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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ασιλεία(바실래이아) 표현은 통치(Rule)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고 βασιλεία를 그 나라 단어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는, 이러한 경우에 어떤 통치가 효과있게 실행되기 위해서는 그 통치가 실시될 수 있는 영역(공간)을 만들어 주어야한다는 이유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러한 관계로, 공간적인 하나님 나라가 결여된 사상은 매우 이상야릇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불가항력적인 동인력 사상 이외에도 어떤 다른 면모들이 명백하게 등장한다. 또한 절정에 도달한 그 나라의 문제를 다룰 때 평화와 행복은 상태로, 묘사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은 자”(마8:11)를 말씀하시여 그나라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을 나타내며 “떡을 먹는 자”(눅14:15)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자와 낮은 자”(마5:11, 11:11, 18:1,4)의 계열이 있는 사물들의 질서로 대표되는 어떤 것이다. 또한 왕이 그의 보좌에 앉아 있고 그의 종들은 좌우편에 앉아 있는 비인격적인 질서(마20:21)로, 또한 의인들은 빛나고 악인들은 쫓겨날 그러한 곳(마13:43)으로 묘사된다. (H. Ridderbos)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을 수 있는 공간(영역)이 있는 세계이며, 하나님이 그보좌에 앉아 있는 공간과 영역과 사물적 존재가 있는 지고한 세계이다. 현금의 학자들 중에는 그나라의 통치만 임했다고 하며 어떤 학자는 성경의 "하나님 나라"를 "통치"로 번역해야 한다고까지 말하지만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는 그 나라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나라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하여 그나라의 영역성(공간성)을 함부로 결여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공간이다.
하나님 나라의 現存에 대한 바리세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17:20-21) 여기서 "너희 안"은 바라세인들이 있는 그때의 그 영역(공간)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바라세인들의 심령안에 하나님 나라가 존재할수 없기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며 주의 재림시에 베일(Veil)을 벗고 나타날 것이다.
아래는 변종길 교수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의 글입니다. |
3) 땅(영토)
그 다음으로 우리가 고려할 요소는 ‘영토(territory)’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또는 공간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 영토(공간, 처소)가 없다면 왕과 백성들이 거할 처소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공중에 뜨게 되며 우리가 바라는 소망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monaiv)’이 많다고 하였으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처소(tovpo")’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요14:2). 그리고 베드로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하였다.(벧후3:13).
게할더스 보스와 조지 엘든 래드, 헤르만 리덜보스 등이 하나님 나라의 ‘주권’ 또는 ‘통치’를 강조한 것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으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측면을 많이 약화시키고 말았다는 점이다.
13) 그들은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신약의 basileia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malkuth, mamelakah 또는 mamelakuth는 장소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며 사실이 아니다.14)
11) LXX에는 basivleion iJeravteuma로 의역되었으며 이 표현이 벧전 2:9에도 나타난다. 어느 곳에서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킴에는 변화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이 중요한 구절을 예외로 취급하고서(예를 들면 G. Vos, The Kingdom and the Church, 21), 구약에서의 malkuth 또는 mamelakah의 주된 개념은 ‘주권’ 또는 ‘통치’라고 한 것은 편파적이다.
12) 물론 이 두 구절에서 ‘나라’는 ‘백성’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나라’는 여러 요소들을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 여기서는 아무래도 ‘백성’의 요소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외에 ‘세상 나라’에 대해서 ‘백성’ 개념이 부각된 예로는 마 12:25, 24:7; 눅 11:17 등이 있다.
13) 이런 부작용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 한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져왔던 내세 천국 사상도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내세의 소망을 확실히 붙들고서 어려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았으며, 그 중에 어떤 성도들은 일제하의 모진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14) 단 11:4에서는 malkuth가 영토적 측면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으며, 에 5:3,6, 7:2은 분명히 영토로서의 나라를 가리킨다. 민 32:33의 mamelakah도 분명히 영토로서의 나라를 가리킨다. 또한 삼상 15:28에서의 mamelakuth도 영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Gesenius의 사전에는 tWkl]m'의 영토적 의미가 별로 나타나지 않으나, F. Brown, S. R. Driver, Ch. A. Briggs가 편집한 Hebrew and English
Lexicon(Oxford, 1952, s.v.)에는 tWkl]m'가 영토를 나타내는 많은 성경 구절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L.
물론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 측면은 종말에 이루어질 ‘미래 천국’(새 하늘과 새 땅)과 지금 성도의 영혼이 안식하고 있는 ‘낙원’ 곧 ‘내세 천국’(눅 23:43; 빌 1:23; 계 14:13 참조)에서는 분명하지만,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세 천국’에서는 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아마 이 사실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영토’ 대신에 ‘주권’이나 ‘통치’라는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도록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의 ‘현세 천국’에서 어떤 고정된 ‘장소’를 지정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현세 천국’이 전부 다가 아니며 우리는 현재 이 순간에도 성도들의 영혼이 쉬고 있는 ‘낙원’과 의(義)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혀 장소없이 공중에 떠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쨌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으며, 이 세상의 자녀들과 섞여 살고 있다(마 13:24-30 참조).
하나님 나라가 장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마 7:21,19:24, 21:31; 행 14:22)15)라든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마 21:43)16)는 표현에서 알수 있으며, 또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신다”(마 26:29; 눅 22:30)는 표현에서도 분명히알 수 있다. 나아가서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 설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은 여기서 ‘밭은 세상’이라고 하시고(마 13:38), 이어서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41절)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장소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17) 뿐만 아니라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18)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장소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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