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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강해(10)
다시오신 예수님
본문 : 요한계시록 21:1~8절
사도신경은 성자 하나님께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함으로써, 다시 오시는 성자 하나님은 처음 오실 때와는 달리 온 인류를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오실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리로서”온다고 했는데, 여기서 “저리로서”라는 말은 저쪽으로부터 곧,
“하나님의 우편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으로 오신다는 소식은 신약성경 안에만 해도 300번 이상 나올 정도로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 많은 구절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구절 한 곳만 인용해 보면 막14: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1. 인류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고백문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역사관을 담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대 희랍 사상에서 시작된 나선형적 역사관 또는 순환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히브리사상에서 유래한 직선적 역사관입니다.
나선형적 역사관 또는 순환사관에 의하면,
역사란 시작도 끝도 없이 동일한 패턴이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이 역사관에서는 역사의 과정을 자연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똑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계 안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끊임없이 매년 반복됩니다.
이 패턴 안에서 봄이되면 온 천지에 생명이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활짝 폈다가 가을이 되면 힘이 다해 시들해지고,
겨울이 되면 죽어버립니다.
이런 현상이 이듬해가 되면 똑같이 반복됩니다.
이 처럼 인류역사안에 등장하는 국가나 문명도 처음에는 미약한 모습으로 시작했다가 전성기를 누린 뒤에는 힘이 다해 쇠퇴의 길을 걷고 마침내는 멸망당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 국가가 문명이 멸망하면
또 새로운 국가나 문명이 시작되어 똑 같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밟아갑니다.
이같은 현상이 춘하추동이 순환하듯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반복됩니다.
이렇게 똑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모습이 마치 나사의 골이 똑같은 간격으로 돌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나선형적 역사관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같은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고 해서 순환 사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역사관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현대의 역사가들이 슈펭글러와 토인비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사상에서 기원한 직선설 역사관에서는 역사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보고,
역사는 시작한 뒤에 종말을 향해서 발전해 나간다고 해석합니다.
이같은 역사관이 형성된 사상적 근거가 바로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주 뚜렷하게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역사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시작이 있는 역사는 또한 끝나는 종말의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바로 역사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시작으로부터 종말까지의 기간은 역사가 발전되어 가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고백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고백함으로써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기독교인의 역사관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나선형 사관 또는 순환사관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일한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순환과 윤희가 아니라 창조에서 시작되어 발전되어 가다가 예수님이 계림에 이르러서 끝이 나는 역사입니다.
2.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온 인류의 모든 역사와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이처럼 사도신경의 고백문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역사의 종말에 관한 고백에는 중요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심으로써 역사가 끝이 나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사도신경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1) 그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표현은 인류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 재림시에 살아있을 자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죽은 모든 자들도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은 종말의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되는 인류의 역사의 순간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편에 않으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살펴보왔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진리는 역사 안에서는 예수님의 왕권이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를 통하여 행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통치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법을 거스리면서 사탄의 나라의 법을 따르는 자들이 눈에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도 아울러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통하여 나타나는 예수님의 통치에 상반되고 때로는 대립되는 악의 통치, 사탄의 통치, 불의의 통치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숨기워져 있다는 말은 이악의 통치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보다 더 무섭고 강력하고 편만한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불의와 폭력이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의와 폭력에 대하여 역사 안에서 충분한 처벌이나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역사는 그냥 흘러갔습니다.
수많은 서민들이 잔인한 전쟁 때문에 살해당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마음속에는 한이 맺혔지만, 이 모든 일들이 역사 안에서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충분한 보상도 위로로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리고 만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한 600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역사안에서 보상을 받았습니까?
이들이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까?
전쟁후에 일부 독일인들이 이들의 묘지를 방문해서 눈물을 훌리고 참회하는 것으로 이들의 빼앗긴 세월과 짓밟힌 생애가 보상이 되겠습니까?
스탈린 치하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한 2000만명의 무고한 생명이 보상을 받았습니까?
과연 이들의 희생과 한이 보상이 가능하고 위로가 가능하겠습니까?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가혹한 김일성 독재정권의 통치하에서 죽임당한 우리 동포들, 인권도, 복음을 들을 기회도, 유복한 경제생활도 다 빼앗긴 채 반세기를 살다가 주어가야 했던 불쌍한 북한의 동포들, 이로 인하여 이산가족의한을 품고 오직 남과 북의 혈육을 만나보기를 평생소원으로 삼고 살아오다가 결국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죽어간 많은 우리 국민들, 이들의 가슴에 맺힌 한이 어디서 보상과 위로를 받았습니까?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이런 피맺힌 한들이 얼마나 많이 그대로 묻혀 버리고 세인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진 바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는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역사 안에 이토록 불의한 사건들이 활개를 칠 수 있으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한을 안고 아무런 위로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죽어야만 하는가?”
