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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권 성수
성경이 가지고 있는 구조
현대는 인간 자율, 과학이 발전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런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불트만은 비신화화 하였다. 자기의 사상을 성경의 틀 속에 넣어 버린다. 자유주의자 일수록 만년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하고, 보수주의자일수록 현대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한다. 현재의 내가 전제를 가지고 성경 속으로 들어간다. 자기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또 그 시대의 안경을 끼고 본다. 총신이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 강의를 통해서도 안경을 끼게 된다. 신학에서 배운 것이 전제가 되어서 안경을 끼게 된다.
문제는 이 전제를 가지고 자기의 전제를 성경에 들어가서 자기의 전제를 정당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경의 이해로 자기의 전제가 성경적 전제로 화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
전제가 성경으로 들어간 후에 다시 나올 때는 성경의 전제를 가지고 현실로 나와야 한다.
본문을 놓고 1주일 내내 자기의 생활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 가운데서 말씀이 착근(着根)을 하게 된다. 말씀이 着根 되도록 하라.
1>.말씀이 삶의 맥과 연결되도록 하라.
2>.성경은 인간의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이어야 한다. <문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은 쟝르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비유를 놓고 신문기사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복음서를 놓고 전기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복음이라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쟝르를 구성하고 있다. 쟝르를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이 불제자였다'라고 추측하는 것은 복음서의 쟝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3> 근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을 설교할 때, 이 설교를 통해서 하루 밤의 기도로 완전히 천사가 된다고 착각시키는 설교는 하지 말라. 그는 여전히 형 에서 앞에서 아부하였다. 아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1-6절을 설교할 때>, 빌립보 전체를 여러 번 언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설교를 여러 번 뒤집어야 한다.
4> 그래서 원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원접문맥을 살펴야 한다.
1. 단어에 있어서 부당축의 하지 말라.
자기 의미 아닌 것을 모아서 설명하는 것이 부당축의이다.
예)베드로가 물에 빠져들 때,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에서 '구원'을 설명한다면 부당축의하게 된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부당축의할 수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부당축의한다.
예)"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계시라는 말을 잡고 설교자가 "일반 계시가 어떠하며, 특별계시가 어떠하다" 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부당축의이다. 여기서 계시는 조명에 대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2. 어원화를 주의하라.
어원이 항상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어가 역사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 하는 보다, 그 시점에서 어떤 의미로 쓰여 졌는가를 알아야 한다.
단어에는 통시적(diachronic) 의미와 동시적(synchronic)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단어를 설명할 때, 동시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동시적 분석으로 단어를 분석해 나가야 한다.
3.역사적 맥을 따라야 한다.
그 지명과 그 역사와 그 문화를 이해해서 그 사람들의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성서지리학을 해야 한다. 신약배경사와 구약 서론, 신약 서론을 공부해야 한다.
주의할 것은 그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이해하라는 것이다. 큐티는 내 나름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심리화, 영화, 현대화로 착각할 수 있다.
지금은 Emotion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예배는 장례식이 아니고, 축제다. 주로 Emotion에 집착하고 있다. 우리는 지. 정. 의 를 다 포함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흐르다보니 지적인 부분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흐름이 Emotion 으로 흐르기 때문에 롱맨은 그것을 포착한 것이다.
Allpender 와 Longman이 같이 글을 썼다는데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창녀 속에서의 신부의 영성> 현실감각이 뛰어난 일반대학 교수가 분석한 뒤, 그 분석에 대해서 신학교수가 처방전을 내어놓는다면 좋을 것이다. 알렌더는 인간심리를 분석하고 롱맨은 성경을 갖다 대었다. 두 지평의 융합된 것이다.
강해 설교에 있어서도 두지평이 융합되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비판받는 것은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모르는 것에 비판을 받고 있다.
<시편>을 가지고 글을 썼는데, 시편은 우리의 깊은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어찌하여 원수가 많습니까? 영원히 나를 떠나시려나이까? > 갈등 속에서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감정이라는 것은 기복이 심하다. 현대심리학자들은 그 감정들이 중립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저자는 이 감정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깊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질문을 표출시키는 것이 때문에 감정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룰 때, 시편중에서 <Psalms of Disorientation>
시73편같은 경우에 자기는 바로 믿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은 너무 잘되고 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고통적인 삶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잘되는 것을 보며 가슴앓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신신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삶은 망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가슴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그래서 감정을 영혼의 울부짖음이라고 한다. 시편을 해석할 때, 상담심리학에서 말씀을 다루어 나가게 되면 감정을 분노, 시기, 절망, 멸시, 수치 6개의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분노 중에서도 의로운 분노, 불의의 분노가 있는데, 의로운 분노는 불의한 분노에 대해서 하는 분노이고, 불의한 분노는 기다리지 못해 나타나는 분노이다.
두려움에도 자기를 파괴하는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다.
어두운 욕망, 시기와 질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망,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욕망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 두 지평의 융합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병무 교수의 말 "왜 기장측들이 부흥하지 않는가? 철학적인 설교만 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생활과 관련된 것을 좋아한다. 생활과 연결시키는 설교를 해야 한다.
<데니스레인>
한국교회의 장점, 기도와 헌신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단점)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에는 영국 교회가 한국 교회와 비슷하였다. 한국 교회는 위기다. 말씀이 생활에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기 때문에 세상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관련된 말씀이다. 오늘과 관련되지 않으면 그 말씀은 떠 버린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인간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삶이 강조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데니스레인은 모든 삶을 말씀과 관련을 시킨다. 말씀이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면 위기다. 지금 굉장히 번창하지만 이 말씀대로 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왜 줄어들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남비와 같은 신앙이기 때문에, 빨리 식어 버릴 위험이 있다. 심각한 문제는 말씀과 생활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설교자들이 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지 않는다 *
웨스트민스트와 같이 보수적인 학교에서도 이렇게 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실천 쪽에 관심을 가지면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는, 현실을 뒤집어엎는 시도를 해야 한다.
4> 성경의 맥을 잡아라. - 경맥(신학적해석)
성경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66권 성경이 40여저자에게서 1600년간에 걸쳐 쓰여진 말씀인데,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저자이시기 때문이다. 두 말씀을 충돌시키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창세기로부터 계 1600년 까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웅장한 설계자로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각 성경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본문을 설교할 때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신학적 해석이라고 한다.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맥을 잡는 해석인데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병행되는 본문을 통해서 그 본문을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구절이 나올 때, 다른 구절의 단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유의점 1>
주의할 것은 표면상 같은 단어나 구가 실제로 같은 구나 단어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문맥 속에서 같은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콘코던스를 사용하는 자들이 모순에 빠지는 것은 문맥 속에서 단어를 찾아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문의 풍부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껍데기만 설교하는 것이다.
표면상의 의미와 병행구가 같도록 해석하라.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잘못 사용하면 교인들은 성경에서 멀어진다.
*<유의점 2>
구약 신학, 신약 신학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신약 신학을 하지 않으면 종말론에 가서 <세대주의적 설교>를 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전체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접근 방법>을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구속사란 무엇인가? 창-계 하나님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신약을 이야기해야 한다. 신약을 설교 하면서 구약을 인용해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시각이 없이 구약을 해석하면, 랍비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구약 본문 자체로 보면서도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주제가 발전되면서 계시록에 와서 종결을 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을 이야기하면서 안병무의 이야기를 하였다.
남한을 비판하면서 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가? 안교수는 유대인들을 소외된 계층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와 가나안의 쫒겨난 자들이 하비루를 구성하였는데, 그 제도권에 저항하는 사상을 여호와 유일사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윗이 군인출신으로 여호와가 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사령화하고 성전을 사령화하였다.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 그래서 안교수의 타도대상이 다윗이라는 것이다. 그 타도할 사람이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여호와 유일사상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의 지도자로 사역하였다. 민중의 한을 푸는 자가 예수다. 예수 무당이 민중을 규합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들어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도권이 때리므로 맞았고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저항주의자이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화산맥이 나오고 있고 그것이 주기적으로 분출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태일이 바로 그였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메시야가 현존했다고 한다. 민중신학이 보는 성경이 맥이 바로 이렇다. 메시야를 죽인 것은 민중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해석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차이는 해방신학은 폭력을 민중신학은 비폭력적이다.
우리는 구원의 역사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모토중에 하나는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라는 것이다. 이 모토 즉,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기 때문에 성경 외에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것은 반지성주의적 경향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주장한 종교 개혁자들은 대단한 지성주의자, 학자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을 주장했고 그렇게 성경을 해석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이러한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루터는 원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원어로 설교했다. 그 실력으로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는가? 헬라어, 히브리어를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중세교회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공부를 해야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책보다도 신학책을 사랑하지 말라. 성경전체를 많이 읽어야 된다. 성경의 내용이 맥으로 잡히고, 체질화 되도록 해야 한다.
5. 영맥을 잡아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숨길이 들어가 있는 책이다. 1에서 4까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잡아낼 수 있다. 그러나 영맥 쪽으로 보면, 예수 믿지 않는 학자들은 할 수 없다. 성경해석은 깨닫는 것이다. 인격이 부딪혀서 변화되어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진짜 깨달음은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듣고 깨닫는 자니,............." 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중생한 사람이라도 성령에 다이얼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다이얼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영맥은 강조했던 반면에, 1에서 4에 대해서는 무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성령의 설교를 할 수 있다. 성령의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령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다툼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막혀 버린다. 회개하여야 한다. 미운 사람을 마음에 품고 성경해석을 할 수 없다. 감정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다. 강단에 설 때, 그러한 부분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노이로제에 걸려서는 안된다. 회개는 고치는 것이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맥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영맥과 연결되는 것이다. 설교자가 어떻게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질이 달라진다. 말씀을 붙들고 깊이 묵상할 때,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설교묵상을 할 때, 1-4번을 확인하고 성도들에게 외치라.
