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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잠들지 못 하는 애국지사 김 철 선생을 위하여 ― 전라남도 나주시 금계동 74-13번지 나천수 김 철선생은 1886년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리에서 출생하여 일본 明治大 법과를 졸업하였고 1917년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임정의 주요직을 거치면서 조국 광복 운동을 하셨으며 1962년 3․1절을 기해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함평군지등 자료에 의한 선생의 약력을 살펴보면 일본 明治大 법과 졸업후 1916년 중국 망명, 臨政에 가담하였다. 1919년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남도 의원에 당선되고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겸 법무위원에 피선 되었다. 그 후 교통차관, 교통총장대리에 임명되시고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25년 임정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고 1927년 군무장(국방부장관)에 임명 1932년 상해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피선, 항주 淸泰旅社로 판공처를 옮긴 후 첫국무회의에서 金澈은 군무장에서 재무장(재무부장관), 金九는 재무장에서 군무장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무임소장 전임,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 되었다. 그리고 1934년 6월 29일 절강성에서 운명 하셨다. 나는 향토사에 관심이 있어 내가 그 동안 김 철선생을 어떤 연유로 알게 되고 이역만리 중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일 하시다가 돌아가신 원혼을 위해 잃어버린 묘지를 찾고 중국 절강성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노력하면서 후손들의 소망인 국립묘지 이장을 위해 노력해 왔던 활동한 사항을 기록하고자 한다. 1993년 5월경에 나는 전라남도 국제협력계에서 일을 하던 중 중국 절강성과의 교류 타진 차 절강성 방문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방문하는 중국이어서 매우 설레인 가운데 현지와의 교신을 하고 출국 준비를 하고 있을 때 6월16일자 지방 언론지인 무등일보에 광복절을 기해 상해 만국묘지에 안치된 임시정부 총리급 인사 5명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하는데 절강성에 묻힌 임정요인 김 철선생만은 고국에 봉안이 되지 못 하는 가족의 애타는 심정을 보도하였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언론사에 전화를 하여 광주시 서구 월산4동(전화365-2240)에 거주하는 관련 후손인 김 철선생의 조카 金達根노인장과의 전화 연락이 되었고 7월말경에 본인이 절강성을 방문할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김철선생의 묘를 찾아보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金達根씨가 도청을 방문하여 첫만남을 가졌다. 김 철선생은 딸만을 두었는데 따님의 이름은 金美卿, ‘93년도 당시 연령은 63세이고 김노인은 79세였으며 김미경씨는 현재 미주LA(전화 213-525-0718)에서 김 철선생의 외손녀인 딸과 함께 살고 있단다. 김노인은 김철선생 따님의 오빠가 되는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김노인의 말에 의하면 1932년 상해 虹口 공원(현재는 魯迅 공원)에서 尹奉吉 의사 폭탄투척 義擧 이후 일본 군경에 의해 임시정부 요인 체포 및 탄압이 시작되어 부득이 임시 정부를 절강성 항주로 옮겨 淸泰旅社 32호실을 臨政 辦公處로 사용하면서 광복운동을 하던 중 극도의 피로와 급성 폐렴으로 불행히도 1934년 6월29일 선생의 나이 48세에 절강성 廣慈병원(현 절강성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최후를 마치었다. 장례는 金九선생이 주도하에 臨時政府葬으로 杭州 岳坎後山 裏東山路湖山堂 公墓에 안장하였다. 상해 臨政이 절강성으로 온지 2년째의 일이다. 그러나 해방이 후 한 번도 묘지를 가보지 않아 실제 묘지가 보존되었는지 의문이라고 하면서 낡은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퇴색한 김 철선생의 묘와 묘비명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묘비판이 나무도 아니고 돌비석도 아닌 종이 위에 쓴 것이었다. 임시정부 요인을 추적하고 있어 그 당시 묘를 만들고 종이로 쓴 묘비명을 앞에 두고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묘비판이 종이판이라는 사실에 金노인도 수긍하였다. .