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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공 휘 극감
문경공 휘 극감(文景公 諱 克堪)
자(字)는 덕여(德與)이시고 호(號)는 이봉(二峯)이시다. 세종9년정미(世宗九年丁未:1427)년 을사일(乙巳日) 신시(申時)에 출생하시고 세종26년(世宗二十六年) 갑자(甲子:1444)년 시년 18세에 진사(進士)가 되시었다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어 한원(翰苑: 한림을 말함)에 들어가시었다. 세종29년(世宗二十九年) 정묘(丁卯:1447)년에는 중시(重試)에 연이어 급제하시고 호당(湖堂)에 뽑히시어 남상전랑(南牀銓郞), 검상(檢詳), 사인(舍人),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직제학(直堤學),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삼사 국자(三司 國子)에 선임(選任)이 되셨고, 시년 28세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참판(參判)을 거쳐 팔도도관찰사(八道都觀察使)에 발탁(拔擢:특진)이 되시고, 좌익공신(左翼功臣)으로 책록(策錄)이 되시어 광성군(廣城君)의 봉작(封爵)을 받으셨으며, 시년 36세에는 형조판서 겸 홍문관 예문관(刑曹判書 兼 弘文館 藝文館)의 제학(提學)을 배수(拜受:배명)하시고 세자시강원 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이 되시었다. 세조9년(世祖九年) 계미년(癸未年:1463)에 외간상(外艱喪:부친상)을, 세조11년(世祖十一年) 을유년(乙酉年:1465)에는 내간상(內艱喪:모친상)을 연이어 당하시고 지나치신 효성과 많은 슬픔으로 몸이 극히 쇠약(衰弱:과애시훼:過哀柴毁)하여지신 나머지 기사회생(起死回生)치 못하시고 세조14년(世祖十四年) 무자년(戊子:1468)년 7월 27일(향년42세)에 서거(逝去)하시니 성종(成宗:당시 왕세자)이 매우 슬퍼하며 <진도:震悼> 말씀하시기를 "이봉(二峯)은 충성스럽게 사람의 잘못을 간하였으며 도덕(道德:충간지도)과 호걸(豪傑:지용이 뛰어나고 기개와 풍도가 있는 사람을 말함)로 명성이 있는 사람인데 일찍 죽으니 어찌 아깝지<可惜>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수일간 철조(撤朝)를 하고 좌의정 겸 세자부(左議政 兼世子傅)의 증직을 내리고 문경공(文景公)의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영세토록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며<세사부조:世祀不 >공의 학문이 고명하시고 문장과 풍절(風節)이 용동(聳動:우뚝 솟아 뛰어나 움직인다는 말)하시어 도덕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이 풍부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국사(國士)라 칭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하여 공이 손수 쓰셨던 유적(遺籍)이 하나도 전하여지지 못하였으며<무일지가전:無一紙可傳>, 다만 공이 지으신 시문(詩文)이 승사(乘史:史記)에 많이 나타나는게 있어<다현승사:多顯乘史> 이를 모아서 유고(遺稿)로 1권을 편집하여 행록(行錄)으로 전하고 있다. 묘소는 말흘산 도부곡 무좌(末屹山 陶釜谷 戊坐), 충청북도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 산90번지에 있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묘(墓)를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려고 하자<천양의 화:泉壤의 禍> 때마침 뇌성벽력<뇌정:雷霆>이 일어나 묘를 파헤치지 못하여 피화를 면하였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충주최씨(貞敬夫人 忠州崔氏)이시며 부친은 창수 덕로(倉守 德露)이시고 조부는 관찰사(觀察使:江原道)순(洵)이시다. 세종9년(世宗九年) 정미(丁未:1427)년에 나시고 성종18년(成宗十八年) 정미(丁未:1487)년 8월 7일(향년 61세)에 서거(逝去)하시었으며 묘소는 합묘(合墓)이다. 장자는 세좌(世佐)이시고 2자는 세우(世佑)이시며 3자는 세걸(世傑)이시다. 