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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 삼가귀감 (서산대사).천불전등을 ( 단속사를 불태운 불지른 성여신)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자는 공실(公實)이고 호는 부사(浮査)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금산(琴山)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정월 초하루에 아버지 두년(斗年)의 아들로 진주(晋州) 구동(龜洞)의 무심정(無心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그가 남긴 문집은 『부사집(浮査集)』 4권 4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성여신은 12세(1557년)에 『통사』, 『소학』, 『사서』를 배워 문리가 크게 진보되고 제술에도 능하여 조계공이 ‘이 아이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여 훗날 반드시 큰 유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13세(1558년)에는 삼경(三經)과 외전(外傳)을 다 읽고 시(詩)·부(賦)·책(策)·론(論)을 능숙하게 지을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15세(1560년)에는 정탁을 찾아가 『상서』를 받고 이름있는 선생에게 나아가 배울 것을 권유받았고,
16세(1561년)에는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좌구명(左丘明), 유종원(柳宗元), 한유(韓愈), 구양수(歐陽修) 등 고문가의 책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으면서 지냈다. 18세(1563년) 봄에는 폐백을 갖추고 이정(李楨)을 찾아가 뵈었다. 이정(李楨)이 한 번 보고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서로 만나는 것이 이리 늦었는가?’하고 『근사록』을 주며 위기지학으로 면려하였다.
급문 : 성여신은 23세(1568년)에 남명선생을 배알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이 해 가을 정유길(鄭惟吉)이 진주 목사 최응룡과 함께 근처 고을의 유생을 모아 시부(詩賦)를 짓고 열 명을 선발해서 단속사에 모였다. 뽑힌 사람은 하면, 진극경, 손경인, 손경의, 정승윤, 정승원, 박서구, 이곤변, 하백 등이었는데, 그 중에서 성여신이 으뜸이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승 휴정이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이 절에서 판각을 하였다. 삼가(三家) 가운데 유가(儒家)를 제일 끝에 두었고, 또 불상을 만들어 사천왕(四天王)이라고 하였는데, 모양이 매우 기괴하였다고 한다. 모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그 책을 인출하므로 성여신이 마음으로 매우 분하게 여겨 일행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람을 꾸짖고 그 책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 도(道)를 훼손하고 우리 유가(儒家)를 모욕한 이 책과 불상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곧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 책판을 불지르게 하고, 또 명하여 오백 나한과 사천왕을 끌어내 모두 불태우게 하니 승려들이 모두 두려워 떨면서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26세(1571년) 3월에 덕산으로 가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5월에 사천으로 가서 이정(李楨)을 찾아 뵈었다.
과거 : 성여신은 64세(1609년) 가을에 생원(生員) 및 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였다. 당시 이정구(李廷龜)가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집 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 않았는데 강산 천만리가 다 보이네’라는 구절을 읽고, ‘이는 반드시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이면서 시속의 풍격을 본 받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발탁하였다’고 한다.
68세(1613년)에 별시 동당(東堂)에 장원하여 서울에 이르렀는데 객사의 관인이 정도에 의하지 않는 부귀의 길을 청하자, ‘임금을 섬기려고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은가? 내가 과업을 늙도록 폐하지 않는 것은 어버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평소의 포부를 한 번 펴 보고자 한 것인데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세도(世道)를 알 것 같다. 하물며 시사가 바르지 못하고 삼강(三綱)이 장차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데, 과거는 해서 무엇하리요!’ 하고는 돌아갔다.
강학 및 교유 : 성여신은 21세(1566년)에 쌍계사(雙磎寺)에서 돌아와 모친상을 받들고 돌아온 이정(李楨)에게 찾아가 학업을 익히고, 이정(李楨)의 손자인 호변(虎變), 곤변(鯤變) 등의 여러 문하생들과 더불어 공부하였다. 의리를 강론하는데 잠자거나 쉬기를 잊어버리니, 이정(李楨)이 매우 공경하며 중히 여기고, 경전을 읽어도 반드시 동부(東賦)를 같이 외우게 해서 과정을 익히게 하였다. 성여신이 특히 사서(史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이렇듯 조계공과 이정(李楨)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22세(1567년) 가을에는 덕산에서 쌍계사로 가서 독서하였다.
