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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청수 목사가 미국의 풀러 신학대학원에 제출한 논문을 학문적인 관점이 아닌 실제적인 상황으로 재편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 번 개척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개척하면서 잘했던 일보다 실수를 해서 시행 착오를 많이 해서 당했던 여러 가지 애로점들을 기록했습니다. 이 글이 학문적인 가치는 없겠으나, 교회를 개척하시려는 분들에게 다소나마 참고되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서울에 새롭게 형성되는 변두리 주거 지역(대 단지 아파트 지역)에서의 교회 개척을 논했기 때문에 농촌이나 기존의 주거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시는 분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1장 : 교회 개척의 준비 목회와 교회 설립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책들 가운데 어떤 책들은 전적으로 한 교파에 국한된 책들이고, 또 실제로 다 대 도시에서 크게 성장한 교회들을 중심 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성서 대학이나 신학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에게나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에게 알맞은 저서는 그런 성공적인 목회를 해서 대 교회가 된 경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목회 신학에 입각한 교회 설립의 동기와 장소 방법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나친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교회를 설립하여 파산하기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형편에 맞추어 교회를 설립하다 보니 성장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 교회를 설립하여 좌절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명이 없는 성도들과 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다. 유능한 목회자란 낯선 지역 사회에 들어가서 건물의 이층이나 천막을 치고 난로도 지피고 비로 청소도 하고 걸레질도 하며 목수일도 하고 청소부 일도 하면 서 그 동네 사람들을 불러 예배를 드리고 설교도 하며 질문에 답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줄 아는 목회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 교회를 개척하기 전의 준비 과정과 100명-30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이도록 성장하는 약 3년 정도의 과정을 기록했다.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 한다. 1. 교회 개척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라. 교회 개척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도중에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는 힘이 된다. 그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하나님의 가장 고상하고 시급한 뜻이라는 확신이 되기 대문이다. 목회자가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12사도를 세우셨다. 즉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해야 할 가장 우선되는 사명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아무 제한도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국민들 사이에 복음을 전파하므로 써 그리스도의 나라 즉 교회를 개척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온 세상에 두루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를 세우노라 하였다.(롬 15:19-20)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 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들로 파견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에 파견된 사람들이 ‘사도’라 부름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모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열두 제자 이외에 바울이 첨가한 사람들도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에게 유명이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였다.(롬 16:7) 그러나 사도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고자 했을 때에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 어디서든지 교회를 새롭게 개척하는 열두 제자들에게만 사도라는 말을 적용했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이다. (마 10:1)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은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도들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이라 할 수 있다. 2. 최초의 한국의 교회 개척 현재 한국의 교회는 전 세계 교회의 모범이 되고 희망이 되였다. 이와 같이 되기까지 한국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으며,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한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다. 알렌과 언더우드 박사가 1884년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래 첫 개심자를 얻은 것은 2년 후였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 교회는 매년 13%-15%씩 증가하는데 이것은 인구 증가율 2%보다 600%-700% 앞서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는 연간 4,000개 이상의 교회가 새로 설립이 되였다. 그것은 매일 10개의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선교 100주년이 넘은 지금 4,000만 인구의 1/4이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되였다. 초창기 한국 교회의 부흥은 네비우스 방법에 힘입은바 크다. 1890년 한국에 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중국 지프(芝栗)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John Nevice 목사 부부를 초청하여 두 주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장차 한국 교회의 선교에 지침이 될 만한 선교 방침을 세웠다. 그것은 신자는 누구든지 자기가 도전 받는 곳에 살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 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교회를 개척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선교 정책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다. 어떤 면에서 근대의 전도나 선교 정책도 이 정책에 유사한 점이 많다. 한국의 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독립되어 전도를 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 급속한 도시의 발전과 함께, 그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이 그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 전도에 노력했기 때문이다. 풀러 신학 대학의 피터 와그너 박사는 “교회가 개척 설립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주님은 마태복음 28:18-20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하셨고, 누가복음 19: 1에서도 “인자의 온 것은 잊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하셨으며, 요한 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다. 3.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 하나님의 교회는 말씀 위에 세워지고, 사도적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 교회 개척의 신학적 대 전제다. 이것은 이 세상에 세워진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가 하나님의 교회의 탈을 쓴 이리의 집이며, 사단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철저한 복음적 신학에 입각한 목회 신학과 교회 운영을 해야 한다. 오늘 날 많은 교회가 처음에 세워질 때 잘못된 신학과 인간적인 이상(理想)이나 성취 욕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닌 종교 기업으로 세인(世人)의 조롱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거룩함과 신성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교회는 장사꾼들이 장사하는 시장이 아니며, 주님이 말씀하신 데로 강도의 굴혈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개혁 주의 신학에 입각한 교회론을 염두에 두고 그 교회론에 입각한 실천적 사항을 논하고자 한다. 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사랑이다. 교회를 개척 설립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사단의 집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 경계에 경계를 거듭하신 강도의 소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칼뱅의 교회관을 소개하여 신학적으로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점에 있어 이 글을 보시는 다른 교파의 목회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칼뱅의 교회관 (칼뱅의 기독교 강요. 하권 1장 이하)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교회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다. 1) 교회의 필요성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지에 가기 위해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한 보조 수단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복음 전파가 활발히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시고(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시고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맡기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교회를 세상에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속에 모아 그들이 어린아이일 동안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을 받고 보호와 지도를 받아 성인이 되고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다.