장녀는 팔거인감찰현분(八 人監察玄賁)집이시며 부는 현감 득리(縣監 得利)오, 자(子)는 현윤문(玄允文)과 현윤무(玄允武)이고, 여(女)는 김항(金抗)과 정홍우(丁弘佑)와 문광서(文光瑞)다. 2녀는 호군 이순응(護軍 李舜膺)집인데 그의 아드님은 이광보(李光輔)와 이광서(李光瑞)이다. 3녀는 박은(朴垠)집으로 자(子)는 박인심(朴仁諶)과 박인성(朴仁誠)이며 그의 여(女)는 종실(宗室)인 화(譁) 칠성수(漆城守)인데 부(父)는 시안군(始安君) 탁(擢)이요, 또한 따님은 역시 종실(宗室)인 완천군(完川君) 희(禧)의 집이고 부(父)는 영춘군(永春君) 인(仁)이시다. 4녀는 손경조(孫景祚)집, 5녀는 주부 선팽손(主簿 宣彭孫)집으로 그의 여(女)는 사직 류완(司直 柳琬)집이다. 6녀는 여산인(礪山人)인 생원 송윤은(生員 宋胤殷)집이며 부(父)는 현감 관(縣監 觀)이시며 여(女)는 이오(李塢)집이다.
◎ 광천부원군 휘 극증
광천부원군 휘 극증(廣川府院君 諱 克增)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익대좌리 공신 광천군(崇政大夫 判中樞府事 翊戴佐理 功臣 廣川君)의 휘(諱)는 극증(克增), 자(字)는 경휘(景 )이며 호(號)는 삼봉(三峰)인데 시(諡)는 공장(恭長)이시다. 한성부(漢城府) 연화방(蓮花房)에서 우의정(右議政) 시(諡) 충희(忠僖) 휘(諱) 인손(仁孫)의 제3자로 세종13년(世宗十三年) 신해(辛亥:1431)에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재기(才氣)가 비범하셨으며 문장이 일찍 성취하셨고 성품또한 단아(端雅)하시었다. 문종원년(文宗元年) 신미(辛未:1451)에 사마시(司馬試:소과)에 합격하셔 음직(蔭職)으로 종묘(宗廟) 록사(錄事)가 되시고, 세조2년(世祖二年) 병자(丙子 :145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셔 군기시(軍器寺) 직장(直長)에 제수(除授)되시었다. 얼마 후에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거쳐 세조6년(世祖六年) 경진(庚辰:1460)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제수되시고, 이듬해에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이 되시어 서연관(書筵官)을 겸대(兼帶)하시었다.
세조8년(世祖八年) 임오(壬午:1462)에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으로 옯겨 경연(經筵)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시고 세조9년(世祖九年) 계미(癸未:1463)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에 오르시었다. 세조10년(世祖十年) 갑신(甲申:1464)에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가 되시고 이 해에 의정부 검상(議政府 檢詳)이 되시었다.
세조12년(世祖十二年) 병술(丙戌:1466)에 호조판서 구종직(戶曹判書 丘從直)이 학문(學問)을 진작(振作)시킬만한 여덟 신하를 천거(薦擧)하였는데, 공께서 학술(學術)이 정밀(精密), 심오(深奧)하여 남의 스승이 될만하다고 여겨서이다. 그러나 세조13년(世祖十三年) 정해(丁亥:1467) 때마침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이르키니 공을 정략장군 부호군(定略將軍 副護軍)에 제수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겸하게 하여 격일(隔日)로 입시(入侍)케 하니 찬획(贊劃)한 바가 많아 그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시고 같은 해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오르셨는데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은 항상 겸대(兼帶)하셨고 동년(同年) 9월에 선위사(宣慰使)로 개성(開城)에 다녀오시기도 하시었다. 예종원년(睿宗元年) 기축(己丑:1469)에 수충보사정난익대 이등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 二等功臣)에 책록되고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으며 가선(嘉善)의 품계에 올랐는데, 교서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에 특제(特除)하니 일찍이 보기드문 수우(殊遇)였다.
