豊山金氏 忠州派 略史(풍산김씨 충주파 약사)
豊山金氏는 始祖(시조) 金文迪(김문적)은 신라 敬順王(경순왕)
넷째 아들 大安君(대안군) 金殷說(김은열)의 11세손으로
豊山縣(풍산현)에 살면서 高麗祖(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을 세우고 佐理功臣(좌리공신)에 책록되어
判司使(판사사)에 올라 豊山伯(풍산백)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後孫(후손)들은 그를 始祖(시조)로하여 貫鄕(관향)을
豊山(풍산)으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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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世 휘 문적(金文迪) |
고려 판상사(高麗判相事)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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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휘 영현(永玄) |
호장중윤(戶長中允)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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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휘 유연(有連) |
신호위(神號衛) 산원(散員)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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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휘 연성(鍊成) |
좌우위(左右衛) 보승랑장(保勝郎將)으로 공신이다. |
계림(鷄林:경주)에서 안동 풍산현(豐山縣) 석릉촌(石陵村)으로 |
옮겨 살고 오릉촌(五陵村-현. 오미동)에 별서(別墅)를 두어 |
자리를 잡고 살만한 곳으로 정하였다. |
부인 풍산(豊山) 류씨(柳氏)는 호장중윤(戶長 中允) |
대령(大令)의 따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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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世 휘 합(盒) |
진사(進士)로 벼슬이 지숙천사(知肅川事)를 지냈다. |
부인은 풍산(豊山) 류씨(柳氏) 은사급제(恩賜及第) 백(伯)의 따님이며 |
아들 삼 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진사(進士) 윤덕(允德)이요, |
둘째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윤보(允寶)요, |
셋째는 별좌(別坐.) 혹은別將) 윤견(允堅)이다.(충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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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휘 允堅(윤견) |
합(盒)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별좌(別坐;혹은 別將)을 지냈다. |
부인은 보성선씨(寶城宣氏)는 낭장(郞將) 공윤(公允)의 |
따님이며 아들 휘 안정(安鼎)과 휘 순정(舜鼎)을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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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휘 안정(安鼎) |
( ? - 庚辰1400) 별좌공(윤견 允堅)의 맏아들 로 태어나 |
공민왕(恭愍王) 6(1357)년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 大夫) |
삼사좌윤(三司左尹: 實今之漢城判尹)에 이르렀는데 |
종반간에 송도(松都: 현 개성)에 살았다. |
부인은 보성(寶城) 오씨(吳氏) 좌우위보승별장 (左右衛保勝別將) |
(좌우위보승별장) 순(順)의 따님이며 |
아들 첫째; 자량(子良)충주파; 문과(文科), 판서(判書), |
둘째; 자순(子純)은 김포파, 영남파; 직장(直長) 형제를 두었다. |
豊山金氏 忠州派 略史(풍산김씨 충주파 약사) |
우리 豊山(풍산) 金文迪(김문적)은 高麗中葉(고려중엽) 始組(시조) |
金文迪(김문적) 判相事(판상사) 公(공)은 |
豊山伯(풍산백)에 封(봉)해저 姓(성)을 얻은 以來(이래) 나라와 더불어 |
그 盛衰(성쇠)을 같이하여 왔다. |
判相事(판상사)公(공)의 七世孫(칠세손) 安字(안자) 鼎字(정자) |
左尹公(좌윤공)은 麗末(려말)에 安民濟世(안민제세) |
之略(지략)으로 國家(국가)에 우뚝 솟았으며 長子(장자)이신 子字(자자) |
良字(량자) 寒竹軒(한죽헌)祖考(조고)의 後裔(후예)이다. |
忠州派(충주파) 公(공)은 高麗(고려) 恭愍王(공민왕) 壬辰年(임진년) |
1352년에 탄생하셨고 372년 中司馬(중사마)에 登科(등과) |
1373년에는 文科別試(문과별시) 壯元(장원)하시어 |
官(관)은 侍中(시중)에 이르렀다. |
公(공)은 일찍이 圃隱(포은) 鄭夢周先生(정몽주선생), 牧隱(목은) |
李穡先生(이색선생)의 門下生(문하생)으로 일약 성장 하셨다. |
高麗(고려)가 崩壞(붕괴)되고 李太祖(이태조)가 등극하자 公(공)은 |
草野(초야)에 隱居(은거)하시며 나라를 念慮(염려)하시다 |
其後(기후) 뜻하지 않았던 李太祖(이태조)의 三顧草廬(삼고초려)의 |
恩典(은전)을 받아 不得己(부득기)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셨고 |
1393年(년)에는 大司馬 大將軍(대사마 대장군) 韓城府判尹(한성부 판윤)을 |
歷任(역임)하셨으며 禮曹判書(예조판서)로 계시는 동안 |
知經筵 弘藝文 大提學(지경연 홍예문 대제학)을 兼任(겸임)하셨다. |
또 吏戶兵刑(이호병형)의 五曹判書(오조판서)을 두루 거치시고 |
老年(노년)에 이르러 外職(외직)으로 咸鏡(함경) · 慶尙(경상) |
觀察使(관찰사)로 계시다 不幸(불행)하게도 甲辰年(갑진년) 1400年 |
10月12日 趙思義(조사의) 亂(란) 휘말려 士禍(사화)로 돌아가셨다. |
이로 因(인)하여 書頭(서두)에 말씀드렸듯이 나라에는 興亡盛衰(흥망성쇠)가 |
있듯이 屈谷(굴곡)은 있는 法(법)인가 보다 3代(대)에 걸친 風塵(풍진)을 |
슬기롭게 보내신 祖上任(조상님)들의 놓은 氣像(기상)은 우리 後孫(후손) |
