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대두되고 있는 영적각성과 지상명령성취에 순종하기 위하여 창의적인 접근 전략으로써의 태권도선교에 관한 연구이다.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종주국으로,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 되었고, 타무술과 비교했을 때에 오랜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 행동철학과 생활방식으로 사회생활에 깊숙히 자리잡아 국내는 물론 160여개국에서 22,000명의 태권도 지도자가 태권도를 보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개혁신학과 신앙으로 무장하여 태권도를 복음의 도구로 접목시킨다면 태권도 선교(Mission)라는 창의적인 접근전략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개혁신학에서 태권도선교 관련 논문이나 책들이 나오지 않아 신학적인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므로 태권도선교와 성령의 사역의 연관성을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중생이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자"에 대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다(딛3:5). 그러므로 중생은 성령과 사람의 협동이 아니다. 죽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창조주인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임으로 태권도선교는 성령의 사역에 의지해서 우둔한 구도자들에게 듣게 할수 있는 접촉점으로 연관성을 갖게 되는데 필자가 국내외적으로 수백회의 집회사역을 감당해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들 중 단 26%만이 비기독교적인 세계의 3분의 2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큰 불균형을 보여준다. 거의 2,000년이 지났는데도 20억이 속해있는 10,000개의 단일 최대 종족들이 여전히 지역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다. 곧 미개척지 선교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태권도선교가 제한국가로 들어가기 위한 창의적인 다리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성령의 사역을 통한 태권도 선교의 연관성의 연구는 시기적절하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태권도와 비교무술을 다루어 세계의 대표적인 무술들을 비교 분석하였다. 아울러 기독교와 우상종교들을 구별하여 비교해 보았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힘입어 회심을 하고 성령체험을 한 자가 태권도정신과, 성령사역의 결과인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통하여 태권도 정신으로 무장한 자라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성령사역과 태권도선교이해를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동작원리와 미적표현방법을 연결시켜서 성경을 의지하여 '육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4:8)'는 소망함으로 구체적인 적용점을 찾아 광신대학교 태권선교연구회의 활동과 드라마콘티와 시범멘트를 실어 태권도선교이해를 더 해 갔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달란트와 은사를 믿음으로 잘 활용하여 마지막때에 '참 잘 했다' 칭찬받는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 7년의 과정의 결실을 맺어 다시 가야할 달려갈 길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원한다. 경험한 바로 태권도가 강한 인상을 주고 접촉점이 용이하지만 우려되는 바는 집회를 할때에 태권도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사역중이나 집회가 끝나고 태권도동작, 격파, 겨루기가 회중에 남아있는다면 복음은 희미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철저한 개혁신학의 바탕에서 전신갑주를 취하고 영성훈련을 통하여 자아(自我)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도록 연구와 사역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목 차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분명한 의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로마는 언어와 법으로, 영국은 문화로, 미국이 경제력으로 선교를 담당했다면 한국은 무엇을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해야 되겠는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음 전파의 부차적인 수단 하나를 들자면 전문인 선교인 태권도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선교학자들은 한국이 세계 선교의 마지막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은 CIA로 세계를 정복하고 일본은 종합상사로 세계를 정복한다면 한국은 태권도로 세계를 정복한다는 태권도계의 말이 있다. 태권도는 서울에 세계태권도연맹의 본부가 있는 국기원을 중심으로 세계160국의 정식회원국이 있다. 태권도 보급 현황으로는 국내에서만 400만 유단자를 포함하여 500만 동호인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세계적으로 2만2천명의 사범들이 2천만명이 진출하고 5천만의 동호인을 형성하였다. 또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경기가 세계 곳곳에 방영되어 태권도계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태권도보급과 성장은 태권도선교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기회라 보겠다.
GCOWE '95(세계복음화대회)이 대회 기간 중에 국가별 전략회의에서 한국대표는 10/40창문지역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지역의 선교를 위해 전문인 선교사 발굴과 파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오늘날 전문인선교는 10/40창문지역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선교전략으로 인식되고 있다. 1998년초 버지니아주 선교통계학 연구교수인 David B. Barrett의 주장에 의하면 아직도 비기독교인이 67%라고 하면서 복음의 미완성과업의 성취를 역설하였다. 그 가운데에 1분당 46명, 매일 66,24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죄의식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전도자이든 선교사이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67%라는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앞에 인도할 거룩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제한지역을 창의적인 접근 방법으로 각 전공 분야에 훈련된 전문인 선교사가 곳곳에 게릴라 전법으로 토착신앙, 혼합종교, 모슬렘, 공산권, 힌두교, 불교 등의 사신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개(各個)격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중대한 현실과 향후 전망에 구원의 방주인 교회는 적극적 대응으로 주님께서 각 성도에게 허락하신 각종 은사와 달란트를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전문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사역에 헌신한 자는 해당 직업분야에 개혁주의적 신학의 체계를 세우고 기독교 세계관을 확립하여 세상 문화를 정복하고 다스림의 일환으로 헌신한 분야에 최고를 달려야 할 것이다. 성령사역의 결과로 복음이 증거됨을 재확신함으로서, 기독교의 입장에서 기독교문화를 거듭나지 않는자가 다루어서는 안되듯이 태권도 선교 역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만이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1. 연구의 목적과 문제제기
태권도선교의 볼모지와 같았던 광주지역에서 93년에 태권도선교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사역을 감당하면서 선교사훈련을 받아왔다. '선교'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찼고 세미나 및 집회정보를 입수하면 곧장 어디든지 상관없이 달려가 참가하기를 밥먹듯이 했다. 태권도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있고 크리스빅 체조 협회에서 교육생으로 6개월을 배웠고, 태권도 사범 생활을 8년을 한 경험이 있는 태권도 선교사로서 여기서부터 선교지라 생각하고 선교사적 삶을 훈련하면서 태권도를 통하여 'Cross Drama', 'The Passion Drama',를 연출, 안무하여 태국, 필리핀 등지에서 100회이상 집회를 인도하였고, 국내에서도 전방 군부대와 논산훈련소와 강원도 및 호남지역과 제주도에서 100회 이상의 영적각성과 전도집회를 은혜롭게 인도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중요한 것은 체계적으로 신학적인 바탕을 둔 자료가 없다는 것이고, 논문이 쓰여졌다 할지라도 개혁주의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신학사조로 쓰여진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이제 졸업할 때가 되어 사명감을 가지고 '성령사역을 통한 태권도선교의 관계성'을 연구하려 한다. 이 논제를 통하여 광신대학교 태권선교 연구회뿐만 아니라 태권도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도전이 되기를 원한다.
이 논문에 있어서 문제제기는 세계도처에 그리스도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10의 40창지역에서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에 있다. 전세계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수입의 0.09%를 복음화 지역에 쓰고 단지 0.01%만이 미전도종족을 위해 쓰고 있다. 이 같은 불균형은 21억≪8,000종족≫이나 되는 인구가 자신의 말로 복음을 직접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만명의 선교사중에 아홉명 중에 한명꼴로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 Groups)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기를 얻어 창의적인 선교접근전략인 태권도선교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변함없이 태권도선교에 사명감을 가지고 준비했던 지난 과정을 통하여 수확한 결실을 맺기를 원하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신앙을 가지고 개혁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신학서적들과 태권도관련서적과 신문, 잡지, 인터넷 등을 활용하여 논제를 펼치려 한다. 아쉽게도 개혁신학에서 태권도선교 관련 논문이나 책들이 나오지 않아 다른 대학의 논문을 참고만 하고, 처음부터 지도교수인 조봉근교수님의 지도를 받아썼다. 또한 본 광신대학교 태권선교연구회에서 수년간 경험한 태권도선교의 사역들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Ⅱ. 태권도와 비교무술
1. 무술의 분류
무술(武術, martial art)은 싸우는 스포츠나 기술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주로 극동지방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쿵푸, 유도, 가라테, 검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무술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궁술, 창술, 검술이 있고, 중국에서 시작된 비무장무술은 발과 손으로 치거나 잡는 기술을 강조한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무사 계급이 훈련할 때 궁술, 검술, 비무장전투, 포와 총기의 사용, 갑옷 입고 헤엄치기 등을 강조했다. 전투에 관심이 있는 다른 계급 사람들은 막대기, 도리깨, 낫, 칼 같은 일상적인 작업도구를 이용한 무술과 비무장전법을 익히는 데 전념했다. 비무장무술뿐만 아니라 무장무술도 정신단련 수단으로 많이 이용된다.
(1) 지역상의 분류와 형태상의 분류
지역상의 분류를 들면, 첫째로 동양계 무술인 한, 중, 일 삼국의 무술을 주로 일컫는 말과 동남아권도 포함한다. 또한 서양무술과는 달리 기심체의 일치를 그 목적으로 한다. 둘째로 서양계 무술인데, 주로 아메리카나 유럽의 무술을 일컫는다. 동양무술과는 달리 힘과 스피드, 테크닉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다. 크게 또 하나는 형태상의 분류이다. 첫째로 타격계 무술이다. 이 무술은 복싱, 태권도등과 같이 치기와 차기같은 타격기술이 주종을 이루는 무술이다. 둘째로는 접근계 무술인데, 유도나 아마츄어 레슬링과 같이 메치기, 꺽기, 조르기등의 접근계 기술이 주종을 이루는 무술이고, 셋째는 종합무술이다. 프로레슬링처럼 위의 두 가지 형태를 종합적으로 갖춘 무술이다.
또한 세부적인 분류로서, 기술의 분류와 방어기술의 분류가 있다. 기술분류로써 첫째는 공격기술의 분류에서 첫째는 치기, 차기와 같이 타격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타격기술이다. 둘째는 상대방을 던지는 메치기기술이다. 셋째는 상대방의 관절등을 꺽어서 제압하는 꺽기기술이다. 넷째는 목이나 허리와 같은 곳을 강하게 조여 제압하는 조르기 기술이다. 다섯째는 유도의 굳히기, 누르기와 같이 누운 상태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침기기술이다. 또 다른 방어기술의 분류로서 첫째는 신체의 일부를 움직여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기술이다. 둘째는 신체를 움직여 상대방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는 회피하는 기술이다.
2. 태권도이해
우리나라 국민의 48.3%가 한 달에 2∼3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대부분의 국민들이 차츰 생활 체육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태권도는 참으로 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회학과 심리학, 생리학, 운동역학과 영양학, 등을 통한 건강교육을 이미 여러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그 뿌리부터 살펴 태권도선교적 측면을 강화하고자 한다.