(막 10:9 참조)라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 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2)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우리는 지금 가견적 교회에 대하여 논하면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단순한 칭호의 중요성부터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았으며, 젖을 먹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와 같이 될 때까지(마 22:30), 우리를 보호하고 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 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가 일생 동안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교회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 받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떠나서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가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라고 말하고, 요엘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라고 말한 말씀에서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에게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 인줄 알리라(겔 13:9)” 그와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촉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했다 (참조 사 56:5]; 시 87:6). 그리고 시편의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 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4-5)“라고 말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부성 적인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 양떼들에게 국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서는 언제나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3) 교회와 信經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경에서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라는 말은 보이는 교회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 죽은 신자들까지-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 하나님의 양떼와 사나운 짐승들 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이 구별을 명백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마귀로부터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이 모두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 것이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이 교회에 접붙임을 당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즉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다른 모든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장차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아니하는 한(엡 1:13;고전 1:13. 참조)하신 말씀들이 교회가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이 되었음으로 (엡 1:22-23]” 참조) 한 머리에 의존하여 서로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제자들 같이 (롬 12:5]; 고전 10:17, 12:12,27)” 서로 단단히 결합이 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 모두 영생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시고,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하게 하심이다.(엡 4:16, 참조) 우리 주변에서 어떤 경우에 교회가 사단의 시험을 받아 없어져 버린 것 같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를 반드시 살아 있어서 다시 힘있게 역사 한다는 것을 엘리야는 분명히 말했다.(왕상 19:18) 4)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경의 이 조항들은 외면적 교회에 적용된다. 즉 우리가 각각 하나님의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교회에 부여하고 두말 할 필요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라고 첨가하였다. 이 구절은 성도가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코 교회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라고 기록하고,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라고 말하여, 각 사람의 사유 재산권이 허락이 되었으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아버지 시며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의 머리가 되신다. 성도들은 이것을 확신하여 그들이 각각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일이 우리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 탐구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증거는 우리 스스로 교회의 지체가 되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교회는 흔들릴 수 없는 것이며 넘어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근거를 가지며 따라서 온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존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영원 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이 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찍기 기를 허락하시지 않는 것같이 신자들이 자기에게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품속에 있는 한 항상 진리의 빛 가운데 있음을 확신한다. 끝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옵 1:17]”.라고 하셨다.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라는 말 지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님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들의 소유가 된다고 확신할 때 우리는 더욱 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 꼭 우리들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해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꼭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도 교회가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우리 믿음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을 받은 자와 선택을 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교제에 들어 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누어 받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5)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의무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 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바울의 글에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라고 하셨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일순간에 그 백성들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으시나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 장성하기를 바라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동일한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게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 임명된 교사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는데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라고 하신 말씀이 그 말씀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 술에 기타 다른 미신에 빠지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 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신 18:10] 진언자나 신접한 자나 박수나 초혼 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11]; 너희는 신 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 참조) 그들에게 완전히 만족할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인 것이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 늘[말 2:7]“ 참조) 하나님은 옛날에 천사들을 통해 이 보배를 맡기지 아니하시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들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심과 같이 지금도 사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을 하셔서 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 (말 2:8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들을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셨다.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들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친히 우뢰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을 할 것임으로 사람인 해석 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므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4. 교회 개척자 자신의 준비 1) 목회 신학을 확립하라.