非氣發也 心中所有之理 乃性也 未有心發而性不發之理 則豈非理乘乎 或原者以其理之所重而言也 或生者以其氣之所重而言也 非當初有理氣二苗脈也 立言曉人 不得已如此 而學者之誤見與否 亦非朱子所預料也 如是觀之則氣發理乘與或原或生之說 果相違忤乎 如是辨說而猶不合 則恐其終不能相合也
[音讀]
도심원어성명이발자기야 즉위지리발불가야 인심도심구시기발 이기유순호본연지리자 즉기역시본연지기야 고리승기본연지기이위도심언 기유변호본연지리자 즉역변호본연지기야 고리역승기소변지기이위인심이혹과혹불급언 혹어재발지초이유도심제제이불사지과불급자언 혹어유과유불급지후 도심역제제이사추어중자언
기순호본연지리자 고시기발이기청명어리 고소중재리이이주리언 기변호본연지리자 고시원어리이이비기지본연 즉불가위청명어리야 고소중재기이이주기언 기지청명여부 개기지소위야 리즉무위야 불가위호유발용야 단성인형기무비청명어리 이인심역도심 즉당별작의론 불가곤위일설야
차주자왈심지허령지각일이이의 혹원어성명지정 혹생어형기지사 선하일심자재전 즉심시기야 혹원혹생 이무비심지발 즉기비기발야 심중소유지리 내성야 미유심발이성불발지리 즉기비리승호 혹원자이기리지소중이언야 혹생자이기기지소중이언야 비당초유리기이묘맥야 입언효인 부득이여차 이학자지오견여부 역비주자소예료야 여시관지즉기발리승여혹원혹생지설 과상위오호 여시변설이유불합 즉공기종불능상합야
[字義]
灼작 : 사를, 구울, 밝을, 빛날, 꽃 활짝 필. 俱구: 함께, 다, 동반할, 갖출.
纔재: 겨우, 잠깐 暫, 비롯할 始, 삼: 엷게 검은 빛 微黑色. 趨추: 달아날, 자주 걸을.
滾곤: 꿈틀거려 흐를. 苗脈묘맥: 일이 곧 일어날 싹수, 일이 내비치는 실마리.
預예: 미리, 참여할, 미칠, 간섭할. 忤오 : 거스를 逆, 미워할 意不喜.
「中庸章句序」에서 朱子 曰, “蓋嘗論之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 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 不能無道心 二者雜於方寸之間 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雜也 從事於斯 無少間斷 必使道心 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則危者安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허령은 마음이 비어 있고 또 신령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그 體, 知覺은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用)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인심과 도심의 차이가 있다 하는 것은, 곧 그것이 어떤 때에는 형기(形은 형체로서 몸, 氣는 氣質로서 사람의 趣向을 나타내는 知覺作用. 形氣之私란 곧 사람의 耳目口鼻의 사사로운 욕망)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고, 어떤 때에는 성명의 올바름(性命이란 天命之性. 性命之正은 곧 仁義禮智)에 근원을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각케 하는 것이 같지 않으니 어떤 때에는 위태로워 불안하고, 어떤 때에는 미묘하여 알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형기를 갖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러한 성명을 갖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도심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 섞이어 있으나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곧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세한 것은 더욱 미세하여져서, 하늘의 이치의 공공됨이 끝내 사람들의 욕심의 사사로움을 이겨낼 길이 없게 된다. 정밀하면 곧 이 두 가지의 사이를 살피어 뒤섞이지 않고, 한결같으면 곧 그의 본심의 바름을 지키어 떠나가지 않는다. 이러한데 종사하여 조금도 멈추는 일이 없고,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늘 한 몸의 주인으로 삼으며 인심이 언제나 매번 그 명령에 따르면, 곧 위태롭던 것이 안정되고 미세하였던 것이 뚜렷하여져서, 행동과 말하는 것이 자연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中庸에 이른다).”
[국역]
도심은 성이 명하여 발하는 기에 바탕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발이라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인심과 도심이 모두 기발이나 기가 본연의 리에 따름이 있으면, 기도 역시 본연의 기이므로 리가 그 본연의 기를 타고서 도심이 되는 것이요, 기가 본연의 리에서 변한 것이 있으면 역시 본연의 기에서도 변하므로 리도 역시 그 변한 바의 기를 타고서 인심이 되어 혹은 지나치기도 하고 혹은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혹은 겨우 발하는 처음에 이미 도심의 제제가 있어 과불급이 없게 하기도 하고 혹은 과불급이 있은 뒤에 도심이 역시 제제하여 중으로 가도록 하기도 한다.
기가 '본연지리에 순하는 것은 본래 기발이나 기가 리에게서 명령을 들으므로, 그 무게가 리쪽에 있어서 주리라 말하고, 기가 '본연지리'에서 변한 것은 본래 리에 근원하였으나 이미 기의 본연이 아니어서 리에게서 명령을 듣는다고 할 수 없으므로, 그 무게가 기쪽에 있어서, 주기라 말한다. 기가 명령을 듣고 안 듣는 것은 모두 기가 하는 바이고 리는 무위이니, (기와 리) 둘 다 발한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성인은 형기가 리에게 명령을 듣지 않음이 없어서 인심도 역시 도심이니 마땅히 따로 의논해야 할 것이요, (보통사람과) 섞어서 한 설(기발리승일도설)로 해서는 안 된다.
또 주자는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일 뿐이로되 혹 성명의 바름에 근원하기도 하고 혹 형기의 사사로운 것에서 나기도 한다."하여 먼저 심자 하나를 앞에 놓았으니, 심은 기이다. 혹 근원하기도 하고 혹 나기도 하여 심에서 발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기발(氣發)'이 아니겠습니까. 심(心) 가운데 있는 이(理)가 바로 성(性)이요, 심이 발하는데 성이 발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어찌 이가 탄 〔理乘〕것이 아니겠는가. 혹 근원한다는 것은 그 리의 중한 쪽을 가지고 말한 것이요, 혹 난다는 것은 그 기의 중한 쪽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당초부터 리기의 두 묘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을 만들어 사람을 가르치자니 부득이 이렇게 말한 것인데, 배우는 이의 그릇된 견해가 있고없고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의 예측한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이 '혹원혹생설(或原或生說)'과 과연 서로 어긋남이 있겠는가. 이렇게 설명하여도 오히려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끝내 서로 합치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論註] 理, 氣, 性, 命, 人心과 道心
먼저 ‘道心原於性命而發者氣也’에 대한 해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性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中庸章句序」의 ‘或原於性命之正’대로 읽으면 ‘命’은 ‘性’과 합하여 ‘天性’의 뜻을 가진다. 이것을 적용하여, ‘도심이 성명(의 바름)에 근원하여 발하는 것을 기라고 한다’라고 국역할 수가 있고, 또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데 발하는 것은 기이다’라고 할 수가 있고, 또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는데 발하도록 하는 것은 기이다’라고 할 수가 있다. 또 ‘도심은 성에 바탕하는데 명하여 발하는 것은 기이다’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성에 바탕하는 도심을 명하여 발하는 것은 기이다’라고 국역할 수 있다.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율곡의 말을 직접 들어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나 독자들의 국역에 따라 의미 차이가 약간씩 있다.