설교가 원고로 준비된 후에 머리 속에 담고 산책하라. 그리하여 산책하며 두번 정도 설교하라. 그리하면 강단에서 설교를 볼 필요가 없다. 성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 강단에 서면 위험하게 된다. 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라. 성령의 삶과 현실의 삶이 맞지 않을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신다. 고난을 통해서 머리에 있던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간다. 고난을 당하면 자기와 관련된 부분이 강하게 다가온다. 맥(脈)을 잡아라.
성경무오에 관한 시카고 성명
1,2조> 카톨릭을 겨냥한 말
3조> 실존적으로 부딪히는 것만 진리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진리이다. 튀빙겐의 주장/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므로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 인간의 이성에다 계시를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4조> 인간의 언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언어가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5조> 성경계시의 점진성에 대해서 말한다. 신약성경이 완성됨으로 성경이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점진적이라는 것은 발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명이 처음부터 있었는데 펼쳐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계시와 후기계시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6조> 글자까지<언어영감을 말한다>
7조>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을 통하여 사역하셨다. 그 방법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8조> 인간저자의 개성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유기적 영감이다. 영감 되었다고 해서 전지한 것은 아니다. 성경저자가 전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저자들이 쓴 것은 참되다. 왜곡이 전혀 없다.
10조> 영감은 성경의 원본에만 적용되며 이 원본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가능
12조> 성경전체가 무오하다는 것이다. 영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지만, 역사나 과학분야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13조> 성경에는 정밀성이 전혀 없다. 문법도 틀린다. 보이는 대로 기록한다. 허위를 허위대로 기록한다. 과장법, 어림수를 많이 쓴다. 자료를 주제별로 배열하고 있다. 병행기록에 있어서 자료를 다양하게 인용한다. 성경이 성경을 인용할 때, 정확하게 인용하지 않는다. 설명적으로 , 해석적으로 해석한다. 그 당시의 인용법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6조> 성경무오 교리는 고등비평에 대항하거나 개신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만든것이 아니라, 신학사상의 주류였다.
17조> 성령의 내증, 성경과 분리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19조> 성경무오를 외친다면 실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성경무오를 믿지 않아도 천국에는 가지만, 교회에 엄청난 폐해를 끼친다.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
*성경무오의 정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 신구약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행위의 규칙이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성경의 자증과 성령의 내증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구 프린스톤학파에게로 넘어가는데, 워필드가 대표적이다. 그의 큰 공헌은 성경의 영감교리이다. 워필드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영감된 인간 저자들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인간의 책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동류적' 작용이 오류를 절대 불용하였다. Carson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 속에서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자유롭게 작성된 인간의 저작들을 감독하사 그 결과로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적으로 참되다"라고 말한다. 물론 워필드는 성경이 동류적 작용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경의 原本(autographs)을 두고 한 말이다.
워필드의 성경무오 사상은 "성경무오에 관한 시카고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1. 자신이 진리이시며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상실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자, 주, 구속자, 심판자로 계시하시기 위해 성경을 영감하셨다.
2.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며 성령에 의해 준비되고 감독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그것이 다루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무오한 신적 권위서이다. 그것은 그것이 주장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교훈으로 신앙되어야 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복종되어야 하며, 그것이 약속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증으로 수납되어야 한다.
3. 성령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은 그의 내증에 의해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신다.
4. 성경은 전체적으로, 또 축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개인생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세계 역사의 사건들과 하나님 하에서의 그 자체의 문헌적 기원에 대한 진술 면에서, 즉 그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오류나 결함이 없다.
5. 이런 전체적 신적 무오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한되거나 무시되거나, 성경 자체에 위배되는 진리관에 상대화되면, 성경의 권위는 피할 수 없이 저해된다. 이런 탈선은 개인과 교회에 심각한 손실을 안겨준다.
이상에서 정의된 성경 무오에 관한 7대 오해가 있다.
1. 가현설적 성경관(Docetic)이라고 오해한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 주장하는 설이다. 인간이 전혀 노력하지 않고 성경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떨어뜨려준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성경의 인간저자들을 무시한 성경관인 것이다. 성경전체에는 인간의 개성이 들어 있다.
워필드는 '동류설'을 주장한다. 그는 '구술설(dictation theory)'을 부인한다. 그가 신적 저자와 인간저자들의 동류적 작용을 지적한 것은 구술설이 들어설 자리를 없앤 것이다. 윌리암 아브라함은 워필드의 동류설과 구술설이 구별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윌리암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은 유추적이 말이며 하나님이 누구를 영감한다는 말은 스승이 학생을 영감한다는 것과 유추가 된다고 보았다. 이 말은 학생이 스승의 가르침의 핵심은 충실하게 전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의 제한 때문에 비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의식적으로 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저자를 영감 시켰지만 성경저자들은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하므로써 동류설이 구술설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워필드의 동류설은 인성과 신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설명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핵심적인 문제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의 동류(concurrence)를 어떻게 균형있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 무오를 가현설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성경에 인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성경이 유오하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오성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적요소를 강조하게 되면 인적 요소가 성경에 들어가게 됨으로 성경이 유오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인적 요소가 성경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유오성이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전제에 문제가 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존재인가? 그러면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오류가 없었다. 또한 완전 상태에 들어갔을 때 인간은 오류가 없다.
카슨은 "인간들은 항상 유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항상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성과 유오성을 필연적인 등식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현설적 성경관이라고 비판하고 인적요소가 있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을 <가현설적>이고 한다면, 인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을 <자연신론적 Deistic)이라고 한다. 성경의 신적 성격을 부인하고 인적성격만 강조하는 이상의 입장은 자연신론적 성경관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인적요소가 들어간다고 해서 절대로 오류가 있다고 보면 잘못이다.
Berkouwer는 성령과 인간 저자들의 유기적 관계를 적응과 원용을 구분함으로써 설명했다. '적응'( adaption)이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적응시키신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가 자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말하듯이 수준을 낮추어서 말하신다. (Baby talk) 물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불순한 것은 아니다. 원용이 아니다. 성경 무오 사상은 결코 가현설적 성경관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가현설적 성경관이라고 하는 자들이 그 반대의 극단인 자연신론적 성경관의 오류에 빠져있다.
2. 학문적 황무지라고 주장한다.
둘째 오해는 성경무오를 받아들이게 될 경우 발전적 학문활동을 할 수 없고 그 결과로 학문의 황무지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무오는 인적요소를 무시하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황무지가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오히려 가현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 학문적 활동의 마비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실제로 성경무오를 주장하므로써 학문적 황무지가 아니라 더 많은 학문적 활동을 복음주의자들이 하고 있다. 시카고의 어느 자유주의 신학교는 학문적으로 무장되면서 신앙에 무장되지 않으면 학교 문을 닫게 된다. 그러니까 자유주의 신학교일수록 수준을 낮추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쪽이 학문적으로 더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성경무오설을 받아들이게 되면 학문적 황무지게 된다는 오해는 잘못이다.
3. 연역적 성경관이라고 주장한다.
세번째 오해는 성경무오 사상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를 전제해 놓고 이 명제로부터 연역해낸 성경관이라고 보는 오해이다. 성경의 현상을 주석적으로 관찰해서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대신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완전무오하시다, 따라서 성경은 무오하다는 식의 연역적으로 추론한 것이 성경무오설이라는 것이다. 결국 성경무오는 "주석적 왜곡"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현상을 조사하면,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비과학적 세계관과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진술들이 나타나므로 성경 현상의 바른 주석으로부터 성경무오를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무오가 연역적 성경관이라는 오해에 대한 폴 파인버그의 반론
1.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이 단일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다.
스프로울의 경우
1)고백적 방법(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믿음으로만 그렇게 인정하는 방법)
2)전제적 방법(성경의 자증대로 성경의 절대 권위와 무오를 전제하는 방법)
3)고전적 방법 (귀납적 연역, 외증과 내증을 겸한 방법)
따라서 모든 무오론자들을 연역적 성경관의 테두리 안으로 가두는 것은 불합리하다.
2.연역적 방법을 사용한 자들을 무조건 교조주의적이고 폐쇄된 자들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기하학의 공리들(axioms)을 사용하는 자들을 비학문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음과 같다. 기하학의 공리들과 같은 신학적 공리들을 전제하고 이것들로 부터 이론을 연역할 경우 이것을 교주주의적 이론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3.성경무오설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복잡한 학문을 하는데 대부분 연역법과 귀납법을 동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무오를 연역법적 성경관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실제로 이론을 세울 때는 귀납법과 연역법이 미묘하게 상호 작용할 뿐 아니라, 이 이상으로 나가서 창조적 사고나 갑작스런 통찰 등으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4. 프린스톤의 신고안
네째 오해는 성경무오가 구프린스턴의 新考案이라는 것이다.
샌디인은 그의 저서 <근본주의의 뿌리>에서 하지와 워필드가 성경 원본의 무오성 신앙을 일부 장로 교인들을 위한 교리적 차원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성경무오 교리를 창안했다고 했다. 그 결과로 성경무오 신앙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리가 되었으나, 실상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작성자들과 칼빈등의 개혁주의 전통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로저스와 맥킴도 이 교리에 참여하였다.