(1) 고대태권도발생
인간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신체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운동을 제거할 수는 없으며, 인간은 그 활동을 통해서 성장 발달한다. 이러한 신체 활동은 예로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무기가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 사회에 있어서는 각자의 생활영위와 종족보존을 위한 식물의 획득, 외적방어라는 인간 본능의 생활요구에 따라 자연 발생적으로 도수공권(徒手空拳)의 투쟁형태가 투기 또는 자위무술로 발달하여 그 시대의 유일한 체육적 활동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세월이 흘려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무기 사용을 하게되고,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튼튼히 하려는 생존의식은 계속되었고, 체력과 기술을 발휘하고자 하는 인간 본능이 앞서 개발된 투기나 자위무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였으므로 천신, 태양, 산악 등을 숭상하는 원시신앙, 인간신앙이 유일의 생활이니만큼 오월 하종(下種), 시월추수(秋收)가 끝나면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부족에 따라 부여(夫餘)에서는 동맹(東盟), 마한(馬韓)에서는 시월제(十月祭), 신라(新羅)에서는 가위(可謂)라 불렀으나 같은 서일의 제례이었으며 이때 힘과 기술을 겨루는 투기시합을 하였다하니 지금까지 전하는 농악, 씨름등 민속놀이에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제천대회에서 여흥적으로 즐기던 유희, 오락과 투기 등이 점차 경쟁의식을 갖게 되어 경기로 발전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 없다. 이러한 것은 다신교(多神敎)를 신봉하는 그리이스인들이 여러 신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전에서 제전경기를 행한 '올림피아'경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제천 행사가 계속됨에 따라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의 향상을 목표로 강한 정신력과 체력배양을 위한 무예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신체 건강을 위한 양생술(養生術)이 발전되었고, 동작이나 힘이 우세한 동물의 공.방자세 등을 자신들의 투쟁경험을 위주로 체계화시켰으니 여기서 오늘날의 태권도가 싹트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2) 태권도역사와 철학
태권도의 역사는 태권도의 연원은 고대부족국가의 제천행사였던 영고, 동맹, 무천때 체육활동으로 행해졌던 제천경기로, 이로부터 형성된 전통무술인 택견(태권도의 옛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는 화랑도를 통해 학문을 닦는 한편, 신체를 단련하고 무술의 하나로서 수박을 행했다. 또한 고려 고종 때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신라 무술의 대목에서 탁견술을 기술한 것이 있는데, 태권도의 옛 이름인 '택견'도 이 탁견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체육사'에 '이 시대의 환경,조건으로 보아 각저, 수박(手搏)등의 투기가 행하여졌다'라고 기술한 것도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 태권도는 다른 문헌이나 사화에 따르면 수박 이외에도 수박희, 박희, 수박, 수벽, 각희, 권법, 권술, 유술, 탁견등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권도를 수박 또는 수박희라고 했으며, 고려 의종은 이의민의 수박희를 가상히 여겨 벼슬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790년에 이덕무, 박제가가 저술한 무예도보통지에 권법이라는 이름으로 태권도 기술이 도해로 기술되었다.
태권도철학에서 있어서 태권도는 맨주먹과 발을 사용하는 자기방어 기술의 집합이며 그것은 싸움의 기술이다. 그러나, 수련의 주 목적은 단순히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태권도 수련은 손과 발의 기술을 배우고, 마음과 정신을 조화롭게 해주고, 그 사람의 신체 상태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태권도를 하는 사람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가 좋아지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것을 한다. 무엇보다도, 태권도 수련은 자신을 연마하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인내와 자기수양은 튼튼하고, 되풀이되는 육체적 수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태권도인은 정신과 육체사이의 조화를 얻는다는 첫 번째 목적을 갖고 사는 생활 철학을 보여준다. 정신생리학적인 여러 자극하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나 생리적 반응의 개인차를 다룬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 자연,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우주와 조화를 이루려는 생활 철학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이 싸우는 방법을 배우려는 도덕적 의무를 갖는 데에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분별력에 기초한 것이다. 스스로 먹이를 먹을 수 없고, 스스로 행동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책임져야 하듯이 자신을 유지시키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 둘째는, 실행력과 관계된다. "훈련이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가정이다. 싸움의 경우에도 훈련이 어떤 사람의 능력을 개발시켜 준다면 자신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훈련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따라서 그가 극단적인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면 싸움 방법을 배우려는 충동을 느낀다.
(3) 태권도역사 선교사(宣敎史)적 배경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태권도 선교사(宣敎史)의 배경은 인간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 세상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고 가인의 믿음 없는 제사가 최초의 살인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들은 자구책이 필요했고, 수많은 것 들 중에 종속 보존의 본능과 자기 방어의 본능이 한국의 무술로 자리잡아 오늘날의 태권도를 낳게 되었다. 태권도는 한민족의 고대 단군신화와 홍익인간의 사상의 인본주의와 불교의 호국사상(護國思相)과 화랑도의 선사상(仙思相)을 바탕으로 출발하여서 군대무술과 자기 방어의 본능의 일환으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제천행사에 사용되기도 한 일들에 대하여 시인한다. 아울러 교만과 탐심의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 사실이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악을 선하다고 하는 곳에 서로 투기하고 서로 대적하는 곳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진리를 선포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창1:28)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마28:19-20)에 충성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받은 달란트와 은사대로 엘리사에게 주셨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특사로 직무를 다하자. 또한 태권도선교 역사의 영적인 의미는 이제 태권도선교는 거듭남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하여 찬양하는 몸의 악기로 변화하여 새로운 태권도선교의 역사가 도래한 것이다. 아울러 시편150편의 말씀처럼 나팔, 퉁소(관악기)와 비파, 수금(현악기)와 소고(타악기)를 총동원하여 찬양함은 매우 아름다운 일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모든 기쁨을 쏟아 내도록 신도(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시청각 이미지를 사용하여 찬양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여기에다가 마음과 성품(신6:4,30:2)을 다하고 모든 삶의 국면에서, 신령과 진정으로(요4:20-24) 생명을 다하여 찬양과 경배를 드림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으로 확신한다. 여기에 몸으로 드리는 찬양의 자세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히4:12)를 다하고 호흡을 다하여(시150:6) 신앙고백(마16:16,요20:28,갈2:20)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으로 확신함으로써 태권도선교가 시작되었다.
3. 태권도 外의 아시아 무술
(1) 한국
현재 국내에는 각종 무예 단체가 무려 1백개가 넘는다. 이들의 대부분이 민족무예, 전통무예를 표방하고 있는 데 거의가 비논리적이고 황당한 연원을 주장하고 있어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다. 아래에 열거한 무예들도 전통성 여부를 따져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비교적 민족의식으로 과거의 무술들을 재평가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비전된 전통무예로 알려져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는 종류였다. 무예의 역사성, 전통성을 확인하는데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문헌적 자료와 사실상의 전승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택견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를 입증할 자료는 물론 전승계보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예가 구전 심수로 전해졌고 더구나 탄압을 피해 산 속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에 입증이 불가능하다고만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두 번째 방법은 그 무예의 현재의 실기를 분석해 보는 것이다. 대체로 각 민족마다 행동양식에 독특한 리듬과 동선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의 고유한 가락과 춤사위 등의 특성과 무예의 동작을 비교해 보면 쉽게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해 볼 때 주로 은류로 전승했다는 무예들은 중국무술과 유사성이 많이 발견되고 시중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종류는 일본무술에 가까운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알려진 몇몇은 고전 춤사위와 택견 등의 동작을 모방하고 있어서 외견상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십팔기는 대한십팔기협회 김광석 회장이 무예도보통지를 실연한 것이라 한다. 한풀은 삼랑무 한풀연구소 김정빈씨가 1970년대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다. 수벽치기는 중앙문화센터에서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데 벽치기 전인이라는 육태안씨는 기천문 출신이다. 이외에도 공권도, 권법술, 기공무술, 무합도, 불무도, 봉술, 도봉술, 국술, 궁중무술, 한무도, 심도, 격검도, 정도술, 권격도, 태수도, 토착무술, 작대기도, 선배 도리체, 회전무술... 등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가지 수가 많다. 우리 무예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반도 이북을 포기하고 외교정책에 의지하여 국가를 보위하기 시작한 이래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주자학이 성풍하던 시기의 조선에는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되었다. 민간에 의해 민속경기놀이로 전승되던 무예는 일제시대에 와서 거의 절멸하고 말았다. 해방이후 이 땅에 봄비 맞은 풀처럼 무수히 자라난 수많은 무예들의 모습은 바로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작용의 표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민족은 전통이 가지는 지속적 특징에 의해 민족성이 일관되고 민족적 양식이 형성된다. 한민족의 흥융은 강한 역사적 전통의 근원적 힘에 의하지 않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무예 역시 그가 가지는 고유한 전통의 여부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2) 중국
중국무술은 엄청나게 많은 수치를 보였다. 그러므로 본 논제에는 대략적인 부분만을 다룬다. 첫째로 쿵푸(功夫)가 있다. 쿵푸는 정신 집중과 자기 수양에서 유래한 운동형태인 동시에 주로 비무장한 상태에서의 개인 격투방식이다. 한국의 태권도나 일본의 가라테와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다. 쿵푸라는 용어는 어떤 숙련된 솜씨를 완벽하게 발휘하기 위해 지성이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신중하게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쿵푸가 무술로 등장한 시기는 주대(周代: BC 1111-256/255)나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C5세기에는 도가(道家)들이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했다. 쿵푸의 규정자세와 동작은 인간의 골격과 근육구조에 대한 관찰 및 생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여러 근육이 조화를 이루는 협동운동을 채택하고 있다. 둘째로 태극권(太極拳)이다. 태극권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중국의 독특한 운동형태이자 공격, 방어 권법, 중국 권법이라고도 한다. 운동으로서의 태극권은 신체조절 훈련을 하는 동안 굳어진 근육과 긴장을 풀도록 고안되어 있으며, 태극의 원리, 특히 음(陰), 양(陽)의 조화를 응용했다. 음과 양은 각각 수동적, 소극적 성질과 능동적, 적극적 성질을 나타낸다. 태극권은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율동적이며 신중한 동작을 이용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절권도는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로 이소룡은 무술가겸 영화배우로 당산대형, 용쟁호투,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절권도는 이소룡이 홍콩에서 배운 영춘권과 세계의 각종 격투기의 에센스만을 추출하여 창시한 무예로 전통무예의 일정한 형식(기마 자세, 형(型)등)을 깨고 수련자 각자에 맞는 격투방법을 익힐 것을 강조한다.
(3) 일본
일본무술도 역시 수많은 무술을 다룰 수가 없음으로 대표적인 무술만을 다룬다. 그 중에는 가라데(오키나와)로서, '가라데' 는 우리의 한자 발음으로 공수도라고도 하는데, 일본의 오끼나와의 전통무예가 일본 본토로 건너가면서 발전하였다. 오끼나와 원주민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는 지배계층에게서 적수공권으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가라데는 일격필살의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고, 현재 세계적으로 수많은 수련자를 가지고 있다. 가라데의 세계보급에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분은 한국인인 '신의 손'으로 불리는 최영의님으로, 세계의 무예명인과의 대결에서 단1회의 패배도 없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라데는 일본 전통 무예로서 세계 속에 일본문화를 알리고 있다. 또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은 아이키도이다. 아이키도는 옛 유술의 풍취가 남아있는 현대 무도이다. 기술적으로도, 예를 들면 쇠퇴해져 버린 옛 유술의 기술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맨손으로 무기를 가진 상대를 쓰러트리는 기술을 매일같이 연습하여 익히는 것도 군대나 경찰들의 훈련을 빼면 아이키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투쟁을 부정하는 아이키도에서는 시합을 하지는 않는다. 공격자와 방어자를 나누어 약속 한 기술을 걸고 받는 '약속수련'이 있을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실전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해지는 '합기'(合氣)의 기술과 정신, 일본무도가 도달한 최고의 경지라고도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아이키도의 실체는 물리학과 역학 그리고 인체공학을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이며 또한 신비한 격투기이다. 마지막으로 유도이다. 유도의 유래에 대해 일본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들도 많지만 분명한 것은 유도가 오늘날과 같이 근대적으로 체계화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일본인 가노 지그로가 고래의 여러 유술들을 종합·집대성하여 오늘날의 유도를 정착시켰다. 이후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남자 경기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자 경기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오늘날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인기 있는 운동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 밖에 대동류합기유술, 스모, 체도, 일본권법, 인술 등이 있다.
