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찰이 산악에 많은 이유
우리나라는 명산에 대찰이 많기로 유명하다. 평지가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산에 사찰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기도 하다. 그 이유에 대해 조선조 오백년의 불교탄압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필자도 한땐 사찰이 산속에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대중과 유리된 불교가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려한 것인가 하는 점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 것이지만 건립자들의 의식이나 당시의 여러 가지 여건들을 종합하여 도심이나 근교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조 오백년 동안 도심에 있던 사찰들은 파괴당하거나 폐사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산속에 자리 잡은 사찰이 많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조상들은 사람들이 사는 거주 지역과 무관하게 산속에 사찰을 건립할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산악숭배사상과 제천의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명산에는 신성지역이 있었으며, 그 신성지역에는 신령이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침범해선 안 되는 경건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삼국시대 이 땅에 살고 있던 조상들의 사고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법주사, 금산사, 통도사, 월정사, 건봉사, 묘향산 보현사, 장흥 보림사, 영월 법흥사, 대흥사, 해인사 등 내로라하는 대형 사찰들이 산중에 자리 잡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부터 사찰이 산속에 건립된 것은 아니었다. 평양에 건립된 이불란사나 초문사, 신라의 국립 사찰인 황룡사 등은 도심지 안에 건립되었다. 그러던 것이 근교나 산속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 간다. 필자는 이에 대해 당시 활동했던 불교운동가들의 포교전략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토착화 과정에서 대중들의 저항감을 최소화하면서도 최대한의 경배심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당시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고 있던 장소, 즉 소도(蘇塗)로 불렸던 불가침 지역에 사찰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필자의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이미 역사상 그 실례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바로 이차돈의 순교가 그것이다. 물론 이차돈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순교한 것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한 면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신성지역에 사찰을 건립하여 토착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던 불교운동가들의 전략 역시 배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경주에서 가장 신성한 지역이었던 천경림에 사찰을 건립하는 문제로 보수 세력과 왕당파 사이에 갈등이 생겼으며, 결국 이차돈의 순교로 천경림에 대흥륜사가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이에 대해 이차돈을 순교자로 추모하고 있으며, 그가 죽자 몸에서 젖과 같이 흰 피가 솟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경에 의하면 순교자가 생기면 그가 흘린 피는 젖과 같았다고 기록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월정사나 낙산사의 건립과 관련된 연기설화, 내지 심심산골에 자리잡은 기타의 많은 사찰들을 참배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단순히 수행도량을 건립하기 위해 사람들이 왕래하기 어려운 곳에 사찰을 건립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불교사에서도 불교 이전에 신성지역으로 추앙받던 성지를 불교인들이 접수한 실례들이 있다. 도교의 성지였던 아미산은 보현신앙으로, 구화산은 지장신앙으로, 오대산은 문수신앙으로, 보타산은 관음신앙으로 접수하여 여전히 성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산지가람은 세 불리로 인해 도피한 것이 아니라 토착화를 위한 포교전략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1. 삼론종 사상적 기반다진 승랑
교학 선학불교 통합 정혜병수설 첫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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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랑스님은 고구려의 요동에서 태어나 장수왕 시대에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을 깊이 연구한다. 삼론종의 창시자인 길장이 삼론종이란 종파를 개창할 수 있도록 그 사상적 기초를 다진 사람이 바로 승랑이라 말할 수 있다.
삼론종이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에 입각해 중관사상의 핵심사상을 연구하는 종파이다. 삼론종이 형성되어 중관사상의 본질을 연구하기 이전의 중국불교계는 공사상을 노장사상이나 기타 토착사상에 의거해 해석하는 격의불교시대였다. 그것이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와 유관 경론을 번역한 이후 해결되는 것이다.
