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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을 중심으로 본 조선회화
<답사자료:火風鼎>
1. 들어가는 글
겸재 정선이 조선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그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다른 여타 인물에 비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근래에 이르러 이루어진 것으로 그전의 겸재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한국의 역사는 중국 변방의 역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여 한국적인 독자성을 되도록이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저변에 깔려있었으며 또 다른 면은 중국의 송원시대의 화풍을 기준으로 그 것에 가까운 안견풍의 그림은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그 기준에서 멀어진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나 풍속화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평가 절하되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한 화관(畵觀)이 근래까지 상당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근래 들어 겸재의 진경산수를 자주적이며 민족적인 한국화라고 지나치게 과대 포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겸재 정선을 기준으로 놓고 겸재 이전의 화풍과 겸재 이후의 화풍을 비교하여 조선후기 겸재의 진경산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2. 겸재의 생애
숙종 2년 1676년(1세) 겸재 생
숙종 25년 1699년(24세) 연안 송씨와 결혼
숙종 37년 1711년(36세)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 박태유(朴泰維)의 여정에 동행
숙종 38년 1712년 8월 (37세)
숙종 39년 1713년 (38세) 김찬집의 천거로 위수벼슬을 하게 됨
숙종 45년 1719년 (44세) 기해년화첩-사시풍경(四時風景)
경종 원년 1721년 (46세) 하양(河陽)현감 부임
영조 2년 1726년 (51세) 하양(河陽)현감 임기 마침
영조 4년 1728년 (53세) 사직송(社稷松), 송하문사(松下問師), 제작 인왕곡으로 이사
영조 5년 1729년 (54세) 의금부도사(금오요원록), 의금부계회도
영조 7년 1731년 (56세) 서교전의도
영조 8년 1732년 (57세)
영조 9년 1733년 (58세) 청하(淸河)현감 도임
영조 10년 1734년 (59세) 금강전도, 내연삼용추(內延三龍湫)
영조 12년 1736년 (61세) 회갑
영조 13년 1737년 (62세) 남한강 상류 사군(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 유람 사군첩
영조 14년 1738년 (63세)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절강추도도(浙江秋濤圖)그림
영조 15년 1739년 (64세) 청풍계(淸風溪), 옥동척강(玉洞陟崗), 육상묘도
영조 16년 1740년 (65세) 삼승정(三勝亭), 삼승조망(三勝眺望) 제작, 양천(陽川)현령 부임
영조 17년 1741년 (66년) 경교명승첩
영조 18년 1742년 (67세)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제작
영조 21년 1745년 (70세) 양천(陽川)현령 임기 마침
영조 22년 1746년 (71세) 계상정거도, 풍계유택도, 무봉산중도, 인곡정사도
영조 23년 1747년 (72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영조 25년 1749년 (74세) 사공표성시화첩(司空表聖詩畵帖)
영조 27년 1751년 (76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영조 28년 1752년 (77세) 우중귀려도
영조 30년 1754년 (79세) 사도시첨정 종4품)
영조 31년 1755년 (80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영조 32년 1756년 (81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
영조 33년 1757년 (82세) 청송당(聽松堂)
영조 35년 1759년 (84년) 졸 3월 24일 (묘 현재 도봉구 쌍문동)
3. 겸재 이전의 화풍
조선회화를 시대별로 구분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김원룡의 한국미술사에서는 임진왜란이전을 전기로 이후를 후기로 구분하고 있으며
조선회화가 중국화와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은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의 구분이 뚜렷하여 서로의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조선에서는 초기에는 북종화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숙종 때를 지나 영 정조 때에 조선 풍의 문인화와 풍속화가 형성되는데 중국과 달리 남종화법과 북종화법이 동시에 사용된다는 점이다. 남종화와 북종화의 구분은 명나라 때의 막시룡,
북종화는 이사훈을 시조로 송의 조간, 조백구, 조백숙을 이어 마원, 하규에 이르렀다. 강한 채색을 사용하여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부벽준이라는 강열한 준법을 주로 썼으며 주제가 대각선구도에서 한쪽 면으로 치우치는 포치가 주를 이루며 면과 면의 만남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으로 대비되며 대부분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후기 절파는 이러한 특징에서 부벽준이 더 커져 대부벽준이 되고 인물묘사가 동적이며 선이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남종화(문인화)와 북종화(절파)는 서로의 화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남종화가는 북종화풍을 천시하고 배타했다. 남종화풍은 청나라에 이르러 득세하며 조선에 유입되게 된다. 18~19세기 조선은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 까지 새로운 문화적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는데 기존의 북종화풍이 주를 이루던 조선의 회화에도 남종화풍이 유입되는데 조선에서는 중국과 달리 북종화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 남종화법을 끌어드린 점은 아주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15~16세기는 안견(安堅)풍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안견의 화풍은 곽희파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소화한 것으로 그의 유일한 진전으로 알려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있으며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절파풍의 전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상좌(李上佐)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마원화풍의 경향이 강하다. 이상좌의 자손들은 조선화가의 일맥을 만드는데 이숭효, 이흥효는 그의 아들이며 이정(李楨)은 그의 손자가 된다.
