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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한성부 시대 도성 즉 서울 성곽의 안을 '문(門)안'이라 하고 그 밖의 주변지대를 '문(門)밖'이라고 불렀다. 이 '문안' · '문밖'의 호칭은 같은 서울지역을 도성 성문의 안쪽 지역과 바깥쪽 지역을 구분 하여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주변지역에서 서울의 중심지로 들어올 때에는 흔히 '문안에 간다'고 말함 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오랜 옛날부터 불러오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당시 한성부에 포함되었던 성외(城外)의 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하여 대개 도성밖 사위 10리 정도였다. 왕십리 역시 성저십리에 속하였던 '문밖'이었다.
현재의 왕십리는 상·하왕십리로 명칭되어 성동구의 일부분의 지역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원래는 광희문을 나와 고개를 넘으면 광활한 벌판이 나오는데 이를 '왕십리벌'이라 하며 현재의 한양대학교 부근에까지 이르러 '전관평(箭串坪:살곶이벌)'과 맞닿아 있었다. 왕십리벌에서는 주로 무, 배추 등을 길러 성안에 채소류를 조달하였고, 전관평은 국초부터 큰 목장을 두어 군마와 파발마를 사육하였다. 봄·가을에는 말탄 군졸들의 열병과 연습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왕십리는 중구의 신당동·황학동을 비롯, 성동구 도선동·홍익동·행당동·응봉동 일부까지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대문 밖 청계천 남쪽을 왕십리벌이라 부르다가 1914년 4월1일 상왕십리와 하왕십리로 나뉘어졌다가 후에 여러 동으로 개편되었다.
어느 동네나 땅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지만 왕십리(往十里)의 풍수설화는 그 중 유명하다.
조선초기 무학(無學)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한양의 지리를 두루 살필 때 산기슭마다 빽빽하고 골짜기마다 막히고 좁아서 뜻에 맞는 곳이 없는지라, 삼각산(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용맥을 찾아 내려오다가 목멱산(지금의 남산) 제일 끝자락에 당도하니 들이 넓고 훤히 트여 시원해서 과연 새 도읍터로 마땅한 듯 하여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 그 때 한 백발의 노인이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에게 채찍질을 하며, "이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꼭 무학과 같구나! 어찌 좋은 자리를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닐꼬."라고 중얼거렸다.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다가가 가르침을 청했다. "노인장께선 소승이 무학이라는 것을 알고 하신 말씀 같사온데 혹시 좋은 도읍지가 어디에 있는지 소승에게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동북방으로 왕10리 하면 명당 자리가 있을 것이오."하고 말하고 사라졌다 한다. 무학대사에게 도읍 터를 알려준 노인은 신라말기의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대사의 영혼으로서 죽은 지 수백 년 후에 나타나서 무학대사에게 좋은 자리를 잡도록 일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학대사는 북악산 아래 현재의 경복궁 자리에 도읍을 정하니 이곳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한양이다. 이 뒤로부터 무학대사가 도선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10리를 더 갔다 해서 왕십리, 서울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10리쯤 가면 왕십리라는 동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도읍할 터를 찾았다 해서 왕십리 등으로 불렀다 한다.
