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현 수 박사
평택대학교 부총장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주 되심의 영성
성경은 사람이 갖는 이러한 이중적 현상을 하나님 형상의 관점에서 나타낸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창 1:26-27). 하나님 형상은 본래 고결한 것이었다(창세기1:31). 이것은 동물을 각기 종류대로 (21, 24, 25) 지은 것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람만이 갖는 독특성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를 지은 다음에도 여전히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창세기 5:1-3에는 ‘형상’이란 말이 없고 ‘모양’이라는 말만 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의 뜻과 거리가 멀다. 이 둘은 같은 뜻이며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모양이란 말은 타락 사건 후에 나오지만 여전히 아담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아담이 여전히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후손 셋 역시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창세기 9장 6절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하지만 어떤 이는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었고, 타락 후 잃어버렸지만 미래에 회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가치 곧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었거나 미래에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바로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 크나큰 죄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다. 시편 8:6: 5절의 ‘엘로힘’이란 말을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옳다. 천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받지 않았고, 사람은 천사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창세기 첫 장의 말씀을 되풀이 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최고의 피조물이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의 발아래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타락한 후에도 이러한 형상을 사람은 가지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야고보서 3장 9절의 ‘남을 저주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가 하나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를 저주하면 그를 지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남’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죄의 결과들이 그것을 나타내준다. 가령,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피한다.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신학의 역사에서 하나님 형상은 대략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 왔다. 첫째, 이성의 능력이다. 사람이 지닌 합리성은 이 세상을 지으신 신적 로고스에 참여하거나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창조자를 섬기고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창조자와 그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성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사람의 성품을 이지적 차원에서만 보는 위험이 있다. 사람의 본질이 우선적으로 추상적 추론의 과정에 있다고 보면, 이것과 상응하는 감성적 및 신체적 차원이 무시되게 된다.
둘째, 땅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러한 이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위계질서에 따라 있다는 세계관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영혼은 몸을 통제하며, 남자는 여자를 주관하고, 사람은 다른 피조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자연을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된다. 인종주의와 식민주의는 이러한 사고의 한 형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난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