율곡이 ‘氣之聽命與否 皆氣之所爲也 理則無爲也’라 한다. 리는 무위이기 때문에 기의 유위를 강조하며 기가 명령을 듣고 안 듣고는 모두 기가 하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전제로 ‘固是氣發而氣聽命於理’와 ‘則不可謂聽命於理也’라 하여 리의 명령권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리의 무위를 말하는 율곡이 ‘命’이란 말을 쓴 까닭은 리가 주체적인 동력으로 기에게 명령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에다가 聽’자를 놓아서 기가 리를 보고 반응하는 소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설정한 가상일 것이다. 기에게 능동적인 선택권을 분명히 주되 그 선택의 소이를 리에다 둠으로서 리의 본연지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만약 리가 명령권을 갖고 있다면기는 당연히 청명해야 하므로 인성론 자체가 성립이 안 될 것이다. 인간 세상이 금세 반듯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道心原於性命而發者氣也 則謂之理發不可也'에 대한 국역으로는 여러 학자들이 해석하는 ‘도심은 성명에 근원하여 발하고 발하는 것은 기이다’보다 ‘性’과 ‘命’을 띄워 '도심은 성이 명하여 발하는 것인 기에 바탕하는 것으로, 리가 발하는 것에 바탕한다고 할 수 없다'가 적합하다. 이 해석이 성즉리이고 리는 무위무형이므로 기발리승이라는 율곡의 일관된 논리에 부합한다.
그러나 율곡이 가상 개념으로 ‘命’ 자를 씀으로서 性과 氣의 인과 관계는 보충했을지 몰라도 리기론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다. 언제는 리와 기를 동등하게, 언제는 리를 중심으로, 언제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논리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더구나 ‘不可謂互有發用也 但聖人形氣無非聽命於理 而人心亦道心 則當別作議論 不可滾爲一說也’에서는, 호발을 인정하지 않지만 ‘但’ 聖人의 형기는 모두 리에 聽命한다는, 즉 리발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나타냄으로서 적어도 성인론에서는 리발과 기발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불상리불혼잡 하더라도 리 개념과 기 개념의 사용 방도가 다른 이상 경계는 분명히 해야만 논리가 헝클어지지 않는다.
퇴계와 율곡 등의 조선 철학자들의 맹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聖人論’이다. 현실계에서는 성인이 존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논리상에서 성인이라는 절대자를 설정함으로서 논변의 동력을 자하시키고 인성의 본질을 종교에 묻어버리는 편리를 범하고 있다. 요순우탕 등의 소위 성인은 아득한 후세에 기득권자들이 만든 우상일 뿐이다. 공자, 예수, 석가모니, 노자 등의 성인 대접 받는 사람들 모두 실제 모습에다가 過裝飾을 한 智者일 뿐이다. 가상의 존재인 성인들만이 시종일관 유지하는 본연지기는 하나의 이상적인 경지의 감정이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칠정으로 대표되는 인간 감정의 상위 개념이지 칠정과는 별도의 것이 아니다.
조선의 유학자, 성리학자들이 리에 대한 과부하인 성인론이라는 허상에 집착함으로서 기 덩어리인 인간의 실상 탐구를 소홀히 한 것은 학문의 중심이 어긋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書에서 율곡이 ‘但聖人形氣無非聽命於理 而人心亦道心’’라고 말한 것은, 성인에게는 리발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읽혀짐으로서 자기가 그토록 부정한 퇴계 리발론의 본지와 흡사한 것이 아닐 수 없으며, 리발을 성인에게만 국한시킨 편의적 논리의 일단을 내비침으로서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인성론을 초월적 성인론으로 단순화시킨 것이 아닐 수 없다.
또, 「중용장구서」에서 ‘性命之正’이란 말을 쓴 것은 성명의 바르고 바름을 강조하는 어법이지만 달리 상대적으로 생각하면 성명에도 私 또는 曲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성인은 두 유형이 있다. 천부적으로 성명지정을 가진 성인과 성장하면서 차츰차츰 성품과 지혜와 갈고닦아 성명지정에 근접하는 성인이 있다. 율곡이 말한 성인이 후자형이라면 말이 되지만 전자형이라면 비논리 영역이기 때문에 학문 영역인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 전자형은 논외이니 문제는 후자형인데, 성인이 되어 가는 길도 별 수 없이 기질지성의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기의 ‘聽’과 ‘不聽’이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논리가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리는 본연지성으로 순수하기 때문에 당연히 기가 ‘聽’한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현실의 유행하는 인성의 다양성을 ‘氣聽命’ 하나 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든 개념이 ‘不聽’인데, 이것 또한 같은 기인데 왜 어느 기는 리의 명령을 듣고 어느 기는 듣지 않는가 하는 논리 상충이 일어난다. 그래서 만든 개념이 ‘順’과 ‘變’인데, 이것 역시 왜 순하고 변하는가에 대한 치밀한 논거 없이 ‘氣質之性’이란 총괄 개념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氣質之性’이 모두 악한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本然之性’의 상대 개념으로 쓰이면서 邪惡한 이미지가 덧칠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군자는 모두 본연지성을 가지나, 다수인 백성들은 모두 기질지성을 가지므로 피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율곡의 이 書에 나타난 ‘性命’의 의미는「中庸章句序」에서의 의미보다는 앞에서 말한 구절에 연관할 때 ‘性’과 ‘命’은 떼어서 읽을 수도 있다. ‘성명에 근원하는 도심은 기의 발함에 승한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性과 命을 띄워 읽고 而, 者의 뜻을 살려 ‘성에 근본하는 도심을 명하여 발하는 것은 기이다’라고 읽는 것이 기발리승을 주장하는 율곡의 본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도심은 스스로 발할 수 없으므로 기발에 乘하여 발한다는 것이다.
