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② 숨결 5
홀로 허허웃는 달, 경허선사
연암산 천장사 (5)
천장사 인법당 외벽에는 몇 개의 재미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우선 눈 오는 날 달마대사와 그의 제자인 혜가가 마주앉아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다. 혜가가 달마대사를 만나기 전까지 사용했던 이름은 신광(神光)이다. 신광이 처음 소림사로 달마대사를 찾아와서 법을 물었을 때 대사께서는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다.
이때 신광은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옛사람들은 도를 구하고자 하여 뼈를 깨뜨려 골수를 빼내고. 피를 뽑아 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카락을 진흙땅에 펴고 벼랑에서 떨어져 굶주린 호랑이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다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광이 구법(求法)의 열망을 담아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밤새도록 내리는 눈을 맞으며, 달마대사가 선정(禪定)에 든 굴밖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밤을 지새운 것이었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였다. 이 장면을 그린 것을 입설구법도(立雪求法圖)라고 한다.
아침이 되어 토굴 밖으로 나왔던 달마대사께서 눈사람이 되어 있는 신광에게 묻는다.
"그대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음은 무엇을 구하고자 함인가?"
"스님께서는 감로의 문을 여시어 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랫동안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하룻밤 눈을 맞으며 새운 작은 공덕과 하잘 것 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대사의 이 말씀을 듣고 신광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기의 왼쪽 팔을 잘라 받친다. 바로 이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혜가단비도이다. 혹은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라고도 한다. 달마대사께서 신광의 구법의지가 목숨을 바치라고 해도 그렇게 할 만큼 확고부동하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제자로 받아드리며,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내렸다. 혜가는 ‘지혜를 얻을 만하다' 는 뜻이 들어 있는 법명이다. 입설구법도나 혜가단비도 혹은 입설단비도는 모두가 구법의 열망이 진지해야 함을 나타내는 그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마에서 혜가로 이어진 선종의 등불은 승찬 → 도신 → 홍인을 거쳐 육조인 혜능으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우리나라로 전래되어 한국 불교에 선이 접목되어 오늘에 이르는데, 천장사의 혜가단비도는 여기가 바로 경허에 의해 꺼져가던 선종(禪宗)의 등불이 다시 밝혀져 전해지게 된, 선가전등(禪家傳燈)의 진원지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려진 벽화라고 여겨진다.
혜가단비도 옆에 한 스님이 아이들로부터 매를 맡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벽화가 있었다. 천장사 주지스님께서 매 맞고 있는 스님이 바로 경허당 성우선사라는 설명을 해준다. 어째서 선사께서 아이들로부터 몰매를 맡고 있는 것일까.
언제가 경허선사께서 길을 가다가 몇 명의 초동들을 만났을 때, 스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기를 하자는 제안을 한적이 있었다.
“너희들 중에서 지게 작대기로 나를 때리는 사람에게 엿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을 주겠다. 어떠냐, 누가 해보겠느냐?”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다.
“정말이세요, 스님?”
“그래 나를 때리기만 하면 틀림없이 돈을 주마.”
초동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를 자초하는 것도 실없고, 매를 맞고 돈을 주겠다는 것은 더더욱 실없는 말이었다. 이런 이상한 제안을 받은 아이들은 처음 망설인다. 아무리 돈을 준다지만 찬물을 마시는데도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따지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더 힘들만큼 가난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마침내 한 아이가 다짐을 둔다.
“나중에 딴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그건 염려하지 마라.”
이렇게 해서 한 초동이 지게 작대기로 경허를 때리게 되었다. 매를 맞은 경허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했다.
“자, 때렸으니 약속한 돈을 주세요?”
그러자 경허가 시치미를 뚝 뗀다.
“난 맞지 않았느니라.”
“에이 분명 때렸는데, 안 맞았다고 우기신다. 정 그렇다면 다시 때릴 게요.”
초동이 좀 전보다 힘을 더 주어 기게 작대기로 경허를 내려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경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이번엔 좀 아프지요?”