(4) 그 밖에 9개국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태국의 무에타이(Muay Thai)는 태국의 전통 국기이며, 약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무에타이(Muay Thai)에 관해서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지만, 타이의 오래된 군사무술 지도서인 유타사트(Yuttasart)라는 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 오고 있다. 이 책에는 창과 칼, 전쟁용 도끼 등을 이용한 전투기술이 나와 있는데, 여기서 창은 사람의 팔, 도끼는 주먹, 칼은 팔꿈치가 되는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을 무기로 하는 새로운 기술이 전해졌다. 즉 맨손으로 싸움을 하는 새로운 형태, Muay Thai가 출현한 것이다. 전쟁을 위한 군인들의 무술이 새로운 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태국에는 카브리와 카라봉 등이 있다. 그 밖에 미얀마에는 반도 등이 있고, 인도네시아는 펜챠크 실랏 등이 있다. 또한 필리핀은 에스크리마, 쿤타우 등이 있고, 베트남은 보비남, 콴기도, 베트남 씨름, 쿵누 등이 있다. 또한 인도는 인도식 레슬링, 칼라리 파야트 등이 있으며, 러시아는 삼보 등이 있다. 끝으로 이란은 코슈티 등이 있고, 이스라엘은 크레브 마가 등이 아시아무술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셈이다.
4. 유럽무술
대표적으로 스위스무술이 있는데 슈빙겐이란 스위스식 레슬링을 일컫는 말이다. 슈빙페스트는 지난 수백년간 스위스의 여러 산골짜기에서 거행되었는데, 아마도 슈빙겐은 산의 농부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힘겨루기에서 발전된 듯 하다. 슈빙겐은 많은 움직임을 동반하며, 조르기 기술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역사에 따르면 약 1750년경 베른에서 추수감사절 기념 슈빙페스트가 시작되었으며, 각지의 레슬러들이 모여 챔피언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슈빙페스트는 1805년과 1808년 개최되었는데 당시에는 각국의 대표자와 왕, 여왕 그리고 여러 부류의 일반인들이 방문하였다고 하며 당시의 경기는 스위스 독립의 초석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1864년 슈빙겐 관련서적이 처음으로 출간된 후 체육인들에 의해 슈빙겐은 산지뿐 아니라 평지지역에도 보급되어 점차 국가적인 스포츠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1) 그리스와 아이슬란드
그리스무술로써 판크라치온은 고대 그리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격투기이다. 판크라치온의 역사는 B.C 6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 30회 올림피아드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고 하며 초대 우승자는 시라쿠사 사람인 Lygdamis였다고 한다.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은 판크라치온을 가리켜 "올림피아드에서 가장 가치있는 경기"라고 극찬하였다 한다. 또한 판크라치온은 당시 전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 단계의 하나로 여겨질만큼 그 위상이 높았다. 판크라치온이란 말은 그리스어 "판"과 "카라토스"의 복합어인데, 직역하자면 "with all strength"란 의미이다. 판크라치온계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의 일부와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티벳을 점령하였을때 알렉산더 대왕의 병사들에 의해 그 지역에 판크라치온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달마대사가 중국으로의 장엄한 여행을 떠나기 무려 800년 전의 일이다.
아이슬란드 무술로써는 그리메란 아이슬란드의 전통적인 레슬링으로 바이킹시대부터 아이슬랜드지방에서 인기있었던 격투기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의 씨름이나 일본의 스모와 같이 서로를 붙잡기 위해 일종의 벨트를 착용한다는 것이다. 그리메경기는 양자가 서로 상대의 주변을 돌면서 상대방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거나 상대방을 들어서 넘어뜨리는 형태이다. 그리메에는 기본적으로 8가지의 기본기가 있으나 이것의 조합으로 인해 수많은 기술이 존재한다. 그리메는 아이슬랜드의 국지적인 격투기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즉 바이킹시대에 아이슬랜드는 그리메를 사기를 높이는 좋은 것으로 판단한 반면 여타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국가들은 이를 이교도의 산물로 인식하여 도입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킹시대 그리메는 남녀의 구분없이 모두 수련하였던 격투기이며 아이슬랜드의 전설에 따르면 남녀간의 경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기는 며칠씩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를 맺지 못한 체 종결되었다고 한다.
(2) 그 밖에 5개국
프랑스에 사바트가 있는데 사바 트는 프랑스 군대에서 전해오는 무술로써 발기술이 상당히 화려하다. 원래 사바트는 18세기 프랑스 군대에서 군기를 어지럽힌 자에 대해 엉덩이를 걷어차는 처벌로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엔 그저 강하게만 차다가 점차 기술이 붙고 나중에는 프랑스인 특유의 심비성까지 가미되어 화려하고 예술적이기까지한 발차기 무술로 발달되었다. 그 밖에 스페인은 스페인유술, 지포타 등이 있고, 독일은 로펜 등이 있다. 또한 영국은 퓨링, 영국식 레슬링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이슬란드는 그리메 등이 있고 스코틀랜드는 그리노츠 등이 있다.
5.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무술
(1) 미국
미국은 여러 무술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한다. 카주켄보란 Karate, Judo, Kenpo, Boxing의 머릿글자에서 따온 복합어이다. 명칭과도 같이 공수도, 유도, 권법 그리고 중국식 복싱에 종합한 격투기이다. 카주켄보는 1949년에서 1952년사이 하와이의 팔라마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각기 다른 무술을 익힌 다섯명의 무술가가 모여 서로의 무술을 보완하는 식의 형태를 거쳐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무술을 만들게 된 것이 그 시초이다. 흔히들 카주켄보의 창시자는 권법과 에스크리마를 익힌 Siju Adriano D.Emperado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카주켄보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권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5명의 창시자는 Peter Choo(공수도), Franz Ordonez(유술), Joe Holke(유도), Adriano D.Emperado(권법 & 에스크리마), Clarence Chang(중국식 복싱)이다.
또 다른 무술은 루아이다. 정보는 상당히 미흡한 편이다. 루아는 하와이의 전통적인 격투기로써 유술과 흡사하며 관절기를 강조한다. 1800년대 하와이의 귀족들인 하와이의 귀족구성원 이외에는 루아를 수련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다(물론 불법적으로 수련은 계속되었다). 루아라는 하와이의 비밀스런 격투기가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라 한다.
마지막으로 정축술은 거의 모든 무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정축술의 원래 의미는 "발차기 기술의 본질"이란 의미이지만 거의 모든 타격을 포함하는 의미를 가진다. 정축술은 유술, 공수도, 쿵후 그리고 킥복싱의 기본기술에 권법(일본권법으로 추정), 절권도, 합기유술, 쿵후의 격투원리를 결합시킨 듯하다. 그러나 정축술의 수련방법은 어디까지나 정축술만의 독특한 성향이 있다. 정축술은 관절기, 메치기, 컨트롤, 격투원리, 제공권, 형 그리고 신체의 움직임 등을 기본으로 삼는데 각 요소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것들을 거리에서 즉 실전에서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2) 브라질과 아프리카 3개국
아메리카의 잘 알려진 카포에이라는 브라질무술이다. 카포에이라는 철권3에 나오는 andy의 무술이 바로 카포에라이다. 카포에라는 브라질만의 독특한 춤으로써 브라질의 카니발이나 축구 경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춤은 200여년전 포르투칼인들이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데려온 흑인들이 고향을 그리면서 추던 춤이다. 카포에라의 율동 속에는 브라질 원주민과 포루투칼의 백인문화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한이 서려 있다. 한때 도덕을 타락시키는 춤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카포에라는 브라질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또 브라질에는 그레이시와 유술 등이 있다.
아프리카 3개국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어서 간단히 소개한다. 기니에는 페울 등이 있으며, 수단은 누바 등이 있고, 세네갈은 디우라 등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태권도와 세계각국의 무술을 살펴보면서 태권도와 각 나라의 무술들은 거의 비숫하여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태권도는 역사성에는 월등하게 민족의 시작과 함께 하였고 한국과학대학교를 비롯한 경희대, 한체대, 용인대 등의 수 십계의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태권도학과(선교학)를 통하여 과학적인 연구와 양질의 우수한 인재들이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이를 통하여 태권도를 통한 세계화의 길목은 활짝 열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이 기독태권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통하여 힘차게 준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전도에 직무를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음 장을 통하여 본고를 더욱 확고히 세우자 한다.
Ⅲ. 기독교와 우상종교와의 구별
1. 종교의 본질
종교는 필연적으로 모든 진실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주의를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다. 급진적인 회의주의자요 초자연의 반대자인 철학자 흄(Hume)까지도 한때 이렇게 말하였다. "종교가 전혀 없는 사람을 찾아보아라. 만일 찾는다면, 분명히 그들은 어느 정도 짐승에서 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종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라틴어 relegere의 인출인 바, "돌아가다"(return to)의 뜻이다. 그러니까 종교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경건한 의식이다(사19:22). 종교는 인간이 만든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이고 계획이다(마4:10, 눅4:8). 그러므로 종교는 "마음(知)을 다하고 성품(情)을 다하고 힘(意)을 다하여"(신 6:5)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의식이다.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종교학자의 풀이에 의하면 종교(宗敎)의 「宗」은 갓머리 밑에 보일 시(示)인데, 갓머리는 지붕 곧 하늘을 뜻하고, 시(示)는 세 발이 달린 상 위에 제물(祭物)을 올려놓은 형상으로 「하늘에 제사를 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영어 religion는 그 의미를 보다 시원스럽게 밝혀준다.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했는데, 그것은 「돌아가다」, 곧 하나님을 등진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감」(사19:22)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종교의 기원과 자리
성경적 견해는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자기를 계시함에 있어서, 그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예배와 봉사를 결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계시에서까지도, 그것을 이해하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自己啓示) 종교적 관계를 수립하는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성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그것은 외부에서부터 인간에게 부가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처음에는 종교없이 존재하다가, 그 후에 인간존재에 부가된 무엇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받아들이고 평가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을 살펴보면, 역사적 기원에서 종교는 자연물을 숭배한다든지(Naturism), 영들을 숭배한다든지(Animism), 혹은 조상숭배(Ancestralism)에서 기원한다는 견해이다. 또한 심리적 기원은 어떤 가상적 절대의 힘을 향한 동경심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여기는 견해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적인 "인격적 신"이 될 수없다. 또 계시적 기원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of God)라는 명백한 근거에 그 기원을 둔다. 계시 종교는 하나님이 "알게 하고 섬기게 할 것을 가르쳐"줌으로서 시작되는 종교를 의미한다(요 14:26, 엡 1:17).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살아 있는 교통이다. 종교의 기원은 바로 「가라사대」, 곧 "말씀"의 계시에만 있다(창 1:3, 3:9). 그렇다면 종교의 자리는 어디 있는가?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곳은 우리의 신비인데 첫째로 지성(知性)에 둔다. 종교의 자리를 지성(intellect), 혹은 정신(geist)에 두는 견해이다. 헤겔(Hegel)의 주장이다. 둘째로는 감정(感情)에 둔다.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felling)이다라고 보는 견해인데, 이는 슐라이막허(Schleiemacher)의 주장이다. 물론 종교에 있어서 감정의 요소는 중요하다. 그러나 감정만 중요시하면 종교는 한낱 열광주의나 신비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셋째로, 의지(意志)에 둔다. 종교를 도덕적 행동으로 여기고 종교의 좌소를 의지(Will)에 두는 견해이이며, 이는 칸트(Kant)의 주장이다. 그러나 종교는 바르게 살자는 도덕 정도가 아니다. 물론 자연종교나 이성종교를 두고 하는 말이긴 하다. 넷째로는 마음(心情)에 둔다. 종교의 자리는 마음(heart)이다. 마음은 영혼의 중심 기관이다. 마음에서부터 지(知), 정(情), 의(意)가 나오기 때문이다(잠 4:23, 눅 10:27). 종교는 인간 두뇌 작용의 소산도 아니고 감정적 느낌만도 아니다. 그렇다고 도덕적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요일 5:20, 고전 2:13).
