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황산대첩 전적지와 판소리 동편제의 현장을 가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회수리 비전마을"에 있는 황산대첩 전적지와
동편제의 가왕인 송홍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터가 있는 이 곳은
전투에서 피흘리며 죽어가는 수 많은 군사들의 아우성과 함께
묵직한 소리로 민초들의 심금을 울렸던 판소리와 극명하게 대비되어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현장이다.
황산대첩을 기리는 전적지와 동편제를 완성시킨 가왕 송홍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를 복원한 생가터가 있는 곳.
1.가왕 송홍록의 생가터
가왕 송홍록(조선시대의 명창)
송홍록의 문하에서 송우룡. 박만순이 나왔으며
송홍록의 조카인 송우룡은 송만갑.유성준.이선유.전도성과 같은 많은 명창을 배출하였다
송만갑의 문하에서는 장판개.김정문.박중근.박봉래.송기덕과 같은 명창이 나왔으며
박록주.김소희.한승호 등 많은 명창들이 한 때 송만갑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가왕 송홍록의 생가
이 곳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 송홍록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계면조.우조.진양조 등 가조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 시켰으며
판소리의 큰 유파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어 가왕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업적
1780년경 출생~1863년경에 사망( 추측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임.
조선전기 8명창 중 한 분으로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임.
동편제의 모든 가사를 집대성 하였음.
계면조.진양조의 완성과 메나리조를 도입하여 판소리를 오늘의 민족음악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송홍록의 가계도
송홍록은 조선시대 정조 초기 권삼득의 고수 송첨지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동생 "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만갑"으로 이루어지는
송씨일가를 이루어 대대로 명성을 떨쳤다.
국창 박초월의 생가
양력
1915년 09월17일 출생~1983년11월26일 사망
송만갑.김정문의 지도로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전수받음.
사단법인:한국국악협회 초대 이사장 역임.
한국국악예술학교 설립.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됨.
박초월은 12세 때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전수 받았고,송홍록의 손자 송만갑에게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전수 받았으며 옥계저수지에 수몰된 옥계폭포에서 득음하였다.
송만갑은 서편제를 집대성한다.
공간
공간구성의 원리
가왕 송홍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판소리 동편제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임.
여러 개의 둥근 조형물은 진양조의 24박자 표현한 것이고.
3 개의 사각기둥 조형물은 매나리조의 구성음을 표현한 것이고.
2 개의 석연지(石蓮池)에 담긴 물은 계면조에 세련미를 보인 송홍록의 비곡(悲曲)을 듣고
청중들이 흘리는 눈물을 표현한 것이다.
유적 앞을 지나는 임천강.
이 강물은 산청으로 흘러 경호강을 만나고
경호강은 진주의 남강에 합류된다.
남강은 낙동강과 합수되어 남해바다로 흐른다.
2.황산대첩 유적지
황산대첩 유적이 잇는 사당.
삼문(출입문)
아래는 안내문에 새겨진 글을 옮겨 온 글이다.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裨)
사적 제104호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을 회수리)
이 곳은 고려망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 곳에서 주둔 하면서 장차 바다로 나가려고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말도의 투구를 떨어뜨리고 뒤 이어 이두린이 쏜 화살이 그의 이마를 맞혓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 하는 왜군을 섬멸하였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 낸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군막터가 있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주춧돌.
수정봉(여원재)방향.
여원재로 지는 석양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파괴된 원비문을 안치한 파비각 옆에 세워진 황산대첩기념비는
1972년 신석호씨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 새로 세운 것이다.
파비각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11월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1977년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각들을 모아 안치하였다.
대루비각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6년(1380년)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10년(1577년) 왕명을 받아 이 곳에 황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
현종8년(1667년)에 비각을 세우고 고종19년(1882년)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 때 어휘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대루비각 안에 세워진 황산대첩비.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하였다.
황산대첩 사적비
이 비는 고종19년(1882년) 운봉현감 이두현이 화수산 어휘각을 창건하고 세운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 이다.
일제강점기에 황산대첩비와 비각 등이 함께 파괴되었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 건립 취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경내에서 바라보는 삼문
어휘각(御諱閣)
황산대첩 우왕6년 다음 해 본 석벽에 8원수 4종사관의 명단을 새기게 해 자기 혼자만의 공이라기 보다는
여러사람의 공으로 튼 승리를 거뒀다는 성지로 표현했던 유일한 곳이다.
여념의 오랜 세월에도 뚜렷하였던 그 성적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본 비첩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그 잔영만이 남아 있다가 1973년 현재의 비각으로 건립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