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광릉(廣陵)과 연아총(燕娥塚)’의 유래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는 ‘광릉’과 ‘연아총’이 있는데 바로 천곡 최원도 선생과 둔촌 이집 선생의 유애가 서린 장소입니다.
천곡(泉谷)은 영천 최씨인 원도의 호입니다.
그는 여말의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해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땅에 내려와 우거하고 있었으며, 둔촌 이집과는 과거 동년생으로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둔촌은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장차 닥쳐올 큰 화를 예견한 둔촌은 연로하신 노부를 등에 업고 영천 땅의 천곡을 찾아 낮에는 숨고 밤이면 산길을 택해 걸었으며, 천신만고 끝에 몇 달이 걸려 도착한 천곡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이라 많은 인근주민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며 천곡을 찾았으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은 반기기는커녕 대노(大怒)해,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
고 소리치며 오히려 내쫓았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은 다시 노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그곳을 떠났으며,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를 태워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다가 떠난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습니다.
한편, 둔촌은 천곡에게 쫓겨나 산길을 걸으면서 천곡이 진심으로 자신을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가지 않고 길옆 덤불 속에서 밤을 맞고 있었고 천곡은 둔촌이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산을 내려와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때가 1368년(공민왕 17)입니다. 천곡은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했으며,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 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담게 해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긴 세월동안 날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먹어치우는 주인의 식욕을 의아히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을 몰래 들여다보고 놀라서 안방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함구령을 내린다고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요?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어서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만약에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가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제비를 연아(燕娥)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후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의 집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동리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으며, 그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돌아가셨으나,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리에 치러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컸습니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습니다.
이곳이 바로 도유리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공 묘소 즉, ‘광릉’인 것입니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해 유배되었다가 곧 주살되었고 장장 4년에 걸친 피신생활도 끝이 났으며,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고 그 시는 지금도 전합니다.
둔촌은 그 후 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고 천곡도 좌사간으로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고로 우의의 두터움을 말할 때면 관포(管鮑)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과 천곡의 우의도 오래도록 기릴만 합니다.
둔촌의 후손들이 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보은당(報恩堂)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으며 충비(忠婢) 제비를 잊지 않기 위해 제비의 무덤인 ‘연아총’ 앞에 술과 밥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6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단을 유지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무덤 일대에는 나현회관 앞에 둔촌선생유적비와 이당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추원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은거해 정착한 사간 최원도, 장례원판결사 최형도, 형조참의 최정도 3형제의 단을 수호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묘재인 나현재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 전하는 둔촌과 천곡의 우정과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몸종 제비의 이야기는 자양면 용산리 하절(夏節)에 있는 충노 억수의 무덤, 충과 효에 큰 모범을 보였던 포은 · 노계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의 우애를 가르쳐준 화북면 횡계리 옥간정의 양수선생, 부부사랑을 몸소 실천한 오원복 노인의 고인돌 무덤, 자양면 충효리에 서린 산남의진의 충과 효, 죽어서 오히려 더 큰 모범으로 남아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킨 이 분들의 삶에서 우리는 크나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