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가 죽었다. 조회와 저자[市]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로서 쌀과 콩 각 70섬, 종이 2백 권을 주고 관에서 장사를 비호(庇護)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는데, 자신을 위태하게 하면서 윗사람을 받든 것이 충이고,
의(義)에서 행하면서 일을 이루는 것이 경이다.
재는 경상도 의령이 본관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 지금 일에도 밝고 옛 일에도 통달하였다.
대성(臺省)을 역임하고 중외에 드나들어 경세 제민(經世濟民)하는 재간이 있었다.
〈고려가 조선으로〉 세상이 바뀔 무렵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재한테서 많이 나왔고,
갑술년 사이에 상왕이 왕자로서 명나라에 들어갔을 때 재가 따라갔는데, 그
때 함께 갔던 재상이 자못 불공하였으나 홀로 재만은 예로서 공경하였다.
무인년에 그의 아우 남은(南誾)이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과 더불어
여러 적자를 없애버리기로 모의하였으나,
상왕이 재는 모의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고 사저(私邸)에 두었다가,
사건이 평정된 뒤에 죽음을 면하게 하여 귀양보내고 다시 소환하였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하여 우의정에 이르고 부원군에 봉하게 되었는데,
상왕이 기구 대신(耆舊大臣)으로서 특히 예모(禮貌)를 더하여 대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죽으니, 나이 69세였다.
그의 손자 남휘(南暉)는 상왕의 네째 딸 정선 공주(貞善公主)와 결혼하였다.
[주D-001]갑술년 : 1394 태조 3년.
[주D-002]상왕 : 태종.
[주D-003]무인년 : 태조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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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년 기해(1419, 영락 17)
12월 17일(정해)
상왕이 의령 부원군 남재의 빈소에 치재한 교서
상왕이 병조 참의 윤회에게 교서를 주어서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의 빈소에 치제(致祭)하였다.
교서에 말하기를,“생사의 길고 짧은 이치는 대개 천명의 자연에 인함이요, 슬프고 영화로움에 증작(贈爵)하고
무휼(撫恤)하는 임금의 은혜는 실로 국가의 떳떳한 법이라,
하물며 고굉(股肱)의 늙은 이에게 어찌 융숭한 예수(禮數)가 없으랴. 경은 성질이 영걸하고 식견이 고매하매,
학문은 들은 것이 많고 적선한 나머지 경사스러운 일도 많았다.
천명의 거취(去就)를 알고 인심의 향배(向背)를 살펴, 고려의 국운이 썩어 들어가고 우리 집 왕업이 일어날 때를 당하여,
태조를 몸과 마음으로 도왔고, 생민을 도탄에서 건졌으며,
의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단하여 창업하는 큰 규모를 도와 이루었고,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여 개국의 중요 정책에 협력하였다.
오부(烏府)의 기강을 진작하니,
간사한 무리는 모두 낙담하였고, 은대(銀臺)의 후설(喉舌)을 맡아 왕명을 출납함에 있어서 면종(面從)하지 않아,
명망은 조정에 높고, 풍성(風聲)은 중외에 떨쳤다.
일찍이 내가 〈명나라에〉 조근하던 날, 부사(副使)가 되어서 발 벗고 물 건너는 수고로움을 꺼리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뒤, 더욱 보필의 공을 발휘하여 자신의 안위를 걸고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였으며,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였음은 후인에게 경계가 될 만하고,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였음은 진실로 철전(哲前)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나이 더욱 높아도 기운은 더욱 장하였으며, 벼슬이 더욱 높아도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바야흐로 정양(靜養)하여 한가롭게 거처하고, 함께 태평 세월을 길이 향유할까 하였는데,
한 번 병이 들어서 갑자기 구천으로 떠날 줄 어찌 알았으랴.
말이 이에 미치매 슬픔이 그지 없도다. 어허, 경이 지키던 지조는 생사에 따라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만약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어디에 고문하여 결정할까.
변변치 못한 휼전(恤典)을 베풀어 조금이나마 영령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주D-001]오부(烏府) : 어사대(御史臺), 즉 사헌부의 별칭.
[주D-002]은대(銀臺) : 승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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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년 기해(1419, 영락 17)
12월 19일(기축)
법가를 갖추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제사를 내리다.
임금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임금이 그 집 문전 6, 7보 앞에서 말을 내려 악차에 들어갔는데,
상주(喪主) 남지(南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맞이하였다.
지에게 명하여 잔을 올려 제사를 드리게 하고, 소윤(少尹) 김상직(金尙直)이 교서를 읽었다.
