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호남 사림의 원류적 동질성
고려말 어수선한 정국에서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1392년 7월)하려 하자, 공양왕은 왕위를 물려 줄 수 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정몽주(1337-1392)는 조준을 제거하려는 동시에 고려를 끝까지 받들고자 하다가 이방원의 자객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성리학자로서 오부학당․향교 등을 설치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던 정몽주가 의리와 명분론을 앞세워 조선의 이성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따르지 아니한 점은 기득권 보호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어쩌면 자연스런 반항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조선이 개국하자 명분과 의리를 배반한 조선이라고 비난하면서, 고려의 충신들은 절개와 지조를 내세워 은둔하는 등, 조선의 정치에 참여치 않았으며, 정몽주와 뜻을 같이한 그의 제자들은 낙남落南의 길에 들어 영남과 호남으로 귀양아닌 귀양의 길을 떠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길재(1353-1419) 이거니와 그는 스승인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이 태상 박사라는 벼슬을 주면서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받지 아니하고, 고향인 영남(선산)으로 내려가 성리학의 탐구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선비들의 제 1차 낙남
길재는 고향으로 내려가 김숙자 등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가 체득한 낙천지명 樂天知命의 태도와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충정은 후일 사림의 뿌리가 되었다. 정종에게 올린 소에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과 절을 백이와 숙제에게 비유하여 사군 事君에서의 의리義理를 내세웠다. 그는 정주학程朱學에 바탕을 두고 충과 효를 위주로 하는 도학을 밝혔으며 이단 배척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정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조선 성리학이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제자 김숙자(1389-1456: 호 봉암 시호 문강)는 아들 김종직(1431-1492:본 선산, 호 점필재)에게 길재의 학통을 전수하여 영남학파의 종조 宗祖가 되게 하였다.
김종직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을 강조하였으며 인정仁政의 실시를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오륜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민(士農工商)이 각각 그 직업에 안정케 하는 정치를 표방했는 바 그런 정치의 근본은 교육이라 하여 향교교육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재 등용의 중요성과 원훈후예元勳後裔의 세습적인 등용에 반대하였다. 그 결과 성종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문인들을 많이 등용시킨 반면, 훈구파(유자광,이극돈 등)의 심한 반발을 사서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1498)의 빌미가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일손․정여창․김굉필․남효온․최부 등 훌륭한 선비들이 있었거니와 그 중에서 소학동자로 일컬어진 김굉필(1454-1504:본 서흥, 호 한훤당, 사옹, 서울 출생)은 호남의 인재를 직접 가르쳐 스승의 학문이 호남에서 꽃피게 했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 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실려 있었는데 그 것이 수양이 단종의 자리를 빼앗은 반인륜적 행위를 비방한 것(이극돈)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 참시함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죽이거나(김일손등) 귀양을 보냈다. 이른바 무오사화였는데 김굉필 또한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전남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그가 순천에 있을 때 그 곳의 선비 최산두(1483-1536:본 광양, 호 신재,나복산인)를 가르쳤다. 윤구․유성춘과 함께 호남의 삼걸三傑로 추앙된 최산두는 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인 김인후(1510-1560:본 울산,호 하서,시호 문정)를 가르쳤으며, 김인후는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정철鄭澈(1536-1593:본 연일, 호 송강, 시호 문청)을 배출했다.
한편, 호남 사람 최부崔溥(1454-1504:본 나주, 호 금남)는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는데 그의 문화에서 유계린, 윤효정, 임우리 등 훌륭한 인물이 배출, 호남학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였다. 유계린은 두 아들 유성춘과 유희춘에게 스승으로부터 물려 받은 도학적 학풍을 잇게 했으며, 어초은漁樵隱이라는 호를 가졌던 윤효정은 윤구, 윤항, 윤행, 윤복 등의 네 아들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임우리는 조카 임억령에게 사상과 학문을 전수하여 훗날 호남 사림의 사종이 되게 하였다.
