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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진모> 강연 원고, 2012년 6월 14일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여성 -
최종고(崔鍾庫)
(서울법대 교수, 한국인물전기학회장)
Ⅰ. 머리말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아직도 많이 미흡하다고 할 수도 있다. 원래 한 나라의 건국에 대하여는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어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을 감안하고라도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새삼 요청되는 이유는 해방 후 어떤 국내외 사정 속에서 남한만의 지역에 자유민주주의의 공화국이 건국되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 발표는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해보려 한다. 우선 대한민국의 건국은 유엔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보려는 입장이다. 그리고 유엔조선위원단이 파견되고 그 의장이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건국과 한국전쟁에 인도의 역할이 상당히 컸고, 인도가 미소냉전 체제 속에서도 비동맹 중립노선을 택하였기 때문에 그런 시각에서 다소 신선하게 한국현대사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인도인 의장 메논(K.P.S. Menon) 박사라는 인물이 한국과 유엔에서 그린 역학관계를 자세히 추적하여 의미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또한 메논이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 같은 지도자들과 공식적으로 접촉하면서 건국방향을 모색하는 가운데 모윤숙이라는 여성시인을 만나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건국방향에 중요한 함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해석으로 통한다. 이런 주제를 되도록 당시의 자료들을 살려 생생하고 바른 모습으로 복원해보고자 한다. 이제는 가십이나 에피소드가 아니라 정식으로 역사서술에 올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Ⅱ.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1. 메논은 누구인가?
지금까지 한국인들에게 메논의 자세한 이력은 알려지지 않아 왔다. 인도에는 메논이란 이름이 많고 국내외적으로 활동한 메논 씨들도 여럿 있어 헷갈리게 한다. 특히 인도 외교관으로 유엔에서 활동하다 국방장관을 지낸 크리슈나 메논(Vengalil Krishna Menon, 1896- 1974)은 우리의 주인공과 매우 흡사한 경력의 인물이라 흔히 혼동하게 한다. 우리의 주인공 메논은 다행히 자서전을 써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상카라 메논(Kumara Padmanabha Sivasankara Menon, 1898-1982)으로 이름이 길어서 인도에서도 일반적으로 K.P.S. 메논(KPS Menon)이라 불린다.
1) 출생과 학력
K.P.S. 메논은 1898년 인도의 남부 코타얌(Kottayam)이란 도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거쳐 마드라스(Madras)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후일 부인이 된 아누지(Anujee)여사를 만났는데, 그녀는 국회의장을 지낸 나이르(B.N.Nair)의 딸로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이 사실은 후에 말하는 모윤숙여사와의 관계에 중요한 대목이 될 수 있다. 메논은 후일 장인 나이르의 전기까지 써서 출간하였고, 대단히 애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에 마드라스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그 때 타고르(R. Tagore)가 옥스퍼드를 방문하였는데, 메논은 자서전에 “위대한 시인, 애국자,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옥스포드 동창으로 환영하였다”고 적고 있다. 메논은 영국에서 고급문화와 학문의 높은 교양을 닦아 평생 그것을 애호하고 그런 정신으로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2) 중국주재 인도대사
조국에 돌아왔다가 1943년에 중국으로 총영사 책임을 맡아 부임하게 된 것이 외교관으로서의 출발이었다. 그는 그해 9월 17일 부인과 딸을 데리고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10월 10일 신임장을 제출하였는데, 그것은 공화국 32주년 기념일이면서 장개석이 총통으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그후 손문과 송미령 여사 등 정치인들은 물론 학자들과 지식인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는 “나는 중국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고 적었고, 손문의 3민주의를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짬뽕이라고 적었다. 주은래를 ‘매력인’(the charmer)이라 불렀다.
인도에 돌아왔다가 다시 1944년 8월 16일 두 번째로 중국에 대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낙타를 타고 히말라야와 실크로드를 넘어 125일간 몸소 탐험여행을 하였다. 그것을 적어 <델리에서 중경까지>(Dehli-Chungking)란 책으로 출간하였다.
중국에서 메논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인도대표로 위촉을 받았다. 장개석 총통에게 작별인사를 갔는데, 장총통은 공산주의의 위협이 중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얼마나 심각한지를 설명했다.
1947년 말에 일본을 방문하여 맥아더 사령관의 저택에 초청받아 점심을 함께 하였다. 메논은 자서전에 “나는 신념의 인간을 보았다”고 적었다. 재벌을 해체하고, 국가종교인 신도(神道)를 부정하고, 심지어 천황을 한 인간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메논은 일본에서 바로 1948년 1월 8일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일본인의 맥아더 사령관에 대한 태도와 한국인의 하지 장군에 대한 태도는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일본에서는 연합군에 대해 절대복종이었는데, 한국인은 미군정에 대해 끊임없이 항거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지 골리기(Hodge-baiting)가 무슨 장난취미같이 보였다. 이것이 일본인의 맥아더숭배보다 더 민주주의를 위하여 건강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고 메논은 자서전에 적었다.
3)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회의 두 메논
1945년 4월부터 6월 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회의(San Francisco Conference)에 인도 대표단 고문(Chief-Adviser)으로 참석하였다. 50개국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국제연합(UN)이 탄생된다. 같은 이름의 크리슈나 메논도 참석하여 장장 8시간의 웅변을 하여 유엔 역사상 최장 연설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네루와 두 메논, 이 세 인도 지도자들은 서구 민주주의에 가치를 두면서도 ‘자본주의의 악덕’을 비난하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동경하면서 비동맹의 독자적 외교노선을 추구해 나갔다. 1940년대말 서방진영과 공산진영의 어느 한쪽과 연합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 불거졌을 때 네루는 “왜 우리는 꼭 어느 한 쪽에 서야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태도는 약소국인 한국의 입장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인도만의 여유요 뱃장, 아니면 한풀이라 하겠다.