金노인이 김 철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와 지금까지 보도된 신문 스크랩을 나에게 복사하여 주면서 金노인도 지금까지 얻은 정보에 의하면 김 철선생의 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7월9일 절강성정부에 김철선생의 묘지를 찾도록 연락하고 나도 중국방문시 묘터 방문할 계획을 통보한 바 7월20일 절강성으로부터 김철선생의 묘소는 1978년경 도시개발 사업(APT건립)으로 묘터가 없어졌다고 회신이 왔다. 나는 만약 김철선생의 묘가 없어졌다면 현지에서 초혼 봉안해 오기로 하고 取土祭를 위한 제물 준비를 부탁하였다. 7월말경 아시아나機가 목포 비행장 착륙중에 화원반도 끝머리 산중턱에 추락한 사건이 생겨 상황실에서 긴급 대책추진이 진행되는 가운데 7월28일 나는 공업과 金載坤 계장과 같이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절강성측에서는 부주임韓國勁, 부처장陸國灝, 통역趙盛姝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7월29일 나는 항주시청을 방문하고 부시장을 예방하였으며 항주시 외사판공실에 1978년 당시 서류를 확인해 줄 것을 부탁하고 절강성 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절강성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대략 한바퀴 순방하는 식의 답사를 끝내고 항주로 돌아와 8월5일 항주시청을 재 방문하였다. 항주시청측은 당시 서류로는 무연고 묘로 처리된 김철선생의 묘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만약 무연고 묘 이더라도 묘비가 있었다면 기록을 남기는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묘비도 없었지 않나 하고 추측하였다. 나는 당시의 공동묘지터인 岳坎後山을 항주시 안내인과 같이 찾기로 하고 우선 취토봉안해야 할 棺을 사고자 문의 하였던 바 중국 안내겸 통역을 하는 趙盛姝 여사가 火葬場 관리사무소로 안내해 주었다. 中國棺은 화장 문화이기 때문에 관의 크기가 길이 약30CM, 높이 20CM 이하로서 손에 들고 이동하기가 매우 쉬웠다. 木棺 옻칠이 된 것을 사니 붉은 색 보자기도 덤으로 받았으며 祭를 지낼 紙榜文은 관리인 노인에게 일금 30元을 주고 대필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장, 재무장, 외무차관, 국무원 비서장, 전라남도 초대 대의원 故 金澈선생 神位』라고. 이 紙榜 문안을 본 항주시 안내인이 매우 놀라워했다. 대한민국의 고위직이라는 것을 알고 杭州市史에 揭載코자하니 자료를 보내 달라고 한다. 그날 따라 항주의 기온은 낮기온이 37도로서 땀이 비 오듯한 가운데 당시 묘터를 도착하니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조국을 위해 일하신 분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여 술잔을 올리고 허공을 향해 再拜를 올리니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렸다. 나는 한참 동안 북받치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나의 모습을 본 중국 안내인들이 좀 의아했을 것이다. 울음을 그치고 나는 취토하여 관에 넣고 아울러 잔디도 棺에 담았다. 김철선생의 원혼을 감싸 않은 잔디마저도 고국으로 돌아가 같이 모시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붉은 보자기로 관을 정성스럽게 싸서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에 金노인에게 전화를 하여 취토 봉안한 관을 가지고 귀국 할 것이라고 말하니 金노인은 어떻게 관을 가지고 올 것인가에 대해 걱정을 했단다. 8월6일 우리는 상해로 와서 출국 준비를 하는데 상해시 외사판공실 안내원이 흙은 통관이 안되는 품목이라고 걱정을 해주었다. 나는 상해시측에서 별도의 확인서를 만들어 주길 부탁했으나 불가능 한 사항이라 하기에 공항에서 내가 출국하는 과정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상해의 마지막 밤을 貴都호텔에서 그 동안 정들었던 陸國灝, 趙盛姝와 이별의 밤을 보냈다. 8월7일 우리는 상해공항에서 출국 수속과 한국 입국 수속을 하고 난 다음 나는 김철선생의 원혼이 나의 입출국을 도와주었다는 믿음이 선 사례를 말하고 싶다. 취토봉안하는 관을 손에 들고 큰 가방은 끌고 엑스레이 검사대까지 왔는데 큰 가방만 엑스레이 대에 올리고 손에 든 관은 엑스레이 대에 올리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렸다. 엑스레이 대에 올리면 검색에 걸릴 것 같아 순간의 판단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상해공항 검색대에서도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통관의 기쁨이 가슴을 벅차게 하면서 나는 기내에서도 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金澈선생의 상해 광복활동을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해 보았다. 