또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은 조광조趙光祖(1482-1519:본 한양,호 정암,시호 문정)에게 훌륭히 전수되었는데 그의 학문은 학자인 박상, 양산보, 최산두 등에게 이어졌다. 동국의 삼박三朴으로 일컬어진 박상朴祥(1474-1530:본 충주,호 눌재,시호 문간)에게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칭송되는 임억령林億齡과 면앙정 시단의 주인 송순宋純 등이 나와 호남 문단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세조의 왕위 찬탈(1455년)은 의리와 명분에 죽고 살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운명을 뒤바꾼 대사건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선비의 대대적인 낙남
성삼문 등의 사육신과 김시습 등의 생육신이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세상을 버림으로써 단종에 대한 충성의 다짐은 물론 의리와 절의를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선비들은 명분 없는 쿠테타(coup)에 충격을 받고 벼슬길에의 염증을 느낀 채 영남 또는 호남으로 낙남落南의 길을 택했다. 고향인 영남으로 내려간 선비들은 지역 향촌鄕村의 경제적 기반에 힘입어 서원 등을 설립, 후진양성과 성리철학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한편, 호남으로 낙남해간 선비들은 주로 지역에 처가 또는 먼 친인척을 두었을 뿐 특별한 향촌에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단지 호남이 한양으로부터 지역적으로 원격한 위치에 있기에 정쟁의 화를 피할 수 있으며 기후가 따뜻한 탓으로 물산이 풍부하며 그로 인해 인심이 넉넉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엽편주의 한 몸을 호남에 맡겼었다. 그러니까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은 중앙의 선비들을 영남과 호남으로 은둔 또는 피세避世하게 만든 이른바 “선비대이동”사건의 절정으로서 역사적 가치판단과는 다른 각도로 평가되거니와, 호남으로 낙남한 선비들은 각기 자기 씨족의 호남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세조의 왕위찬탈(1455년)을 필두로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등은 호남으로 선비들의 낙남을 가속화하였다. 광주의 충주박씨, 담양의 문화유씨, 홍주송씨, 나주의 금성나씨와 나주나씨, 해남의 해남윤씨, 고흥의 고령신씨와, 여산송씨 등이 대표적 사례이거니와 그들은 처處 또는 은둔지로서 호남을 택하였으며 그후에는 호남에 뿌리를 박고 세거世居함으로써 훗날 곧 성종대 이후 사림士林으로 성장하여 호남사림 문화의 꽃을 피우는데 영향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광주․나주․장성․창평(담양)은 호남사림의 중심지로서, 사림의 대부분은 무등산 원효사 계곡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처음 호남 지역에 들어온 선비들은 호남에서 오랜 동안 살아온 향반가鄕班家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도움의 댓가로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 호남의 선비가 융성할 수 있는 토양을 구축하였는데 학문의 전수 및 강학講學 활동은 주로 누정樓亭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영남의 선비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사립종합대학교격인 서원書院을 중심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한 것과는 달리, 호남으로 내려간 선비들은 연고가 거의 없는 지역으로 낙남했던 탓으로 경제적 여유 등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주로 그 지역 향반가의 도움으로 누정을 건립, 그 곳에서 주로 활동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중종대 전국의 누정 880여 개 가운데 약 반이 영남과 호남에 집중되어 있다고 하였는 바, 실제로 호남지역 특히 호남사림의 중심 활동지였던 광주․나주․장성․담양 등에는 많은 누정이 건립되었으며 그러한 누정에서 지어진 누정 한시는 국문학사의 한 획을 지을만큼 그 질과 양에서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누정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시를 지으며 나라를 걱정했던 사림들의 활동은 단순한 현실의 도피에서 나온 패배자의 아우성이 아니라 명분과 의리의 정치가 실천되지 못한 현실적 불합리한 여건에서 나온 우국․충정의 것이었는 바 그것을 창조해 내었던 원천과 뿌리는 다름 아닌 도학의 정신과 의리의 자세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바로 사림문화의 원천인 도학의 정신과 의리의 자세는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병활동이라는 실천행동으로 나타났으며, 평상시에는 모순된 정치 현실을 개탄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높히는 대현실 참여의 문학창작 및 자연적 질서와 그에 동화를 갈망하는 서정시의 창작으로 실현되었다.그에 대한 단적인 예가 곧 김덕령등 호남의 의병활동과 식영정 이십영등의 한시 및 면앙정가등의 가사문학이다.
다가올 21세기는 정신문화와 정보가 주가 될 것이며, 신지식 창출의 능력이 국력을 좌우할 전망이라고들 입을 모으고 있는데, 그러한 저력은 두 말할 여지 없이 정신문화에 기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말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창작적 자세를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납득되고도 남는 일일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전통 문화 가운데 성리철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으며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그 가치와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곧 한국학 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문화 유산은 조선시대 우리의 풍風과 속俗뿐만 아니라 오늘의 생활에까지 깊숙히 영향 작용하고 있어서 공자가 살아야한다느니 또는 죽여야 한다느니 하면서 야단 법석이다.