성종원년(成宗元年) 경인(庚寅:1470)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에 오르셨는데 국가경비(國家經費)에 대한 규제(規制)가 없었으므로 공이 진명(震命)을 받으시고 식례(式例)를 찬정(撰定)하시었다. 횡간(橫看)이나 쇄설( 屑)한 사항도 반드시 공의 손을 거쳐서 작정(酌定)되었으니 비록 까다롭고 자잘한데서 손상되기는 하였으나 조도(調度)는 그것에 힘입어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사간원(司諫院)에서는 횡서식(橫書式) 방안(方案)이 잘못되었다고 헐뜯고 모략(謀略)하여 파직(罷職)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상께서 윤허치 않았다. 성종2년(成宗二年) 신묘(辛卯:1471)에 순성 명량홍화좌리공신(純誠 明亮弘化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셨고 이해 가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셨으며 호조(戶曹)로 옮겨 비록 사소한 지출이라도 반드시 재결(裁決)을 받도록 하니, 이것이 바로 지금의 예산서(豫算書)와 같은 것으로 수입(收入)과 지출(支出)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여 재정 운용(財政 運用)에 일호(一毫)의 차질이 없게되자 조정제신(朝廷諸臣)이 그제서야 그 편리함을 인식(認識)하고 간언(諫言)이 없었다.
성종6년(成宗六年) 을미(乙未:1475) 2월에 공께서 아뢰기를 "신의 백형(伯兄) 극배(克培)가 병조판서(兵曹判書)이고, 아우 극돈(克墩)이 예조참판(禮曹參判)인데, 신이 호조(戶曹)를 맡으면 일가삼인(一家三人)이 요직(要職)에 있게되어 물의가 있을 것이므로 신의 직(職)을 체개(遞改)하여 주소서"하고 간청(懇請)하였으나 상께서 윤허치 않았다. 성종8년(成宗八年) 정유(丁酉:1477)에 강원도 순찰사(江原道 巡察使)의 명을 받고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돌아오셔서 상세히 복명(復命)하고 구휼(救恤)할 예책(豫策)을 아뢰니 후한 상을 내리시었다. 이어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로 외보(外補)되셨는데 이때에 왜구(倭寇)가 호남연해(湖南沿海)에 침입(侵入)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니, 조정에서 공을 천거(薦擧)하여 진압(鎭壓)케 한 것이다. 성종9년(成宗九年) 무술(戊戌:1478)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에 보임(補任)되셨고 성종10년(成宗十年) 기해(己亥:1479)에는 정헌대부 병조판서(正憲大夫 兵曹判書)가 되셨는데, 이때에 또 서북양계(西北兩界)에 오랑캐가 출몰하니 조정에서 공의 위망(威望)을 빌어 평정하려 함이었다.
성종12년(成宗十二年) 신축(辛丑:1481)에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옮겼다가 성종13년(成宗十三年) 임인(壬寅:1482)에 황해도 진휼사(黃海道 賑恤使)의 명을 받고 진휼(賑恤)에 진력(盡力)하니 백성들이 전활(全活)하게 되었다. 이어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 左參贊)에 올라 정사(正使)로 북경(北京)에 다녀오셨고 성종14년(成宗十四年) 계묘(癸卯:1483)에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보임되시었다. 성종15년(成宗十五年) 갑진(甲辰:1484)에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崇政大夫 判中樞府事 兼 同知成均館事)로 옮겨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하였는데, 규모(規模)를 넓혀 재숙소(齋宿所)를 정록청(正錄廳) 북쪽에 짓고 관사(館舍)도 새로 수리하니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振作)하였다. 동년 11월에 강원도 량전순찰사(江原道 量田巡察使)로 나가게 되어 일을 차질없이 마치고 돌아오니 또 후한 상을 내렸다.