“난 맞지 않았는데 왜 아프단 말이냐? 누가 다른 사람이 해보아라.”
맞고도 안 맞았다고 하는 경허를 상대로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지게 작대기를 휘둘러 댔지만 그때마다 경허는 맞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스님, 억지 그만 부리 세요. 돈 주기 싫으니까 맞고도 안 맞았다고 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아세요!”
“너희들이 그러니 내가 돈은 주마.”
경허선사는 바랑을 벗어서 돈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맞지 않았다.”
이 무슨 해괴한 장난인가. 경허물매도는 그 때의 일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 같다. 경허선사께서는 어째서 매 맞는 것을 자초했던 것일까. 그리고 분명히 맞았는데 어째서 맞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하여 계속해서 매질을 유도한 것일까. 누구에겐가 흠씬 두들겨 맞고 싶었던 것은 무력감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계속된 폐불의 암흑기에서 홀로 불을 밝힌 선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비심은 넘치지만, 자비심만으로는 압제(壓制)에 시달리며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헐벗은 백성들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데 따른 무력감을 달랠 길이 없었던 것 아닐까. 특히 이 땅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아이들에게 제일 미안하기에, 저들로부터 몰매 맞는 것을 자초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허대선사의 행장을 돌아보는 가운데 도처에서 만나는 파행과 기행도, 따지고 보면, 혼탁한 세상에 홀로 깨달아 성성한 가운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하는 외로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깨달았어도 미혹 중생들을 다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한계는 선각자를 자괴의 늪에 빠지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경허당 성우선사가 천장암에 계실 때 시봉을 했던 만공스님의 증언한 것이다. 어느 여름날 밤 만공이 등불을 켜들고 큰방으로 들어가니 경허 스님께서 누워 계셨다. 그런데 불빛에 비춰보니 경허선사의 배 위에 독사 한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만공이 소리를 질렀다.
“스님, 배위에 독사가 앉아 있습니다요!”
경허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쉬잇, 실컷 놀다가 가게 조용히 해라.”
만공은 행여 독사가 은사스님을 물지도 몰라 절절 매고 있는데, 독사가 스스로 똬리를 풀고 슬슬 배위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사라졌다. 경허선사의 말씀이 이어졌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적어도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어야 공부가 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
독사에 물리면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생사를 초월한 선사는 죽음이 두려워서 살생을 저지르지 않을 정도의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홀로 가는 선각자의 외로움과 자과감은 경허당 성우선사로 하여금 곡차를 드시게 만든 것 같다. 그러다보니 술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한번은 경허선사께서 시봉인 만공에게 말했다.
“단청불사를 해야겠다. 시주 좀 받으러 가자."
당시 천장암은 퇴락할대로 퇴락해 있었다. 단청불사를 한다니 그 천정암에다 단청을 하려는 것으로 받아드린 만공이 기꺼이 따라 나섰다. 스승과 제자가 마을로 내려가서 얼마의 시간이 경과하자 약간의 시주금이 모였다. 경허선사는 주막에 들려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셨다. 그러자 만공이 투덜거렸다.
"스님은 시주를 받아서 술을 드셨으니 지옥에 떨어지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내가 혹여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것이냐?"
"단청한다며 받은 시주돈으로 어떻게 술을 사 마실 수 있습니까요? “
"녀석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너는 단청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이미 단청불사를 마쳤느니라.”
“언제 어디다가 단청을 했단 말씀이세요?”
“내 얼굴을 보거라?”
"술 취한 모습이 가관입니다요."
"어허 녀석 진정한 단청을 볼 줄 모르네. 볼그족족한 것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그럼 처음부터 스님 술드시려고 시주를 받았단 말씀입니까?"
"그랬다 이놈아. 목은 마르고 컬컬해서 한 잔 생각이 났지. 이렇게 목도 축이고 기분 좋게 길을 갈 수 있으니 그 부처님 참 영험하시다. 허허허~"
"그렇게 말씀하시면 남들이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합니다요."