이 풍수설화는 한양 정도와 무학대사와의 관련을 절대시한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항용 한자로 '往十里(왕십리)'라 쓰지만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경도(京都)에는 '王十里'로,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경조오부(京兆五部)에는 '旺深里(왕심리)'로, 또 300년 전의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등에는 '往審(왕심)' 및 '往尋(왕심)'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거의가 왕십(十)이 아니라 찾아 살핀다는 '심'을 쓴 것이 흥미롭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설봉산 석왕사기(雪峰山 釋王寺記)에 기록된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이성계가 스무살 때 아버지 환조가 죽었는데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중 두 사람이 함흥 땅을 지나가게 되는데 뛰어난 산세를 보고 스승이 먼저 제자에게 묻기를 "이 곳에 왕이 날 흥왕지지(興王之地)가 있다고 하는데 너도 아느냐"하니 제자가 대답하기를 "산이 세 줄기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는데 아마도 가운데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가 봅니다"하였다. 이에 스승이 제자의 의견을 고쳐주면서 "아니다. 사람을 보면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긴요하듯이 저 산도 오른 쪽 긴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대화를 이성계 집 종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급히 집에 가서 주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이성계가 하인에게 "무엇을 꾸물대고 있느냐 빨리 따라가서 두 분을 모셔오라"하였다. 종은 함관령 밑까지 따라가서 두 스님을 모셔와 환조의 장지를 택하게 되는데 바로 이 두 스님 중 스승이 나옹이요, 제자가 무학이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무학 대사가 설봉산 아래 토굴에 살고 있었는데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1만 마리는 됨직한 닭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1천여호나 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찧는 소리가 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성계는 먼저 이웃마을 점쟁이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는 "여인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해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설봉산이 있고, 거기 토굴에 9년간이나 도를 닦고 있는 신승(神僧)이 있습니다. 가서 해몽을 부탁해 보시지요"했다. 이성계는 노파가 가르쳐 주는 대로 설봉산 토굴에 찾아갔다. 그 신승은 바로 무학이었다. 무학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해몽을 시작했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1만여 집에서 일시에 닭이 울고 1천 여 집에서 방아 소리가 난 것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무학은 이성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요. 큰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인(聖人)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천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11일 왕사로 임명되었다. 바로 태조의 생일날이었다.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했다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의 부도(浮屠)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천보산 자락의 회암사(檜巖寺) 왼쪽 산등성이에 있다. 보물제388호. 1397년 건립. 무학대사 열반 전에 이성계가 미리 마련해 놓았다. 정교하게 공을 들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도 앞의 상석(床石)과 석등이 특이하다. 두 마리의 사자가 상대와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는데 양감이 풍부하다)
조선왕조시대 도성 안팎에 거주한 양인들의 대종은 주로 성저(城底)에서 경작에 종사한 농민들이었다. 수도 한성의 경우 도성 안은 협소하여 조선 초기부터 가옥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가옥에 딸린 채전(菜田) 외에는 경작지가 없었으며 따라서 농경주민들의 일터와 주거는 도성 밖 이른바 성저십리(城底十里) 내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동대문밖 왕심평(往審坪)은 순무[蕪菁] · 무우 · 배추[白菜] 등 야채류의 산지이고 청파(靑坡) · 노원(盧原)의 2역이 있는 일대는 토란의 산지이며 남산의 남쪽에 위치한 이태원 사람들은 다요(茶蓼)를 심고 홍아(紅芽)를 경작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성동구 왕십리 일대, 용산구 청파동과 이태원 일대, 옛날 노원역이 있었던 현 도봉구 도봉산입구 일대의 주민이 당시에 어떤 농업에 종사했던가를 알려 주고 있다. 순무 · 무우 · 배추 · 토란 · 미나리 등의 소채류는 당시에 있어서도 대도시 근교의 경제작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십리는 질펀한 들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일명 진퍼리(진펄리:도선동일대)라고도 했다. 여기 저기 농촌 취락이 산재되어 대부분 채소 재배를 했으며 가내공업이 발달하여 주머니끈 즉 끈목이 유명하였고 쇠고기·돼지를 잡아 파는 '푸주'가 있어서 도성안으로 육류 등을 공급하여 나름대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등 조선시대에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왕십리는 큰 변혁을 겪게된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고종 19년(1882) 6월, 서울에서 하급군인이 중심이 되어 야기한 도시하층민의 대규모 저항운동이다. 이 시기 서울의 하급군인들은 도시하층민 중에서 충원된 자들로서, 군인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영세소상인이나 영세수공업자로 가족들과 함께 생계를 꾸려나가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왕십리, 이태원 등의 도시근교에서 미나리, 배추 등 야채를 재배하여 시장에 판매하거나 한강 연안에서 상품과 세곡을 싣고 내리는 하역작업과 각종 토목 공사에 임시로 고용되어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급군인들은 군인 복무 이외에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각종 부업에 종사하였으나 대체로 낮은 수준의 생활을 하였다.