4) 유엔 조선위원단 의장
K.P.S. 메논은 1948년 1월 8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3월 19일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까지 10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의 한국체류가 그가 원하던 대로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지는 못하였지만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간디와 타골을 숭배하며 “우리 유엔한국위원단은 이 등불을 다시 켜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바람은 우리에게 너무 강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지치고 아쉬운 마음으로, 특히 김구가 자기를 원망하는 모습을 보고 떠나 고별사에서 해명을 해야했다. 그러나 모윤숙이라는 여류시인을 만나 인간적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런 기억은 만년까지 남아있었다. 뉴델리에서 발간하는 신문 <Statesman> 1950년 8월 15일자에 <한국에서의 추억들>(Memories of Korea)이란 글을 전면에 실었다. 여기에는 사진 석장이 실렸는데, 첫째 사진은 김활란, 모윤숙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 둘째는 유엔총회에서 한국안을 통과시키는 모습, 셋째는 이승만이 “한국의 진정한 친구 메논박사에게”(To Dr. Menon, the friend of Korea)라고 사인하여 선사한 우남 자신의 사진이다.
5) 인도 외무부장관
K.P.S. 메논은 1948년 3월에 인도 외무장관으로 뉴델리에 돌아와 활동하였다. 자연히 수상 네루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메논은 캐임브리지대학 출신의 네루를 ‘인도정치의 햄릿’이라 부르며, 많은 문제에 박식한 견해와 늘 공부하는 모습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분단의 비극을 체험한 네루는 17년간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세속주의, 국가통합,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처음 7년간은 빛났지만 점점 그의 계획경제는 실패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기에는 도약, 자기창조적 성장, 산업화가 없었다. 네루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자처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이윤추구의 체제를 협동적 봉사를 통해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더욱 고귀한 이상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맑스식 무산계급의 지배를 통하여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협동과 절제에 의해 이루는 것이라 보았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극단주의에 반대하고 이성에 호소하는 네루는 분명히 동서냉전의 대립구조 속에서 신선한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빛을 바래기 시작했고 슬프고 초라하게 보였다. 이승만과 직접 교섭은 없었으나 서로 어떤 노선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인물이 1960년을 고비로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공통점이다. 어쨌든 메논은 이런 네루 수상의 정치에 외무장관으로 함께 하면서 한국과 이승만에 대한 이해와 결정에는 메논이 크게 작용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윤치영은 회고록에서 메논을 네루보다 더 큰 인물의 외교관이라 평하였다.
6) 소련주재 인도대사
4년 동안 장관직을 지내고 메논은 1952년 소련주재 인도대사로 갔다. 이번에도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타고 런던을 거쳐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스탈린 서기장과 수차 대담도 하면서 지냈는데, 1953년 3울 5일 스탈린이 급서하였다. 메논은 이러한 소련의 변화를 ‘한 시대의 종말’이라 부르며 잘 관찰하여 후일 <나르는 트로이카>(The Flying Troika)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대립을 외교현장에서 목도하면서 인도는 평화정착에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인도가 유엔한국위원회와 유엔 인도차이나위원회의 의장국이 된 것도 그러한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때 인도가 파병을 하지않고 의무병만 보내고 포로송환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모두 그런 정책의 표현이었다.
1955년 6월 네루 수상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메논은 러시아 전역을 동행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그해 11월에는 답방으로 후루시쵸프와 불가린이 인도를 방문하였다. 이처럼 9년이나 소련에 머물며 양국의 우호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1년 대사직을 떠날 때 메논은 모스코바대학교로부터 역사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지금도 메논이라 하면 인도에서는 '인도와 러시아 친선의 챔피언‘(Champion of Indo-Soviet Friendship)으로 알려져있다.
7) 은퇴 후 고향에서
모든 공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케랄라(Kerala)대학교 부총장이 되었다. 이제 시간을 내어 저술에 몰두하였다. <러시아 파노라마>(Russian Panorama, 1962), <나르는 트로이카>(The Flying Troika, 1963)를 출간하고, 자서전 <많은 세계들>(Many Worlds)을 저술하였다. 많은 대학들에서 강연요청이 줄이었다. 자서전은 1965년에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1979년에 증보하여 제2부에 몇 편의 여행기와 교우록을 실었다.
1979년 5월 1일 메이 데이에는 레닌국제평화상(International Lenin Peace Prize)을 받았다. 1981년에 메논은 다시 자서전에 에필로그를 붙여 <많은 세계 수정판>(Many Worlds Revisited)이라 개명하여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남아프리카의 한 시인의 시도 인용되고, 독일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도 언급된다. 세게가 데탕트의 시대로 들어간다 하는데, 여전히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미국만 원자탄을 가져 전보다 위협을 더 느끼고 있다고 적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시구를 적고 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리 있을 수 있을까?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그리고 나서 1년 후 1982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먼저 타계하였고, 아들도 아버지처럼 중국대사와 외무장관으로 활약하다 타계하였다. 손자 시바상카르 메논(Shivashankar Menon)은 1949년생으로 작년까지 외무장관을 하다 지금은 싱(M. Singh) 총리의 외교안보 특별고문을 하고 있다.
이처럼 메논은 대단히 지성적인 외교관이었기에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인도의 습관인지 일목요연한 총 논저목록이 없어 얼마인지 정확히는 모르나 15종정도 되는 것 같다.