이 주장에 대한 부당성은 카슨과 우드부리지가 주장하였다. "1500년이상 동안 하나님의 무오하게 영감된 책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진정성은 기독교의 고정되고 논란되지 않은 신앙이었다"
교부들도, 종교개혁시대에도 성경무오를 주장하였다. 성경역사 전체를 두고보면 구프린스톤의 주장이 아니고 전체역사의 주류였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성경무오 사상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바에 의하면, 성경 무오가 프린스턴의 창안으로서 역사적 기독교 및 개혁주의 전통과 단절된 것이라는 샌디인과 로저스/맥킴의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5. 형식적 성경관이라고 오해한다.
성경 무오에 관한 다섯째 오해는 성경의 권위는 본래 '신앙과 행위' 영역에만 국한되고 역사와 과학 등의 영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데 성경무오가 바로 이 점을 무시한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저스/맥킴은 성경의 기능(function)과 형식(form)을 엄격히 구분하고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믿을만하나, 무오한 기능이 무오한 형식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들은 성경의 기능을 강조하는데 구원적 기능만을 강조한다. 구원적 기능면에서는 오류가 없지만 형식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폴 파인버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성경무오는 문법규칙들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2)성경무오는 비유법이나 주어진 문학 장르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완서법, 과장법,제유법, 의인법, 환유법 등) 기사, 비유, 예언, 시, 복음, 역사 등의 문학 장르도 사용되고 있다.
3)성경무오는 역사적 혹은 의미론적 정밀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4)성경무오는 현대과학의 전문술어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은 현대 과학적 경험주의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통속 용어 혹은 관찰용어를 사용한다.
5)성경무오는 신약의 구약인용에 있어서 여자적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기록당시에는 인용부호, 생략, 괄호, 각주 등을 정확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6)성경무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쓴 정확한 단어들과 정확한 음성과 정밀하게 일치해야 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7)성경무오는 어떤 하나의 기록이나 관련되고 결합된 기록들의 철저한 포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8)성경무오는 성경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들의 不誤나 無誤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이 과학의 교재나 연대기적 역사 교재가 아니므로 이런 기준에서 성경현상을 보고 성경유오 운운하는 것은 성경의 본질을 오해한 결과이다. 그러나 성경이 역사나 과학 문제를 다루는 한도 내에서 무오하다.
성경이 구원적 기능면에서는 무오하나 과학과 역사 면에서는 유오하다는 것은 기능과 형식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원론은 부당하다. 구원적 기능이 성경의 형식을 통하여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능과 형식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신적 저자의 영감으로 성경이 구원 문제에 무오한 기록이라면 그외 문제에 그의 초자연적인 무오보장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로저스/맥킴의 성경의 무오한 기능과 유오한 형식 구분은 하나의 오해에 불과하다.
6.과학적 도구(scientific tools)무시한다고 오해한다.
여섯째 오해는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자들이 과학적 분석의 도구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비평(historical-critical method)과 관련된 오해이다. 성경무오론자들은 역사비평에서 다루는 학문의 도구들을 무시한다는 오해이다. 역사비평가들은 성경무오론자들의 글을 두고 원시인으로 취급한다. 결국 이 오해는 성경이 구원 기능으로서만 무오하고 과학이나 역사에 있어서는 유오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에 역사비평의 도구로 얼마든지 분석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도구라는 개념을 착각하였다. 기계공의 연장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사상의 영향이 없는 것이지만, 문학적 도구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예)구조비평이란 도구를 써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할 경우.
거짓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참 존재에로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식으로 실존주의에 오염된 주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실존주의에서 출발해서 구조비평의 도구로 성경을 분석한 다음 결국 성경의 옷을 입힌 실존주의 사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중립적이라고 하는 '도구들'이 과연 그런지 주의해야 한다.
문학적 도구들은 성경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경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계몽주의 소산으로 인간의 자율이성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비성경적인 사상으로 오염되어 있는 도구들의 오염을 제거하고 사용해야 한다.
예) 편집비평의 경우
건드리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마가복음과 Q의 내용과 다르거나 거기에 덧붙인 내용이 마태복음에 있을 때, 그 내용은 역사성이 없는 미드라쉬로 보았다. 이는 성경의 권위를 부인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현상을 심각하게 취급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역사비평 -자연주의적 전제에서 초자연을 거부한 상태에서 성경도 비판되어야 한다. 또한 유추에 의해서 비판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비판해야 한다. 또한 인과율에 의해서 비판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그러면 기적이 없어진다.
*자료비평 -성경 이전에 기록된 문서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은 이전 문서의 편집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료에 초점을 맞춘다.
*양식비평 - 성경 이전의 자료들, 이전의 구전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어떤 사건을 전달할 때, 소 단위로 전달되는데, 탄생설화, 기적, 비유같은 것을 수도 있다. 그런 구전상태의 유니티는 삶의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Sita im Leben) 그 당시의 상황을 연구한다.
*편집비평 - 저자가 어떤 각도에서 썼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마태의 특징, 마가의 특징, 누가의 특징들을 다룬다.
*구조비평 - 마태복음이면 마태복은 전체의 구조를 연구하는 비평이다.
*청중비평 - 성경을 받아 들였던 청중을 연구한다.
*전승비평 - 어떤 문제가 나오면 구약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과정을 추정하는 것이다.
*독자반응이론 - 본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최초의 독자가 어떤 반응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드니즘에서 연구)
인간이성의 기준을 가지고 비평을 하면 학위를 취득하기가 쉽지만, 학문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전제를 받을 수 없다. 또한 이런 비평들이 내용을 비판할 때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밝히는데 이용될 수 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식비평에 관심을 가지는데, 옛날에는 비유라는 양식에 관심이 없을 때는 알레고리로 해석해 버렸다. 왜 그런가? 비유라는 양식을 몰랐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왜 세대주의가 나오는가? 묵시라는 양식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편집비평에서 저자의 특징을 연구한다. 과거에는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로 주석해 버린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조화시키면 통일성을 살리지만, 예각을 죽인다. 그러므로 따로 따로 쓴다.
마태복음의 '기름은 성령이다'는 말을 성경전체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마태가 쓰는 기름과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쓰는 기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의 상황 속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청중비평도 필요하다. 독자반응이론도 필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독자가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성을 전제하거나 성경내용을 뒤엎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으나, 과학적인 도구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비평에는 기계적인 과학적인 도구들이 아니라, 자기의 전제들이 깔려있음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를 가진 도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분별하며 사용해야 한다.
편집비평을 보면, 건드리가 마태복음을 주석했다. MK도 없고 Q없는 것이 MT마태복음에 나온다. 그러면 그것은 미드라쉬(유대들은 자신의 신학을 말하기 위해서 역사를 뜯어 고친다는 것)라는 것이다.
동방박사의 방문사건을 두고 (마태는 이제 유대목자의 방문을 이방인마고의 방문으로 바꾼다) 건드리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뜯어 고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유대인 미드라쉬라는 것이다. 편집비평이니까 마태복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반응을 이방인 방문으로 뜯어 고침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의 주석은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 버리면 성경의 역사성이 없어진다. 성경이 믿을 만한 책이 될 수 없게 된다.
104 주 53) 편집비평 자체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고 편집비평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과학적인 비평을 한다고 한면서, 성경을 꾸면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용할 수 없다.
주의할 것은 편집비평을 마치 도구라고 생각하고 작업했을 때, 건드리의 마음 속에 성경이 역사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마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건드리가 그렇게 본 것이다.
<편집비평 시험가능성 있음>
편집비평을 하는데,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데 마태가 이런 식으로 했다고 하는 것이고
B는 편집비평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성경 자체의 특징을 거부한다.
스톤하우스는 확실한 사실에서 출발해서 ,추측으로 나아가는 작업을 했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폼으로 언약을 잡아내서, 구약의 통일성 즉 언약이라는 것으로 전체가 통일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딜라드, 구약의 공관문제, 사무엘, 열왕기서, 역대기서 동일한 본문에 대해서 저자의 시각이 다른다는 것이다.
쟝르비평> 성경을 밝히는 한도 내에서 비평을 쓰고 있다.
7. 해석학적 획일성이라고 오해한다.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획일적인 내용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한다고 하는 전제,
일곱째 오해는 그것이 해석학적 획일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 오해는 극보수주의자들 편에서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어느 귀절에 대한 특정해석만이 성경무오를 세워준다는 오해로서, 학문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혹은 해석자의 시각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해석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야기되는 오해라는 점에서 여섯째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지만, 어떤 주석도 각도에 따라 달리 주석할 수 있다. 해석학적 획일성을 반드시 주장할 필요는 없다.
예1)실바는 민 25:9의 24,000명과 고전 10:8의 23,000명에 대한 세가지 해석을 소개했다.