제를 마친 다음 임금이 법가를 돌렸는데, 지(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애곡(哀哭)하니,
임금이 식(軾)에 이마를 대어 예하고 지나갔다. 그 교서에 말하기를,
“듣건대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한몸 한마음이라.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에게 살아서는 작록으로 영화를 주고, 죽어서는 조휼(弔恤)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고금에 통한 의리요,
국가의 떳떳한 법칙이다.
생각건대 경은 낭묘(廊廟)의 거룩한 자질과 산하의 뛰어난 정기를 타고 나서 백가(百家)의 학문을 다 닦고
세상 만사의 변화를 처리하는 재주가 있었다. 대[竹]를 쪼개고 물고기를 나누매,
백성들은 바지[袴]가 다섯 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고,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매 노래는 감당(甘棠)에 미쳤도다.
착한 정책을 건의하고, 아름다운 정치를 실시하여 후설(喉舌)의 책임을 맡으매, 탁한 것을 물리치고 맑은 것을 드높였으며,
오대(烏臺)에 있을 때, 홀로 그 명망이 우뚝 솟았고, 암랑(岩廊)의 영수(領袖)가 되어 만사를 조화하여
정내(鼎鼐)와 같이 안정시켰으며, 중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성명(聲名)이 자심(藉甚)하였다.
옛날 고려 말기의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이 흩어져 천명과 민심이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자,
경은 그 기미를 밝게 알고 성조를 추대하여 억만년 무궁한 큰 자리를 개창하였고, 우리 상왕께서 명나라에 조근(朝覲)할 때
경도 또한 배종(陪從)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상왕의〉 고생스럽고 어려움을 막았으매,
〈내가〉 왕위에 오르자 비익(裨益)함이 더욱 많아,
어린 나에게는 경과 같은 늙은이가 더욱 수감(水鑑)과 약석(藥石)이 될 것인데, 지금 그만이니 무엇으로 마음을 잡을까.
하물며 경은 과인에게 옛 은혜의 교분이 있고, 경의 손자는 인척의 경사가 있어, 장차 백료(百寮)의 의표(儀表)가 되어
네 세대를 보필할 것이라 하였더니, 하늘이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심인지 갑자기 방아노래를 멈추게 하였으니,
마음 아픔을 어찌 참으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삼가 상사(喪事)를 치르게 하고,
이제 박한 제물을 갖추어 소유(素惟)에 와서 제전(祭奠)을 드리노라.
어허, 국가와 함께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길이 두 어깨에 졌으니,
애도하고 영광을 주는 예도 존망간에 극진하리로다.”라 하였다.
[주D-001]식(軾) : 수레 앞에 가로막이한 나무. 수레를 타고 가다가 상복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여기에다 이마를 대어서 조의를 표하였음.
[주D-002]대[竹]를 쪼개고 : 병부(兵符). 지방의 수령 및 장수에게 병부의 한 쪽을 쪼개어 주어서 신표(信標)로 삼았음.
[주D-003]물고기를 나누매 : 구리[銅]로 물고기 모양의 인장을 만들어서 신표로써 그 반쪽을 지방관에게 주던 것임.
[주D-004]백성들은 바지[袴]가 다섯 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고 : 동한(東漢)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었는데,
전에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밤에 불을 켜고 일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염범은 물을 많이 준비하여
밤에 일을 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편케 여겨서 노래를 불렀는데, “염 숙도(廉叔度:염범의 자)가 왜 늦게 왔던가.
불을 금단하지 않으니 백성이 편케 일한다. 전일에는 적삼도 없었는데,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일세.”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정사를 잘하였다는 것을 의미함.
[주D-005]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매 : 동한(東漢) 환제(桓帝) 때 기주(冀州)에 도적떼가 일어났으므로,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조사하게 되었는데,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아당길 적에 개연히 천하를 맑고 깨끗하게 할 마음이 있었다고 함.
[주D-006]감당(甘棠) : 나무 이름인 동시에 《시전(詩傳)》 소남편명(召南篇名)이기도 함. 주나라 소공(召公)이 남국을 순행하며
정사를 다스리고 농사를 권하면서 감당 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뒤에 백성이 그를 사모하여 그 나무까지 사랑하여 시를 지었다 함.
[주D-007]암랑(岩廊) : 의정부.
[주D-008]정내(鼎鼐) : 큰 솥.
[주D-009]경의 손자 : 정선 공주의 부마 의산군 남휘.
[주D-010]백료(百寮) : 백관.
