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지의 파쇄와 부드러워짐
하나님이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시는 길이 각 사람에게 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통제가 강타하는 점도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자애심(自愛心)을 한 번, 두 번, 열 번, 환경을 통해 그의 교만을 치신다. 어떤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처리하시고 자신을 의지하는 그의 총명함과 행함을 처리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모든 환경에 문제가 생기게 하시고 모든 일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은 계속 그로 실패하게 하여 그로 자신의 총명을 의지하지 않게 하신다. 결국 <나는 사람의 지혜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로 사노라>고 말하게 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안배하신 통제는 다른 종류일 수가 있다. 성령은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관적임을 치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과 자기 주장과 자기 방법으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능치 못하시는 일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이 있다. 어떤 형제는 그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 태도를 갖고 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나는 모른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도 없는 것같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은 환경에서 그의 이 점을 처리하시고 그 점이 거듭거듭 타격을 받도록 하신다. 그는 입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가 성사시킨 일은 한 가지도 없다. 그가 용이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중 망치지 않은 일과 실패하지 않은 일이 한 가지도 없다. 성령은 이 길에서 그를 치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령이 각 사람을 다루시는 부분은 다르다는 것이다.
성령이 각 사람을 치시는 속도 또한 다르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쉬지 않고 연달아 두세 번 치신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는 한동안 치셨다가 한동안 쉬신다. 그러나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지 않는 일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성령이 강타하는 점을 찾아낼 수 있다. 매번 성령이 강타하는 점은 다르지만 매번 성사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똑같다. 밖에서 강타하는 것이 무엇이든 속에서 상처 받는 것은 사람의 자아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애를 처리하시든, 우리의 교만을 처리하시든, 우리의 총명을 처리하시든, 혹은 우리의 주관적임을 처리 하시든, 밖에서 하나님이 어느 점을 처리하시든 매번 다루신 결과는 우리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 두 번 역사하사 결국 언젠가 우리 자신을 타파하시고 우리 자신을 부드럽게 만드신다. 어떤 사람은 감정에 있어서 특별한 다룸을 받고 어떤 사람은 생각에 있어서 특별한 다룸을 받는다. 그가 받은 다룸이 어떤 방면이든 최종적인 결과는 그의 의지를 파쇄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타격이 어느 방면이든 파쇄된 것은 그 사람의 자아요 그의 의지인 것이다. 우리들은 다 강팍한 사람이다. 우리의 의지는 강팍하다. 우리의 강팍한 의지를 유지해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 자애와 우리의 감정과 총명이다. 우리의 의지를 옹호하는 것은 다 다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강팍한 의지는 다 같은 것이다. 성령이 우리 각사람을 치시고 다루시며 헐어버리시는 것이 각기 다른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내적인 다루심은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다 우리 자신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요 우리의 의지를 깨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로 인해 엎드로지는 사람 혹은 통제로 인해 엎드러지는 사람의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그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부드러움은 파쇄된 사람의 특징이다. 하나님에 의해 파쇄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우리가 강팍하고 겉껍질이 딱딱한 이유는 우리의 강팍함을 옹호하는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기둥이 가득한 한 채의 집과 같다. 하나님이 기둥을 하나, 둘 뽑아버리실 때 집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밖의 지탱하는 물건이 무너질 때 속의 자아는 자연히 무너진다. 우리는 결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의 의지는 강팍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앞에서 별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의 의지가 필히 부드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목소리가 작은 사람의 속이 강팍한 경우도 매우 많다. 강팍함은 목소리의 문제가 아닌 성품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 성질이 급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보다 더 부드러울 것 같으나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그는 똑같이 고집이 세고 강팍하며 똑같이 이기적이고 자신을 신뢰할 것이다. 우리 속의 건축물을 지탱해주는 기둥들은 다 다르겠지만 속의 건촉물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우리의 자아와 의지는 다 똑같이 강팍하다. 주님은 우리의 강팍함을 옹호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가져가고 타파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한 번, 두 번, 열 번,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 몸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징계가 이렇게 심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다시 행할 때 그런 일에 대해 우리 마음 속에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다시 그런 일을 하고 전과 같이 말할 때 주님이 우리를 치실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전과 같이 임의로 행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는 것이 밖의 어떤 것인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를 부드럽게 하여 우리로 어떤 점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점에서 주님을 거스를 수 없고 자기의 주장을 견지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주님의 치심이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 일에서 부드러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다루심이 증가할 때 당신의 부드러움도 증가하게 된다. 하나님이 당신 몸에서 하신 헐어버리는 역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당신은 더욱 부드러워진다. 그러므로 부드러워진 것은 파쇄를 거친 하나의 현상이다.