1)개인들의 정확한 숫자 계산의 의도가 없을 때, 어림수를 제시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한선, 모세는 상한선을 제시한 것이다.(칼빈의 해석)
2)두 저자가 다 정확한 숫자를 제시할 의도가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목적에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림수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데 더 유리하다.(우드의 해석)
3)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우리가 그 저자들의 목적과 당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확성의 기준을 염두에 둘 때, 결코 오류가 없다. 그의 목적은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도덕을 경고하는데 있었다. 바울은 통계보다 부도덕을 강조한다. 의도 - 목적 - 의도의 내용 (죄악성과 하나님의 공의)- 수사학의 원리, 당시의 정확성(주석학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깨닫는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마운스의 해석)
예2) 막 10: 17-18과 눅 18:18-19에서 '선한'과 '선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선한'이 어디에 걸리느냐? 선한 선생님,
선한 (양쪽에 다 걸린다) 왜 내게 선하다고 하느냐, 왜 선한일을 묻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전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부분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성경무오의 7대 오해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성경무오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하라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에게 느슨한 자세가 있는 사람은 성경무오를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싶다. 이렇게 양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성경무오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면서 성경관 논의의 방향 설정 제의>
1. 어떤 경우에도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수호되고 주장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을 따라 간다고 포기되면 절대적 권위가 없어진다.
성경의 권위는 절대 수호되어야 한다.
2. 보수주의자들은 너무 수비적인 자세로 취하지 말고, 성령의 검으로 담대하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는 식으로 학문 활동을 하라는 것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성경무오를 주장한다는 인식을 주지 말라.
3. 성경을 현대 속에 넣어 현대를 변혁시키도록 한다는 점에서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 간에 '지평의 융합'을 시도하라. 세속주의관을 뒤집어 엎는 융합을 시도하라는 것이다. 삶과 연관되지 않는 성경무오는 자칫하면 '죽은 정통'의 자기정당화 수단이 될 수 있다.
성경 무오를 이야기할 때 지평의 융합차원에서 하라. 딤후3:16을 쓰는데, 왜 디모데후서 전체의 문맥을 보라는 것이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시대, 고통하는 시대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그 일에 살아라. ABIDE에 초점이 있다. 그 뒤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현실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온전하고 무장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추상적으로 삼지 말고 충돌하면서 그 안으로 이 구절이 나왔다면 삶의 현실을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뒤집어 엎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무오의 연구는 삶을 변혁시키는 방향으로 역동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4. 말씀을 전하는 자가 생명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체험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이 읽으십시오 라고 하면서 왜 설교가 메말랐느냐는 것이다. 본인이 생명을 체험하지 못하고 전하면 안된다. 본인이 생명의 말씀을 체험하고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사람을 우습게 본다. 사수를 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학문을 하라. 지평의 융합을 하라.
이것이 바로 성경에 대한 오해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고 성경의 권위를 전향적으로 정립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성경해석의 역사.
성경해석의 역사를 보면 오석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잘못된 해석이 많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참작해서 바른 해석을 해야 한다. 해석을 잘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잘못된 해석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잘못 해석할 가능성을 가지고 성경해석에 임해야 한다.
A.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1. 랍비들의 성경해석
(1) 에스라에서 바리새주의까지
에스라는 랍비전통의 효시이다. 그는 율법을 철저하게 확립하였다. 그의 긍정적 영향은 율법 회복, 이방결혼 근절, 회당 교육 강화, 제사장들의 개입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법 교육, 다신론의 유혹 청산등을 통하여 계속되는 위기속에서 이스라엘을 존속시킨 정신적 지주이다. 부정적 영향은(그의 의도는 아니지만) 성서우상숭배(Bibliolatry), 종교핵심의 석화,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가 책 전승 의식으로 형성, 외적 일치가 구원을 대치, 고문하는 엄격성이 즐거운 순종 대치, 공로가 신앙 대치, 경건은 서기관파에 입당하는 것, 예배의식이 윤리 대치 등 신정이 율정으로 바뀌는 방향으로 나타났고, 이런 영향은 드디어 예수님과 정면 대결한 바리새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쉬나 > 모세 오경을 그들의 농사법, 절기법, 여인법, 형법, 제사법, 정결법 6법
모에드--절기법/ 안식일, 형법 - 산헤드린. 안식일 규정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미쉬나의 설명 --- 그것을 탈무드라고 한다. 유대인 전승의 기초가 되는 것이 미쉬나(6법전서)인데 그것을 에스라에서 찾는다. 에스라자신은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을 정리하는 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바꿔 버렸다.
종교핵심이 석화 - 외적인 문제가 중시됨
보수주의 신앙인들이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율법과 나의 관계가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된다. 의식이 활성적 경향을 죽이는 경향이 있다.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율법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치하면 안되고, 전승보다 성경이 우선하며, 외형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고, 의식보다 윤리가 더 중요하며, 신앙은 공로가 아니고, 억지 복종은 감심의 순종을 죽이며, 전문가의 권위만을 내세우면 경직되고, 타학문 연구를 타부시하면 종교가 석화될 가능성이 있다.
(2) 예수님 당시의 두 대표 : 힐렐과 솨마이
1) 힐렐 - 그는 이웃 사랑으로 율법을 요약한 랍비이다. 그는 미래의 미쉬나 6등분의 기초 작업을 했다. 그는 613개의 모세의 규칙들을 중심한 무수한 규칙들을 분류했으며, 7대 주석법을 제정했다.
(성경해석이 전문가들에 의해 독점되면 큰일난다. 힐렐은 성경해석자였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시므온과 안나는 많은 공부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힐렐은 인도주의자, 솨마이는 보수주의자이다)
힐렐의 7대 주석법
①칼 바호메르: 덜 중요한 경우에 적용 되는 것은 더 중요한 경우에는 더욱 더 확실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하물며 법칙'
②게지라 솨바: 한 구절과 다른 구절의 표현상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해석하는 법칙, 동일한 단어들이 서로 다른 경우들에 적용될 때는 양자에서 동일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법칙
③비느얀 아브 미카투브 에하드: 동일한 구가 여러 구절들에 나타나는 경우에는 그 중 하나에서 발견되는 의미가 그 전체에 적용된다는 법칙. 하나의 본문에서 하나의 원리를 세우는 원칙.
④비느얀 아브 미쉬네이 케투빔: 두 본문에서 한 원리를 세우는 법칙, 두 본문을 관련시킴으로써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 원칙.
⑤켈랄 우페라트: 일반적인 원리가 다른 구절에서는 특수화 될 수 있고 특수 원리가 다른 구절에서 일반원리로 확대될 수 있다는 법칙
⑥케요쩨 보 베마콤 아헤르: 한 본문의 난제는 그와 일반적으로 유사한 다른 본문과의 비교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는 법칙.
⑦다바르 할라메드 메인야노: 문맥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법칙
힐렐은 미드라쉬 해석의 대표로 간주되는데, 미드라쉬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 더 깊이 성경의 정신까지 뚫고 들어가서 본문을 모든 각도에서 살피고 그리하여 본문에서 명백하지 않은 의미를 추출해내는 주석"을 의미한다.
2) 솨마이
그는 좁은 형식주의자이며 딱딱하고 격렬한 성격을 가진 자이다. 속죄일에 유아 손자를 금식케 하여 죽을 뻔 하였고, 초막절에 산고로 신음하는 딸 침대 위에 초막을 세운 랍비이다. 그는 상황을 무시하고 원칙에 매여 성경을 해석했으며 힐렐파와 피를 흘릴 정도로 논쟁하였다. 그는 초문자주의적 해석 (hyperliteralist interpretation)의 대표이다.
필로의 성경해석 - 풍유적 해석을 한다. 그의 해석을 체계적이었다. 모세오경 전체를 한체계 안에 넣어놓고 해석하였다. 장엄한 풍유적 해석이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자들이 호머를 해석할 때 쓴 방법인데, 이것을 필로가 받아 들인 것이다.
<법칙>
1. 하나님에게 해당시키기에 무가치한 진술들, 모순되는 진술들, 명배간 알레고리가있는 경우 문자적 의미를 제거하였다.
2.불필요한 반복의 경우에 풍유로 해석하였다.
3.단어를 해석할 때 구두점과 상관 없이 해석
쿰란파의 성경해석 - 분파적 성경해석
이들은 종말적 공동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을 해석할 때 자기들과 연관시켜 해석하였다. 그리고 의의교사의 해석을 절대로 받아들이는 카리스마적 해석이었다. 이들을 '페쉐르' 해석이었다.
< 쿰란파에 대한 학위 논문이 얼마든지 나올수 있고,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총평>
구전을 축으로, 헬라 철학을 축으로, 의의 교사의 교훈을 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구전지향적인 유대인들에게, 철학 지향적인 유대인 교포들에게, 종말론적 교포들에게 성경해석이 적절하였다.
B. 교부들의 성경해석.
1. 오리겐
교회사에서 오리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사본비평의 창시자이다. 스콜리아( 본문의 여백부분에 과거 선배 학자들의 주석을 간단하게 써 놓는 것) 70인영감, 외경의 영감을 믿었다. 그런 차원에서 성경이 감동으로 된 것으로 깊이 의미를 찾아 내었다. 그도 역시 풍유적 시스템을 말련하였다. 왜 풍유적 해석을 하게 되었는가?
1.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신성모독이 된다.
2.비 도덕적인 경우,(노아, 롯근친상간, 다말사건), 문자적으로 무가치한 경우.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문제가 되는 경우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3. 성경 자체에 풍유적 해석이 있다.
바울이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로
4.오리겐은 풍유화의 근거를 삼분설에서 찾았다. 유적, 혼적, 영적 의미로
5.오리겐은 자신의 불완전한 언어학적 지식 때문에 풍유화를 강화하였다. --히브리어의 병행법을 몰랐다.
<이런 풍유적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1.당시의 변증적, 신학적 필요성 면에서 오리겐의 풍유화를 보아야 한다.