성종19년(成宗十九年) 무신(戊申:1488)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시어 오랜 경륜으로 서정(庶政)을 일신(一新)하였으며 성종23년(成宗二十三年) 임자(壬子:1492)에 왕명을 받들어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찬정(撰定)하여 올리자, 이를 예조(禮曹)에 넘겨 발행(發行)케 하니 법전(法典)의 미비로 시행에 이동이 있던 사항을 바로하게 되었다. 만년에 성균관(成均館)을 맡아 유생(儒生)을 가르치기에 정성을 다했는데 이때부터 미병(微病)이 있어 2년후인 성종25년(成宗二十五年) 갑인(甲寅:1494) 3월 25일 영면(永眠)에 드시니 수(壽)는 64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 슬퍼하고 철조(撤朝)와 시문(市門)을 닫게 하였으며 예장(禮葬)을 명하시고 부조묘(不 廟)에 모시도록 전교(傳敎)하였으며 공장(恭長)이란 시호(諡號)를 내 렸으니 은졸(隱卒)이 두터웠던것이다. 후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겸(兼) 광천부원군(廣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시었다.
배위(配位) 정경부인 청풍김씨(貞敬夫人 淸風金氏)는 부사 리(府使 理)의 따님으로 묘소는 합장(合葬)하였고 5남 3녀를 두시었다. 공의 묘소(墓所)는 본래 성남시 야탑동(城南市 野塔洞)에 계셨는데 분당 신도시개발(盆唐 新都市 開發)로 인하여 민국신미(民國辛未:1991)에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廣州郡 草月面 池月里)로 천묘(遷墓)하였다.
◎ 광원군 휘 극돈
광원군 휘 극돈(廣原君 諱 克墩)
익평공(翼平公:사려심원일익집사유제일평<思慮深遠日翼執事有制日平>) 선조(先祖)께서는 세종17년(世宗十七年) 을묘(乙卯:1435)에 한양 향교동 본제(漢陽 鄕校洞 本第)에서 충희공(忠僖公) 휘 인손(諱 仁孫)의 제 4남으로 출생하시었다. 휘(諱)는 극돈(克墩)이시고 자(字)는 사고(士高)이시며 호(號)는 사봉(四峰)이시다. 유시(幼時)로부터 의모(儀貌)가 웅위(雄偉)하고 성장하여 동지(動止)가 유도(有度)하사 성품이 항직(亢直)하시었다. 세조3년(世祖三年) 정축(丁丑:1457)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실 당년이 23세이셨다. 승문원 정자 박사(承文院 正字 博士)에 이르러 박학사민(博學辭敏)하여 무출기우(無出其右)이며 청화가문(淸華家門)으로 명우세(鳴于世)하시었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으로 이조 예조좌랑 동부승지 병이조참의(吏曹 禮曹佐郞 同副承旨 兵吏曹參議)를 역임하시었다. 세조9년(世祖九年) 계미(癸未:1463)년 7월 13일에 우의정부군(右議政府君)께서 치사중(致仕中)에 이병졸(以病卒)하시니 향년 69세이시다. 증의정부영의정 시 충희공(贈議政府領議政 諡 忠僖公)이시고 몽부조지전(蒙不 之典)하시었다. 정경부인 교하노씨(貞敬夫人 交河盧氏)께서는 3년후인 을유(乙酉:1465) 6월 초6일에 향년 69세로 병졸(病卒)하셨으며 이오자구등문과봉군(以五子俱登文科封君) 됨으로 매년 사미 20석(賜米二十石)을 하사(下賜)받으신 것으로 중외(中外)에 유명하였다.