고익진 박사는 〈한국고대불교사상사〉에서 승랑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구마라집과 승예, 승영, 승조, 도랑으로 이어지는 관하구설. 이들을 계승한 승랑과 그의 제자 승전의 섭령상승. 승전의 제자 법랑과 그의 제자 길장으로 이어지는 흥황상승이다. 일본사람들은 구마라집을 필두로 도생-담제-도명-승전-법랑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주장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승랑의 역사적 위상은 70 내지 80년간 단절되었던 관하의 구설을 다시 부흥시킨, 그래서 삼론종이 존립할 수 있는 사상적 터전을 닦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승랑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고삼론, 그 이후를 신삼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상적인 입장에서 승랑은 약교이제설, 삼종중도론, 중도위체설, 횡수병관, 무득정관설을 확립했다고 본다. 공, 유, 중도의 논리체계를 확립하여 길장의 4중중도설이 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횡수병관설은 정혜병수설의 논리적 기초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불교사〉를 저술한 탕용동은 승랑과 승전이 정혜병수(定慧幷修)의 선구자들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삼론종원류고〉를 쓴 양영천은 정혜병수설이 승랑에게서 시작되어 그의 제자인 승전으로 계승되었다고 말한다. 정혜를 병수한다는 것은 중국불교사에서 양자강 이남의 교학불교와 양자강 이북의 선학불교를 통합했다는 의미이다.
승랑은 삼론과 〈화엄경〉을 깊이 탐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 의해 삼론종이 탄생하며, 그 점에 대해 길장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동시에 삼론종의 사상적 정립은 천태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천태의 세계관, 나아가 수행관의 핵심인 정혜겸수설 등은 모두 길장 이전의 삼론종 조사들이 수립한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한편 선종의 사상과 논리체계 역시 삼론종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압축과 생략이 전제되어 있지만 홍인, 법융, 혜능, 신수, 신회, 마조 등 많은 선승들의 사상 속에 삼론종의 논리가 녹아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99년도에 두 번에 걸쳐 남경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지만 승랑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따라서 승랑이 머물며 수행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서하사를 참배했는데 그곳에 승랑기념관이 있었다. 위대한 불교사상가인 승랑, 동시에 우리의 선조인 승랑의 기념관이 우리도 모르게 서하사에 조촐한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다. 또한 머물면서 양무제가 파견한 승려를 지도하고, 주옹이란 늙은이를 가르쳤다는 종산 초당사를 찾았지만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다. 현재 종산이란 이름의 산은 남경 시내에 있다. 손문의 사당이 있어서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초당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대만서 발간된 육조시대사찰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중간에 없어진 것으로 나와 있다. 늦었지만 유지라도 찾아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42. 중국 오대산과 한국 오대산
“문수보살 상주…” 중국화엄종 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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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가 진신 친견후 한국에 전해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다. 해발 4000미터에 가까운 산이기 때문에 한 겨울에는 사람이 범접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화엄경〉 보살주처품에 의하면 “동북쪽에 보살의 주처가 있으니 청량산이라 한다. 과거 제보살이 이곳에 상주하셨으며, 현재 문수사리가 계시며 일만의 보살 권속을 거느리고 설법하신다”고 한다. 또한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에선 “세존께서 금강밀적주보살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멸도한 뒤 동북쪽의 대진이라는 나라에 오정이라는 산이 있으니 문수사리동자가 이곳에서 유행거주하시며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은 대진나라의 오정이 지나, 즉 중국의 오대산이라 믿게 되었다. 청량산-오정-오대산이 같은 것이므로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거주하는 신령한 산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7세기경에는 인도에까지 알려졌으며,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불교를 중국에 홍포하기 위해 참배하러 오는 인도인도 있었다.
원래 오대산은 도교의 성지였다. 마침 동진시대에 60화엄경이 번역되고, 이어서 80화엄경이 번역되자 문수신앙을 앞세워 불교도들이 차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이상과 같은 이유로 오대산은 초창기 중국 화엄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들을 오대산계 화엄사상이라 지칭하는데 초조는 영변(477~522), 제2조는 해탈, 제3조는 〈신화엄경론〉과 〈십명론〉의 저자이자 고려시대 지눌의 사상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이통현(645~735) 장자이다.
