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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는 말은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는 여로보암2세(B.C. 793-753) 때
쓰러져가는 이스라엘왕국이 부흥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아(왕하 14:25)
주전 약 780년대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엘리야 선지자의 뒤를 이은 엘리사에 의해
바알숭배가 철폐된 후였습니다.
그리고 아람 왕 하사엘에 의해
아합 왕가가 무너졌고,
마침내 예후에 의해 이세벨과 모든 바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이후였습니다.
이처럼 바알숭배가 철폐되고
아람의 침략이 무디어지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부흥을 하게 됩니다.
특히 니느웨에 수도를 둔 앗수르가 부강해지면서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아람왕 하사엘을 죽이고,
호시탐탐 아람을 공략하고자 하므로
아람은 이스라엘을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침공 보다는
앗수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새롭게 이스라엘 왕으로 등장한 여로보암 2세는
부국강병책을 써서 다메섹을 공격하고
많은 영토를 확장하기에 이르릅니다.
이때가 북 이스라엘왕국이 가장 부강했던 시기입니다.
1. 요나의 불순종에 대하여
이 무렵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죄악이 관영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나 선지자의 이러한 반응을 이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가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1:3), 멀리 도망가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번 기회에 니느웨가 완전히 멸망함으로써
다시는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보기에는 아람의 벤하닷 보다는
니느웨가 훨씬 강하여서
이스라엘을 침공한다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스로 도망간 것이라기 보다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되기를 바랬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곧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가 힘이 들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조국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요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선민의식의 발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
이방인들을 업신여기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자부심과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특권의식 때문에
이방인들과 상종하기를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이방 니느웨에 대하여 그처럼 무관심했고,
심지어는 은근히 멸망을 기대한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 교만을 표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스올의 경험이 주는 의미
이처럼 이방 구원에 대해 무관심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서 큰 폭풍을 만나
마침내 바다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회심하도록 하십니다.
요나는 회심의 기도를 통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사오니"(2:4)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흑암의 깊음에 빠져 죽게되었다고 말합니다(2:5).
그렇지만 요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2:6)고 하면서
온전히 자신이 변화되어 여호와만을 생각하고 의뢰한다고 고백합니다(2:7).
그러면서 끝으로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2:9)고 결단하면서
자신의 본연의 사명의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요나가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1)하나님께 버림을 받고(2:4),
2)죽음에 이르게 되며(2:5),
3)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요나를 살리셨고(2:6),
4)전혀 새롭게 변화되어(2:7),
5)마침내 사명을 완수하게됨(2:9)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라고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요나의 스올의 경험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가끔 요나의 표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하심을 보아서도
스올의 경험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전에 요나가 바다에 빠질 때의 상황을 잠시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가 심지에 뽑혀 바다에 던지우게 될 때까지만 해도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요나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던지워지게 되자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1:9)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하는 이 죽음이
어떤 경로로 이르게 되었는지 말할 때,
각국 사람들은 여호와를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바다에 던지워지자
풍랑이 멈춘 것을 보고
그들은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1:16)하게 됩니다.
곧 요나의 죽음을 통해
이방에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죽음에서 나와 니느웨에 이르러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고 하자
니느웨는 즉각 회개하고
여호와께 부르짖게 됩니다(3:8-9).
그러자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한 뜻을 돌이키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3: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요나의 죽음과
하나님의 이방에 대한 구원을 베푸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요나의 죽음을 통해
이방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죽음 후의 요나의 회심을 통하여
이방이 구원에 이르게 됨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요나의 죽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댓가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증표가 됩니다.
그런 후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살리시어 구원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선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고 한 것 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인류를 구원하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굳이 요나의 표적을 비추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심에는 이러한 의도가 담겨있었습니다.
곧 자신이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때문이요,
자신이 살아난 이후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서
요나의 스올의 경험이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가 됩니다.
결국 요나는 스올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민의식이 철저히 깨어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1)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나라이며,
2)이방에 하나님을 나타내며 이방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적 사명을 위해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출 19:4-6 참조).
그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표가 되어
이방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단코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준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패한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remnant)를 남기시어
새로운 이스라엘로 삼으시겠다고
엘리야를 통해 밝혀 주셨습니다(왕상19:18).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요나의 스올의 경험을 통하여
전혀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실 것을 밝혀주십니다(요나서의 의미).
곧 요나가 죽음에 내려갔다가
다시 살아난 후
이방에 하나님을 선포하였던 것 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순종한 댓가로
철저하게 심판을 받아 죽었다가
새로운 존재로 드러나야 할 것을
요나서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1)요나가 바다의 폭풍에 빠짐 = 이스라엘이 정치적 혼돈에 빠져 멸망함,
2)요나의 회심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봄,
3)하나님이 요나를 살리심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
4)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선포함 = 이스라엘이 이방에게 복음을 전함의 관계를 지을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의 회복(새로운 존재)이 갖는 의미
이스라엘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이 말한 것 처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철저한 심판을 받아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써
이전에 가졌던 자신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을 버리고,
우주를 향한 우주적인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회복을 받게 되는 것은
단순히 선민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남들보다
더 많이 받는 특권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계획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스라엘을 끝까지 회복하시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끝까지 성취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실한 약속의 성취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참으로 은혜로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나 선지자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심판을 받을 것과,
마침내 회복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깊이 관심을 갖고 있음에 대하여 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후의 궁극적인 성취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방법으로 심판이 예언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가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에 대하여
호세아는 광야에서 새로운 세대로 이스라엘이 등장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사야는 새로운 출애굽으로,
예레미야는 새로운 존재로 등장해야 함을 예언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지서들이
이방의 구원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선지서의 종합적 의미
이상을 종합해 보면,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실 것을 보여주셨고,
요나를 통해 죽음을 지난 새로운 탄생의 이스라엘이
이방 구원의 원동력이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후 모든 선지서들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가 새로운 존재로 바뀌고
이방의 구원을 완성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요나의 메시시지는
앞으로 올 모든 선지서들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전 우주적인 광대한 구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계획은
마침내 요나의 표적과 함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이후부터는
이방인이라는 개념 조차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예언한 선지자가 곧 예레미야 선지자였습니다(렘 3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