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재
민족의 영웅 박정희 -- 친일파가 아니라 지략의 애국자다 (4)
"항일 = 독립운동"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세력은 독립운동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 그들은 그냥 항일 세력일 뿐이며 결국은 일제와 같은 민족말살 세력이므로.
-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은 여기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 당시의 항일 운동은 현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에도 맞게 해석해야 한다.
- 국제 정글에서 민족보다는 국가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이전 조선의 항일 세력들 중에서 광복군이 아닌 공산주의 계열의 세력들은 만주국군이나 일본군 경력의 조선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대답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든 일체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당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세력은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줘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그래야 박정희와 5.16 등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박정희가 만주국군 부대에 있을 때 그 주변에 출몰하거나 맞닥뜨린(?) 항일 세력들이 있었다 하고 이를 빌미삼아 그 동안 반역의 무리들이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해 왔다. 그런데 그 항일 세력들은 주로 공산 계열이었고 이제 이 글을 계기로 해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세력은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줘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반역의 무리들의 주장의 중요한 근거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하나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많은 우익 인사들이 이러한 이정표를 잘 활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세력과 인물들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1. 공산주의는 결국 민족말살 세력이다.
공산주의 세력은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항일운동을 한 것이지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그리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 개념은 궁극적으로 탄압하고 말살해야 할 대상이지 보호와 육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동안의 공산주의 역사와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에에 민족이란 공산주의에 역행하는 분파주의요 종파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런 공산주의자들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입에 담을 때에는 어디까지나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진성 민족주의자들을 속이기 위한 위장용인 것이며 이를 증명해 주는 사례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례 1 -- 우선 무엇보다 오늘날 북괴의 실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일성을 두목으로 한 북괴 집단이 그 동안 해 온 짓들은 민족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민족을 악용하고 필요하면 탄압하는 짓거리였다는 게 명백한 사실이다.
북괴 집단의 최대 관심사는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와 그를 통한 자신들의 특권 유지, 그리고 남한을 적화통일하는 것이니, 그런 적화통일이란 바로 공산 특권 계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 동안 북한의 지배 계급들이 누려 온 엄청난 특권과 호사에 대해서는 많은 탈북자들의 증언과 기타 보도로 이미 알려져 있다.
북한의 지배 계급들인 북괴는 절대로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례 2 -- 1945년 일제 패망 직후 박정희가 편입된 광복군 부대에 침투한 연안파(공산주의자들)의 모함으로 해당 부대원들이 감금된 사건도 있다. 아래는 관련 글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1945년 12월 10일 오전 11시 경, 광복군 평진대대는 야외훈련중 무장한 중국군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원 체포되고 북신교(北新橋)의 막사까지 연행되어, 부대원들은 모두 해산되고 간부들은 영창에 감금당합니다. 몇 시간 뒤 모두 풀려났지만 부대내에 침투한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계)의 모함의 결과였음이 판명됩니다. 동족간의 이념투쟁은 구걸의 삶을 이어가던 남의 나라 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보기였습니다. 얼마 뒤 박정희를 '중대장동무'라고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는 연안계 부대원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있게 됩니다. 박정희가 좌익사상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한머루)
(주: 이 사실로 볼 때 박정희가 나중에 국군내 남로당 조직에 가입하게 된 건 그가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해방 정국에서 발생한 대구 폭동시 그의 형 박상희가 경찰에 의해 죽게 된 데 대한 일시적인 분노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게 된다. 광복군 평진대대 시절 공산주의자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박정희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례 3 --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김좌진 장군이 1930년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사실을 모두 알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각 독립운동 단체와 부대에 침투하여 얼마나 많은 분란을 일으키고 파괴 공작을 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사례 4 -- 간접적인 근거이지만 1921년에 일어났던 자유시 사변은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운동 세력들은 조선독립군으로서의 자격이 없으며 독립운동가들이 공산 계열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되면 공멸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사건이며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줘서는 안 됨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다. 자유시 사변은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 사변'으로도 불리우며 공산 계열의 인사들에 엮여 발생한 사건이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 연해주 지역 조선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궤멸되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평가된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전사자의 숫자는 전하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다." (두산백과에서)
보다시피 자유시 사변으로 인해 조선인 항일무장단체들(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인 건 아니었다)이 전멸해 버렸고 이 사건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으로서 공산주의자들 간의 싸움에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까지 희생된 어이없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결국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범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당시 항일 투쟁에 나선 조선인일지라도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면 독립군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단순한 항일 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의 모든 항일이 독립운동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니 우리는 독립운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 항일과 그렇지 않은 항일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일제 때 조선의 공산 계열 항일운동가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와 소련을 이용했다는 말을 하지만 설사 그 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공산주의 집단에 몸을 담아 활동한 이상 그들의 행위는 독립운동이라고 인정해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공산주의는 외세의 침략보다 더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 동안의 세계 공산주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고 그렇게 위험한 이유는 바로 공산주의 이론 자체가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 막가파 식 깡패 이론이어서 그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백성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뒤따르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사리사욕에 치우친 깡패같은 지도자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탈린과 모택동이다.