日警에 쫓기고 배고프고 고달파도 이를 악물고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분의 혼령마저도 묘가 없다는 이유로 국립묘지로 안장되지 못하는 우리의 법규정이 과연 애국지사를 위한 법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중국에 다녀온 사항과 내 이름을 거명하여 공무원으로서 추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방정부 대표로 절강성을 방문하고 아울러 임정요인 김 철선생의 혼령을 취토봉안해 왔다고 말하자 그때야 그 사람은 자기를 밝혔다. 자기는 나주 노안면이 고향이고 공항 경찰대에 근무하는데 자신의 형님하고 이름이 똑같은 내가 입국자 명단에 있어서 호기심에서 나를 찾았단다. 나는 그가 말하는 나와 이름이 똑같은 그의 형을 기억한다. 그는(그 사람 이름도 千洙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현재 지방 법원의 판사로 일하고 있고 그의 아버지까지 알고 있음을 시사하자 그는 나의 중국 활동에 깜짝 놀라며 계통을 통해 보고를 하고 나를 검색없이 무사 통관하도록 조치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두가지 일이 귀신의 도움이 없으면 이루어 질 것인가(?) 생각하니 김 철선생의 원혼이 50년만의 귀국을 위해 보이지 않게 도와 주었다고 느껴졌다. 국제선 제2청사 밖에서 나는 한참 만에야 金노인 일행을 만나 먼저 붉은 보자기에 싸 온 관을 전달했다. 金노인은 관을 붙들고 한참을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다. 50년만의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공항 휴게실에서 차를 나누면서 나는 중국에서 활동했던 사항을 간략히 보고 드리고 항주시에서 요구한 김철선생 자료를 보내주기로 하였다. 나는 李鈞範도지사가 주재하는 아침 간부회의장에서 귀국보고를 직접하고 애국지사 김철선생에 대한 자료 제공과 국립묘지 이장 추진에 대해서 협조요청을 국가보훈처에 보고하였으나 반응이 전혀 없었다. 8월11일 항주시 측에서 9월중에 한국 방문시 전남지역 방문을 희망하면서 시단위 교류 대상지역 소개를 요청해 왔으며 애국지사 김철선생에 대해서 항주시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의 협의 방안이나 필요한 의식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서신이 접수되었다. 나는 公的 채널을 통해 여천시를 교류 파트너로 추천을 하면서 김노인이 제공한 김철선생의 자료를 항주 외사판공실 洪美瓏부주임에게 8월26일 송부하면서 항주시에 김철선생의 기념비를 세우고 전남도지사의 항주 방문시 제막식을 합동으로 거행하자고 제의하였다. 9월1일 항주시측에서 9월20일 여천시 방문 스케쥴을 보내오면서 방문시에 김철선생의 후손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였다. 항주시 방문단 단장은 대외우호협회 史濟烜회장 그리고 수행원이 4명인데 洪美瓏부주임과 趙華達 통역은 두 번째의 만남이 될 것 같다. 나는 김노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金노인은 김철선생의 따님을 동행하여 여천시에 가기로 하였다. 9월20일 나는 내 프라이드 차에 두 분을 모시고 여천시에 가서 항주시 대표단을 만났다. 김철선생의 따님은 중국에서 살았던 기억을 하고 있으며 김구선생이 자주 김철선생댁에 와서 밥을 먹었던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따님 말에 의하면 김철선생은 朱子선생의 34대 종손과 친구로서 그 당시 그분의 소유 땅에 김 철선생을 안장하였으니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고 항주시측에서도 상해에 朱子 연구협회가 있어 그쪽으로 연결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철선생의 기념비 건립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외국인에 대한 기념비 건립은 여러 가지 선결 되어야 할 문제가 있으나 아마도 ‘94년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기념비 건립에 따른 후손의 재정적 참여의 기회를 달라고도 했다. 이와 같은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우리 道에서 강한 추진력으로 중국 측과 협의 한다면 아마 가능했을 것인데 그 이후 우리 道 지도자급에서 이 문제에 대해 거론을 하지 않았다. ‘93년 10월 萬學遠 절강성장의 우리 道 방문시에도 이 사항을 거론치 않았으며, 11월에 李鈞範도지사의 절강성 방문시에도 거론치 않았다. 그러니 항주시 측에서도 朱子후손 찾는 일이 지지부진한 것 같았다. 실무적 아이디어와 의견이 국제무대에서 전혀 제안되지 못 한 세월이 흘러갔다. 李지사 후임 具용상지사는 도무지 중국과의 교류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93년도 양지역간 우호교류협의서에 조인한 바 있는데 절강성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나는 절강성측 서신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하여 절강성측에서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具지사 후임에 曺규하지사가 부임했다. 