30세(1575년)에 응석사(凝石寺)에 가서 공부하였고, 32세(1577년)부터 34세(1579년)까지는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살면서 경전(經傳)과 『심경』, 『근사록』, 『성리대전』, 『대학』, 『소학』 등의 책을 차례로 강독하였는데, 혹시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문득 잠심(潛心)하고 묵회(黙會)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하였으며, 뜻이 풀린 뒤에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성여신은 제자백가를 포함하는 폭 넓은 독서를 통해 학문적 포용성을 길렀는데, 이 시기에 성리학에 침잠함으로써 성리학적 사상의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외종손인 안시진(安時進)을 통해서 남긴 「침상단편(枕上斷篇)」에는 그의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36세(1581년) 봄에는 창녕의 선영(先塋)을 살피러 갔는데, 당시 창녕의 수령을 지내고 있었던 정구(鄭逑)가 찾아와서 만났다. 4월에는 장인인 박사신(朴士信)을 따라 의령의 가례(嘉禮)로 이사하였는데 근처의 곽재우, 이대기, 이대약(李大約), 이종영 등과 더불어 서로 강마(講磨)하였다.
37세(1582년)에는 자굴사(闍崛寺)에서 곽재우, 이대기와 더불어 강마하면서 겨울을 지냈다.
57세(1602년)에는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고, 이 해에 이종영과 이대약(李大約)과 더불어 계서약(雞黍約)을 하여 매년 봄 가을 양 계절 끝 보름에 돌아가면서 서로 방문하니 정온(鄭蘊)도 함께 참여하였다.
58세(1603년) 3월 보름에는 「계서회(雞黍會)」를 부사정에서 열기로 하였다. 9월에는 친구인 선비들과 함께 덕천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는데, 이광우, 이천경, 진극경, 정승윤(鄭承尹), 하징, 하성(河惺), 신가(申檟), 하수일(河受一), 정승훈(鄭承勳), 이유함(李惟諴), 하광국(河光國), 조영한, 조겸(趙㻩), 이명고, 이각(李殼), 조영기, 문홍운(文弘運), 박인(朴絪) 등 여러 선비들이 모두 와서 모였고, 그 밖에 또 33인이 왔다(『凌虛集』).
59세(1604년)에는 이대기를 방문하였다(『雪壑先生文集』).
61세(1606년) 3월에는 이대약(李大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가을에 정구(鄭逑)가 덕천(德川)에서 찾아왔다.
저술 : 성여신은 62세(1607년)에 「삼자해(三字解)」와 「만오잠(晩悟箴)」을 지었고, 69세(1614년) 여름에 「성성잠(惺惺箴)」을 지었으며, 71세(1616년) 봄에 「금산동약(琴山洞約)」을 이루고 가을에 두류산에 가서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으며 겨울에 보름 동안 두류산을 유람하고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를 남겼다. 73세(1618년) 봄에 관포(灌圃, 漁得江)선생의 쌍계사(雙磎寺) 팔영루 시판을 쓰고 여름에 두류산에 올라가서 「기소견장편(記所見長篇)」이라는 7언고시를 남겼다. 74세(1619년)에 「진양전성기(晋陽全城記)」 및 「상락군김공시민극적비명(上洛君金公時敏郤敵碑銘)」을 짓고, 77세(1622년)에 『진양지(晋陽誌)』를 펴냈고, 78세(1623년)에 『천자초예(千字草隸)』를 지었다. 다시 두류산을 유람하고 장편의 고시인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지었다. 87세(1632년)에 「침상단편(枕上斷編)」을 지어 가을에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을 이루었다.
스승추존활동 : 성여신은 31세(1576년)에 최영경, 하항(河沆), 유종지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는데, 이 때 그도 함께 가서 의논하고 일을 도왔다. 56세(1601년)에는 병화로 소실된 덕천서원을 제현과 더불어 중건하고, 최영경을 배향하였다. 이 때 이정(李瀞), 진극경, 하징 등과 더불어 도모하였다(『茅村集』).
성여신은 87세(1632년) 봄에 병으로 눕고, 동년 겨울 11월 초 1일에 부사정(浮査亭) 양직당(養直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李 瀞, 『茅村集』 5권 1책.
朴 敏, 『凌虛集』 4권 2책.
李大期, 『雪壑集』 4권 2책.
成汝信, 『浮査集』 4권(『韓國文集叢刊』 56), 民族文化推進會, 1990.
成汝信, 『浮査先生文集』 4권(飜譯本), 浮査亭, 檀紀 4327.
『民族文化大百科辭典』 8·10·12·18.
李商元, 「浮査 成汝信의 隱逸精神」, 『南冥學硏究論叢』 4, 南冥學硏究院, 1996.
高順貞, 「浮査 成汝信 硏究」, 慶尙大學校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5.
진주선비<부사 성여신2>
고향 향약 만들어 풍속 바로잡아 부사는 임란· 정유재란을 겪고 54세 되던 해,
고향 금산으로 돌아와 이듬해 부사정(浮査亭),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강학의 장소를 마련하였다.
