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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文定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는 흔히 의붓아들 인종(仁宗)을 독살(毒殺)한 의혹의 배후 인물인 표독스러운 악후(惡后)라는 평가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영민(英敏)한 왕비(王妃)로 숭유억불(崇儒抑佛) 사회에서 불교(佛敎)를 보호하였으며, 정치적 파란과 대신(大臣)들과의 갈등에도 중궁(中宮)의 자리를 굳세게 지킨 여걸(女傑)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신하들에 의하여 한 나라의 왕이 바뀌었다. 왕의 조강지처마저 쫒겨났다. 피바람 부는 권력투쟁 속에서 조선시대 여인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더 강해지고 더 독해지는 것이다.
중종(中宗)의 세번 째 부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는 왕비자리에 오른 후 차례차례 정적(政敵)을 제거해 나가며 친아들 명종(明宗)을 왕위에 앉혔다. 그녀는 이후 20년 간 국왕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장악하였다. 권력투쟁 속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찾은 전략가, 냉철한 피의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문정왕후이다.
태릉 泰陵
단릉(單陵)으로 되어 있는 태릉(泰陵)은 옆에 놀이동산과 육군사관학교가 있다.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사망 2년 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17년만인 1534년(중종 28)에 아들(훗날 명종)을 둔다. 원자(元子)가 왕이 된 후 8개월만에 사망 1545년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된다. 1565년 창덕궁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여 이곳에 묻혔다.
태릉(泰陵)은 문정왕후가 권력을 휘둘렀던 생시를 반영하듯 왕릉이 묘제(墓制)에 따라 정확하면서도 웅장하게 조성되어 있다. 왕비릉(王妃陵)의 단릉(單陵)이면서도 어느 왕릉보다 무게가 있고 안정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능이다. 무엇보다 봉분에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져 있는 병풍석(屛風石), 상석(床石)과 난간석이 모두 돌려져 있다. 오래된 탓에 왕릉의 12간지(干支) 중 여섯 자(字)인 자(子), 축(丑), 묘(卯), 진(辰), 술(戌), 해(亥)만 읽을 수 있다. 6.25 한국전쟁 때 전소(全燒)된 정자각(丁字閣)은 1995년 복원되었다. 입구인 홍살문과 정자각(丁字閣) 그리고 봉분(封墳)이 일직선(一直線)으로 되어 있고, 주위가 매우 넓다. 능 앞 양쪽에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유달리 둔탁하게 앞뒤로 볼륨이 크다. 남편 중종(中宗)을 멀리 두고 있지만, 아들 명종(明宗)과 며느리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가 철책넘어 북쪽에 강릉(康陵)이라는 이름 하에 쌍릉(雙陵)으로 되어 있어 외롭지는 않아 보인다.
중종(中宗)은 왕비가 세 명이면서도 옆에 누워있는 왕비는 없고 모두 멀리 따로따로 두고 있다. 숙종(肅宗)이 세 명의 왕비와 서오릉(西五陵)에 같이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영특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권력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나타난 한 측면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가 따로 따로
중종(中宗)의 제1 계비(繼妃)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윤씨. 1501~1565)는 1515년 25세의 나이에 원자(元子 ..인종)을 낳고 산후통(産後痛)으로 승하하여, 처음에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묻힌다. 그러나 1537년(중종 37)에 현재 서삼릉(西三陵)에 능역을 조성하여 이장(移葬)을 하였다. 이 이장(移葬)에는 중종(中宗)과 사돈지간인 김안로(金安老 .. 아들 '禧'와 중종의 첫딸 효혜공주와 결혼)) 등의 권력암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종은 그 윤씨 묘 희릉(禧陵) 옆에 묻힐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그가 1544년 승하 후 그곳에 묻힌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생각이 다랐다. 왕후는죽어서 남편인 중종 곁에 묻히고 싶었다. 당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문정왕후는 1562년에 중종을 부친인 성종과 성종비 정현왕후 윤씨가 묻혀있는 봉은사 가까이에 있는 선릉(宣陵)으로 천장(遷醬)을 하게 된다.