한국학, 그것은 성리철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국민의 신앙, 민속, 한문, 문학, 건축, 음악, 미술 등이 아닐 수 없겠는데, 그 중에서 영남과 호남이 하나의 뿌리로부터 분갈이하여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우는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무래도 사상과 그에 기반하여 만개한 구국운동과 문학이라 생각하거니와, 특히 무등산 원효사 계곡으로부터 비롯된 시가 문학은 전남 담양의 누정을 중심으로 그 절정을 이루어 주옥같은 명작들을 남김으로써, 이 지역을 조선시대 시가의 메카로 공인케하여, 이천년 십일월 십일일 마침내 가사문학관의 건립․개관과 그에 따른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게 할 계기를 마련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문학사에서 문학권文學圈을 말할 때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조선시대 호남 인물들의 시문학 활동 중심지였던 광.라.장.창(光州, 羅州, 長城, 昌平)을 손꼽을 수 있겠다. 이수광李晬光, 정두경鄭斗卿, 허균許筠 등 조선시대의 유명한 평론객들에 의하여 높히 칭송된 인물의 대부분은 호남출신들로서 그들은 모두 당대의 걸출한 시인이었다고 한다.
“뛰어난 시인과 문장가로 숭앙된 인물들이 호남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이수광의「지봉유설芝峯類說」)
“호남에는 높고 깨끗한 山水의 정기가 사람에게 모여 文章과 기걸奇傑한 선비가 많았다.” (정두경의「松川集序」)
“숙종조 호남에는 당세의 저명한 인재가 많았는데 그들은 학문과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허균의「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 한결같이 입을 모아 칭송하였던 인물 중에는 박상朴祥, 박우朴祐형제를 필두로 양팽손梁彭孫, 송순宋純, 윤구尹衢, 임억령林億齡, 오겸吳謙, 나세찬羅世讚,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유희춘柳希春, 유성춘柳成春, 임형수林亨秀, 양응정梁應鼎, 박순朴淳,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임제林悌 등이 있다.
위에서 말한 인물들은 각기 명사名士로 칭송된 인물로서 당대의 학문과 시문에서 독창적인 시학과 학문세계로써 호남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였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앞서 말한 사람들 대부분은 비슷한 시대적時代的 상황에 처했던 선비들로서, 특히 호남이라는 지연地緣으로 말미암아 서로 가까워진 사람이 많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진 당대의 지식인知識人이요, 정계의 소용돌이에 희생양이된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는 데서 서로의 교분은 자연적으로 긴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몸소 향리鄕里에서 ⌈소학⌋의 정신을 실천으로 옮기는등 어른을 섬기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사승관계師承關係이기도 하고, 함께 종학從學하던 동문同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신적 유대관계에서 지식인들 간에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상호간의 학문과 시적詩的교유였다. 시가시인詩歌詩人의 문집文集에 서로 창화수창唱和酬唱한 시詩가 많이 전함은 바로 이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소신과 신념 및 동일한 세계관과 독서취향 나아가 사승관계 등에 의해 시작활동詩作活動을 전개하였다면, 이는 분명한 시창작 정신이나 또는 원리 곧 시학詩學에 의한 창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호남의 시가시인이 시적詩的인 모임을 비교적 활발히 한 것은 조선 중기 중종조中宗朝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때 부터라고 한다.
중종 14년 기묘년己卯年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현량과등으로 정계에 입문한 많은 호남인湖南人들이 유배流配되거나 삭직削職되었으며 타지방 사류士類들은 全南으로 낙남落南하거나 유배되기도 하였다. 앞의 든 인물 가운데 최산두, 윤구, 유성춘, 양팽손, 박상 등이 이른바 호남출신의 기묘명인己卯名人으로서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도학을 물려받은 조광조趙光祖는 전남 화순 능주陵州로, 신잠申潛은 전남장흥長興으로 유배되어 호남의 사류士類들과 더욱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1495 - 1519)는 얼마되지 아니하여 곧 사사賜死되었지만, 신잠은 17년간을 장흥의 유배지에서 살았다. 그는 이곳에 귀향온 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인 해남에 물러나 있다가 영암으로 유배된 윤구,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며 기묘명현들과 뜻을 같이 하였던 박상(1474-1530)과도 왕래하며, 매우 다정하게 지냈다.