2. 이승만과 메논
메논박사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가장 생생하게 담고 있는 자료가 남아있어 천만다행인데, 그것은 그의 연설들을 모윤숙여사가 모아서 영어 원문과 함께 정인섭 외국어 대학교 교수의 번역으로 편집한 <메논박사연설집>(문화당, 1948)이다. 현재 국회도서관에 유일하게 한 권 소장되어있다. 사료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이번에 낸 졸저에 모두 실었다. 이 책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메논박사의 연설집을 출판함에 즈음하여>라는 서문도 실려 있다. 대통령으로서 남의 책에 서문을 써준 예는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메논박사의 연설집을 출판함에 있어서 매우 흥미를 가지고 계신 모윤숙여사 및 인사들의 요청을 받아 서문으로 써 몇 마디 말씀하는 것을 충심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한인으로서 이러한 연설집을 출판하는 것은 시의에 적합한 일입니다. 그것은 한인들이 생생한 민족문제에 있어서 메논박사의 취하신 태도에 만강의 감사를 올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왜인들의 반세기간의 선전의 영향으로 외국인들이 한인들의 독립에 관한 포부, 결심 그리고 자격 등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메논박사야말로 그의 예리한 관찰과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한국문제의 궁극의 전반적 해결의 제일보로서 한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와 또 가능지역 및 가능시기에 있어서 민주적 독립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변설하였던 것입니다. 한인들은 장차 몇대에 걸쳐 자유의 길과 공산주의에 대하여 민주주의 원칙을 소개하신 그의 기념할만한 업적을 높이 평가할 것이며 또 상기할 것입니다. 메논박사는 유명한 지도자 고 마하트마 간디 옹의 위대한 가르침을 한국에 소개하였으며 또 현재 유명한 인도의 지도자 펜딛 네루씨에 의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UN위원단의 성공은 간혹 전부가 아닐지라도 모든 세계문제에 관한 정의와 진리의 종결적인 승리에 있어서 메논박사의 불후의 공적에 힘 입은 바 큰 것입니다.
1948년 5월 1일 이승만
이승만은 이렇게 메논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바로 알린 점, 한국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 가능한 지역 안에서의 민족적 독립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자진다는 점을 표명하였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하여 자유와 민주주의의 원칙을 소개하고, 간디의 가르침을 소개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엔위원단의 성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유엔조선위원단(UNCOK,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 일행은 1948년 1월 3일 뉴욕을 출발하여 7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일정이 하루 연기되어 일본 동경에서 일박하였다. 이곳에서 대기 중인 다른 대표들과 합동하여 8일 저녁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
S·H·잭슨(Jackson)(駐 동경 호주위원단 고문관)(호주) 장관
유어만(劉驭萬, Yu-Wan Liu)(駐 서울 중국총령사관 공사급)(중국)재서울중국총영사
쟝 폴-봉클(Jean Paul-Boncour)(전 루마니아주재 프랑스 공사)(프랑스) 대사급
멜치오 아란즈(Melccio Arranz)(전 필리핀 상의원 임시의장)(필리핀) 상원의원
재키 자비(Zeki Djabi)(의사정당지도자)(시리아) 의사
케이 피 에스 메논(KPS Menon)(주 중국 인도대사)(인도) 대사
미겔 발레(Miguel Angel Pena Valle)(엘살바도르) 법률가, 외교관
이상이 위원단의 각국 대표들이고, 실제로 사무를 볼 스탭진은 아래와 같았다.
사 무 총 장 호세택(胡世澤, Victor Chi-Tsae Hoo, 중국) 외교관
수 석 비 서 페트루스 J. 슈미트(Petrus Schmidt)(네덜란드)
수석비서보조관 아안 F.C.마이너(Ian F.C. Miner)(호주)
법 률 고 문 관 마크 슈라이버(Marc Schreiber)(벨기에)
행 정 관 로버트 S. 하우스너(Robert S. Hausner)(미국)
정 보 관 알베르 C·그랑(Albert C. Grand)(프랑스)
비 서 보 고 원 제스피스 F·엔저스(J.F. Engers)(네덜란드)
유초민(Tso-Min Yu)(중국)
그래함 J·루커스(Graham Lucas)(미국)
주홍리(Hung-Li Chu)(중국)
재 무 관 앨프렛 J·켓즈(Alfred F. Katz)(미국)
문 서 관 아더 M·곳테스맨(Arthur M. Gottesman)(폴란드)
통 역 해리 유(劉, Harry Liao)(중국)
니콜라스 위로우보프(Nicholas Wyrouboff)(프랑스)
번 역 관 죠르쥬 글로바(Georges Globa)(프랑스)
속 기 보 도 원 로랜드 헐(Rolland Hall)(미국)
페이버드 로즈(David Rose)(미국)
속 기 정 리 원 코린 M·켐벨(Colin M. Campbell)(영국)
안토니 E·바린스키(Anthony E. Balinski)(폴란드)
매리언 M·몬테규(Marion M. Montague)(미국)
매드렌느 엘라드(Magdeleine Allard)(캐나다)
비 서 콜렛트 코피(Collete Coppee)(벨기에)
크리스챤 R·화우레(Christiane Faure)(프랑스)
이타 B·글랜스((Ita F. Glance)(미국)
에미리엔 라갈릿세(Emilienne Lagalisse)(프랑스)
애리스반 R·스미스(Alice Van R. Smith)(미국)
죠세핀 스티렌(Josephine R. Stieren)(미국)
메논 일행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1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20만명이 운집하였다. 이승만은 환영사를 하였고, 메논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렬과는 달리 한국은 남북통일국가가 서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답사를 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메논은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한국인들이 독립에 집착한다면 그들은 또한 통일에도 집착하고 있었다. 한국민족의 동질성만큼 분명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같은 인종에 속하고, 같은 언어를 말하며, 같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한 저명한 한국인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최근까지 북한인니 남한이니 이북인이니 이남인이니 하는 말은 없었다고 하였다. 신의 섭리는 한국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했다. 북쪽은 남쪽없이 살 수 없고, 남쪽도 북쪽없이 살수 없었다. 남쪽은 농업적이고 북쪽은 산업적이었다. 남쪽은 아시아의 빵바구니이고 북쪽은 전력의 원천지였다. 남쪽은 쌀을 생산하고 복쪽은 철강, 석탄, 목재와 수력발전을 가졌다. 그래서 한국은 경제적, 정치적 혹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분단될 수 없는 나라이다. 남이건 북이건 모든 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1948년 1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 연설할 때 20만명의 한국인들이 나에게 보내준 열렬한 박수갈채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통일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고, “하나님이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정치적 생활은 한마디로 흥분되고 무질서했다. 400개에 가까운 정당들이 있었는데, 정치적 원리에 거의 차별도 없는 것들이었다. 정치적 지도자들 사이에도 어느 날은 동지이다가 다음날은 경쟁자나 원수가 되어 쓰라린 인격적 모함들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우에서 좌로 혹은 좌에서 우로 놀라운 경쾌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의 세 사람의 정치적 지도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었다. 그들은 모두 70대였고, 각각 조국을 위한 독특한 활동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는 극심한 개인적 반목들이 있었고, 내가 한국에서 떠난 직후 김구의 암살이 있었다. 김구는 청년시절에 몇가지 괄목할만한 일을 하였다. 한국의 마지막 황후를 살해한 일본인 쯔치다(土場) 대위를 맨손으로 도살한 사람이다. 1932년 샹하이의 한 공원에서 폭탈을 던졌는데 그 결과 일본인 사령관이 목숨을 잃고 일본인 제독이 한 눈을 잃고 일본인 장교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 김규식은 다른 타입이었다. 학자적이고 명상적이며 더없이 박학하여 좌익도 우익도 아니고, 한국의 독립만이 아니라 통일도 가치를 주는 중도파 그룹의 지도자였다.