(2) 종교의 구원
종교는 둘이다. 하나는 "자신의 힘"(Do)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연종교(Natural Religion)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Done)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성취하신 구원으로만 가능하다. 거짓 종교의 형태(사1:11-17, 사58:4-5, 딤후3:5)를 보라. 계시 종교를 떠나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단 말인가?
2.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구별
불신자가 보기에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비슷한 종교의 하나로 보인다. 성경은 로마서 3:23에서 우리가 결코 충분히 행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루다(D-O)' 방법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과 조차도 화목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루어졌다(D-O-N-E)'의 종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결코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행하셨다. 그 분은 우리가 결코 살 수 없었던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가 잘못한 각각의 일에 대한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 그는 우리에게 값없이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 기독교인은 신은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피조물임을 믿는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실들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 해석한다. 하나님의 섭리 외에도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우주내에서 신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다. 하나님이 궁극적 실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믿음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이와 일치하는 점이 하나도 없다. 반대로 이것 중 하나라도 부인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신이 되셔서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셔서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고, 그가 세상 끝날에 재림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1) 기독교와 이슬람교
첫째로, 《신(神)》에 대해서 보면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대상인 신(神)은 하나의 신으로 통합되는 셋이다. 이 한 명의 신은 소위 삼위일체라 불린다. 그러나 신이 셋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최악의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각 신들은 모두 동등하며, 똑같이영원하고,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교리는 하나의 “신비"로써 설명된다. 무슬림들의 믿음대상으로《신(神)》은 오직 한 분이며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며 기초적인 단어이다. 그 분은 자식이나부모가 없으며, 어느것과도 동등하지 않으시다. 이슬람에서 신은 "알라”, "가장 자비로우신 분”, “가장 자애로우신 분”, “전지전능하신 분”등 99가지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둘째로는 《예수》에 대해서 살펴보면 기독교인들의 믿음 대상인 예수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신으로, 삼위 일체 첫 번째 신의 아들이자 동시에 모든면에서 "완전한”신이다. 무슬림의 믿음 대상으로 《예수》는 신의사도 중의 한 명으로 올바르고 매우 높이 평가된다. 무슬림이 이를 믿지 않는다면, 그를 무슬림이라 부를 수 없다. 셋째로, 《성신》에서 대해서 보면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대상인 성신(Holy Spirit)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신이며, 또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이다. 무슬림의 믿음으로 《성신(Holy Spirit)》은 이는 천사 가브리엘을 가리킨다. 천사 가브리엘은 매우 “신뢰할 수 있는" 천사로 평가된다. 넷째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서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정결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삼위일체의 둘째 신이자 모든 면에서 “완전한”전지전능한 신인 예수를 낳았다. 무슬림의 믿음 대상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정결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세상의 모든 여인들 중에서 선택되어 깨끗해졌으며, 신의 명으로 아버지없이 올바른 선지자 예수를 낳았다. 다섯째로, 《구원의 길》에서 살펴보면은 기독교인들의 믿음 대상인 구원의 길은 물려받은 아담의 죄에 대한 예수의 속죄를 믿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오직 신앙심만이 필요할 뿐이다. 선행이 필수적이지는 않다. 무슬림의 믿음 대상으로 《구원의 길》은 신을 믿고 그 분의 사도들을 믿고, 그 분의 명에 복종한다면, 그분은 사람들이 행하는 조그마한 선행을 몇 배로 늘려 주시며, 그들의 사악한 행동을 없애주신다. 심판의 날까지 그 분의 자비는 사람들의 선행이 사악한 행동을 압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천국과 기쁨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다. 천국은 상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곳으로 영원히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된다. 사후에 그 곳에서는 선행은 더 이상 필요없고 오직 보상만이 있을 뿐이다. 끝으로 수 많이 비교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그만 줄인다.
(2) 기독교와 천주교
로마 카톨릭이 타종교, 타종파, 타사상에 대해 열려진 교회를 지향한다는 미명하에 종교일치 운동을 벌이고 있음에도 기독교인들이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다. 로마 카톨릭은 1962년부터 1965년 12월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고,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계시헌장',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의 4개 헌장을 비롯해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등 9개 교령, '그리스도적 교육에 관한 선언' 등 3개 선언을 발표하여 현대세계의 전쟁과 평화, 부와 빈곤 등의 문제를 교회 자신의 문제로 함께 짊어지며, 또 타종교, 타종파, 사상에 대해 열려진 교회를 지향할 것을 공포하였다. 그 일환으로 저들이 벌이고 있는 것이 타 종교와의 연합운동인 종교일치운동이며, 타종파와의 연합운동인 기독교 연합운동인 것이다. 저들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데 여러 길이 있듯이, 구원의 길 역시 여러 가지다."(테레사 수녀)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외에도 구원의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타종교를 인정하고, 모든 종교는 각기 그 이름은 다르지만 절대자로서 추앙하는 신이 존재하고, 구원의 방법은 다르지만 각기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 있고, 또 각각 추구하는 영생의 세계가 있으므로 종교일치운동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타종교간에도 서로 대화를 통해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시므로,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기독교는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종교이다. 결코 많은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카톨릭은 타종교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저들과 화합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자신들이 기독교가 아닌 총체적인 이단임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3) 기독교와 힌두교
힌두교(영 Hinduism) 는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써 힌두교는 문자 그대로는 '인도의 종교'를 뜻하며, 인도에서 기원된 모든 종교, 즉 바라문교, 자이나교, 불교등을 포함하는 말이 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부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 자이나교를 배재한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힌두교에 대한 이해없이 인도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교에 기독교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날카로운 차이점이 존재한다. 힌두교는 창시자도 없고 계시도 없으므로 그 자체를 표현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힌두교는 부분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신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에서 표현하는 단어의 개념자체가 기독교와는 다르기 때문에 어느 때는 서로 대화를 가능케도 하지만 갑자기 대화를 종식시키게도 한다. 복음은 힌두교에게 있어 독특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지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힌두교적 의미의 세상의 일부분이 아니므로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은총의 길이기 때문이다.
(4) 불교와 기독교
우리에게 전통적인 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인데 자신의 완성보다 타인의 구원에 관심이 있다.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부처는 각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대승불교 추종자들은 부처를 구원의 신으로 격상하여 그가 인류를 위한 구세주로 생각토록 하였다. 중국, 티벳, 일본, 한국, 월남 등에서 성행하고 있다. 그래서 차이점을 살펴보겠다. 첫째로, 《길(道)의 문제》에서 부처는 하나의 길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자신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구원》에서 보면은 불교는 자기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노력(공로)로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셋째로, 《고통과 죄의 문제》에서 불교는 고통의 이유가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하지만 욕망을 초래하는 죄의 문제는 설명 못한다. 기독교는 고통의 근본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넷째로, 《명령 이행을 위한 약속》에서 불교는 약속은 없으며 자기 노력으로만 할 수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맡기면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믿는다. 다섯째로, 《하나님》에서 불교는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기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다. 여섯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견해를 보면 불교는 훌륭한 선생이며 부처보다 덜 중요한 인물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세주이시다. 일곱째로 《윤회사상》은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인간이 짐승이 될 수 있다. 기독교는 한번 죽으면 영생이나 영사이다. 여덟째는 《만물의 기원》에서 불교는 설명 못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아홉째는 《성경(불경)》불교는 부처 가르침을 불자들이 수정해 왔고, 앞으로도 수정 가능하다. 기독교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더블어 원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알아보겠다. 첫째로, 《구원관》에서 원불교는 본인의 노력이나 수양과 연구를 통해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선포한다. 둘째는 《내세관》에서 원불교는 인과응보에 의한 환생을 믿으나, 기독교는 환생이 없다.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가고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 셋째는《신(하나님)》에서 원불교는 범신론이며,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Ⅳ. 성령의 열매와 태권도정신의 관계
1. 성령의 9가지 열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세 분류를 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열매이다. 첫째로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주님의 새 계명이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은 바 되고(롬 5:5), 항상 그의 사랑이 강권하신다. 실로 사랑은 은혜의 여왕이다. 또 성도의 새로운 속박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둘째는 희락(잠7:8)이다. 인간의 희락이 말랐다(욜1:12). 그러므로 기쁨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도에 있어서 이 열매의 원인은 복음의 전파에 있다(빌 1:18).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기쁨"이라고 했다. 희락이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화평(롬 5:1)인데, 인생의 저마다 가슴은 전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가슴에다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화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살전 5:13, 막 9:50).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롬 1:20).
두 번째는 분류는 이웃에 대한 열매이다. 첫째는 오래 참음(골1:11)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사랑으로 오래 참을 수 있다. 희락은 승리의 사랑이고, 화평은 평안의 사랑이며, 오래 참음은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랑이다. 정말 사랑은 오래 참음이 열매이다(고전 13:4).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든다(약 1:2-3). 인내로 영혼을 얻으라(눅 21:19). 둘째는 자비(빌2:1)이다.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다(신 4:31).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속에 자비의 열매를 원하신다. 자비는 이웃에 대한 부드럽고 인자한 행동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경은 자비를 "선"으로도 번역했다(롬 3:12). 셋째는 양선(엡 5:9)이다. 바울은 양선의 열매를 그냥 "선"(롬 15:4)이라고 했다. 사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선한 곳에서만 맺는다. 양선은 자비에 배해서 능동적인 선이다. 또 양선은 형제에 대한 사랑이요,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성도의 참된 선이다. 또 양선은 형제에 대한 사랑이요,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성도의 참된 선이다. 은밀한 그것은 보답을 받는다(마 6:3-4). 넷째는 충성(딛2:10)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고전 12:3). 그래서 충성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롬 12:3, 고전 12:9)이라고 했다. 믿는 자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마 25:21).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세 번째는 자신에 대한 열매이다. 첫째는 온유(마 11:29)이다. 온유는 회개와 겸손에서 오는 부드러운 심정이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칼빈은 〈못된 인간성의 개조는 창조보다 곤란하다〉고 했다. 항상 온유한 자가 복이 될 것이다(마 5:5). 둘째는 절제(벧전 1:5-7)이고, 절제는 글자 그대로 "자제"를 뜻한다. 그래서 이는 육체의 열매 가운데 "술 취함과 방탕"(갈 5:21)에 관련된 열매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딛 3:14) 항상 힘써야 할 것이다.