곁으로는 풍수지리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성종(成宗)의 기복사찰(祈福寺刹)인 봉은사 주지(住持)로 있었던 보우(普雨)와의 내밀한 관계가 더 많이 작용하였다. 아이가 없던 문정왕후는 토속신앙인 삼신(三神)보다 절을 통해 아들 낳기를 빌었으며, 보우(普雨)와 가까워지면서 숭불정책(崇佛政策)을 펴고 승과(僧科)를 만들어 승려의 길을 더욱 터 놓았다.
그러나 후에 이 곳 지역이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가 되어 묘자리로써 부적합한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능을 다른 곳으로 정할 수 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능 자체가 잠길 정도로 낮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공릉동 불암산 남쪽 자락에 자기 묘터를 잡고 현재 태능(泰陵)이라는 묘호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문정왕후 금보 (金寶)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 권력자이었던 문정왕후의 금보(金普 .. 왕실 도장인 어보의 한 종류)가 미국으로 유출되어 현지 유명 미술관에 소장, 전시 중인 것이 밝혀졌다. 이 금보(金寶)는 원래 조선왕실의 사당인 종묘(宗廟) 신실(神室)에 봉안되었던 의례용 인장이었다.이 금보(金寶)는 높이 6.45cm, 가로, 세로 각각 10.1cm의 크기이다. 금동 재질로 비늘과 등딱지가 달린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아래 인면(도장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尊號 .. 존경해 오리는 호칭)인 ' 성열대왕대비지보 (聖烈大王大妃之寶) '라는 명문(銘文)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547년 그의 아들인 명종(明宗)이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섬돌 위에 나아가 ' 성렬인명대왕대비(聖烈仁明大王大妃) '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玉冊文)과 악장을 올렸다는 기록이 나와, 이 금보(金寶)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옥책(玉冊)은 국왕, 왕비,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문서를 말한다. 이 금보는 해방 직후 또는 한국전쟁 당시의 혼란기에 종묘에서 무단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어보 御寶
어보(御寶)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이다.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尊號)를 올릴 때 사용하던,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이다. 특히, 임금의 도장은 외교문서나 행정에 사용하던 국새(國璽)와 의례용으로 사용하였던 어보(御寶)로 구분된다. 임금의 집무용, 대외적으로 사용되는 도장인 국새(國璽)와는 달리, 어보(御寶)는 각종 행정문서가 아닌 왕실의 혼례나 책봉 등 궁중의식에서 시호(諡號), 존호(尊號), 휘호(諱號)를 올릴 때 제작되어 일종의 상징물(象徵物)로 보관하던 것이다. 왕과 왕비뿐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도 어보를 받았고, 왕과 왕비의 어보는 사후(死後) 왕실 사당인 종묘에 안치하였다.
하나의 어보는 거북 또는 용 모양의 의례용 도장, 도장을 담는 내함인 보통(寶桶), 보통을 담는 보록(寶菉), 그리고 이를 각각 싸는보자기와 보자기를 묶는 끈 등 최소 6개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한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보는 3~7kg 정도의 무게로 한손으로 들기에는무거운 편이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몸통 부분의 보신(寶身), 거북, 용 모양 등으로 장식된 보뉴(寶紐)에 술이 달려 있다. 보유의 모양은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면서 거북이에서 황제의 상징인 용(龍)으로 변경되었다.
어보와 국새는 거북이나 용 모양으로 장식되어 그 모양과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국새는 금(金)으로 제작되었으나, 어보는 금박을 입히거나 은(銀) 또는 옥(玉)과 같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었다. 국새(國璽)가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소실(燒失)된 반면, 어보는 종묘에 보관되어 있어 대부분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다. 조선시대 어보는 모두 366점이 제작되어, 현재 323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316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미국 로스안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문정왕후의 금보(金普)를 포함한 나머지 7점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정왕후 文定王后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悍)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윤비(尹妃)는 사직(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 목서(牧誓)에 '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고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명종실록 31권, 20년(1565.을축 4월6일
중종의 세번 째 왕비가 되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反正)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왕, 중종(中宗)이 세 번째로 맞이한 왕비이었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치마바위의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이었는데, 그녀는 연산군(燕山君) 때의 권신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澤君 ..신하들이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된 왕은 자신의 아내를 지킬 힘이 없었고, 결국 중종(中宗)은 '신씨'가 폐서인(廢庶人)되는 것을 멀거니 지켜 보았다.