해남 윤씨 문중에 전해오는「당악문헌棠岳文獻」에 의하면, 윤구는 호를 귤정橘亭 자는 형중亨仲이라 했는데 최산두(1483 - 1536)와 유성춘 (호는 나옹懶翁 또는 취암鷲巖이라 했음)등의 여러 선비는 물론, 임억령(1496 - 1568), 박상, 신잠 등과 상유相遊하며 시사회詩社會의 모임을 갖고, 가신佳辰에 즈음하여 ”편지로 부르고, 말을 함께 타고 모이되, 미처 이르지 못한 자에게는 대백大白의 벌주罰酒를 내리고, 혹은 시를 지어 수창酬唱하였는데 이렇게 함이 수십년이 되었다”고 전한다. (「棠岳文獻」(禮), 海南尹氏文獻, 卷1.)
이와 같은 진술은 조선조 중종 때 호남지역에 시회詩會가 성했던 사실을 전하는 중요한 기록이 된다. 이를 근거로 추론컨대 호남 시단은 이미 조선조 중엽에 완성되었으며, 이런 시회를 통해 호남의 문학은 한층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박상은 이곳 시단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충주忠州의 지비천知非川 위에 있는 공자당工字堂의 선비들 모임에도 참여하여 강학講學하고 그 主人인 김세필金世弼(1473 - 1533)등과 시회의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박상이 참여하였던 호남과 충남의 두 시회詩會는 당시의 대표적인 시단의 형성에 기여를 하였거니와 시대적時代的 고뇌苦惱를 같이하는 동호인同好人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다. 그 중 호남의 시단은 작시창화作詩唱和를 일삼던 시인詩人들간의 모임이라는 데에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한다.
작시창화는 누군가에 의하여 원운原韻이 지어지면, 그 시운詩韻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뒤를 이어 시를 지어 화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면 이같은 조선조 전기 호남의 시단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하게 되었는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서 후배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던 인물人物을 중심으로, 그들의 시적詩的 교유관계交遊關係를 바탕으로 하여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광주지역光州地域의 시가시인을 보면 박상, 박우(1476 - 1546), 박순(1523 - 1589), 기대승(1527 - 1572), 고경명(1533 - 1592) 등이 있다. 그 중에 박상과 박우는 형제간兄弟間이요, 박우와 박순은 부자간父子間이다. 박상의 장형長兄으로 박정朴禎(호를 하촌荷村, 자는 마용馬用이라함)이 있었는데, 이 3형제는 글에 능하여 중국 송나라의 삼소三蘇(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澈)에 비유하여 동국東國의 삼박三朴으로 칭송되었던 명사名士들이다.
특히 박상은 현량과로 추천되어 정계에 나간 이른바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김굉필(1454 - 1504)에게서 17세 때부터 도학을 배운 조광조 등과 뜻을 같이 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눌재집訥齋集』에는 그의 詩가 약 1200수 전하는데 거기에는 기묘당인己卯黨人과의 교유시交遊詩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己卯士禍로 장흥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신잠과 시회를 같이 하였다 함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박상은 신잠이 유배지流配地에 있는 동안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와 가지사迦智寺를 왕래, 시대적 아픔을 같이하며 시정詩情을 나누었는데 임억령, 윤구와는 물론 이구李構(1484 - 1536), 이화지李和之 등의 형제와 동행同行하기도 했다.「눌재집訥齋集」에 의하면 신잠과의 교유시로 제작한 작품이 무려 114수나 되는데, (박준규, <눌재 박상의 교유인물과 시문의 제작>, 광주광역시「눌재 박상의 문학과 의리정신」, 1993, p.103) 이런 숫자는 당시 기묘명인己卯名人들과의 교유시로는 가장 많은 수에 이른다.
雖遁深山晦姓名 깊은 산에 숨어 이름 없이 산다 한들
有時天變亦關情 천기 변할 때면 또한 가슴 졸인다.