2. 태권도 정신
태권도는 우리 겨레의 문화적 유산이며, 우리나라의 고유한 무도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정신적 유산인 동시에 직접, 간접적인 맥을 형성해 오면서 우리의 외형문화만이 아닌 내면적이 정신문화에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태권도 정신(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을 살펴보겠다. 태권도정신은 군대처럼 군기가 강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배워왔다. 그렇게 배운 것을 추억하면서 첫째로《예 의》를 살펴보겠다. 수련생은 다음을 지키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서로 양보하는 정신을 기르고, ㉡남을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악습을 부끄러워 하고, ㉢상호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겸손한다. ㉣정의감을 길러야 한다. ㉤사범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의 관계를 명확히 한다. 이어서 둘째는《염 치》이다. 염치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만약 그릇된 일을 하였을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실력이 안됨에도 선량한 수련생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면 안된다. 가르침은 사범만이 할 수 있다. ㉡시범시 위력 과시를 위해 송판을 풀로 붙인다던가 벽돌에 금을 새기는 등의 눈가림을 하지 않고 관중이나 후배에게 뻔뻔스럽게 대하지 않는다. ㉢도장을 필요이상 사치스럽게 하거나 사무실을 장식하고 지나친 거짓친절을 베풀어 수련생의 환심을 사 자신의 무능을 가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무도인은 단,급을 올려주면 부끄러워한다. 실력 이상의 단, 급을 요구하거나 돈으로 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한다. ㉤진정한 제자를 기르기 위함이 아닌 영리를 목적으로 도장을 운영하지 않는다. ㉥개인 영리를 위해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
셋째는 《인 내》이다. 참는 것은 덕이요 백번 참으면 그 가정이 평화스럽다는 옛말처럼 참는 자에게는 행복과 번영이 온다. 무도에는 고단자와 완벽한 기술의 소지자가 있다. 어느쪽이건 어떤일을 달성하자면 먼저 목표를 설정한 다음 인내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매진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권도도 하나의 개인운동이고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성공한 자만이 최우수 선수가 되는 영광을 안을 수 있는 동시에 육체적인 기술과 정신적인 인격이 조화롭게 발달된 육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극 기》이다. 극기는 도장 내외를 막론하고 자신을 억제함은 실로 중요하다. 대련시 실수로 인하여 하급자나 동료로부터 맞았을때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면 곧 사고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검소하고 절제 있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지 못해 남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허영심에 사로잡힌다면 무도인으로써의 위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승인자유력 자승자강이라 하며 "남을 이기는 자는 그 자보다 다소 힘이 있는 자일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진정한 강자요 승자다.
다섯째는 《백절불굴》이다. 올바른 태권도인이라면 평소에 겸손하고 정직해야하며 정의감에 입각하여 생활한다. 상대가 누구이건 또한 그 숫자가 얼마이건 추호의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이 과감히 불굴의 정신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태권도의 정신이란 고도의 육체적인 기술과 고차원적인 마음의 수련을 닦은 차원 높은 정신적 영역까지를 포함한 것을 말한다. 고도의 육체적인 기술과 정신을 소유하려면 극기와 인내와 백련천마의 고통이 뒤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정신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자세를 일상적 생활에서 항상 생활화해야 한다.
3. 성령이 충만한 자들의 상태
성경에서 증거 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구약에서의 《브사렐》이다.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자였고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만들게 된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이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눅1:15-16).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백성을 예비한다(눅1:17). 하나님에 의해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선택된 사자이고, 회개를 촉구한 설교자로서 두려움 없이 권세자의 행악(헤롯 안디바)을 지적했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또 《엘리사벳》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다(눅1:6). 성령이 충만(눅1:41)한 삶을 살았으며, 다른 사람의 축복을 즐거워(눅1:42)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눅1:45). ≪사가랴≫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행한 의인으로 알려졌고(눅1:6), 예언자이며 제사장,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여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묵묵히 힘쓰고 있는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또한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였다.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증거하여 병자를 낫게 하고 모인 곳이 진동되어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행4:8,10,22,31). 또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주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할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담대해졌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5)이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지도자(행6:8), 성경에 해박하고 지혜가 풍부한 설교자(행7:1-50), 사랑과 용기가 넘치는 사람(행7:51-56), 최초의 집사이며 순교자,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자, 작은 일에 충성한 자이다.《바나바》는 착한 사람(행11:24),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행 11:24)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 격려자 또는 위로자이며, 바울의 첫 동료이고 12사도 외에 사도로 불렸던 사람(행14:1-14), 초대교회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해석자, 이론적 저술가이며 실제적인 전도자, 항상 친구를 구하고 그들과 동역함, 강직하고 준엄한 성격을 가진 자,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강한 자신감(고전15:10;고후12:11)과 동시에 겸손함을 가졌으며, 바울은 두려움으로 전도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연단시키고 있었다(고전9:27). 바울은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실제적인 실천가였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 충만의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권능으로 나타났다. 성령을 떠난 베드로는 비겁했다(마26:69-75).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받고서 놀라운 기사를 행할 수 있었다(행3:6). 둘째는 사랑이 나타났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으로 호흡하면서 살았고, 때문에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행2:42). 이렇게 상부상조한 사랑은 역시 성령의 선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롬15:30). 셋째는 전도로 나타났다. 그들의 심령은 뜨거웠다. 마치 불타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가만히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날마다 "예수의 부활"(행 2:32)을 증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받고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주님으로 주님되게 하는 도전이 다음장에서 일어난다.
Ⅳ. 성령의 열매와 태권도정신의 관계
1. 성령의 9가지 열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세 분류를 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열매이다. 첫째로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주님의 새 계명이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은 바 되고(롬 5:5), 항상 그의 사랑이 강권하신다. 실로 사랑은 은혜의 여왕이다. 또 성도의 새로운 속박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둘째는 희락(잠7:8)이다. 인간의 희락이 말랐다(욜1:12). 그러므로 기쁨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도에 있어서 이 열매의 원인은 복음의 전파에 있다(빌 1:18).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기쁨"이라고 했다. 희락이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화평(롬 5:1)인데, 인생의 저마다 가슴은 전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가슴에다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화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살전 5:13, 막 9:50).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롬 1:20).
두 번째는 분류는 이웃에 대한 열매이다. 첫째는 오래 참음(골1:11)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사랑으로 오래 참을 수 있다. 희락은 승리의 사랑이고, 화평은 평안의 사랑이며, 오래 참음은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랑이다. 정말 사랑은 오래 참음이 열매이다(고전 13:4).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든다(약 1:2-3). 인내로 영혼을 얻으라(눅 21:19). 둘째는 자비(빌2:1)이다.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다(신 4:31).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속에 자비의 열매를 원하신다. 자비는 이웃에 대한 부드럽고 인자한 행동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경은 자비를 "선"으로도 번역했다(롬 3:12). 셋째는 양선(엡 5:9)이다. 바울은 양선의 열매를 그냥 "선"(롬 15:4)이라고 했다. 사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선한 곳에서만 맺는다. 양선은 자비에 배해서 능동적인 선이다. 또 양선은 형제에 대한 사랑이요,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성도의 참된 선이다. 또 양선은 형제에 대한 사랑이요,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성도의 참된 선이다. 은밀한 그것은 보답을 받는다(마 6:3-4). 넷째는 충성(딛2:10)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고전 12:3). 그래서 충성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롬 12:3, 고전 12:9)이라고 했다. 믿는 자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마 25:21).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세 번째는 자신에 대한 열매이다. 첫째는 온유(마 11:29)이다. 온유는 회개와 겸손에서 오는 부드러운 심정이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칼빈은 〈못된 인간성의 개조는 창조보다 곤란하다〉고 했다. 항상 온유한 자가 복이 될 것이다(마 5:5). 둘째는 절제(벧전 1:5-7)이고, 절제는 글자 그대로 "자제"를 뜻한다. 그래서 이는 육체의 열매 가운데 "술 취함과 방탕"(갈 5:21)에 관련된 열매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딛 3:14) 항상 힘써야 할 것이다.
2. 태권도 정신
태권도는 우리 겨레의 문화적 유산이며, 우리나라의 고유한 무도이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정신적 유산인 동시에 직접, 간접적인 맥을 형성해 오면서 우리의 외형문화만이 아닌 내면적이 정신문화에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태권도 정신(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을 살펴보겠다. 태권도정신은 군대처럼 군기가 강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배워왔다. 그렇게 배운 것을 추억하면서 첫째로《예 의》를 살펴보겠다. 수련생은 다음을 지키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서로 양보하는 정신을 기르고, ㉡남을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악습을 부끄러워 하고, ㉢상호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겸손한다. ㉣정의감을 길러야 한다. ㉤사범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의 관계를 명확히 한다. 이어서 둘째는《염 치》이다. 염치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만약 그릇된 일을 하였을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실력이 안됨에도 선량한 수련생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면 안된다. 가르침은 사범만이 할 수 있다. ㉡시범시 위력 과시를 위해 송판을 풀로 붙인다던가 벽돌에 금을 새기는 등의 눈가림을 하지 않고 관중이나 후배에게 뻔뻔스럽게 대하지 않는다. ㉢도장을 필요이상 사치스럽게 하거나 사무실을 장식하고 지나친 거짓친절을 베풀어 수련생의 환심을 사 자신의 무능을 가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무도인은 단,급을 올려주면 부끄러워한다. 실력 이상의 단, 급을 요구하거나 돈으로 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한다. ㉤진정한 제자를 기르기 위함이 아닌 영리를 목적으로 도장을 운영하지 않는다. ㉥개인 영리를 위해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
셋째는 《인 내》이다. 참는 것은 덕이요 백번 참으면 그 가정이 평화스럽다는 옛말처럼 참는 자에게는 행복과 번영이 온다. 무도에는 고단자와 완벽한 기술의 소지자가 있다. 어느쪽이건 어떤일을 달성하자면 먼저 목표를 설정한 다음 인내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매진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권도도 하나의 개인운동이고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성공한 자만이 최우수 선수가 되는 영광을 안을 수 있는 동시에 육체적인 기술과 정신적인 인격이 조화롭게 발달된 육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극 기》이다. 극기는 도장 내외를 막론하고 자신을 억제함은 실로 중요하다. 대련시 실수로 인하여 하급자나 동료로부터 맞았을때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면 곧 사고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검소하고 절제 있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지 못해 남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허영심에 사로잡힌다면 무도인으로써의 위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승인자유력 자승자강이라 하며 "남을 이기는 자는 그 자보다 다소 힘이 있는 자일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진정한 강자요 승자다.
다섯째는 《백절불굴》이다. 올바른 태권도인이라면 평소에 겸손하고 정직해야하며 정의감에 입각하여 생활한다. 상대가 누구이건 또한 그 숫자가 얼마이건 추호의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이 과감히 불굴의 정신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태권도의 정신이란 고도의 육체적인 기술과 고차원적인 마음의 수련을 닦은 차원 높은 정신적 영역까지를 포함한 것을 말한다. 고도의 육체적인 기술과 정신을 소유하려면 극기와 인내와 백련천마의 고통이 뒤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정신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자세를 일상적 생활에서 항상 생활화해야 한다.