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청빙하는 교회가 없어 할 수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아예 처음부터 교회 개척에 사명을 가져 개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안정된 교회의 부 교역자로 하나님을 섬기다 단독 목회의 열망을 가져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교육 기관의 특수 목회를 했던 사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돌아 온 목회자들------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유형은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동기에서 교회를 개척하려 하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 신학이 확립되어야 한다. 목회 신학이 확립되지 아니하면 목회와 설교, 교회 운영 등이 일괄성이 없게 된다. 나는 모 교파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된 사람이 교회가 잘 되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의 교파를 달리 하고 교회를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목사 자신과 성도들에게도 혼란스러움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좀 지루한 감이 들지만 목회 신학에 대해 언굽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목회 신학의 의미와 목적 존 데이슨은 ’작은 교회의 목사들‘이라는 책에서 “목회 신학 (Pastoral Theology)”이라는 말은 목회자에 대한 신학적 제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의 목회 신학은 목회 후보생들의 신학적 견해를 검토할 때에, 매우 중요히 취급된 것이고, 여기서의 목회 신학이라는 것은 목회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는 전 생애와 직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목회”라 말은 한 지 교회를 담임한 사람의 일에만 특수하게 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나아가는 목회자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리고 “신학”이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관계되는 말이다. 그래서 “목회 신학”은 목회자가 목회 사역을 수행하여 나가는 동안에 내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된다.“라고 했다.
(2) 목회자란 무엇인가? “목회자”라는 말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한 지 교회 회중의 우두머리를 가르치는 말로 쓰여진다. 영어의 “Pastor”는 본래 문자 적으로 “목자” 또는 “목동”을 의미하는 헬라어 포이멘을 라틴어로 번역한데서 유래된 말이다. 헬라어 포임네는 “양”을; 포임니온은 “양 떼”를; 그리고 포이미아노는 “먹이다, 떼를 돌보다, 양을 지키다”를 각각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돌보는 사람을 목사 혹은 목회자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한 일이다. 이것은 신자들의 일반적인 명칭이 양들이기 때문이다.(시 95:7; 요 10:3-5, 11,14,16; 히 13:20; 벧전 5:2) 그리고 동일한 성직을 가르치는 다른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헬라어 “에피스코프”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감독”이라고 번역이 되고, 또 다른 말은 “프레스비테로스”라는 말로 이 말은 “장로”라는 말로 번역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사와 장로, 감독은 동일한 한 직분을 가르치는 말로 쓰여졌다. 사도행전 20:17-18에서 바울이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을 28절에서는 감독자들이라고 부르고 있고 야고보서 1:1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양들을 치게 하신 자”라고 부르고 있다. 칼뱅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 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 이 말씀들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3) 목사의 소명이란 무엇인가. 웹스터 사전에서는 이 말에 대한 해석으로 무려 16가지의 다른 해석들을 나열해 놓고 있다. 현재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유일한 의미는 “어떤 특수한 임무, 혹은 직업으로서의 소환(召喚)”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인 소명의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성서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목회자의 소명”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과 그 일에 관계되는 여타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여 세워 사도, 선지자. 제사장, 사사, 목사들이라고 말했다. 히브리 기자는 히브리서 5:4에서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하였다. (4) 소명에 대한 잘못된 인식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게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부모의 압력. 때로 어떤 부모는 자식이 하나님의 사역 자로 일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만일 그런 단순한 부모님의 바램이 소명 인줄 알고 다른 부르심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아주 잘못될 수가 있다. 물론 부모님이 자식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종이 된 경우도 있다.(삼상 1:20-28) 그럴 경우에도 본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② 개인적인 야망. 목회자로서 세상을 성공하겠다는 야망은 결코 소명이 아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목사는 늘 집에 있으며 편한 직업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소명일 수 없다. ③ 봉사 정신과 희생 정신. 이웃을 위해 착함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고 봉사하고자 하여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경우도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목회자는 이웃을 위해 헌신할 수는 있지만, 사회 사업가나 자선 사업가는 결코 아닌 것이다. (5) 참된 소명 다음에 열거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 혹은 전부는 한 개인의 목회 사역에 분명한 소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① 목회 사역은 영적 사역이다. 영적이라는 세상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말은 목회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내적이며, 불가견적이고, 영원한 자질을 가르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목회는 적어도 이 수준에 올라 있는 사람에게 온전한 헌신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유일의 영적 소명이다. ② 목회는 사람을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사역이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적으로 연결시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영원한 봉사요 헌신이다.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 이 이유 때문이다. ③ 목회 사역은 인간을 위해 참된 가치 사역의 모든 것을 관여하는 일이다. 이 점이 목회자가 변호사와 의사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목회자의 지대한 관심은 인간의 영혼에 집중되어 있고 그리고 이 인간의 영혼 문제가 인간의 복지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명 의식이 있어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 (6) 어떻게 소명을 받는가?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소명을 받았다.(눅 6:13) 사도 바울은 그의 중생과 관련하여, 혹은 그 직후에 환상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행 9:5)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그는 아나니아로부터 그와 동일한 취지의 하나님 메시지를 받았다. (행 9:15-17; 갈 1:1, 15. 16) 디모데와 디도는 사도 바울에 의해 소명을 받았다. (행 16:1-3; 고후 8: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 두 사람의 마음에, 특히 디도의 마음에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마음과 같은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목회 사역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일들을 점검하므로 자기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가질 수 있을 것이다. ①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들의 사역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혹은 聖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한다. ② 소명이 없는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그들의 지상 과업으로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중생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③ 소명이 없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무오성과 영감을 부인한다. ④ 소명이 없는 사람은 설교를 기계적으로 하며, 다른 사람의 설교를 인용하되 성경은 그들이 말하려는 몇몇 구절들을 설명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⑤ 소명이 없는 사람은 자주 목회자 사역에 환멸을 느끼고 그들이 받는 수입에 불만을 가지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종들에게 맡기신 거룩한 일이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사역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역이다. 그리고 목회 사역은 영원한 상급을 가져다 줄 것이다. (7)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성경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하셨지만 질서가 가장 엄수되어야 할 때는 교회 정치를 확립할 때이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불규칙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에서는 말썽을 일으키며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히 맡지 못하게 하려고(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음으로) 소명을 받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가지지 못하도록 특별히 유의했다. 