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현재 나는 예천읍 백전리에 거주하고 있으나 풍기진씨 집안의 아내를 맞이하여 결혼을 하기 십여년 전에 살던 마을은 큰 범주로 볼 때 금당실 권역 마을에 포함되는 마을이지만 좁은 의미로 상금리 소재지를 금당실로 본다면 금당실 마을에서 동쪽으로 2킬로 정도 떨어진 능천리 방두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유인이 살았던 아흔 아홉칸 집터
우리 방두들 마을은 큰길로 면소재지를 드나들 때 반드시 양주대감이라고 불리던 이유인이 만년에 이거하여 살던 흔히 말하는 아흔 아홉칸 집을 지나야만 했다 아쉽게도 내가 태어나기 전 이미 아흔 아홉칸의 궁궐 같은 큰 저택은 이유인 죽은 후 상속인이 한 칸 두 칸 팔아 버려 뜯겨져 역사만 남기고 사라졌으나 큰 집터에 보통 담장의 두서너 배가 넘는 웅장한 담장만이 담쟁이가 가득한 채 담장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은 큰 저택이 있었음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지금 그 집터에는 우리 집안의 주손인 노철 형님이 70년도 한 모퉁이에 집을 짓고 고추와 참깨 농사 등을 지으며 살고 있었던 탓에 어릴 때부터 주위 마을 원로들로부터 이유인(양주대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유인은 본래 경남 김해 사람으로 중인이었으나 무술인 진령군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민비)의 측근이 되었고 노년에는 명당으로 유명한 반서울이라 불리는 금당실 마을에 큰 저택을 지었는데, 일각에서는 구전에 한말 끊임없는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고종과 황후의 도피처로 삼기 위해서 저택을 지었다고 구설로 전해온다.
그러나 아흔 아홉 칸의 궁궐 같은 큰 저택을 지으며 힘없는 지역 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시켰으며 강제 노역에 시달린 주민들은 목재를 목도질 해오면서 목도소리 대신 상여 소리를 하였고 집이 망하기를 기원하면서 집의 기둥을 세울 때 거꾸로 세울 정도로 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고 전해 들려온다.
이유인이 지었던 옥소정(병암정) 이 같은 원성 이면에 이유인은 1898년 법부대신(法部大臣)으로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을 규탄하고 보안회(輔安會)를 조직하여 배일운동에 앞장섰는가 하면 1905년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 되는 등 자주국권을 찾기 위해 항일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1907년 여름 귀양살이 도중 한살 위인 부인 송씨를 남겨두고 의문의 죽음으로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이글은 본론에서 1) 양주대감 이유인은 누구인가?. 2) 이유인은 왜 금당실에 잡았을까?. 3) 구전으로 들려오는 이유인에 대하여 정리하였으며 전제적인 줄거리로 마무리 하였다.
이 글은 한말 법무대신을 지낸 이유인의 인물에 대한 평가와 금당실에 온 배경을 소설, 구전설화와 어릴 때 들어온 이야기를 더듬어 작성하였으며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많으므로 학문적인 논문을 쓰는 학자들은 신중하게 판단하여 인용해 주길 먼저 밝힌다.
2. 본 론
1) 양주대감 이유인은 누구인가?
양주대감으로 불리던 대한제국 "광무개혁정치"의 지도자 희재 이유인(1843-1907)은 이용익 등과 함께 고종의 측근이자 반일주의자였는데, 먼저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 보면 1888년(고종 25) 파주목사(坡州牧使)로서 전무위원(電務委員)이 되어 기해전선(畿海電線)을 연로(沿路)에 가설하는 데 공헌하였고 1894년 함경남도 관찰사, 1896년 중추원 일등의관이 되었다. 1897년(광무 1) 덕수궁을 수리했으며, 뮈텔 주교(主敎)를 왕에게 소개하여 국호(國號: 대한제국)·연호(年號: 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이유인이 소유했던 사괴당 고택 1898년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으나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을 규탄하여 한때 유배되었다. 그 후 경무사(警務使)가 되고 1904년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배일운동에 앞장섰으며. 1905년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 이듬해 석방되었으나 1907년 여름 귀양살이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먼저 조선말 경남 김해 출신의 이유인은 학맥이나 인맥이 없었던 인물로 한양에 입성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초고속 승진을 하며 법무대신 등 중앙의 주요 요직을 두루 지내며 양반사회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 인지를 살펴보자.