"그렇다면 내가 무슨 궤변을 늘어놓았는지 지적해 보거라."
"첫째로 스님의 몸과 법당은 다르단 말입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고?"
"스님은 인간이지만 법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잖아요."
"아따 고놈 눈도 나쁘네."
"뭐가 말입니까?'
"이 놈아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그야 말씀이고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까?”
"귀까지 나쁜 것 같으니 한번만 더 말해주겠다. 잘 듣거라. 이 몸이 법당이요 이 마음이 부처니라. 법당의 부처는 죽어있는 돌덩어리이고 법당은 돌덩어리를 지키는 집에 불과하다. 나는 내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했는데, 너는 죽은 부처의 법당에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타박이구나."
"스님 말씀을 듣고 보면 그럴싸하기는 합니다만, 부처님께서 술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스님은 술을 드셨으니 문제 아닙니까요."
"문제 될 것이 없느니라. 술을 마시고 본성이 취해서 함께 흔들리면 문제지만, 내가 술을 많이 마셔도 어디 한번 비틀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이 놈아, 술을 마셨느니, 계를 범했느니, 맨날 고시랑거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가 기특하다고 수기를 줄 것도 아니고, 니 스스로 그 속박에 매일 뿐이란 말이다.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 못한 것이다!”
어느 날 경허선사와 만공스님이 함께 길을 가는데, 어느덧 한낮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인가가 눈에 띠지 않는 첩첩 산중인데, 시장기가 들기 시작했다. 이럴 때 산마루턱에 당도하니, 상여군들이 모여 있었다. 만장이 나부끼고 있는 곳으로 다가간 경허선사가 말했다.
"시장해서 그러나 먹을 것 좀 주시오? “
"먹을 것이라고는 술밖에 없는데요?"
한 사람이 장난스럽게 대꾸를 하자 스님은 태연히 받았다.
"술이 있으면 술을,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좀 주시지요?"
사람들이 모두 눈을 크게 뜨는데, 한 점잖은 사람이 말했다.
"아니 대사(大師)가 어찌 술을 달라 하시오? 곡차라 하지도 않고."
스님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시장한데 한 잔 하면 되지, 굳이 다르게 말할 것이 뭐 있겠소."
사람들이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누군가 술 한 대접을 떠서 내놓았다. 경허스님은 술잔을 받지 않고 손사래를 쳤다.
“잔이 너무 작습니다. 바가지라면 몰라도."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어디, 동이째 내 줘 봐."
그렇게해서 술이 가득 담긴 동이가 경허 스님 앞에 놓였다. 스님은 그것을 들어 올려 단숨에 비웠다. 이것을 지켜보던 맏상주가 대나로로 만든 상장(喪杖)을 짚고 스님에게로 와서 고개를 숙인 다음 말했다.
"무애행(無碍行)을 하시는 도력 높은 스님들 같사온데, 자비를 베푸시어 망인(亡人)이신 저희 아버님을 명당에 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경허선사가 큰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명당은 해서 뭐에 써? 죽으면 다 썩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데!"
스님의 말에 울화가 치민 상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상장을 들어 후려칠 기세였다. 그러자 경허선사가 일갈 했다.
"네 이놈들!"
6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의 경허선사께서 떡버티고 서자 범접하기 힘든 위세를 풍긴다. 맏상주가 흥분한 아우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스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장자(莊子)에도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까막까치나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미흡해서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
상주는 행상 길을 재촉해 떠날 차비를 했다. 그들을 향해 경허선사께서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죽고 사는 것도 원래 그러하므로, 만약 모든 것이 참으로 허망한 줄 알면, 그대들도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을...."
생멸(生滅)의 실상(實相)을 설하는 말씀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구슬픈 만가를 앞세우고 상여 행렬은 고개를 넘어갔다.