중종이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반정(反正)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尹任)의 여동생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이었는데,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훗날 인종(仁宗)이 되는 원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장경왕후가 죽은 후 단경왕후(端敬王后)를 다시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잠시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 반정(反正) 주도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경왕후의 복위 논란은 곧 잦아 들었다.
당시 반정공신(反正功臣) 세력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서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를 잃은 세자(世子)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 박씨(敬嬪 朴氏)'같은 후궁의 자식들에게 치이지 않게 하기 위해 세자(훗날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은 세자를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 가문의 처녀를 왕비 후보로 밀었다. 훗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되는 이 윤씨 처녀는 당시 17세이었으며, 어머니 없이 자랐지만,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당시 소녀들과는 달리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 윤지임(尹之任)으로부터 아들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윤임(尹任) 덕분에 국모(國母)라고 하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후궁들의 등쌀과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못하였다. 시하들의 입김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힘 없는 왕, 중종의 왕비로 문정왕후는 자신의 앞날이 언제 단경왕후(端敬王后) 같아질지 모를 위협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녀는 세자(世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세자를 끼고 돌며 자신의 안위를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녀는 중종이 사랑해 마지않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이 정쟁(政爭)에 휘말려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그녀가 아들을 낳아 세자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윤임(尹任)의 견제도 극복하여야 했다. 말만 국모이었지, 바늘방석 같은 왕비의 자리에서 젊은 시절 문정왕후는 정치의 쓴맛을 골고루 맛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때의 비참함과 굴욕을 흘려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앞날을위한경험으로 체화시켜 나갔다.
아들 출산 그리고 정쟁의 소용돌이
왕비이지만 왕비 같지 않은 눈물의 세월을 보내던 문정왕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녀가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 아들 (慶源大君 ..훗날 명종)을 낳은 것이다. 내리 딸을 낳고 당시로서는 노산(老産)인 30대 후반 나이에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의 기쁨도 잠시 그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쟁(政爭)에 휘말리게 된다.
지난 긴 세월 동안 방패막이 삼아 끼고 돌며 키워 온 세자(世子 ..훗날 인종)이었지만,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되자 문정왕후에게 세자는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을 위해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다.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문정왕후는 적극적으로 정쟁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동생 윤원형(尹元馨)과 그의 첩(妾), 정난정(鄭蘭貞) 등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와 그를 보호하는 윤임(尹任) 세력과 맞섰다. 두 윤씨(尹氏)의 대립을 윤원형(尹元馨)을 소윤(小尹)이라 하고,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이라고 하여, 소윤과 대윤의 대립이라고 하기도 한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세자를 죽이기 위해 세자궁(世子宮)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약(心弱)한 세자를 독한 말로 구박하여 병들게 하고, 때로는 무속(巫俗)의 힘을 빌려 저주(咀呪)를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실제 실록(實錄)에 남은 기록을 보면, 문정왕후는 세제에게 장차 경원대군(경원대군)과 자신의 친정 가문을 죽이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자신을 키워준 문정왕후에게 효심을 품고 있던 세자(世子 ..훗날 인종)을 근심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세자에 대한 문정왕후의 위와 같은 날카로운 대응은 단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에 대한 그녀의 욕심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윤임(尹任)이 김안로(金安老)등을 내세워 문정왕후를 폐위(廢位)시키려 획책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안로(金安老)의 음모는 결국 이를 빨리 알아챈 문정왕후가 중종(中宗)을 움직임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문정왕후는 실제 권력이 없는 허울만 좋은 왕비의 자리가 얼마나 소용이 없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병약(病弱)한 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중종이 죽은 후 인종(仁宗)이 다음 왕위를 이어받았고, 문정왕후의 정적(政敵)이던 윤임(尹任)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문정왕후는 여러 면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이미 권력을 잡은 윤임(尹任)에게 대놓고 맞서지는 못했다. 대신 몸이 약한 인종(仁宗)을 몰아붙여 힘들게 하였다. 결국 인종(仁宗)은 문정왕후가 바라마지 않게 즉위 8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중종의 유일한 적자(嫡子)로 남은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이 12살 나이에 조선 13대 왕 명종(明宗)으로 즉위하였다.