명성황후는 1866년 경기도 여주에서 살았던 가난한 집안의 딸로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는데 첫째 왕자를 낳았으나 항문이 없어 죽자 전국의 명산대천 곳곳에 제를 드리게 하고, 무당 진령군(眞靈君)을 불러들여 굿을 하였다. 또한 명성황후는 1866년부터 자신이 시해당하기 1년 전인 1894년까지 28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친정아버지의 무덤을 옮길 정도로 미신과 풍수에 광신적인 집착을 보였는데 당시 대표적 지식인 황현(黃玹)은 당시 조선을 “귀신의 나라(鬼國)”라고 불렀고 남편인 고종조차도 임오군란(1882) 후 “궁궐이 정숙하지 못하여 부녀자(민비를 가리킴)가 치성을 자주 하니 이것이 나의 죄”라고 했을 정도였다.
1882년 위정척사파와 명성황후에게 밀려난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 임오군란이다, 이 사건으로 명성황후는 궁중을 탈출해 여주 장호원에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는데 갑자기 한 무당이 찾아와 8월이면 환궁할 것이라 하였고 정말로 대원군이 청국에 납치되어 환궁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이후에 그 무당을 궁궐로 불러들여 진령군(眞靈君)이라 봉하였으며, 측근에 두고 정치에 깊이 관여토록 하였다.
이후 명성황후는 진령군의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고 이에 이유인은 자신의 입신을 위해 진령군(眞靈君)에게 접근하였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유인이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한다고 소문을 퍼트리자 진령군(眞靈君)이 만나기를 청했는데, 이유인은 수하인 부랑배들과 사전 약속을 하고 진령군을 산으로 모셔 내었다. 그리하여 귀신을 부리는 곡예는 시작 되었는데 이유인이 동방적제장군(東方赤帝將軍)을 부르자 한 귀신이 서방적제장군(西方赤帝將軍)을 부르자 또한 귀신이 등대 하였다. 모두 부랑배들의 가장이지만 진령군은 오직탄복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진령군의 추천으로 궁중의 사빈(師貧)이 되었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와 어떤 연후로 이 두 사람이 맺어진 것은 모르겠으나 학맥과 인맥으로 출세 길을 열었던 조선의 다른 관료들과 달리 주위의 배경이 그리 좋지 않았던 이들 두 사람에게는 서로 간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화려한 관료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김원우의 역사소설《우국의 바다》, 제7장 “죽음을 부르는 혼”에 이유인과 진령군의 관계가 흥미롭게 펼쳐져 있는데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유인은 매일같이 진령군의 사당에 출입하여 공손히 숙배한 다음 “민중전 만세”를 한동안씩 암송하는 것이었다. 그 암송이 끝나면 진령군 앞에 현신하여 정중하게 절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근숙의 예를 다하곤 했다. “국무 진령군 들으시게. 금일의 국조가 이처럼 융성한 것은 오로지 진령군 자네의 위국성축의 소치일세. 신민 된 자로서 내 이를 어찌 근사치 않으리요. 가히 신불의 영험이라 할 만하다.”
신이 내린 것들이란 매사가 긴가민가한 법이라 진령군은 곧장 이유인에게 미쳐 돌아갔고,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서로 살을 섞고 지내며 밤이면 사당 안팎에 요분질소리가 맷돌 돌아가듯 요란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진령군은 중전 민비에게 이유인을 천거했고, 그에게는 곧장 등용의 길이 열렸다.
이 이야기의 내용도 한편의 흥미로운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유인과 진령군과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은 관계였음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문장으로 이유인의 중앙정계의 입성은 진령군과 깊이 연류 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입성한 이유인은 중앙 정계 입문 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많은 공적도 남겼는데 공적을 보면 1888년(고종 25년) 파주목사(坡主牧使) 로 전무요원(電務要員)이 되어 기해전선(畿海電線)을 연로에 가설하는데 공헌하였고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궁할 때 궁궐수리의 책임을 맡았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프랑스인 뮈텔 주교(主敎)를 왕에게 소개하여 국호(國號: 대한제국)·연호(年號: 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광무 2) 법부대신(法部大臣)으로 부임하였는데, 규칙을 개정하여 대신이하 모든 관원들이 날마다 오전 8시에 출근하여 오후 7시에 퇴근토록 하여 이전에 한만(閒漫)하던 폐습을 다 없애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후 경무사(警務使),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 되었으나 왜적의 국모시해사건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금도로 귀양 갔으나 1899년(광무3)에 임금이 조서를 내려 방송(放送)하라 하여 풀려났다.