한때 관섭(寬燮)이라는 행자가 경허스님을 시봉한 적이 있었다. 그는 경허스님의 무애행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었다. 곡차 심부름을 하다가 지친 그는, 어느 날 또 술과 안주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자, 일단 술과 안주를 산 후, 나머지 돈으로 비상(砒霜)을 구입했다. 수도는커녕 허구헌날 술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럽고, 파계승이 종풍을 흐려놓고 있다고 여겨, 비상을 빻아서 안주에 뿌려 넣었다.
비상섞인 안주와 술주전자를 받은 스님은 곡차를 따라서 쭉 드시고, 안주를 집어 잡수기 시작했다. 이때 뭔가 버석버석 입안에 씹히자 선사께서는 씹하는 것을 차례로 골라 뱉어버리고, 아무 말 없었다는 듯 나머지를 다 드신 다음 말했다.
"아, 맛있게 먹었다."
경허스님은 비상인 줄을 알면서도 놀라지 않았고, 먹는 것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리고 행자에게 화도 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사실이 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계를 육안(肉眼)으로 지켜본 시봉은, 겁도 나고 무서워서 이 사실을 가슴 속 깊이 숨겨두고 있다가, 후일 만공스님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서 알려지게 된 일화다.
해탈한 대자유인 경허선사는 계율을 타파하는 파격과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낳았는데, 그의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무애행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종풍을 흐려놓는 미꾸라지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오죽했으면 시봉 드는 젊은 행자가 고기 안주에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경허큰스님을 불법을 어긴다며 미워해 안주에 비상을 넣어 죽이려고까지 했을까 싶다. 그러나 행자로서는 몰랐으리라. 경허선사께서 역경계(좋지 않은 일)를 행하면서 거기에 마음이 끄달리거나 흔들리지 않는가를 보는 의도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것은 파행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수행법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배불정책으로 조선 중기 이후 선맥마저 끊겨버려 검증받을 스승 하나 없던 세상에서, 그는 그렇게 한국 근대 선의 첫새벽을 연 것이었다. 선의 일상화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고고함을 버리고, 진흙탕에 뒹굴기를 자처한 경허당 성우선사는, 그러나 그 더러움에 불 들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난 한떨기 연꽃이었다.
기행 쪽만 들어서 막돼먹은 엉터리선사였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기행은 따져보면 모두가 화광동진(和光同塵)과 자비구현(慈悲具顯)이라는 철저한 보살도를 실천에 옮기는 것과 맞닿아 있다. 가령 경허선사께서 해인사의 조실로 계시던 때의 일이다.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스님은 눈 덮인 산길을 오르다가 쓰러져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였다. 얼굴을 보자기로 감싸고 있는 여인을 눈속에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경허스님은 그녀를 업고 산길을 올라가서 조실 방으로 들어갔다. 경허스님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정신이 든 여인은, 자기가 좋아서 스님이 예뻐해 주는 줄로 알고, 가지도 않고 그 방에서 계속 기거하며, 숙식을 조실스님과 함께 하였다.
이런 사실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만공스님은 문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누가 조실스님을 만나러 오면 “스님께서 지금 곤하게 주무시는 중입니다." 하며 돌려보냈다. 그런 식으로 열흘이 흐르자 만공스님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공이 방문을 두드리며 경허스님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슬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경허스님은 여인에게 당신의 팔을 베개해 주시고, 그 여인의 몸위에다가 다리를 척 걸친 채 코를 골고 잠을 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인은 코도 눈도 분간 할 수 없었고, 손가락도 떨어져 나간 상태였으며, 걸친 옷이 고름에 절어 있을 정도였다. 살썪는 악취 때문에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물러 나온 만공스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나병에 걸려 썩어가는 여인과 한 방에서 열흘씩이나 먹고 잘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허스님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경허스님이 천장암에 계실 때 하루는 갈산 김 씨네 49재가 있어서, 장을 푸짐하게 보아다가 진설해 놓았다. 재가 끝나면 음식을 얻어먹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몰려든 구경꾼들이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것을 본 경허스님께서 법당에 차려 놓은 음식들을 모조리 그릇에 쓸어 담아 가지고 내려와서, 구경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걸 본 주지인 태허스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재 지낼 것을 다 갖다 주느냐?"