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兵判公(병판공)의 五世孫(오세손)이신 |
元字(원자) 吉字(길자) 參議公(참의공)은 士禍(사화)의 終止符(종지부)을 |
찍고 1502年에 出生(출생)하시고 1530年에 及第(급제)하여 |
兵曹參議(병조참의)에 이르렀으니 參議公(참의공)으로 因(인)하여 우리의 |
前途(전도)에도 登科(등과)의 門(문)이 열렸다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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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議公(참의공)은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
第1子 = 鑑(감) = 松都派(송도파)이시고 |
第2子 = 鎬(호) = 忠州派(충주파)로 |
第2子 = 鎛(박) = 長瑞(장서)및 豊德派(풍덕파)로 分布(분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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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특)히 第2子이신 鎬(호)자 祖考(조고)는 忠州派(충주파)로 우리의 |
中始祖(중시조)로 浮上(부상) 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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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공)은 1526년에 出生(출생)하시여 1555年(년)에 進士(진사), |
1562年(년)에 別試文科(별시문과) 及第(급제)하시고 通訓大夫(통훈대부) |
行(행) 龍安(용안), 三登(삼등), 橫城(횡성), 高陽君守 至 奉常寺正 |
(고양군수 지 봉상사정)으로 계시다 1594年 3月 29日 돌아가셨다. |
中始祖(중시조)이신 公은 松都(송도)에서 忠州府(충주부) 德面(덕면) |
黃金谷(황금곡)으로 落鄕(낙향)하시어 子孫萬代(자손만대)의 |
基盤(기반)을 이룩하시고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니 長子(장자) |
克忠 執義公(극충 집의공), 次子(차자) 克邦 直長公(극방 직장공), |
三子(삼자) 克家 司果公(극가 사과공))이 그 基盤(기반)을 굳건히 |
다져오시던 중 그 터전과 財産(재산)을 노리던 集團强盜(집단강도) |
10여명에게 急襲(급습)을 당해 죽음의 직전에 아버님을 대신해 |
죽음을 당하신 執義公(집의공)! 公의 本來(본래)의 性品(성품)은 |
性 至孝(성 지효)하시고 不離親側(불이친측) 하셨기에 가상하게도 |
아버지를 대신하여 칼을 받으시고 그 날이 아버님이 돌아가신 같은 |
날 2시간 전이였으니 出天大孝(출천대효) 執義公(집의공)은 아버님 |
忌日(기일)과 같은 날 1594年 3月29日이시다. |
그리하여 直長公(직장공)과 司果公(사과공)의 呼哭(호곡)과 |
執義公(집의공)의 六子(육자)들의 悲痛(비통)함을 엇지 다 記述(기술)하랴. |
그리하여 온 고을에 居住(거주)하는 住民(주민)들은 萬古大孝(만고대효) |
執義公(집의공)을 높이 찬양하여 나라에 상소되었고 曾孫(증손)이신 |
同知(동지) 中樞公(중추공) 夏錫(하석) 先祖考(선조고)에 힘입어 나라의 |
恩典(은전)을 받아 1736年에 孝子旌(효자정)을 건립케 되었고 後世(후세) |
우리에게 敎訓(교훈)을 남김, 즉 國家(국가)의 棟樑之材(동량지재)들이 |
公의 孝心(효심)을 높이 讚揚(찬양)하셨다. |
※嘉善大夫(가선대부) 司憲府(사헌부) 大司憲(대사헌) 兼(겸) |
成均館(성균관) 祭酒(제주) 世子(세자) 贊善元孫(찬선원손) |
輔養官(보양관) 閔遇洙(민우수) 撰(찬) |
※大匡輔國崇錄大夫(대광보국숭록대부) 領(영) 中樞府事致(중추부사치) |
仕奉朝賀(사봉조하) 兪拓基(유척기) 篆(전) |
※崇政大夫(숭정대부) 行(행) 吏曹判書(이조판서) 兼(겸) 藝禁府事 |
(예금부사) 知經筵(지경연) 春秋館事(춘추관사) 金陽澤(김양택) 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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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世人(세인)들의 흠모를 받으신 大孝(대효)이시다. |
公은 일찍이 六兄弟(육형제)을 두셨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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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子 瑺(상) 1576年生 中部(중부) 主簿(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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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子 璉(연) 1579年生 行內廳正都摠經歷(행내청정도총경력), |
都正(도정), 通政大夫(통정대부) 行(행) 草溪郡守(초계군수) 兼(겸) |
晋州鎭管(진주진관) 兵馬節制都尉(병마절제도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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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子 璿(선) 1585年生 贈通政大夫(증통정대부) 承政院(승정원) |
左承旨(좌승지) 兼(겸) 經筵參贊官(경연참잔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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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子 珩(형) 1587年生 通訓大夫(통훈대부) 監察(감찰) |
江陰(강음) 縣令(현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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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5子 璜(황) 1590年生 宣傳官(선전관) 贈通訓大夫(증통훈대부) |