진정한 사역 자로 인정되려면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아야 하고(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다음에 소명에 응해야 한다. 즉 명령을 받은 일은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바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사도직을 주장하려 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과 자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고전 1:1)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꾼도 자기가 주의 명령으로 사도직에 임명되었다는 것과 위임받은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교회에서 발언할 권리를 강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나 그 중에 한가지도 없는 사람이 이런 영예를 가지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칼뱅의 강요 하권) (8)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네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① 어떤 종류의 사역 자가 될 것인가? ② 어떻게 ③ 누구에 의해서 임명을 받아야 하는가? ④ 임명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한 엄격한 소명(외적 소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비밀한 소명(내적 소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각 일군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가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된 직책을 받은 것은 야심이나 탐욕이나 그 밖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속마음이 잘 증거한다. 우리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각 사람에게 이런 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이 사명에 임하는 사람도 그의 사악한 심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합당이 부르심을 받는다. 또한 사람들은 평신도에 대하여 그들이 맡은 직분이 적당하고 그 일에 그가 유능하다고 인정하면 흔히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인정을 한다. 좋은 목사의 경건을 겸한 높은 학식과 그 밖의 은사들은 그가 그 일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높은 자리에 예정하신 사람들에게는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무기를 주셔서 빈손으로 임직원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여러 가지 직책을 논할 때, 각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은사들을 논한 것이다 (고전 12:7-11). (9) 목회자의 자격 ㈀ 자연적인 자격 자연적인 자격이라 함은 목회자의 인간 본성에 속한 자격을 말한다. 이 자격이 그 사람의 영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않는 사람도 이런 자격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도 이러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① 정신과 신경의 안정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회나 성도들이 극히 어려운 정신적 상황에 부딪쳐 목회자에게 도움을 구할 때 목회자가 정신적 인정이 없이는 그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② 동정심은 목회자가 참을 수 없는 시련을 당하면서 생기는 무정한 마음을 막아 줄 것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사랑을 말해도 실제 목회자에게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성도들은 목회자의 사랑을 믿지 않을 것이고 그 설교에 감동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③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한다. 사람들에 대한 형식적인 관심이나 사무적인 관심을 성도들은 쉽게 안다. 목회자는 교회를 직장으로 하는 직업인이 아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이름만 기억해도 되지만 오래 교회를 나온 사람은 그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④ 지혜롭게 생각하고 일을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의 지혜는 성도들의 그것 보다 월등해야 한다. 경험을 통한 지혜도 있어야 하고 성령의 지혜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가지는 여러 문제들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하 것이다. ⑤ 목회자는 열심히 일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직업의식이나 마지못해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⑥ 목사의 책임감은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의 말하고 행동하는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목회자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 교육적인 자격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할 경우에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계 22:18-19).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평생 연구 생활을 해야 한다. ① 공인된 정규 신학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런 학교에서 목회자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목회에 대한 모든 지식을 폭 넓게 배워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과 목회의 현장에서의 경건된 생활과 교육 방법, 그리고 봉사 정신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 같은 경우에 정규 과정이 아닌 급조되거나 조잡한 목회자의 과정이 많아서 그런 곳을 이수한 목회자들로 인한 병폐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한국 교회에서 이단시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크던 작던 모두 이런 비정규 과정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공인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들도 기회를 포착하여 정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므로 체계적이고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조직적 지식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올바르게 전하고 싶어도 말씀의 지식이 부족하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된 신학적 지식에 대한 판단이 부족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도들에게 독초를 먹이는 경우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비 성경적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서도 설교를 아주 잘한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데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② 일반 대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 좋다. 오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지식 수준은 매우 높아서 문맹자는 없을 뿐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목회자가 꼭 우수한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자의 교육적 수준이 낮아 용어 선택이나 일반적인 상식, 사회 생활에 대한 판단, 상도들의 생활에 대한 긍정적이고 납득할 만한 충고를 할 수 없으면 목회자의 인기가 소실되고 신임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가장 좋은 질적 교육을 받아 자기들을 인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목회자는 과학, 철학, 역사, 문학, 언어, 사회, 정치, 경제 그 밖에 사람들이 사는데 접촉되는 모든 제반 문제에 대한 고상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배우고 판단할 수 있는 기능은 대학 교육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훌륭히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무디같은 사람은 아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전도자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그런 일군으로 세우신 것은 복음 전도의 진정한 능력은 영적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을 받고 목회에 크게 성공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을 받은 인물들은 그 당시에 최고의 학문을 통달했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바울, 모세, 다니엘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10) 영적인 자격 위에서 언급한 자격보다 사실 더 중요한 자격은 영적인 자격이다. 그것은 영적인 자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모든 자격을 구비했어도 훌륭한 목회자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영적 저격은 ① 반드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이 말은 목회자가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적이거나 사고적인 수준의 믿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생활에 밀착된 복음 전도를 하기 어렵다. 즉 이론적이고 사고적인 복음 전달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이론이나 상상이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격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전할 수 있다. 이런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을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사람은 세우지 못하게 하셨다 (딤전 3:6). ② 성령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엡 5:18). 성령 충만에 대한 신학적인 논란은 많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어떤 감정의 충만이나 신학적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나 많은 은사를 체험하고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지배받는 것이다. 