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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팔경은
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 안동에도 있다.
선어모범[仙漁暮帆], 귀래조운[歸來朝雲], 서악만종[西岳晩鐘], 임청고탑[臨淸古塔], 학가귀운[鶴駕歸雲], 연미세우[燕尾細雨], 도산명월[陶山明月], 하회청풍[河回淸風] 등 여덟 군데 명승지를 일컬음이다.
안동팔경은 고산서원[高山書院 : 안동시 南後面 소재. 1789년(정조 13)에 이상정(李象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방 사림(士林)에서 건립.]에 소장된 [와혈(窩穴)](이완규 지음)이라는 책에 安東八景歌라는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0-1781) 선생이 지었다고도 한다.
안동팔경 노래(시)
仙漁臺下銀魚肥 선어대 아래에 은어들은 살쪘고
歸來亭上白雲遊 귀래정 위에는 흰구름 노니는데
西岳寺樓前日樂 서악사 누 위에서 즐거웠던 지난날
臨淸閣軒古時愁 임청각 마루에서 옛시름 겨워하네
鶴駕山影照三郡 학가산 그늘은 세 고을에 드리우고
燕尾園名傳萬秋 연미원 이름은 만세에 이어지니
西厓祠前松竹綠 하회마을 앞에는 송죽이 푸르고
退溪門下洛江流 도산서원 아래는 낙동강이 흐르누나
[제1경 선어대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 반변천가의 선어대에서 무당 주도로 지내는 용왕제.
[개설]선어대 용왕제는 안동시 안흥동 베전골목에 사는 무속인 김순애(여, 85세)의 주도하에 지내는 주민 공동의 제사이다. 이를 ‘선어대용제’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과 연중 4~5회 정도 크고 작은 규모의 용왕제를 선어대에서 지낸다. 이러한 제의 전통은 약 50여 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영가지(永嘉誌)』에는, “선어연은 안동부에서 동쪽 10리 소을마촌 서쪽 송항(松項) 아래에 있는데 백장심연(百丈深淵)으로 여기는 교룡(蛟龍)의 굴택(屈宅)이 된다. 그 위에는 용단(龍壇)이 있어 날이 가물 때에 여기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영험이 있는 곳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절차]선어대 용왕제는 산신제→ 용왕제→ 방생의례→ 산신제→ 길대장군 위하기→ 거리풀음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현황]선어대 위쪽 산기슭에는 ‘송제비’라는 비가 세워져 있으며, 용단이 있어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또한 「용이 싸움을 한 선어대와 다도령이 개척한 마뜰」이라는 선어대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어 신령한 용에게 기원함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안동인들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제2경 귀래정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개설]귀래정은 고성이씨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인 낙포(洛蒲) 이굉(李汯, 1440~1516)의 정자이다. 이굉은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상주목사·개성유수 등을 지내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경상북도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임청각(臨淸閣)·군자정·하회(河回)의 옥연정(玉淵精)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변천]1513년(중종 8) 벼슬에서 물러난 이굉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낙향하여 부성(府城)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되는 경승지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뜻을 취해 당호를 ‘귀래정’이라 하였다.
[형태]귀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丁’자형 건물로 팔작지붕집이다. 4칸통 대청과 온돌방 3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호에는 창틀 가운데 세운 작은 기둥인 가운데설주가 남아 있는데, 이런 창호 형식은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고식(古式)으로 귀래정의 연륜을 읽게 한다.
건물의 구조 양식은 막돌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방형(方形)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대청 주위에만 원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에는 모두 네모기둥을 세웠다. 대청 상부에는 큰 대들보와 작은 종보를 이중으로 걸치고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판재 대공을 세워 맨 위의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현황]귀래정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고성이씨 문중이다. 지금은 귀래정 앞쪽의 도로 확장으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뒤쪽으로 조금 물러앉게 되어 다소 옛 풍치를 잃었다.
귀래정에는 이굉을 비롯해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송재(松齋) 이우(李堣)·택당(澤堂) 이식(李植)·백사(白沙) 윤훤(尹暄) 등 3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제3경 서악사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
[개설]창건 당시 절 이름을 운대사(雲臺寺)라 하였는데, 후에 안동부 사악(四嶽)의 하나인 서악(西嶽)에 위치한다 하여 서악사(西岳寺)로 개칭하였다. 서악사를 창건한 도선(道詵, 827~898)은 통일신라의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다.