어떤 사람과 왕래해보면 당신은 그 사람이 확실히 은사 있는 사람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그가 아직 파쇄되지 않은 사람임을 자주 느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은사가 있는 반면에 아직 파쇄되지 않았다. 그 파쇄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접하기만 해도 그의 강팍함을 알 수 있다. 파쇄된 사람이 부드럽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반면에 파쇄되지 않은 사람은 강팍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매를 맞은 그 점에서는 감히 자랑하지 못하고 감히 교만하지 못하며 감히 방임하지 못한다. 또한 그 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성경은 성령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였다. 성령을 불 같다고도 하고 물 같다고도 하였다. 불은 그분의 능력을 말하고 물은 그분의 청결함을 말한다. 성령의 성품을 말할 때에는 비둘기 같다고 했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의 성품은 강팍하지 않고 비둘기같이 부드럽고 안온하며 온화한 성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성품을 한 단계 한 단계 우리 안에 건축하실 때 우리는 더 많이 비둘기의 성품을 갖게 된다. 경외함에서 나온 부드러움은 성령의 파쇄로 인한 표시이다.
부드러워진 상태
사람이 성령에 의해 파쇄될 때 자연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부드러워진다. 사람들이 그를 접할 때 그는 더 이상 강팍하지 않고 무섭지 않다. 그는 주님의 의해 목소리도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태도도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그가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는 태도와 말에서 그의 속의 경외함을 흘러내보내게 되고 이러므로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쉽게 다룸을 받음
어떤 종류의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인가? 부드러운 사람은 쉽게 다룸을 받는 사람이다. 부드러운 사람은 쉽게 남의 말을 듣고 쉽게 청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파쇄된 사람은 죄를 자백하기도 쉽고 눈물을 흘리기도 쉬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것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아무 용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다룸을 받고 밖의 성품이 하나님에 의해 파쇄되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의 파쇄를 당할 때 자기의 잘못을 쉽게 보고 죄를 자백하기도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는 말을 듣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그의 두꺼운 껍질이 깨질 때 그의 감정과 생각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말과 훈계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날부터 그는 하나님에 의해 다른 새로운 영역 안으로 이끌리게 되고 언제 어디서나 온전케 함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쉽게 느낌을 가짐
부드러운 사람은 쉽게 느낌을 갖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겉사람이 파쇄되었기 때문에 그의 영이 매우 쉽게 나오고 또한 형제 자매의 영을 만질 수 있다. 누가 영을 사용할 때 그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감각은 매우 예민해져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의 옳고 그름을 알수 있다. 사람의 영이 움직일 때 그는 즉시 반응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는 어리석은 일이나 사람에게 득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많은 때 다른 사람의 영의 어떤 일을 좋지 않게 느낄 때에도 우리가 그것을 계속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에는 느낌이 있는데 우리에게 그런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때 어떤 형제 자매가 집회에서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지겹게 느끼고 그가 기도를 멈추기를 바라는데도 그는 계속 기도한다. 다른 사람의 영은 그가 기도하기를 그만 하기를 원하는데도 그는 감각이 없다. 사람이 느끼는 것에 대해 그는 아무 감각이 없다. 이것은 그의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쇄된 사람은 그의 영으로 쉽게 다른 사람의 영을 만지고 다른 사람이 느낀 것을 만진다. 그는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 같지 않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자신을 모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겉사람이 파쇄될 때 비로소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을 알기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영을 만질 수 있으며, 다른 지체의 느낌을 만지게 된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일을,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감각이 없는 사람은 몸이 가짜 지체 같고 끼워 놓은 의수와도 같다. 의수도 몸의 활동을 따르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감각이 없는 지체이다. 온 몸이 다 감지했는데도 그는 감각이 없다.