즉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경우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함께 모여 뜨겁게 열심히 기도하였을 때고(행 2:1-4,14,; 4:8,31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였으며, 회개할 때(행 2:37-43), 그리고 사도들에게 안수 받을 때(행 8:17)이다. 목회자가 성령으로 충만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성도들에게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서다. (11) 목회자의 영적인 생활 목회자의 영적 생활은 목회의 사활(死活)이 달려 있는 문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고 목회자의 일이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성도들이 생활에 관여하여 충고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영적인 일을 기초하여 되는 일이다(요삼 2).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적 생활에 이상이 생긴다면 목회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영적 생활을 알기 쉽게 분별하기 위해 영적인 생활인 것 같은데 영적인 생활이 아닌 것과 참 영적인 생활을 비교하여 말하고자 한다. ① 영적인 생활이 아닌 것. ㉠ 거룩한 체 하는 외모. 목회자의 거룩한 척하는 외모는 영적인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 구별된 복장. 카톨릭의 거룩한 사제들의 옷차림이 그들을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인 증거는 안된다. 목회자가 노동복을 입고 설교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언제나 설교 때에 입는 특수한 옷을 입고 살수는 없다. 일상 생활에 맞는 다른 사람에게 덕을 줄 수 있는 옷차림을 하는 것이 좋다. ㉢ 경건된 말씨. 어떤 특별한 음성과 말씨가 거룩하고 경건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교회의 어떤 단체에서는 목사들의 음성 변조까지 교육을 한다 하니 그런 인위적인 노력은 오히려 목회자의 경건 생활에 외식을 더할 수 있다. 좋은 음성으로 성도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특별한 음성이나. 말씨는 성도들에게 오히려 위화감을 준다. ㉣ 금욕 생활. 아이런싸이먼 박사(Dr. H.A.Ironside)는 성경에 “에녹은-----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창 5:22)는 말씀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집중하게 했다. 이 구절로 정상적인 가정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다. 오히려 목회자의 독신주의나 금욕 생활은 교회 성도들에게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하고 경계심을 불러 일으켜 불미스러운 사고를 유발시킨다. ㉤ 불경건한 신비주의 목회자들 특히 목회 초년생들은 이 부분에 대한 엄청난 유혹을 받는다. 교회를 처음 설립하고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때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그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는 중에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고 잘못된 사상을 접하게 된다. 목회는 씨를 심는 것과 같아서(마 13:31-32; 막 4:26-29) 정성과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인데, 당장에 큰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욕심이 작용하기 쉽고 그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한 신비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신비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분을 가진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목회자들 보다 더욱 우월하고 탁월한 영감의 권위나 어떤 영권을 전매 특허처럼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이 행세하는 영적인 일들을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나 목회는 천사 모양으로 자기를 변형한 사단의 장난일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신비주의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순종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을 원하신다. ② 영적인 생활인 것. ㉠ 진실된 헌신과 희생적인 생활. 목회자는 자기가 어떤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을 방해하는 사람을 거절하거나 물리쳐서는 안 된다. 누가 되었던 간에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아 친절히 도와주어야 한다. 즉 오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십리까지 가 주는 자기 희생 정신이 필요하다.(마 5:41) ㉡ 진정한 겸손의 생활. 총신 대학원의 학장이셨던 김희보 목사는 목회자의 필수적인 자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다. 진정한 겸손이란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자기를 무시하도록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겸손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롬 12:3) 자기가 맡은 일에 감사하며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 ㉢ 밝고 무게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목회자들에게는 언제나 우울한 일들이 많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좋은 일을 말하기 보다 우울하고 걱정되는 일들을 많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시험에 빠져 목회 생활에 회의를 하고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럴 때일수록 더욱 고상하고 무게가 있으며, 밝게 말하고 처신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재치와 지혜로 일을 처리하고 고상하고 덕이 있는 유모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인내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인내라는 말은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딘다는 말이다. 뿌려진 씨가 열배되어 추수하기까지 길이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서둘러 실패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으나 인내하여 숙고함으로 실패하는 일은 없다. ㉤ 영적 경성의 생활. 목회자가 목회를 직업적으로 하는 일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단순한 선생이 되어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영감이 넘치는 설교나 목회 생활이나 말씀의 교육은 싶지 않다. 목회자의 영적 생활은 목회에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12) 영적 생활의 촉진. 목회자는 영적 생활의 촉진을 위해 다음과 같은 일을 힘써야 한다. ① 부지런히 성경을 읽은 생활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설교를 위한 성경을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개인의 심령을 위한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② 매일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해야 한다. 식사 기도나 잠을 자기 전에 하는 일상적인 기도 이외에 개인적으로 은밀한 기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 기도는 강대 상에서 하는 목회 기도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③ 독서와 묵상의 생활을 해야 한다. 목회자가 접해야 하는 책은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정신에 풍요를 주는 책을 보아야 할 것이며, 성도들이 보는 책들도 보아야 한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얻어야 하는 정보의 루트는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 가운데 성도들이 보는 책들을 구해 읽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특히 목회자는 신앙에 도움되는 책을 늘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묵상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말하기를 “묵상을 대신할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마음에 활력을 주며 그 활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④ 성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 목회자의 일상 생활, 즉 가정 생활, 심방 하는 것, 병자들을 위로하는 일, 운동이나 독사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목회자는 성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 물론 교회를 돌보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⑤ 순결한 생활은 목회자의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목회자는 자기 자신이나 아내나 다른 모든 성도나 불신자 사이에서도 성결 생활이 증명되도록 도덕적인 성결을 잘 유지해야 한다. 목회자의 부도덕한 말과 행동은 목회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13) 목회자의 사회 생활. 목회자의 사회 생활은 가정 생활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목회자가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에서 보내게 되고 목회자의 가정 생활은 밖으로 흘러 나아가 결국 성도들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① 목회자의 아내에 대한 태도와 행실은 일반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아내에 대한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말에 예의를 세우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부부간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목회자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공공연하게 공개적으로 표시해도 성도들에게 질시의 시선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성도들과 야유회를 가게 되었을 때 목회자와 아내가 팔짱을 끼고 정답게 걸어가는 것을 보면 성도들 가운데 홀로 사는 여 성도나 과부들에게 위화감을 주어 목사와 거리감을 가지게 한다. ② 목사의 아내 목회자의 아내는 다른 가정의 아내와 다른 점이 많다. 