그러자 경허스님이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재를 바로 지내는 것입니다."
나병에 걸려 살이 썩어문드러진 여인과 열흘씩이나 한방에서 지내면서 밥을 먹여주고, 악취 나는 몸과 흘러내리는 피고름을 손수 닦아 준 경허선사인데, 죽은 영혼보다 살아있는 부처가 우선이라고 여긴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리라. 누가 이 어른에게 계행을 여겼다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장마 부러난 물 때문에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만공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만공은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냈다.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합니다. 어찌 젊은 처자가 스님에게 업어달라는 부탁을 히시오! “
그러자 경허선사가 처녀에게 등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도와드리지요. 자, 업히시오. "
경허는 처녀를 업어다가 건너편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가는데 뒤따르는 만공스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따졌다.
"스님,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경허스님께서 말했다.
"내려 놓아라!"
"네?"
"나는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구나! “
하루는 스님이 모친을 위해서 법문을 한다는 소문을 냈다. 도인 아들이 자신을 위해 특별 법문을 해준다니 그의 어머니는 입이 벌어진다. 대중들이 모여들고 그의 어머니가 자리를 잡고 앉아 경허스님은 부스럭거리며 옷을 벗더니 알몸으로 법상으로 올라갔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심오한 설법을 기대하고 있다가 해괴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 그의 어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 무슨 짓이오!"
크게 노하여 법석(法席)을 박차고 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경허스님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는 이 몸을 벌거벗겨 씻기며 안아주고는 하시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못하시는고."
본래진면목을 들어내도 보지 못함을 깨우쳐 주려는 그의 법문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천장사 벽화를 둘러보는 것을 마무리 짓고 나자, 등에 가서 붙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배곺은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다음부터는 성지순례에 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던 보살은, 경허와 만공스님의 숨결을 느끼는 동안, 허기를 잊은 것일까,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느라고 여념이 없다. 오히려 내가 사정이 더 급해져서 채근을 하여, 인법당의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식당채로 내려올 정도였으니, 다음부터 성지순례에 불참하겠다는 말은 협박이 아니라 애교어린 투정이었나 보다. 그 사이에 상이 차려져 있었다. 새로 지은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는다. 수저로 밥을 떠서 입에 넣으니 꿀맛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시장이 반찬인 탓도 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경력이 많이 쌓인 것으로 여겨지는 두 분의 보살들이 실력을 발휘해 준 덕분이었다. 재를 올릴 때 쓴 과일이 남았던가. 후식으로 올라온 사과와 배, 밀감 같은 것 까지 먹고 났을 때, 지금까지 시중을 들어준 보살이 말했다.
“다 둘러 보셨어요?”
“그럭저럭이요."
“마지막으로 태허 경허 두 스님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 부도가 있는데 보고 가실래요?”
“경허스님 어머니 부도가 이곳에 있습니까?”
“네, 원하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보살은 천장사 왼쪽 산비탈로 난 소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장마에 흙이 씻겨 내려가고, 풀까지 무성하게 돋아난 길을 따라 1.5km쯤 올라가면서 보니, 멀리 서해바다가 조망된다. 부도는 바로 그 서해바다가 굽어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었다. 부도 앞에서 사방을 휘둘러보니, 막힌 곳이 없어서 시야가 탁 트인다. 부도가 모셔진 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명당자리같았다. 명당은 해서 무엇하는냐고 소리를 지르던 경허스님이 직접 터를 잡은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누가 한 것일까. 살아있는 사람도 갑갑한 것은 싫은데, 혼령인들 아니 그렇겠는가. 맑고 화사한 햇볕이 지천으로 쏟아지는 곳에서, 멀리 바다를 굽어볼 수 있으니, 이 보다 좋은 영면터는 없을 듯 싶었다. 자식들의 배려가 아니래도 생전에 복을 많이 지은 공덕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석종형 부도의 탑신에는 태허 경허 두 스님을 낳아 길으신 어머니의 성이 배 씨 부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밀양 박 씨라는 설도 있으나 부도에 배 씨로 적혀 있으니 이것이 맞을 듯싶다.