曺지사는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으며 특히 일본어와 일본에 능통했다. 그때부터 절강성측과의 교류가 적극적이지는 못 했으나 절강성측 서신에 답변이 되고 초청장을 발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李지사 이후 曺지사까지 절강성과의 교류 프로젝트를 제안 할 도정의 구제화 마인드가 형성되지 못 하였고 국제교류가 도정 시책으로 채택되지 못 하였다. 그러므로 김철선생은 초혼이나마 고국에 봉안되었어도 국립묘지에 잠들지 못 하는 우리나라의 실상이고 현실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김철선생뿐인가. 제주도에서 절강성으로 표류하여 漂海錄을 쓰신 나주인 崔溥의 선비정신을 기리는 상륙기념비 건립도 절강성측과 교섭해야할 주요 사업인데 이러한 사업들도 지도자의 관심에 따라 지지부진 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업무를 더욱 강력히 제안하고 추진하였다면 조금이라도 전진했을 것인데 내 보직의 능력 한계성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나 지방행정에 있어서 국민(주민)을 위한 행정이 무엇인가. 지역 개발에만 치중하고 문화와 정신면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이는 이 분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유라고 본다. 보훈 사업이 무엇인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분들의 업적 현장 사업은 물론 후손들을 보살피는 것인데 법과 규정 그리고 굳어 버린 思考의 틀을 벗어나지 못 하기 때문에 김철선생이 잠들지 못 하고 있다고 본다. 옛날부터 시신을 찾지 못하면 招魂葬이라는 것이 있는데 김철선생의 묘소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립묘지로 이장을 서두르지 않고 있는 보훈처나 현재 살아있는 광복회 회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분들이 자신의 친인척들이 그러한 처지였다면 이역만리 땅에서 원혼으로 헤메도록 방치하고 있거나 무관심 할 것인가. 金美卿 여사도 이제 늙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원혼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위해 국립묘지로 안치하는게 소원이고 꿈이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恨에 맺힌 절규를 한다. 그러나 이 꿈이 한국, 김철선생의 조국 땅에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異域 중국땅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분골쇄신하여 뼈도 추스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시신(뼈)이 없으니 국립묘지 移葬이 안 된다는 법을 가진 우리나라이다. 1995년 6월 드디어 민선 지방정부가 출범하여 압도적인 차이로 許京萬 도지사께서 당선하셨다. 그리고 민선지방 정부의 새로운 국제교류 시책 발굴이 지시되어 나는 중국과의 교류 프로그램인 『환황해 연안 한중 교류』문제를 보고하였다. 政界에서 오랜 세월 몸담아 온 분의 시각으로는 처음에는 부정적 의견이었으나 대중국 진출이 소외받은 호남의 경제활성화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다. 『우리도가 낙후된 원인은 그동안 정치적인 편견에서 오는 이유도 있지만 중국과의 단절로 인해 서해 항만의 기능상실이 낙후의 주요인이다』고 지사께서 여러번 주장하였다. 이제 중국과의 수교가 재개되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우리도의 해양지향적인 발전 전략은 점차 가시화 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96년도 초에 중국순방 프로그램을 세우라는 도지사의 지시에 중국과의 교류추진에 박차를 가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민선 도지사의 지시에 의한 중국과의 교류가 도정 추진과제로 대두 한 것이다. 방문지역은 절강성, 상해시, 강소성, 산동성이다. 나는 절강성과의 교류 현황과 앞으로 해야 할 자료를 작성하면서 김철선생 기념사업도 도지사의 입을 빌어 절강성에 제안하고 준비하였다. 나는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 옛터 기념관에서 백범 김구선생과 같이 촬영한 김 철선생의 사진을 발견하고 도지사님께 설명하였다. 바로 이분이 우리도 함평출신 김 철선생이라고! 상해방문을 마친 우리들은 절강성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막상 절강성 방문시 성장, 지사간의 대화에서는 실무적 업무 이야기는 보다는 큰 흐름의 교류문제만 거론되었다. 