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의 설립
선감학원의 명칭은 처음에는 가칭으로 '갱생원'이라고 하였으나, "갱생원이라는 이름은 소록도의 갱생원과 혼동할 염려가 있으니 사용하지 말라"는 총독부의 지시로 '선감학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선감학원의 건립비용은 선감도 주민에 대한 보상비 31만원과 건축비 19만원을 합하여 모두 50만원으로 당시 총독부 예산과 사회단체의 기부금으로 조성하였다. 이때 선감도의 땅은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매입하고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의 대부분은 퇴거시켰다. 물론 이때 매입보상을 받은 것은 지주에 한정되었다.
당시 선감도에는 91가구 529명이 거주하였는데(1941년) 토지소유는 일부가구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초에 토지조사사업으로 만든 「토지소유부」에 의하면 선감도의 농경지는 밭 59,882평, 논 81,074평으로 약 14만평이었다. 농경지를 10평 이상 소유한 사람은 모두 86명으로 이 가운데 3명의 지주가 7만2천 평을 소유한 것으로 기록되었다(또 다른 3명이 5천 평 이상 소유, 6명 ⇒ 8만8천 평).
1941년 토지매수 당시에는 논이 1만7천 평 정도 늘어나 전체 농경지는 15만 7천 평으로(미등록지 45,316평 제외) 조사되었으나, 이때의 소유주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분해과정이 중소지주층이 몰락하며 대지주로의 토지집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선감도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수의 지주들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았겠지만 농토가 없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소작지를 빼앗기고 퇴거하여 그들 역시 도시의 토막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감학원 운영을 보조할 인원으로 15가구의 70여명만을 남겨 놓았는데 이로써 선감도는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수용소'와 같은 섬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는 이미 1923년 5월 개성에, 1936년 7월에는 인천에 소년범 만을 수용하는 소년형무소를 특별히 설치하였다. 그런데 감화원의 수용 대상자는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육지와 격리된 외딴 섬에 수용하여 중범자 취급을 하였다. 이러한 행태 자체는 이미 본래의 설치 목적과는 다른 뜻을 지닌 것이며, 어떤 술책이 담겨져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선감학원의 개원과 운영

선감학원생들의 김장 담그는 모습 Ⓒ 홍석민
당시 일본에는 한개 현에 하나씩의 감화원이 설립, 운영되었다. 일본의 감화교육은 사회개량적 차원에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사전에 막고 사회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토지수탈에 의해 농촌으로부터 내몰린 화전민,토막민 등 빈민이 급증하면서 정착할 수 없는 부랑자, 거지들에 대한 “청소”로서 진행되었다.
1941년 가을 착공한 선감학원은 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건립되었다. 공사는 이듬해 봄에 완료되고 4월 20일 츠카모토(塚本)가 원장이 되어 개원하였다. 1942년 4월 1차로 200여명의 소년이 처음 수용되었다. 부랑아들이 선감학원으로 잡혀간 경위는 경성 내 길거리에서 부랑․걸인 생활하는 10세 이상 17세 이하의 소년을 숙청하기 위해 경기도 형사과와 부내 각 경찰서가 협동하여 이들을 전부 검거해 선감학원으로 보낸 것이다.
일제는 2차로 그해 11월에 "28일부터 12월 3일까지 길거리에서 부랑생활을 하는 10세 이상 17세 이하의 소년을 남김없이 검색하여" 선감학원에 보냄으로써 "도시의 명랑을 얻고 동시에 이 소년들은 낙원인 선감학원에서 자애 있는 보육을 받아 훌륭한 황민이 될 것"이라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수용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섬 지역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권유린 사태가 일어났다. 엄격한 규율과 통제 아래 소년들은 20만평(미 등록지 포함)에 달하는 농지의 상당부분을 농사기술의 습득과 자급자족이라는 미명하에 직접 농사인력으로 동원되어 중노동에 시달려야했다.
또한 1942년 7월에 개최된 ‘조선총독부 소년계 판검사회의 서류철’에 의하면, 선감학원 등 감화원의 목적을 “사회 반역아 등을 보호·육성하여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늘리자.”라는 취지를 천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는 1943년 11월 당시 야외교육 장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칠판의 글씨 내용]
11월6일 토요일 맑음 (1943년)
지원병[志願兵]
천황폐하의 감사한 호의로 우리들도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명예로운 일본의 군인이 된다는 일은 더없는 행복이다.
나는 몸을 단련하고 마음을 닦아서 훌륭한 청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원병이 되어 천황폐하의 고마운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이 칠판에 쓰인 글은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확보하라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44년 6월 2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선감학원에서 “황국신민의 산업전사”로 양성하고 "규율에 단련된 연성아(練成兒)" 61명(1차 21명, 2차 40명)을 탄광의 노동자로 보내고 있었다.
선감학원에는 주로 경성부내 부랑아들과 경기도의 부랑아들이 수용되었고, 형무소의 소년 수감생들도 이곳으로 이감되었다 한다. 교육목적은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교화․훈련이라고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쟁에 필요한 충실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선감학원생들의 정신교육 모습 Ⓒ 홍석민
1942년 당시 국민학교 2학년 학생으로 선감학원의 원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3년 여 동안 생활했던 이하라(井原宏光)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당시 눈으로 보이는 육지는 불과 300여m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썰물 때 선감도에서 바라보는 화성 마산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많은 소년들이 탈출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살이 빨라 대부분 익사하거나 육지에 닿았다 하더라도 곧 잡혀 왔습니다. 물론 잡혀 와서는 지하실에 감금되어 잔혹(殘酷)한 체벌을 받았지요. 학원에서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이들 가슴에 선감도의 「仙」자를 쓴 작업복을 입히고, 저녁에는 이를 모두 벗게 하여 교관들이 인원 파악을 하고 탈출을 못하도록 벌거벗은 채로 재웠습니다.”
또한 그가 자전적 소설로 쓴 『아! 선감도』에는 “굶어죽기 일보직전인 원생들이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2년 사이에 10명이었고 폐결핵환자가 10명,배고픔으로 아무 풀이나 먹어 위염, 위궤양 등의 질환자도 늘어났다. 도망갔다 잡혀온 자는 뒤로 손을 높이 묶어놓고 죽도로 미친 듯이 두들겨 팼다. 등과 허벅지와 엉덩이에서 분출해 나온 피는 마당의 돌을 순식간에 물들이고 마침내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은 자도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결국 소년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에서 출발한 선감학원은 실제적으로는 어린 소년들을 소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러한 인권의 사각 지대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죽거나, 구타로 인하여 또 영양실조로 죽은 경우 그리고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씹다가 독버섯류를 잘못 먹어 죽는 경우 등 수많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되었고 이들은 그대로 섬의 한 구석 야산에 내팽개치듯 매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댓글 지금도 친가는 대부도, 외가는 선감도에 있습니다. 외가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선감도(원래는 대부도에 터를 잡았으나 천주교를 믿었기에 조선시대때 선감도로 이주했다고 합니다)에 터를 잡고 살았고 어머니(41년생)도 결혼전까지 선감도에서 계속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선 기존에 살던 사람들을 전부 퇴거시킨 것처럼 쓴 구절이 있지만 그게 꼭 정확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본문에 밝혔듯이 "91가구 529명 중 선감학원 운영을 보조할 인원으로 15가구의 70여명만을 남겨 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사람으로 그 당시 선감도에 살았다면 선감학원의 직원이거나 보조직원이었다는 얘기라는 말씀이지요?
선감학원에서의 잔악한 짓을 자행한 자들은 결국 한국인이 아닌 일본놈들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은 입이 만개면 뭐합니까. 할 말이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