수렴청정 垂簾聽政
문정왕후는 그녀 이후 조선왕조 내내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여하려 하거나, 처신에 문제가 있을 때면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것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남성 관료들을 호령하였고, 조선의 국시(國是)이었던 억불정책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호불(好佛)했으며,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외면하고 강력한 독재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선시대 내내 남성 지배층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편, 문정왕후는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세상의 정당한 가치관이라고 굳게 믿어지던 시대에 비록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누구보다 지적(知的)이었던 조선의 남성지배관료층을 발 아래 두고 자신의 권력과 왕권을 오로지 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될 수도 있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입장을 극복하고 지성(知性)과 지성(知性)의 대격돌장이던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시켰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지적이며 어떤 남성관료와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을 뛰어난 정치적 식견(識見)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입중하는 것이다.
세조(世祖)의 왕비 정희왕후(貞喜王后)의 수렴청정 이후 조선왕실에서는 몇차례 왕비들의 수렴청정이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남성 관료들을 쥐락펴락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종종 부정적인 의미로 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역발상을 해보면 그것은그만큼 문정왕후의 정치능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정왕후에 대해 이후 남성 지배층들이 보여준 것은 불평이나 비난(非難)의 수준이었을 뿐, 그녀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한것을 보면 문정왕후는 조선 전시대를 통해 매우 강렬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짐작하게 한다. 그녀의 능호(陵號)를 여느 왕비(王妃)들의 능호(陵호)에 주로 붙는 여성적인 글자가 아니라 ' 태(泰)'자를 붙혀 태릉이라고 부르는 것도 문정왕후가 가진 탁월함과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주는부분인 것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 발을 드리우고 그 뒤에서 정치에 대하여 듣는다 '라는 의미로 동양에서 왕(王)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면서 차마 여성으로써 남성 관료들과 직접 대면하지 못해 왕의 뒤나 옆에 발을 드리우고 국사를 처리하는 것을 이미한다.
조선에서는 세조(世祖)의 왕비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수렴청정을 한 것이 처음이었고, 그 다음이 바로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는 12살 명종을 대신하여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수렴청정을 그만 둔 뒤에도 아들 명종을 휘두르며 죽을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일일이 지시했으며, 왕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 네가 왕이 된 것은 모두 나의 힘이다 '라고 하며 욱박지르고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장악한 뒤 일단 자신을 핍박했던 대윤파(大尹派)를 일소하였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仁宗) 때 등용된 사람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 대윤과 소윤의 정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은 이전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勳舊) 세력과 이를 개혁하려는 사림(士林) 세력 간의 갈등이었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한 문정왕후는 명실상부한 조선 제1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의 동생 윤원형(尹元馨)이 꾸민 '양재벽서사건 (良才壁書事件)'에 쓰여진 문구, '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 '에서 처럼 실질적으로 그는 여왕과 마찬가지이었다. 그녀는 재난이 일어나면 중론을 모으게 하고 대신들과 몇 시간씩 토론을 하는 등 남성 학자와 관료군들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정ㅊ를 핸갔다. 그녀에게 오점(汚點)은 그녀의 동생 윤원형(尹元馨)과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이 그녀를 도와 정치의 어두운 부분을 도맡아 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은 것이었고, 문정왕후 또한 그들을 눈감아 주고 함께 일정 정도 부정부패에 일조하였다는 데 있다.
을사사화 乙巳士禍
양재역 벽서사건 良才驛 壁書事件
중종 말년부터 경원대군(慶源大君.. 문정왕후의 아들)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馨)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일파와 세자(世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일파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仁宗)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小尹) 세력은 역모(逆謀)를 씌어 대윤(大尹)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史禍)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 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小尹)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政敵)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殘存)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
명종 2년인 1547년,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良才驛)에서 ' 위로는 여주(女主 ..문정왕후를 지칭), 아래에는 간신(奸臣) 이기(李기)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 '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壁書)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이에 윤원형(尹元亨)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른(禍根)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가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관계에 있는 이약수를 사사(賜死)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이 중에는 사림파(士林派)가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 琓)도 역모의 빌미가 되다는이유로 사사(賜死)되었으며, 그 밖에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낳았다.
1565년 소윤(小尹)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宣祖)가 즉위하고 사림(士林) 세력들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誣告)로 공인되었고, 연루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신원(伸寃)과 포상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匿名)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했다.
