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명창 김옥심
마디마디 맺힌 한(恨)과 설움을 한 올 한 올 풀어내 듯, 저미는 가슴의 미어지는 아픔을 절절이 토해내 듯 불러주는 경기 명창 김옥심의 "정선 아리랑"은 듣는 이로 하여금 한없는 애절함과 함께 신비감마저 들게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생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음악은 워낙 소질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이 어떤 것인지도 몰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20, 30대 까지도 민요는 LP 판을 씨리즈로 사 놓고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구색갖추기용으로만 샀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나도 한국사람이어서인지 아니면 나도 태생이 시골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40대가 되며 민요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여 민요를 듣기 시작 했습니다.
내고향이 경기도라 그런지는 몰라도 경기 명창들의 소리가 좋았습니다. 특히 김옥심이 불렀던 '정신 아리랑'을 들을 때면 웬지 가슴이 찡해오며 나도 모르게 그래 이소리야! 하며 혼자 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남도 민요들도 좋아 남도민요의 맛도 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깔끔한 경기민요에 마음이 더끌리곤 합니다. 60, 70년대 구입을 한 아주 오래된 LP음반으로 민요를 들으려면 심한 잡음이 나지만 그래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지며 내 고향의 맛을 느끼는 것 같아 집니다.
◎ 아래 글은 인터넷 국악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김옥심에 관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 하늘이 내린 소리 경기 명창김옥심 金玉心 (愛姬), 1925 ~1988
잊혀진 전설의 소리꾼 김옥심"
경기도 양주 출신. 8세부터 조선권번에서 주수봉에게 시조와 가사, 잡가 등을 배웠으며, 해방후에는 이창배에게 경서도창과 산타령을 사사했다. 1958년 전국국악경연대회 성악부분 1등상을 수여 받은 이후 대한국악원에서 활발히 활동을 하면서 1950년대 이후 많은 인기를 모았던 경기명창이다. 1968년 세종국악대상 세종상을 수상했고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로 지정된 김옥심.유성기음반을 비롯하여소리꾼으로는 가장 많은 2백여장의음반을 남기고 1988년 1월,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옥심의 목소리는 경기소리를 위해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윤기가 흐르며 호소력 또한 일품이어서 그 소리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옥심 명창은 경기소리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어, 혹자는 100년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명창으로 일컫기도 한다.
우리 소리는 듣는 이의 귀 뿐 아니라 마음까지 깊게 후벼파는 묘한 힘이 있다. 때로는 한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흥을 돋구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이나 한번 흘려 버리고 마는 가벼움은 없다. 서양식 창법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요즘 귀에는 처음에는 다소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맛이 우러난다. 아마도 목청을 찢는다고 할만한 고된 훈련으로 다져지는 득음(得音)의 과정 때문일 것이다.
고 김옥심 명창(1925-1988)도 득음을 위해 동두천 소요산에서 폭포를 스승 삼아 3년간 수련했다. 그는 경서도 소리, 즉 경기 민요와 서도민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경서도 소리는 걸판진 남도 소리와는 달리 맑고 구슬픈데, 그중에서도 김옥심의 소리는 듣는 이의 눈물을 자아낼 만큼 애절해 '하늘이 내린 소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국악인으로는 드물게 200여장이 넘는 많은 음반을 발표했으며 특히 1950년대에 그가 즐겨 불렀던 '한오백년'과 '정선 아리랑'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이성림 회장은 그를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로 한과 흥을 신명으로 풀어내고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했다"고 기억한다.
음악이 그 나라의 문화를 재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국제화를 지향하는 시대답게(?) 전세계 음악의 주류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주류 음악 소비층으로 분류되는 10대들은 락, 힙합 등 미국에서 들어 온 장르를 최고의 음악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현재 가장 잘 팔리는 음반을 생산하는 대부분의 가수들은 이러한 장르에 국한되어 있다.