어떤 목회자는 불행하게도 목사의 아내가 될 자격을 갖추진 못한 여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목회를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인데 목회자의 아내도 남편인 목회를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의 아내라면 가정을 꾸려 가고 아이들을 잘 기르고 남편을 도와주면 좋은 아내가 될 것이지만, 목회자의 아내는 그의 모든 언행 심사가 성도들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성도들은 목회자의 아내가 목사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지던지 아니면 목회자와 같은 수준의 믿음과 인격을 가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목회자의 아내는 자기는 교회의 사모가 아니고 목사의 부인이기 때문에 목사의 부인의 역할만 잘하면 된다고 말한다. 즉 한 남편의 아내 노릇을 잘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에게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되었으면 그의 아내도 하나님에게 동일한 소명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에스겔에게 “인자야 네가 네 기뻐하는 것을 한번 처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겔 24:18-19)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내도 죽음으로 헌신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호 1:2-3)라고 하셨으니 목회자에게 짝 지어 주신 아내는 목회자를 돕는 배필로 짝을 지어 주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더욱 목회자의 아내의 직분을 확정 시키신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 하시고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하셨다. 만일 목회자의 아내가 남편인 목사를 돕는 배필로서 충성스러우면 그 목회자는 목회에 있어서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③ 목회자의 자녀 교육 또한 중요하다. 목회자의 자녀가 다른 일반 성도들이나 다른 불신자들의 자녀들 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게 우수하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 보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높은 수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의 자녀들이 우수하다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인 목회자의 수입이 다른 사람들 보다 적을 지라도 일반 가정의 아이들 보다 더 훌륭한 교양과 교육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세아의 가정을 살필 필요가 있다. 호세아는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았는데 그들의 이름은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호 1:8]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호 1:3-2:3]하셨으니 어느 누가 자기 자식을 낳아 이런 이름을 붙일 것인가? 그러나 목회자는 자식을 하나님에게 헌신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목회자의 자녀들이 모범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에 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④ 목회자의 손님 대접은 성도들과 목회자를 더욱 가깝게 할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들이 명랑하고 기분 좋은 인상을 받고 방문한 것에 대한 보람을 가지도록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다른 가정을 방문했을 때도 같은 효과가 있도록 예절 발라야 한다. 그러니 위해서 사교적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개척자로서의 확고한 의지와 긍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어떤 형태로든지 개척된 교회다. 새로운 교회가 개척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명령이시고, 새로운 지도력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들이 했던 거룩한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인데 오늘에 와서 그 일을 교회 설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은 분명한 지도자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백절불굴의 믿음을 가지고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자기에게 맡겨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존 데이슨은 말했다. 5. 교회 개척의 계획 수립. 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먼저 생각할 점은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과업은 처음부터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규모야 커도 좋고 작아도 좋다. 신령한 마음들이 한 교제 안에서 서로 아끼고 돌보며 사랑의 심령이 상호간 도움을 주며, 불신 사회를 향하여 흘러 내려가는 명실공히 하나님 복음의 교두보 역할을 감당하면 족한 것이다. “개척 교회(New Church)”는 같은 지역 안에서 하나님을 함께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집단을 말한다. 개척 교회는 새로운 지역 사회가 형성되는 동안에는 계속 필요할 것이다. 교회의 개척이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박사는 ① 교회의 개척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며 ② 교회 개척은 교단의 생존을 의미하고 ③ 교회 개척이 새로운 지도력을 개발하고 ④ 개으르고 나태한 기존 교회들에게 자극을 주며 ⑤ 주님의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라 했다. 6. 교회의 성격을 확립하라. 새로운 교회가 설립이 될 때 그 교회가 가지는 성격은 목회자의 목회 신학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파하여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할 것인가는 그 교회의 성격을 결정하고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는가를 결정한다. 예를 들면 장애자들을 위한 교회, 학생과 청년들을 위한 교회, 군인들을 위한 군인 교회, 환자들을 위한 병원 교회, 연예인들을 위한 연예인 교회, 체육인들을 위한 체육인 교회가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진 교회일 수는 없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목으로 3년을 봉사한 후 교회를 개척했다. 그것은 이미 자리 잡힌 교회에서 부목이나 기관 목사로 일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목회자의 사명을 소신껏 감당하고자 하는 열망이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열망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그것은 마치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 갔을 때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그를 부른 것과 같은 일이었다.(행 16:6-10) 1)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를 섬기고 싶었다. 목회자들이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던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확장시키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가운데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벗어 나 많은 시행 착오를 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아닌 내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여 저지른 잘못이 많았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말한 교회 개척의 실패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을 했다. 2) 지역 사회에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전도를 가장 열성적으로 하고 효과적으로 하는 교회는 개척 교회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명령하신 것을 가장 잘 수행하는 교회인 것이다. 나는 내가 전도해서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새롭게 형성된 아파트 지역에 희어져 추수하게 된(눅 10:2) 많은 알곡을 본 것이다. 「라일 쉘러」 (Lyle Schaller)는 전통적인 교회들이 답답한 정체 상태를 벗어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의 이 말이 나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것이다. 3) 이미 믿는 성도들의 믿음을 바르게 성장시켜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을 성장시킨다는 의미에서 성도들의 어머니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도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다. 교회는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이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서 보호를 받으며, 믿음이 자라기 때문이다. 4) 선교를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선교는 교회가 가야 할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교 때부터 군대에 입대 할 때까지 내가 봉사하고 있었던 교회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자각한 선교 사역의 선두 주자였다. 그 교회는 홍콩, 태국과 보르네오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선교부의 간사로 일을 하면서 선교에 대한 기초적인 훈련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로서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한 후에 선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선교사로 헌신을 하지 못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선교사를 돕는 협력 선교를 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개척할 때 선교하는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을 했다. 5) 교회를 통한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했다. 이 세상은 날로 죄악으로 어두워지고 빛을 찾는 사람은 많으나 빛을 찾는 사람은 적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 목회자의 소신껏 교회를 섬기기 위해 교회 개척을 하였다. 