夜來風雨知多少 밤사이 비바람이 얼마나 휘몰아쳤나
揮淚佳花落滿庭 아름다운 꽃들이 뜰에 가득 눈물겹구나
이는 박상朴祥이 신잠申潛의 시에 화답한 <산거백절山居百絶>중의 하나 이다. <山居百絶>은 절구시絶句詩 100수를 연작連作으로 이룬 장편長篇 7언시言詩이다. 그 중에 위의 시는 어수선하던 당시의 時代 상황을 우회적으로 노래한 그의 대표작이다. 박상은 이 시를 짓고 윤구와 이화지에게 보이며 감상토록 하였다 한다. 이로 보면 20여세 年下인 윤구는 눌재를 어른으로 모시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訥齋集」에 윤구와의 交遊詩가 24수 전함은 양자간의 친분이 그처럼 긴밀했던 것을 뒷받침해 준다. 윤구가 최산두, 유성춘 등과 함께 호남삼절湖南三絶로 일컫는 名士로 성장하기까지는 그 이면에 이같은 도학의 의리정신과 탁월한 문사적 재능을 겸비한 박상의 가르침과 感化가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상과 교분이 두터웠던 호남湖南의 人物로는 또 담양의 유옥柳沃(1487 - 1519)과 전북 순창의 김정金淨(1486 - 1520)을 들 수 있다. 세 사람은 의리義理 추구에 뜻을 같이 하여 을해년乙亥年(1515)에 中宗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복위소復位疏를 올리고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 등의 삼훈三勳을 지탄指彈하며 논죄論罪하였는데 이는 기묘사화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이 을해소로 말미암아 김정은 보은報恩으로 유배되고, 박상은 영평永平(지금의 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귀향을 갔다. 그 사이 세 사람은 시를 지어 뜻을 나누었는데 박상이 그들과의 관계에서 제작한 시는 적지 않다.
한편 송순宋純, 임억령林億齡, 정만종鄭萬宗(호를 안노재安老齋, 자는 인보仁甫) 박상의 門下에 들어 수학受學하였다. 명류名流 10 걸傑에 속하는 박순朴淳이 그처럼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있는 名士로 성장하게 된 것 또한 그의 숙부인 박상의 가르침이 컸기 때문이다.
이제 시각을 시단으로 옮겨 개관하고 그것의 의의 및 가치를 살피기로 하자.
조선시대 호남에는 두 개의 시단이 양대산맥처럼 버티고 있었는데, 면앙정 시단과 성산동(식영정) 시단이 그것이다.송순(1493 - 1583)은 면앙정 시단의 창도자였는데 박상이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 정만종과 함께 그에게 나아가 사사師事하였다. 정만종과는 그 때부터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오겸吳謙(1496 - 1582), 임억령林億齡, 신광한申光漢(1484 - 1555)을 따라 종유從遊하였으며, 김인후(1519 - 1560), 임형수,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1536 - 1593), 노진盧禛(1518 - 1578), 이이李珥 등은 그 門下에 들어 종학從學하였는데, 그가 담양의 제월봉霽月峯 밑에 <면앙정>을 짓고, 20년 뒤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으로 개축하였을 때는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는 <면앙정부>를 지었다. 또한 임억령, 김인후, 박순, 고경명은 <면앙정 30영>을, 그리고 임억령, 김인후, 고경명, 노진, 소세양蘇世讓(1486 - 1562), 이황李滉(1501 - 1570), 양산보梁山甫(1503 - 1557), 윤두수尹斗壽(1533 - 1601) 등은 또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 을 제작하였으니, 송순을 주축으로 한 면앙정시단俛仰亭詩壇의 위세가 어떠하였는지, 또는 후학에 끼친 그의 학문과 詩文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히 짐작 할 수 있겠다.특히 국문시가의 경우, 송순의 〈면앙정가〉는 정철의 〈성산별곡〉에 그 수법, 어휘구사,성격 등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산동(식영정) 시단은 임억령에 의해 창도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 바, 호남湖南의 시문학詩文學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임억령의 역할 또한 가벼이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역시 박상을 사사하여 시회詩會의 모임을 함께 하였으며, 송순과의 교분이 두터워 면앙정 시단에 출입하였다 함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전남 해남海南에서 태어났지만 광光․라羅․장長․창昌의 인물들과 사귀면서 무등산록無等山麓에 자리한 성산동星山洞과 석저촌石底村을 자주 왕래하였다. 담양에는 별뫼(성산)의 산언덕에 식영정息影亭 및 서하당棲霞堂이 있었고, 또 괸돌마을에 소쇄원蕭灑園, 그리고 충효리의 환벽당環碧堂이 근거리에 위치하여 송순은 이를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칭송하였거니와, 임억령은 이곳의 승지勝地를 출입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 삼천여 수 가운데 이 성산동에서의 작시作詩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최한선, 석천 임억령 시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논문, pp. 10 - 30)