한편 오대산계 화엄사상은 자장율사에 의해 643년 한국에 전래된다. 자장율사는 선덕왕 5년인 636년 제자 승실 등 10여명과 함께 오대산을 참배하게 된다. 그때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 감응을 받아 범게와 가사, 사리를 받게 된다. 이에 귀국 후 강원도 오대산에 문수도량을 열게 된다. 한국화엄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의상에 의한 종남산계 화엄사상은 28년 지난 671년 도입된다.
오대산은 한국의 문수성지이며, 불교가 장기간 흥륭할 터전이다. 따라서 신라의 효소왕이 출가하여 효명이란 법명으로 수련했으며, 통효대사 범일, 낭공대사 행적, 징효대사 등이 오대산 인근에서 수도했다. 고려의 왕건 이래 역대 제왕들이 오대산에 봉납했으며, 고려 명종 때의 원진국사는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한다. 이래 혼수, 무학, 나옹 등의 고승들이 오대산에서 수도했다. 이조시대에 들어오면 태조 이성계는 상원사에 누차에 걸쳐 쌀을 보시하였으며, 태종은 수륙재를 베풀어 국운의 융창을 발원했다. 세조는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만났다고 한다.
중국 오대산에서 시작된 화엄사상과 문수신앙은 한국의 오대산 신앙을 낳게 된다. 수많은 한국의 중국 유학 스님들이 오대산을 참배하게 되는데 화엄사상과 문수신앙이 그 이유라 말할 수 있다. 남종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북경 인근에 있는 방산 운거사에 거주하며 화엄동을 열어 천년 역사를 계승해 준 혜월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중국의 오대산은 라마교화 되어 있다. 강희제는 재위 중에 다섯 번이나 오대산을 참배하고 대록사란 절을 창건한다. 건륭제는 여섯 번 참배했다고 한다. 근래 중국 오대산의 사원은 청묘와 황묘의 두 계통이 있다. 전자는 중국 전통 스님들로서 청색 옷을 입고 선종에 속해 있다. 후자는 달라이 라마에 속하는 라마교 계통이며, 황색 옷을 입는다. 〈오대산 문화〉, 〈오대산〉이란 잡지도 발간되고 있다. 한국의 오대산과 중국의 오대산이 손을 잡고 불교 문화창달에 기여한다면 21세기 동북아시대에 새로운 역할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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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지장과 구화산
도교.민간신앙 혼재했던 구화산
신라왕족 김지장의 지장성지로
구화산은 중국 4대 불교성지 중의 하나이다. 산서성의 오대산, 사천성의 아미산, 절강성의 보타산과 더불어 지장보살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이전에는 이 산의 봉우리가 아홉 개 있다고 해서 구자산(九子山)이라 했는데 이태백이 아홉 봉우리를 연꽃에 비유한 이래 구화산으로 불린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1342m이며, 이 지역의 연평균 기온이 16℃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구화산은 옛날부터 신선들이 사는 선경으로 알려졌으며, 그래서 도교의 성지였다. 옛날에는 한나라의 두백옥, 진나라의 갈홍, 당나라의 많은 도사들이 이 지역에 와서 개원관, 백운관, 선단궁 등으로 불리는 도관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도교 성지에 동진시대인 융안 5년(401년)에 배도화상이 들어와 초암을 짓게 되며, 당나라 지덕 연간인 756년에서 758년 사이에 중건되어 화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일본 동경대학에 있던 가마다 시게오 선생은 구화산을 지장성지로 만든 스님들은 신라출신들이라 밝히고 있다. 그 선두에 신라왕족의 일원이었던 김지장이 있다. 그가 들어오기 이전의 구화산 일대는 도교와 민간신앙, 산악신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김지장(696~794)은 대략 719년 무렵 중국의 구화산에 도착하며, 그곳에서 각고의 수행 끝에 인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그는 동굴 속에서 수행에 정진할 뿐 의식주에 신경 쓰지 않아 피골이 상접했으며, 그런 모습에 인근 사람들이 감동했던 것이다. 김지장이 99세로 입적하자 신라 스님들이 잇따라 구화산에 들어온다. 그 중 한 사람인 정장화상이 구자암의 서쪽에 쌍봉암을 창건한다. 이후 국가적인 사찰로 발전하게 되어 수많은 전각이 들어서게 됐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이 일어나자 전화로 사원이 쑥대밭이 되는데 청나라 정부가 거액을 투자해 중건하며, 156개의 사묘와 3000~4000명의 스님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알려졌다고 한다.