모든 교회의 성격이나 운영 방법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격이 다르다고 해서 교회가 세워진 목적이 달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를 새로 시작하려고 할 때 개척 교회 목회자는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인지를 엄격히 결정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사도들에게, 사도들로부터 교회에 전수되어 내려 온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여 지키도록 하는 교회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세상을 향해 사도적 사명을 완성하는데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교회가 복종을 통해 계속 인정하고 나타내는데서 사도직이 계승된다. 7.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먼저 착수해야 할 일들 1) 내부 능력의 분석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능력을 엄격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 문제를 소홀히 하게 되면 교회 설립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된다.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는 교회를 작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능력을 작은데 큰 교회를 시작하게 되면 교회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오게 된다. 교회 내부적 능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① 교회 운영 자금, 교회 설립을 위한 특별 헌금, 사업, 지출 등을 포함한 교회의 재정 자원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② 교회 설립을 위한 설비와 공간을 분석해야 한다. 운영 조건과 아울러 교회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분석해야 한다. ③ 성도들의 인구 통계적 요소를 분석한다. 각 연령층에 속한 사람을 분석하되 헌금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실력을 가진 사람과, 전도를 할 수 있는 사람, 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 등을 분석해야 한다. ④ 교회의 사회학적 측면, 즉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자유주의적인가를 분석하여 지역 사회에 알맞은 교회 운영을 시도해야 한다. 보수적인 교회라 할지라도 진보적인 성향이 뚜렷한 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때에는 복음 자체는 진보적일 수 없으나,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⑤ 교회의 권력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이 본분에 대한 확실한 경리 없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교회의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칼뱅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셨을 때에, 이미 말한바 와 같이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에게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마 28:19] 그러고 주님은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신성 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과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사도라 사칭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목사들은 어떠한가? 바울은 자기뿐 아니라, 그들 전부에 대하여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고 하였다. 이 구절들과 빈번히 나타나는 구절들로 보아서, 우리는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행한다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추론한다. 가르치는 방법은 공개적인 것 뿐 아니라, 각 가정에서 사적으로 가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라고 말했고, 조금 뒤에 가서는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다고 했다.[행 20:31] 목사가 하는 일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임명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만일 그들의 태만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이 문지 때문에 멸망한다면 [3:17]”이라고 하셨다. 바울이 자신에게 관해 한 말은 모두에게 해당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7]” ⑥ 교회의 조직과 경영, 재직들, 평신도 지도자, 인사 정책 등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⑦ 교회의 지역 사회에 알맞은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든 내부적인 전략은 외부적인 환경과 맞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도시의 변두리에 세워지는 교회의 내부적인 분석이 도시의 중앙에 세워지는 교회의 그것과 같을 수 없을 것이며 농촌과 어촌에 세워지는 교회가 도시에 세워지는 교회와 같은 방법을 쓸 수 없는 것이다.
2) 교회 설립의 외부적인 조건들 교회 설립의 초창기에 가장 중요한 조건은 외부적인 조건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 올 때에 목사의 개인적인 인격이나 교회의 여러 조건들이나 프로그램이나 기타의 조건들을 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들어 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런 것들은 점차 밝혀진다. 그러므로 교회가 설립되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를 설립한 후에 성도들이 교회 들어 올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① 장소 선정. 로버트 엔 화이트라는 사람은 “교회 개척의 외부적인 환경은 제일 중요한 점은 장소의 선정이다. 그것은 교회가 지역 사회, 시, 군, 국가, 세계, 그리고 자신의 교파 등을 포함하고 있는 외부적 환경 안에서 운영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소의 환경 내에서 교회의 영향을 끼치는 복잡한 흐름이 있다.“라고 했다. ㉠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살펴야 한다. 즉 그 지역 사람들의 개인 소득, 동산, 부동산, 삶의 유형 등을 살펴야 한다. 아파트의 경우에 30평 이상의 아파트 보다 15-25평 정도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더 잘한다. 이 사람들은 더욱 잘 살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크고, 잘 살 수 있는 학력, 경력, 집안의 배경 같은 유리한 조건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의 축복을 바든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뚜렷하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11조도 성실히 잘 드린다. 내가 30평 이상 50평이 아파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 그곳 사람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조건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그런지 모르겠으나 교회 생활에 너무 불성실했다. 11조 생활도 수입이 너무 많아 드리지 아니하고, 기도 생활도 개을렀으며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를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런 동네의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일종의 취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설혹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원래 다니던 교회에서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통 수단이 좋아서 가난한 개척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 연령층의 변동, 교육 수준, 미망인과 퇴직자들의 숫자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 추세 등의 인구 통계학적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30대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개척하기에 좋다. 이 나이의 사람들은 대게 아이들이 어리고 멀리 있는 다니던 교회에 성실히 다닐 만한 조건이 되지 아니한다. 우선 아이들을 놔두고 몇 시간씩 집을 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직장과 사업체에서 시달리다가 주일까지 힘들게 살 의욕을 가지지 아니한다. 또한 이 부류의 사람들은 원래 다니던 교회에 대한 애착심도 별로 많지 아니하다. 그들의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과 강력한 성취 욕은 신앙 생활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새로운 지역에 새워진 활기 찬 교회에 대해 많은 매력을 가진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는 우선 이런 부류의 가정에 자라는 아이들을 주목하라. 아이들이 교회를 나오면 어느 땐가 반드시 그 부모들도 교회를 나오게 될 것이다. ㉢ 지역의 상업 활동, 지역의 성장과 퇴보, 교통 수단 등에 따르는 도시의 문제 등도 있다. 퇴보하는 지역에 새워진 교회는 퇴보한다. 사람이 새로운 삶을 위해 모이는 곳에 있는 교회는 역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 그러나 너무 교통 수단이 좋은 곳이면 교회가 성장하는데 지장이 있다. ㉣ “가장 중요한 시간”에 대해 경쟁이 되는 추세-주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평상시의 저녁 시간들, 어떤 다른 일이 당신과 경쟁하면서 그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주일이다.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은 주일에 자기 나름대로의 취미 생활을 즐기기 위해 여러 가지 스케줄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 생활에서 그 취미를 찾고 보람을 얻는다. 이런 점이 교회 개척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지역 사회에 있어서의 교회 출석 추세와 이런 추세의 이유, 이 시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판명된 교회 활동은 무엇인가? 교회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말한다. 예배, 기도회, 성경 공부, 야유회, 구역 활동, 주부들을 위한 여가 선용, 아이들을 위한 특별 활동, 부부들을 위한 어떤 류의 모임, 절기 따라 떠나는 여행 등등은 특별한 여가 선용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 있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 활동은 교회를 활성화하고 전도를 극대화하며 성도들의 신령한 교제와 사회적인 단결력을 고취하여 비록 개척 교회지만 교회에 소속된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하므로 교회 성장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 사회 가치관의 변화, 지역 사회의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런 영역의 평가는 가족 관계의 결속력이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한 태도 등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문제들을 신중히 검토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런 중요한 정보들을 어디에서 얻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정보들은 부동산 업자들이나, 지역 정보지, 동사무소, 구청의 담당 직원, 교회 안에 있는 사업가, 땅값의 변동 추세, 인구 변동 , 또는 같은 지역 내의 동역자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모으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의 발전적 면에서 진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모을 수 있도록 제한된 양의 실질적인 질문을 구상하여야 한다. 자료를 지나치게 많이 모아 두는 것은 오히려 교회 개척의 계획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 이외에 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경우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쉬운 정보는, 그 지역에 있는 개척 3년 이내의 담임 목사를 찾아 가 의논하는 일이다. 이것은 대단히 망설여지고 어려운 일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임을 명심해야 한다.
