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학은 10세기 무렵에 그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은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다. 그 역사를 놓고 보면 주역이 사주보다 대략 1,500년 이상 앞선다. 그러므로 주역이야말로 동양 역술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역사(周易史)를 대강 훑어보면 주역에 대한 입장은 3가지 분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점서(占書)로써 주역을 대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점을 치기 위해 주역을 보았다. 이 노선을 보통 상수학(象數學)이라고 부른다. 주역의 팔괘와 육십사괘는 일차적으로 형상(象)으로 나타나고, 이 형상은 숫자로 환산된다.
예를 들어 건괘(乾卦)는 1이고, 태괘(兌卦) 는 2이고, 리괘(離卦)는 3, 진괘(震卦)는 4로 표현하는 식이다. 점을 치기 위해서는 상(象)과 수(數)에 골몰해야 한다. 주역의 원래 목적은 점을 치는데 있었다. 상수학적 입장이 가장 원조다.
송대(宋代)의 소강절(邵康節. 1011-77)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저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상수학적 입장에서 우주의 변화를 설명한 명저다. 그러나 정이천(程伊川)을 비롯한 송대의 신유학자들은 소강절의 패러다임을 전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감이 있다. 너무나 거창하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신유학자들의 어록을 모아 놓은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유독 소강절의 어록만 빠져 있다. 괴상하다고 여기고 빼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 대목은 19세기 한국의 민족종교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후천개벽이라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의 연원은 소강절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점이다. 후천개벽설은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고, 일본에서도 주목받지 못한 우주론이다. 유달리 조선에서만 각광받고 유행하였다.
조선에서의 계보를 살펴보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소강절의 노선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 이토정(李土亭.1517-78)이고, 토정 다음에는 전라감사로 유명한 이서구(李書九.1754-1825), 그리고 계룡산의 김일부(金一夫)로 계승되었다.
김일부의 영향을 받아 후천개벽을 주장한 민족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동학의 최수운(崔水雲), 모악산의 강증산(姜甑山), 유성룡(柳成龍)의 친형인 유운룡(柳雲龍). 그의 호인 겸암(謙唵)은 주역 겸괘(謙卦)에서 유래하였다. 겸손하라는 의미다.
둘째는 의리학적- - 셋째는 과학적 ---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