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흥안씨의유래와역사
순흥안씨는 지금의 경북 영주 순흥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공 안자미(安子美)선조는 고려 신종(神宗)때인 1182년경 순흥에 거주 하였으며, 상호군으로 추봉되었다. 아들 삼형제 를 두었으니 장남은 추밀공 안영유(安永儒), 차남은 별장공 안영린(安永麟), 삼남은 교서 랑공 안영화(安永和)이다. 이 세분의 후손이 22개파로 분파되었고 그 후에 많은 학자와 시호(諡號)를 받은분이 33현(賢) 봉군(封君)21현(賢) 문과 급제(文科及第)188여명이 배출 되었다. 시조공의 증손인 문성공 회헌(文成公 晦軒) 안향(安珦)선조는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로서 우리 나라에 최초로 주자학을 도입하고 장학재단인 섬학전(贍學錢) 설립하여 고려말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세워, 이에 국왕은 문성공(文成公) 시호를 내려 문묘 (文廟)에 배향하게 하고 영정을 그려 순흥향교에 모시게 하였다. 현재는 국보제111호로 지정되어 소수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다. 문의공(文懿公) 질재(質齋) 안문개(安文凱) 선조는 삼중대광 좌정승 지공거(三重大匡 左政丞 知貢擧)를 지내셨으며, 충숙왕과 원나라에서 억류 생활까지 하면서 고려의 국난극복에 힘쓰셨다. 증손안준 (安俊)은 고려말 충신이며 안홍국(安弘國), 안위(安衛)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명장이다. 문정공(文貞公) 근재 (謹齋) 안축(安軸) 선조는 첨의찬성사 (僉議贊成事)를 지내 셨고,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 과‘죽계별곡(竹溪別曲)’ 을 지어 국문학사에 크게 이름을 떨쳤 다. 아들 문간공 (文簡公) 안종원(安宗源)은 조선조 판문하부사 (判門下府事) 이며, 손자 안경공(安景公)은 조선개국에 참여 개국원훈 공신(開國元勳 功臣)이 되었으며, 증손 안순(安純)은 세종때 호조판서 (戶曹判書)를 12년 지내시며 난시제민 (難時濟民)의 큰 공을 세우셨다. 순흥 읍내리 에 안석(安碩), 안축(安軸), 안보(安輔),안집(安輯)4부자가 쓰던 우물이 사현정 (四賢井) 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향 순흥에서는 금성 대군의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죽계천이 피로 물들게 한 참혹한 화를 입엇고 한양에서는 여러 사화로 인하여 많은 분 들이 화를 입거나 전국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중에서 안지귀(安知歸), 안침 (安琛), 안당(安瑭), 안위(安瑋), 안현(安 玹), 안명세(安名世)등은 정직한 선비이며, 명재상으로 유명하 였으며, 특히 근세에 이르러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 (安重 根) 의사를 비롯하여 민족의 스승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안재홍(安在鴻),안익태(安益泰),안희제(安熙濟),안무(安武), 안창남(安昌男)은 나라가 암울하던 시절에 한민족의 정신과 기개를 세상에 드날렸다.순흥안씨는 현재 전국에 6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경북 영주 순흥 읍내리 산413-1에 조성한 ‘순흥안씨추원단 (順興安氏追遠壇)’에 시조 이하 11위의 선조님의 재단을 모시고 매년음력10월1일2,000 여명의 후손들이 모여서 세사를 봉해 하며 후손 모임으로는 ‘순흥안씨대종회’와 각파 종친회 그리고 시도 시군 종회가 있다.