삼각관계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그의 이름은 남한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숭배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혐오되었다. 그의 나이, 학력, 사회적 매력, 닐슨대통령과의 친분, 그리고 한국독립을 위하여 평생의 부단한 승리로 이승만은 네루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 같은 의미로 국민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네루는 문자 그대로 인도의 정치적 생활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렇지만 좌우익대립의 갑작스런 개입에 의해 이승만은 극단적 우익으로 전환되었다. 38선이 불길한 상징이었다. 외모로는 잰틀하면서 신념에선 경직된 이승만은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er)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처럼 '북극성처럼 확고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 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한 태도도 시저와 같았다. 그는 좌익과 자유주의자, 동반동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한푼(quarter)도 주지 아니하였다. 그들과 상대하기 위하여 그는 남한에서 일종의 경찰국가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북한에서 김일성이 반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취한 것과도 같았다. 남한에는 인신보호가 없었고, 영장없는 구속을 인정하는 일본법률이 연전히 적용되고 있었다. 많은 점에서 우리는 남한의 정부가 북한의 정부처럼 전체주의적(totalitaran)임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북한이건 남한이건 한국인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통일에 대한 내면감각에 호소하였다. 한때는 이것이 심지어 북한에서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는 듯 했다. 그래서 북한정부는 우리 위원단을 악용하여 ‘미국 달러의 매판자금’,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구성된 괴뢰들로 조선을 미국 식민지로 전락시킨다’, ‘조선같은 세계 약소국을 사기로 팔아먹으려한다’ 등의 표어를 사용하였다. 어떤 남한 지도자들도 다른 이유에서 우리를 악용하려고 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이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이상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들, 변이, 이데올로기적 충돌 속에서 한국의 한쪽 덩어리는 좌로 다른 덩어리는 우로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나눠진 이 연약한 통나무가 다시 한번 옛날처럼 우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어떤 중간코스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하였다.
위원단의 사무총장 호박사를 데리고 나는 뉴욕으로 날아가 유엔총회의 소위원회에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우리 위원단은 한결같이 남한에 수립된 분리정부는 하나의 국민정부(a National Government)라고 불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국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룬다는 것은 무용한 짓이었다. 그렇지만 협의적 목적을 위한 선거는 어느정도 좋을 수도 있었다. 나는 강대국들의 세력에 다음과 같은 말로 호소하였다.
만일 한국문제가 국지화(localize)되는 하나의 기준의 빛 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면, 즉 한국민 전체의 선을 위하여 해결될 수 있다면, 유엔은 삼천만 한국민에게서 영원한 교훈 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은자의 민족 한국인은 자신의 아무 잘못없이 국제세력의 놀이 터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강대국들은 해결책을 스스로 갖고 있으며 세계의 이목, 특히 세계인구의 절반 이상을 갖고 있는 아시아국가들과 위원단의 회원국의 눈앞에서 자신을 가지고 이 에피소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 국가들이 독립을 얻은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인도는 마지막이었으며, 인도인으로서 유엔위원단 의장으로서 나의 열렬한 희망은 되도록 빨리 또 하나의 주권적 아시아공화국 한국이 출현할 수 있도록 이 위원회가 하나의 해결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호소에 하나의 경고를 덧붙였다. 만일 한국의 통일이 회복되지 않고, 한국에 두 주권국가가 존재하게 된다면 두 정부는 충돌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결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나는 유엔에 경고하기를, “한국은 날아갈지도 모른다(Korea may blow up). 그리고 그것은 아시아세계에 대한 거대한 촉매의 시작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2년 후에 이 예언은 거의 현실로 나타났다.
한국의 분단을 향한 첫 번째 형식적 단계는 미국에 의해 취해졌다. 내가 보고서를 제출한 직후 그것은 남한에만 대한민국(Repulic of Korea)이라 불리는 단독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결의되었다. 그에 대한 즉각적 반응으로 북한에는 조선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orea)이 한반도 전체의 관할을 주장하면서 세워졌다. 미국정부는 유엔 회원국가들에게 상당한 압력을 행사했고, 그 결의는 압도적 다수에 의해 가결되었다. 반대한 나라는 카나다와 호주뿐이었다. 표결한 시간에 인도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인도는 위원단 안의 두 대영제국연방 동료(영국과 호주)와 결별하고 미국을 편들어주면서 그 결의에 찬성하였던 것이다.
이 인도의 표변(volte-face), 그것도 남한에 주권국가를 세우려는 제의를 부정(deprecate)해온 나의 면전에서 이루어진 이 사건은 나를 깊은 숙고에로 몰고갔다. 어떤 관찰자는 심지어 이것은 인도정부와 나 사이에 다른 강한 견해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위원단에서 곧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Gordenker, The U.N. and the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유엔에서의 의견조류가 강력히 미국의 결의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그것을 거슬러는 것은 인도를 위하여 부질없고 해로울 것이라 여겼다. 필라이(Pillai)의 판단을 많이 존경하면서도 그의 주장에 확신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도는 항상 편의보다도 원칙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의 보고서를 제출하고는 총회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소극성에는 하나의 센치맨탈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내가 마하트마 간디의 부음을 들어야 했던 것은 한국에서였다. 나는 한국의 친구들이 이 가누기 힘든 시간의 번민을 나누어 주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손실이 자신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 동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존경과 감탄으로 기억된 다른 인도인의 이름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였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알고 나에게 반복하여 타고르가 극동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에 준 메시지를 언급하였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죽지 않는 빛이 되리라!.