문정왕후와 불교
숭유억불(崇儒抑佛)이 조선의 국시(國是)이었지만, 왕실에서 조차 알게 모르게 불교를 통해 기복(祈福)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 중에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많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천년을 넘게 지배이데롤로기로 군림하였던 불교를 조선에들어와 아무리 핍박한다 하여도 뿌리깊은 신앙심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백천간두의 위태로운 정치상황을 헤쳐나온 문정왕후(文定王侯)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다. 어차피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남성학자, 관료군들과는 그 출발이 달랐던 문정왕후는 국시(國是)인 숭유억불(崇儒抑佛)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앞서의 성군(聖君) 세종(世宗)도, 엄군(嚴君) 세조(世祖)도 차마 해내지 못한 일을 기어히 해냈다. 밖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면서도 실제로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었던 세종과 세조도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한 불교의 부흥책을 당당하게 내놓은 것이다.
보우 普雨
문정왕후는 강원감사(江原監事)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으로 승려 보우(普雨)를 데려와 봉은사(奉恩寺) 주지(住知)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자들인 관료들의 바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선교(禪敎) 양종(兩宗)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300여 개의 절을 공인(公認)하였다.
도첩제(度牒制)란 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하여 신분을 공인해 주던 제도이다. 조선은 억불숭유 정책을 표방하면서 일반 양인(良人)들이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양인(良人)의 승려화는 농민의 감소로 이어지면서 조세 수입의 감소로 인한 재정의 약화를 초래하고, 나아가 군역(軍役)에 충당해야 할 양인들이 승려화되면서 군역이 감소되는 부정적 요소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의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때아닌 불교 부흥책에 아연실색하여 반대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지만, 문정왕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의 불교 부흥책으로 임진왜란(임辰倭亂) 때 활약한 승려 유정(惟政 .. 사명대사)과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발탁되기도 했다. 하여간 이처럼 시끄러웠던 도첩제가 실시되자 3년마다 시험을 봐서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15년 동안 이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가 4천여 명에 이르렀다. 정원은 30명이었지만 아예 무시하고 정원의 1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벼슬아치 승려를 양산(量産)하였다.
이쯤 되자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보우(普雨)를 죽이라고 상소를 빗발치 듯 올렸고, 언관(언관)들과 선비들도 반대하며 난리를 쳤으나 문정왕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선종판사(禪宗判事)로 임명되기까지 6개월 동안 양종(兩宗) 부활의 반대와 보우(普雨)스님을 죽이라는 내용의 상소(上疏)가 무려 498회에 이르렀다. 결국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몇 달 동안 성균관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집단행동까지 서슴치 않았다.
보우(普雨)를 인생의 스승으로 신뢰하였던 문정왕후는 그의 건의에 따라 죽은 남편인 중종(中宗)의 묘를 봉은사 옆으로 천장(遷葬)해오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바로 선릉(宣陵)이다. 그녀는 봉은사(奉恩寺)를 크게 일으켰으며 갖가지 불교 행사를 연이어 열었다. 도처에서 문정왕후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였지만, 그녀는 앞서의 그 어떤 왕도 해내지 못한 독단으로 생전에 불교 진흥을 이루어냈고, 죽으면서 유언(遺言)에서까지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회암사 檜巖寺
명종이 즉위하고 20년, 즉 실질적 제 1 권력자로 조선을 20년 간 통치한 문정왕후는 회암사(檜巖寺)에서 열 큰 재(齋)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죽자 염려대로 보우(普雨)는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고 불교는 다시 핍박받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약 200여 년간 왕실의 후원 속에서 융성했던 사찰로 당시 불교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곳이다.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 속에서도 조선 전기의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 아래 대사찰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를 물려준 뒤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세종 13년과 성종 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창(重創)되었다.
성종 3년인 1472년의 중창(重創)은 기단부는 그대로 사용하는 등 고려 우왕(禑王) 때 확장한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대대적인 공사이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쯤 지난 명종(明宗) 시절에 이르러 조선불교는 다시금 중흥(重興)을 맞이하였고, 그 중심에 회암사(檜巖寺)가 자리하고 있다.
회암사는 1563년부터 1565년 봄에 걸쳐 승려 보우(普雨)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 구제와 같이 중수하였으나 새로 조성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고 하니 이때의 중수(重修)도 대규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檜巖寺) 중수에 맞추어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불화(佛畵) 제작을 발원하여 석가, 미륵, 아미타, 약사여래의 화상을 금화(金畵) 및 채화(彩畵)로 각 50점 씩 모두 400점을 제작하였다.