3. 성령이 충만한 자들의 상태
성경에서 증거 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구약에서의 《브사렐》이다.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자였고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만들게 된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이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눅1:15-16).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백성을 예비한다(눅1:17). 하나님에 의해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선택된 사자이고, 회개를 촉구한 설교자로서 두려움 없이 권세자의 행악(헤롯 안디바)을 지적했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또 《엘리사벳》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다(눅1:6). 성령이 충만(눅1:41)한 삶을 살았으며, 다른 사람의 축복을 즐거워(눅1:42)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눅1:45). ≪사가랴≫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행한 의인으로 알려졌고(눅1:6), 예언자이며 제사장,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여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묵묵히 힘쓰고 있는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또한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였다.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증거하여 병자를 낫게 하고 모인 곳이 진동되어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행4:8,10,22,31). 또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주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할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담대해졌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5)이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지도자(행6:8), 성경에 해박하고 지혜가 풍부한 설교자(행7:1-50), 사랑과 용기가 넘치는 사람(행7:51-56), 최초의 집사이며 순교자,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자, 작은 일에 충성한 자이다.《바나바》는 착한 사람(행11:24),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행 11:24)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 격려자 또는 위로자이며, 바울의 첫 동료이고 12사도 외에 사도로 불렸던 사람(행14:1-14), 초대교회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해석자, 이론적 저술가이며 실제적인 전도자, 항상 친구를 구하고 그들과 동역함, 강직하고 준엄한 성격을 가진 자,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강한 자신감(고전15:10;고후12:11)과 동시에 겸손함을 가졌으며, 바울은 두려움으로 전도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연단시키고 있었다(고전9:27). 바울은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실제적인 실천가였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 충만의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첫째는 권능으로 나타났다. 성령을 떠난 베드로는 비겁했다(마26:69-75).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받고서 놀라운 기사를 행할 수 있었다(행3:6). 둘째는 사랑이 나타났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으로 호흡하면서 살았고, 때문에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행2:42). 이렇게 상부상조한 사랑은 역시 성령의 선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롬15:30). 셋째는 전도로 나타났다. 그들의 심령은 뜨거웠다. 마치 불타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가만히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날마다 "예수의 부활"(행 2:32)을 증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받고 말씀이 말씀되게 하고 주님으로 주님되게 하는 도전이 다음장에서 일어난다.
Ⅴ. 성령사역과 태권도선교이해
성령의 특별사역이란 구속의 영역에서도 신생을 일으키고 이를 열매 맺게 하며, 발전하도록 인도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도달하게 한다. 성령에 의한 변화를 보면 하나님의 영은 새롭게 하시는 과정에도 참여하신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했다(신44;3, 겔36:26-27). 더욱이 그는 회복 주이시다. 그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축복하고 샬롬의 상태로 새롭게 하신다(사 32:15-20)
1. 태권도문화를 태권도선교문화로 전환
문화는 늘 진보하고 변화된다는 사당동 총신대 서철원교수의 말을 인용해서 필자에 논제 목적에 따라 문화를 표현하고자 한다. 문화란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바를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일단(一團)의 사람에 의하여 공유된 사상, 감정, 가치 그리고 행동에 연관된 유형과 산물의 통합된 다소(多少)의 체계"로 정의한다. 어떤 자아(自我)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신앙고백으로 오직 예수님을 향한 노래로 나아갈 때에 이전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로운 피조물로 당당히 새롭게 태권도가 무술에서 선교로 갱신되는 것이다.
(1) 태권도선교는 종합예술이다.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부르심을 받는 자들은 먹던지 마시던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되는 것이 믿는 자들아 본분이다. 그러므로 기독태권도인은 태권도가치를 앎으로 마땅히 헌신해야 되는 것이다.
태권도의 가치는 전신(全身)운동으로써 인체(人體)의 모든 기관에 에너지를 발생(發生)케 하고 신체를 강하게 해 주며 정신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수련케 한다. 또한 정동뇌를 자주 발달시켜 돋구어 주는 체계적인 운동으로서 기능의 보유와 균형을 보존하는데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종합 신체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태권도선교는 찬양, 드라마, 전도메시지 선포, 태권무용, 태권창작품세, 태권도 등을 하기 때문에 종합예술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큰 일」에서 '예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했다. 그분이 그의 영을 통해서 예술가들의 모든 행사에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무장하게 하시는 것이다(출31:3; 35:31). 예술은 능력, 곧 인간의 영적 능력의 증거요, 그의 깊은 소원과 높은 이상, 물릴 줄 모르는 조화의 열망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또한 예술은 다르고 높은 실재를 우리의 눈에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 평안을 가져다 주고 우리의 영혼에 경악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마음을 소망과 기쁨으로 충만케 하고 있다.
종교는 "문화적 부수 현상이 아니라 인간 문화에 궁극적인 통합을 부여하는 심오한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힘이다"라고 브로니슬로 말리노스키(Bronislaw Malinowsky)가 바르게 지적했다. 그것은 문화의 모든 면이 종교적 원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음악과 무용, 과학과 의학 농학과 건축학이 종교적 근원을 가지며 근본적으로 종교적 성격을 가진다.
(2) 동작원리와 미적표현방법
무용수는 움직이면서 특정한 운동 감각적 감각을 경험하는데, 이런 것이 무용의 미적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의미의 전달은 관객의 감정이입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것은 공연자의 움직임을 봄으로써 유발되는 것이다. 관객 자신들의 신체도 무용수와 비슷한 운동감각적 감각을 경험하게 되면서 무용수가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무의식으로 훈련된 성향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동작원리에 대해서 알아보면은 첫째로는 반대의 원리는 인간의 동작은 원칙적으로 팔과 다리를 반대로 움직인다는 원리(the principle of opposition)이다. 단 태권도선교에서 있어서 미적표현은 이 동작의 원리를 무시할 수가 있다. 미적표현은 복음송에 입각한 동작이 표현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일반적인 율동을 할때에 대두는 내용이다. 연속적 완결성의 원리는 지르거나 차기를 하는 동작에는 그 동작이 시작되면서부터 끝날때까지 같은 방향으로 신체적 동작을 계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원리(the principle of follow-through)이다. 예를 들어 앞차기를 했을 때 중간에서 끊지 말고 끝까지 차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목표초점의 원리는 공격, 방어, 반격의 동작에서 목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원리(the principle of objective focus)이다.
넷째는, 전체집결의 원리가 모든 신체활동을 할 때 신체의 한 부분만 사용하지 말고 전신(全身)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원리(the principle of total assembly)이다.
다섯째는, 질적 조정의 원리는 적당한 시기에 힘과 속도를 잘 조정해서 동작하면 신체의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표출할 수 있다는 원리(the principle of qualitative adjustment)이다.
여섯째는, 동작응용의 원리는 지식, 기본기술, 동작, 대인적 기능, 정신력 등 모든 것을 유효적절하게 미적표현에 응용해야만 된다. 그러므로 계속적인 훈련으로 응용된 기술이나 전법, 지식등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하고 넘어갈 부분은 동작의 요소들이 연속적으로 잘 정돈 될 때 리듬을 구성한다. 사람은 공간리듬, 시간리듬, 그리고 무게 리듬을 분별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관객을 집중하고 표현자를 긴장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용이하다. 그렇지만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추웠던 다윗처럼 신전의식에서 표현자가 사람이 성령에 붙잡힌 바 되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다면 그 영적상황에 분위기야말로 향기로울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기쁘고 자신에 넘치며 당당해야 한다. 또한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솔직해야 한다.
2. 태권도선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에게 성령이 뜨겁게 임하므로 그는 견딜수 없는 구령의 열정을 갖고 구두를 던져버리고 세계의 전도자가 되어 세계의 수 많은 청년들을 일으켰다. 17살의 소년 견습생인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는 결정적인 영적 경험을 통하여 삶의 획이 그를 중국내지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였다. 테일러의 헌신은 참으로 믿음에서 출발했고 성령의 사역을 전적으로 신뢰했다고 보겠다.
우리 하나님의 영의 미래적 강림과 쏟아부으심으로 인간 역사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스케줄은 참으로 각 시대마다 합당한 종을 부르시어 그의 일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자신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으로 드려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광신대학교 태권선교연구회의 사역을 통하여 논제에 접근하기를 원한다.
(1) 집회(공연)전에 인도자로서의 성령사역
집회전에 우리는 철저하게 전신갑주로 무장한다. 우리의 영성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좋은 기능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철저히 준비시키시는 것만은 사실이다. 모세는 40년 쓰임받기 위해 80년을 준비했으며, 예수님은 3년을 위하여 30년을 준비하셨다고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세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이다. 각각 사역자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를 경험케 되도록 성령께 내어 드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 하는 일도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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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안무와 표현연출, 그리고 현장에로의 관객상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를 원한다.
첫 번째로 태권도는 206개의 뼈와 신체의 조직들을 총동원한 동작을 이루는 전신운동이다. 그러므로 안무에 있어서는 안무법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감각이나 지성을 통하여, 혹은 심장이나 소화관을 통하여, 손가락으로 혹은 눈으로 혹은 등뼈로 혹은 다리로 그렇게 이 세상에 등장했다."<주:머레이 루이스 『무용의 내면』, 1980년, 뉴욕 세인트 마틴 출판사 발행, 123쪽을 재인용> 동작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성경이 요구하는 오직 여호와앞에서 드리는 경배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표현연출 역시 주제, 의도, 동기, 혹은 동작의 프레이즈 중 어느 것이 먼저 와야만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러나 찬양율동 학습을 위한 3원칙이 있는데, 곧 가사(올바로 선택된 곡)와 동작(성경적인 표현)과 마음(하나님께 드려진 심령)이 서로 정삼각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중에서 한 부분이라도 불충분하면 생명력은 상실된다. 생명력있는 표현 연출되어지지 않을 때에 온전히 성령님께 위탁되지 않은 상태로 볼 수가 있다.
세 번째로 관객의 상태는 "너 거기 있었는가"찬송가 136장처럼 2000년전에 골고다언덕에서 나의 죄와 허물 때문에 죽어져간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 피흘리심의 현장에 있었는가이다. 오감만족이란 단어가 있는데 필자는 육감만족을 주장한다. 우리의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에 오감뿐만 아니라 영감이 넘치어 유감으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힘뻑 젖어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2) 구도자 초청과 태권도 교육으로서의 성령사역
성령은 지금도 우리 심령 속에서 간구하신다(롬8:27). 또 가르치시고(요 14:26), 인도하시고(요16:13), 도우시고(롬8:26), 강건하게 하시며(엡3:1), 권능도 주시고(행1:8), 좋은 품성의 열매(갈 5:22-23)를 맺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속에 사역하심을(17절) 항상 감사하고 기억하여 패배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로 서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으로 집회를 준비하여 거리외침 전도와 노방전도, 가정방문전도를 병행 실시하여 초청해 온다. 97년에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구도자초청전략은 첫 번째로 작전은 현장에서 투입될때에 ①영적 땅밝기와 중보기도를 한다. ②거리전도 및 외침전도를 실시한다.
두 번째의 작전은 초청대상은 카-드로 노름을 하는 청년들, 집에서 잠자는 어른, 가사일을 보는 아줌마, 그리고 학교같다가 온 아이들까지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는 강권적으로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하였다. 특별히 모슬렘자치주임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각오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데 성령의 이끄심대로 순종하며 나아갔다. 우리가 그들을 초청하여 구주를 영접할때에 은혜와 도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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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된 구도자들에게 향한 두 번째 선교전략은 사역실제를 통하여 소개한다. 첫 번째로 ①먼저 기도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하고 진지하게 시작하고, ②현지사역자들과 우리 찬양팀이 어울려져 현지 복음송 중심으로 찬양인도를 하고 나면 어느 덧 시선들이 모아진다. ③초청할때에 태권도시범이 있다고 소개했음으로 태권도교육(격파장면은 본 장p.46에서 소개) 및 시범에 들어간다. 우리는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웃음을 줌으로 하나가 되어져가는 사역을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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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구도자를 향한 세 번째 선교전략은 인형극을 보여준다. 인형극은 동남아지역에서 무척이나 호응도가 높았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작은 인형에 정신을 잃고 관람함으로 준비를 철저하게 해 간다면 복음을 듣게하는 좋은 도구이다. 이것을 마친 다음에 비로소 드라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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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태권도 격파시 사역하는 멘트를 소개한다.