그러나 겉사람이 파쇄될 때 그는 교회의 양심을 만지게 되고 교회의 느낌을 만질 수 있게 된다. 그의 영은 열려 있으며 교회의 영으로 그의 영을 만지게 하고 교회의 느낌을 그의 영에 교통을 해주도록 허락한다. 잘못을 범할 때마다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겉사람의 파쇄는 오늘 이후로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빨리 알 수 있는 기관을 갖는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 당신의 잘못을 알 때에, 그들이 당신에게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을 접하기만 해도 당신은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고, 그들의 영을 만지기만 해도 그들이 어떤 일에 대해 반대하거나 동의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몸의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몸의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가 다 상의한 후에야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 몸은 우리 육신적인 몸같이 상의할 것이 없고 모든 지체가 동일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 느낌은 몸의 뜻을 나타내고 그 느낌은 또한 머리의 뜻을 나타낸다. 머리의 뜻은 몸의 뜻을 통하여 나타난다. 우리 겉사람이 파쇄될 때 우리는 쉽게 교정을 받고 쉽게 몸의 느낌도 가질 수 있게 된다.
쉽게 온전케 됨
가장 큰 도움은 우리의 잘못을 교정받는 데 있지 않고, 우리 겉사람이 파쇄됨으로 우리의 영이 열린 영이 되고, 이 영이 나타나는 동시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의 공급을 받을 수 있게 되는 데 있다. 우리의 영이 속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또한 어디에 가서나 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만일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의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생각이 특별히 강하기 때문이다. 이 형제가 집회에 와서 온전케 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생각이 강한 사람은 그보다 생각이 더 강한 사람에게서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형제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이 생각도 안 좋고 저 생각도 안 좋다 하며, 그것도 흥미 없고 저것도 흥미가 없으며, 이것 저것도 다 자기를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이 지나도 그는 아마 한번의 도움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생각의 두꺼운 껍질이 있기 때문에 그는 생각 속에서만 두움을 얻을 수 있고 영적인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오셔서 한 번, 열 번, 일 년, 이 년, 수년에 걸쳐 그의 생각의 껍질을 전부 벗겨 내어 그의 생각이 얼마나 쓸모 없는지를 보여주신다. 결국에 그는 갓난아이같이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다시는 남을 경시하지 않게 된다. 이런 사람은 형제의 메시지를 들을 때에 그의 목소리를 듣거나 전파한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듣지 않는다. 또한 이해하도록 전하는가의 여부도 듣지 않고 자기 영으로 그 형제의 영을 만진다. 주님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시어 전하는 사람의 영이 해방되고 활동할 때 듣는 사람은 이로 인해 소생함을 얻고 온전함을 얻게 된다. 만일 사람의 겉사람이 파쇄되었다면 다른 형제의 영이 해방될 때 그의 얻는 온전케 함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방면의 온전케 함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처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겉사람은 더욱 철저히 파쇄되고 그가 얻은 도움도 더 많아진다. 어떤 형제 자매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움직일 때 그는 도움을 얻게 된다. 이 때 그는 더이상 교리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의문으로 사람을 척량하지 않으며, 어떤 형제가 전한 것이 좋고 나쁜지를 생각하지도 않으며, 어느 형제의 구변이 좋고 나쁜지를 생각하지도 않으며, 어느 형제의 구변이 좋고 나쁜가 또는 성경 해설이 좋고 나쁜가를 주의하지 않게 된다. 그의 태도는 완전히 변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는 우리의 영이 어떠한가에 달렸다. 많은 때 사람들이 우리 앞을 지나갈 때 우리가 그들의 영을 만지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온전케함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껍질이 너무 두껍기 때문이다.