임억령은 여기에서 고경명, 정철, 김성원(1525 - 1597) 등과 함께 성산사선星山四仙으로 자처하면서 호운작시呼韻作詩하고 수작창화酬酌唱和하였다. 성산 사선四仙 가운데 그는 가장 나이 많은 어른으로서 강남의 사종詞宗으로 기려온 인물이다. 김성원은 그의 사위이자 제자로서 29세 년하였으며, 고경명과 정철은 근 41세나 아래인 사제관계로서 이 세 사람은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우며 사사하였지만 서로 수창酬唱할 때는 망년지교忘年之交의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세 사람은 임억령의 원운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에 차운하였는데 송순도 이에 차운함으로써 <식영정이십영> 시는 모두 일백수에 이른다. 송강, 제봉, 인재 등은 석천의 <서하당팔영棲霞堂八詠>시에도 차운하였으니 당시의 시회가 얼마나 성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정철은 시가문학상 강호가사의 으뜸이라 할 <성산별곡>을 담양의 성산에서 제작하였는 바, 위의 가사는 <식영정이십영>, <서하당팔영> 등의 한시에서 거둔 발상, 소재. 기법 등의 시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잉태된 성산시단의 결실이 아닐 수 없으며, 무등산 원효사 계곡에서 시원始源한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시적 분위기와 전통의 영향 때문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임억령은 위에 든 4선뿐만이 아니라 소쇄원을 경영하는 양산보, 환벽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김윤제, 그리고 식영정에 자주 출입하던 송순 등과도 어울려 성산동제영星山洞題詠을 지었다. 우리 나라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일컬어진 백광훈, 최경창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대시인大詩人인데, 그 중 백광훈은 성산동을 찾아 함께 시적교유詩的交遊를 하는등 음양으로 석천의 영향을 받았던 인물인데, 그는 호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제일의 시인으로 평가 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16세기에 성황을 이루었던 성산시단星山詩壇은 명실공히 호남시단 뿐만 아니라 조선시단을 크게 발흥시킨 중요한 터전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당시 호남의 시인으로서는 김인후와 최산두의 인맥人脈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인후는 을사사화乙巳士禍(1545) 이후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장성長城에 돌아와서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와 도학의 실천 및 시문詩文의 제작에 뜻을 둔 대학자大學者요, 문인文人이다. 이미 말한 대로 그는 송순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 - 1543),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 - 1536)등을 사사하며 학문과 작시의 감화를 많이 받았었지만,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同福에 유배와 있던 최산두를 찾아 수학한 것은 그의 학맥學脈에서 성리학의 정통적 계승과 작시생활作詩生活의 인맥人脈을 형성하는 또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하서 김인후는 서경덕, 백인걸, 성운, 정유길 등과 동방同榜한 인물로서 인종이 승하하자 옥과 현감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에 돌아와 안빈낙도 安貧樂道하는 은둔생활을 하였는 바, 그는 한 마디로 송시열이 지적한대로 “도학, 절의, 문장” 등의 세 가지를 모두 겸비한 대학자였다.
한편, 「하서집河西集」에는 김인후의 시가 약 1600수 전한다. 하서는 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지는 도학파를 계승한 대표적 인물로서 유희춘과 함께 김안국의 문하에서 지치至治의 왕도정치 이념을 호남사림에게 연결시켰다. 거기에 양산보와 유희춘의 두 사돈은 물론, 그의 여서女壻인 양자징梁子澂(양산보 자)과 유경렴柳景廉(유희춘 자)과의 교유시가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양산보의 소쇄원에 머물면서 지은 <소쇄원瀟灑園 48 영詠>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소쇄원의 모습을 소재로한 실경 묘사적 시편이 많아서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짐작케하는 등 건축․조경학적인 측면에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누정제영樓亭題詠으로서 국문학사 상에서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김인후는 도학, 문학, 경제, 정치,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서 탁견을 지닌 큰 선비학자로서 문묘에 배향되거니와 그의 문하에서는 양자징을 비롯하여 정철, 기효간奇孝諫, 변성온卞成溫 등이 배출되었는데, 정철은 국문시의 대가大家로서 성산동시단星山詩壇에서 크게 활약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최산두는 호를 신재新齋라 했는데 광양인으로 성리학에 정진하였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이었다. 정몽주(1337 - 1392) - 길재(1353 -1419) - 김숙자(1389 - 1456) - 김종직(1431 -1492) - 김굉필(1454 - 1504) - 조광조(1482 - 1519)등으로 이어지는 도학적 경세사상의 학맥은 호남의 최부, 최산두와 유계린柳桂隣 등에게 계승되어 호남지방湖南地方의 사림士林 진작振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로 최산두에게서는 훌륭한 道學者로 손꼽는 김인후가 배출되었고, 유계린의 학문은 그의 두 아들 유성춘과 유희춘에게 이어졌다. 김인후는 또 앞에서 말한 성산동 시단에 출입하면서 소쇄원의 양산보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다. 결국 그는 양산보와 이미 말한 유희춘의 아들을 사위로 맞이하는 인연을 맺었다. 유희춘柳希春은 中宗 8년(1513) 해남海南에서 계린桂隣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號는 미암眉巖 혹은 인재寅齋며 인중仁仲은 자字이다.