혜철대사에게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을 배워 크게 깨달았으며, 참선 삼매의 불도를 닦았다. 도선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건립경위 및 변천]서악사는 통일신라 후기 경문왕(景文王, ?~875) 때 도선국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사기(寺記)인 『서악사기(西嶽寺記)』와 「태화산운대사상량기문(太華山雲臺寺上樑記文)」에 의하면, 1744년(영조 20) 태화산 중턱에 있던 서악사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1748년(영조 24) 대규모의 중창 불사가 있었다고 한다.
[활동사항]서악사는 법공양을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다.
[현황]서악사는 극락전·산령각·응향각·천불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서악사의 본전이다.
내부에는 주불인 아미타불과 협시불인 관음보살·대세지보살 등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은 1749년(영조 25) 첫 개금불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도 세 차례의 개금불사가 있었다.
산령각은 극락전의 오른쪽 뒤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산신상과 약사여래상·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향각은 극락전 왼쪽에 자리하며, 2009년 현재 종무소로 이용하고 있다.
서악사 옆, 동북쪽 능선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된 관왕묘(關王廟)가 있다.
관왕묘는 중국 삼국시대 명장 관우(關羽, ?~219)를 배향하는 사당으로, 1598년(선조 31) 명나라 장수 쉬후첸[薛虎臣]이 지은 것이다.
본래 안동시 성내동 목성산(木城山)에 있는 안동향교 맞은편에 있었는데, 향교의 문묘(文廟)와 마주 보고 있는 것을 꺼려 1606년(선조 39)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제4경 임청각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조선 중기 전통 가옥과 누정.
[개설]안동 임청각은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건축한 조선 중기의 종택 건물과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李洺)이 중종 때 세운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해 임시 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이명의 17대 주손(冑孫)이다.
[형태]군자정은 목조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을 겪은 오래된 건물이다.
군자정 대청에는 이현보(李賢輔) 등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으며, 안동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이황(李滉)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군자정은 ‘丁’자형의 누각으로 된 별당 건축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대청이 남향으로 앉아 있고, 그 왼쪽에 온돌방 4칸이 연접하여 ‘ㅏ’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온돌방의 한 부분은 각주를 세워 굴도리를 얹은 간단한 구조로,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청은 원주를 사용하였고, 그 위에 이익공 계통의 공포(栱包)와 그 사이에 화반을 1개씩 배치하였으며, 겹처마로 만들었다.
공포는 건물의 외면에서는 쇠서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간소하게 초공으로 꾸며져 있다.
벽은 회벽을 치고 대청 주위에는 판문을,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아놓았다. 처음에는 대청 전체에 단청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내부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쪽에 위치한 본채는 양지 바른 산기슭에 자리 잡았는데, 총 50칸이 넘는다.
앞면 아래서부터 동서 길이로 12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뒷면에 다시 같은 길이로 두 채씩 병행시켰는데, 제일 뒤쪽 건물의 중앙에 대청을 두었으며, 그 앞면 좌우에는 앞뒤채를 연결하는 방이 있어 안마당이 세 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으로서 안채와 대청은 굴도리집이고 나머지는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집이다. 건축 양식상으로는 대청 종량 위의 포대공이 눈에 띈다.
[현황]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소유자는 이창수이고, 관리자는 이상동이다.
현재 고택 체험의 일환으로 일반인들이 전통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으며 전통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 중에 있다.
[제5경 학가산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서후면 자품리와 예천군 보문면 경계에 있는 산.
[명칭유래]학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 같다고 하여 학가산(鶴駕山)이라 하였는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주에서는 정상이 평평하게 보여 선비봉, 안동에서는 울퉁불퉁하게 보여 문둥이봉, 예천에서는 그 모습이 수려한 인물과 같다고 하여 인물봉으로 불린다.
산 아래 자품리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마을에서 재주가 많고 인품이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시기하여, 재품리(才品里)였던 마을 이름을 ‘놈 자(者)’를 써서 자품리(者品里)로 격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아름다운 학가산의 이름도 원래는 학가산(鶴駕山)이 아니라 학가산(鶴佳山)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자연환경]높이는 882m로 안동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동쪽으로 일월산(日月山), 서남쪽으로 팔공산(八空山), 멀리 북쪽으로 소백산맥이 아련히 보이고, 영남의 북부 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부근은 동서로 길쭉하고, 높이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봉우리 4~5개가 500m에 걸쳐 솟아 있다. 서쪽 끝자락은 안동과 예천의 경계이다.