시편 기자는 이처럼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오히려 이들을 괴롭힌 악인들은 버젓이 잘 살고 부와 명예를 축적하며 형통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하마터면 큰 시험에 들어서 실족할 뻔 했다고 토로합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73:2,3).
이른바 신정론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600만명을 무고하게 죽이고도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600만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람도 대충 봐주고 눈감아 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겠습니까?
그러므로 600만명을 무고하게 살해한 살인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하나님! 왜 저 사람을 공정하게 판단해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하는 것은 정당한 항의인 것이요, 이 항의에 답변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신뢰할 만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뢰할 만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추상과 같은 정의를 집행하심으로써 무고한 자를 보호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역사안에서 일어난
이 모든 불의의 세력에 대하여 어떻게 자신의 공의를 행사하실까요?
그 대답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 “산 자와 죽은 자가 모두”
곧, 모든 인류의 역사와 그 역사 안에서 행한 모든 인류의 행동들이 정밀하게 검사받고 판단받고 거기에 상응하는 형벌과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굵직 굵직한 큰 사건들뿐만 하니라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 있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소자 한 사람에게 한 극히 작은 선행과 악행까지도 면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검토되고 평가되고 감사받고 거기서 상응하는 상벌이 주어질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불의가 횡행하고 방자하게 그 손을 펼칠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져버리고 죽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공의의 엄정한 집행을 잠시 미루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정 공의의 집행을 미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데,
곧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면 역사안에서 보류되었던 모든 악과 불의와 폭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조금도 치우치지 않는 엄정한 심판이 시행될 것이며, 역사안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에 잠시 보류되었던 하나님의 정의가 남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성도들에게는 한없는 위로의 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안에서 행해진 모든 불의에 대하여 심판을 가하시며,
모든 인간들의 행위를 철저하게 감사하는 재림의 때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한없는 위로와 기쁨이 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되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나 모두 부활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부활하는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무로 돌아가 버리거나 멸절되어 버린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사도행전 24:15절을 보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의인도 살고 악인도 살아납니다.
그런데 차이는 의인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부끄러움에 떨어집니다.
요5:29절과 다니엘12:2절에 이 가르침이 나타나 있습니다.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본격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날이 될 것이며,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되어서 그 나라 안에 마련된 모든 축복에 참여하는 은혜를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나라는 온갖 보석으로 단장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 모든 백성들이 목마를 때마다 마실 수 있는 곳이며,
모든 질고와 슬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흘리는 모든 성도들의 눈물을
하나님이 친히 씻겨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아픔도 저주도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참 빛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해와 달이 필요 없습니다.
이 같은 계시록의 묘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새 예루살렘의 풍경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마련하신 이 나라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이 나라에 가는 순간 우리는 이 나라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에 흠뻑 반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바로 이 나라에 있으며,
또 이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는 값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의지하여 참여한다.
그런데 성도들은 어떻게 이 나라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은 거듭거듭 이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값없이” 참여하는 것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22: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우리는 이 나라에 값없이 참여합니다.
왜 값없이 이나라에 참여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값을 대신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모든 인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믿고 영접한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는 심판을 통과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애를 기록한 필름이 하나님 앞에 있는 스크린에 상영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기 어려운 부끄러운 죄악들이 그 스크린에 속속 드러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워서 자진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는 대열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낄 때,
바로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흠없는 의의 옷이 우리의 발걸음을 막아주고 필름이 다 돌아갈 때까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고 마침내는 우리를 감싸고 있던 예수님의 완전하고 흠없는 의의 옷을 보시고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단하시고 우리를 그 나라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5. 재림의 날은 갑자기 에기치 않은 때에 오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에 임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랜 시간간격을 두고 천천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동에서 서까지 번게가 번득이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마24:27절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예수님께서 재림과 동시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새 하늘과 새 땅도 하늘로부터 네려 올 것입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1000년이 지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듯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언제 올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오시는 예수님 자신도 이 날이 언제 오는지 모릅니다.
이 날이 언제인가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아시는 지식입니다.
마24:36절에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와 같이 재림의 때는 오기는 오는데 그 오는 날짜는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좋은 재림의 때의 준비는 “항상 깨어 있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보초를 설 때 가장 보초를 잘 서는 방법은 언제 적이 침투해 올 것인가, 언제 순찰조가 올 것인가를 미리 계산해서 그 시간만 정신차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적과 순찰조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무시간 내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기본태도입니다.
막13:35~37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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