당시 왕실은 세자의 사망과 명종(明宗)의 건강 악화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아들 '명종'의 쾌유와 왕실의 안녕, 특히 세자의 탄생을 통한 순탄한 왕위 계승의 염원이 불화(佛畵)를 제작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불화 가운데 네 점의 약사삼존도와 두 점의 석가삼존도 등 여섯 점이 현재 국내외에 전하고 있다.
을묘사직소 乙卯辭職疏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巨頭)이었던 ' 남명 조식(南冥 曺植 . 1501~1572) '은 평생 벼슬을 사양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았던 올곧은 선비로, 퇴계 이황(退溪 李晃)과 대유학자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남명 조식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 성성자(惺惺子)'라 이름하여 항상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 '성(惺)'은 깨달음이니 움직일 때마다 나는 방울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경계하고 자신을 일깨우고 삼가하는 경계로 삼았다. 또한 하나의 장도(長刀)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 장도에는 ' 내명자경, 외자단의 (內明者敬, 外斷者義) '라는 명문(銘文)을 새겨 넣어 '경의검(敬義劍)'이라 이름하였다.
이 의미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과단성 있게 드러남이 의(義)란 뜻이다.
특히 그는 평소 ' 성성자(惺惺子) '라는 방울과 ' 경의검(敬義劍) '이라는 칼을 차고 다니며 선비 정신을 다잡으며 생활하였고, ' 실천궁행(實踐躬行 ... 실제로 몸소 실천한다는 뜻) '을 덕목으로 삼아 언제나 자신이 터득한 도(道)를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조식(曺植)은 또한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과부(寡婦)로, 어린 국왕 명종(明宗)을 외로운 아들로 표현하며 국정을 비판한 상소문(上疏文) '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로 유명하다. 이 상소문에 명종(明宗)은 매우 분노하여 엄중한 벌을 내리고 싶어했지만, 재야(在野)의 영수이었던 조식(曺植)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추앙받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된 때는 국정의 피폐함이 극에 달했던 명종 11년이었다. '남명'은 현감(縣監) 직을 받는 대신 상소문을 올리는데, 이를 단성소(丹城疏) 또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 한다. 남명은 단성현감의 사직소와 함께 당시 정치제도나 군신(君臣) 간의 절대적인 분별, 즉 왕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짓던 시대의 상소문으로서는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파천의 극언(破天의 極言)을 왕에게 올렸다.왕과 문정왕후를 진노하게 하고, 조정의 중신들을 놀라게 하고 사람들까지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이른바 '을묘사직소'는 다음과 같다.
선무랑(宣務郞 .. 종6품)으로 새로 단성현감(丹城縣監 ..종6품직)에 제수된 신(臣) 조식(曺植),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上疏)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데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 참봉(參奉 ..종9품)직을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후에 주부(主簿 ..종6품)를 두 번씩이나 제수하시었고, 이번에 다시 현감(縣監)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한 것이 산(山)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임금 앞에 나아가 하늘과 같은 은혜에 사례하지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인재)를 취하는 것이 장인(匠人)이 심산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모두 취하여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대장(大匠)이 나무를 취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쓰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하(殿下)께서 인재를 취하시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책무(責務)이니, 신(臣)은 그 점에 대한 염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큰 은혜를 사사로이 여길 수는 없으나, 머뭇거리면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側席 ..곁 자리) 아래에서 감히 주달(奏達.. 임금께 아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臣)의 나이 60에 가까웠으나, 학술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丙科 ..과거 급제의 마지막 등급)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물을 뿌리고 빗질을 하는 일을 맡기에도 부족합니다. 과거 공부에 종사한 지 10여 년에 세 번이나 낙방하고 물러났으니, 당초에 과거(科擧)를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조급한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고 큰 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人才)가 아니온데, 하물며 사람의 선악(善惡)이 결코 과거(科擧)를 도모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미천한 신(臣)이 분수에 넘치는 헛된 명성으로 집사(執事 ..신하)를 그르쳤고, 집사는 헛된 명성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는데, 전하께서는 과연 신(臣)을 어떤 사람이라 여기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문장(文章)에 능하다고 여기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라 하여 반드시 도(道)가 있는 것은 아니며, 도(道)가 있는 자가 반드시 신(臣)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전하께서만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재상(宰相)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됨됨을 모르고서 기용하였다가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臣)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으로 출세를 하는 것보다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臣)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亡)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저버렸고 인심(人心)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이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 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해 나아갈 수 없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 ..하급 관리)은 히히덕거리며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 ..