1904년(광무 8)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保安會)를 조직 그 부회장으로 배일운동에 앞장섰으며 1905년에는 보안회장(保安會長)으로서 일본공사(公使)를 만나 일본의 우리나라 황무지 개간권을 직접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유인은 1905년 '공진회'의 숙청대상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탄핵, 유배, 구속을 거듭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일본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 후 낙향했으며 일본을 배척하고 유교를 진흥할 것을 주장한 시무 15조를 올리기도 하였고 항일운동으로 왜경을 피해 다니다가 1907년 김해에서 잡혀 그 날 밀양까지 압송되다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이와 같이 그의 개인적인 영욕 이면에는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자주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 하였다.
2) 이유인은 왜 금당실에 자리 잡았을까?
금당실의 옛 전경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고 옛부터 인재가 유독 많이 배출 되는 ‘금당실과 맛질’을 아울려 반서울이란 이야기를 자랑삼아 많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금당실과 맛질’을 왜 반서울이라고 부르는지 유래를 명확하게 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 나름대로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해 오는 ‘금당실 맛질 반서울’의 유래를 조동윤 용문면장이 운영하고 있는 용문면 홈페이지에 다섯 가지로 잘 정리해 놓은 것을 여기에 옮겨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명풍 남사고(名風南師古 : 李滉 弟子)가 말하기를, “ 이 마을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음이 아쉽다.” 라고 하여 그 뒤부터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2) 조선 말엽 금당실(金塘室) 99칸 집 주인 양주대감 이유인(楊州大監 李裕寅)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경상감사, 법부대신, 한성판윤 등의 벼슬을 역임한 세도가였다. 그는 맛질에 살고 있는 처사(處士) 권경하(權經夏)의 집에 자주 놀러 가는데, 그 행렬이 한양의 왕가행차(王駕行次)와 흡사하고, 또 맛질에 와서 자주 교유(交遊)한다고하여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嶺南의 傳說) 또한, 법부대신(法部大臣)으로 예천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 2006. 3.28지정) 있을 때 서울 나들이 행렬이 컸다고 한다.
3) 18세기에 높은 벼슬에 올라서 국왕을 보필하고 국사(國事)를 보살 핀 이 곳 출신이 많아 반조정(半朝廷)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졌다고 한다.
4) 조선 초기 이성계(李成桂, 太祖)가 용문 (龍門)을 도읍으로 정하기 위하여 그의 신하 권중화(權仲和, 柳川面 星坪里 出身)에게 닭을 한 마리 주면서, “이 닭이 울기 전에 용문에 도착하면 도읍을 정하겠노라.”라고 했는데, 닭이 이 고개를 넘어서면서 울었기 때문에 여기를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고 전하여 온다.
5) ‘맛질’이란 작은 맛질에 우거(寓居)한 권의가 맏아들이어서 맏길(맛질)이라고 했으며, 또 마을 근처의 산과 들에서 마(薯, 고구마科 屬하는 山藥)가 많이 나서 ‘마를 캐는 길목’이라고 맛질이 되었다고 한다. ‘반서울’이란 권의의 아들 7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높이 되어서이다.
금당실은 조선중기 역학, 풍수 천문, 복서(卜筮) 능했던 남사고(南師古)가 꼽은 십승지지(十勝地地) 가운데 한곳으로 외부와 차단되고 시냇물 사이로 넓은 평가로 이루어져 평소에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만 난리가 나면 선동골, 허릿골 등으로 쉽게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길지이다.
그러면 경남 김해 출신으로 한양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민비)의 총애를 받아 일세 세력을 떨치던 이유인은 왜 연고도 없는 예천의 금당실에 자리를 잡고 아흔 아홉 칸의 저택과 옥소정(玉蘇亭)을 지었는가?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주승택 교수는 예천 금당실ㆍ맛질마을 정감록이 꼽은 길지에서 보면 고종과 명성왕후의 심복으로 벼락출세를 하던 이유인은 당세 정세로 보아 고종이나 명성황후의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일설에는 신변이 위태로울 때 황제와 왕후의 피난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유인이 금당실에 궁궐에 가까운 저택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저한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 금당실 마을에 거주하는 제보자 박춘수에 의하면 이양주 대감은 김해 사람으로 서울서 관직을 하였는데 일본과 노소아(러시아)와 전쟁이 나면 십승지지(十勝地地 )인 이곳으로 조정이 피신하기 위하여 아혼 아홉칸을 지었다고 제보했다.
