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로부터 4년, 다시 밝힌 등불
2014년 창립60주년을 맞이한 이바라기조선초중고급학교(미토시 센바쵸).
결코 동포수가 많지 않은 지역에서 조국해방직후 국어강습소로 시작해 일본 당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53년에 현재 이 학교의 전신이 되는 이바라기조선중학교가 창립되기까지의 여정은 이바라기현 동포들이 모두 나서 싸워 얻은 것이었다.
새로이 태어난 민족교육
이바라기의 조선학교가 걸어온 길은 현내 재일조선인사보존활동의 일환으로 2001년에 발간된 책자 <이바라기의 재일조선인의 발걸음(역사편찬위원회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하는 이 책자를 바탕으로 학교창립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알아본다.
1945년 11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이바라기현 본부 산하에 있는 지부가 중심이 되어 각처에 조선인학교(국어강습소)가 개교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46년 2월 개교한 조련 세키모토초등학원(가나가와현)과 타나베초등학교(이바라기현 츠쿠바시)가 가장 오래되었다. 그 후 시모다테(下館), 츠치우라(土浦), 호죠(北絛)로 이어져, 47년까지 22개교가 개교되었다고 한다.
당시, 츠치우라 사카에마치(土浦栄町)의 초등학원에서 학감으로 근무했던 이원후씨는 만년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때 학생들은 연령이 다양해 5~6세부터 16세까지 함께 모여 ‘가, 갸, 거, 겨’부터 시작했는데, 교과서도 칠판도 없었어. 시간표 같은 것도 엉망이었지. 국어를 가르치는 도중에 아이들이 지친 것 같으면 노래를 부르거나 했으니까”(학교창립 35주년 연혁사 중에서)

- 츠치우라사카에쵸(土浦栄町)에 있던 조선소학교(1947년) 사진 왼쪽이 이원후씨 -
가난 속에서 탄생한 민족교육이었지만, 그로부터 2년 만에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48년 1월, 문부과학성이 조선학교 폐쇄를 통달하자, 전국에서 민족교육 사수를 위한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바라기 동포들도 현 교육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현 당국과 교섭했다. 이바라기조련 중앙소학교를 설립하고, 현 내의 학교를 6개 분교로 정리 축소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사립학교의 인가를 받아 재단법인의 설립도 인가되었다. 통폐합에 의해 학생 수는 줄어들었으나 위기는 피한 것처럼 보였다.
민족학급의 설립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듬해 49년 10월 19일, 전국에서 일제히 조선학교에 대한 폐쇄·개조를 명령했다. 동포들은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저항을 했지만, 11월 4일 현내 7개교에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일본학교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민족교육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폐쇄 당일에 민족교육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11일에는 학생, 보호자 450여 명이 현 지사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지사와의 담판을 지었다.
행정 측은 민족교육을 지키고 싶다는 조선인 측의 요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호코타(鉾田)에서는 보호자 대표들이 마을대표에게 일본학교에서 조선인교사를 채용하는 <민족학급>설립 요청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히타치(日立)에서는 시청 부지에 책상을 놓고 <파란하늘 교실(青空教室)>에서 교육을 이어갔다. 시 측은 결국 해안가에 장소를 제공하고, 민족교육의 존속을 묵인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립학교 가운데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특별학급을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행한 <민족학급>은 53년 5월 현재 히타치(日立), 미토(水戸), 츠치우라(土浦), 코가(古河), 하코다테(下館) 등 현내 10개교를 설립, 274명이 공부했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호코타(鉾田)와 류가사키(竜ヶ崎), 미츠카이도(水海道, 현재 조소시(常総市)에도 있었다 한다.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한 교실에 모여 조선어와 역사를 배웠다.
이바라기에서는 이바라기조선중고급학교에 초급부가 병설되는 67년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 민족학급에서 초등 단계의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 50~60년대까지 히타치 나카코지소학교(日立中小路小学校)에 설립된 민족학급 -
‘불사조’ 처럼
한편, 동포들은 학교 재건에 나섰다.
53년 2월, 재일본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 이바라기현 본부는 멤버 14명으로 이바라기조선중학교건설위원회를 설립하고, 폐쇄당한 츠치우라코마츠마치(土浦小松町)의 학교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건설위원회 결성에서 공사까지의 경위가 기록된 <이바라기조선중학교운영위원회 정기대회>(54년 4월)의 보고서에 따르면 건설위원회 위원장은 신종기(申鍾驥), 재정위원은 조희태(曺喜泰), 정기서(鄭箕犀), 정운용(鄭運龍)을 선출했다. 교사 수선복구비, 기숙사건설비, 비품대 등 합계 85만 엔의 예산은 츠치우라(土浦)의 구 조련 사무소과 주택을 매각, 부족분은 지역 유지들이 갹출해 마련하기로 했다. 동포들도 하루 5엔씩 저축운동으로 약 50만 엔을 모으는 등 학교재건을 위해 하나가 되었다.
53년 4월 15일, 츠치우라(土浦)에 이바라기조선중학교가 개교되었다. 학생 17명, 교원 7명으로 시작했다. 이바라기조선초중고급학교의 설립기념일은 이날로 정해졌다.(55년에 고급부가 병설, 59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
초창기 이 학교에서 배운 장○○(70)씨는 일본학교에 다녔던 소학생 시절에는 조선인이라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학교는 환경면에서 보면 결코 좋은 곳이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주위 사람 모두 조선인이어서 아무 걱정 없었지. 진심으로 마음이 편하고 좋았어.”
장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장사를 하는 한편 현내 민족교육 발전에 많은 봉사를 한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 고생한 1세대들이 계셨기 때문에 현재의 나도 있다고 생각해.”
학교는 미토(水戸)로 이전한 후에도 경찰의 강제수사, 화재에 의해 교사가 소실되는 등 많은 곤란에 직면하지만, 그 때마다 ‘불사조’처럼 되살아났다. 2013년, 창립 60주년을 계기로 교내에 개설된 이바라기 민족교육역사자료실은 학교를 지키고, 지원하고, 이어온 동포들의 뜨거운 마음을 현재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