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 생애 10 / 대산종사, 종법사 위에 오르다
당시 원광대학교 교정에서 정산종사 교회 전체장 발인식이 진행됐다.
정산종법사 열반하다
정산종법사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하였으나 효험을 못 보고 총부로 돌아왔다.
원기47년 1월 22일, 정산종법사가
"누가 한번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설명해 보라" 하자
시자의 청을 받은 대산종사가
'동원도리 동기연계 동척사업'의 삼동윤리를 설명하며
"이는 곧 대종사의 일원대도에 근거한 대 세계주의로써
스승께서 말씀하신 천하의 윤리요 만고의 윤리가 되나이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정산종법사는 "그 말이 옳다"고 했다.
정산종법사는 원기47년 1월24일, 법랍45년, 종법사 재임 19년, 63세로 열반했다.
대종사와 정산종사 유업 계승하다
대산종사는 정산종법사의 발인식을 마치고
'신도안을 개척하라'던 정산종법사의 유촉을 받들기 위해 계룡산 신도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원기47년 1월31일, 〈원불교 교헌〉에 의한 종법사 선거에서
신도안에 머물던 대산종사가 신임 종법사에 당선됐다.
정광훈이 신도안으로 찾아가서 종법사 당선자인 대산종사를 총부로 모셔왔다.
총부에서는 새 종법사보다 나이가 많은 원로들이 많이 있었다.
40대의 젊은 새 종법사가 총부에 오자 대중들은 새 종법사를 어떻게 예우해야할 지 어리둥절했다.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에 대해 오랫동안 절대적인 신성을 바쳐온 대중들이었기 때문에
새 종법사에 대해서 생소한 점이 많았다.
새 종법사 보다 나이가 18세나 많은 이완철 종사가
남 먼저 앞으로 나아가 대중들 앞에서
"대산종법사와 같은 어른이 없었다면 법통을 누가 받을 것인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우리 교단의 큰 복이다.
새 종법사를 잘 받들어서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뜻을 더욱 잘 실천하자"고
오체투지로 절을 올리자 대중들도 이완철 종사를 따라 오체투지로 절을 올리고
받들 것을 다짐했다.
원기47년 2월23일, 종법사 취임식이 총부 대각전에서 거행됐다.
대산종법사는 취임식에서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의 유업을 계승하자'고 호소했다.
수위단원 일동이 대산종법사 추대식을 한 후 중앙총부 대각전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신도안으로 다시 가다
대산종법사는 취임식을 마치고
계룡산 신도안으로 다시 들어가 신도안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원기52년에 소태산대종사의 일원대도에 바탕하여
정산종사 삼동윤리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삼동수양원'을 설립했다.
삼동수양원에는 숙소가 부족했다.
대산 종법사가 원장 이병은에게 "저기 변소 간에 방을 들이라. 내가 거기 있겠다"고 했다.
이병은은 시키는 대로 엄동 추위도 아랑곳 않고
찬물에 맨발로 흙을 이겨 변소를 고쳐 방으로 만들었다.
방에 불이 잘 안 들어가 고치기를 수차 거듭하는 것을 보고
대산종법사는 "동산(이병은)은 구정선사보다 더 큰 신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대산종법사가 신도안의 옹색한 오두막집에 계속 주석했으나
총부에서는 예산이 부족하여 조실 시봉비를 제대로 책정하지도 못했다.
대산종법사는 종법사위에 오른 후 20여년간
주로 신도안 오두막에서 돌밭을 일구며 돌담을 쌓는 간고함 속에
재가 출가교도들을 접견하고 훈련하며 삼동원 개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원기68년에 신도안이 종합 군부시설 건설의 정부시책에 따라
신도안 일대의 종교단체나 주민들이 모두 철수하게 됐다.
그리하여 삼동원을 논산시 벌곡 천호산으로 옮겨 훈련도량으로 다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