절강성 항주 임시정부와 김 철선생이나 표해록 최부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는 모처럼의 수장간 협의에 거론되지 못하였다. 1997년도 김철선생의 따님 김미경여사가 아들과 함께 절강성 방문을 문의해와 절강성 趙盛姝여사에게 초청장 발송과 현지 안내를 부탁하여 김여사의 중국 방문을 도와주었다. 金여사가 중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중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다시 항주 시청을 방문하고 김 철선생이 묻혔다는 묘터를 방문하였는데 이번에는 ‘93년 당시 내가 방문했던 곳과는 조금 다른 곳이라 했다. 당시 기록의 현지 판단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어찌 했던 간에 김철선생의 묘 터는 찾지 못했다. 딸로서 다만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鎭魂의 旅行이 되었을 뿐이다. 김철선생 기념사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98년도 전라남도와 절강성간 자매결연을 전라남도에서 체결하는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절강성측은 柴松岳 성장 일행이 방문해 왔다. 자매결연 체결 기념 사업으로 몇 가지 교류 프로젝트를 제안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전남-절강성간 포럼(Forum) 개최이다. 제안의 배경에는 김 철선생 기념비, 최부 표해록 상륙지 표석 등의 사업을 하려면 우선 절강성내 전남 문화유적의 학술적인 뒷 받침이 필요하고 양지역간 역사적 교류사의 체계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 포럼을 계획하였다. 나는 이 포럼의 첫 번째 개최를 절강성에서 문화 포럼으로 개최할 것을 요구하여 절강성측이 승낙하였다. 전남-절강성간 역사적 교류를 체계화하는 포럼을 절강성에서 개최한다면 그쪽 학계에서나 언론계에서 양지역간 교류사에 대해서 상당한 홍보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이러한 기반 위에 김철선생 기념사업을 절강성에서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제1회 전남-절강성 포럼은 문화분야로서 ‘99년 7월26일부터 30일까지 절강성 항주에서 개최되는데 전라남도에서는 前영산호 농업박물관장 金井昊 사계 전문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金鏞漢 학예연구실장, 목포대 李榮文교수가 포럼 발표자로 위촉 되었다. 그리고 5월18일 사전 모임을 가져 우리측 대응 방안을 협의하였으니 절강성에서의 전남 문화와 항일의 역사가 밝혀질 것이고 崔溥선생 표해록 상륙지 기념 표석 수립이나 항주 臨政의 흔적 그리고 金澈선생의 기념비 건립이 가시화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국의 품에서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金澈선생의 원혼을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일이 선결문제라고 생각되며 지난 6월 1일 청와대의 대통령님께 다음과 같이 서신을 올렸다.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님께 저는 전라남도 나주시 금계동 74-13번지에서 살며 현재 전라남도 통상협력과에서 국제교류업무를 담당하는 나천수 입니다. 지방행정의 공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대통령님께 올리는 서신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여러 날을 고민하였습니다만 이 일에 무관심해 버린다면 오히려 제가 더 죄책감에 빠질 것 같아 진심으로 마음을 비우고 몸을 경건히 하여 제1건국을 위해 목숨 바치신 임시정부 군무장, 재무장, 국무원비서장 등을 역임하신 애국지사 김철선생의 사연을 올립니다. 그 동안 저는 개인적으로 ‘93년도에 김 철선생의 원혼을 중국 절강성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취토 봉안해와 후손에게 인계한 바 있으며 절강성내에 김 철선생 기념비를 건립하는 일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취토 봉안해 온 선생의 혼령은 지금도 잠들지 못 하고 있으니 대통령님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김철선생은 1886년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리에서 출생하여 일본 明治大 법과를 졸업하였고 1917년 임시정부에 가담하였으며, 1919년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남도 의원,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겸 법무위원, 그후 교통차관, 교통총장대리에 임명, 1925년 임정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7년 