부도 참배를 마친 다음 깎아지른 듯한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직벽을 형성한 개울에서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 길이 천장암과 세속을 연결해주던 원래 길 같았다. 토끼나 다녔음직한 가파른 오솔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서, 다시 만공에게 전법게를 내리신 후 천장암를 떠나신 경허선사의 행보를 따라간다.
마지막으로 천정사를 내려오신 경허선사의 발길이 멈춘 곳은 오대산 월정사였다. 월정사 유인명 방장스님이 경허당에게 화엄경 설법을 청했고, 이 제안을 받아 드린 경허선사가 그곳에 머문 기간은 대강 3개월이었다.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을 줄여서 부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후 최초로 설법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경전이다. 구름처럼 운집한 대중들을 상대로 화엄경을 설한 후 선사는 금강산으로 향했다. 유유자적 금강산을 유람하며, 연작시로 금강산 유람가를 지었다. 금강산 명구, 제헐성루 등을 쓴 것도 이 무렵이다. 선사는 450여 편의 시를 남겼기에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위업을 달성한 뛰어난 묵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금강산에서 쓴 것이 175편으로 헤아려 진다.
한 지팡이로 구름 위에 솟아 서너 걸음 걸어보니
푸른 산 흰 돌 사이마다 기이한 꽃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저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어쩔 것인가
산과 구름이 함께 희다
구름과 산의 모습은 가릴 수가 없구나.
구름은 흘러 돌아가고 산만 홀로 남았으니
일만 이천 봉
경허당 성우선사가 스님으로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곳이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석왕사다. 석왕사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오백나한(五百羅漢)들이 도와주었다데 근거하여 오백나한을 봉안한 절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옻칠이 벗겨지자 1904년 개분불사(改粉佛事)를 한 뒤 증명법사로 경허선사를 초청했었다고 한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승복을 벗고 주장자도 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당시에도 비난하는 무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직접대하면 누구라도 경허선사의 높은 도력에 무릎을 꿇었었다. 어디 적당한 산문에 안주하여 법석을 열면, 널리 존경을 받으며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동안 자신이 이룬 위업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무(無)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안정된 기반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용기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경지다. 안정을 거부한 것이 현실에 대한 저항이라는 형식으로 표출된 것이기에 더욱 우러러 보인다.
경허당 성우선사의 선택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당시의 조선 정세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가 바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다투던 일본이 대련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동시에 일본 군대 일부가 경인지역을 점령, 대한제국에 대한 정치 ․ 군사적 간섭을 합리화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 체결하는가 하면, 주민들의 토지와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수탈, 침략용 경의 ․ 경부철도 부설을 강행한 시점이었다. 그 해 여름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경찰이 한반도 전역으로 배치되었고, 경허선사가 종적을 감춘 때쯤인 11월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어, 사실상 모든 국권이 일제 통감부에 넘어가는, 그 래서 민영환(閔泳煥) ․ 조병세(趙秉世) ․ 홍만식(洪萬植) 등 뜻있는 여러 고관들이 울분을 토하며 자결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봉기가 노도처럼 일었던 때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더 절실하게 구현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암울한 시대에 한 지식인으로서 저항 의지를 반영한 선택이었든, 경허선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명성과 영예를 미련 없이 버리고 오지(奧地)중에서도 오지인 반도의 최북단 유배의 땅으로 잘 알려진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들어가서, 유생 박난주(朴蘭洲)로 살았었다. 머리를 기른 것은 일제의 단발령에 대한 단호한 저항이었고, 유생이 된 것은 서당을 열어 장차 나라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까막눈으로서는 무명을 벗어날 수 없고, 가렴주구에 시달려도 저항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궤뚧어 본 것이었다. 산문에서 도인을 배출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절실한 것이 까막눈에서 중생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선사의 평등사상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다. 선사께서는 그런 식으로 중생들을 교화 제도시키는 한편, 선비들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술과 시로서 세상시름을 잊으며 말년을 보낸 것이었다. 이 기간이 9년인데, 득도의 과정보다 더 사무치게 깨달음을 실천에 옮긴 세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쓴 시다.