訓練判事(훈련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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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6子 瑨(진) 1592年生 朝散大夫(조산대부) 工曹正郞(공조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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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長公(직장공)의 子 瓚(찬) 1594年生 通德郞(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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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果公(사과공)의 子 瑜(유) 1587年生 嘉善大夫(가선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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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행)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 忠翊衛將(충익위장) 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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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와 孫(손)을 두셔서 忠州三派(충주삼파)에서 忠州八派(충주팔파)로 |
至稱(지칭)되어 왔다. 追遠之誠(추원지성)과 孝悌之心(효제지심)을 |
永遠無窮(영원무궁)토록 繼承發展 되기를 渴求(갈구)하며 |
不甚繁珩(불심번형)의 境地(경지)을 脫皮(탈피)하여 現在(현재) |
700餘(여) 世大(세대)에 이르렀으니 위로는 代代顯祖(대대현조)들의 |
大爵(대작)이 相襲(상습)되어 門中(문중)에 家聲(가성)을 |
높이고 아래로는 派分(파분)이 廣珩(광형)된 가운데 現代(현대) |
著名人士(저명인사)들이 禁然(금연)하고 國內(국내) 國外(국외)의 |
모든 分野(분야)에서 활발히 活動(활동)하고 있으며 앞으로 |
더더욱 발전 할 것이다.
ㅇ풍산 김씨 항렬자(行列字)
ㅇ풍산 김씨 항렬자(行列字)
24세 |
欽 |
흠 |
31세 |
柱東 |
주 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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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
洛 |
락 |
32세 |
熙煥 |
희 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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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
秉 |
병 |
33세 |
圭均 |
규 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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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
燮 |
섭 |
34세 |
錫 |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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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
在 |
재 |
35세 |
泰永 |
태 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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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
鉉 |
현 |
36세 |
植根 |
식 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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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
淵 |
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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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순 김 병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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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사의의 난 趙思義 ── 亂 조선 태종 때 안변부사(安邊府使) 조사의(?~1402)가 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 조사의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1398년(태조 7) 안변부사가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아들인 왕세자 방석(芳碩)이 제거되자 이들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난을 일으켰다. 1402년(태종 2) 11월 5일에 군사를 일으켰는데, 대호군 안우세(安遇世)가 동북면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정부는 상호군 박순(朴淳)을 보내 이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박순은 함주(咸州)에 이르러 도순문사 박만(朴曼)과 주·군 수령을 회유하다가 군중에게 피살되었다.
호군 송류(宋琉)도 명령을 받고 함주에 이르렀다가 역시 피살되었다. 이 지역은 태조의 수하가 많은 지역이라 태조의 양위에 대한 지역민과 여진족의 불만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반란 초기부터 태조의 행적도 심상치 않았고, 그의 관련설 때문에 진압과 사후처리에 논란이 많았다.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