유희춘의 아버지 계린桂隣은 호남 도학의 일맥을 열었던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문인인데 금남이 처가인 해남에 있을 당시 사사師事했다.
계린의 훌륭한 인품은 스승을 늘 감탄케 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금남의 사위가 되었다.바꾸어 말하면, 유희춘은 호남의 도학적 학맥을 고스란히 지킨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였던, 금남 최부의 따님을 어머니로 하고, 경학經學에 남다른 조예를 지닌 계린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것이다.
곧 정몽주-길재-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 | |
최부 최산두 박상
| | |
유계린 김인후 송순․임억령
임우리 |
윤효정 정철
등으로 이어지는 호남도학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희춘은 부친 외에도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을 사사師事하면서 도학과 경학의 학문 세계를 넓혀갔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1545)와 양재역 방서謗書 사건(1547)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기전까지, 中宗 32년의 生員, 33년의 別試 文科급제를 시작으로 성균관 학유, 사간원 정원 등 순탄한 관직생활을 했다.
뜻하지 않게 벽서壁書(謗書) 사건이 터지자, 조광조의 노선을 따르는 호남의 도학적 선비라는 이유로 20년간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宣祖가 즉위(1567)하자 그의 무고가 논의, 석방되어 성균관 직강, 전라감사,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 하였다.
특히 여덟 차례에 걸쳐서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한 점은 매우 주목을 요하는 바로써, 이는 그의 탁월한 경륜과 인품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증좌이다.
유희춘은 宣祖의 학문을 보좌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도학의 정통을 물려받은 학맥의 고귀함과 몸에 밴 도학자적 자세로 귀향살이 20년간을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한 결과, 그의 학문세계가 깊고 심오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유희춘은 宣祖8(1675)년에 이조참판을 끝으로 사직하고 경사經史와 성리학性理學에 관련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 어록자의語錄字義, 대학석소大學釋疏, 역대요록歷代要錄, 헌근록獻芹錄, 주자대전어류朱子大全語類, 강목고이綱目考異, 시서석의詩書釋義, 미암일기眉巖日記, 미암문집 등을 편찬 또는 저술했다.
특히 신증유합新增類合 2권 1책은 한문 입문서로서 뿐만 아니라, 16․ 17세기 국어사 연구에 귀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라감사 시절 완산의 진안루鎭安樓에서 박화숙朴和叔(淳)과 자연을 완상하면서 읊었다는 “미나리 한 펄기를 캐여서 싯우이다”로 시작하는 시조는 그의 『미암집』에 전하는 한시문과 더불어 국문학사에서 크게 주목을 받는 충신연주 시조로 알려져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암일기』는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 1일에 시작하여 1577년 선조 10년 5월 13일까지 약 11년간의 시간을 자신의 일상사는 물론 조정의 대소사건, 경외京外 각 관청의 기능과 관리들의 생활, 나아가 당시의 사회의 풍속, 문화, 정치, 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일기체 문학의 백미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일기는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1592년 이전의 승정원 일기가 모두 소실된 바람에 『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서 첫 10년간의 기초적 사료가 되었다. 『미압집』에는 주옥 같은 시문 등 그의 문학인으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시편이 실려 있다. 유희춘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문절文節인 것으로 보아 그의 문학적 역량과 지조있는 선비의 정신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는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에 있는 미암사眉巖祠와 담양읍 향교리 취영에 있는 의암서원義岩書院에서 단독 배향되고 있으며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및 해남海南의 해촌사海村祠(五賢祠)에서 해남의 삼현三賢으로서 금남 최부, 석천 임억령 등과 함께 배향되고 있다.