사도행전3장에 성전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내게 금과 은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빌2장9절 이하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증거합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할때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선교 역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때에 변화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신앙고백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의 어두움의 잠에서 못 일어나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자기 자신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그것이다.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탐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하여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켜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승리하신 주님 앞에 거듭나게 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역시 이미 승리를 선포하고 이 송판에 쓰여진 죄악의 습관들, 고정 관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격파할때에 함께 격파함으로 다시는 미혹하는 영, 참소하는 영, 우리를 꾀이는 영에게 굴복하지 말고 멋진 그리스찬으로 선한 군사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3) 구원메세지에 조명자로 역사하신 성령사역
우리는 너무나 조심스럽게 예수그리스도에 수난을 작은 드라마에 담아 2000년전에 사건을 재현할려고 아니 성경을 드라마로 보여주는 사역이라고 믿고 사역을 감당 해왔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때 단독적으로 처리하시기도 하지만 인간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말씀의 의해서 성령을 쫏아 행하는 사역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하는 일도 성령의 사역이다. 예수께서 친히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라고 하셨다. 사도 요한은 보혜사 성령이 장차 의에 대하여 말씀하시리라고 했다. 의는 곧 예수님이다.
성도는 예수의 증인이다(행5:32). 이유는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이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정말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려고 오신 보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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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계신 곳에 의가 있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 의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온 미적 표현 설교를 한다. 그래서 미적 표현 방법으로 콘티를 소개한다.
제1장,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1. 주기도문송 입장 : 이미 입장된 상태이다.
-. 깃발무 1인=무용 혹은 십진품세 (나머지는 기도자세 대형)
-. 전주곡 할 때에는 전부 엎드리어 있다.
-. 본곡에 들어 갈때에 깃발 표현자가 서서히 시작한다
-. 나머지 인원은 자리에 따라서 시작한다.
* 본곡에서 거룩하고 장엄한 음악적 효과를 누리며 주기도문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한다.
상황설명 *가사가 바로 끝나면서 나레이션에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라 하는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 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시험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라고 하신 후에 그곳으로부터 조금 더 나아가셔서 얼굴을 떨어뜨리시고 기도하셨습니다
#2. 찬송가 384장
-. 십진품세,창작품세
-.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교차하듯이 표현.
-. 등장인물은 세명은 한쪽에서 졸고 기도하다가 끝내 눕는다. -.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울 때에 울며 몸부림치며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요17:1-5),제자들을 위한 기도(요17:6-19),온 교회를 위한 기도(요17:20-26).
#3. 겟세마네의 기도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다>
#4.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 오실때에 로마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가려고 체포하려 출동하였습니다.) 무대뒤에서 빠르게 나오면서 고양이낙법을 실시하면서 군병대형으로 집합한다. 병정 대형은 마른모꼴로 위치하고 15도 각도로 서며 고개는 숙인다. 찬양 가사 시작과 동시에 실시하는데 마임적인 표현을 묘사한다.
제2장,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5. 예수님체포.
-. 예수와 제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려 회중안으로 들어간다.
-. 조명은 특별히 신경써야 될 scene이다.
-. ㉠ 병정①"네가-예수냐?(회중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끌어내면서 잡고 흔들며) 야! 이녀석아
- 나레이션: 목요일밤 체포당하신 예수님은 성난 군중에 이끌려 재판을 받으러 대제사장 가야바 빌라도, 헤롯에게로 끌려 다니시며 갖은 고초를 겪으셨습니다.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사형시킬 죄목을 찾았지만 사형에 마땅한 죄를 지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성난 군중심리로 폭동을 두려워하는 빌라도로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채찍을 맞으시고 갖은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잡고 손가락질을 하며)
-.네가 메시야라고 하하하 웃기지 마라(밀친다)
-.㉡ 병정②++(히쭉히쭉 웃으며)너 꼴 좋구나 자신도 구원치 못한 주제에 메시아라고?(따귀를 대리며 침을 뱉고 발로 밀어차고 돌아선다)→백부장(멀찍이 덜어져 지휘봉을 만지작 만지
작한다.아주 거만스럽게 실시한다)
-.㉢ 병정③++(채찍을 치며) 이 자식아! 거짓말도 되는 말을 해야지 (홍포를 벗기고 채찍으로 때리고 가시 면류관을 씌워주며"왕이여 절 받으소서" 하며 조롱한다) → 예수: 표현자는 천천히 -당하셨도다 - 까지 자기표현. (돌려서 회중을 보고 앉힌다. 병정들은 예수 중심으로 좌우에 선다.
-. ㉣ 병정④++(넘어질때에 일으키며)야! 이정도로 넘어지냐?
제3장, 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6. 베드로와 군중(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군중①회중 앞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베드로를 가리키며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베드로는 주춤거리다가 앞으로 뛰처 나가면서)이∼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저∼어 사람을 몰라(딱 잡아뗀다)
-.군중①이 잠시 침묵하다가, 너도 한패지? (베드로 놀라면서) 이∼ 양반아! 난 아니란 말이야! 난 저- 저런 자식을 본적도, 만난적도 없단 말이야 (뒷걸음치며 다른 사람 옆으로 선다)
-.군중②는 다른 앞줄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생각난다는 것처럼 빠르게 앞으로 나와서 회중을 보면서) 저 사람은 분명 갈릴리 사람이야 분명히 그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았어! (베드로가 굉장히 화난 표정으로) 이 사람아! 난 당신이 하는 말을 도무지 모르겠어! 저런 저주받은 자를 내가 알아서 무엇 한단 말이야 (자기 옷을 벗어서 예수님을 치고 물러선다) (닭 울음소리가 3번 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마주 보다가 베드로만 남고 예수님은 로마군병이 빌라도법정으로 끌려 간다)
#7. 이 악한 죄인
-.베드로 (닭 울음소리가 끝날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통곡하고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데 찬양이 이 악한 죄인 끝날때까지 몸부림치며 여기 저기 정신 없이 다니면서 한다) 오! 주여!!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하다니요, 저와 함께 삼년동안이나 진리와 생명을 가르쳐주신 내 주를 모른다고 하다니. 아∼ 아 더러운 인생아! 위급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에 그렇게 한심하게도 주님을 모르는 척하게 할 줄은 정말 저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주여! 저에게 더러운 발바닥까지 씻어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저주받은 자라 한 저-를 용서하옵소서……<흐흐흑 울고 들어간다...>
제4장,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상황설명《모욕당하시는 예수님산헤드린에 의한 공식적인 유죄판결심문 당하신 예수님고난의 길,순종의 길》
금요일 이른 아침에
#8. 십자가의 길
-.뒤에서 십자가를 메고 군병이 채찍으로 때리면서 들어온다.
-.㉠ 병정① **(조롱하며)이 자식아 똑바로 가!(채찍으로 두세번치며)길을 비켜라(크게 외침)
-.㉡ 병정②++(더 크게 히쭉히쭉 웃으며)너희를 구원할 메시야가 행차하신다(발차기두번)→백부장:+++ 자! 빨리 빨리 가자!
-.㉢ 병정③(군중을 향하여)너희의 구원자,
-.㉣ 병정④(멱살을 잡고) 해방자가 지나가신다(몸동작을 크게)→ (예수는 쓰러지고 병정들 예수에게 손을 가르치며 멈춰선다)백성들과 함께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뒤따라 올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무대에 올라가서)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무대에서 넘어지고 일어나며..무대에 오른다)=예수표현,=채찍질 3회,=예수표현 마무리++회중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못박아라!" 외친다.
제5장,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8. 골고다언덕
※어느 금요일 오전 9시 예루살렘 교외 (로마병정들이 예수를 눕혀놓고 못을 박는다. 쇠판에다가 쇠망치로 강하게 박는다. 준비한 잉크를 손과 발에 바른다) -못을 박고 있을 때에-
나레이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바로 이어)
#9. 그가 찔림은
(못을 다 박은 후 천천히 십자가를 세울 때에 음악이 줄어든다)
상황설명,십자가상의 가상칠언,십자가에 달리심《처음 3시간, 그 후 3시간》
#10. 하나님 어린양
-.㉠가상 칠언 ++ 하나님 어린양 (싱어 솔로)
①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②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 으리라
③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④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⑤(애타는 목소리로)아- 아- 내가 목 마르다
-위의 사진-
#11. (간절하고 애절하게) 웬말인가 날 위하여 찬141장
⑥(다 ?나는 지점에서) 다 이루었다
⑦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군중(혹은 사역자)은 앞으로 나와 무릎꿇고 앉는다. 천둥,번개,비소리(성극효과 음악 테이프)
제6장, 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상황설명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무덤으로 가는 것을 표현(깨끗한 세마포에 싼다)++십자가는 제일 중앙에 둔다
#12. 십자가에 위에서 죽으셨네
나레이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어 죽으셨습니다++<형제> (홍포로 예수님을 곱게 덮는다.그리고 두명의 병정이 목과 손목을 잡고, 두 명의 병정은 허리와 다리를 잡고 지원팀 2명이 보조를 하고 이동한다. 위로 높이 처들고 찬양에 맞추어 넓게 천천히 이동한다) (아아아 -할때에 나레이션 들어가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는 고백처럼 심히 통회하고 회개기도를 한다)
-위의 사진-
나레이션 ⇒ 거룩한 피 내가 흘리게 했네.
내가 그 분을 나무에 못 박았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 모 욕에 나도 참여 했-다네. 그 소리치던 모든 군중 속에 나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네. 그 무례한 외 침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누-나. 십자가 주위의 군중을 내가 보니 그 고통 받는 자의 신음 을 비웃도다. 하지만 거기서도 내 목소리가 들리 네. 마치 나 혼자서 비웃는 듯-이. (무대를 한 바퀴 돌고 퇴장한다.)
상황설명 ※예수님의 임종시 일어난 현상들
→첫 번째 것은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 일어났고, 지진이 일어난 것과 성인들 중 몇몇의 성도가 부활한 사건은 마태복음27:51-53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형의 집행관이었다고 추정되는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제7장, 태선창작 찬양극『The passion』.
#13. 부활의 새벽
-. 참새소리와 더블어 고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레이션 ⇒① 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성소휘장이 한 가운데서 찢어지고 하늘과 땅과 바다 모든 피조물이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나레이션 ⇒② 예수님을 돌무덤에 장사지내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우리는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겨났습니다. 돌무덤이 열렸는데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우리들에게 말했습니다.(두 명이 등장하여 어리둥절하다가...기쁜 마음으로 퇴장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14.무덤에 머물러-찬150
헨델의 메시아 中에서『할렐루야』,무덤격파.
나레이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대신 죽 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성경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할렐루야 찬양 할때에 회중, 출연자 전부 일어나 찬양한다. 찬양 할때에 시범을 한다)
-.어린이시범단(기본동작,품세)고려품, 창작품세.
-.성인시범단 (종합격파).