2.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신모독이나 모순을 일으킨다고 보았는데 현대해석자들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3/신약 자체가 알레고리 사용한고 본 점을 지적할 수 있다.
4.설교할 때 풍유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지적
결국은 풍유화는 정도의 차이지 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지나치게 비판하지 말라.
본문을 놓고 주해를 하는데는 풍유화가 필요없지만, 적용부분에 가서는 불가피할 경우가 너무 많다. 본문과 현실의 적용이 시각이 약간 다르게 적용해야 할 경우
풍유적 해석에 대해서 대부분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사실상 수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가서이다.
풍유에 대해서 왜 비판해야 한는가?
그것도 현실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평양신학교 출신자들이 본문과 상관없이 설교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으로 나오고 있는것이다.
성경을 다룰 때에 현실로 끌어 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끌어 들이는 상황에서 풍유적 해석이 나온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비판하면 문제가 있는데, 어느 정도 끌어 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풍유적 설교를 하기 위해선 뛰어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무엇을 표현할 때 풍유적 방법으로 사용할 때, 인상에 남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풍유적 의미를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너무 비판하게 되면 적용할 수 없는 경우에 나아간다.
2. 크리 소스톰
그는 황금의 입을 가진 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 당시에 크리소스톰은 목회자였고 영혼에 대한 애정와 탁월한 웅변, 학식와 양식에 근거한 대중적 강해를 했으며, 성경 전체에 익숙하여 혈관 속에서 그 맥박을 감지하였다. 그는 웅변으로 설교하여 사람들을 움직였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따라갔다. 문맥의 의미를 따라갔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풍유적,
안디옥 학파는 문자적 의미로 나아갔다. (sensus plenior - literal)
3. 어거스틴
초대교회의 것들을 중세로 넘겨준 학자였다.
디코니우스의 7대법칙을 수용하여 성경에 풍유적 해석을 가하였다.
어거스틴은 성경해석자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C. 중세의 성경해석
1. 4중적 의미
1. 문자적 -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2. 풍유적 - 신앙과 연결
3. 도덕적 - 생활과 연결
4. 천상적 - 마지막 하늘나라와 연결시킴
어떤 본문을 보든지 이렇게 4가지 의미로 찾아낸다. 이것이 중세전체에 팽배했던 해석방법이다.
예) 예루살렘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도시, 교회, 인간영혼, 하늘의 도시
이렇게 보니까 주석의 내용이 많아진다. 그래서 이사야 1장을 두고 주석 24권을 썼다.
교부신학은 주로 주석에 근거한다.
중세 시대에 이런 해석이 유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부신학은 주로 주석에 근거하였는데 원래 신학이란 말씀을 가급적으로 넓게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석을 확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동시에 해석해야 한다.
2. 니콜라스
그는 주로 문자적인 의미에 집중하였다. 중세 전체가 풍부한 의미를 찾고 있었지만 그는 고독하게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해석하였다.
D.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
1. 루터
36세까지는 벌겟, 교부들, 4중 의미에 부분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만족
그후 4넌간 히브리어 헬라어를 연구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역본에 의존하면 강해설교까지는 가능하지만, 학자들과 논쟁할 수는 없게 된다)
그의 성경해석은 40세 이후에 정립하였다.
1)그는 성경의 최고 절대 권위를 성경해석의 최고원리로 삼았다.
2)성경의 충족성을 주장하였다.
3)그는 중세의 4중의미를 부정하였다.
루터는 중세의 4중 의미를 복합적지성(multiplex intelligentia)로 보았다.
성경을 여러 사람의 해석을 종합해서 보면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이야기 해야 한다. 다양한 각도로 보면 한없이 들어가게 된다.
4)루터는 풍유의 타당성을 거부했다.
오리겐의 풍유는 원숭이 장난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시대적으로 보아야 한다. 박희천 교수가 문자적인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은 시대의 배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 이다.
5)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했다.
6)개인의 성경 해석권(만인 제사장직)
7)루터는 성경해석 규칙들로 문법적 해석, 때, 상황, 조건을 고려할 필요성, 문맥, 신앙과 영적 조명의 필요성, 신앙의 유추, 모든 성경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 등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신칭의와 관련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다.
"canon within the canon" 정경속의 정경
이 말은 성경이 있다고 할 때, 정경은 기준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약의 27권만이 정경이라고 하는 기준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할 때, 정경이 정경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
정경해석의 원리는 성경 속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원리, 그 또 하나의 원리가 성경전체의 내용을 포괄하지 못할 경우, 성경의 일부분을 짤라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 버리면 야고보서 ,히브리서 등이 짤려 버린다.
정경을 다룰 때, 기준을 잘못 정할때 일부분이 희생될 수도 있다.
이것이 성경해석에 적용할 때, 잘못된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2. 칼빈
(1)간단 명료성
주석의 최고의 미덕은 간단 명료성에 있다.
멜랑츠톤은 신학적 주제 중심의 주석을 시도하여 고려 가치 있는 주된 문제들만 편파적으로 취급하였다.
주제식으로 성경을 다루게 되면, 장점으로서는 성경의 본문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점으로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주제일 수도 있다. 자기가 내세운 주제를 밝혀야 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주제와 관련된 부분만 언급할 가능성이 있다. 선택적으로 설명하는 약점이 있다.
부처의 경우, 신학의 주제들과 주석을 병행했다.
본문을 명확하게 보여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부처의 장황성에 대해서, 칼빈은 간단 명료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주제를 언급할 수 없게 되어 결국 <기독교 강요>로 만들었다.
E. 17-18세기 성경해석
1. 신앙 고백주의
잘못 하면, 성경이 신학의 시녀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시대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성경을 거기다 맞추려고 하지 말라.
2. 합리주의
인간의 이성이 기준이 되는 경우.
3. 경건주의
성경공부, 기도회, 성결, 기독교 교리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기고 신학 논쟁에 질식된 설교의 생동성을 부활시키는 경건주의 운동이 활발한 시대이다.
벵겔이 그 대표적이다.
F. 19-20 세기의 성경해석
1. 맥락화
전통적인 성경해석은 서양의 한 문화 중심의 콘스탄틴적 문화의 속박에 매인 해석, 역사비평적인 시각에 지배됨, 관념론적 언어학의 영향을 받음
이것은 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신은 정치경제 맥락 속에서 성경을 해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맥락화를 하고 있다.
토착종교 속에 맥락화한다고 한다면서 성경이 기준이 아니라 토착종교가 기준이 될 경우 잘못된 것이다.
2. 학문의 연계성 차원의 성경해석
성경해석에 도움이 될 만한 학문들을 연계해서 논의
3. 역사 비평적 성경해석
이성, 경험이 기준, 성경이 비평의 대상
성경 해석을 할 때, 저자, 독자, 본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에는 저자에 관심을 두었는데, 지금은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text의 자율성으로 넘어가며, 또한 독자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을 독자가 결정해 버림으로 상대주의로 흘러가고 있고, Post-Mordernism 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양성 해석으로 돌아가고 있다.
성경의 절대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신학이다. 안식일 성수와 경건성, 복음전파
그런데 지금은 어떤 분위기인가? 주일성수 문제는 그 때와 지금이 완전히 다르다. 전천년설도 박형용목사님과 다르다.
이런 규정을 할 때에 (미국의 신학자들의 강의에서 개혁주의의 특징을 말하는데 성경의 절대주권을 이야기하면 밋밋하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가 성경의 절대권위를 어떻게 부인하는가를 들면서 설명하게 되면 생동감있는 강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강의해야 한다.)
류동식 목사의 한국신학의 분류
정통신학의 공
1. 정통신학의 공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
2.정통신학의 공은 성경의 절대권위의 확립니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3.정통신학의 공은 성경이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을 살려준 점이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다.
4. 복음의 핵심 뿐 아니라 이 핵심과 관련된 주요 교리들을 전해준 점이다.
5.주경신학의 기초를 박윤선 목사님이 놓았다는 점이다.
6.정통신학의 공은 포괄적인 조직신학과 성경 전권 주석으로써 목회의 내용적 틀을 제공한 점이다. 목회자가 목회일선에서 던져야 할 메시지를 준 것이다.(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순수한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7.개인윤리의 확립이다. 이것이 없다면 순교자가 나올 수 없다. 개인윤리의 확립 면에선 정통신학이 귀한 공을 세운 것이다.
8.청교도적 초기 선교사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복음화에 주력한 점이다.
빵 만을 주게 되면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거부하게 된다. 빵을 나누어 주어도 인간 속에 있는 죄악의 본성이 죽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
정통신학의 과제
1.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하시면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밝히며 가르치지 못했다. 이런 것을 강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중신학이 나왔다.
2.성경의 절대권위를 주장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축자영감과 성경무오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마치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단죄하는 과를 범한 것
3.복음이 사회 현실 및 문화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는 누룩인 것을 체계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점
4.서구신학적인 요소가 있는 사실인데 한국적 이해의 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
5.성경의 깊은 부분을 더 밝히지 못한점
6.목회의 청중 분석적 차원을 밝히지 못한 점 (신약을 설명하면 위대한 정치가가 나오지 못한다. 구약부분의 설교를 해야 한다. 우리 정통신학일수록 구약이 삽입이 되지 않았다.)