이밖에 16세기의 호남시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송천 양응정(1519 - 1581)이 있다. 그는 자를 공섭公燮, 호를 송천松川이라 했는데 기묘명인己卯名人인 양팽손의 제 3자로 화순의 월곡月谷에서 출생하였다. 양팽손은 연산조에 벼슬을 버리고 장성의 삼계森溪에서 강학講學 수양하고 있던 지지당 知止堂 송흠宋欽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는 기묘팔현己卯八賢인 조광조, 김정 등과 뜻을 같이 한 선비이다.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향리에서 27년간을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양응정은 임억령과 주고 받은 시편들이 많은데 장편배율이 주를 이룬 그의 시편들은 서사한시의 전단계적 작품으로서 웅혼한 기상과 넘치는 기개가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부친의 가르침과 의리정신義理精神을 이어받은 양응정은 지조가 있고 文章이 뛰어나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문하에서는 이름있는 文人으로 정철, 백광훈, 최경창, 백광언 등이 배출되어 훌륭한 호남시단의 맥脈을 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강남江南의 사종詞宗이라한 임억령과는 시적 논쟁이 많았다. 석천은 24세의 연상年上이지만 이른바 시쟁詩爭이라 할 정도로 시를 다투어 지어 수창酬唱하는등 당대를 떠들썩하였다. 그들간에 제작한 <당성수창시棠城酬唱詩>가 바로 시쟁詩爭으로 말미암은 대표작이다. 「송천집松川集」에 의하면 서로의 수창시가 수백편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소실되어 얼마 되지 않는다.
15․16세기에는 위에서 말한 명사名士들이 나타나 국문학사에서 사대부문학士大夫文學은 상승기를 맞이하였으니 (임형택, <조선 전기 한문학의 기본성격>,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1권), p.249) 이것이 실로 호남시인들의 역량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광주․전남지역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호남시단의 전통과 맥을 면면히 잇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논의나 연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를 간행하는 가운데 호남문인 100명의 문집을 포함시켜 100권을 출간한 것과 전라남도의 지원으로 향토문화자료 32권을 출간함으로써 대략적인 자료는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문집이 우리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진군에만도 70여 종의 미공개 문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한 영인影印 작업은 물론 번역작업 등 본격적인 연구가 시급히 요청된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는 않지만 호남시학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의 당대적 의미와 현대적 가치는 무엇인가 등에 대한 해명작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광조와 절친하였던 눌재 박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면앙정 송순과 석천 임억령은 각각 면앙정 시단과 성산동 시단을 창도하여 수 많은 작품의 제작과 후진을 양성하여 호남시단이라는 큰 물줄기를 열었는 바, 이제 우리는 호남시단의 시창작 정신 또는 원리 등 호남시학의 특징을 밝히고, 그것을 신지식으로 창출하여 21세기 본격적인 문화시대에 대비할 준비를 해야될 것으로 사료된다.
21세기 한국학은 성리철학의 우수성과 더불어 서정미, 낭만성, 풍류도, 대현실성, 방외기질, 섬세함 등에서 단연 뛰어나다는 호남시문학이 세계문화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호남은 영남학에서 발원․영향 작용한 성리철학과 도학에 힘입어 조선시대 학문과 시문학의 메카로서 그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집적물을 창출하였거니와 지금 우리에게는 그곳에서 이루어진 학문적․문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야 할 책무를 떠안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전쟁의 시대라고들 입을 모으고 있거니와, 이는 달리 말하여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훌륭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욕구와 가치관을 지닌 새로운 시대에 맞게 어떻게 신지식화할 수 있느냐의 역량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호남을 한국학 부흥의 적지성으로 꼽는 이유가 바로 이상에서 살핀 대로 학문적 전통과 인맥의 연결고리 나아가 시가문학의 찬란한 집적성과에 있거니와, 이제는 구체적 대안과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뒷받침될 기반확립과 분위기 성숙이 영․호남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져야할 것이다.그리하여 역사와 전통이 자력資力이 된 한국학이 새로운 세기의 가늠자가 되는데 우리 모두가 책임과 의무를 지녀야할 것으로 사료된다.
어찌되었건 호남학 중 사상과 문학은 그 뿌리가 영남학에서 내려 뻗은 것이며 그 뿌리의 건실함과 튼튼함은 가지와 잎을 무성하게 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웠으니 이른바 심근무엽深根茂葉의 전형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남학과 호남학의 우열을 논하는 편협한 생각을 지우고 그 둘의 특징을 어떻게 문화 창조와 지식 창조의 에너지로 활용할 것이며, 그것들의 당대적 의미와 현대적 가치는 무엇인가 등에 대한 해명작업에 모두가 하나되어 심혈을 기울여야할 때이다.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