개화의 일환으로 정부는 신식군대인 별기군를 양성하여 신식군인들을 특별히 우대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군병들이 1882년 6월 9일 폭동을 일으켜 일본과 민씨정권의 개화파에 항거하였다. 포도청과 의금부를 습격하고 민비(閔妃) 일파와 개화파 관료들의 집을 공격하였으며, 별기군의 훈련장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과 일본 공사관 순사 등을 처단하고, 경기 감영과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이에 민비는 변장하고 궁중을 탈출하였으며,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6월 19일 민씨 일파와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이 청나라에게 난군(亂軍)을 진압해달라는 원조를 요청하여 6월 27일 마젠충(馬建忠)이 지휘하는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으며, 6월 29일에는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이끄는 1,500명의 일본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에 주둔한 청군
1882년 음력 7월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동관묘 앞에는 10여구의 시체가 목이 잘린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 시체들은 조선군인이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민비와 고종이 청국 군대를 불러들인 결과였다. 청군은 군란가담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구식군인이 많이 살고 있던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습격하여 민간인을 포함해 17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에 군인임을 증명하는 패를 차고 있던 10여 명을 참수했던 것이다. 120년 전 동관묘 앞의 목없는 우리 군인의 시체는 그 뒤 한 세기를 넘게 계속되고 있는 외국군주둔사의 서막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금의 현실도 그때와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미군이 보여준 의정부 여중생들 장갑차 역사 사건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자료(1)
임오년(1882) 6월 초9일, 한성의 영군(營軍)들은 큰 소란을 피웠다. 그것은 갑술년(1874) 이후 대내(大內)의 경비가 불법으로 지출되고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도 고갈되어 한성의 관리들은 봉급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오영(五營)의 병사들도 종종 결식(缺食)을 하여 급기야 5영을 2영으로 줄이고 그 중에서도 노병과 약졸들을 도태하여, 도태된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그들은 팔을 끼고 난을 일으키려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난데다가 호남세선(湖南稅船) 수 척이 도착하여, 한성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때 선혜청당상관 민겸호(閔謙鎬)의 하인이 선혜청 고지기가 되어 그 군량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는 쌀을 벼 껍질과 바꾸어 그 남은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들은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하였다. 민겸호는 그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그를 곧 죽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은 더욱 분함을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땅을 치며, "굶어 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일 사람이나 하나 죽여서 원한을 씻겠다"고 하며 서로 고함소리로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고함소리로 인하여 땅이 꺼질 것 같았다. 그들은 곧바로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평지로 만들었다. 그 집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군중들은 "돈 한 푼이라도 훔치는 자는 모두 죽인다"고 하고 그 보물을 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 비단과 구슬이 타서 그 화광(火光)은 오색을 띠고 인삼과 녹용과 사향 등의 냄새가 수리까지 풍겼다. 이때 민겸호는 담을 넘어 대궐로 도주하였다.