소련의 스탈린이 권력 유지를 위해 또는 잘못된 정책으로 직간접으로 죽인 사람들 수는 1800만명 정도이고 중국의 모택동이가 마찬가지 이유로 직간접으로 죽인 사람들의 수는 3000만명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공산주의의 해악은 엄청난 것이며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집단은 그 무엇보다 악독한 도적 떼인 것이다.
이로 보건대 과거 일제 침략의 시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한다는 식의 말은 조국을 한 도적에게서 더 악독한 다른 도적(공산주의)에게 넘긴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니, 따라서 한국의 경우 일제 때 공산 계열 항일운동가들은 절대로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원래 의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냥 공산주의에 부역하는 항일운동을 했을 뿐인 것이며 그 것은 인류와 민족의 적인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한 이적 행위다.
우리는 오로지 반공주의를 겸한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들만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줘야 하는 냉철함이 필요한 것이다. 독립운동사를 감상적으로 다루고 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우리는 당시 팔로군이나 소련군 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항일 행위를 했다고 해도 그들을 독립군으로 인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항일 행위가 다 독립운동인 건 아닌 것이다.
▶ 2. 공산주의는 인류 공동의 적이다.
이는 제 1항 취지의 연장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는 당시 일제의 적이기도 했지만 조선인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인류의 적이기도 했으며 적으로 여겨야 했었다는 건 오늘날 북한의 현실과 구소련, 중공 등 공산 치하에서 벌어진 비극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일제 때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소속되어 중공과 소련 공산당을 친 행위 자체는 결과적으로 난세 상황에서 적(일본군)과 전략적인 합작을 하여 또 다른 적을 친 셈이 되므로 별 하자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일본군 소속 조선인들이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 계열의 광복군과 그 후원 세력인 중국 장개석 군대를 친 경우만 문제가 되는데 이는 이미 말한 대로 당시의 광복군 지도부들이 그 조선인들을 광복군에 받아들인 것으로 인해 이미 사면되었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전 글 참고)
▶ 3. 적의 적이라고 해서 다 친구가 아니다 -- 소련과 중공
"적의 적은 친구"라는 공식은 여기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즉, 일제 때 일제와 싸웠다고 해서 다 독립군이거나 우리 민족의 친구가 아닌 것이다. 당시 중공의 팔로군과 소련군이 일본과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곧 조선과 조선인의 우방인 것은 절대 아니며 그들도 결국 조선을 침략하여 해롭게 할 또 다른 적에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당시 전쟁의 결과는 미국이라는 또 다른 세력의 존재와 견제로 인해 일제가 패망했더라도 중국과 소련 공산당이 한반도를 완전히 먹는 게 불가능해졌지만 이는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한반도를 누가 점령하게 될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러시아 내지 소련이 한반도를 완전히 점령하는 기회를 차지했다면? 조선인들은 스탈린과 공산주의자들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들에 의해 한반도 인구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마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최대의 잔인성을 가진 그들이 못 할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중공이 한반도를 점령할 기회를 잡았다면? 지금의 티벳처럼 탄압받아 조선민족 자체가 말살당했을 것이다.
공산당은 아니지만 역시 항일 세력의 하나였던 장개석 군이 한반도를 점령할 기회를 잡았다면? 그래도 마찬가지다. 장개석 정부도 한반도 한강 이북을 사실상 점령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으므로 다 같은 도적놈들인 것이다. 아래는 2010년 12월 24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인용한 관련 자료 중 일부다.
"1940년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 한국(의 한강 이북)에 중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 군사고문을 파견하여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계획했던 사실이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신라대학 배경한 교수(사학과)는 최근 공개된 1940년대 초 중화민국 외교부 당안(외교문서)을 분석하여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배 교수는 '중일전쟁 시기 장개석·국민 정부의 대한정책'이란 논문을 12월 말 역사학보에 실을 예정이다. (하략)"
즉, 중국의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결국은 중화주의를 앞세우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장개석의 국민당도 한반도 한강 이북을 영향권내에 둔 후 결국은 지금의 중국 공산당이 획책하는 동북공정을 통한 역사 왜곡과 조선 민족 말살을 시도하는 쪽으로 흘렀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뙤놈은 뙤놈일 뿐이며 공산당과 국민당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중공, 소련, 장개석 군대가 모두 일제와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우리 민족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적의 적이라고 해서 다 친구로 여겨 버리면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부분들(박정희 포함)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왜곡되어 버린다는 사실에 모두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일제와 싸운 소련이 만약 정말로 우리 민족의 친구였다면 조선의 무장 세력들을 몰살해 버린 자유시 참변(1921년)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래는 위키백과가 인용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재인용한 것이다.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1)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붉은 군대(소련군)와 하얀 군대(반혁명군)의 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2)
그리고 아래는 두산백과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평가된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전사자의 숫자는 전하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다."