물론 음악은 이념이나 사상을 초월하는 공통의 감성을 자극하는 언어로서 어디에서 태생한 장르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 따라 누구에게는 천국의 소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혼란스런 소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민족적 감성에 호소하는 고리타분한 논리로 따분하고 지겨운(?) 우리 국악을 듣자고 하는 것은 돌팔매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잠시 한 걸음 물러나서 반문해보고자 한다.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 한다. 그렇다면 글로벌화 된 세계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문화상품은 어떤 것이 있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물(비록 한치 앞을 못 보는 문화행정으로 시멘트로 덧칠 해지고 아들 점지해달라는 기원으로 훼손된 석불들이지만)들과 더불어 우리의 정신을 함축하고 고양시킨 우리의 음악이 아닐까 한다.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민족이지만 현존하는 우리 고유의 음악은 그 저변이 너무 엷다. 민요 만이 유일한 고유의 우리소리가 아닐까? 세계 어느 나라에서 노래를 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도록 수련하는 과정을 거의 필수적인 교육과정에 넣고 있는가? 득음을 위하여 폭포수를 상대로 소리를 질러대고, 똥물을 마시면서 몇 년간 산에서 수양하는 소리꾼이 있다니 참으로 경탄할 일이다. 지금의 가수들에게 이런 수련의 과정을 거치게 한다면 몇이나 견디어 낼까도 궁금해진다.
국악의 면면에서 궁중악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민요는 독자적인 우리의 생활환경에서 탄생한 고유의 전통이다. 타악기 중심의 농악 등은 잠시 접어두고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서도민요, 경기민요, 남도민요를 큰 축으로 나눌 수 있다.
경서도 소리란 서울, 경기, 강원, 충청일대에서 불리는 경기민요와 황해도, 평안도 지역 등 북한 서쪽 지역에서 불리는 서도민요(일명 관서민요)를 통칭하는 것으로 굵직한 선을 가진 남도민요와는 대별되는 맑고 고우면서도 때론 구슬픈 소리를 말한다. 지금은 경기소리꾼이 서도소리를 전문적으로 부른다거나 서도소리꾼이 경기소리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경우가 드물지만 일제시대 또는 해방 후 70년대까지는 경서도소리라 하여 서도소리꾼이 서도목으로 경기소리를 즐겨 불렀고 경기소리꾼도 경기목으로 서도소리를 즐겨 불렀으며 이때 창자들은 대부분 경서도 소리에 두루 능통했다.
이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김옥심'(이 이름 석자 잘 기억해 두기 바란다. 이 사람을 알고 있거나 그의 소리를 좋아한다는 말을 옆 사람 누가 하거든 존경해도 무방하다)이 바로 경서도의 두루 통달한 하늘이 내린 소리라는 평을 받는 명창이다.
식모살이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한의 소리
한국 시단의 거성 신경림이 시심을 일으키는 정서의 깊은 샘이라고 감상했던 김옥심은 1925년 8월 30일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서 부친 안동김씨 김황록씨와 모친 박씨 슬하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이 김애희로 어릴 때부터 소리를 매우 잘 하였으며 노래를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했다가 그대로 흉내내는 비상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래의 친구들이 훌쩍 거리며 울 때도 김옥심은 마치 폭우에 폭포수 쏟아 붓는 것처럼 시끄럽게 울어 어른들로 부터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김옥심은 어릴 때 '버들피리'를 잘 불러 일찍이 소리신동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8세인 1932년 조선권번에 동기로 입번한다. 입번과 더불어 서울 모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수업을 중단하고 12살 어린 나이에 함경도 서장전으로 식모살이를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3년 동안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어깨너머로 함경도 소리를 배운다. 어른들이나 부르는 '애원성' 등 민요를 어른 못지않게 부르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리를 전문적으로 배워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한다.
삼촌의 권고로 서울로 돌아온 뒤 조선권번에서 경서도창의 대가였던 스승 주수봉에게 시조, 가사, 잡가 등을 배운다. 이때 '옥심' 이라는 별호도 얻게 된다.
박춘재, 최경식과 함께 경서도소리를 이끌던 주수봉 문하에서는 경서도잡가, 가사, 시조 등에 두루 능통하고 대감놀이 등으로 30~60년대를 주름 잡던 대명창 이진홍이 수업했으며 현 경기민요 무형문화재인 묵계월, 소도소리 보유자였던 오복녀 등이 수업했다.