《黃玹, {梅泉野錄} 제1권, 甲午以前》
자료(2)
군졸들은 먼조 교동(校洞)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벌벌 떨고 있는 그를 죽였다. 군병들은 그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장창(長槍)으로 항문을 찔러 창날이 머리와 뺨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장안의 민가놈은 다 죽이겠다"고 호언하면서,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 민규호(閔奎鎬)· 민두호(閔斗鎬)· 민영익(閔泳翊)· 민치서(閔致序)· 민치상(閔致庠)· 민영목(閔泳穆)· 민창식(閔昌植)은 종루(鐘樓)에 끌려나와 난자질 당하여 죽었다. 또 김보현의 큰 집, 작은 집과 신관호(申觀浩)· 한성근(韓聖根)· 윤흥렬(尹興烈)· 홍완(洪玩)· 이태응(李泰膺)· 내영집사 등속과 중인통왜자(中人通倭者:일어통역관)의 집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홍완은 포박되어 죽이려 들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였다. 그밖에도 민가(閔家)와 친근한 사람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점쟁이·무당들 집까지도 모두 파괴하여 이날 피살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渚上日月} 1882년(壬午年, 고종 19년) 6월 10일》
자료(3)
(임오년 6월 10일) 대원군에게 군국사무(軍國事務)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대원군은 궐내에서 거처하며, 기무아문(機務衙門)과 무위(武衛), 장어(壯禦) 양영(兩營)을 폐지하고 5영의 군제를 복구하라는 영을 내려 군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난군은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난병들은 대궐에서 물러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黃玹, {梅泉野錄} 제1권, 甲午以前》
필자가 십수년 전 왕십리의 어투(옛날 서울말은 우대말과 아랫대말로 구분되었다)를 수집하려고 생존하고 있는 토박이 어른들을 찾았을 때 임오군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그분들의 연세는 80∼90이 넘으셨으나 기억력이 좋았다. 모두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청군들이 왕십리를 초토화하기 위해 쳐들어온 날은 음력 7월 16일 밤이었다고 한다. 당시 왕십리에서 민가가 가장 많은 지금의 하왕십리 '큰우물께'를 향해 수리재[車峴:수레고개로 하왕십리에서 행당동으로 통하는 고개]와 당재[堂峴 하왕십리 제1동사무소 북쪽에 있는 고개] 그리고 무학봉(舞鶴峰:응봉 줄기)을 넘어 포위하여 왔다고 한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무더운 여름이라 문을 열고 자고 있다가 졸지에 들이닥친 외국군인(청군)들에게 겁을 먹고 벌벌 떨었으며 특히 젊은 사람들은 무수한 구타와 함께 끌려가고 어린아이가 울면 발로 차 기절시키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저항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리보존하고 있는 노인네의 집에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문헌상에는 10여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는 수십명에서 백여명이 죽었으며 부상당해 얼마 살지 못해 죽은 이도 많았다고 했다. 부모가 함께 죽어 고아들도 속출해서 친척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많았으며, 매년 그 날이 돌아오면 두어집 걸러 제사를 지냈다고 회고했다.
1895년 The Graphic 3월 9일자에 실린 청일전쟁시(1894년) 한인학살과 수탈삽화로 청군의 왕십리 초토화 작전에서도 비슷한 정경이라 생각되어 게재함
그러한 왕십리에 가난이 찾아온 것은 일제병탄 후 농지를 빼앗긴 농민들의 무작정 상경 그리고 왕십리에서 정착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즉 빈민의 유입이었다. 많은 움막과 불결한 위생, 따라서 전염병이 창궐되기도 하고..... 또 육이오 전쟁으로 모여든 사람들, 왕십리는 그렇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민의 애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왕십리가 똥파리의 대명사가 된 이유
왕십리 부근의 산과 들에는 장안에서 실어온 인분을 저장해 두는 인분 구덩이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화학비료가 없었던 시절 푸성귀를 재배하려면 썩힌 인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파리가 들끓게 마련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런 혐오 시설들이 거의 없어졌다. 언뜻 생각하기에 지금껏 왕십리의 주민들에게 "똥파리"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것과 그 고장을 가리켜 사람의 몸 가운데 "엉덩이" 부위로 비유되어 내려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당시 똥파리가 들끓던 바로 그 때문인 듯하다.
왕십리에 살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주위의 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라났다. 땔나무를 비축하는 일이며 노루나 묏돼지 같은 산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산속을 누비며 헤매고 다녔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가파른 산등성이를 단숨에 차고 오르는 것과 지게에 집채만한 나뭇동을 짊어지고 험준한 산길을 내려오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왕십리 사람들은 대체로 몸이 튼튼하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힘이 장사들이었다고 한다.
장안에서는 해마다 단오 명절이면 큰 씨름대회가 열렸다. 나라 안의 내로라 하는 힘깨나 쓴다는 씨름꾼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하지만 구척장사인 왕십리 씨름꾼들은 번번이 그 억센 손아귀의 힘으로 상대방의 바를 질러 그 다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 놓은 뒤 안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거나, 반짝 들어 휘둘다가 저만치 금 밖으로 내던져 버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놀라운 괴력을 넋 놓고 지켜 보던 관중들은 기가 질린 듯 혀만 차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해마다 거의 우승 소를 끌고 가는 것은 항우와 같은 왕십리의 씨름꾼들이었다.