( In the palmy days of Asia's greatness
Korea was a lamp which sent forth
its illumination over the entire East.
May that lamp shine again with an undying light!)
우리 유엔한국위원단은 이 등불을 다시 켜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냉전의 바람은 우리에게 너무 강하였다.
메논은 자서전에서 한국전쟁에 대하여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서의 전쟁은 인도의 외교정책의 산소실험처럼 드러났다. 전쟁은 1950년에 일어났다. 인도는 북한군대가 남한을 침략했다는 유엔한국위원단의 관찰을 동의하면서 유엔총회가 북한을 침략자로 선언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인도주재 미국대사 로이 핸더슨(Roy Henderson)은 바이파이(Bajpai)에게, “이것은 내가 기다려온 날이다”고 말했다. 핸더슨은 인도의 찬성이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 소련과 미국사이의 거대한 경쟁에서 인도가 후자쪽으로 전회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의 입장을 너무 안이하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출발에서부터 한국문제를 위한 인도의 노력은 정치해결이었지 군사적해결은 아니었다. 초장에는 북한군이 곧장 남한을 휩쓸었고, 한국전체가 그 아래 떨어질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나서 맥아더의 눈부신 인천상륙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남한은 침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군사적 행동에 제동을 걸고 해결을 시도해볼 적절한 순간이었고, 인도는 이것이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맥아더(MacArthur)는 단지 침략자를 남한에서 퇴치하라는 유엔의 위임을 초과하여 38선을 넘어서 북한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중국이 만일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개입할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하루는 주은래(周恩來)가 북경주재 우리 대사 파니카(Panikkar)를 자정에 깨워 이 결정을 엄숙히 말하였다. 중국과 서방의 연결하는 유일한 효과적 고리인 인도는 이 경고를 영국과 미국에게 매우 심각히 전달하였다. 그러나 서방세력, 특히 미국은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이 유엔과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15개국에 보증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면 누가 한국에서 싸울 것인가? 그리하여 맥아더는 북한에게 항복을 받으려는 계획으로 진군하였다. 처음에는 잘 나갔다. 그의 군대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얘들아, 크리스마스까지 집에 가자”(Home by Christmas, boys!)라고 맥아더는 승리하는 군대를 격려하였다. 이어서 중국의 공격이 시작되어 맥아더의 군대를 38선 이남까지 격퇴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미국에는 분개의 소리가 나왔고, 미국은 원자탄을 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일어났다. 이때 영국제국 수상회의가 준비중이었고, 카나다에 의회 지원을 받아 인도는 중국의 동의를 받는 어떤 조처를 취하겠다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으로 하여금 중국을 침략자로 낙인찍는 데에 신경을 쓰고 적대감을 종식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 전쟁은 또 2년에 걸쳐 진행되는 결과가 되었고 극동에서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가능한 기회는 상실되었다.
메논은 중국통이었기 때문에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의 어느 쪽에도 군사지원을 하지 않고 휴전과 포로문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는 네루정책의 입안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소련대사로 부임하였다.
3. 메논과 모윤숙
모윤숙이 메논을 만난 1948년은 이미 안호상과 별거하며 딸만 데리고 살고 있던 때였다. 모윤숙은 김구, 김규식 등 지도자들 가운데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메논박사의 마음을 이승만에게 돌리게 했는지 생생히 적고 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임무와 사사로운 교제를 엄격히 구별하는 메논씨의 절도에 결국은 내가 두 손을 든 꼴이 되었다.
“마치 문학토론이나 하러 한국에 오신 것 같군요. 덕수궁회의에서도 문학이나 문화에 대한 토의를 하시나요?”
그동안에도 그가 다소에 눈치를 못채고 있었을 까닭이 없다.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자 그는 금방 웃음이 터져 나올 듯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한국문학토론이나 덕수궁에서 하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머리 아프도록 복잡하기만 하거든요. 당신은 한국이 어떤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또 누가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요? 김규식 같은 이는 참 침착한 학자정치가입니다. 남북한 국민의 의사도 적당히 조화시킬 수완도 있어 보이고....”
“이승만 박사는요?”
나는 다그쳐 물었다.
“훌륭한 분이지요, 하지만 하지장군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나로서는 어떤 특정인의 주장에 따르기보다 한국민 전체가 열망하는 초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낼 책임이 있습니다. 이 나라 국민을 모두 만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진심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는 모두 만나고 싶습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보여 주었다.
“대다수 국민이 이박사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지요”.
메논 씨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이 밝았다 어두웠다 했다. 그의 책임은 너무나 무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와 나는 신뢰할 수 있는 깊은 우정에 억매어 있었다. 그는 매일 덕수궁회의에 나가기 전에 그 커다란 세단을 우리집 앞에 새워놓고 문간방에 놀고 있는 일선이를 껴안고 볼에다 굿모닝키스를 했다.
저녁에는 꼭 나일비서를 시켜 초코렛이니 과자 같은 것을 보내주었다. 동네에서는 이상한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또 수군거리기도 했다. 장택상 씨 부인 김영식 여사가 옷도 갖다 주고 용돈도 보내주어 급한 이박사 심부름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나는 어느 정도 행동을 자제해야겠다고 춘원선생에게 간단한 편지를 썼다.