7.개인의 순교는 강조하면서도 더불어 사는 희생차원에서 너무 약했다. 대천덕 신부는 敎會를 交會로 고치자고 하는 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진짜 교회의 본질을 바로 이행한다면, 공동체성을 확립한다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mitnensch
유학생들의 대부분이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정통신학의 약점이 윤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사회윤리, 사회구조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나와야 한다.
8.사회변혁 등한시
정통신학의 과제
행동이 따라가지 않으면 자제할 필요가 있다. 정통은 사통이 될 수 있다. 성경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강조하게 되면 사람들이 역겨워한다. 바로 믿는다고 하면서 바로 행하지 않으면 송장신앙이 된다. 신학적인 논리만 이야기 하고 행동이 없으면 중풍신학이다.
정통과 정행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정행을 시도하지만 실천이 나타나는 반면에 영혼의 관계가 이상해진다는 고백이 나온다. 그래서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비교(성경해석)
내가 지금 무엇을 상대로 하고 있는지를 바로 파악해야 한다. 에큐메니칼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 정의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복음주의는 카톨릭을 뺀 개신교회 전체가 에큐메니칼이라 한다. 개신교 전체가 복음주의라면 에큐메니칼은 어떤가?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조지 말스덴에 의하면,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현대주의 운동으로부터 전통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근본주의가 반사회적, 반지성적 편협성과 분파성을 띠게 되면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후에 나타난 것이 복음주의 운동이다.
<성경해석을 두고>
에큐메니칼에 가입한 교단, 기장, 예장통합, 기감등이 가입되어 있는데 성경해석은 복음주의 해석을 하고 있다. 안병무 교수의 민중신학을 공격한 사람은 한신 출신의 이화선박사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속에 있는 사람도 복음주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박윤선 박사와 이상근 박사도 소속이 다르지만 둘다 복음주의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경향이 다르다.
1. 성경관이 다르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무오를 주장하는 경향, 에큐메니칼은 성경유오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김이곤 교수는 여전히 성경무오라는 교리를 성서자신의 소리를 막는 기독교 신앙의 대원수로 봄으로써 성경의 절대권위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2. 역사비평.
이반젤리칼은 성경의 본문을 인간 이성의 비판으로 부터 보호하였고, 에큐메니칼은 인간이 계시하신 하나님을 인간이성의 법정의 피고석에 세워놓고 마구 취조하고 심문한 독신적 오만에 빠졌으나
3.성경본문과 삶의 맥락.
에반젤리칼은 텍스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에큐메니칼은 현실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
민중을 이념화하여 민중신학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 가진자와의 적대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윤성범의 토착화 신학. 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한 면이 있으나 단군신화를 삼위일체의 표시로 보고, 誠을 신의 근본개념 뿐 아니라 모든 대립과 투쟁의 해결개념으로 봄으로써 대범한 혼합주의에 빠졌다.
비교에서 얻는 교훈
복음주의가 에큐메니칼을 향해 문이 열려져 있지만, 에큐메니칼 쪽에서는 복음주의에 대해서 문을 열어 놓지 않는다. 오히려 에큐메니칼 쪽이 더 독선적이고 폐쇄적이다. 자신의 약점 부분은 상대방의 장점이 있을 때 배워야 한다.
성경관 -
역사비평 면에서 -
택스트와 컨텍스트 면에서 -
박윤선 박사와 박형용 박사가 성경해석학에 끼친 공과 실에 대한 문제가 95년도에 출제되었다.
음운론은 소리를 다루는 것으로 형태론에 속한다. 어휘론은 형태론 의미론에 속하고, 통사론도 형태론, 의미론이다. 이들은 공히 공시론, 통시론에 속한다. 어휘 의미론을 다루기를 원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임스 바르와 키텔을 알아야 한다. 제임스 바르는 키텔의 신약에 있어서 신학사전을 치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3사람을 알아야 한다.
키텔의 신약신학 사전을 보면, 전통적인 의미론을 따르는가?
전통적인 의미론 - 안토니 씨슬톤이 정리
그는 두 지평이란 책과 새 지평을 썼다. 철학과 성경
<토마스 퀸은 일정한 기간 동안에 특정 주제에 관한 사상이 다소 일관된 사상체계에 의해 공통적으로 조종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패러다임이란 어떤 과학적인 이론의 명시된 법칙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가능한 가설들에 관한 무언의 전제를 가리킨다.>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가설적 전제가 파라다임이다. 파라다임이 계속 바뀌고 있다. 주일개념, 예배형태,여성사역 등에서 파라다임이 변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론을 길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토마스 퀸의 파라다임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퀸은 파라다임이 전이될 때, 연속적이냐? 불연속적이냐 하는 것이다.
(1)문장이나 언어 행위보다 단어가 기본적인 의미단위이다. 이것은 문맥 속의 언어 행위들보다 단어들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입장이다.( 지금은 문맥 속에서 단어의 의미를 찾는다)
(2)어원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 혹은 기본적인 의미를 다소 규정한다. 19세기의 언어학은 주로 원언어들, 언어들의 관계, 언어의 역사 등 통시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어떤 언어가 있으며 그 언어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언어들간의 관계를 연구하거나 역사를 연구하는 것) 그러나 지금은 '동시적 언어학'이 시도되고 있다.(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를 연구한다)
(3)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는 인습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법칙들은 단순히 서술적인 것이 아니라 지시적인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언어와 사회 공동체의 습관에서 이루어진다.
(4)논리구조와 문법구조는 기본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전통적인 경우는 <이다>라는 것은 서술어로 보았지만, 현대적 의미론에 의하면, 명령일 수도 있고, 서술적 선언적 진술일 수도 있다. 경고일수도, 책망일수도 있다.
요일 2:26에 내가 이것들을 너희들에게 썼다는 것은 주제가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5)의미는 항상 한 단어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간의 관계에 의존한다.
(6)언어 사용의 기본은 선언문 즉, 진술이다
(7)언어란 내면적인 개념들 혹은 관념들의 외면화다.
전통적인 개념은 단어 속에 개념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키텔의 경우, 단어 하나가지고 많은 것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연구하기 위해서 아가페를 가지고 설명한다. 그래서 아가페 단어가 쓰이는 문장을 뽑아내어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가페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단어가지고만 해석하게 되면 문제가 되고, 넓게 연구할 수 없다.
B. 크레머에서 키텔까지
신약헬라어, 고전헬라어가 있다.
신약 헬라어는 거룩한 헬라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클레머가 신약사전을 썼다. 70인경 헬라어와 신약헬라어를 비교하면서, 신약헬라어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약 헬라어는 성육신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크레머는 성육신으로 헬라어가 그리스도의 영의 도구가 되어 새롭게 발전되었다고 주장했다.
크레머는 이러한 이론을 목회 현장에서 실제와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율법적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그랬더니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서 은혜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 디카이옷, 디카이오쉬네, 디카이오오를 2년간 연구했다. 그는 단어 속에 은혜가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은혜란 말이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든지 많았는데, 크레머는 단어 속에만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클레머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가 다이스만이다. 그는 5,000단어 중에서 특별한 언어는 1%만 있고 나머지는 통속적인 단어, 코이네 헬라어라고 하였다.
이러한 클레머에 대해서 밀리간은 문법을 가지고 했다.
이러한 클레머의 특징을 더 발전 시킨 사람이 키텔이다. 단어의 의미를 이야기 할 때, 란 단어를 가지고 대논문을 썼다.
C. 신약신학 사전
크레머가 신약 헬라어 단어에 대해 소논문을 썼다면, 키텔은 각 단어에 대해 대논문을 썼다.키텔은 신약 단어들 거의 전체, 심지어 전치사들까지 다루었다. (하나)라는 단어를 가지고 논문을 썼다.
단어의 의미보다는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백과 사전적 정보를 제공하는 사전이다. 내면적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바르
그는 TDNT에 직면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론 연구에 있어서 쏘시르의 이론을 가지고 폭탄을 던졌다. 이러한 영향 가운데는 쏘시르의 영향이 있다. 쏘시르는 구조언어학의 시조이다. 쏘시르의 언어학을 이해해야 하는데,
(1)지시물과 피지시물 관계의 임의성 - 지시물은 단어를 말한다. 피지시물은 대상을 말한다. signfier & signified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개라는 실물을 놓고 한국인은 개, 미국은 독이라고 하듯이, 지시물과 피지시물은 임의적인 관계이다.
1)지시물과 피지시물 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2)한 언어의 피지시물 또는 개념들은 다른 언어의 그것들과 아주 다르다.
어떤 실물을 놓고 지칭할 때, 전체로 이야기할수 있는 문화권도 있고, 그것을 쪼개는 문화권도 있다. 바늘 구멍을 놓고, 눈이라고 하는 문화권이 있고, 코로 보이는 문화권이 있고, 귀로 보는 문화권이 있다.
불어 aimer에 영어love 와 like가 다 포함되어 있다.
to know에 불어 connaitre와 savoir를 포괄한다.
(언어권에 따라 달라진다)
3) 한언어의 역사적 진전 과정에서 개념들 또는 피지시물들은 경계선들을 바꾼다. cattle이라는 단어가 재산전체를 지시하던 때가 있는가 하면, 후에 네발 가진 재산을 지시하다가 드디어 소과의 가축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역사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것은 지시어와 비지시어가 임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에 있어서의 인습성conventionality이다.
2. 병치/ 동치관계
언어는 하나의 망(network)이다. 각 용어의 가치는 다른 용어들의 똥시적인 현존으로부터만 발생하게 된다. 서양장기에서 왕이란 패가 없다면 다른 동전으로 할 수 있다. 결국 이 장기에서 하나하나의 단위에서 구분이 되고 기능만 다르면 된다. 옆에 있는것과의 구분, 기능적 관계만 다르면 된다.