김지장이 현재까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명확하게 어떤 종파에 속했던 스님인가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김영태 선생께서 여러 가지를 종합해 선종에 속하는 스님이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다. 또한 선생은 김지장에 관한 여러 가지 사료들을 분석해 〈전당문〉에 실린 〈구화산화성사기〉가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 이것을 모본으로 삼아 〈송고승전〉이 나오고, 다시 〈송고승전〉을 모본으로 〈신승전〉이 만들어졌다고 봤다. 기타 자료들은 왜곡된 곳이 많다고 봤다.
여하튼 문제는 어떻게 해서 김지장이 이국만리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도 명확한 고증이 없다. 다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지장사상이 지니고 있는 사상적 특징이 도교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유교를 하늘에 비유한다면 도교는 땅에 비유된다. 땅은 만물을 생육하고 포용하지만 호오미추(好惡美醜)를 분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교사상 내지 노장사상의 사상적 특징을 땅의 사상이라 표현한다. 그런데 불교 역시 지장보살사상이 있다. 지장보살은 대지의 덕을 의인화한 바라문교의 지모신(地母神)을 불교가 수용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장보살은 모태가 아기를 잉태하듯 땅이 만물을 기르는 힘을 지닌 것과 같은 보살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도교와 지장사상이 융합할 여지가 있었으며, 김지장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라 본다.
44. 원효의 화쟁사상과 의의
주의주장 회통…일심사상으로 귀일
불교사상사 ‘논쟁의 역사’에 종지부
‘삼계는 마음뿐이요, 일체의 모든 존재는 인식뿐이다.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할 것인가?’라 선언 했던 원효(617~686). 그는 한국 불교가 낳은 최고의 불교사상가이자 한국불교사상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위대한 성인이다. 그는 무애자재한 일생을 통해 형식과 체면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필요한 경우 결혼도 했으며, 그것을 숨기지 않고 자신을 소성거사라 자칭하기도 했다. 현재 확인된 그의 저술은 86종이며, 그중에 〈대승기신론소〉 〈이장의〉 〈유심안락도〉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등의 많은 저서가 남아 전한다.
원효의 중심사상은 화쟁사상이다. 다툼을 화해한다는 의미이자 일체를 모두 화합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 안의 일체 주의주장을 회통해 일심사상으로 귀일시키고 있다. 특정한 종파나 경전의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그 경전이 혹은 그 종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때문에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로 파당을 짓거나 논쟁을 전개할 이유는 없다. 일체는 동일한 마음, 전일한 마음의 표현이기에 결국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같다는 것이다.
원효가 주장하는 화합의 논리는 단순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신 이후 인도불교는 상좌부와 대중부로 갈리기 시작하며, 이것이 40여개의 부파로 발전하게 된다. 각파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논쟁의 허실을 간파한 일군의 운동가들은 대승불교라는 신불교운동을 전개한다.
대승불교라는 신불교운동 역시 다양한 성격을 표출하게 되며, 각자의 이념과 선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대승경전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운동을 사상적으로 정리하면 크게 두 그룹으로 구별할 수 있다. 반야부경전에 입각해 공사상을 주장하는 중관파가 있었다. 이들은 철저한 해체론의 입장에서 무집착 공을 주장했기 때문에 대중들을 염세적인 악취공의 세계로 인도할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 폐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일군의 사상가들은 중관파의 입장을 수정 보완해 그들의 단점을 극복할 사상을 구상하게 됐다. 바로 유식학파였다.