病酒伊來將忘國
訪仙是處更爲邦
淸簞淡蔬堪足慰
欲忘京洛舊心腔
병들고 술 취해서 나라걱정 잊는가 했더니
신선 찾던 이곳도 또한 나라일세
조촐한 도시락과 담박한 나물로 위안을 삼으며
서울(京城)을 잊고자 하는 옛 마음 그대로일세.
은사가 행방불명이 되자 맏상죄인 수월이 평안도 묘향산의 한 암자에 머물며 스승의 행방을 애타게 수소문하고 다녔다. 산수갑산에 들어 박혔다는 것을 알아낸 수월은 수백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가 서당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짚신을 보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분명 스승 경허의 짚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에서 “스님, 스님 ―” 하고 애타게 불렀으나 방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제자 수월임을 알고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되돌아가도록 했다. 스승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수월은 할 수 없이 미어지는 심정으로 스승을 위해 짚신 한 켤레를 정성들여 삼아놓고, 멀리서 삼배를 올린 후 발길을 돌렸다. 후에 수월스님도 스승처럼 만주로 흘러들어가, 나라를 잃고 떠도는 조선민초들에게 짚신보시를 하다, 바람처럼 전설속으로 사라져 갔다.
경허당 성우선사는 1912년 4월 상순에 노구의 몸을 이끌고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온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백두산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고 돌아온 바로 그 달 하순 갑산의 웅이방 도화동이라는 춥고 외로운 땅에서 원적이 드시었다. 시적(示寂)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다음, 그 위에 써놓은 열반게(涅槃偈)다.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달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세수는 67세고, 법랍은 59세다. 나중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받진 김탁이라는 유지가 법구를 수습하여 유교식으로 장례를 모셨다. 선사의 부음 소식이 충청도 정혜사에 있던 만공스님에게 전해진 것은 1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만공은 사형 혜월과 함께 달려가서 다비식(茶毘式)을 거행한 다음 분골(粉骨)된 재는 경허선사께서 술과 시로써 외로움을 달래며 떠돌던 갑산의 강과 산 그리고 들녘에 뿌려졌다. 그의 오도가 중에 한 구절이다.
誰是孰非
夢中之事
北邙山下
誰爾誰我
누가 옳고 그른가
모두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인가
천장사의 혜가단비도
일본의 한 사팔에 그려져 있는 입설구법도
천장사의 경허물매도 벽화
첫댓글 알고도 행함이 없으면 진리구현이라 할수 없겠지요.정의를 몸소 실천하시고 우리들이 우러러 보아야할 깨침의 실체를 보여주신 경허선사님을 마음에 모시겠습니다.해월스님,연휴 내내 긴 글 쓰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스님 덕분에 많이 공부하고 배웁니다.좋은 가르치심 감사드립니다._()_
경허 선지식의 행장을 좀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상세히 피력해주심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불법의 오묘함에 미련한 중생의 처신이 그저 한탄스럽습니다, 일념 을 다한 공부의 매로 받듭니다. 감사합니다.
인연이 닿으면 해월스님의 법문을 새기며 천장사를 순례하고 싶습니다.
스님 긴 글 쓰시느라 근념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크지 않지만 머물고 싶은 공간입니다. 가을에 찾아가기 또한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찰이더군요.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