온전케 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온전케 됨은 아는 것이 증가하고 생각이 더 많아지고 교리가 더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한번 더 접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을 통하여 흘러나오든, 집회에서나 평상시 교통에서나 하나님의 영이 다른 사람 안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그들로 인해 배불리 먹고 소생함을 얻게 된다. 우리의 영은 거울 같다. 우리가 온전케함을 얻는 것은 마치 우리가 영이 빛나도록 한 번 더 닦여지는 것과 같다. 온전케 됨은 다름아닌 우리의 영이 다른 사람의 영에 의해 만진 바 되고 우리의 영이 성령에 의해 만진 바 되는 것이다. 성령이 다른 사람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만질 때 우리를 온전케함을 얻게 된다. 영에서 나온 것은 부딪히기만 해도 빛을 낸다. 이것은 램프의 등피 색깔이 붉은 색이든 파란 색이든, 전선의 껍질이 희색이든 검정색이든 전기가 통하기만 하면 전구가 빛을 내는 것과 같다. 등피가 어떤 색인가는 우리의 주의할 바가 아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다름이 아닌 전기의 유출(流出)이다. 다른사람의 영이 조금 유출될 때 당신은 빛을 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을 잊어버리고 영을 해방한다면 당신은 소생함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배불리 먹을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은 쉽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어떤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그를 돕기 위해서 당신은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많은 힘을 들여야 그를 도울 수 있다. 강팍한 사람은 도움을 받기 쉽지 않으나 부드러운 사람은 쉽게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완전히 다른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외부적인 생각이 속으로 들어오고 교리가 들어오며 성경 해설이 들어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도 일종의 도움이라고 말한다. 이는 영과 영이 접하는 길로서 영이 접촉될 때 영성의 도움을 얻게 된다. 두번째 길을 만진 사람만이 참된 기독교를 만진 것이다. 이것은 참된 온전케 함이다. 만일 당신이 말씀을 듣는 것밖에 모른다면, 어떤 메시지를 듣고서 그 다음 주에 집회를 참석하여 같은 형제를 만나 또 같은 메시지를 들을 때 당신은 싫증을 내고 가버리려고 할 것이다. 당신은 같은 설교는 한 번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기독교를 교리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들을 당신 영안에 담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온전케 됨이 교리의 문제가 아닌 영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지난 주에 말씀을 전한 형제가 영을 해방하고, 당신의 온 존재가 그의 영에 만진 바 되었다면, 당신은 그에 의해 씻어진 것같이 소생함을 얻을 것이다. 다음 주에 가서도 그 형제의 영이 해방되었다면 당신은 그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제목은 낡은 것일지라도, 교리는 낡은 것일지라도, 그의 영이 해방되었다면 당신은 물로 씻어지듯 한번 더 씻겨질 것이다. 우리는 온전케 됨이 생각의 증가가 아닌 영과 영의 일로서 겉사람이 당신에게 얼만큼 교리를 주고 가르침을 주느냐에 있지 않다. 영의 접촉이 없는 모든 가르침과 교리는 다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겉사람이 파쇄된 후 당신은 더 쉽게 온전케 되고 더 많은 방면에서 온전케 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의 질문에서도 온전케함을 얻을 수있다. 주님을 찾고자 하는 죄인과 기도할 때에도 당신은 온전케 될 수 있다. 주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큰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심한 말과 책망의 말을 하게 하셨을 때 당신이 그의 영을 만졌다면, 당신은 이로 인해 온전케함을 얻게 된다. 당신은 여러 방면에서 온전케함과 공급을 얻을 수 있으며, 온 몸이 지체인 당신에게 공급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어떤 지체도 당신을 공급할 수 있고 이떤 상황에서도 당신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은 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온 교회가 당신의 공급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풍성한지! 이 때 당신은 머리의 풍성이 몸의 풍성이요 몸의 풍성은 나의 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생각과 교리의 증가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이 차이는 매우 큰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고 더 폭넓게 도움을 받는 것이 그가 파쇄된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남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다른사람들보다 더 총명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밖의 껍질이 다른 사람보다 더 딱딱하여 어떤 것도 그를 매혹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일 주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사 여러방면에서 그를 깨뜨리셨다면, 어느 날 그는 온 교회로부터 공급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공급을 받을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의 껍질이 딱딱하다면 성령이 다른 사람에게서 흘러나올 때 당신은 그 영을 만지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에 의해 깨뜨려졌다면 사람의 영이 움직이기만 해도 당신은 그에게서 도움을 얻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섬세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영을 만났는가의 문제이다. 이 영의 만남이 당신의 영을 소생케 하고 당신을 온전케 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이여, 이 겉사람의 파쇄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온전케 될 수 있는가, 사역할 수 있는가의 기본 조건이다.