17세기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정과 이징,
이징(李澄 1581~1645)은 16세기 절파화풍의 대가인
개인적으로 17세기의 작가 중에서
17세기말에 이르러 조선화풍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윤두서이다. 윤두서(1668~1715)는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그의 자화상은 미술사적으로 최초의 자화상이라는 외적인 사실로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은 인식에 대한 전환을 암시하는 것으로 관념에 머물렀던 기존 화풍에 대한 반란이자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윤두서는 곳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으며 기존의 화풍에서 벗어나려 애쓴 흔적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아직 관념화풍의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속화에 대한 시도는
4. 겸재의 화풍
겸재 이전에도 실경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고려의 이녕은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송나라 휘종의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사신에게 금강산이나 삼각산 등을 그려준 일이 있다는 기록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 초기부터 조일전쟁(朝日戰爭) 이전의 계회도(契會圖)나 기로도(耆老圖)등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수는 실경으로 보여야 하는데 실제로 실경답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인조4년 청음
겸재는 기존의 전래되던 절파풍의 화법과 새로운 남종화법을 활발히 받아 들였으며 그것에 머물지 않고 더 나가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만드는데 이러한 겸재의 화풍은 기존의 화풍과는 큰 차별을 두게 된다. 겸재가 화본(畵本)의 형식에서 벗어나 실경을 그림의 소재로 택하여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게 된 것은 18~19세기의 시대적 상황도 중요하지만 겸재의 그림이 뒤로 갈수록 더욱 겸재다워지는 것으로 볼 때 장수한 그의 삶도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겸재의 화풍은 크게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초기는 30대에서 50대 전반까지로 겸재의 화풍을 형성하는 시기로 하향현감을 지냈으며 대부분을 위수와 한성부 주부로 서울에서 생활을 했다. 50대 후반에서 60대 까지는 청하현감, 양천현령 등을 역임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한 시기로 볼 수 있다. 70대에서 80대에는 사도시첨정, 첨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의 예우를 받았으며 진경산수의 완숙기라 할 수 있다.
인왕산과 백악산 등의 바위를 표현하기 위해 넓은 붓으로 여러 번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사용했으며 금강산의 개골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예리한 각필(角筆)의 수직준(垂直皴), 양필을 사용하여 뾰족하게 세워 어지러이 그리는 난시준(亂柴皴)법 등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1734년 겨울에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에서 완성된다. 내금강의 전경을 주역의 음양적 사상을 근거로 하여 원형구도의 부감형식으로 판을 짜고 수직준법과 미점준의 절묘한 조화로 음양의 역동적 기운을 만들었다.
겸재의 60대의 진경산수(청풍계도(淸風溪圖 1739), 정자연도(亭子淵圖1738), 육상묘도(毓祥廟圖1739), 서원소정도(西園小亭圖1739),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1740~1),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1742)들은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피마준법과 미점, 태점 준법을 우리의 실경에 맞게 완전히 소화하여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절파풍의 대각선구도의 화면 구성과 부벽준을 변형시킨 적묵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편필과 직필을 적절히 사용한 소나무묘법, 양필법의 능란한 구사로 겸재적인 그림을 완성한다.
70~80년대의 겸재의 화풍은 완숙하고 세련되어가지만 50~60대 보다 오히려 더욱 힘차고 남성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때의 대표작으로는 1746년에 그린 퇴우이선생첩(退尤李先生帖)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무봉산중도(舞鳳山中圖), 풍계유택도(楓溪遺宅圖), 인곡정사도(仁谷精舍圖)와 1751년에 그린 인왕재색도(仁王재色圖)가 있다. 이때의 그림들은 번잡함이 사라지고 능숙하며 자연스럽고 담묵의 구사가 맑고 부드러워졌으나 화면의 구성은 더 광활해졌고 중량감은 전보다 더 강해진 듯하다.
5. 겸재 이후의 화풍
이후 겸재의 영향을 받아 실경을 그리는 많은 화가가 생겨났으며 겸재의 화풍을 이어받아 그린 화가들을 정선파라 하는데 겸재의 특징적인 화풍을 본받는 것으로 수직준법과 습기가 많은 파마준법, 듬성듬성한 태점, 편필의 소나무묘법, 대부벽준의 변형인 암준법, 부감형식의 구도 등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정선파 인물들로는 강희언, 김윤겸, 정황, 최북,
진경산수는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시기에 형성되어 겸재의 천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19세기전반부터 급속하게 쇠락한다. 진경산수의 쇠락을 표암
“정선은 평생토록 익힌 능숙한 필법으로 마음먹은 바를 휘려하고 그려냈는데 바위의 형태와 봉우리를 막론하고 거친 열마(裂麻)준법으로 일관하여 난사(亂寫)하였다. 그래서 사진(寫眞)의 부족함이 드러난다. 심사정의 것은 정선보다 나은 편이나 역시 폭넓고 고랑(高朗)한 시각이 결핍되어있다”
이것은 표암선생의 사경적 의미가 겸재가 의도한 실경적 의미와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시대적 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겸재 이후 산수는
19세기로 갈수록 겸재의 진경산수나 단원의 풍속화도 쇠퇴하게 되는데 청나라의 남종화풍이 본격적으로 유행 토착된다.
이것은 그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6. 마무리
조선후기 유학의 실학(實學)적 분위기를 바탕에 두고 그의 그림은 그 이전에 지속되었던 화본(畵本)에 의한 관념산수의 틀에서 벗어나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우리의 산천을 마음으로 그린 가장 한국적인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실경을 실경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의적 해석에 의해 재구성하여 진경(眞景)으로 그려냈다.
실경(實景)과 진경(眞景)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 인왕은 겸재가 바라보던 인왕과 다른 것일까?
나는 지금 인왕을 보면서 관념의 관념에서 벗어나
실경을 관념화한 겸재의 시선을 따라간다.
<참고서적>
우리나라의 옛그림 /
화인열전/
조선후기회화의 사실정신/
한국화화사/안휘준/일지사/1996
도록(회화 사십일 대겸재)/한국민족미술연구소/2004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