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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11일 마지막 임실 답사를 8분의 선생님들을 모시고 잘 다녀왔습니다.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산세가 너무도 아름답고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해주더군요.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날씨는 겉옷을 하나씩 벗게 하였답니다. 참석하신 선생님들 정말 행복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 건강하게 잘 지내시다 다음 답사 때 뵙겠습니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 보물 267호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8-1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이고, 이곳 진구사지 석등은 두 번째로 크단다. 진구사지 석등은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는 2매석으로 되었으며 8각 하대의 각 측면에는 가늘고 길쭉한 안상(眼象) 을 새기고 상하에는 굽을 둘렀다. 이 위에 올려진 연화대석 위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8판씩 조각하였는데 그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달아 장식하였다. 간주석은 원주형으로 중앙에는 북모양으로 배가 부른 양각대가 있고 상, 하단의 주위에는 복엽8판의 양, 복면을 대칭이 되도록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낮고 높은 2단의 원형 괴임이 조출(彫出)되고 측면에는 단엽 8판의 앙련이 새겨져있다. 화사석(火舍石)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다. 옥개석 정상에는 현재 8각의 노반과 암화 석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등 여러 가지 상륜부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석등은 조각된 문양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난 1992년도부터 실시한 5차례 발굴조사에서 “진구”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보덕화상의 제자가 세운 진구사지임이 밝혀졌다. 진구사가 번성했을 당시에는 수도승이 천여명을 헤아렸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석등의 규모로 미루어 보아도 이곳에 거대한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진구사가 폐허로 변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도 하고,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절 앞에 흐르는 섬진강이 엄청난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사찰은 물론 승려 모두가 홍수에 휩쓸린 후 폐허로 변했다고도 한다.
석등의 의미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하여 광명등(光明燈) 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 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석등이라고 하면 돌로 만든 등을 일컫는데, 등을 사용한 것은 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 것으로 생각된다.
석등이라는 명칭이 우리나라에서 등장한 것은 진성여왕 5년(891)에 건립된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에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 유적을 통하여보면 사찰이나 능묘에 주로 남아있고 가옥 등의 유적에는 없으며 백제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옥개석과 화사석 및 대석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은 단순히 밤에 불을 밝힌다는 의미 외에 보다 더 큰 의미는 구조에서 보듯이 화사석의 위치가 연화대좌 위에 앉은 부처님에 해당한다. 이는 석가부처님이 입멸하실 때 남기신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부처님의 말씀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인 법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석등은 어두움을 밝혀주는 일반적인 목적도 있지만 스스로 등불을 밝혀야 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석등의 구조
석등은 8각을 기본으로 하여, 보주-우동-옥개석-화사석(화창 4개- 4성제를 의미, 신장(神將)과 보살(菩薩)이 조각되기도 함)-상대석(앙련(仰蓮)-윤회, 부처가 있는 자리-연화좌대)-중대석(간주석 -8각형: 8정도를 의미, 북이나 쌍사자로 조각되기도 함)-하대석(복련(覆蓮)-이승에서의 인연과 깨달음을 상징, 우리 중생을 의미)-귀꽃-지대석으로 되어있다.
석등의 명칭
① 보주(寶珠) : 등의 꼭대기에 있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 ② 우동(隅棟) : 모서리 등마루 ③ 옥개석(屋蓋石) : 지붕 모양의 돌. 지붕처럼 덮는 돌. ④ 처마(軒) : 지붕을 구성하기 위한 기본구조 ⑤ 사천왕상(四天王像) : 석등을 수호하는 신장상(神將象) ⑥ 화창(火窓) : 석등(石燈)의 화사석에 뚫은 창 ⑦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 ⑧ 상대석(上臺石) : 화사석과 간주석 사이. 보통 앙련(仰蓮)부조. ⑨ 앙련(仰蓮) : 연꽃이 위로 향한 것처럼 그린 모양 또는 그런 무늬. ⑩ 상대(上臺)받침 : 상대석의 받침대 ⑪ 간주석(竿柱石) : 석등의 기둥 ⑫ 간주석 괴임 : 간주석을 괴이는 부분 ⑬ 하대석(下臺石) : 석등의 밑에 받치는 부분. 복련(覆蓮)모양. ⑭ 복련(覆蓮) : 연꽃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무늬. 이승에서의 인연과 깨달음을 상징 ⑮ 지대석(地臺石) : 지면에 터를 잡은 돌 ⑯ 귀꽃 : 석등이나 돌탑 따위의 귀마루 끝에 새긴 꽃 모양의 장식
운서정(雲棲亭) 전북유형문화재 135호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 52 -3 관촌면 오원천변의 사선대 위에 있는 운서정은 울창한 수목들에 둘러싸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운서정은 당대의 부호인 승지 김양근의 아들 승희공이 부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8년 당시 쌀 3백석을 들여 6년간에 걸쳐 지은 곳이다. 정각과 동, 서재 그리고 가정문으로 이루어진 운서정은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거대한 목재와 석축 등을 사용한 건축 양식이다. 건립후 일제하에 경향의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으로도 유명한 운서정은 오늘날에는 관광지 사선대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사선대에서 올려다 본 운서정이 물위에 그림 처럼 떠 있다. 임실 성미산성 지방기념물 100호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 24 임실 성미산성은 성미산(430m)의 정상을 안고 남쪽 사면(斜面)을 축성한 좁은 정삼각형으로 둘레가 540m나 된다. 또한 성미산성을 중심으로 대리산성(신평면 대리), 방현리산성(관촌면 방현리)이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달리 유래가 없는 것으로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현장인 것이다. 2007년도 성미산성 일부지역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집수시설 2개소와 건물지 흔적들이 발견되었으며, 백제 오부명 인장와 및 금동여래입상등이 출토되어 성미산성의 역사성을 증명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왕 605년 2월에 각산성을 축성하였다고 하며, 신라 본기에는 태종 무열왕 661년에 두량이성과 정읍 태인에서 백제군에 패한 후 2000여급을 배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월사(水月寺)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321 성미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수월사 극락보전은 극락정토의 주제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며, 아미타불은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 비구였다.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는 귀의 한다는 뜻을 지송함으로써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광명이 끝없이 백천억 겁으로 셀 수 없다하여 극락보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한편 주불의 이름을 쫓아 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겨울 눈속에 핀 개나리가 한층 더 환하게 피어있는 수월사 신흥사(新興寺)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12호
관촌면 상월리 360. 신흥사는 다포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은 석가모니와 그 분의 협시보살로 문수와 보현 두 보살을 모신 신흥사의 본전(本殿)이다. 기단부분과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며, 지붕은 기둥의 높이가 낮아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기둥은 이 절을 처음 지었을 때의 것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신흥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지었으며, 처음 지었을 때에는 300 여 명의 스님이 수도(修道)하는 큰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보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 백제시대의 사찰 건축양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는 사선대에서 메기탕과 새우탕으로 맛있는 점심을하고, 사선대 조각공원을 한바퀴 돌아보며 유유자작 여유러움을 만끽하고 신흥사를 들러보고 익산으로 돌아왔다. 모든 선생님들이 만족한 답사였기를 바라며 다음을 기약한다.
사선녀들의 음악이라는 조각상이다. 나도 신선이라며 청개구리 왕눈이가 배꼽을 덜렁내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다. 재미있는 조각상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