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남대 이수건 교수의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 조작" 논문(첨부자료)을 읽고 의문점이 있어 사랑방에 글을 올리니 정확한 근거에 의한 자료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누구를 비방하려는 목적이 아니며 글 중에 과격한 부분이 있어도 이해 바랍니다.
2. 이수건 교수가 살았을 때 발표를 하지 않고 돌아가셨기에 발표한 제자에게 반박하거나 추가 자료를 요구해도 충분한 답변이 있을지 의문이며, 기왕이면 이수건 교수의 논문으로 차원부설원기가 조작되었다는 것까지는 좋으나 차류 문제에 단정하여 이수건 교수 이름을 오점을 남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3. 몇 년 전 저와 전대 농대 모 교수는 각각 자기 문중의 조작 사실을 (이수건 교수 논문 내용과 같은) 발표했다가 종중 어르신들로부터 선조를 욕 보이는 놈, 건방진 놈, 등 고초를 당했는데 그 교수님은 돌아가시고 저는 이제는 정확한 근거와 자료에 의한 확실한 자료를 알고자 합니다.
4.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성경 등이 당시 정확한 사실 기록인가? 의문이 가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정사로 배우고 있으며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제 의지왕이 궁녀를 3천명이라는데 당시 인구비율로 불가능한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또 성경을 내용의 의문점에 의의를 달려면 교회를 다니지 말고 성경 내용을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5. 1997년 대전 뿌리 공원에 연안차씨유래비가 만들어질 때 당시 작은 집이던 대전 대종회 임원들이 유래비를 보고 지적하고 조언을 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며, 차류대종회가 활발히 활동할 때 문류보감, 차류종보등의 문헌을 만드신 분들이 이제 대전 대종회에서 차씨는 남이라면 당시 동족이라고 외쳤던 어떤 변명이라도 한 후에 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은지요?
6. 차원부설원기의 조작이 시실이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1689년 기사보에 류처후 선조가 원파도를 소개하면서 더 연구하라고 했다는데 더 연구해야 하지 않을지? 류차달, 효금 금환 노일 보춘 선조의 배(처)가 없고, 1562년 가정보를 편찬한 류희잠은 父, 本人, 子 모두 生 卒년월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효금의 호랑이 이야기도 현재 관점으로 보면 이상한 이야기 이며, 류차달의 號를 당시에는 없던 것을 지금은 인정하듯이, 우리는 믿고 후손에게 교육하는데 기사보 이후 318년 동안 정부 문헌, 타문족보, 우리 선조의 비문에 써진 원파보를 임원 몇 분이, 각종회장 몇 분이 박수치며 없던 일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7. 어느 민족이나 문중이나 자신의 선조는 조작합니다. 하늘의 자손이다,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신의 게시가 있었다든지,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이 20% 미만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80%의 주인 평민, 천민은 어디로 갔기에 지금은 모두 양반 후손이 되었는지?
8. 후삼국시대 인물 중에서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 된 류지방(柳志防), 신혜왕후(神惠王后) 柳씨 고려 태조의 제1비 본관은 정주(貞州).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 고려 태조의 제4비. 정덕왕후(貞德王后) 柳氏 고려 태조의 제6비. 정주유씨(貞州柳氏)로, 시중 덕영(德英)의 딸,
태봉국에서 진각성경직에 있었던 류척량(柳陟良) . 백제인으로 전주 류씨로 승화현 출신으로 백제의 우장군까지 올랐던 류법반(柳法攀) . 염주호족으로 889년 신라조정에 반기를 들고 자치세력을 유지하였고. 패서지역에서 평주와 더불어 최대의 세력을 유지하였던 류긍순(柳矜順). 류천궁(柳天弓) 고려 정주(貞州, 승천, 풍덕)의 대호족, 류덕영 태조의 제6왕후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柳氏)의 아버지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류차달은 분명 개성지방의 해상 호족일것인데 다른 류씨들의 선계는 어떻게 된 것인지?
9. 노론 서인 남인이 서로 싸울 때 저의 집안은 정철에게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행된 분이 계십니다. 당시 당상관 이상으로 재직한 4촌, 6촌 들의 구명운동이 없었으며 자기 당파 살기에 적극적 이였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 건국의 현실에서 차원부 가족이 몰살당할 때 누가 감히 차효전이 형님 집안이라고 하는 문헌을 남기겠는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 마다에 당시 일부 족보에 차효전의 이름이 없다고 동족이 아니라는 것은 더 연구 핼 대상이 아닌지?
10. 우리 선조들이 바이칼호수 부근에서 발생하여 알타이 산맥, 몽고를 거처 한반도로 온 민족으로 4대 문명발생지인 황하지역 베이징 인과 다르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약 50만년전부터 언어를 사용하였다는데 문자가 없던 시절 구전으로 역사가 전하는 과정에서 황제(黃帝), 하후씨(夏后氏) 왕조명(王祖明) 왕수긍, 기자(箕子) 왕몽(王蒙), 차무일 등의 역사적 인물을 원파보에 적당히 맞추어 꾸몄다고하는데 이분들이 우리 성씨와 간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이칼호수에서 발생한 동족의 일부는 분명할 것 같은데 더 연구가 필요하지 않는지?
11. 확실한 문헌이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구전 자료라도 댓글에 남겨 주십시오. 남겨준 댓글을 보고 이곳 대학 도서관이가서 찾아보고 그래도 못 찾으면 카페 주인에게 물어 보고, 또 여러 사람 의견을 들어보고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2. 이번 12월 2일 대전 종회에서 민주적인 방법으로 회의를 진행하지 않고 발언 기회를 주지 않고 17일 임원과 각파종친회장이 모여 문화류씨 유래비문 내용을 확정한다면서 이수건 교수의 논문 때문에 차류는 남아라는 어느 임원의 말이 있었다는데 제 생각은 차원부설원기 조작 내용과 차류 문제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문장별 번호칸의 띠어 쓰기기 되지 않아 메인게시판에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