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샤오셴의 <해상화> (2)
한방칭의 『해상화열전』
장아이링이 두 번이나 번역한 『해상화열전』은 21세기 들어 문학사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원로학자 판보췬(范伯群) 교수는 『중국현대통속문학사』에서 『해상화열전』을 2천년이 넘는 고대문학 열차에서 현대문학 열차로 갈아타는 ‘환승역’으로 명명한 바 있다. 곧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될 이 책에서 판 교수는 여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현대 대도시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현대통속소설이라는 점. 둘째, 상하이 상인을 주인공 또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로 삼은 점. 셋째 시골 사람이 도시에 진입하는 선구적 시점을 택해 상하이라는 신흥 이민도시의 거대한 흡인력과 상하이에 거주하는 다양한 이민자들의 초기 생활을 반영한 점. 넷째 오어(吳語) 문학의 최초 걸작이라는 점. 다섯째 ‘교차은현(交叉隱現)’ 플롯을 사용하는 등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 여섯째, 작가 한방칭은 문학 간행물을 발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 판 교수 이전에도 『해상화열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인물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문학 진영의 맹장인 루쉰(魯迅), 류반눙(劉半農), 후스(胡適)와 1930년대 장아이링(張愛玲)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장아이링의 평가를 보자. 장아이링은 해상화열전의 주제를 ‘에덴동산에 열린 금단의 열매’라고 말했다. 그녀의 해설을 들어보자. “맹목적으로 결혼한 부부도 결혼 후에 애정이 생겨나기는 하지만, 먼저 성(性)을 먼저 경험하고 나중에 사랑이 생기기 때문에 그들 간에는 긴장과 염려, 동경과 신비감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연애가 아니었다.”(역자 후기) 이는 중국 전통 혼인·연애 제도에 대한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남녀가 엄격히 구분된 사회에서 미성년자들은 성애와 연애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다 “일단 성년이 되면 기루라는 더럽고 복잡한 구석진 곳에서 기회를 갖게 되곤 한다.” 일찍 결혼한 남자는 성에 대해 이미 신비감을 상실하고, 기루에서 ‘기생’이 주는 ‘연애’의 감정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의 측면에 대한 분석이다.
그러면 이들 남성의 파트너인 당시 기생은 어떠했는가? 장아이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매춘부는 정이 없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말로, 그녀들의 표면적 호의는 직업 활동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해상화를 보면, 적어도 당시 고급 기루에서 기녀의 첫 경험이 그리 빠르지 않았고 받는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인의 성심리가 정상이라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반응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상대방이 참을성이 있다면 왕래가 잦아져 자연히 연애 감정이 생겨날 것이다.
장아이링의 해석에 따르면, 상하이 조계의 기루는 봉건 중국에서 자본주의 근현대로 전환하는 기간 자유연애를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기루를 찾는 남성들은 봉건 혼인제도로 말미암아 제대로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정혼했고 혼인 후 육체적 성에는 눈을 떴지만 연애 감정은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여성도 돈을 벌기 위해 부득이 기루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단골손님 중심 시스템은 기녀들에게 일정 정도 선택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손님과 기생 사이에 애인 관계로 발전하거나 심지어 의사(擬似)가정 생활을 꾸린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근현대 중국에서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은 5․4신문화운동 이후 입센 열풍이 불기 시작한 1920년대인 만큼, 장아이링이 『해상화열전』을 “백 년 전 인생의 중요한 공백을 메웠다”고 평한 것은 과도기 혼인 형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텍스트로 평가한 것이었다.
영화에서 중심인물로 다뤘던 왕롄성과 선샤오훙의 관계는 의사가정의 좋은 예다. 왕롄성이 다른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때 선샤오훙의 질투는 마치 정실부인의 그것과 같았고, 반대로 선샤오훙이 경극 배우와 바람이 났을 때 왕롄성의 반응도 격렬했다. 또한 저우솽위는 주수런과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지만 주수런이 집안의 압력으로 다른 여성과 약혼하자, 저우솽위는 아편을 삼키고 동반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기생들에게는 금전적 고려가 전혀 없지 않았고 상대 남성들도 순진무구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오로지 계산속으로 고객을 대한 기생도 많았음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개항 이후 상하이 조계지, 특히 쓰마루(四馬路)에 집중되어 있던 상하이 기생은 한편으로는 봉건 잔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연애라는 근대적 가치를 구현한 직업여성이라 할 수 있다. 기생의 삶은 두 영역과 공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남성 중심의 공공영역과 전통적인 여성의 사적영역, 개방적이고 근대적인 공간과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공간이 그것이다. 양자 사이에서 그녀들은 서양의 생활방식과 전통적인 가치의 충돌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신 유행사조와 근대적 문화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9세기와 20세기가 교차하는 시점에서 고급 기생들은 ‘모던’을 앞서 이해하고 선도하는 새로운 문명의 중개자로 각광받았다. 이들은 5․4시기 신여성의 등장과 뒤이은 여배우들의 활약 이전 짧은 시간이나마 상하이 소비문화의 주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리수팡의 치정(癡情), 선샤오훙의 자기 뜻 존중, 자오얼바오의 순정 등을 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개항 이후 상하이의 표상을 ‘이민’과 ‘조계’로 설정하고 그 주요한 특징을 ‘해납백천(海納百川)’과 ‘이신시서(以身試西)’로 파악해온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목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녀들의 ‘경계 넘기’는 모던 상하이의 혼종적 징후(hybrid symptom)를 구현했던 것이다.
근현대 혼종적․개방적 징후가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소비다. 당시 기녀들은 단순하게 술을 따르고 몸을 팔아 돈을 챙긴 것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의사 가정을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이 자신과 딸린 식구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지출하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기생들의 씀씀이는 사치스러웠다. 그녀들은 자신의 가치를 소비행위에서 구현했다. 그녀들은 의류와 장신구에서 유행의 첨단을 달렸을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의 상징인 연극 관람과 서양문화의 대표인 마차 타기와 사진 찍기 등에 열중함으로써, 상업도시 상하이의 소비 주체로 우뚝 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