상급 간리)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물만을 불리면서 근본 병통(病痛)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 .. 경관직 관리)은 자기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龍)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 .. 외관직 관리)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신(臣)은 이때문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은 생각에 장탄식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밤이면 멍하게 천정을 쳐다보고 한탄하며 아픈 가슴을 억누른 지가 오래입니다.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강물이 마르고 곡식이 비오듯 내렸으니, 이는 무슨 조짐입니까. 음악 소리는 슬프고 옷은 소복이니, 형상에 이미 흉(兇)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아무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한 자가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할 수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초개(草塏 .. 지푸라기) 같은 일개 미천한 자의 재질로 어찌 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분의 일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털끝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臣下)되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 하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官爵 ..관직과 작위)을 사고 녹(祿 ..녹봉)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臣)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臣)이 보건데 근래 변방에 변(변)이 있어 여러 대부(大夫)들이 제때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臣)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번 사변은 20년 전에 비롯되었지만,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으로,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서 사람을 임용하여 재물만을 모으고 민심을 흩어지게 하였으므로 필경 장수 중에는 장수다운 장수가 없고, 성(城)에는 군졸다운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적들이 무인지경처럼 들어온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對馬島)의 왜놈들이 몰래 향도(向導 ..앞잡이)와 결탁하여 만고의 무궁한 치욕을 끼친 것인데, 왕의 위엄을 떨치지 못하고 담이 무너지듯 패(敗)하였으니, 이는 구신(舊臣..오랜 신하)을 대우하는 의(義)는 주(周)나라 법보다도 엄(嚴)하면서도 구적(仇敵 ..원수)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宋)나라보다 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종(世宗)께서 남정(南征)하시고 성종(成宗)께서 북벌(北伐)하신 일을 보더라도 언제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와같은 것은 겉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속에 생긴 병은 아닙니다. 속병이란 걸리고 막히어 상하(上下)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대부(卿大夫.. 신하)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분주하게 수고하는 것입니다.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고 국사(國事)를 정돈하는 것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 입니다.
알지 못하겠으나,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風流)와 여색(女色)을 좋아하십니까 ? 활 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君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小人)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게 된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모든 선(善)이 갖추어 있고 모든 덕화(德化)도 이것에서 나오게 될 것이니, 이들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고루 공평하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평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요체(要諦)를 보존하면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공평하게 헤아릴 수 있어 사특(사특 ..간사하고 못됨)한 생각이 없어질 것 입니다. 불씨(佛氏 ..불교)가 말한 진정(眞定)이란 것도 이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을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儒)와 불(佛)이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인사(人事)를 행하는 데 있어 실제 실천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유가(儒家)에서 배우지 않는 것 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도(佛道)를 좋아하시니, 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는 우리 유가(儒家)의 일이니, 어렸을 때에 잃어버렸던 집을 찾아와서 부모와 친척 그리고 형제와 친구를 만나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군다나 정사(政事)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고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는 것이며, 몸을 닦는 것은 도(道)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신다면 유악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직(社稷)을 보위하는 사람들일 것인데 아무 일도 모르는 소신 같은 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겉만 보고 취한다면 자리 밖에서 모두 속이고 등지는 무리일 것인데, 주면 없는 소신 같은 자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의 덕화가 왕도(王道)의 경지에 이르신다면, 신(臣)도 마부의 말석(末席)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전하를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 삼가 바라건데,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要諦)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왕도(王道)의 법(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臣), 조식(曺植)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릎쓰고 아뢰옵니다.
첫댓글 조선 최고의 여걸 아닌가요? 단성소로 자신을 한갖 과부라 지칭한 남명을 명종과 신하들이 벌하자 해도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니 웬만한 남자 인군보다 낫다 싶은 여걸임엔 틀림없지만, 그 폐단이 너무 컸었던 것이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