모두 다 ‘도심은 성에 바탕하고’와 ‘그 도심이 발하는 것은 기이다’라는 공통점을 가지나, 性과 命을 붙여 읽느냐 띄우느냐, 而와 者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맥락상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도심이 발하는 과정을 기라고 보는 것, 도심이 스스로 발하는 동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 그냥 있는 도심으로 하여금 피동적으로 발하도록 하는 동력을 기라고 보는 것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뒤에 이어지는 ‘則謂之理發不可也 人心道心俱是氣發’를 보면 문장의 본의는 도심이 기발임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심 자체가 기여서 그 동력에 의거해 발하는지, 아니면 무동력인 도심이 동력인 기에 의거해 발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이랄까 모호함이 있다. 율곡의 이전과 이후 논리를 보면 성을 리로 보기 때문에 성이 곧 도심인즉슨, 성이자 무위무형한 리인 도심은 동력이 없으므로 기의 발함에 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원래는 도심 하나뿐이지만 그것이 도심과 인심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소이연을 ‘而氣有順乎本然之理者’와 ‘氣有變乎本然之理者’라 하여 ‘順과 ’變‘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故理乘其本然之氣’와 ‘故理亦乘其所變之氣’라고 말하며 본래부터 무변인 리가 기에 따라서 본래대로의 도심이 되거나 변화하여 인심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기가 변하는 소이로 ‘氣有順乎本然之理’와 ‘氣有變乎本然之理’라는 전제를 달아 리로 하여금 기를 순하게도 하고 변하게도 하는 주체가 되도록 한다.
그렇다면 인심이 사악해지는 책임이 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가 순하거나 변하는 소이가 리에 있기 때문이다. 기가 발할 때 또한 본연의 성은 순수하고, 성이 곧 리이므로 리의 순수성은 필연이다. 그 순수한 리가 어찌하여 기로 하여금 순하게도 하고 변하게도 하는 소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 ‘而氣有順乎本然之理者’와 ‘‘氣有變乎本然之理者’에서는 기를 마냥 리에 따르는 피동적인 존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기의 동력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으로서 ‘氣發’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기가 발하는 어느 경우에라도 리는 본연지리인데도 불구하고 왜 기의 ‘有順’과 ‘有變’이 생기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율곡의 설명이 이 서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절대적 순수성을 가진 본연지리는 기가 발할 때 유순 또는 유변하도록 하는 영향만 줄 뿐, 왜 본연지기와 소변지기에 그냥 乘하기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것은 우주론에서의 리와 기를 인성론에 적용하여 도심과 인심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인심과 도심은 곧 성의 문제로서, 성이 반드시 리라고만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을 리로 치환하여 인성론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몇 번 굴절하며 어렵게 말하기보단, 주자와 퇴계처럼 본연지성인 도심이 외감할 때 그 본연을 그대로 지켜나가는 것을 리발인 도심으로 보고, 기의 영향, 즉 환경의 영향을 받아 曲變해나가는 것을 기발이라고 하는 것이 한결 명료한 논리일 것이다.
수준과 등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도심과 인심 모두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은 감각과 의식을 근간으로 하여 다양한 사유활동을 전개하는 마당이다. 도심과 인심 모두 그 마당에서 유행하는 것들이다. 만물이 갖는 근본인 형체와 작용, 즉 물질성과 운동성을 성이라고 하므로 사람의 심도 신체라는 그릇에 담긴 운동성으로 성이다. 그 성의 운동성은 물질의 집합체이자 화합체인 신체의 구조에 기인한다. 즉 마음이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신체의 투영인 것으로, 신체를 광원으로 하는 빛이다.
인성의 문제, 도심과 인심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광원인 신체이다. 광원이 약하면 빛이 약하고 광원이 혼탁하면 빛이 혼탁하듯이 신체가 약하거나 혼탁하면 마음이 약하거나 혼탁하다. 그러한 빛이 형상으로 나타나는 막 위의 영상 역시 약하거나 혼탁하다. 그러므로 도심과 인심을 가르는 소이는 신체이다. 도심이 仁義禮智라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바람직한 덕목이 되고, 인심이 喜怒哀樂愛惡欲의 보편적 감정이나 憎, 殺, 嫉, 貪, 慾, 矯, 破 등의 특수한 惡癖으로 되는 소이는, 외감을 당할 때 이미 구성된 신체가 일으키는 반응의 종류와 품질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상급의 신체는 상급의 반응을, 중급은 중급을, 하급 신체는 하급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편적 인심을 기반으로 하되 도심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우선 반응의 종류와 품질을 고급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광원인 신체를 淸輕하게 해양 한다. 신체가 병들거나 약물, 악습 등으로 병들어 있으면 애초부터 맑고 바른 반응이 나올 수가 없다.
‘道心原於性’이란 말은 인간 세상 전체에는 보편적으로 쓰일 만하나 인간 각각마다에는 적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개성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性에 原하는 것은 도심, 인심, 惡心의 세 가지이다. 善人之心, 凡人之心, 惡人之心. 이렇게 3분법으로 心을 봐야만 인성의 본상을 제대로 알 수 있지, 도심을 이미 절대적 위치에 놓고 인심을 거기에 의거해서 도출해내려고 하는 것은 단층적인 사유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무리하게 性을 理에 붙이다 보니 리의 무동력성이 걸리게 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氣의 동력성을 임의로 설정하여 氣發論을 세우게 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주론과 인성론의 근간인 리와 기에 대한 명료한 개념 설정이 필요하다. 리가 갖는 속성이 무형성, 무위성, 원리성, 규칙성, 법칙성 등임에도 우주론과 인성론을 오가며 어떠한 하자도 갖지 않는 완전무결의 절대 개념으로만 사용되며, 기가 갖는 속성이 유형성, 유위성, 물질성, 유변성 등임에도 發하여 리도 乘하게 할 수 있는 상대 개념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인성에서 기발과 리발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가상 개념이지 않을 수 없다. 인성이 발하는 것은, 나타나는 것은 이미 내장된 性이 외부의 자극에 저절로 반응하는 것일뿐이다. 아마도 율곡이 기발을 말한 까닭은 리와 기를 인성론 전개에서 기축 개념으로 삼다보니 그 ‘저절로 반응’의 소이를 기에서 찾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本然之性의 ‘저절로’를 하늘로부터 찾는 것은 논리상의 견강부회가 아닐 수 없다. 本然之性이 하늘로부터 저절로 오는 것이라면 인성론이 이렇다니 저렇다니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 모든 개념어가 췌사일 뿐이다. 그렇다고 ‘저절로 오는’을 부정하고 인성의 독립성을 강조할만한 시대적 풍토도 아니고, 사대부로 지내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인간상들의 한계 때문에 인성의 미묘한 면에 대한 천착이 충분하지 못하다보니 ‘기발’이 무난한 논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리와 기 개념이 우주론에서는 유효하지만 인성론에서는 그 효용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도심과 인심의 광원인 신체 자체가 이미 리와 기의 합일이므로 도심이 리이고 인심이 기라는 말은 개념 설정 자체가 이미 어긋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도심, 인심, 악심 모두 신체가 외부의 자극에 당하여 발하는 성과 외감의 결합체, 즉 감정으로서, 그 성들은 외감하면 크게 세 가지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바, 도심은 지향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가치의 감정이고 인심은 보편적인 감정이며 악심은 지양해야할 좋지 못한 감정인 것이다.