연달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세조14년(世祖十四年) 무자(戊子:1468)에 중시(重試)를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시고 도승지(都承旨)에 직배(直拜)되시었다. 이 해에 중형님(仲兄任) 광성군(廣城君)께서 42세에 연조외내정간(連遭外內丁艱)하고 과애시훼(過哀柴毁)로 별세(別世)하시니 전가권(全家眷)이 비통함을 금치 못함에서 평양감사(平壤監司)로 계신 백형님 광릉군(伯兄任 廣陵君)을 갑자기 내직(內職)으로 부르고 예종원년(睿宗元年) 기축(己丑:1469)에 광천군(廣川君), 광원군(廣原君), 광남군(廣南君)을 다 동석(同席)시키고 왕께서 나즉한 어음(語音)으로 경(卿)들 집은 다복(多福)한 집이라고 치하하고 연하여 충희공묘소 이장(忠僖公墓所 移葬)할 일, 향교동 거대 이사(鄕校洞 居垈 移徙)할 일을 은은(隱隱)히 강요하니 광원군(廣原君)께서 "황송(惶悚)하옵니다. 위선(爲先)은 일반이옵니다"하시니 그 후에는 국가자의(國家自意)에서 산소 천묘(山所 遷墓)도 거대이사(居垈移徙)도 처사(處事)한 것이다. 성종원년(成宗元年) 경인(庚寅:1470) 정월, 대사헌(大司憲)으로 계실 때에 시무 12조(時務 十二條)를 상소(上疏)하시와 사서인교육(士庶人敎育)의 기강(紀綱)을 법으로 정해 향학훈도교수(鄕學訓導敎授)를 대읍(大邑)에는 급제출신(及第出身)으로 소읍(小邑)에는 생원진사 년40정도 유경행자(生員進士 年四十程度 有經行者)로 교육실행(敎育實行)할 교직자(敎職者)를 선정(選定)하게 되었으니 일성록(日省錄)에 "이극돈지공(李克墩之功)은 부재어황희지하(不在於黃憙之下)라 하고 우왈(又曰) 이극돈(李克墩)은 금지이윤부열(今之伊尹傅說)이라" 하였다.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은 은(殷)나라 현상(賢相)이다)
성종2년(成宗二年) 신묘(辛卯:1471)에 참좌리공신(參左理功臣)하시와 훈봉 광원군(勳封 廣原君)하다. 훈호(勳號)는 순성명량경제홍화(純誠明亮經濟弘化)이다. 외직(外職)으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로 세조13년(世祖十三年) 임인(壬寅:1482)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로 세조14년(世祖十四年) 계묘(癸卯:1483)에 중추(中樞)로 들어오시어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시다. 성종14년(成宗十四年) 계축(癸丑)3월에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判書 兼 同知義禁府使)가 되어 내직(內職)으로 들어오셔 종일품(從一品)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으로 오르시었다. 성종16년(成宗十六年) 을사(乙巳:1485) 신편동국통감 편찬(新編東國通鑑 編纂)할 책임을 승명(承命)하시고 실록당상(實錄堂上)으로 서거정 제현(徐居正 諸賢)과 공찬(共撰)하시고 노사신 제현(盧思愼 諸賢)과 같이 강목신증(綱目新增) 또는 강정무경제서(剛正武經諸書)를 병위지서( 爲之序)하시다. 공께서 실록당상(實錄堂上)이실때 김일손 소재(金馹孫 所載)인 사초(史草)란 것은 김종직 소작(金宗直 所作)인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쓰고 그 말미(末尾)에다 세조 능욕사(世祖 凌辱事)를 부연(附椽)한 것이다.공께서 보시고 궐문(闕門)안에서 모르는 일을 궐문(闕門) 밖에서 인하이지지(因何以知之)인가 실록정서(實錄正書)가 2, 3일이면 끝나니 그시(其時)에 사실(査實)하자한 것을 2, 3인의 은고(隱告)로 발단(發端)된 것이다. 공께서는 부즉입계(不卽入啓)한 과실(過失)로 이배(移配)되어 어언 4개월(於焉四個月)을 남북으로 분주(奔走)하시다가 익년(翌年)에 사환(赦還)되어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수가거자락(遂家居自樂)하시다가 연산군9년(燕山君九年) 계해(癸亥:1503) 2월 28일에 병졸우가(病卒于家)하시니 향년이 69세이시다. 중종2년(中宗二年) 정묘(丁卯:1507)에 3남 세정공(世貞公)이 상소(上疏)하시와 설원명환직첩(雪寃命還職牒)되시었다.