[주D-011]갑자기 방아노래를 멈추게 하였으니 : 진(秦)나라 목공(繆公) 때에 백리해(百里奚)가 정승으로 정사를 잘하다가 죽으매,
아이들은 노래 부르지 아니하고, 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방아노래를 중지하였다는 고사에서, 정승이 죽은 것을 뜻함.
[주D-012]소유(素惟) : 빈소.
[주D-013]휴척(休戚) :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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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4년 임인(1422, 영락 20)
1월 5일(계해)
신궁에 문안하고, 남재·이제·남은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임금이 신궁에 문안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등의 사당(祠堂)에
사제(賜祭)하고, 장차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알렸다.
남은에게는 강무(剛武)란 시호를 내렸으니, 강의 과감(强毅果敢)한 것을 강(剛)이라 하고, 화란(禍亂)을 능히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이제에게는 경무(景武)란 시호를 내렸으니, 큰 계책에 뜻을 둔 것을 경(景)이라 하고, 화란을 능히 평정한 것을 무(武)라고 한다.
헌부에서 글을 올려 아뢰기를,“남은과 이제는 죄를 지어 참형(斬刑)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배향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소(疏)가 올라가니, 대궐 안에 머물게 하고 내려 보내지 아니하였다.
남재(南在)에게 내린 교지(敎旨)에,
“대업을 처음 일으키는 임금은 반드시 여러 대(代)만에 나는 현인에게 힘입게 되며,
큰 공을 세우는 신하는 마땅히 무궁한 보답을 누려야 될 것이다. 이는 곧 공변된 의리이며 사사의 은혜는 아니다.
경은 학문이 고금(古今)의 사적을 통달하고, 식견은 기미(幾微)의 일까지 환하게 알았다.
활달한 높은 생각으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원대한 계책을 쌓았었다.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쇠진한 때를 당하여 천명(天命)의 거취를 알게 되었다. 이에 여러 공들과 더불어 의논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하고
성조(聖祖)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억만년 무궁한 경사(慶事)를 마련하였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배향할 신하를 널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경(卿)이라.’고 하였다.
지금 봄 제사를 거행함에 있어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특별한 공훈에 보답하니, 상상컨대,
알음이 있거든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라고 하였다.
남은에게 내리는 교지(敎旨)는,
“천운(天運)을 도와 나라를 세운 것은 신하의 큰 공렬이요, 공을 기록하여 제사를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규정이다.
경은 영매(英邁)한 자질로써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방략(方略)을 가졌었다. 식견은 정치의 방법을 통달하고, 총명은 기미(幾微)를 환히 알았었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잔함을 당하여, 천명이 돌아가는 데가 있음을 알았었다.
큰 계책을 먼저 세워 우리 성조를 추대하여 처음으로 큰 기업(基業)을 마련하였다.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어 무궁한 경사를 계승하였다.
맹부(盟府)에 기재되어 있으니 환하게 상고할 수 있다. 이로써 경을 올려서 우리 태조에게 배향하여, 묘정에 종사하게 하여 특별한 훈공에 보답하니,
나의 이 명령을 받을지어다. 아아, 그대의 큰 공적을 가상(嘉尙)히 여겼으므로 포숭(褒崇)을 극진히 하였고,
우리 선왕을 도왔으니 마땅히 길이 보필에 힘쓸 것이다.”
하였다. 이제에게 내린 교지(敎旨)는,
“천운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니, 능히 세상에 드문 공을 이루었고, 덕에 보답하고 은혜를 〈남에게〉 미루어 주니,
마땅히 비상한 은총(恩寵)을 내려야 될 것이다. 경은 웅위(雄偉)한 자질로써 우리 왕가(王家)의 구생(舅甥)의 친(親)이 되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신하여 태조를 섬겼었다.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쇠진하여 정치와 교화(敎化)가 점차 쇠퇴하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덕 있는 분에게 모이었다. 경이 능히 의(義)에 의하여 계책을 결정하고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비로소 국가를 세웠었다.
생민(生民)의 고통을 구제하여 만세(萬世)의 경사(慶事)를 마련하였으니, 그 특별한 훈공과 큰 공적은 모두 맹부(盟府)에 기재되었다.
지나간 행적을 기록하는 일은 내 한 사람에게 있으므로, 이에 종사(從祀)의 의식을 거행하여 훈공에 보답하는 전례(典禮)를 보이노라.
아아, 이 큰 공을 생각하여 인사(禋祀)를 영원히 지내게 하니, 우리 선후(先后)를 도와서 큰 왕업을 무궁한 세상까지 도울지어다.”
하였다.
첫댓글 여기서 상왕(上王)이라고 칭하는 왕은 태종(이방원)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