정신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신체의 투영이다. 물질의 결합체, 물질이 갖는 리와 기의 총체인 신체가 사람마다 다르므로 정신 또한 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심이 각자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인성의 본질을 적확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이 잘 되도록 북돋우고 잘못된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율곡뿐만이 아닌 모든 성리학자들의 논리처럼 도심만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이 빠지기 쉬운 획일성, 규격성을 탈출하여 인성의 다중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인성의 도덕적인 측면만을 현학적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구체성, 실제성, 현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도심을 천부의 본연지성으로 견결히 고정하고 인심을 소변지기의 소산으로 보아 비천하게 여겨 억제하고 다스리려야 할 대상으로 보아서는 인성의 핵심인 감정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다. 도심 역시 감정의 소산이다. 단지 인심이 보편적 감정이라면 도심은 특수한 감정이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심을 바르게 읽자면 인심부터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보통 사람이 갖는 인심은 생물이 갖는 감정의 발로로서 당연하며 하등의 가치적 판단이나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편벽되게 발로되면 자아나 타자에게 불편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표현하는 사회적 禮儀가 필요하다. 이에 비해, 악심은 자아와 타자를 함께 망치기 때문에 사회적 강제인 法律이 필요하고, 도심은 자아를 넘어 타아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기 때문에 사회적 장려가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퇴계는 도심을 일방적으로 추구한 엄격한 도덕주의자로서 인심을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다보니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역시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고, 율곡은 도심을 중요시 하되 기발을 관건으로 보아 그것을 잘 조절함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도심쪽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보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인성을 單層으로 보았다면 율곡은 重層으로 본 것이다.
우주론은 관념세계의 것이지만 인성론은 실제세계의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중요성이 지극하다. 인성론에 따라 시대의 모습이 판이하다. 인심을 억제의 대상으로 보는 봉건시대보다 인심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현대가 모든 면에서 浩然之氣를 표출하며 대동사회의 완성 쪽으로 근접해가는 것을 볼 때, 그 시대의 인성론이 갖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알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평생토록 리기론에 집념한 까닭은 가깝게는 자아의식 때문이고 크게는 사회의식 때문이다. 태극론에서는 리기가 어는 정도 정의되었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었으나, 인성론에서는 리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봉건사회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 본연의 인성을 논하기 보다는 신분에 따라 인성이 다르다는 것을 대전제로하는 근본적인 오류로부터 인성론을 전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인성을 직시하고 향상시켜 사회를 반듯하게 하는데 실패하였다. 사대부 출신들로서는 평민과 천민들의 인성이 자기들과 똑같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마소와 같이 취급하는 천민들이 인성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조차 싫었을 것이다. 리기를 논하는 계급이 상류층 사대부나 양반 지식인이니 조선 후기에 벌어진 인물성동이론도 결국은 異論 쪽이 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바탕위에서 전개 되는 인성론이다보니 당연히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이분법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본연지성은 군자의 것이고 기질지성은 소인의 것으로 치부함으로서 본연지성의 핵심인 리가 기질지성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다는 논리를 만들어서 봉건사회 구조를 지탱하는 받침으로 삼았다.
본연지성은 실체가 없는 관념상의 논거이다. 본연지성은 인성의 기본적 표현인 기질지성이차원 높은 사유 과정을 통해 승화된 것으로 기질지성은 감정이고 본연지성은 감성이라 할 수 있다. 기질지성이 여러 가지 요소들이 녹아있는 생활수라면 본연지성은 증류수라고 할 수 있다. 증류수는 맑지만 귀하고 미네랄이 없어서 사람들이 일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연지성이 순수하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에만 집착해서는 生生之理하는 실존적 존재인 인성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대처할 수 없다.
왕양명이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소이는 위와 같은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주기론을 주장하며 기를 강조하는 까닭은 기를 감각 작용의 요소로만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감각 작용의 바탕인 신체가 이미 리와 기의 합체이고, 감각 작용이란 그 리기 합체의 유행 현상이다. 그럼에도 감각 작용을 다시 기발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 논리이지 않을 수 없다. 율곡이 기발을 말한 기본적인 인식도 양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인성의 본질을 정밀하게 분석하지 않음으로서 욕망 과잉의 문제가 양명학 말류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기질지성을 중심으로 하되 본연지성을 무게 중심을 잡는 추로하여 적당하게 인성의 균형을 잡아 주도록 하는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질지성의 자유성만 강조하다보니 양명학 말기의 방종과 혼란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중간에서 생긴 강물의 혼탁은 흘러가다가 자연 정화 되지만 원류에서부터 생긴 혼탁은 중간에 더욱 혼탁을 보태어 종내 혼탁을 면치 못한다.
봉건시대나 민주시대나 인성은 불변하고 학문의 목적은 동일하다. 다만 봉건시대엔 봉건학자들이 봉건의식으로 인성을 봤고 민주시대엔 민주학자들이 민주의식으로 인성을 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자, 양명, 나정암, 퇴계, 율곡 등은 봉건시대의 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였을 따름이다. 그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보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군주제를 비판하는 것은 곧 멸문지화의 단초였고, 신분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자기의 물질토대를 스스로 붕괴시키는 어리석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엄혹한 봉건시대속에서도 인성의 본질을 바로보고 그것을 사회로 확대하고자 노력했던 소수의 학자들이야말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시공을 통관하는 큰학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바른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극소수였다는 것, 그들은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맹자가 易姓革命을 말하고 대학에서 ‘新民’이 아니라 ‘親民’을 말한 의미가 直流하지 못하고 수없이 曲流하였다.
본연지성은 지향해야할 바의 최고 가치이고, 기질지성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갖는 보편적인 가치이다. 기질지성은 과불급이 문제될 뿐이지 억제하고 구속받아야 할 객관물이 아니라 잘 펴야 할 주관물이다. 봉건시대에는 기질지성을 천시함으로서 양반계층이 이득을 독점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대중지성이 주류인 현대의 평등시대엔 기질지성이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 덕목인 본연지성을 존중하되, 개인적 생명력의 표현인 기질지성을 어떻게 잘 살려나가느냐에 따라 민주시대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율곡은 주자의 心之虛靈知覺이란 말을 논거로 ‘心是氣’라 전제하여, 심속에 들어있는 理가 곧 性이므로 心이 발하면, 곧 氣가 발하면 性인 理가 乘한다고 하는 논리를 氣發而理乘說 의 뼈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주자가 말하는 ‘虛靈知覺’은 심의 다양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심이 곧 기가 아닐 수 있다. 심속에 묘한 정신 작용, 감각, 느낌, 사유 능력 등이 들어 있다는 포괄적 의미이지 꼭 심이 기라는 말은 아니다. 심속에 꼭 리만 들어있다고 할 수 없고, 심에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 들어있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율곡은 심이 곧 기라는 명제를 선뜻 앞세워서 자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또 ‘心中所有之理 乃性也’라 하며 리와 성을 쉽게 연결하고는 ‘심이 발하면, 곧 기가 발하면 알맹이인 성, 즉 리가 따라 발한다, 곧 乘한다’ 라는 논리를 연결하고 있다.