김옥심은 판소리 꾼들이나 시도하는 득음을 위해 동두천 소요산 자락의 한 폭포에서 3년 가까이 독공했다. 소리꾼들이 소리를 까끼는(다듬는) 작업을 스승을 통해 하는 것과는 달리 김옥심은 폭포수를 스승 삼아 소리를 까끼게 되는 데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했는지 말년을 보낸 용두동에서 소리를 가르칠 때 큰 목성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밤잠을 못 이룬다고 항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김옥심은 해방 후 이창배에게 다시 '산타령' 을 배운 뒤, 대한국악원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당시 대한국악원에 참여했던 국악인들로는 '경기잡가'에 박춘재 이진홍, 김옥심, 묵계월, 이은주, 시명화, 노은화, 장국심, 고백화, 한정자, 윤일지홍, 강명화, 이일선 '선소리산타령'에 이명길, 이명산, 탁복만, 엄태영, 정득만, 김수현, 김태운, 이장병, 유개동, 김순태, '서도소리'에 김송죽, 장학선, 이은관, '가야금병창'에 심상건, 이일선, 거문고에 신쾌동, 서달종, '가야금'에는 박상근, 성금연, '승무'에는 최일송, 이경자, '악사'에 김봉엽(해금,줄타기), 이충선(피리,대금), 지영희(해금,피리), 김광채(대금), 이정업(해금,북,줄타기), 김재선(북), '발탈'에 박준제 옹, '장님타령과 재담'에 박천복(발탈), 손홍랑, 고준성, 이경자, '만담'에 장소팔, 고춘자 등 내노라 하는 국악인은 모두 참여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 대한국악원 활동이 중단되고 이들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한오백년', '정선아리랑' - 한국 민요사에 길이 남을 명창의 탄생
한편으로 한국전쟁은 김옥심의 인기를 등가시키며 김옥심의 존재를 한껏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남자 명창들 대부분이 입대를 한다거나 부상당하여 소리판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일부는 월북하기도 한다. 또한 여류 명창들은 부산, 충무 등지로 피난하여 생계를 위한 전쟁을 한바탕 치르게 되는데 서도 대명창이던 백운선 같은 이도 부산에서 요정을 운영하는 등 소리판을 그만 두는 일이 많았다.
반면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은 김옥심은 1951년 성경린을 대장으로 한 '육군군예대'에 가입하여 김천홍, 봉해룡, 김성진, 김기수, 심상건, 강장원, 김태섭, 이창배, 이부용, 고비연, 박금화 등과 같이 사리원 공회당 위문공연을 가는 등 군 위문공연을 주로 다녔다. 이때 한국민요사에 길이 남을 주옥 같은 노래들이 김옥심에 의해 널리 알려진다. '한오백년', '정선아리랑', ' 궁초댕기'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한오백년'은 강원도 민요로 일제시대 김란홍에 의해 취입된 바 있으나 김옥심이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정선아리랑' 역시 정선의 엮음 아리랑을 김옥심이 바꿔 부르면서 점차 세상에 알려진 곡이다. 1949년 가야금의 성금연, 민요의 이은주 등과 함께 킹스타음반에서 녹음한 이들 노래는 급속도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전후 한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민요는 [김옥심의 한오백년, 정선아리랑과 이은주의 태평가]였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보상 받고 위로 받으려는 민중의 심리와 맞아 떨어진 노래였기 때문이다.
김옥심은 5,60년대 현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인 이은주, 묵계월과 더불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며 그녀가 취입한 음반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당시 음반은 한면에 한 곡씩 취입하는 유성기 음반으로 신세기, 오아시스, 킹스타, 도미도 등이 있었는데 이때 발매된 민요반의 절반 가까이는 이들의 소리가 취입되었다.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해외소개반 대부분도 김옥심의 소리가 녹음되었다.
김옥심의 인기는 60년대 극에 달했다. 그녀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몇 달 전에 예약해야만 초빙할 수 있었고 재일동포 위문공연, 수해 위문공연 등 수백차례의 각종 공연을 다녔다.