지질은 석영장석편마암과 흑운모화강암으로 비교적 경사가 급하고 지세가 험준하다.
정상부는 돔(dome) 모양의 화강암 암반이 노출된 전형적인 화강암 산세를 띤다.
돔 모양의 화강암 산지 뒤쪽에는 풍화되지 않은 편마암 산지가 병풍처럼 흑운모화강암 산지를 에워싸며 솟아 있고, 화강암 산지 앞쪽은 저산성 구릉지와 산록완사면 지형이다.
산마루 부근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참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봄이면 산중턱이 매화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며, 은은한 향기를 뿜는 하얀 함박꽃나무 군락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학가산은 골짜기가 깊지 않고 사면이 가팔라 큰 짐승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가끔 멧돼지나 노루, 꿩, 토끼들만 나타날 뿐이다.
[현황]안동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으로 안동·영주·예천이 맞닿는 지점에 있다. 학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세 코스가 개설되어 있다.
첫째 코스는 광흥사-애련암-국사봉으로 이어지는 5㎞ 구간으로 2시간 30분 걸린다.
둘째 코스는 신전리-중계탑-국사봉에 이르는 7㎞ 구간으로 3시간 걸린다.
셋째 코스는 자품리 천주마을 애련암-국사봉-우래휴양림 고갯길 정상-산성리 느리티마을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산마루에는 군데군데 허물어진 석성(石城)의 흔적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화재로 많이 불타 없어져 건물 몇 채만 남아 있는 광흥사(廣興寺)가 있다.
학가산 남쪽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쌓았다는 학가산성이 남아 있는데, 성 위에서 내려다보면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제6경 연미사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서 연미사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1981년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서 주민 강대각(남, 62)이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81년 일조각에서 출간한 『한국구비전설의 연구』에 수록하였다.
이후 1983년 한국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설화의 유형적 연구』와 1984년 안동군에서 출간한 『내고향 전통가꾸기』, 그리고 1991년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과 1999년 안동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동시사』에 재수록하였다.
[내용]예전에 제비원에서 원이라는 처자가 음식 장사를 하였다. 돈 받고 음식을 내주는 장사를 하였지만, 그래도 돈 없는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이 오면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밥을 내주었다. 장사를 하여도 영리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착하여 자선 사업을 많이 한 것이었다.
한편 이송천에 삼송천(三松川) 김씨 성을 쓰는 큰 부자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그만 젊었을 때 비명에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아들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갔는데,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너는 아직 들어올 때도 안 됐는데 왜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내가 죽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잘못 들어왔으니 그만 나가거라!” 하였다.
그리고는 또 하는 말이 “가긴 가는데 자선 사업을 좀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이송천 부자 아들이 “자선 사업을 하라니요? 빈손으로 왔는데 어떻게 자선 사업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여기에 원이가 저장한 창고가 저기 어디 가면 있다.
금은보화가 들어 있는 창고가 있으니 그 창고의 반만 가지고 가서 사람을 도우고 가라.” 염라대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보물의 반을 꺼내서 이송천 부자 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갚을 때는 어떻게 갚는가 하면, 네 살림을 원이한테 반만 주면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송천 부자 아들은 한 사나흘 뒤에 깨어났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부잣집에서는 경사가 났다. 이송천 부자 아들은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래서 재산의 반을 들고 원이를 찾아갔다. “내가 저승에 가 보니 자네 창고가 있었네.
그런데 내가 자네 재산을 좀 쓰고 왔단 말일세. 염라대왕이 내 살림의 반을 원이 처자에게 주어 빚을 갚으라고 말하였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내 재산의 반을 갖고 왔네.” 이렇게 하여 원이는 이송천 부자 아들의 재산을 받게 되었다.
원이는 재산을 받아서 지금의 제비원 자리에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여 법당을 하나 세웠는데, 그 법당이 바로 연미사라고 한다.
[제7경 하회마을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마을.
[개설]안동 하회마을은 조선 전기 이후의 전통적인 가옥군, 영남의 명기(名基)라는 풍수적 경관, 오랜 역사적 배경, 별신굿 같은 민간전승 등이 잘 보존된 민속마을이다.