중종28년(中宗二十八年) 계사(癸巳:1533)에 증시익평공(贈諡翼平公)하고 선조조(宣祖朝)에 세사부조지전(世祀不 之典)을 모시다. 묘(墓)는 조고청백리공묘소 우강(祖考淸白吏公墓所 右岡)에 계장(系葬)하고 정경부인 안동권씨(貞敬夫人 安東權氏) 할머니는 부군동원 쌍분좌(夫君同原雙墳左)에 장(葬)하다. 유 8남 2녀(有八男二女)를 두시었다. 장남 세전(世銓)은 성종14년(成宗十四年) 계묘(癸卯:1483)에 문과급제 하시고 통정대부부사(通政大夫府使)로 예조참판(禮曺參判)에 증직되시었다. 그 후 후손은 수원시파장동에 200호이상 집단거주하고 광원군부조묘(廣原君不 廟) 를 종손 거가좌편에 모시었으니 후손들은 제향날(祭享) 또는 명절이면 꼭 참사한다. 음력10월16일 밤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할머니 입제(入祭)이고 2월27일 밤은 광원군(廣原君)할아버지 입제이다. 제2남 세경(世卿)은 성종11년(成宗十一年) 경자(庚子:1480)에 문과급제로 돈영부첨정(敦寧府僉正)이시고 그 현손(玄孫)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때에 그쳤 다.
제3남 세정(世貞)은 연산7년(燕山七年) 신유(辛酉:1501)에 문과급제하시고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補德)으로 갑자사화(甲子士禍)때 적남해(謫南海) 하셨 다가 중종원년(中宗元年) 병인(丙寅:1546)에 몽유배판결사(蒙宥拜判決事)하시고 이친로(以親老)로 걸양보광주목사(乞養補光州牧使),해주목사(海州牧使),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내시고 중종15년(中宗十五年) 경진(庚辰:1520)에 전라감사 (全羅鑑 司)로, 입위좌승지(入爲左承旨),도승지(都承旨)로 오조참의(五曹參議)를지내시다.
그 후손은 성남시하대원동여수리(城南市下大院洞麗水里)에 기타 산거자 합하여 200호 이상되고 보성군(寶城郡)내 현거주호수가 600호 이상이고 남원지동(南原池 洞) 대동(帶洞) 기타 거주 호수가 200호 정도이며 광주(光州)에 300호이상, 서울 에 100호 이상 거주하고 있다.
제4남은 세륜(世綸)이신데 무과급제(武科及第)로 통정대부병조참의훈련원도정 (通政大夫兵曹參議訓練院都正)이고 그 후손은 충주영죽(忠州永竹)에 100호 이상, 성환복모리(成歡茯毛里)에100호이상, 양주광암지평송현(楊州廣岩砥平松峴)에, 동두촌(東豆川)에, 파주산남(坡州山南)에, 금촌(金村)에, 서울 등지에 각30호 이 상 거주하고 있다.
제5남 세응(世應)은 수사봉사(筮仕奉事)로 그 후손들은 황해도(黃海道) 산직동(平山稷洞)(괴직이)에서 80호 이상이 거주한지가 약 259년전 갑진(甲辰:1724)에 12세손 광운(光雲)께서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로 계실 때 괴직이 마을 마다 광주이씨화수회(廣州李氏花樹會)를 창립하시어 친히 양반후손의 상식범절을 지도하시었다. 해방후 월남한 분이 현 역촌동에 사는 기원(基院)현종형제숙질 1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제6남 세규(世規)이신데 일남을 두셨으니 양필(亮弼)인데 진사(進士)시다. 제7남은 세진(世珍)이신데 유일남인 엽(曄)이시다. 그 후손인 종현(鍾賢)이 6남 을 두었으니 6형제가 다 대졸이고 3명이 박사이다. 현재 미국에 거주한다. 이천 장호원(利川長湖院)이 원적이다. 제8남은 세희(世熙)인데 유일남 무필(茂弼)이다. 장녀는 송수(宋壽)로 목사(牧使)이신데 여산인(礪山人)이고 부는 생원(生員)으로 윤은(胤殷)이시고 외손 송맹경(宋孟璟)은 첨정(僉正)이고 외손 송말경(宋末 璟)은 현령(縣令)이다. 2녀는 노찬(盧瓚)의 집이다.
[광주이씨 대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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