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집
-. 고향 가는 길 [4]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이 필요했습니다.
조주(趙州)스님 같은 대천재(大天才)도 맨 처음에 공부할 때
남천보원선사(南泉普願禪師)에게 가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때도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부처가 무엇인가.
이렇게 조주스님께서 남천보원선사에게 물으니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평생 마음이 바로 도(道)라 이렇게 대답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따라서 조주스님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이 깨달은 경계(境界)를 말씀드리니까
그대가 비록 문득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대가 비록 돈오(頓悟)했다 하더라도
재참삼십년(再參三十年)하라. 즉 30년 동안 더 참수(參修)하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열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부처님뿐이다.
모두가 광명세계(光名世界)다.
이렇게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공부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 그렇구나"하고 느꼈다 하더라도 공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들어있는 습관성(習慣性),
그 씨앗을 뿌리 뽑으려면 굉장히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조주스님 같은 분도 30년이 더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했다고 해서 더 높은 것이 아니고
또는 관세음보살은 낮은 것도 아니며 절대로 고하(高下)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공덕(功德) 차원(次元)에서 볼 때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항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정녕코 말씀을 드려도 나중에 와서는 또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서투른 질문을 안 하시기 위해서 제가 구구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형상(形象)이 아니기 때문에,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또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은 우주(宇宙)의 대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提示)하는 법문 자리를 찾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아미타불을 해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는 화두식으로 하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화두(話頭)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관세음보살 해라, 하셨거니 그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두란 말입니다.
꼭 무(無)자나 이뭣고만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두라는 것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 바른 마음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우주 만유가 모두가 다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많이 해서
거기에 습관이 붙어서 약간의 법락(法樂)에 가까운 재미를 보았다면
구태여 이름을 바꿀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하나의 자리, 하나의 생명자리, 조금도 구분 지을 수 없는
하나이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영가천도를 한다고 할 때도
이런 자리에다가 우리 중생이 영혼(靈魂)을 천도(薦度)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지구(地球)같은 땅덩어리를 맡어 있는 성령(聖靈) 기운이 지장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래서 다른 성령 기운하고 하등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차원의 참다운 기운은 조금도 한계(限界)가 없습니다.
그러한 부처님 차원의 기운은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어서
어디가 덜 있고, 더 있고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어도 바로 그 자리, 또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워도 똑같이 그 자리,
이뭣고를 해도 똑같은 그 자리, 또는 광명진언(光明眞言)을 해도 바로 그 자리,
이렇게 생각 하셔야 시야비야(是也非也) 그런 필요 없는 시비를 않고
우리의 공부가 차근차근 진전(進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자비(慈悲)와 지혜(智慧)가 원만한, 원만히 갖춰져 있는
부처님한테 귀의한단 말입니다.
자비나 지혜 이것은 부처님 자리에 갖춰져 있는 가장 중요한 속성(屬性)인지라
우리가 공부 할 때는 꼭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가지런히 갖도록 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공중(空中)에 나는 새의 날개가 한군데만 있고 한쪽에는 없으면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굴러가는 달구지가 두 바퀴가 똑 같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와 똑 같이 부처님의 공덕은 우리의 본성품(本性品)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의 공덕은
자비와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오행(五行)식으로 말하면 음(陰)과 양(陽)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음만 더 있고 양이 부족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만일 자비만 좋고 그래서 자비만 추구하고 지혜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비도 참다운 자비가 못됩니다.
자비와 지혜가 원래 혼연일체(渾然一體)라서
온전히 하나로 지혜와 자비가 뭉친 자리가 본래 우리의 성품이기 때문에
이 둘은 둘이 아닌데 그 공덕(功德)을 대별(大別)하면 둘이기 때문에
자비만 찾고 지혜를 무시하면 우리의 공부가 더딥니다.
본래 우리의 근본 생명자리는 다 갖춰진 것인데
하나만 추구하면 공부도 잘 계합(契合)이 못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도인들이나 다 자비와 지혜 또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추구했습니다.
정과 혜에서 정(定) 이것은 뜻 정(情)의 정이 아니라
마음을 한군데에 통일시키는 정할 정(定)자 정입니다.
마음을 한군데에 일념(一念)으로 모으는 정(定)과 비추어 보는 지혜는
화엄경(華嚴經)이나 육조단경(六組檀經)이나 보조어록(普照語錄)이나
모든 도인들인 정혜쌍수(定慧雙修) 또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말씀하셨고,
고를 균(均)자 같을 등(等)자, 정과 혜가 같이 고르게 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런 점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정과 혜를 같이 공부할 것인가.
화두를 하나 참선을 하나 무슨 공부를 하나 원래 우리 성품에 갖추고 있고
우주에 갖추어 있는 정과 혜, 자비와 지혜를 균등하게 해서 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공부가 빨리 진척(進陟)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이것은 이른바 반야지혜(般若智慧) 아닙니까?
반야지혜란 말입니다.
반야지혜가 너무 좋아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하는 분들도
마하반야바라밀을 해야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같다고 생각해야지
지지리 나무아미타불 하는 사람에게 그것 그만두고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해라, 그것도 역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식(式)이 좋다고 해서 다른 공부를 비방(誹謗)하거나 폄(貶)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데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참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가 염불을 좋아한다고 해서 염불 아니면 필요 없다.
염불만이 성불(成佛)한다 하면 이것도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혜와 자비가 균등(均等)히 똑같이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균등히 갈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께서 공부를 하시면 그때그때 자기한테 요령이 붙습니다.
그러나 다는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간단한 요령을) 윤곽만이라도
제가 조금 말씀드려야 하겠지요.
지혜(智慧)는 무엇인가.
불교의 지혜는 바로 반야(般若)의 지혜입니다.
또한 반야지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비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변화(變化)해서 마지않는
변화의 과정(過程)에 불과합니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실존적(實存的)인 고유(固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비어있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차근차근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도 머물지 않고 또 어느 순간도 공간성(空間性)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철저히 과학적(科學的)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그 합해진 그것이 조금도 머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벨그송'의 말에도
"우리는 한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한 시냇물에 우리가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있겠습니까.
현상계(現象界)는 모두가 일과성(一過性)입니다.
한번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무상한 인생입니다.
누구 미워하고 누구 지독하게 탐착(貪着)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제아무리 미워한 사람도 이윽고 얼마 안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반야(般若)는 모두가 비었다는, 내 몸도 비어 있고, 원수의 몸도, 내 권속(眷屬)의 몸도
다 비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못 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잠시간 합해져서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그런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듯이
우리 몸의 세포 역시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해서 변동해 마지 않습니다.
고유한 자기 몸뚱아리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입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 지혜의 법문이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인데 다만 공(但空)이라는 소식으로만 안다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되고 맙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그 자리만 공인 것이지
영원의 생명(生命), 즉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영원(永遠)한 생명의 자리는
항상 존재한단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다음 가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호킹'박사도
역시 우주가 파괴되면 하나의 광명(光明)의 구멍, '블랙홀'이라는 광명의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어 나온다. 이렇게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보다 깊은 소식은 모르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은 천지우주가 다 파괴(破壞)가 되어서
우리 인간이 광음천(光音天) 이상으로 다 올라가 버려서
물질은 조금도 없어진 때라고 할지라도 역시 부처님 법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조금도 감축(減縮)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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