군무장(국방부장관)에 임명, 1932년 상해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피선, 상해 虹口공원에서 尹奉吉 의사 의거 이후 절강성 항주로 임시정부를 옮긴후 첫국무회의에서 澈은 군무장에서 재무장(재무부장관), 金九는 재무장에서 군무장으로 임명, 1934년 무임소장 전임,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 그리고 1934년 6월 29일 절강성에서 운명하시어 중국 항주 땅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1962년 3․1절을 기해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애국지사에게 훈장 추서를 하였다 하여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토사 발굴에 취미를 갖고 1987년 나주시청 재직시절에 광복군 제5지대장 羅月煥 장군을 추적하여 나주 문평면에 묘소를 정화한 적이 있습니다만 김철선생의 원혼은 지금도 구천을 헤메고 있는 듯 하여 가슴이 아픔니다. 사연인즉은 김철선생은 따님이 한 분 있는데 중국 절강성과의 교류를 시작하던 중에 그 따님(현재 70세)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분의 소망은 아버지 김철선생이 국립묘지로 안장되는 일이었습니다. ‘93년도 보훈처에서는 임정 애국지사 5위에 대한 고국봉안이 추진되었으나 김 철선생은 누락되었는데 이유는 중국 현지에 묘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우리의 옛 문화로 전래되는 초혼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魂을 불러 장사 지낼 수 있으며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임금께서 신하가 죽었을 때 왕명으로 禮葬을 명하였던 기록으로 보아 뼈가 가루가 되도록 조국 광복을 위해 일하신 선생의 원혼을 위해 초혼이나마 국립묘지 안장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업드려 건의 드립니다. 부득이 법규상 도저히 안 된다면 금년 8․15를 맞이하여 김철선생은 물론 임정 애국지사 중에 묘소가 확인 안된 훌륭하신 분들을 초혼하여 『王命으로서 禮葬』을 명하듯 대통령께서 그분들이 고향 산천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대통령명과 함께 賜額 묘비명을 내려 주시어 후손들의 가슴속 깊이 박힌 恨의 쇠말뚝을 뽑아 주신다면 이것이 곧 제2건국의 초석이라고 봅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번 대통령님께 건의한 내용의 결과가 후손으로 하여금 이번에도 『안 된다』는 사실로 알려진다면 또 한번 가슴속에 못을 박는 일이라 생각되니 윤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99년 6월 1일 전라남도 나주시 금계동 74 -13번지 나 천 수 올림 그리고 20여일 후에 청와대가 아닌 국가보훈처에서 회신이 도착했다. 내용은 현행 규정상 『묘소가 멸실 되어 시신확인이 불가한 김철선생은 안 된다』와 대통령(왕명)께서 묘비명을 주어 家族葬으로 하는 방식은 王朝시대 발상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분을 위해 서대문 독립 공원내 위패 봉안소에 김철선생의 위패를 안치하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나라 가장 높은 기관인 청와대 대통령께 올린 건의문의 답신 내용 전부이다. 조선조때 초야의 선비들도 소위 상소문으로서 임금께 직언하는 言路가 있었는데 오늘날 대통령은 국민의 소리를 직접 청취하지 못 하고 있다고 본다. 어쩌면 대통령께 올린 서신이 중간에서 다른 부서로 배달되는 것은 우편법의 위배가 되지 않을까(?) 본다. 대통령이 국사에 바쁘다면 상소문의 요지라도 보고되어 대통령이 민심의 수준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나는 다시 보훈처 기념과 앞으로 다시 서신을 보냈다. 보훈 사업을 추진하는 시각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보훈 대상자를 위한 기관인데 보훈 대상자를 전혀 도울 수 없는 실정이라면 보훈처는 다만 정해진 법규에 따라 집행한다면 보훈의 질이 어떻게 향상 될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신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국가보훈처장님께 귀 처의 문서번호 기념 35807-522(‘99. 6.17)호와 관련하여 다시 한번 민원인의 의견을 올립니다. 민원인은 회신문을 받고 또 내용을 확인하고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 임시정부 애국지사 金 澈선생의 국립묘지 안장을 보훈처가 하지 못 하기 때문에 본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나라 최고기관인 청와대 대통령님께 건의을 올려 청와대 대통령께서 직접 재야의 국민의 소리 듣도록 함이었는데 『안 된다』는 법과 규정을 준수하는 보훈처로 문서를 이관하였다는데 놀랐습니다. 