필자의 미진한 소견이나 이 같은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유인은 점술가의 한사람으로 황제와 황후의 피난처로 삼기 위하여 병화불입지지( 兵火不入之地)의 명당으로 이름난 금당실 마을에서 제2의 궁궐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3) 구전으로 들려오는 이유인의 평가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린 이유인에 대한 설화가 다섯 편 있는데, 예천읍에 거주하는 신성균이 제보한 “이양주 대감과 아흔 아홉칸에서”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양주대감은 집을 지을 때 마을마다 배당을 돌려 오십리가 넘는 갈밭골에서 목재를 줄로 묶어서 옮겨왔으며, 집을 짓는 책임자는 양주대감인 이유인의 권력을 믿고 품삯을 주지 않고 강제로 부역을 시켜 지방민들로부터 원성이 많았다고 진술 하였다.
용문면에 거주하는 박춘수의 제보에 의하면 김해 사람 이유인이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나면 이름난 십승지지 금당실에 정부를 옮기기 위해 큰 기와집을 지었으며 나무를 육로로 옮기는데 주민들의 노역이 참으로 많았다고 제보하였다.
또한 용문면에 거주하는 한국동이 제보한 “이양주대감의 항일 행적과 구십 아홉 칸 집”에서를 정리하면 법부대신으로 있던 이유인이 고종황제를 압박한 친일파 박영효을 제거하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금당실로 쫓겨 내려 왔으며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고초를 받는 것 보다 자살을 선택했다고 진술했다.
용문면 거주하는 정홍진씨가 제보한 “옥새를 찾아주고 양주목사가 된 이유인”을 정리 해보면 젊어서 재주가 있는 이유인이 점을 배웠는데, 고종황제 때 점을 쳐서 옥새를 찾아 주고 양주목사와 법부대신이 되어 권력을 얻었으며, 조상보다는 자신을 시조로 글도 모르는 무식한 동생을 김해 군수로 손자는 별정군(別軍職), 조카는 춘양군수의 자리를 주고 다른 주위 사람들은 전혀 돌봐 준적이 없어 주위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다고 제보했다.
용문면 김부식이 제보한 “점술로 법부대신이 된 이유인과 마을사람들”의 내용을 보면 점을 잘 쳐서 양주대감이 된 이유인이 금당실에 내려와 양반인 박씨 등과 혼인을 지내며 양반촌인 금당실을 제외한 이웃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부역을 시켰다고 진술했다. 또한 동네 명의의 산을 호세(戶稅) 삼년을 면해주고 빼앗아 가듯 가져갔다고 진술했다.
상기 한국구전설화에 담긴 다섯 편의 구전설화 내용을 정리해 볼 때 이유인은 진령군의 추천을 받고 고종과 명성황후(민비)의 후광으로 요직에 올라 대한제국의 국호와 연호(광무)를 제정하고 법부대신 시절 대법원의 전신격인 고등재판소를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대한보안회를 만들고 당당히 자주 국권을 위해 일본과 맞선 항일 운동가였지만 입신출세 과정과 재산형성 과정에 수많은 의혹과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힘없는 지역 주민들을 강제 동원시킴으로 많은 지탄을 받은 것으로 드려났다.
3. 맺음말
이유인이 주민들을 태질하던 탯돌 이유인은 경남 김해 사람으로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던 무술인 진령군의 도움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다 그는 고종의 측근이자 반일 주의자였는데,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면 1888년(고종 25) 파주목사(坡州牧使)로서 전무위원(電務委員)이 되어 기해전선(畿海電線)을 연로(沿路)에 가설하는 데 공헌하였다. 1894년 함경남도 관찰사, 1896년 중추원 일등의관이 되었다. 1897년(광무 1) 덕수궁을 수리했으며 뮈텔 주교(主敎)를 왕에게 소개하여 국호(國號: 대한제국)·연호(年號: 광무)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으나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을 규탄하여 한때 유배되었다. 그 후 경무사(警務使)가 되고 1904년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배일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 이듬해 석방되었다.
또한 이유인은 예천에 내려와서도 금당실 숲을 보전하였던 화려한 공적 이면에는 경자향약(庚子鄕約)을 실시하여 향권(鄕權) 장악을 시도하기도 하고 자신 가족들의 입신과 재산형성 과정에서의 좋지 못한 의혹과 자신의 영욕을 채우기 위해 아흔 아홉 칸의 큰 저택을 지으며 힘없는 지역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수많은 원성과 태질 하는 그 소리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들려오는 듯하다.
첫댓글 박근노 회원이 예천문학에 게재한 글을 전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