性의 개념 자체가 다양성을 갖고 있다. 만물 하나하나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지만 리와 기가 결합한 상태의 성질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므로 사람의 경우에는 心 전체를 性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지 심속에 들어있는 리만을 성으로 말하는 것은 성 개념을 편벽되게 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심은 감정의 덩어리로서 심이 발하는 것은 감정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理性은 감정의 갈피로서 심이 발하면 자동으로 따라 발한다. 이것은 수박이 구르면 그 속의 씨앗도 함께 구르듯 덩어리인 기가 발하면 알맹이인 리도 함께 발하는 것이므로 꼭 겉보기인 기만을 중심으로 해서 기발이라고 꼭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차가 간다’하면 그 속에 실려 있는 물건이나 사람이 당연히 함께 가는 것으로 여기지만 ‘사람이 간다’하면 차를 생략하여 잊기 쉬우므로 일단 겉보기인 ‘차가 간다’가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간다’인 퇴계의 ‘호발설’은 리와 기를 함께 보되 사람인 리를 더 중시하는 중층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고, ‘차가 간다’인 율곡의 ‘기발리승설’은 실어 나르는 주체인 기를 먼저 보는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가 호발설을 전개한 깊은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이 書에서 호발설 중에서 리발론을 자기 논거에만 의존하여 부정함으로서 영남, 기호 두 학파 간에 학문 수준을 넘는 감정의 앙금이 누적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이 ‘非當初有理氣二苗脈也’라 하여 或生의 主氣와 或原의 主理 간에 경계가 없다고 하면서도 ‘立言曉人 不得已如此 而學者之誤見與否 亦非朱子所預料也’라고 한 것은 앞서 언급한 성인론에 버금가는 편의적인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경계의 有無 문제 때문에 後學者들이 얼마나 많은 논변을 주고받았는가. 사정이 그러함에도, ‘誤見與否’는 ‘非朱子所預料’라고 한 것은 先學의 무책임이 아니라면 아직 그들도 그 경계의 유무를 분명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주자와 율곡과는 달리 정호(程顥)는 "성이 곧 기요. 기가 곧 성이다”라고 한다. 선현들의 말을 섞어보면 성이 리이기도 하고 기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心, 性, 情, 理, 氣를 보는 관점과 개념이 학자들마다 다르다. 同門同學이라 해도 저마다 관점과 개념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 미세한 차이는 나중에는 아주 큰 격차를 초래한다. 한 대상에 대한 학설 이지만 양쪽의 논변이 전혀 엉뚱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과 개념의 차이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유하다 보니 성리에 대한 학설이 백화제방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선현들의 心, 性, 理, 氣에 대한 개념 정의를 종합해 보면, 心卽性, 性卽理, 性卽氣이므로 理卽氣이고 氣卽性, 理卽性 이고 性卽心이 되니 氣卽心, 理卽心이므로 氣發論이나 理發論이나 앞에서 율곡이 말했듯 같은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렇듯 性의 개념이 리기를 오가며 불확실성을 띄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학설이 빈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불확실성은 학문의 자양이지만 학문으로 하여금 공연히 부화하도록 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지치도록 하는 독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분자생물학의 개념과 맞추어보면, 氣는 세포, 理는 DNA와 RNA, 신경은 命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봉건시대에는 심장, 즉 心이 사고의 중심지인 줄 알았으나 현대에서 뇌가 사유작용의 중심인 것으로 확정되었다고 해서 뇌가 理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뇌 자체가 物質氣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유 활동은 자극에 대하여 반응하는 物質氣의 전기 작용의 결과이다.
理인 DNA도 여러 고분자 단백질의 배열이다. 즉 단백질이 物質氣이므로 理도 그 물질기의 배열이고, 만물마다 나타나는 分殊理는 배열의 차이인 것이다. 高度의 氣, 中度의 氣, 低度의 氣 등의 分殊氣가 있고, 세상과 인성은 그 氣들의 다양한 변화와 배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성의 변화를 도모하려면 생명체의 재료인 단백질과 DNA를 구성하는 재료인 고분자단백질의 종류와 질이 중요함을 알고 잘 선택해 섭취해야 한다. 양질의 단백질과 악질의 단백질의 차이가 인성에 영향을 미친다. 식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단백질의 차이 역시 온순성과 폭력성의 차이가 된다. 마약, 술, 담배, 상한 음식, 상한 음료수 등을 섭취하면 금방 세포에 영향을 미쳐서 인성이 왜곡되어버린다. 불량 섭취물이 장기적으로 누적되면 DNA의 변형을 가져온다. 즉 섭취물의 氣와 신체의 氣가 비정상으로 결합하거나 화합하여 신체와 인성이 망가진다.
心은 말 그대로 字形 그대로 여러 가지를 담는 그릇이다. 그 속에는 感, 知, 情, 意 志, 識, 智 등이 들어 있다. 그것들을 발하도록 하는 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신체적 반응, 즉 ‘痛覺’이다. 痛覺 - 感覺의 기초 단계까지는 氣發이고 意識의 입체 단계에서부터 理가 乘하여 生覺 - 思惟로 발전한다. 기초 단계까지 내장되어 있던 리가 의식 단계에서부터 활발하게 펼쳐진다. 현실에서 인성을 살피고 수양, 수정하려면, 기발의 통로를 반듯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 각자에 내장되어 있는 리가 무엇인지, 상태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의 기와 리를 자기 힘으로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原文]
若退溪互發二字 則似非下語之失 恐不能深見理氣不相離之玅也 又有內出外感之異 與鄙見大相浮動 而吾兄欲援而就之 此不特不知鄙意之所在也 又不能灼見退溪之意也 蓋退溪則以內出爲道心 以外感爲人心 珥則以爲人心道心 皆內出而 其動也 皆由於外感也 是果相合而可援而就之也 須將退溪元論 及珥前後之書 更觀而求其意何如
[音讀]
약퇴계호발이자 즉사비하어지실 공불능심견리기불상리지묘야 우유내출외감지이 여비견대상부동 이오형욕원이취지 차불특부지비의지소재야 우불능작견퇴계지의야 개퇴계즉이내출위도심 이외감위인심 이즉이위인심도심 개내출이 기동야 개유어외감야 시과상합이가원이취지야 수장퇴계원론 급이전후지서 갱관이구기의하여
[국역]
아마도 퇴계의 '호발’ 두 글자는 말 표현에 실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며, 리기가 서로 떠나지 못하는 묘리를 깊이 보지 못한 것이 걱정스럽다. 또 내출과 외감에서 차이가 있는 점이(나는 도심과 인심 둘 다 內이며 외감으로부터 동력을 얻어 出한다고 하나, 퇴계는 도심은 內에서 저절로 出하고 외감하여 인심이 된다고 하므로 內, 出, 動에서 차이가 있다) 나의 견해와 크게 서로 어긋나는데, 형이 끌어다가 (나의 설에) 억지로 붙이려 한 것은 내 뜻의 소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퇴계의 뜻도 확실히 모르는 것이다. 대개 퇴계는 안에서 나오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밖에서 감응되는 것을 인심이라고 하나, 나는 인심과 도심이 모두 안에서 나오고 그 동하는 것은 모두 바깥 감응에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것이 과연 서로 합하는 것이라 하여 끌어 붙일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앞으로 퇴계의 원론과 나의 전후의 편지를 다시 보고 그 뜻을 찾는 것이 어떻겠는가.