모윤숙은 메논과의 교제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향한 그의 우정은 좀더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어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포섭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우리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공적인 지령이나 결의라도 참된 우정 속에서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실을 이때 보았다. 너무 고마움에 감흥된 우리는 진실한 그의 인간성에 희망을 두기 시작 했다. 몇 번이나 네루수상에게서 날아온 전문을 보았다. 인도입장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으로보다 사실에 입각한 우리 현실을 그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옥스퍼드판인 그의 자서전에 밝힌바 “나의 인생의 외교생활 중에서 단 한번 머리보다 가슴이 움직이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은 고백이 있거니와 그것은 한국에서의 그가 처음으로 비정책적인 오직 우정의 힘에 의해서 진행된 일을 말함이리라. 우선 남한만의 총선에 성공했고 유엔에서 합법성을 얻기 위한 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박사는 그를 껴안고 고마움에 목메어 울었고 우리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그의 성의의 감탄했다. 그가 한국에서 떠난 후 나는 몇 번의 글을 받았지만 회답도 못한 무심한 자가 되었다. 그는 6.25동란 때 내가 서울시내에서 죽었다는 뉴욕타임지를 보고 인도 어느 신문에 길고 긴 추도문을 발표했다. 그후 내가 살았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간곡한 편지를 대통령과 나에게 보내고 인도나 그렇지 않으면 동경에 있는 인도 대사관에 휴식할 방을 마련하겠으니 딸아이를 데리고 꼭 가서 건강을 회복하라 했다. 그것도 한두번도 아닌 몇 번의 간곡한 청이었다. 나는 물론 그의 청을 받아드리지 못했다. 그가 나에게 대한 우정은 이해를 떠난 진심이었고 내가 그를 대한 성의는 급할 때 그를 이용한 것밖에 안된 셈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순박한 우정의 힘이 얼마나 무섭고 또 큰 것인가를 알면서도 그가 내게 대한 친절의 백분의 일 만큼도 당해내지 못했다.
모윤숙은 춘원 이광수(1892-1950)를 메논과 대면시켜 문학을 통한 공감을 확대시키기도 하였다. 춘원은 즉석에서 <인도에게>(To India)라는 시를 읊었다.
아시아 깊은 골짜기
안개와 어둠의 신음이
당신의 귀에 들려
찾아오신 님, 인도의 나그네.
바다를 건너 이 하늘 아래 계시니
멀고 높은 명상의 땅
인도를 보노라, 아픔을 참고 견뎌온
우리 친구 인도를 보노라.
메논은 이에 대해 <한국에게>(To Korea)라는 시로 화답하고, 춘원을 인도에 와서 대학들을 순방하며 한국문화를 소개해달고 초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국가를 위하여 행한 합작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메논은 인도로 돌아가서 모윤숙을 여러번 초청하였다. 1949년 3월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아내고, 모윤숙은 장면,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등 한국대표와 헤어져 인도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거의 국빈급 예우를 받았다. 이에 대하여도 자신의 기록이 있다.
네루수상의 저녁연회는 나를 위한 것이라고 초청장을 전한다. 1949년 2월 22일 밤. 빗소리가 커다란 잎사귀에 작은 북소리를 울리는 부드러운 음양에 쌓여 네루수상은 몹시 친절한 태도로 나를 옆에 앉히었다. 맞은편에 부인과 같이 앉은 메논을 그때야 나는 눈으로 만날 수 있었다. 네루수상으로부터 이처럼 저녁만찬을 나에게 주도록 마련한 것도 메논씨의 알선인줄 알았으나 나는 어색한 눈치 속에서 나도 모를 이상한 부자유를 느꼈다. 네루수상과 판디여사, 그리고 딸 현 인도수상 인디라 간디여사는 시종 한국 옷을 예산하고 있었고, 네루씨는 갑사적삼의 자주고름을 만지작거리며 아름다운 리본이라고 했다. “그런데 미스 모! 시만 쓰지 말고 나라일을 열심으로 나서서 해야 해. 그게 시와 통하는 길이야. 우리나라의 사로지니 나이두여사는 지금 러크나워주에 도지사로 있지 않소. 나이두여사는 아마 미스모를 한주일간 자기집으로 초청할 거요”. “감사합니다. 누구보다도 그 분을 찾아 뵙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그글 존경하고 마음으로 따랐으니까요. 또 귀국 메논씨는 우리나라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오시어 말못할 고생을 하시며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해 주셨습니다”. 네루수상은 내 말의 응수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아시아문제에 있어서 너무 자기 고집만 세우는 듯한데 그 분이 좀 부드럽게 나왔으면 나와 호흡이 맞아. 무슨 일이든 함께 할 수 있을 터인데. 내가 그런다고 그 고집을 좀 숙이라고 하시오”. 네루씨는 진심으로 이박사의 고집이 불안한 듯이 걱정하였다. “인도와 한국은 서로 다른 환경을 가졌으니까 우리나라엔 그분의 고집이 아마 약이 되는 때도 있나보지요. 저는 고집에 관해 연구해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인도와 같은 중립노선이 한국엔 맞지 않습니다. 이박사의 고집정치가 우리를 휘어잡으려는 상대방의 수완을 거부하는 힘이 되는 걸요. 절반이 끊어진 반신불수나라로 제 몸을 바로 찾아보려는 데 우유부단의 이념으로야 되겠습니까? 가서 수상님의 말씀 잘 전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마주 앉은 메논씨 부부를 쳐다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띠고 있었다. 네루수상은 옥중에서 쓴 자기의 회고록 책에 싸인을 해서 모슬램 등 한계와 함께 이박사님께 선물로 전해 달라 했다. 밤은 12시가 지나 새로 한시나 되었다. 인도의 밤은 무덥고도 측은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젖어 있었고 사방 창으로 이름모를 꽃향기가 내 영혼마저도 취하게 하고 있었다. 네루수상은 자기 서재로 나를 오라 하더니 자기가 그린 그림도 보여 주고 자기가 써 두었던 시도 보여 주며, 로버트 프로스트의 <삼림의 길>이란 시를 두서너 줄 낭송도 해 주었다. “인도의 인상은?” 그는 조용히 물었다. “무척 사람을 외롭게 하는 나라이군요”. 내 말을 알아들은 그는 메논부부를 한번 쳐다보고 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시와 네루수상! 그는 소탈한 인간이었다. 권력자답거나 어느 지위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서민의 풍취를 지닌 목가적인 사나이였다. 새로 2시나 되어 우리는 한 차를 타고 관사로 돌아왔다. 메논씨는 긴 복도를 부인과 함께 걸으면서 굿나이트를 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굿나이트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꽃 향기가 너무 짙게 가득찬 밤공기는 질식에 가깝도록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갸날픈 후회를 되풀이 하며 잠이 잘 들지 않았다.