그런데 그 관계를 보면, 병치와 동치관계가 있다.
병치관계는 예를 들면 가시관에서 가시 대신에 월계가 들어갈 수도 있고, 금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 단어와 비슷한 단어와 대조되는 단어를 갖다 놓으면 된다. 주황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빨강, 노랑 등을 대조시켜 그 차이점을 발견하게 한다.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설명할 때, 그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을 끌어들여 그것이 틀리는 이유를 설명하라. 또 비슷한 사람도 설명하라. 그러면 내가 가는 방향이 확실히 들어나"?된다. 왜 다른 사람이 틀리고, 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써야 좋은 글이 된다.)
동치(syntagmatic)관계
인지구조 - 사람들이 자기 머리 속에 다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강의를 할 때, 자기구조에 맞는 것을 들으면 머리에 속 들어온다. 영어를 공부할 때도 인지구조가 있을 때 효과적이다. 교인들의 인지구조도 알아야 한다. 3이란 인지구조를 가진 성도들에게 10이란 것을 설교하면 남는 것이 없다. 성도들이 은혜 받는 것도 자기들의 인지구조 속에 맞을 때, 가능한 것이다. 토론을 통해서 하는 것이 깊이 들어간다. 외우면 도망가 버린다.
*** 동치관계, 병치관계를 반드시 알도록 하라. ****
(병치관계와 동치관계는 95년도 시험에 출제되었다.
예를 들어, 교포 2세들은 모자를 입는다, 신을 입는다로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put on을 쓰기 때문이다. 동치관계가 되지 않는다.
병치 관계가 서로 대치될 수 있는 요소들 간의 상대적인 관계라면, 동치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결합된 직선적인 결합관계라 할 수 있다. 전자는 대조적인 관계이고, 후자는 결합적인 관계이다.
3. langue/ palole
4. 통시적 / 동시적
5.<신약신학 사전>에 대한 바르의 비판
1)히브리어 구조가 히브리적 사고를 보여준다는 이론 비판
①헬라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의 대조
②언어학적인 논증(동사 체계)
보만은 히브리어의 동사체계 속에서 히브리인들의 사고가 동적임을 설명하려고 한다. 동사는 상태동사와 동작동사가 있는데, 보만은 상태동사까지 동작동사로 해석해 버림으로 자기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룹위에 앉으신'을 설명할 때, 앉으신은 '그룹들 위에 앉으시는 역동적이니 동작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한다.
*보만이 이런 논증에 대해 바르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1)보만은 히브리어 동사만 설명했을 뿐, 헬라어 동사는 설명하지 않았다.
(2)다른 언어들에서와 같이 히브리어에서도 문맥이나 시제 등에 따라 다른 것 같이
보만이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사, 전치사를 가지고 설명하려 했던 것이 잘못이다.
3)형태론과 구문론의 현상에 근거한 논증
(1)구문상태
히브리적 사고를 종합적이라고 설명하기 위해서 '왕의 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라는 단어을 사용한다. 이것이 totality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헬라어
가 더 종합적이다.
(2)수사(numerals)
2. 어원상의 논증과 기타 논증 비판
영어의 어원을 따지는 것ㄱ은 문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성경이 쓰여졌기 때무이다. 또한 그렇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어 어원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카할과 에클레시아 ( 여기 시험에 나올 확률이 80 %이다)
토렌스의 주장
음성이 문맥에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도 사람의 음성도 될 수 있다. 왜 그렇게 고정시켰을까?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카할도 사용되는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공동체도 될 수도 있고 , 악한 자들, 악한 민족의 공동체로 볼 수도 있다.
카할은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1)실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고려해야 한다.
단어를 연구할 때 용례를 연구해야 한다.
2)그 음성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3)카할이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악한 민족들의 그룹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했다.
4)카할은 때때로 골치거리인 그룹을치기 위해 무장한 자들의 회중을 가리켜 사용되기 도 하였다.
전문술어일 경우는 가능하지만, 카할은 전문술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은 잘못
이다. 단어를 연구할 때 전문 술어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용례를 살펴야 한다.
* 한 문장 안에 한 단어는 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저자가 의도적으로 중의성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문맥에서 알 수 있다. 본문의 문맥이 어원상의 의미를 뒷받침한다면 사용하라.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없애버려야 한다.
설교에 있어서 어원의 해석을 해야 할 경우
6)언제 어디에서 사용되었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3)
다바르는 어원상 '뒷면'을 의미한다. 여기서 뒷면은 단어의 내면적 실재를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면적 실재가 표혐화되는 역동적인 사건을 가르킨다.
70인경은 다바르를 헬랑 로고스나 레마로 변경하는데, 데바린은 '역사'를 의미하기도 한다.(복수를 가지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word)이 역동적(matter)사건과 연결되어 복수로 나아가면 (역사)를 의미하며 말씀과 의미가 일치하면 (진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 말씀, 사건, (역사) + 성전 + 이스라엘 역사
다바르라는 단어 하나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걸었다는 것이 잘못이다.
(1)의미의 뒷면 이라는 것이 다바르의문맥 속에서의 실제 용법과 전혀 조화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미의 뒷면과 말씀의 내면적 실재 간에 분명한 관계가 없고
(2)그 내면적 실재가 표현화되는 역동적인 사건이라는 것도 무리하게 과장
(3)다바르의 봇수 데바림에 역사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 역시 부당한 주장이다.
(4)이러한 논증방법의 문제는 한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한다는 데 있다.
다바르의 의미는 word를 의미하기도 하고 matter를 의미하기도 하다.
3. 킷텔의 <신약신학 사전> 비판
1)개념사를 다루 작품
2)개념이 단어들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
3)단어의 실제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고, 어원과 단어와 먼 관계에 있는 것을 많이 찾아냄
4) 단어 = 개념
5)키텔은 기독론적 의미기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
7)meaning 과 significance를 구별하지 못했다.
8)부당한 전체 이양의 우를 범했다.
*바르에 대한 평가
1.부정적 평가
(1)데이비드 실
2.긍정적인 평가
소년이라고 할 때, concept와 signification이 있다.
word ------- significatum
---------sense--------conenpt
단어연구만 가지고 개념을 정립하려면 문제가 생긴다. 누구복음에는 아가페가 한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개념이 나와 있다.
또한 아가파오라는 것이 항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는 선재, 지혜, 그리스도 를 항상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가 쓰여지지 않은 곳이라 해서 그 의미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골 1:15
word = concept 의 등식은 문제가 생긴다.
단어연구방법
*내어적 행위와 통어적 행위(시험문제 준비)
의의란 화자와 그의 세계와의 관계, 화자와 청자의 관계 면에서 언어행위와 관련된 의미관계를 말한다.
(해방신학은 hermeneutics of suspicion적 입장이다. 무엇이든 의심하라는 것이다/
p. 263
개념지향적 접근법
장(field) 지향적인 접근법
어휘 의미, 문맥 의미, 특수 의미,
1)어휘의미
2)문맥의미
3)특수의미
상호보완적이다. 양자의 상호보완성을 전제하고 세 가지 의미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수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자기 속에 있는 특수의미를 이야기하지 말라.
병치관계를 생각하라.(95시험출제)
(1)중첩관계
어떤 본문을 잡으면 그 의미가 이것,이것, 이것 이 아니라고 설명함으로서 이것이다라고 설명하는 방법. (용각산) 목으로 외치지 않아도 설득된다. 비교하라. 그러면 많은 부분의 글을 쓸 수 있다.
이것이 병치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무엇을 해 보게 하는 것이 병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보게 하라.
선교를 하게 하려면 선교현장에 가서 직접 보게 하는 것이다.
1.유사성에 근거한 병치관계
(1)중첩관계 - 상호교체가 가능한 유의어이다.
(2)연접관계 - 부적정 유의어 상호교체작 불가능한 유의어이다.
(3)포함관계 - 하의 관계
상위어(superordinate)와 하위어(hyponym)
2.반의성에 근거한 병치관계
(1)이중관계
(2)복합관계 : 양립불가
3.성분분석
성분분석을 잘 하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동치관계 - 옆에 있는 관계를 설명함으로서 아는 것이다.
1.문맥,
(1) 글의 맥
(2)상황의 맥 - 상황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2.중의성 ambiguity -어휘적 중의성, 통사적 중의성
(1)의도적 중의성 -요3:3 위로부터,다시 2가지 의미가 다 있다는 것이다.
(2)비의도적 중의성 - 말하는 사람은 하나의 의미로 했지만, 듣는 사람이 다르게 듣는 경우이다. 모호한 의미를 어떻게 분명하게 찾아내느냐?
중의성 해소 -
(3)문맥의 원 -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나가는 원을 그려라.
마태복음에서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1단계 원 - 25장 자체에는 기름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2단계 원 - 23-26장에서 찾아보라. 기름없이 주님을 맞이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선행이다. 행위이다. 그 다음에
3단계 원 - 마태복음 전체 원을 그려보라.5대강화를 비교해 보면 5-7장(1강화)에는 행위가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선행이다.
4단계 원 - 신약전체
5단계 원 - 역사적 배경 - 유대인의 해석 -기름섞은 과자 - 선행 섞은토라연구
그러므로 기름은 선한행위이다.