영 안의 교통
교통은 생각과 생각이 상통함이나 의견과 의견의 조화가 아니라 영과 영의 접촉인 것이다. 우리 영이 다른 형제의 영을 만지는, 이러한 영의 접촉이 바로 교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긍휼하심을 입어서 우리 밖의 껍질이 깨지고 우리 겉사람이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의 영은 해방되고 형제 자매들의 영을 만질 수 있다. 그날 후에야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알게 된다. 그날 후에야 우리는 왜 성경에서 영의 교통을 말했고 영의 교통은 관점에서의 교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동심합의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머리로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온 천하를 다녀봐도 자기와 같은 두뇌를 가진 사람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교통은 영 안에서 갖는 것이다. 거듭나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다 우리와 교통을 가질 수 있다. 만일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장애가 제해지고 우리의 겉사람이 헐어졌다면 우리의 영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열려 있게 된다. 우리의 영은 모든 형제의 영을 받을 수 있도록 열려 있고, 어떤 형제의 영에 의해서도 만진 바 될 수 있으며, 어떤 형제의 영도 만질 수 있게 된다. 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게 되고,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시편 42편 7절은,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고 말한다. 깊은 곳은 정말 깊은 곳을 부른다. 당신의 깊은 곳은 나의 깊은 곳을 부르고 있으며, 나의 깊은 곳은 온 교회의 깊은 곳을 만지고자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깊은 곳이 서로 부르는 교통이자 부르짖음이고, 서로의 부르는 메아리이다. 만일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되고 우리 속사람이 해방되었다면, 우리는 교회의 영을 만지게 되고 주님 앞에서 비교적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모방할 수 없음
우리가 말한 겉사람의 파쇄는 성령만이 할 수 있고 사람으로서는 모방할 수 없다. 모방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 말의 뜻은 당신더러 내일부터 부드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언젠가 당신이 만들어낸 부드러움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부드러움은 아무 소용 없다. 성령이 역사한 결과에서 나온 부드러움만이 통한다. 우리 몸에 이루어진 모든 것은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환경 안에서 우리에게 조우를 안배하사 우리를 헐어버리신다.
우리의 책임은 성령의 손길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복종하고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이 다 옳음을 인정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빛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헐어버리시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일지언정, 우둔하고 무지한 노새가 되지 말아야 한다.주님의 능하신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길 때,당신은 그 역사가 오 년 전, 아니 십 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지난 오 년, 십 년 동안에 당신에게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기면서 이렇게 말하라. <주여, 전에 저는 장님과 같아서 당신이 어디서 저를 인도해내고자 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당신이 저를 어디로 인도하실지도 몰랐습니다. 오늘 저는 당신이 저를 허물어뜨리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오늘 제 자신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렇게 할 때 지난 5 년, 10 년 동안 열매가 없었던 일이 이제 결실할 것이다. 주님은 과거 당신이 알지 못했던 것들을 허물어뜨리실 것이다. 당신이 허물어질 때 당신은 교만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며 자기를 높이지 않게 된다. 이 허물어뜨림은 당신의 영을 자유케 하고 해방되게 하며 유용하게 한다. 이 때 당신은 영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추가로 언급하겠다. 첫번째 문제는 이렇다. 겉사람의 파쇄가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한다면, 어떤 활동이 분명 육체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 때 나는 내 힘으로 그 활동을 저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성령이 깨뜨리시거나 큰 빛이 비취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저지하지 말아야 하는지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이렇게 본다. 육체적인 모든 활동을 우리는 마땅히 제어해야 한다. 이것은 꾸민 것과 다르다. 오늘 나의 교만이 일어날 때 나는 나의 교만을 거절할 뿐 겸손해지려고 꾸미지 않는다. 오늘 내가 화가 나서 사람에게 욕하려고 할 때, 나는 성질을 거절해야 할 뿐 온유한 모양을 꾸며내지 말아야 한다. 멈추는 것은 소극적인 방면에 대한 것이고 꾸밈은 적극적인 방면에 관한 것이다. 소극적인 것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 나는 그것들을 거절하고 방치하지 않지만, 결코 적극적인 것을 모방하지는 않는다. 교만은 소극적인 것으로서 내가 처리해야 할 것이다. 겸손은 적극적인 것으로서 나는 모방하지 않는다. 