즉, 이 자유시 참변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과 야합한 소련 적색군(red army)이 소련의 자유시로 들어 간 조선의 항일 세력들(민족 계열과 공산 계열을 모두 포함)을 백색군과의 내전에 이용해 먹은 후 무참히 배신하여 공격, 전멸시킨 사건이다.
뿐만 아니다. 미쓰야 협약(三矢協約, 1925년)이라는 게 있다. 이는 만주국 성립 전인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만주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봉천성 수장이었던 한족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체결한 협약으로서 이로 인해 만주 지역의 조선 독립군들이 큰 피해를 입고 활동 근거를 잃게 되었다. 즉, 당시 만주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조선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을 중,일 양국 관헌이 협력하여 단속한다는 게 바로 미쓰야 협약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또한 장개석이든 모택동이든 장작림이든, 일제의 친구였든 적이었든 조선인이 아닌 세력들은 언제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선과 조선인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다.
"당시 만주에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어 항일독립군 활동이 활발하였으므로, 일본의 만주정책과 만주에 인접한 조선통치에 지장을 주었다. 일본은 중국 중앙정부와 만주의 사실상 지배자 장작림을 상대로 만주에 거주한 한국인 단속에 대한 교섭을 벌여,1925년 6월 11일 협약 체결에 성공하였다. 장작림은 만주에서 한국인 독립운동자를 체포하면 이를 반드시 일본영사관에 넘길 것, 일본은 독립운동자를 인계받는 동시에 그 대가로 상금(賞金)을 지불할 것, 장작림은 상금 중의 일부를 반드시 체포한 관리에게 주도록 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만주의 관리들은 이후부터 독립군 적발에 혈안이 되었으며, 그 결과 일반 한국인 농민들까지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장작림의 강력한 독립군 단속으로 만주독립군 기세는 약화되었으며, 일반 한국인의 피해 중 가장 큰 사건으로 1927년 길림[吉林]의 대검거사건이 있다." (두산백과)
참고로 미쓰야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터넷 자료 인용)
①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중국의 지방행정에 따르도록 하고 연대책임제로 단속한다.
② 무기를 휴대한 한국인이 조만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 위반하는 자는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게 인도한다.
③만주에서 활약하는 항일 한국인 단체를 해산하고 무기를 몰수한다.
④한국인 소유의 총기.화약류를 수시로 수사해서 수렵용이 아닌 것을 몰수한다.
⑤ 일본측이 지명하는 항일단체의 수령을 체포하여 일본측에 인도한다.
⑥항일세력자 단속 상황을 상호 통보한다.
⑦중일 양쪽 경찰은 서로의 국경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처럼 국익에 따라 언제든지 행동이 정반대로도 변하는 국제무대에서 '적의 적은 친구'라는 단순 공식으로 어떤 결정을 하거나 역사를 해석하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 4. 적의 적이라고 해서 다 친구가 아니다 --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당시 김일성 일당을 포함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항일 투쟁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들은 일제의 적이긴 하지만 민족의 독립운동가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1945년 이후 한 짓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6 사변을 일으키고 그 후 북한 주민들을 노예화하여 사익을 챙기는 양아치 짓이었기 때문이다.
▶ 5.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역사 평가의 기준이다 -- 역사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진다.
당시의 항일 운동은 현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국가 이익에도 맞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왜곡해서는 안되지만 그 사실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오늘의 현실에 바탕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안녕에 생사가 달린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과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반공주의에 충실해야 하며 이런 관점에서도 일제 때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항일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줘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과 민족의 적이며 일제보다 더 악독하고 위험한 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모든 게 명확해지는 것이다. 일제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항일 투쟁을 했다고 해도 그 건 해방된 조선을 공산화하기 위한 중간 과정에 지나지 않고 그들의 최종 목적은 결국 전체 조선의 공산화였고 이는 현재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과 국가 이익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투쟁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줘 버리면 현재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게 되고 말며 이는 국가반역 행위인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항일투쟁 노고를 인정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감상에 젖으면 대한민국이 위험해진다. 조선의 공산화가 최종 목적이었던 사람들의 항일투쟁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산주의 운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투쟁은 공산주의 운동이지 독립운동이 아닌 것이다. 혹여 당시 공산주의의 실상에 대해 잘 모르고 실제 공산주의자는 아니면서도 단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공산군에 몸 담아 항일투쟁을 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몸 담은 이상 공산주의 운동에 부역한 것이 되므로 그들의 순수한 마음은 역사 평가라는 냉엄한 무대에서는 기각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기각해야 대한민국이 안전해지는 것이다.
■ 이상의 논지에 의하면 만약 박정희가 중국 공산당 군대인 팔로군과 그에 소속되거나 협조한 조선인 공산주의자 내지 집단들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해도 그 것은 독립군과 싸운 게 아니라 조국의 또 다른 적과 맞서 싸운 게 되는 것이며 아군을 친 행위가 아니며 친일 행위가 아닌 것이다.
당시의 진정한 아군은 오로지 공산 계열이 아닌 민족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들로만 한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공산 계열은 결국 민족의 적이기 때문이다.
유람가세, 2014-12-25
위대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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