[논주] 퇴계의 뜻, 율곡의 뜻
이 문단에서 ‘則似非下語之失 恐不能深見理氣不相離之玅也’의 표현이 지나치다. 어느 학자에게 있어서나 ‘失’과 ‘不能深見’이란 말은 자기가 세운 논리에 허점이 많다는 뜻으로 듣기가 거북한 말이다. 하물며 퇴계의 후학들에게 그 말은 言禮를 갖추지 않은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율곡이 호발론을 비판하는 근거로 ‘리무위무형’과 ‘리기불상리지묘’를 들고 있는데, 리기가 불상잡하나 불상리하다는 말은 겉과 안 모습을 각각 말하므로 리발이나 기발이란 겉과 안 가운데 어디에 말의 중심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자동차와 운전수의 관계, 운전수가 시동을 걸어야 자동차가 발하고, 자동차가 있어야 운전수가 시동을 걸 수 있다. 기 없이는 발할 수 없고 리 없이도 발할 수 없다. 기를 중심으로 하면 기발이 되고, 리를 중심으로 하면 리발이 되는 것이다. 율곡은 앞에서 ‘기와 리의 말의 앞뒤가 없으나’와 ‘故所重在氣而以主氣言’의 말에서 보듯 알맹이인 리가 중요하나 발하는 동력은 유형유위인 기이기 때문에 기발리승을 말한 것이고, 퇴계는 본질인 리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어 종결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리발을 말하면서도 그 리를 실어 나르는 기의 동력 여부도 중요하기 때문에 기발을 말한 것이다.
퇴계가 호발을 말한 관점은 인성론 입장에서 본 것으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려다 보니 리와 기가 일물이어 불상리하나 불혼잡하여 속과 안임에 그 발하는 점을 각기 달리하여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이 ‘不能深見’이니 하면서 선현인 퇴계의 호발론을 비판한 것은 자기만의 생각을 논거로 한 過言이자 지적 오만이요, 후학으로서의 예를 갖춘 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이 ‘其動也 皆由於外感也’라고 했는데, 기발을 먼저 말했으므로 ‘外感’의 주체는 기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논리대로, 인심과 도심 둘 다 內에서 나오나, 순수성 그대로인 본연지기와 접한 본연지리는 도심이 되고, 순수성을 잃고 변질된 기질지기와 만난 본연지리는 어쩔 수 없이 인심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왜 본연지기가 그 순수성을 잃게 되느냐에 대한 규명 논리가 필요하다. 도심의 외감은 왜 순수하고 인심의 외감은 왜 불순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
퇴계는 도심이라는 하나의 출발점을 가지나 율곡은 도심과 인심이라는 두 개의 출발점을 갖는다. 퇴계가 인성의 근본은 도심 하나로서 순수하나 외감하여 그것이 현상화 하는 도중에 변화하여 인심이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성선설에 바탕하여 인성의 가변성과 함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율곡이 인성의 근본은 도심과 인심의 두 개의 원점을 가지며 외감 여부에 따라 동하여 도심 또는 인심으로 현상된다고 하여 인성의 근본적인 불변성 -비록 잘 외감하여 인심이 바르게 펼쳐지더라도-을 말하고 있다. 물론 둘 다 ‘외감’이라 하여 접촉과 반응을 중요시 하고 있다.
이곳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나중에는 논리가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37세 시절 율곡의 인성론 축면에서의 리기관은 ‘珥則以爲人心道心 皆內出而’로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안에 도심만 들어있지 인심은 없다. 그 도심이 바르게 외감하면 도심의 순수성이 그대로 현상이 되고, 혼잡하게 외감하면 순수성을 잃고 혼잡한 인심으로 변질된 현상이 된다’고 하는 퇴계 인성론에서의 리기관은 일원론이란 것이다. 기존 학설인 퇴계의 리발기발 이원론과 율곡의 기발 일원론과는 상치한다. 그러므로 우주론에서의 리기관과 인성론에서의 리기관을 구별해서 보아야만 두 학자의 학설을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두 관을 혼동하면 학설 자체의 토대가 붕괴하게 된다.
퇴계와 율곡은 자기들의 학설이 상치되거나 혼동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는지 또는 못하였는지 모르지만, 우주론과 인성론을 근본과 형상의 둘로 구분하여 사색하지 않고 리와 기를 두 관의 요소로 일률적으로 적용 때문에 그런 착오가 생긴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주는 근본이고 인간은 거기에서 발한 하나의 현상이며, 더구나 인성은 인간에게서 다시 발한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에 율곡의 논리대로 한다 해도 우주의 본연지기와 본연지리가 몇 번 꺾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주와 인성을 통관하는 것은 리와 기로 그 본질은 동일하지만 응용 면에서는 차이점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 모두 도심과 인심의 뿌리가 우주론에 닿아있으며, 도심과 인심에 작용하는 ‘外感’은 객체와 환경의 영향을 말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심과 인심은 자체가 발하지 않고 ‘其動也 皆由於外感也’이라 하여 ‘外感’에 의하여 비로소 발하여 유행한다고 한다. 즉 인성의 본질과 작용면에서 보면 도심과 인심은 리이고 ‘外感’은 기라고 할 수 있다. 리는 도심과 인심의 두 가지이고, 기는 외계 환경 조건이라는 말이 된다.
퇴계와 율곡 모두 주자의 或原或生說에 바탕하여 인심과 도심을 논하는 바, 퇴계의 ‘內出爲道心 以外感爲人心’의 說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본래의 것은 性命之正하나뿐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출발하여 外感 하지 않으면 도심이 되고, 그만 외감 하여 形氣之私를 품게 되면 인심이 된다고 하는 것으로 先或原 後或生, 즉 인성의 순수성을 중심으로 하나 , 율곡의 ‘皆內出而 其動也 皆由於外感也’의 說은 도심과 인심 둘 다 한 곳 안에 있다가 외감 하면, 즉 외부로부터 영향을 동력으로 삼아 출발한다는 것으로 주자의 혹원혹생설을 약간 비틀어 응용한 측면이 있다.