대통령은 직접 국민의 소리 듣기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청와대에 접수된 국민의 소리 건의문을 문서접수 담당처럼 검토없이 다른 부처에 배부하였다는 점입니다. 둘째, 귀 처에서는 보훈 대상자의 소리가 무엇인지 과연 설문조사를 해보았는지 의심이 갑니다. 현행법과 규정상 묘의 소멸은 『국립 묘지 안장』이 안 되는 이유인지는 민원인도 김철선생의 따님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귀 처에서는 보훈 대상자가 원하는바 대로 법과 규정을 바꾸어 보려는 노력은 하였는지요? 현행법과 규정을 개정 추진할 수 있는 기관은 오직 귀 처뿐이란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셋째, 현행법과 규정이 국립묘지 안장이 안 된다면 대통령께서 이러한 억울한 분을 위해 대통령 명령으로 고향산천에 안장하도록 하는 命을 원하였는데 이것을 王朝시대 발상으로 오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소외의 보훈자 후손들의 소원을 어루만지는 대통령의 모습이야말로 국민의 정부 대통령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대통령이 되시도록 귀 처에서 대통령께 건의드릴 수 없습니까. 존경하는 국가보훈처장님! 시신이 없으면 招魂葬으로 魂을 안장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천년을 마무리하고 새천년 밀레이니엄을 준비하는 이벤트 행사로 전통 민속 招魂祭를 곁드린 국립묘지 안장식을 오는 8.15 거행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九泉을 헤매는 국가유공자의 원혼들이 칭송하는 보훈처의 자랑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법에 저촉이 되면 지금부터 개정을 서둘러 올해가 안되면 내년은 어떻습니까? 지난 반세기도 기다려왔는데 1~2년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민원인은 이번에도 좋은 소식이 없다면 보훈처를 대신하여 金 澈선생에게 그리고 恨을 가지고 사시는 후손에게 깊은 속죄를 하는 것으로 덮어둘 것입니다. 소외의 그늘에 있는 보훈자 후손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999년 7월 1일 전라남도 나주시 금계동 74-13번지 나천수 드림 ‘99. 7.9 보훈처의 담당 사무관한테서 직접 내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보훈처는 다만 「국립 묘지법」에 의거 국방부에 국립묘지 안장을 의뢰하는 역할 뿐이라 한다. 국립 묘지법에는 시신이나 최소한 모발이 있어야 안장이 된다는 기준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의견과 이러한 경직된 법규를 준수하는 행정분야의 입장을 같은 공무원으로서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로 건의문에 대한 답신을 가름한다는 것이다. ‘93년도 중국에 묻혀 있는 총리급 애국지사 7기의 유해 봉안도 광복회에서 건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면 현재 살아 있는 광복 회원은 과거의 동지이며 상사였던 죽은 자의 혼을 왜 방치하고 있을까. 광복을 위해 죽어간 총리급은 물론 이름 없는 별들 그리고 시신이 있고 없고 간에 그 영혼은 고국에 봉안되어 국립묘지에서 안식을 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잘못 판단하고 행동하는 양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7월20일 전남-절강성간 문화 포럼 참가 계획이 확정되는 시점에서 나는 오랜 세월 컴퓨터 워드 작업을 한 결과 디스크 병이 도져 통증 때문에 절강성 국외공무여행 허가를 받았지만 1개월의 병가로 해외 출장을 할 수 없었다. 문화 포럼은 나를 제외한 정무 부지사를 대표단으로 절강성 행사에 참여하여 전남-절강성간 문화교류의 역사적 시금석을 놓은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나 임정시절의 김 철선생을 부각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았다. 앞으로 양 지방정부간 문화교류의 공동 연구가 진행되면 세부적인 문화 사업이 가시화 될 것으로 본다. 8월18일 다시 출근하였다. 디스크의 치료는 1개월로는 완치가 되지 않은 병이므로 앞으로 계속 물리치료 내지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 워드 작업만 하지 않는 다면 악화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보는데 출근 첫날부터 워드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25일부터 절강성 주최로 절강성 우호도시 친목회에 전남도지사가 초청되어 나는 도지사님을 수행하는 중국 방문 프로그램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절강성측과 협의할 여러 가지 교류 프로그램의 자료를 작성하였는데 그 동안 양 지방정부간에 과제였던 환황해 연안 한중 시도성수장회의 구성협의, 절강성 농업 현대화에 우리 도 참여, 절강성민의 전남 산업시찰 관광객 파견, 전남-절강성 청소년 교류사업, 전남-절강성간 공무원 상호파견 추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 건립, 표해록 저자 최 부선생 기념비 건립, 심청전 관련한 곡성군과 절강성 주산시간 자매결연 추진문제이다. 