김옥심의 명성은 각종 국악경연대회 수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958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탄신을 경축하는 한편 국악 발전에 기여코자 제1회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서울 중앙방송국 주최로 개최되었다. 각 지방의 예선을 거친 총 24명을 대상으로 본선을 실시하였는데 이 대회에 국악 중견 중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이때 김옥심은 한정자의 장고 반주로 긴잡가 '유산가'를 불렀다. 기악과 성악을 통틀어 영예의 대통령상에는 기악부 거문고의 신쾌동이 수상하였고, 각부의 입상자는 성악부 1등 김옥심(민요), 2등 김월하(시조), 3등 한애순(판소리), 기악부 1등 성금연(가야금), 2등 조한충(대금), 3등 한갑득(거문고)이 각각 결정되었다. 성악부 사상 경기소리꾼이 판소리 창자와 같이 참여한 대회에서 1등을 한 대회로는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였다.
또 1968년에는 한국국악협회(이사장 윤재영)가 국악진흥발전을 위해 주최한 제1회 세종상 국악경연대회가 열렸다. 각 도 예선을 거쳐 경서도창 10명, 판소리 23명, 시창 67명이 참가한 본선 각부 우승자로 경서도창에 김옥심(서울), 판소리에 장판개의 아들이면서 요절한 천재명창 장영찬(서울), 시조에 이재호(전북)가 각각 뽑혔고 최종심사에서 판소리의 장영찬씨가 대통령상인 세종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두 배 이상 많이 참석한 판소리 쪽에 무게를 실어준 것일 뿐, 사실상 대통령상은 김옥심이 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상을 독식하다시피 한 김옥심은 1960년대 국악사에 남을만한 굵직굵직한 활동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민요계의 단합이 필요했고 이에 대한 필요성이 줄기차게 요구되다가 1962년 경서도 민요의 발전을 위해 안비취와 이소향이 중심이 되고 이진홍, 묵계월, 이은주, 김옥심, 장국심, 노은화, 백운선, 주학선, 심명화 등이 적극적으로 지지, 한국민요연구회가 만들어진다. 비로소 경서도민요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모델이 완성되고 조직적인 경서도민요 보급에 힘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시련과 외로움을 넘어서
김옥심, 이은주, 묵계월, 안비취, 이소향 등의 활약으로 경기민요에 대한 문화재지정 인식이 높아지고 판소리와 서도민요가 문화재로 지정된 판국에 경기민요만 홀대 받는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문화재 관리국에서 장사훈, 박현봉 등이 중심이 되어 경기민요에 대한 실사를 벌인 뒤 '유산가', '소춘향가', '집장가' 등 경기 12잡가를 중요무형문화재 57호로 지정할 것을 고시하고 보유자 후보로 김옥심,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4인을 지목한다.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김옥심은 69년 갑작스러운 신경성 고혈압으로 쓰러진다. 야유회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 일어났다. 김옥심은 치료를 위해 방송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때 국악계에는 김옥심이 죽었다는 등 갖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며칠동안은 한쪽 팔을 거의 못 쓰게 될 정도로 심했으나 쉬면서 저마 차도가 있자 소리한데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 이창배의 청구고전성악학원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971년은 김옥심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해였다. 방송활동은 중단했지만 그만큼 집에서 쉴 시간이 많았고 결국 용두동의 한 풍류객인 김만근씨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옥심은 전 남편인 모씨와 성격이 맞지않아 이혼하고 인사동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으며 김만근 옹은 아내를 사별 한 직후였다. 처음에 가족의 반대가 심했으나 두 사람의 금슬이 너무 좋아 양가로부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실제 김옥심의 사망일이 음력 1987년 11월 25일이고, 김만근 옹의 사망일은 1998년 11월 25일이다).