① 2명 동시에 앞으로 공중 3 방차기(풍선)양쪽(보조 6명)
② 사이드로 한명씩 3명 높이턴차기 후,540도 2명차기 (풍선 or 송판)(보조 10명)
③ 앞으로 사람위 공중 3방차기 (송판)
④ 벽장차기 2명(보조 10명)
⑤ 최종 뒤에서 360도 주가리(쟁반)
여기에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제시는 무용수의 도구는 육체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 육체를 얼마나 아름답게 가꾸느냐에 따라 몸 전체와 각 지체들은 모든 운동, 즉흥무, 기교, 그리고 무용과 관련되어 있다. 선교적측면에서 무용수 중심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에 따라 무용수 표현은 값어치를 더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부족한 자료에 허덕이다가 인터뷰를 결정하고 비교적 광신대 태선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광신대 학우들을 대상으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Passion』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느낌으로 보았고, 어떤 은혜를 경험했는지, 태권도선교는 대해서, 태권도선교에 바램이 있다면 등의 논제에 가까운 주제로 접근하여 좋은 결실을 맺어 몇가지를 소개한다. 4회이상 보았다는 7년째 다니는 김종홍학우는 복음의 내용과 연관시켜서 신선했다, 하지만 태권도실력은 어설프다고 충고해 주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었다. 아울러 다양한 접근전략이 필요하고 국내에서는 차별화된 전문적인 사역이 되기를 바랬다. 태권도 2단의 실력인 하상기학우는 철저한 준비를 많이 하여 주님의 고난, 우리가 죄인이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함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전해져 많은 영혼이 살아나기를 희망하면서 경험한 바로, 태권도는 강한 인상을 주고 사람에게 보여 줄때에 호응도 좋았고 접촉점이 용이하였다. 그러나 늘 우려하는 바는 태권도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사역중이나 집회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격파, 태권도 동작이 남아있다면 복음은 희미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하면서 철저한 영성을 훈련을 원했다.
3. 복음의 도구로서 태권도선교의 영향
이구동성으로 태권도선교는 이제 복음의 도구로서 매우 용이하다라고 증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분야에 동역자는 일어나지 않고 자꾸만 정체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 왜!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물론 인도자의 헌신이 미약했고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당회장스타일로 선교회가 운영됨으로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럼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문화사역에 헌신된 사역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는 실정이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한 단체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신학의 신조와 철학의 사상이 바로 세워져야되는 것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태권도선교에 대한 장점과 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1) 태권도선교의 장점과 선교단의 활동
태권도의 사회적 가치를 잘 활용하여 국내외적으로 놀라운 성장일로에 있는데 특별히 단기 선교의 도구로서의 태권도의 가능성과 효과는 매우 크다. OM선교회의 지도자 중에 한명은 미래의 효과적인 선교매체로서 크게 두가지를 제시했는데, 음악과 태권도였다. 찬양은 대중적인 효과가 있으나, 계속적인 양육(Follw-up)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으나, 태권도는 양자가 가능하며, 특히 개인적이고 정기적인 접촉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훌륭한 양육과 제자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태권도의 선교적 가치로서의 장점을 지적했다. 태권도가 복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장점을 다섯가지로 구분하면은 첫째 왕실경호원, 사관학교, 경찰학교, 정치인들이 선호하므로 지도층에 접근하여 그 사회 깊숙히 영향을 줄 수 있다.
두 번째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은 종목으로서 시범단이나 선수단을 통해 거리나 공원, 학교등 어느 곳에서나 거리 전도 도구로서 매우 효과적이다. 선교지역의 선교사와 현지 교회와 협력해서 전략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세 번째는 영적으로 양육된 태권도 지도자는 전도와 양육 제자훈련이 가능하고 엄한 예의, 질서, 명령계통을 갖춘 무도정신 체제가 있음으로 훈련생들에게 신앙적 영향을 크게 미친다.
네 번째는 언론매체나 매스컴 등을 통해 복음적 내용을 담은 태권도 드라마나 율동, 구원 메세지등을 사용해 시각적으로 전도할 수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는 태권도 지도자는 단련된 육체와 투철한 정신력으로 현지적응이 뛰어나고 체육관(평일은 태권도, 주일은 예배)을 선교센타로 활용하며, 관원회비로 자급자족을 앞당길 수 있다.
선교단의 전도활동(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1993년 세계태권도선교회의 김희삼 관장님을 만나고부터 광주지역에서 공개적으로 태권도선교가 이루졌다. 물론 이미 문일호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세계안디옥선교회에서 해외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CCC광주지부나, 호남대학교등에서 하고 있었지만 지역을 기반으로 공개적으로 집회사역을 했던 곳은 아래의 연혁과도 같다. 여기에 많은 것을 수록할 수 없음으로 중요한 것만을 올렸다.
1993년 세계태권도선교회 광주지회개척(광주새한교회/17명)
1994년 광신대학교 태권선교연구회 개척/ 뵈뵈카페에서 일일?집
1995년 광신대 태권선교연구회에서 태국 단기선교사역 10차집회
구동 실내체육관 빛고을 찬양축제에 Cross Drama집회
1996년 광신대태권선교연구회 필리핀 해외단기선교사역 24차집회
광주새순교회/여수등대교회/푸른교회 영적각성 전도집회
서울 선교회관 태권도패스티벌에 광주대표로 참가
1997년 경기도 연천 군부대 위문 및 전도집회사역(청무팀 참석)
광주새순교회 고난주간기념 선교드라마 Cross집회
필리핀 민다나오 단기선교사역(새순교회/태선)16차 집회
강원도 철원 군부대 위문/집회사역 3차 집회
-위의 사진-
1998년 광신대 제2차 태국선교현장실습 태권도전도집회 14차사역
구동 실내체육관에서 빛고을 찬양축제 Passion드라마 집회
과역교회초청 고흥 과역중학교 체육관 전도집회
세계태권도선교회(이단과 동역문제)탈퇴후 마하나임태권도 선교단개척
1999년 강원도 원주 학성장로교회 영적각성 전도집회
영광 영광읍교회 수요일밤 예배시 특별집회
광신태권선교연구회 필리핀 민도르 단기선교사역28차집회
광신대 대예배실에서 고난주간기념 Passion드라마 집회
군 부대 논산훈련소 입소대교회 위문/전도집회사역
2000년 광신대 대예배실에서 고난주간기념 Passion드라마 집회
세계로 선교회초청 전남대학교 대운동장 태권도시범
전북익산 은총교회 예비사역/강원도 양구군부대 5차 집회
목포교회대학초청집회/제주도YM문화센타초청복음축제
(2) 태권도선교를 통한 학원복음화와 도장의 선교기지화
광주광역시에 위치하고 있는 동강대학에서 마하나임태권도선교단의 정현규사역간사가 인도하고 있는 D.C.A(동강기독학생회)에 성경공부모임에서 태권도선교가 일어나고 있다. 광주수피아여고에서도 통합측 한길교회의 지원으로 이정원관장이 섬기면서 매년 캐나다 원주민을 상대로 선교를 감당해 오고 있다. 직업선교를 통한 태권도도장의 선교기지화를 이룬 필자의 오랫동안의 동역자요! 태권도후배인 이광수관장은 직장선교사로 최고의 선교역할을 감당하는 태권도도장의 복음화의 모델이다. 그는 자신있게 태권도 지도철학을 대답할때에 "최고의 정신교육은 성경공부이다"라고 선포한다. 180여개의 광주광역시 등록된 태권도도장 가운데에 10위권 안에 드는 참으로 건실한 도장운영을 감당하면서 꼬마태권도선교사를 양육하고 있다. 참으로 이 체육관을 사용하실 하나님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첨단운암체육관에 있는 임대전관장은 작지만 주님이 일하실 것들을 기대하면서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체육관 운영하고 있다. 2000년 8월에 있었던 제주도 복음축제에 수명의 어린이를 보내어 태권도선교시범을 하게 하였다. 또한 동운동에 세종체육관 서광현관장과 북구 우산동 태룡체육관의 여운상관장,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용하실 것들을 사모하면서 저들의 반응을 기대한다.
(3) 창의적인 접근 지역에 전략의 병기
현대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의 장이다. 현실상황과 선교환경에 따르는 적극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선교적 관점에서 의미있는 변화로는 세계 인구의 증가, 도시화, 이슬람교 부흥, 가난의 편재와 기근의 심화, 민족주의의 대두들이다. 이러한 변화들의 결과로 공식적인 선교사 비자로 입국해 왔던 전통적인 선교방법으로는 선교 또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이 늘어가고 있다. 현재 세계 인구의 2/3정도(약 22억)가 선교를 제한하는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2000년에 이르러서는 85%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조류에 따라 접근 제한 지역에 적응성과 유연성을 갖고 창조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지역을 창의적 접근 지역(Creatice Access Nations)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비량, 직업선교가 매우 강하게 대두되어 왔으며 특별히 태권도선교사의 진출은 매우 밝다고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태권도가 선교 매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몇가지 과제들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태권도는 선교 매체로서의 스포츠 중 한 분야를 훌륭히 개척할 것이다. 그리고 태권도를 통한 선교사역은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 곳곳에, 특히 회교권과 공산권을 포함한 창조적 접근지역에 복음이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훌륭한 선교도구가 될 것이다. 현재 많은 태권도 선교사들이 필리핀과 태국에 진출해 있고, 알바니아를 비롯해서 발칸반도에 창의적 방법으로 들어가 있다. 또한 이스라엘, 인도, 중앙아시아등지에서 풍성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미전도종족지역이면서 저개발국가에는 진출이 미흡한 상태이다. 필리핀 민다나오(모슬렘자치구), 태국의 남부지방에 5개도가 이슬람교가 80%이상이다. 또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는 아직도 공산권이며 방글라데시는 87%가 모스렘인데 최대 빈민국중에 하나이고 아프리카는 남아공에 선교학교수의 보고의 의하면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의 남하정책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태권도를 수련한 기독인들의 헌신이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시점이다.
Ⅵ. 결론
태권도를 복음에 접목시키는 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신학과 선교학에 접목시킨다는 것은 어려움을 많이 경험하였다. 아마도 이 논제가 걸음마밖에 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하나 풀어왔다. 기대하는 것은 이 논제를 통하여 보다 더 폭넓은 연구와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노동을 예배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랍비 잘만(Zalman)이 "나는 나의 목수 연장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했고, 홉킨스(G.N.Hopkins)도 "나무를 베거나, 대들보를 다듬거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의 책임이라고 느껴 행하는 것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라고 했듯이 노동 자체는 영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노동은 곧 하나님과의 동역이며(요15:1)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한 부분이다. 역시 태권도 선교 그러한 자세와 정신으로 개혁신학을 확고하게 세워 나아가야 되겠다. 우리가 신학과 신앙의 사조에 분명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믿음이 연약할때에 넘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고 가르친다(고전10:31, 골3:17, 벧전4:11). 일을 통해서 뿐 아니라 일 그 자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창조법칙이요, 명령이요, 구속에 대한 감격 행동이요, 예배의 한 부분이요, 이웃 사랑의 표현일 때, 즉 노동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으로서 노동이 천국의 상급과 관련될 때 그것은 지상적인 것을 넘어 천상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문화명령을 하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고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그가 범죄함으로 노아에게 새 언약을 통하여 다시 땅에 편만하라(창 9:7)하시고, 야곱에게 그 땅을 주리라(창 35:11-12)말씀하신 부분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따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 분의 대위임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한 사역을 통하여 성령을 뜨겁게 체험하고 성령에 이끄심 따라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