김철선생에 대해서는 절강성내 한국 임시정부 유적지 공동조사와 절강성내에서의 광복 활동 공동조사, 그리고 절강성내 김철선생 기념비 건립에 대해 제안하게 되었다. 1999년 11월1일날 절강성측 종합 답신 내용중에는 절강성내 임시정부 유적지 조사에 대해서는 절강 대학 한국 연구소를 추진 파트너로 소개하였고, 기념비 건립문제는 지방정부 권한 밖의 일로 중앙정부 비준이 필요하다면서 본 건 추진에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시사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자는 의견이었다. 어떻든 절강성의 공식 의견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절강성측 공식답변을 얻기까지 6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지만 앞으로 전남-절강성간 김철선생의 시작하는 하나의 계기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본다. 이제 나의 김 철선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절강성측과는 문화교류 발굴차원에서 전남-절강성간 역사적 교류 사실이 규명되면서 절강성내 임시정부 유적지 조사와 장차 시간은 소요되지만 항주에서 돌아가신 김 철선생의 기념비 건립문제에 서서히 접근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김철선생의 원혼을 국립묘지로 안장하지 못 한다는 현행법규의 한계를 넘지 못 한 속죄의 차원에서 필자가 김 철선생과 선생의 딸 김여사에게 사죄하고자 한다. 존경하는 김 철선생님! 원혼으로 귀국하여 전라도 황토 땅 어느 이름 없는 들녘에 가매장되어 아직도 눕지도 못 한 상태에서 어제는 어디에 계셨으며 그리고 내일은 어디에 계실 것입니까. 선생은 젊어서 청춘을 조국광복을 위해 일하시면서 상해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또한 대한민국 국호를 만드는데 일익을 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그 대한민국 어느 땅 어느 곳에도 잠들 곳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발견하지 못 한게 아니고 선생이 죽음으로 세우신 대한민국 사람들이 선생의 잠자리를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속에 선생께 사죄합니다. 저 나름대로 애써 보았으나 선생의 원혼을 상해에서 조국으로 모신 것 외에는 무력한 저의 힘을 서글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빨간 보자기 속에 싸 온 한줌의 흙이 뼈가 아니라고 애국지사들이 누워 계신 국립묘지로는 안장 할 수 없답니다.그러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선생이 돌아 가신지 60여년 만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작은 사당이나마 당신을 위로 할 지는 의문입니다만 선생이 쉴 사당이 지어질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조국이 당신에게 무관심하고 배신감을 느끼게 하였어도 당신의 조국은 대한민국이므로 구천을 헤메는 원혼이나마 무정량의 애국심으로 조국발전을 위해 음덕을 베풀어주십시오. 존경하는 김미경 여사님! 김여사님도 이제 할머니가 다 되었습니다. 남은 인생이 많지 않은데 아버지 김 철선생의 국립묘지 안장문제는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겨둘 밖에 없는 현실을 한으로 가슴에 새겼지만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의 가슴속에서는 김 철선생이 살아있을 것입니다. 저도 공무원으로서 공직의 가치관을 爲民에 두고 일하고 있지만 김여사님의 가슴에 얽힌 恨을 풀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머지않아 함평 고향에는 선생을 영원히 기리는 사당이 세워질 것이고 절강성에서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지만 임정 유적지 조사와 함께 기념비 건립 사업도 가능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힘을 모아 국립묘지로 모시자는 여론을 불러 올 지 누가 압니까. 사당이 완공되는 날 선생의 영령 앞에 술 한잔 올리고 큰절 드리며 한의 눈물, 속죄의 눈물을 흘려 봅시다. |
첫댓글 이 글은 천수아제가 쓴 원문입니다.
신랑이 이글을 읽고 "부모도 죽이고,버리는세상에, 그분의 가슴은 목화밭 인가 봐"라고 합니다
와이프는 "장작"이라고 하면서, 아제는 "목화밭"이라고 합니다
김철 선생님은 (永山金氏)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