교습활동도 재개, 종로 3가에 있는 무형문화재보존연구원에서 후학들에게 경서도 민요를, 종로 3가에 있는 경기12잡가 연구보존회에서 12잡가를 가르쳤다. 1973년에는 김옥심과 절친했던 서도소리의 명인들인 이정열, 이반도화 콤비 중 이반도화가 사망하자 이정열을 찾아가 학원에서 제자들에게 서도소리를 가르칠 것을 권유하기도 하는 등 본인의 건강보다도 주로 어려운 주변의 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동료애를 보이기도 했다(명창 한정자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무작정 상경했을 때 김옥심이 거두어 3년 동안 김옥심의 집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1974년 당시 명고수 이정업이 김옥심의 건강이 회복되고 있음을 알고, KBS 연출자인 오봉한씨에게 김옥심의 컴백공연을 진행시키는 한편, 6개월 만에 김옥심을 설득시켜 마침내 1974년 6월 30일 민속백일장에서 한오백년과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컴백에 성공한다(이정업은 김옥심 컴백공연 석 달 전인 3월 20일 사망). 이때 김옥심의 컴백을 알리는 신문기사 들이 게재되었는데 특히 모 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옥심은 병환과 자신에 대한 소문 때문에 겪었던 갖은 고초를 털어 놓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할 것을 다짐한다.
이어 74년 7월에는 동양방송국 '민속의 향연'에도 출연하여 긴잡가 '소춘향가'와 '정선아리랑', '몽금포타령'. '경복궁타령' 등으로 컴백공연을 성공적으로 하게 된다. 74년도 '제1회 선소리산타령 및 경기12잡가 발표회'가 열리는데 이미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선소리산타령'의 정득만, 이창배, 김순태 등 남자 명창들과 '경기12잡가'의 김옥심,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이소향 등이 참여하여 전성기 못지 않은 김옥심의 목성을 보여 준다.
한 많은 생을 뒤로 하고
그러나 75년 경기민요가 무형문화재 제57호 정식종목으로 지정되면서 보유자 후보에 올랐던 네 명중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3인이 지정되고 김옥심은 오랫동안 국악계를 떠나 있었다는 다소 애매한 이유로 보유자 후보에서 탈락하는 쓰라림을 겪게 된다.
쓰라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오랜 지인들이 하나 둘씩 그녀 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녀 밑에서 소리를 배우던 제자 가운데 제법 김옥심 흉내를 잘 내어 김옥심이 매우 아끼던 안숙정은 도일하여 소리를 그만 두었으며 최영란 역시 도일하여 자살하고, 오랜 친구들인 경기소리의 노은화, 장국심 등도 소리판을 떠나 버렸으며 서도소리의 이정열은 74년 도미한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녀의 선배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이진홍은 은퇴 하여 소리판에 나오지 않았으며, 동료 주학선 등이 암으로 사망하는 것도 이 즈음이었다.
무형문화재 탈락, 병세 악화, 외로움 등으로 극미한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77년 공간사가 마련한 공간극장 개관기념 공연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된다. '전통 예술의 밤' 에 기악의 김윤덕, 판소리의 김소희, 무용의 김숙자 등과 같이 출연한 그녀는 과거 이정열, 이반도화 등을 긴장시키며 같이 즐겨 부르던 수심가를 발표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힛트레코드에서 김옥심의 독집 음반 제작 문의가 들어왔다. 김옥심은 목이 주저 앉았다고 거절하였으나 '전통 예술의 밤' 공연에 감명 받은 제작 관계자들이 김옥심을 설득, 마침내 김옥심의 마지막 독집 음반이 제작된다. 여기에는 한오백년, 강원도아리랑, 궁초댕기 등 그녀가 즐겨 부르던 민요가 총망라 되어 있다.