풍산류씨 동성마을이며,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쪽과 남쪽, 서쪽 세 방향으로 감싸 도는 빼어난 터이다.
지형은 풍수학적으로 태극형(太極形)·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명칭유래]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하여 하회(河回)라는 이름이 붙었다.
[형성 및 변천]안동 하회마을에는 대체로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등 유력한 씨족이 살아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635년(인조 13)의 기록에는 류씨(柳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류씨의 입향조는 8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 같은 동족 기반은 중흥조 류운룡(柳雲龍)과 류성룡(柳成龍)에 의해 이루어졌다.
류운룡은 14세손이며 류성룡은 지손(支孫)인데,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謙菴派)와 서애파(西厓派)로 부르기도 한다.
[자연환경]안동 하회마을을 감싸고 낙동강의 상류인 화천(花川)이 흐르며, 그 둘레에는 넓은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老松林)이 들어서 있다.
강류의 마을 쪽이 백사장인데 반해, 건너편은 층암절벽으로 여러 정대(亭臺)가 자리 잡고 있어 경승지이다.
과거 강 건너 인근 마을로 통하는 교통수단은 나룻배였으며, 음력 7월 보름에는 부용대 밑에서 시회(詩會)가 열렸다.
[현황]2009년 6월 현재 면적은 5.28㎢이며, 총 121가구에 22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기와집 162동, 초가집 211동, 기타 85동 등 모두 458동의 건물이 있다.
풍산(豊山)과 연결된 큰길이 마을 중심부를 동서로 지나가는데, 이 길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문화 유적으로는 안동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충효당(보물 제414호), 하회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하회 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 하회 빈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 하회 풍산류씨 작천댁(중요민속자료 제87호), 하회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하회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 하회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하회 주일재(중요민속자료 제91호) 등이 있다.
이외에 소규모의 토담집과 봉당집은 진흙만으로 벽체를 쌓아 올린 민가 축조 기법을 보여 준다.
평면 구조는 一자형집, ㅁ자형집, 튼ㅁ자형집 등 다양한 형식을 보이는데,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반상(班常)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안동 하회마을에는 오랜 민간전승 놀이인 선유줄불놀이와 하회별신굿이 행해지고 있다.
하회별신굿에 쓰였던 하회탈 및 병산탈들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제8경 도산서원 소개]
[정의]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서원.
[개설]도산서원은 선비들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을 함께 향사하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교육 시설이다.
이황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을 운영하고, 도산서당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이황은 중종(中宗, 1488~1544), 명종(明宗, 1534~1567), 선조(宣祖, 1552~1608)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조목은 이황을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모시면서 공부한 제자이다.
도산서원은 1561년(명종 16) 이황이 건립한 도산서당, 농운정사와 이황이 타계한 후 문인들의 발의로 건립된 서원을 통칭한다.
[위치]도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있다. 낙동강에서 곡구암(谷口巖)을 끼고 들어서면 영지산(靈芝山)을 배산(背山)으로 동쪽은 천연대(天淵臺)이고, 서쪽은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이다.
도산서원은 아늑한 골짜기 안에서 안동호(安東湖)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변천]1561년(명종 16) 이황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건립하였다.
이황이 죽자 1574년(선조 7)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결의하여 보물 제211호인 상덕사(尙德祠)란 사당을 짓고 보물 제210호인 전교당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지어 1575년 도산서원을 완공하였다. 같은 해 선조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형태]도산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동측 조금 높은 터에 담장으로 둘러싼 도산서당이 있고, 서측으로는 농운정사와 하고직사(下庫直舍)가 있다.
도산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서당과 정사 사이로 난 통로를 따라 오르면 문인들이 세운 도산서원 체제가 시작된다.
먼저 정문인 진도문(進道門)이 있고 좌우에는 동서 광명실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는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이 있으며, 전교당의 좌측과 우측에는 서재인 박약재(博約齋)와 동재인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전교당 마당에서 동측으로 또 다른 담장 속에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서측으로는 주사(廚舍)인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다.
전교당과 장판각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높은 터 위에 상덕사가 있으며, 그 좌측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현황]도산서원은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이황의 유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인 도산서원 향사례(享祀禮)가 매년 봄가을 서원 내 상덕사에서 치러진다.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추기향례(秋期享禮)는 음력 8월 중정일에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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