또한 당시 왕십리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소싸움이었다. 본디 소라는 짐승은 그 뿔로 무언가를 받아넘기는 공격적인 습성을 지닌 동물이지만, 일찍이 왕십리 사람들이 소를 기르는 것은 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 뿔에 힘을 실어 주려면 먼저 그 목덜미를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 목덜미를 강하게 하려면 네 다리의 힘을 옹골지게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일상 소에게 무거운 인분 달구지의 멍에를 지운 채 산판을 오르게 하거나, 벌목한 통나무들을 아래로 끌고 내려오도록 하여 소들이 혹독한 단련과 어려움을 능히 견뎌낼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소싸움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굵은 콩을 삶아 여물에 섞어 소에게 넉넉히 먹여 살찌게 해 주었다.
옛날 천호동 땅콩 밭 언저리 모래사장에서 나라 안의 큰 소싸움 판이 벌어지곤 했다. 어느날 처참하고 치열한 그 판이 종반에 접어들어 드디어 수원과 왕십리의 황소가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처음에는 뚝심이 센 수원 소가 격렬한 공격을 가하면서 단연 왕십리 소를 압도하였다. 지친 왕십리 소는 몇 번이고 쓸어질 것 같은 위기를 넘기면서 억지로 몸을 추스려 맞서고 있었다. 싸움이 막판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지친 왕십리 소의 몸 어디에 숨어 있던 번개같은 힘의 작용이었을까. 난데없이 그 뿔로 수원 소의 정수리를 정통으로 들이받아 처참하게 모래사장에 쓰러뜨렸다. 왕십리 소는 성난 사자처럼 거칠게 날뛰었다. 결국 그 싸움은 끈기가 있는 왕십리 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 무렵 결국 씨름과 소싸움에서도 번번이 왕십리 사람들이 이겼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시각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똥파리”라는 별명이 붙어 내려오는 것도 그 시절 그 질투와 시기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시 모든 승리의 환희에 도취된 왕십리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까짓 하찮은 별명쯤은 들어도 무방하다고 체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미교 다리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영미동에서 내려오던 하천 끝에 놓인 다리였으므로 '영미(永尾)다리'라고 불렀다.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사연이 남아 있다. 즉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갈 때 단종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다리까지 배웅나와 서로 이별한 뒤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성종 때 살곶이다리와 함께 이 다리를 보수하고 왕이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다. 이 후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이 다리를 헐어버리고 그 돌을 석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뒤 나무로 다리를 놓았으나 장마에 떠내려갔고 개천 바닥에 큼직한 돌을 놓아 징검다리와 같이 이것을 밟고 건너 다녔다고 한다.
무학봉
남산 자락인 응봉을 정점으로 동쪽 방향으로 무학봉·큰매봉·작은매봉·달맞이봉 등이 이어졌다. 이 응봉을 매봉산이라고도 한다. 응봉은 산이 높지는 않으나 빼어났으며,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았으므로 매봉 또는 한자명으로 응봉(鷹峰)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학봉은 학이 이곳에 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학봉은 조선의 도읍지 결정의 설화와 관련 있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無學)이 태조의 명으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왕십리에 와서 지세를 살피고 있을 때,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무학에게 서북쪽으로 10리를 더 가라고 알려 주었다. 바로 그 노인이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으로 그가 혼령으로 나타나 무학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와 관련하여 ‘無學‘이 ‘舞鶴’으로 바뀌어 표현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광희문(시구문) 밖에 해당하는 응봉 기슭은 조선시대 도성 안의 시신이 나아가는 길목으로 많은 묘지가 있었다. 일제 때에는 신당동 일대에 공동묘지가 운용되기도 하였다.