가령 본래 당신이 목소리와 태도에서 딱딱한 강팍한 사람이라면 이 강팍함은 응당 처리를 받고 거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꾸며낸 온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활동과 행위를 멈추어야 하는 반면에 적극적인 면의 미덕을 모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주님께 맡기면서, <주여, 내 힘으로 모방하지 않고 당신의 역사를 앙망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럴 때 당신은 하나님께서 헐으신 곳에 다시 무언가를 세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밖의 모방은 하나님이 하신 역사가 아닌 사람 스스로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추구하는 사람은 속에서부터 배울 뿐 밖에서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심으로 그것을 당신 밖으로 표현되게 하여야 한다. 무릇 사람이 밖에서 행한 모든 것은 다 참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은 다 헐어져야 한다. 사람의 거짓됨은 다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인다. 밖의 모방과 꾸밈이 많을수록,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이 그를 지적하면서, <이것은 참된 것이 아니므로 제거해야 한다> 고 말해도 그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서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세워주시도록 하는 것이 좋다. 밖에서 모방하고 꾸미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들을 우리 몸에 더해 주시도록 매일 그분을 앙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단순하고 자연스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두번째 문제는 이렇다. 어떤 사람은 온유와 같은 천연적인 미덕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온유한데, 그렇다면 온유와 통제로 인한 온유는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에 관하여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모든 천연적인 것은 다 단독적이고 영과의 연합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성령의 통제로부터 나온 것들은 다 영의 지배를 받는다. 즉 영이 움직일 때 그것들도 움직인다는 것이다. 천연적인 온유는 영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영을 저지하는 모든 것은 다 강팍한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나의 천연적인 온유함도 다 강팍한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천연적으로 온유하다면, 그의 온유는 독립된 것이고 자신에 속한 온유이다. 가령 주님이 그에게 일어나서 두 마디 강한 말을 하라고 하신다면, 그의 천연적인 온유는 장애가 되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저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일생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 하도록 시키는 편이 낫겠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천연적인 온유가 영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연적인 것에는 다 자체의 의지가 들어 있고 그것들은 또한 다 강팍한 것이다. 그 온유함은 영의 쓰임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파쇄로 인한 온유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온유는 영의 쓰임을 받을 수 없고 영을 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또한 조금도 의견이 없이 완전히 영의 통제를 받는다.
둘째로, 천연적인 사람은 당신이 그의 뜻을 따를 때에만 온유하고, 당신이 그에게 원치 않는 일을 시키거나 원치 않는 일을 만질 때 그는 온유해질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천연적인 미덕은 자아를 버리게 할 수 없고 또한 사람의 자아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불변하는 사실이다. 온유뿐 아니라 사람의 모든 천연적인 미덕들은 다 자아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아가 만진 바 될 때 그의 모든 미덕은 다 사라진다. 당신이 천연적으로 온유한 사람의 뿌리를 만질 때 그는 온유하지 못하게 된다. 언제든지 그가 원치 않는 것이 만진 바 될 때 그의 온유는 사라진다. 그의 온유가 사라지고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통제에 의한 미덕은 완전히 다르다. 당신의 자아가 파쇄될 때 그 미덕들은 나타난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당신의 자아를 파쇄하실 때 도리어 그 미덕들은 나타난다. 당신의 자아가 파쇄될수록 당신은 더욱 온유하게 된다. 천연적인 미덕과 성령의 열매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강건하라
겉사람의 파쇄는 결코 꾸며낼 수 없고 그것을 대치할만한 다른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순복하여 우리 몸에 그분의 다루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겉사람이 파쇄되면 속사람은 강해진다. 소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겉사람이 파쇄되었으나 그들의 속사람은 여전히 강건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마땅히 강건해져야 한다. 만일 당신의 겉사람이 파쇄되었는데도 당신의 속사람이 강하지 않다면, 당신은 강건케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나는 겅건하리라>고 선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강건할지어다>라고 명하셨다. 기묘한 것은 당신의 겉사람이 파쇄될 때 당신이 강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강건하게 된다. 당신이 강해지겠다고 말하면 강해지고 강하겠다고 결심하면 강해진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말할 때 그렇게 된다. 한번 시도해 보라. 겉사람의 문제가 해결될 때 강건함의 문제도 해결된다. 당신이 강해진다고 말할 때 즉시 강해질 수 있다. 오늘 이후로 누구도 당신을 저지할 수 없다. 당신이 어떻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기묘하게도 그렇게 이루어진다. 주님은 <강건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주님을 힘입어 강해지겠다고 말하면 그렇게 된다.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속사람이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