메논이 1965년에 낸 자서전에도 아니나 다를까 모윤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춘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임영신 등이 언급된다.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그들 가운데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친애한 사람은 마이온 모(Marion Moh, 모윤숙)이라는 한국의 지도적 여류시인이었다. 나는 그녀와 많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정치얘기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에 관하여는 그녀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동의했고, 대신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슬픔과 기쁨 등 일상적 사항들에 관하여 담론했다. 하루는 한 의례적 회의에서 끊임없는 연설들에 지쳐서 호세택(Victor Hoo)박사와 나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슬쩍 빠져나와 모윤숙의 집으로 가서 그날 저녁을 그녀와 임경재(Catherin Yim)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자정이 될 무렵 모윤숙의 대문을 요란스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왠 일인가 하고 내려갔다. 거기에는 나의 비서 나이르(K. G. Nair)가 평소에는 그렇게 침착한 사람이 화가 난 표정으로 몇사람의 경찰과 우리를 두 시간 동안 찾았노라고 서 있다. 공산당원들이 날뛰는 판이라 경찰들은 유엔위원단의 의장과 사무총장이 납치된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단순했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K. Adenauer)에게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abbration)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려 투표하는 것은 나라전체의 독립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배반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Saviour of Korea)‘라고 부르는 몇 개의 시도 읊어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So I let things take their course).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This was perhaps the only occasion in my service when I allowed my heart to prevail over my head). 나는 나의 행위 - 혹은 비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한다. 인도는 재빨리 자신을 챙겨, 미국 안에 동의 투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북쪽의 인민공화국보다 더 승인해주기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인도는 한국의 부자연스런 분단을 영구고착화시킬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미소양진영 사이에 연결고리(link)의 역할을 하는 데에 지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3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중반에 평화가 확보된 것은 대부분 인도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나는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에 행복을 걱정하면서도 행하라.
신중의 나이는 결코 되돌라 오지 않는다.
메논의 귀국 후 모윤숙과의 편지교환은 계속되었고, 1972년에 뉴델리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4. 모윤숙과 낙랑클럽
낙랑클럽(The Nang Nang Club)이라면 건국과 전쟁을 경험한 노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것은 건국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여사가 은근히 지원해주면서 영어를 잘 하는 교양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사교단체였다.
일본은 1860년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처음 서양에 개방될 때 서양인들의 마음을 잡으려고 여성들이 양장을 하고 어울려 춤도 추고 접대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나비부인> 스토리 같은 것도 나왔고, 상당수의 서양인들이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수십년 일본에 산 예도 적지 않다. 이것이 일본의 개화에 큰 힘이 되었고, 지금도 일본은 이것을 역사의 일부로 자랑스럽게 가르치고 있다. 좀 뭣한 얘기지만, 그 무렵 조선에 온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면 한국여성들은 너무 초라하고 매력이 없다고 하였다. 치마를 뒤집어쓰고 유방을 내어놓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기행문집에 즐겨 실었다. 그러나 한국까지 오는 서양인은 많지 않았다.
한국에 서양인이 대거 몰려오기는 1945년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 그리고 유엔조선위원단 60여명이었다. 이들에게 한국을 여전히 미개한 나라로 비치게 한다면 독립국으로 건설을 하는 데에 큰 지장이 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 여성들이 외국인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한국문화가 고급문화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낙랑클럽이 언제 어떻게 결성되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미군정보부의 조사에 따르면 1948년 혹은 1949년부터 있었다. 총재는 김활란이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주로 이화여대 출신으로 영어를 잘하는 미모의 여성 150명 정도라고 되어있다. 목적은 서양인들에게 기생파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고급으로 한국문화를 알리는 사명을 띄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도 있었고, 그 운영비는 장면 총리실에서 부담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회원인 김수임이 공산주의자 이강국과의 사랑으로 간첩행위를 하여 처형되는 일이 생겨, 미군정보부는 낙랑클럽을 장기간 면밀히 조사하여 보고한 기록이 있다.
5. 건국기의 한국여성지도자들
여기서 우리는 건국기에 활약하던 여성의 전부를 섭렵할 수는 없다. 모윤숙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해방후 내가 사회활동을 할 무렵, 나를 지도해준 선배로는 박순천씨 외에 황애덕, 김활란, 임영신, 박승호(납북), 황신덕, 고봉경(납북, 고 황경씨 언니), 서은숙씨들, 비슷한 또래로는 최예순(납북), 임길재(재미), 최정희, 이선희, 박화성 씨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가 가진 신, 인간적인 신앙도 있지만 이런 좋은 선배, 동료들 때문에 세상의 스캔들도 극복하고 파멸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믿고 있다.
목사이면서 한국정치에도 깊이 관련되어있던 강원용은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2003)에서 해방 직후의 한국여성계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46년 무렵을 회고하다 보니 당시 활동했던 여성단체들이 떠오른다. 서울운동장 반탁강연 이후 이름을 얻게 된 나는 이곳저곳에서 강연초청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여성단체들도 있었다. 당시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고 맹렬했다. 나는 공산당과 관계된 여성단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단체모임에서 강연을 다니면서 여성인사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당시 여성운동지도자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나를 동생처럼 여기고 사랑해 주었다.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이었던 50대 초반의 박승호는 동아일보 여기자로 일하다가 창덕여고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6.25때 납북되고 말았다. 박승호와 함께 일한 사람들로는 박순천, 황신덕과 그 언니인 황애덕이 있다. 또 생각나는 사람으로 황기성이라는 여자도 있는데, 이 여자는 강연을 아주 잘해서 여성모임에는 주로 나와 황기성이 함께 강연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후 그녀는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과격한 우익여성단체로는 여자청년단이 있었다. 그 단체에서 제일 열심이었던 사람이 홋날 고아원을 운영한 황근옥이다. 당시에는 여성단체역시 좌익계가 압도적이었으므로 공산주의가 아니거나 민족주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테러를 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길거리에 못나갈 정도였다. 우리 선린형제단의 멤버이기도 했던 황근옥은 좌익여성들의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는 사고를 당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위로했던 일도 있다.