퇴계가 先或原 後或生이란 순차 개념으로 도심을 근간으로 본 것은 일원론으로 인심과 도심의 출처를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본 그의 사단칠정론과 상치하며, 율곡이 ‘皆內出而’라 하여 도심과 인심을 등가의 별도로 본 것은 이원론으로 그의 기발리승론과 도심인심이 모두 情이라는 사단칠정론과 상치한다.
[原文]
性情本無理氣互發之理 凡性發爲情 只是氣發而理乘等之言 非珥杜選得出 乃先儒之意也 特未詳言之而珥但敷衍其旨耳 建天地而不悖竢後聖而不惑者 決然無疑 何處見得先儒之意乎 朱子不云乎 氣質之性 只是此性(此性字本然之性也)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爲一性(此性字氣質之性也) 程子曰性卽氣氣卽性生之謂也 以此觀之 氣質之性本然之性 決非二性 特就氣質上單指其理曰本然之性 合理氣而命之曰氣質之性耳
性旣一則情其二源乎 除是有二性 然後方有二情耳 若如退溪之說則本然之性在東 氣質之性在西 自東而出者謂之道心 自西而出者謂之人心 此豈理也 若曰性一則又將以爲自性而出者謂之道心 無性而自出者謂之人心 此亦理也 言不順則事不成 此處切望反覆商量
前日圖說中之言 非以爲擴前聖所未發也 其圖及所謂原於仁而反害仁等之說 雖是先賢之意 無明言之者 淺見者必疑其畔先賢之說 故云云耳 不以辭害意何如
[音讀]
성정본무리기호발지리 범성발위정 지시기발이리승등지언 비이두선득출 내선유지의야 특미상언지이이단부연기지이 건천지이불패사후성이불혹자 결연무의 하처견득선유지의호 주자불운호 기질지성 지시차성(차성자본연지성야)타재기질지중 고수기질이자위일성(차성자기질지성야) 정자왈성즉기기즉성생지위야 이차관지 기질지성본연지성 결비이성 특취기질상단지기리왈본연지성 합리기이명지왈기질지성이
성기일즉정기이원호 제시유이성 연후방유이정이 약여퇴계지설즉본연지성재동기질지성재서 자동이출자위지도심 자서이출자위지인심 차기리야 약왈성일즉우장이위자성이출자위지도심 무성이자출자위지인심 차역리야 언불순즉사불성 차처절망반복상량
전일도설중지언 비이위확전성소미발야 기도급소위원어인이반해인등지설 수시선현지의 무명언지자 천견자필의기반선현지설 고운운이 불이사해의하여
[字義]
杜두: 막을 塞, 杜選得出 : 막고 골라 얻어내다. 여러 학설 중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논거로 삼다 悖패 ; 어지러울, 거스를, 어기어질.
竢사: 기다릴 待. 商量상량: 헤아려 생각함. 畔반: 밭두덕, 도랑, 갑절. 反 叛
畔援 반원: 도리를 배반하여 방자하게 행동함. 제 멋대로 놀음.
乃내: 이에, 너 汝, 옛 古, 곧 卽,겨우. 但단 : 다만, 그러나.
就취: 좇을 從, 이룰 成, 나아갈 卽, 능할 能, 마칠 終. 除제: 버릴 去, 섬돌.
[국역]
성과 정은 본래 리기호발의 이치가 없으며, 무릇 성이 발하여 정이 되고, 다만 이것으로 하여 기가 발하고 리가 탄다는 등의 말은 내가 멋대로 골라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곧 선유의 뜻이다. 특별히 그것에 대해 (선유가) 상세히 말하지 않은 것을 내가 그 뜻을 다만 부연하였을 뿐이니, 천지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아니하고 후세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다는 것은 결코 의심이 없다. 선유의 뜻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 하면, 주자는 "기질지성은 다만 이 성이(이 性字는 본연지성이다.)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으므로, 기질을 따라 스스로 하나의 성이(이 性字는 기질지성 이다.) 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자도 "성이 곧 기요. 기가 곧 성이니, 그것이 生한 것을(살아서 실제로 활동하는) 말함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 결코 두 성이 아니다. 기질 상에 있어서 그 리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을 특히 좇아서 본연지성이라고 하고(무게 중심을 리에다 둘 경우에), 리기를 합하여 그것을 이름 지어 말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고 한 것이다.
성이 이미 하나이면 정이 어찌 두 갈래의 근원이 있겠는가. 이것을 버리면(‘性旣一’이란 전제를 없애면) 두 가지 성이 있은 뒤에라야 두 가지 정이 있는 것이다. 만약 퇴계의 설대로 하면, 본연지성은 동쪽에 있고, 기질지성은 서쪽에 있어서, 동쪽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서쪽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인심이라 하는 격이니, 이것이 어찌 이치인가; 만약 성이 하나라고 하면, 또 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성이 없이 스스로 나오는 것을 인심이라 할 것이니, 이것도 역시 무슨 이치인가. 말이 순리가 아니면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 여기에 대해 반복하여 상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일의 도설 중의 말은 옛 성인이 발명하지 아니한 것을 확충한 것은 아니다. 그 도설과, 이른바 “인에 근원하였으되 도리어 인을 해친다"와 같은 설은 비록 선현의 뜻이지만 분명히 말한 이가 없으니, 견문이 천박한 자는 반드시 선현의 설에 배반된다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한 고로 말을 하였을 뿐이니,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論註] ‘理發不可’ 넉 자에서 싹튼 400년 논쟁
먼저 性의 개념을 확실히 정리하여야 한다. 程子는‘性卽氣氣卽性生之謂也’라 하여 性을 氣라고 하였고, 앞에서 율곡은 ‘則心是氣也 或原或生 而無非心之發 則豈非氣發也 心中所有之理 乃性也’라 하여 心 中에 리가 들어 있으며 그것이 곧 性이라 하였다. 이것은 心 속에 氣 등의 여러 가지 요소가 들어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 중심이 되는 理를 특정하여 말하되 性卽理라 함으로서 정자의 ‘性卽氣’라는 말과 리와 기 개념을 넘나드는 불확실성을 증폭하고 있다. 철학적 사색에서 언어 개념은 지표가 된다. 사색의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완벽한 부합이 아니라 아주 약간의 차이라도 있으면 언어를 새로 정하여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와 기를 다르다고 보는 것도 아니고 동일하다고 보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개념을 갖고 사색하여서는 매우 곤란하다. 언제는 리와 기를 별개의 것으로 쳐서 한 쪽은 올리고 한쪽은 낮추어서 그 여파에 만물의 가치를 등락시키거나, 언제는 리와 기를 동일한 것으로 쳐서 호연지기의 배양을 주장하는 養氣論의 논거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이 단락에서는 37세 율곡의 논리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퇴계의 호발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논리를 잣대로 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이 정도를 차츰 넘어 비방의 지경에 이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퇴계가 ‘內出爲道心 以外感爲人心’라고 한 뜻은 심 중에 도심만 있다가 그것이 출하여 외감하면 인심이 된다는 것으로, 도심을 리, 인심을 기에 감한 感氣로 보고 있다. 이것은 ‘道心卽理’의 일원론으로 주자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율곡이 주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자기 논리의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정자의 ‘性卽氣’라는 말을 이끌어와 ‘合理氣而命之曰氣質之性’이라 하여 자기의 氣發理乘論의 논거로 삼아, 퇴계가 마치 二性二情을 말한 것처럼,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출처가 각기 따로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학문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율곡의 ‘皆內出而 ’가 도심과 인심의 출처를 각기 달리하는 이원론으로서 주자의 설에 크게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또 ‘性旣一則情其二源乎’라 하여외감에서 유래하는 ‘動 의 개념을 중간에 삽입하여 퇴계보다 인간 개체의 주체적 판단을 중시하였지만 그 ’動‘ 역시 氣發을 강조하는 장치인 것이다.