3) 예배 처소(성전) 마련하기. 농.어촌. 도시, 중소 도시. 대 도시. 농촌, 어촌 도시의 중심지, 변두리 등의 장소가 정해지면 교회가 들어 설 건물을 얻어야 한다. ① 건물 임대 거듭되는 말이지만,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교회가 잘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이는 곳에 건물을 임대하려 했을 때 터부니 없이 비싼 임대료에 거의 염두를 낼 수 없다. 그렇다고 가진 돈에 맞추어 건물을 임대하려 하면 도저히 교회가 될 것 같지 아니한 한적한 변두리 지역이나 극히 낙후된 지역이 되어 실망을 하게 된다. 이럴 경우에 목사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특별한 방법을 찾아야 하고 이에 따르는 비상한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교회 개척이 한국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교회 개척의 가장 호기였던 70년대와는 달라 지금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될 리 수 있는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하는데 그곳은 고밀도 지역인 고층 아파트가 들어 선 주거지역으로 주민들이 입주할 때에 맞추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아파트의 세대는 최소한 2,000세대일 것이며 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1,000세대 이하의 아파트 단지는 실패할 확률이 크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상가의 경우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감히 염두를 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가는 대게 의 경우 주민들이 입주할 때 상가가 오픈을 하게 되는데, 그 때는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싸지만, 아주 작은 면적(전용 면적 15평정도. 이 정도의 전용 면적은 공유 면적(복도 등)까지 합하면 대개 25평이라고 한다)을 보증금 얼마에 월세 얼마를 주기로 하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교회 장소가 협착(狹窄)할지라도 넓게 사용하는 방법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상가의 복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든지, 화장실을 점심을 준비하는 주방 정도로 사용하는 방법 등이 있으며, 주일에 문을 열지 않는 주변의 다른 상가를 싼값으로 임대하여 사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우리 교회도 이층의 넓은 화장실을 주일 점심을 준비하는 (주로 국수를 끓었지만) 장소로 사용했고, 같은 층의 넓은 피아노 학원을 주일마다 무료로 대여하여 사용했다. 이렇게 되면 목사가 어떤 전도 전략을 세우며 어떤 설교를 하는가에 따라 교회를 섬길 줄 아는 성도들이 등록을 하게 되고 매월 부담해야 하는 월세는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런 장소를 얻어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성공한 개척 교회란 에서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또 다른 방법은 이런 상가는 입주한 후 일년 정도 지나면 처음 보다 월등히 임대료가 떨어진다. 그러나 주민들이 입주한 후 일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미 교회를 정해 버린 성도들이 많아 교회를 섬길 줄 아는 새로운 성도를 확보하기가 어렵게 된다. ② 이미 세워진 개척 교회를 인수받기. 이럴 경우에 한가지 명심해서 주의할 점이 있다. 물른 교회가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왜 교회를 타인에게 인수하려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타인에게 교회를 인수하려는 이유는 첫째, 교회가 잘 되지 아니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다. 이런 경우에 그곳은 인수하여 새롭게 단정을 하고 전도를 해도 잘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실패한 교회가 어떤 특별한 은사가 없는 한 같은 경우를 답습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둘째, 교회가 부흥되어 다른 넓은 장소로 이전하던지 아니면 상전을 건축해 나가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이전하는 전 교회가 얼마나 멀리 이동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이미 상당한 기간 기존 교회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전도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의 주체가 누가 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주체라는 것은 교회를 개척하는데 누가 경제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가를 말한다. 이미 몇 사람의 성도들이 있고 예배 처소도 있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하려는 목사에게는 매우 좋은 조건인 것 같아도 교회 주체 세력들(단 한 사람이라도)이 목사의 목회에 상당한 지장을 줄 것이다. 대게 의 경우 의욕이 넘치는 개척 교회 목사와 기존의 세력들 간에 분쟁이 생길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목사는 그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미 세워진 개척 교회를 인수받을 경우 부임하는 목사가 주체가 되도록 교회의 모든 재정적인 것을 목사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즉 건물의 임대료 전체를 목사가 지불하는 것이다. 그럴 능력이 부족하면 아예 그런 교회를 맡지 아니하는 것이 좋다. 까닥하면 어려움을 당하고 심령의 상처를 받게 될 것이며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결과를 당한다. 물른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부언 한다. 4) 성전의 비품 마련하기. 어떤 곳이던 장소를 확보하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시설물들을 구입해서 성전을 만들어야 한다.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비록 임대 건물에 세든 교회지만 성물을 아주 최고급품으로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제정 사정이 넉넉하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그러나 이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좋은 성물로 아름답게 성전을 꾸미는 것은 교회가 성장하여 힘이 있을 때 해도 하나님께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교회 비품을 최소한의 경비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중고 성물을 취급하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모든 비품을 구한다. 그런 정보는 기독교 계통의 신문에 잘 광고가 많으며 교회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있다. 그런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은 장로나 집사들이 많다. 그래서 개척 교회 목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그들이 달라는 값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엄청나게 싼값으로 중고품을 구해 적어도 수 십 배의 이익을 남기고 물건을 판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업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저기 많이 다녀 보고 꼭 필요한 필수적인 성물들만 우선 구입해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의 여기 저기를 탐색하다 보면 성구를 무료로 준다는 광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하이텔이나 천리안의 KCM에 들어가서 어딘가 이런 광고를 본 기억이 있다. 새로 교회를 찾아 등록하는 성도들은 교회의 으리으리한 성물을 보고 등록하지 않는다. 예배 분위기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야 등록을 한다. 지나친 교회 치장은 오히려 새로운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잘 해 보려는 성도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5) 목사의 사택 마련하기. 교회 예배 장소는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간신히 마련되었으나 목사와 아내와 아이들이 살집이 또한 큰 걱정거리다. 이럴 때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일반 주택지의 지하실이나 이층을 얻어 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목사의 사택이 꼭 아파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형편이 되는 데로 아파트로 사택을 옮기면 될 것이다. 좀 거리가 멀어도 소형차를 구입하던지 아니면 어차피 있어야 하는 승합차를 이용하여 왕복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나는 상계동에 교회를 시작했을 때에 미처 이사를 할 수 없어 거의 일년 동안 강남에서 상계 동까지 출퇴근을 했는데 그 거리가 25키로나 되었다. 그래도 새벽 기도회 한 번 빠지지 않고 낡은 승합차를 타고 아내와 나는 교회의 재단을 지켰다. 끝으로, 사도들이 전 세계를 위하여 한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목장에서 양떼들에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말로 보건대 교회의 권력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목사에게 전적으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고도의 지혜가 필요하다. 즉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함”의 지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