가장 독특한 여성운동단체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서울여자대학전문학교가 주축이 되어 만든 애국부녀동맹이다. 카톨릭 신자였던 박은성이 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고 홍만길, 나신애 등을 중심으로 한 30여명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애국부녀동맹은 초창기에 주로 반공투쟁을 했다.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똘똘 뭉쳐 한집에서 숙식까지 하는,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이들은 또 신선한 발상으로 운동을 전개하여 사람들의 이목도 많이 끌었다.
내가 이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 학교에 강연을 나가면서부터다. 나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한주에 한번씩 그들에게 강연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활동이야 그네들이 자발적으로 했지만 그들의 중도 우익적인 입장은 나와 맞는바가 있어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때는 공산당이라고 막 잡아넣는 시대는 아니었고 오히려 백가쟁명식으로 모든 이념과 사상이 분출하여 격렬하게 대립, 투쟁하던 시기였다. 특히 대자보로 전개되는 사상투쟁이 격렬했다. 그런데 1948년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쳐버리기 시작하자 이 열성 극우단체도 중간노선으로 돌아서서 극좌와 극우를 모두 배격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사람들 또한 좌익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 애국부녀동맹은 다른 단체에 비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많은 지지도 이끌어 냈다. 이들은 재치있게 반공투쟁을 이끌어 신문에도 자주 등장했는데, 공산당조직에 직접 침투하여 정판사위조사건을 적발해 내는 데도 공을 세웠다.
이들이 벌인 활동 중에 특기 할만한 것으로는 정동교회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모의재판이 있다. 그들은 박헌영과 여운형 등을 가상으로 세워놓고 기지와 재치를 한껏 발휘해 신랄하게 비판하여 사람들에 관심을 사로잡더니 마지막에 판사가 여운형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 모의재판은 여운형의 귀에도 들어가 그의 심기를 언잖게 했던 모양으로 얼마후 몽양을 찾았던 나는 그 재판과 관련해 섭섭해 하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애국부녀동맹의 박근성은 6.25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가고 홍만길, 나신애는 붙잡혀서 공산당 학생동맹에서 인민재판을 받은 후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런데 거기서 극적으로 탈출한 홍만길은 우리 식구와 더불어 시골로 피난 가서 석달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또한 고황경과 김활란과도 알고 지냈는데 보건사회부 부녀국장을 지냈던 고박사는 여성운동을 하면서 경동교회 여성모임에도 자주 나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최초의 여성박사인 김박사는 1948년 강연 부탁을 받고 내가 이화여대에서 강연한 것을 인연으로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깝게 지냈다. 전쟁 중에는 여자청년단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을 펼쳤다. 모두 군복을 입고 다녔는데 단장은 모윤숙 씨였고 중간간부로는 이희호, 김정례, 박기순 등이 있었다. 이런 정도가 해방 전국의 여성운동의 모습이었다.
한 가지 애석한 점은 공산당여성운동에 대해서는 내가 접근조차 하지 못한 관계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 밝히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강연한 것을 들었던 좌익학생 중 한 사람이 홍만길이 인민재판을 받을 때 변명을 해준 사실이다. 그랬다가 그 여자도 잡혔다고 한다. 한참 뒤에 일이지만 그녀는 미국에 가서 의사인 남편과 결혼을 해 살고 있다가 내가 워싱턴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그 교회에 다녀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번은 그녀와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좌익이었던 당신이 어떻게 내 강연을 들으러 왔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기독교는 질색이었지만 미남이 와서 강연하다기에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 갔죠”. 어쨌든 그녀는 내 강연을 들으러 다니다가 홍만길 등 애국부녀동맹 사람들과도 낯을 익히기 되고 그 인연으로 인민재판정에 선 홍만길을 도왔던 것이다. 그때 여성운동은 크게 두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일반의 무지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계몽적인 성격이고, 또 하나는 의식있는 여성들의 애국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여성단체는 계몽운동과 정치운동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 시절 여성들만 한 500명 모인 전라북도 김제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말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손드는 사람이 몇 없었다. 이런 여성들이 계몽운동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여성들, 게중에는 오히려 이름을 드러내기를 주저하며 숨은 봉사를 한 여성들도 더 많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세우는 데에 남성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여성의 힘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모아졌다는 사실이다. 이 방면으로 따로 독립된 연구서가 나와야 할 것이다. 모윤숙을 중심으로 다루다보니 낙랑클럽만 부각된 것 같이 보이나, 그 외에도 각 분야에 오늘날만큼은 안 되지만 선구적으로 활약한 한국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Ⅲ. 맺는말
위에서 한국의 현대사, 즉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깊이 관여한 인도인 메논이 어떤 인물인지를 조명하고, 어떤 과정으로 인도의 중립정책을 거역하면서까지 ‘친미’노선의 이승만을 지지하여 남한에서의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했는지를 추적해보았다. 여기에는 모윤숙이라는 여류시인과 문학을 논하면서 한국인이 독립국가를 운영할 문화역량을 가진 나라라는 신뢰감을 갖게하였다. 모윤숙은 개인적 관계만이 아니라 낙랑클럽을 통하여 엘리트여성들이 국가건설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였던 사실을 정식으로 클로즈업시켰다. 한국의 여성정치의 출발을 보게된다.
인도로 귀국한 메논은 외무장관, 주소련대사로 이승만과는 거리가 먼 중립노선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심각성,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는 남북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평화회복과 포로송환에 주력하였다. 인도와 한국의 관계는 그만큼 멀었고, 인도는 1990년에 들어서야 중립노선에서 자유서방에 가까운 관계로 선회하면서 경제적 부흥도 이루고 있다. 이제야 메논이 한국에서 뿌린 씨앗이 열매 맺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는 지나간 선배인물들의 피나는 노력과 애환이 깃들어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