방송활동도 활발해져 79년 8월 국악의 항연 잡가 편에서는 거의 반신불수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장고를 치며 휘몰이 잡가 중 곰보타령, 육칠월을 불러 팬들을 감동 시켰다. 또 당시 가장 인기 있던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 정선 아우라지 편에서는 이은관과 함께 '정선아리랑'을 경기제가 아닌 메나리제 정선본조로 불러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세상에 알려지자 82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에서는 기존 국악인 가운데 업적은 뛰어 나면서도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국악인을 대상으로 '재야인간문화재'라는 별칭과 함께 공로상을 수여하게 되는데 이때 이상을 수여한 사람으로는 판소리의 공대일, 강대근, 무용의 이동안, 기악의 한범수, 김득수, 민요의 김옥심, 이소향 등이다. 김옥심의 소리 실력을 누구보다도 가장 아끼고 칭찬했던 이창배는 휘몰이잡가로 김옥심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요청하려 했으나 83년 사망하면서 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옥심은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한 채 말년을 극심한 병치레에 시달려야 했고 87년 김광숙(현 무형문화재 서도소리 보유자 후보), 이선민(경기민요 이은주 전수자)에게 경기민요를 가르치는 중에 고혈압이 재발하여 두 달 동안 경희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88년 1월 14일(음력 1987년 11월 25일) 자택에서 아침식사 도중 64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김옥심 소리의 특징
김옥심은 이은주와 더불어 가장 많은 음반을 취입한 소리꾼이다. 현재 파악된 김옥심의 음반은 유성기 음반이 30여장, 레코드판이 114매 등이며 파악되지 않은 음반까지 합하면 약 200여장은 족히 될 것이라는 게 국악관계자 들의 얘기다. 이처럼 김옥심의 음반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구동성으로 김옥심의 독특한 목성을 꼽는다. 김옥심의 목청은 가냘픈 듯 힘이 있고 한과 흥겨움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도 어릴 적 함경도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얻은 특유의 애원성 때문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곱고 슬픈 소리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읊조리는 듯 뱉어 내는 맑은 목소리를 바탕으로 방울목으로 굴리고 덜미청으로 쳐서 내는 기교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김옥심만의 전매특허였다.
특히 대부분의 가창자들이 기능적이고 기계적인 소리를 토해내는데 반해 김옥심은 단어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색깔까지도 감정을 섞어 표출해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그래서 당대의 대명창들 조차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는 현재 활동하는 경서도 명창들의 말을 빌면 김옥심의 목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 분의 소리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소리이다 !" (김영임, 전화 인터뷰, 2000년 음성 꽃동네 공연 전)
'우리들의 우상, 울고 싶을 때 선생님의 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나온다. 내 마음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이춘희씨, 음악동아 인터뷰)
'경기민요를 배우기로 마음 먹은 게 김옥심 선생의 소리를 듣고서부터다'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 김금숙씨, 일간스포츠 인터뷰)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소리의 극치'(경기도 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임정란씨- 전화 인터뷰)
'경서도 소리꾼 가운데 최고다. 그런 소리는 이후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무형문화재 서도소리 배뱅이굿 보유자이자이며 김옥심 선생과 가장 친했던 이은관 선생 - 전화 인터뷰)
'우리 엄마 박초월 선생은 소리 수업하다 김옥심 선생의 소리가 들리면 북채를 놓고 늘 감상한 뒤에 어떻게 저런 애원성을 가졌는지 부러워하셨다' (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후보 조통달씨, 2000년 프레스센터, 유태평양 일본공연 전 회견장 인터뷰)
'그런 소리꾼은 내 생에 처음이다'(박송희 선생, 노재명 출판기념회, 판소리 3명창 공연 인터뷰)
'저런 소리는 내 평생 처음 들어본다. 선배들도 저런 소리는 구경 못 했을 것이다' (일제 해방 후 최고의 경서도 명창이라던 이진홍 선생, 한정자 선생 인터뷰, 충주 자택)
'정자야, 앞으로 방송 출연하려면 열심히 소리 공부 해야겠다. 아니면 농옥(염농옥)이 처럼 목을 키우던지, 영월(모영월)이 처럼 만신소리 듣게 대감을 놀리던지…' (한정자 선생의 스승 박춘재 선생이 김옥심의 소리를 듣고서 소스라치게 놀라서 한 말, 한정자 선생인터뷰- 충주 자택)
'김옥심의 목소리는 어떤 민요도 청승맞게 소화해 내는 기막힌 목소리이며 서도소리꾼과 겨뤄도 지지 않는 목소리이다' (그의 스승이자 음악적 친구였던 이창배 선생이 한국가창대계 평함)
'어떻게 저런 소리를 그냥 내버려 뒀는지 이해가 안 된다. 국악계가 참으로 큰 실수를 했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장국심 인터뷰- 용인자택 근처)
'고운 목은 그냥 밋밋하게 마련인데 그냥 고운 게 아니라 슬프도록 곱다'며 김옥심의 소리는 너무 기막혀 말로는표현할 수 없다고 증언 (오랜 동료인 고백화 선생 인터뷰 - 원당자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