◆ 순흥안씨 서파공파의 유래
(경북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에 정착)
공은 시조10대손이며 회헌 안향의 6대손으로 판서공 종약 (從約)의 4남으로 조선 태조 계유년 서기1393년에 태어 나셨고 호는 서파 (西坡)이고, 또 호는 낙원(樂園)이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배웠으므로 당대의 명유들이 공을 추존하여 높였다. 백형(伯兄)과 중형(仲兄) 두분이 이상(貳相)과 판윤(判尹)으로 모두 현달하고, 중용 되었으나,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옛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분들이 많은 것을 경계하 였다. 우리 집안에는 회헌선조 이후로 고려와 조선에서 드러났으며, 지금 형제들과 자질(子姪)들이 부원(府院)과 대각(臺閣)의 관직에 가득하며 집안에 있는 모든 일가들이 한사람도 벼슬하지 않는자가 없으니 이는 바로 지위가 성만(盛滿)한 때이다. 공은 문을 닫고 책을 읽으며 깊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다. 경태 계유년에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외직(外職)으로 의령(宜寧) 현감에 부임했는데, 흉년을 만나 고을 백성들이 흩어져 도망하자, 공은 봉급을 대어 구휼 해주고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지니 흩어져 도망한 자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도백(道伯)은 치적(治績)이 훌륭하다고 하여 그 내용을 조정에 올렸으므로 다음해인 갑술년에 예천군수로 승진하였다. 공은 억지로 부임 하였는데 얼마 안있다가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자리를 물려주자, 공은 은둔할 것을 결심하고 관향(貫鄕)으로 돌아와 거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벼슬을 버리고 순흥부(順興府)의 남쪽 삼십리쯤 되는 누암산(樓巖山)아래에 집터를 정하고는 누(樓)자를 용(龍)자로 고쳐 용암산 (龍巖山)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는 황무지를 개척하여 촌락을 이루고는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였으며, 인하여 낙원옹(樂園翁)이라 호 하였으니 대룡산은 제갈공명의 와룡(臥龍)의 뜻을 따른 것이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독락원 (獨樂園)의 뜻을 따른 것이다. 경태(景泰) 정축년(1457)에 사육신(死六臣)의 화가 일어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순흥 부사(順興府使)인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상왕(上王)인 단종 (端宗)을 복위 하려고 도모하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관복을 입은 집안들이 모두 멸족(滅族)을 당하니 당시 죽계의 물이 붉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공은 돈독한 뜻으로 굳게 은둔하여 산수의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닐며 일생을 마쳤다. 일찍이 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지금은 벼슬할만 한 때가 아니다 물은 가득차면 넘치고 달은 가득차면 기우는 법이다 우리종족은 번성하고 또 현달함이 지금보다 더 한적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혼정신성 (昏定晨省 )하는 여가에 주자(朱子)의 글을 읽어 선조께서 회암(晦菴)을 사모한 뜻을 살피고, 녹(祿)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말라, 비록 서울에 가더라도 공경히 선조의 사당에 배알할 뿐이요 부디 가까운 친척과 부귀 영달하는 일에 언급하지 말라 만일 나의 그 교훈을 어긴다면 이는 진실로 너의 애비가 바라는 뜻이 아니다. 일시에 유명한 공경들이 편지를 보내왔으나 공은 답하지 않았으며 방백 수령들이 매양와서 방문하였으나 공은 모두만나 보지않았다. 서울에 거주하는 조카와 손자 들로서 대신의 반열에 있는자들이 공이 시골에서 담백하게 사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매양 사시(四時)에 아름다운 음식을 갖다 드리면 공은 이를 물리치고 웃으며 말씀하기를 ‘소백산의 머위 나물이 내 분수에 족하니 관청의 고량진미가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공이 별세 한 후 몇 년이 못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집안과 대 종가가 모두 화를 면치 못하니 공의 집안만은 다행히 화를 면하니 당시 사람들은 공의 선경지명에 탄복 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영주에 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향지의 유적지 보존관리와 시향을 준비한다. 묘소는 대룡산 계곡에 있으며 자좌(子坐)이고 세사는 음력10월초6일에 봉행하고 죽림사 (竹林祠)향사를 삼월(三月)구월(九月)중정일(中丁日)에 봉행하고 있다.
첫댓글 정말 부러운 순훙안씨 명문에대해 다시한번 잘 알게되었습니다. 좋은정보 감사드리며 귀문중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드립니다.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자~~~ 알 읽었습니다.
순흥안씨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安珦(晦軒,文成公)-于器(竹玉,文順公)-牧(文淑公)-元崇(文惠公)-瑗(文科,刑曹典書)-從約(文科)-理(西坡,樂園)-季文(副司直)-瑛(五之堂,進士)-公弼(司馬)-璇(西塢,部將)-敬立(岩溪,判官)-王+燮-世臣-晩宗(樓岩堂,贈戶參)-夏圭(竹淵,通德郞)-聖益(松窩,通德郞)-象九(通德郞)-壻 李永福(外 6代祖)
외 6대조 조모 친정댁 가계를 정확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