율곡이 ‘氣質之性本然之性 決非二性 特就氣質上單指其理曰本然之性’라고 말한 뜻을 보면, 주자나 퇴계가 으뜸으로 중요시한 본연지성이 여기서는 기질지성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율곡의 관점이 氣와 기질지성에, 그것을 파악하여 바로보고 현상을 수정, 교정하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자와 퇴계는 性의 근원은 본연지성이나 외감 당하더라도 군자는 영향 없이 본연지성 그대로이나 소인은 아주 큰 영향을 받아 기질지성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인간의 마음을 평면으로 보나, 율곡은 비록 이원론이지만 ‘皆內出而’라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는 본연과 기질의 두 가지 성이 혼재하는데, ‘其動也 皆由於外感也’라 하여 외감에서 오는 동력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갈라진다고 인간의 마음을 입체적으로 본다.
퇴계가 말한 뜻이 꼭히 본연지성의 특수성과 기질지성의 일반성을 강조하여 인성의 수정, 교화가 불가하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東西兩出의 비유를 함으로서 마치 퇴계의 인성관이 고착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나아가서 이원론으로 규정함으로서 마치 퇴계가 선현인 주자와 정자의 설에 미흡하거나 어긋난다는 인상을 줌으로서 후세에 많은 논란의 씨앗을 몇 개 남기고 말았다. 율곡 역시 37세 즈음에 갈파한 리기론과 인성론이 마흔 이후에는 변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율곡이 70 이후까지 살았다면 확실한 자기 학설을 세웠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쉰 이전에 사망한 바, 지기들과 주고받은 여러 書에서 보듯 아직 結論이 아니라 試論 정도에 머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절에는 자기 학설에 대해서 겸허해야만 학문의 확장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이 유행하여 시간이 쌓이면 진화하듯 학설도 변화하고 진화한다. 그럼에도 한 때의 자기 학설을 완성된 것으로 고집하는 것은 학문하는 태도가 아닐뿐더러, 더구나 타 학설에 대하여 비판할 적에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 학문 이전에 인간적인 신뢰가 우선한다. 출판 매체가 매우 열악한 그 시대에는 書가 중요한 발표 지면이었는바, 심통하는 문우에게 보내는 書라고 하여 ‘若曰性一則又將以爲自性而出者謂之道心 無性而自出者謂之人心 此亦理也 言不順則事不成’이라고 하며 비꼬며 우롱할뿐더러 이치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은 퇴계가 살아있어 그것을 보았다면 분명 대노하였을 것이고, 영남학파 역시 대대로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오래된 반목과 불화의 뿌리가 이 한 편의 書에서 시작한다.
주자를 모범으로 공부한 퇴계의 후학답게 영남학파들은 본연지성의 리에 중심으로 한 주리론에 집착하였으며, 주자의 틀을 벗어나길 원한 율곡의 후학답게 기호학파들은 본연지성의 리를 알맹이로 하되 그것의 동력인 기질지성의 기를 중심으로 한 주기론에 몰입함으로서 퇴계와 율곡 두 선현의 학설은 더욱 더 간격을 넓히게 되었다. 후세에 던져진 문제는 그 간격이 학문의 범위를 넘어서 이념성과 정치성을 갈수록 짙게 띈 것이다.
퇴계는 마흔 문턱에서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고 쉰 문턱을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한 노력형 학자이지만 율곡은 십대 시절부터 철학성이 강한 천재형 학자이다. 노력학자는 선현의 학설을 충실히 추종하면 그 경지에 이어서 오를 수 있으나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한계를 가지나, 천재학자는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나 자칫 추락하기 쉬운 경박성을 갖는다. 즉 천재가 갖기 쉬운 함정은 독단과 자만이다.
율곡이 성호원과 여러 書를 집중적으로 주고받은 때는 퇴계가 사망한 2년 뒤인 1572년으로 율곡의 나이 36세 때이다. 물론 퇴계 생시에 지극했던 율곡의 태도가 사후에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학설 면에서 보면 퇴계 생시에는 반론을 펴기에 조심스럽던 율곡의 태도가 사후에는 차츰 과격해진 면을 書에 표현한 文字를 통해 볼 수 있다. 물론 30대 중반 천재형 학자의 혈기방장한 시절이니 선현의 학설에 대해 순종하기보다는 비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비판을 하되 文字를 극히 가려 써야 한다. ‘此豈理也’와 같은 문자는 해당하는 학자로 하여금 자기 학문의 근본을 부정하는 말로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퇴계가 생시에 율곡의 이 書를 읽었다면, 분노보다는 기고봉과 주고받은 書에서 보듯 비판받은 학설에 대한 논변을 아마도 후학을 위하는 학문적 애정을 품고 차근차근 써 보냈을 것이다. 율곡 또한 10년 정도 더 최소한 예순까지만 살아 학문의 깊이를 완성하였더라면 분명히 ‘理發不可’를 단언하지 않고 이전의 書에서 사용한 몇 개의 文字들을 洗草하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후학들로 하여금 1572년부터 현재까지 440여 년 동안 ‘理發이냐 氣發이냐’ 쳇바퀴 도는 논쟁에 골몰하지 않고 성리학의 새로운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새로운 경지에서 새로운 역사가 건설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가도 문자는 남는 법, 모름지기 학문하는 자라면 생시에 쓰는 한 자 한 자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할 일이다.
2012년 3월 7일 說樂然齋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