이때는 전란이 막 끝난 뒤라 고향의 풍속은 변해 민심마저 어지러웠다. 고향에 돌아온 부사는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자 온힘을 다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비로서의 학문 정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현들의 유업을 잇는 일과 무고로 억울한 일을 당한 어진 선비들의 신원을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56세때 덕천서원을 중건하고 수우당(진주선비 최영경) 위패를 봉안하는 일에 참여 했으며, 이듬해는 수우당 신원소를 올리는 일에 동참하였다.
61세때 덕천서원에서 한강을 만났으며, 69세때 영창대군의 일로 옥에 갇히게 된 동계 정온의 무고함을 상소하는 일에 고을의 선비들과 같이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용장 김덕령 장군이 억울한 일을 당하자, 이의 신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71세때 고향에서 금산동약(琴山洞約)을 만들었다. 마을의 덕이 있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여씨향약과 퇴계선생 향약을 본받아 동의 규칙을 정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덕업을 서로 권한다. 2.잘못은 서로 바로잡아 준다. 3. 예속으로서 서로 사귄다. 4. 어려움이 있을 때는 서로 구휼한다. 이와같은 조목을 정해 놓고 또 따로 부모에게 불손한 사람, 형제간에 싸움하는 사람, 집안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사람, 망녕되게 위세를 부리고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 남을 업신여기고 어른을 욕되게 하는 사람, 과부를 유혹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마을의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어지러워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또 양전시진폐소(量田時陳弊疏)를 지어 임란후 실정을 무시한 과중한 결세의 부담 때문에 백성들이 집을 떠난다는 점을 지적하여, 전란으로 황폐해진 전답에서 이전과 같은 양의 세금을 거두는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즉 부사는 자신의 학문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널리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
행장을 보면, 공은 일찍이 남명 구암 문하에 수학하여 경의(敬義)와 효제충신(孝悌忠信)의 가르침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두 분의 말씀은 다른 것같지만 실상은 같다. 효제충신은 경의가 아니면 행할 수 없고 경의는 효제충신이 아니면 설 수 없다. 이것은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내마음의 마땅한 것을 다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종신토록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래서 자신을 닦고 남을 기르는데 이로써 먼저 힘쓸 일을 삼았다.
부사가 스승인 남명과 구암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은 효제충신과 경의인데, 이것은 생활하는데 있어 자기 마음의 마땅한 것을 다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사는 경의와 효제충신을 학문의 요체로 삼아 이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생활에 활용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여기서 부사의 실천적 학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619년 부사는 '진양전성기급상락군김공시민각적비'를 지었다. 임란때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록한 비이다. 임란 3대첩의 하나로 3,800여명의 군사로 2만여 적을 물리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상세하게 드러내었다.
" 아! 위난을 다급히 여기고 왜적을 물리친 것은 충성심이 솟구쳤던 때문이며,죽음으로 지켜 달아나지 않은 것은 의로움에서 결단된 것이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치친 것은 용맹을 드날린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비를 후대인들은 '김시민장군전공비'라 부르고 있으며 1972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진주성내 임진계사순의단 앞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으나, 이 비석의 글을 진주 선비 부사 성여신이 74세때 지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로부터 3년 후 '진양지'를 편찬을 의논하였다. 진양지는 부사를 중심으로 창주 하징 능허 박민, 봉강 조겸, 진사 정성훈, 진사 하흡 등 진주 선비들이 1622년(광해군 14년)부터 1632년(인조 10년) 에 걸쳐 편찬한 진주목 읍지이다.
총 2책으로 된 이 책의 내용구성은, 1책에 건치연혁 진관 관원 속현 주명 풍속 산천 성곽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 2책에는 향교 서원 병사 명환 인물 사마(司馬)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구가 지은 함주지의 영향을 받아 그 체재를 그대로 따라 충신 효행 열녀 등 충효사상을 강조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진주 사림등이 편찬하였기 때문에 각 면리의 구역과 주민의 거주 신분 풍속 물산 등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진양지의 편찬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길이 남겨 후손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부사를 비롯한 진주 선비들의 애향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부사는 임종에 앞서 최치원,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등 우리나라 여러 선현들의 학덕을 기리는 글을 지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1
632년 87세의 일기로 부사가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은 1702년(숙종 28년) 진주 금산에 임천서원을 건립하여, 1719년 부사를 비롯한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창주(滄洲) 하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위패를 모셨다, 그 후 대원군 서원 철폐때 훼철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