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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 권태훈 선생님 (1900∼1994. 민족운동가, 단군사상가)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인학(寅鶴), 자는 윤명(允明) 또는 성기(聖祈), 호는 여해(如海), 봉우(鳳宇), 물물(勿勿), 연연(然然). 서울 재동(齋洞)출생. 권율(權慄)장군의 11대손이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내부판적국장(內部版籍局長), 평산, 진도(珍島), 능주 군수를 역임한 중면(重冕)이고,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경주 김씨이다.
중면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중현(重顯)과 형제의 의를 끊고, 1907년의 정미칠조약을 계기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권태훈은 이러한 특수한 가계와 집안분위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6세 때 조식법(調息法)을 배운 이래 선도(仙道)의 세계를 접하였으며, 유교경전들을 섭렵하였다.
10세 때인 1910년에는 서울 종로구 마동(麻洞)에 있는 단군교 포교당에서 나철(羅喆) 대종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충청북도 영동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수학 등 근대학문을 접하였는데, 이 때 일본유람단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3세에 선도계의 거인인 우도방주(右道坊主) 김일송(金一松)을 처음 만났으며, 19세에 그를 따라 구월산에 입산하여 3개월간 선도수련에 입문하였다. 이 때 좌도(左道), 우도(右道)의 여러 심법(心法) 등을 전수받았으며, 그 뒤 인천에서 산주(汕住) 박양래(朴養來) 등 선도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3.1운동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전쟁에 참여하였고, 국내로 잠입하여 지하운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 한독당(韓獨黨)에 가입하는 등 정치운동에 나섰으나 고난을 치렀다. 60세 때에 공주에 연정원(硏精院)을 신축하여 수련을 하다가 65세 때에 상경하여 한의원을 개업, 83세가 되는 1982년에 대종교의 최고지위인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단(丹)》이란 소설을 통해서 선인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1986년에는 한국단학회 연정원을 설립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89년에 수필집 《백두산족에게 고(告)함》을 출판하였고, 같은해《천부경(天符經)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를 구술, 감수, 출간하였다. 또한 1992년에는 《민족비전(民族秘傳) 정신수련법》을 구술, 감수, 출간하였다.
그리고 95세인 1994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上莘里)에서 운명하였다.
권태훈은 유ㆍ불ㆍ선의 여러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주로 선도를 바탕으로 하였고, 시대적 영향을 받아 민족종교인 대종교 사상의 영향도 받은 듯 하다. 6세 때부터 시작한 호흡법을 기본으로 평생 선도수행에 열중하였고, 예언ㆍ사상 등도 역시 그에 기초한 것이 많았다.
1951년에 이미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예언하였으며, 원자탄의 발명. 일본의 멸망. 남북의 통일. 중국의 분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을 비판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문명비평가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 권태훈이 "丹"이라는 책자를 발행함으로 인해 기와 단전 그리고 명상이나 기체조와 무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국선도, 단월드 같은 수행 학원이 증가했으며 매우 번창한 단체도 있는데 반해 연정원(원장: 성주흥)은 겨우 명맥만 연명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기 수행 지도자나 단체 또는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모두 권태훈의 이론이 바탕이 되었다.
연정원의 쇠약에 반해 봉우선생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대동원단회, 홍익학당 등 많은 수련단체에서는 세를 확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