안정사(安定寺, 安靜寺)
성동구 하왕십리동 998번지 무학봉 중앙에 위치한 안정사는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사찰로 신라 흥덕왕 2년(827)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4년에 임허스님에 의해 대웅전과 삼성전이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초 한양 정도와 밀접한 인물인 무학대사가 주관하며 사찰을 중창하였다. 사찰을 중창할 당시 푸른 연꽃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해서 청련사(靑蓮寺)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무학대사는 왕궁터 선정의 왕명을 받고 이 절 석벽 아래서 7일 동안 등을 밝히고 기도를 드림으로 해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접하고 지금의 경복궁터를 선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또 무학대사가 중창할 때 절터를 병화불침지(兵禍不侵地)인 이곳에 정하면서 예언하기를 "무학봉 산 위에 큰 물이 고이면 이곳이 크게 번성하리라"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현재 대현산배수지가 설치되었음은 그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고 한다. 안정사는 1923년 사상범 체포로 악명을 떨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터뜨린 김상옥의사가 도피하여 일시 은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아기씨당(阿祈氏堂)
현 성동구 행당동 산 128번지에 아기씨당이 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이곳에 공주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공주 자신도 세상을 비관하여 시집가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이에 동리 사람들이 그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그의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에게 영험이 있어서 소원을 빌면 성취가 되고, 또 이 동리의 처녀가 결혼을 하면 바로 시댁으로 가지 못하고 신방을 신부집에서 차려 얼마를 지난 뒤에 이 동네를 떠나야지 만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이것은 아기씨의 처녀혼이 질투를 하는 까닭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의 왕십리에는 처가살이하는 남정네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관원터
행당동 66-3, 공용시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각 요로에 설치한 원으로, 고려 때부터 승려들로하여금 원을 지키게 하여 병자에게는 약을 주기도 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 이용이 국한되어 점차 폐지되고 민간업자가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서울에서는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이 있어 서울의 4원이라 하였는데, 그중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지명으로 전한다.
마조단(馬祖壇)
동교(東郊) 즉 전관평(箭串坪) 전관교(箭串橋) 서쪽 언덕 위에 마조단이 있었다. 처음에는 목장(牧場)이 있는 전관평에 마조단 및 처음 말을 길렀다는 선목(先牧)을 제사드리는 선목단(先牧壇), 처음 말을 탔다는 마사단(馬社壇), 말을 해치는 신이라는 마보(馬步)를 제사하는 단이 따로 설치되었는데 후에 마조단이 이곳에 옮겨졌던 것이다. 이 마조단의 제사는 마필(馬匹)의 번성 및 마역(馬疫)의 예방을 위하던 것인데 영조 25년(1749)에는 우역(牛疫)이 유행함으로 전관(箭串) 목장 안에 단을 쌓고 제사드린 일도 있었다. 마조단의 제사도 융희 2년 이후로 폐지되었다. 마조제란 말의 질병을 퇴치하고 무사하게 잘 사육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다. 마조단은 말을 돌림병으로부터 지켜달라고 말의 수호신이며 조상신인 방성(房星), 즉 천사성(天駟星)을 제사지내던 단으로 중춘(仲春)에 길일을 택해 임금이 신하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 곳이다. 현재의 건국대 자리부터 중량교까지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직할지 목장이 있었으며 한양대학교 부지에 마조단이 위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백남학술정보관 광장 옆에는 옛 마조단 터임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한국스카우트 기마대 주최로 마조제가 열리기도 했다.
광무극장터
성동구 상왕십리동 780-2, 지금은 휑하니 공터로 변하여 유료주차장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광무극장이었다. 왕십리 사람들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곳이 바로 광무극장이었다. 그 때에도 종로나 충무로 통에는 대형 개봉관이 있었지만 서민들에게는 동네 조그만 극장 하나면 충분했다. 지금이야 극장하면 영화나 관람하는 곳으로 알고 있겠지만, 극장은 영화관람 외에 가끔 '○○○리사이틀'이라는 것이 자주 공연되곤 했다. 골목마다 나붙은 포스터에는 지금은 이름마저 희미해진 코미디언들이며, 한복 곱게 차려입은 대중가수의 얼굴이 나붙곤 했다. 그리고 혹여 이름이라도 알려진 유명 연예인이 출연하는 쇼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극장주변으로 구름떼 같은 인파가 몰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