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하는 심정
사무엘하7장1-17
얼마전 한국에 갔을 때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앉아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절은 갓바위 절이 최고라고요.
갓바위가 뭔지 모르시는 분 있으시죠.
말 그대로 갓을 쓴 바위입니다.
그 바위가 부처죠.
갓바위의 위력은 꼭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지성이면 감천이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잠시 그들의 대화를 전해 드리면, 누가 어느 절에 가자고 해서 가 보았는데 돈을 얼마나 많이 갖다 바쳐라고 하는지 그게 기분나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 내키어 하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강요하느냐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한 절간은 어떤 중이 책을 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책을 다 읽지도 못했는데 또 책을 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새 책을 들고 있는데 자신은 지난 책을 들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책을 사지 않을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핑계를 대어 그 절간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도무지 필계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그러던 중 손자손녀들을 봐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에 그 핑계로 그 절간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엽서는 수도없이 온답니다.
그 전에는 전화가 와서 애를 먹었답니다.
전화로 거절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런 대화중에 갓바위 절간이 최고라고 나온 것이지요.
그냥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뭔가 생각되는게 없습니까?
오늘날 교회도 그렇죠?
교인들은 예수님을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해라 저째라하는 말을 싫어합니다.
물론 남의 토에 자신이 동의할 수 있으면 동의하지만 동의되지 않는 말은 결코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언제나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어떠하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할 것 하고 받을 것 받으면 되지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매일 108배 한다는 것이지요.
염불도 108번인가 어쩌고 저쩌고 한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탄력이 붙었습니다.
얼굴을 보아도 좋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죠.
교회생활에 탄력이 붙으면 교회생활이 재미있죠.
자기 하고싶은대로 교회생활하니 말입니다.
새벽기도도 재미있고, 철야기도도 재미있고, 성가대도 재미있고, 여러 가지 헌금, 봉사도 다 재미있습니다.
자기 만족속에 살아가죠.
이런 사람 만나면 자신감이 넘칩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자신의 능력안에서 믿음이 놀고 있고 주님이 놀고 있으니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겠습니까?
물론 진정한 평안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활을 지속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삽니다.
늘 자신이 신께 어떻게 행함으로 무엇을 해 드리고 무엇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 혼자 북치고 장고치고 다 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백향목 집에, 왕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훼장에 즉 천 쪼가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괜찮은 생각아닙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는 생각아니겠습니까?
이제 쫌 평안해지고 먹고 살 만하니 누가 생각나겠습니까?
자신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생각나겠지요?
우리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먹고 사는데 급하여서 돈벌고 주일 빠자 먹고, 헌금 하지 않고 하다고 먹고 살만해 지고 돈도 웬만큼 벌게 되면 나를 위해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너무나 인간적이지요.
양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5-16절을 한번 읽어 봅시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입이까 없다는 말입니까?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집을 짓습니까?
하나님이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지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봅시다
요한복음2장19-2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누가 성전을 짓습니까?
예수님이 지으십니다.
예수님 자신의 육체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지금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니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 지으질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으로 지으실 성전입니다.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결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왜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성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성도가 해야 합니까?
이게 오늘 다윗의 바램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백향목 궁에 거하게 하셨으니 당연히 이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자신이 지어드려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으면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 사람손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염치가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예수님께 다 맡겨 버리면 그것은 너무 염치 없는 짓이지요. 이렇게 사는 것을 말하기 위해 제가 서론에서 절간이야기를 한 이유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심에 대해서 성도는 그냥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자꾸 무엇을 꿈꿉니까?
이젠 내가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되지 않을까? 주님 무엇을 해 드릴까요?
이런 태도가 지옥가는 자들의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