중관파와 유식파는 각각의 사상적 특징을 유지하며, 상대방과의 우열논쟁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장점을 흡수하고 재창조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게 된다. 이것이 유상유식학파와 무상유식학파의 사상적 논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인도불교의 쇠퇴와 함께 인도에서는 사라지지만 인도불교의 전통을 수입한 중국불교에서 다시 타오르게 된다. 중국불교는 인도와 달리 중국화된 종파불교를 탄생시키게 된다. 그렇지만 유식학파의 사상은 화엄종에서 살아나게 되며, 중관파의 사상은 천태종에서 부활하게 된다. 따라서 두 종파는 사상적 우열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게 된다.
원효는 이와 같은 사상적 배경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한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불교사상이 논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고, 자아를 완성하는데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십문으로 분류된 일체의 상대적 입장은 모두 일심의 두 시각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불교사상사에서 오랫동안 전개되던 논쟁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각각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한 속에서 중생제도와 수행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 전개된 논쟁은 본질을 상실할 수 있다는 각성이 그래서 가능했다.
45. 왕오천축국전과 혜초
신라승 혜초 4년간 51개국 여행기록
佛 학자 펠리오 돈황 막고굴서 발견
혜초스님(704~780)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국에서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돈황의 막고굴 제17동에서 우연히 책명과 저자의 이름, 권두와 권말이 탈락된 두루마리로 된 사본 단간을 발견했는데 지난 90년간의 줄기찬 연구결과 이 책의 이름이 〈왕오천축국전〉이며, 저자는 신라 출신의 혜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전기는 중국이나 한국의 고승들 전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불공 밑에서 그와 동문수학한 혜림의 〈대장음의〉와 〈대종조증사공대변정광지삼장화상표제〉 등에 간단하게 보일 뿐이다.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16살에 중국 광주로 건너가며, 그곳에서 천축출신의 밀교승 금강지를 만나 밀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여행을 결심하고, 723년 광주에서 뱃길로 인도를 향해 출발하며, 동천축국에 도착한 이래 4년여간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탐방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여행기를 저술한다. 지금의 대흥선사에 거주하며 불공삼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밀교경전의 한역과 필사, 연구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지금의 산서성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76세의 일기로 세연을 마감했다.
혜초가 인도에 들어갈 때는 바닷길을 이용했지만 돌아올 때는 비단길을 이용한다. 동천축에서 시작된 그의 여행은 불교의 4대 성지를 순례하고 중천축국으로 이어진다. 이어 지금의 인도 데칸고원지방에 해당하는 남천축국과 서천축국을 경유하여 북천축국의 수도인 잘란다라에 도착한다. 여기서 간다라와 카슈미르 등 주변 지역을 여행한 뒤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에 해당하는 토화라를 방문한다. 이어 한달 열흘간의 여행 끝에 아랍에 해당하는 대식국 치하에 있던 페르시아의 니샤푸르에 도달한다. 이곳을 끝으로 다시 토화라로 돌아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던 쿠차에 도착한다. 광주에서 출발한지 4년이 지난 727년 11월이었다. 이어 언기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온다.
혜초 이전에도 인도를 다녀와 여행기를 남긴 중국 사람으로 현장과 의정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인도를 경유하여 아랍지역까지는 다녀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런 점에서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소중한 책이다. 〈중한불교관계일천년〉을 저술한 진경부는 이 책이 지니는 가치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당시 인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51개 국가 내지 지역에 관한 위치, 생산물, 광물자원, 면적, 국왕, 대신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둘째 51개 국가와 지방의 국제관계, 당나라와의 관계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서 8세기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 각 지역의 민족과 풍속, 습관, 혼인제도 등에 관해 알려주는 민족학의 1차 자료이다. 넷째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섯째 종교문화사를 알려주는 훌륭한 자료이다. 때문에 〈왕오천축국전〉은 마로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바투타의 〈이븐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들 여행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여행기란 점에서 문명사적 가치를 지닌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말할 수 있다.
혜초는 불공의 제자 중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불공이 열반하자 황제에게 올리는 감사의 글을 제자들을 대표하여 작성한다. 당시 심한 가뭄이 들자 대종은 혜초에게 기우제를 주관하게 한다. 불굴의 도전 정신이 일세를 대표하는 여행가, 수도승, 학승으로 발전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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