그런데 많은 성경해석자들이 먼데서 가까운 곳으로 들어간다.
마태복음을 해석할 때 바울로 가지 말고 마태복음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선행을 강조하는데, 그 선행은 열매로 나타난다. 그 열매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메시야와 연결되어 있는 나무라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난 선행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선행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 초점이 그리스도가 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초점이 있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p. 276
적절한 단어를 문장 속에 쓰는 것이중요하다.
(1)어휘선택
(2)어휘의 장
단어가 많은 중 왜 이 단어를 썼는가? 의문을 제시하라
(3)스타일
오이다 -직관적으로 아는것,
기노스코 - 학습으로 획득하는 것.
어떤 단어에 특수한 의미가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쓰는 것이다.
<결론적 제의>
(1)우선 주어진 단어가 어느 정도 지시적인지를 결정한다.
(2)표준 사전들을 택하여 그 단어의 의미론적 폭을 결정하되 그 폭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적절한 의미인지를 살핀다.
(3)단어의 병치관계와 동치관계를 살피라
(5)역사적 차원에서 동시적인 것을 살피라.
(6)저자의 의식과 의도에 초점을 둔다. 저자가 역사적, 배경적 요소들과 친숙하거나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개연성이 벗을 때는 그런 역사적 요소들에 영향을 받아 어의를 결정하면 안된다.
6장. 신해석학에 대한 역사적 개관과 비판
(시험문제) 슐라이마허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유
아스트는 해석할 때, 고대의 정신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정신면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슐라이마허는 이 정신면을 발전시킨사람이다.
볼프는 해석할 때, 시는 시로, 문학은 문학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실천을 통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저자와 해석자 사이에 공감이 중요하다. 무엇을 해석할 때, 아스트는 시대 정신면에서, 볼프는 공감 면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슐라이마허가 발전시켰다.
그런데 슐라이마허는 이것을 할 때,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이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이다.
슐라이마허 이전에는 법칙들을 본문에 적용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저는 지난달 나의 아들을 잃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이해할 때, 단순히 지식을 얻었다고 이해되는 것인가? 그가 진정으로 그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이해했다고 할 때,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사역, 그의 속성, 등을 이해했다고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냐? 정말 이해란 무엇인가? 슐라이마허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구속 역사를 이해했다고 할 때, 정말 성경본문을 이해한 것인가?
슐라이마허 때부터 해석학의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전통적 해석학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해를 말할 때, 이해란 무엇인가? 하이덱거 선이해로,불트만의 전이해, 푹스의 공이해 개념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상대방과의 이미 맺어진 관계에서 이해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무슨 법칙이 들어가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해가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슐라이마허는 문법적 해석(객관적 해석), 심리적해석(저자의 스타일에 근거 주관적, 개성 등을 심리적으로 이해하는 것 - 저자와 동질성을 확보할 때, 이해할 수 있다. - 어떻게 하면 저자와 동질성을 확보하는냐? 영감적 방법( 해석자가 저자의 마음을 그 속에 넣어서 해석하는 것-네가 내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고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 , 비교적( 개체를 그 당시의 보편과 비교해서 이해하는 것)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분석해 보면 저자의 집필과정과 정반대의 과정이다. 저자의 정신성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작품이 있으면, 작품을 쓴다고 할 때는 저자의 정신생활이 작품에 들어가게 되고, 해석할 때는 <저자의 정신생활>에 들어가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정신생활은 작품을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품과 저자의 정신생활 사이에는 하나의 원이 생긴다. 바로 해석학적 원이 생긴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이 된다. 그래서 해석학적 파라독스(역설)이라 할 수 있다.
개별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부분과 전체가 원이 생기게 된다.
단어를 이해하려면 문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문장을 이해하려면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문장과 문맥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저자와 해석자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나의 해석학적 원이 생긴다. 이것은 순환적이다.
결국 슐라이마허이 이해는 해석학적 원을 통해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딜타이
해석학이 인문사회과학 전체에 기초과학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떤 작품이란 삶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자연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 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물이다. 물은 H2O이다) 관념적으로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딜타이는 <살아본 체험Erlebnis>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직접 살아본 체험은 역사적이다. 이것이 작품을 통해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 해석학이 왜 필요한 것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슐라이마허는 저자와 독자와의 심리적 동질성을 가져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고, 딜타이는 독자가 저자처럼 살아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반 해석학에서 나오지 않고, 철학의 분야로 들어가야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 해석학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했다고 하면서 왜 기도하지 않는가? 이해란 무엇인가? 심리적으로 그 사람 속에 들어가야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람처럼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공감을 가지지 않고서는, 동일한 체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삶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해석이라는 것은 해석법칙 몇 개만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할 부분들이 성경에도 많이 적용된다.
평소에 삶을 살 때는 성경을 피상적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고난 당할 때, 성경의 본문과 초점이 맞을 때, 더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 이것을 주장한 것이 <딜타이>의 해석이다.
마틴 하이덱거
1.초기 하이데거
Dasein 그이 존재론은 해석학적 존재론이다. 그의 해석학은 현상학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그런데 현상학은 Daseim이다.
(시험문제) 초기 하이덱거의 존재학을 Dasein에 대해서 설명하라.
Dasein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Sein & Seiende 를 알아야 한다.
Sein(Being) 이고 Seiende(entities)이다. 전자는 존재론적(Ontological)이고 후자는 존재적(Ontic)이다.
전통적인 서양철학에서는 저자와 작품을 분리시켜 놓았다. 해석자는 나이고, 저자와 작품은 객체이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내가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 전부를 의심했다. 그래서 철학을 하는 방법으로서 의심을 했는데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그의 철학을 출발시켰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은 객체이다. 그래서 객체를 분석해 버렸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 한다. 주객도식이라고 한다) 나와 객체를 짤라 놓고 이야기한다. 모든 기준은 나에게서 나온다. 내가 무엇을 만들어 놓고 이야기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이 범주(카테고리)이다. 카테고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이다. 카테고리를 가지고 무엇을 잰다고 할 때,주체가 만들어 놓은 카테고리가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분석해 놓은 것을 읽으면 하나님은 없어져 버린다. 로이드 죤스는 성령론이 성령을 소멸시킨다고 하였다. 신학이 신을 놓치게 할 수도 있다. 신을 분석하면서 경외심도, 감탄도 가슴도 없어져 버릴 수 있다. 내가 기준이 되어서 범주를 통해서 객체를 분석할 때에 이것을 가리켜 ontic(존재적)이라 한다. 주체와 객체와 분리해서 객체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 과거의 서양철학이다.
그런데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 하이덱거의 입장이다.
데카르트의 주객도식이 무엇이냐?
아히테마이어
1.장벽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놓았다.
2.주체가 마음대로 기준을 만들어 조정해 버렸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3. 존재에 대한 경이(驚異)를 전혀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해 경이를 잃게 되었다.
존재의 소리를 듣고 반응을 보이고, 존재를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감탄, 놀라움이 생긴다. 존재의 소리를 듣고 반응을 보이는 입장이지 존재를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하이덱거는 주객도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나와 존재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의 소리를 들을 때,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이것이 극단적으로 가면 불교적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이덱거식의 사고는 동양적이며 주관적이다. 상대주의로 흘러가 버린다. 존재의 소리라고 할 때, 존재란 무엇인가? 범신론으로 흘러 버린다)
존재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 존재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존재의 소리를 들을 때, 묵상하며 그 말씀을 살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이덱거는 전통적인 주객도식을 깨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통쾌하다는 것이다.
하이덱거는 존재 자체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존재 자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현존재를 분석해야 한다. Being을 통해서, 함께 분석해야 한다. 인간존재(존재와 연결된 시간)를 분석해야 한다. 그런데 이 다자인은 세계내 존재이고, 시간의 지평 안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면 이것이 다자인이라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물자체
무엇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을 카테고리를 가지고 분석하지 말고, 그것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라는 것이 현상학이다. 하나님을 분석할 때,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드러나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기준이 되어 조정하듯이 분석하지 말고, 그것이 그것으로 하여금 드러나게 하라.
훗셀은 인간경험, 하이덱거는 존재자체에 기준을 두었다.
그래서 하이덱거를 이해하기 위해하기 위해서는 <주객도식>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현상학이란 것은 결국 나하고 존재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붙어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해란 슐라이마허는 저자와 해석자 동질성, 딜타이는 삶의 체험, 하이덱거는 존재방식 자체이다. 그래서 그대로 드러나 버리는 것이 이해다라고 하였다. 세계내적 존재라고 할 때, 세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고 말 할때 물은 물이다 라고 할 때, 뒤의 물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물이 물로 드러나는 것이 물인 것이다.
하이덱거가 말하는 이해는 존재가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는 세계 내에 있다. 이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는 세계성이다.
세계란 것은 주객도식을 없앤 상태에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것에서 합일된 상태에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그 무엇이 세계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이해라고 한다.
모든 해석은 미리 가지고 있는 것(先持), 모든 해석은 우리가 미리 보는 것 (하나의 先見), 미리 파악하고 있는 것(先握)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을 선구조(Vor-structure) 라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이해한다고할 때는 이해에 근거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학의 원이 생긴다. 관계 속에서,연결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이해이다.
예) 망치가 무엇이냐? 망치는 과학적으로 분석, 물리학적으로 분석하여 이것이 망치다라고 하는 방식이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망치의 질을 통해서 망치를 드러내는 것, 그 기능을 드러내는 것, 그 때 그 망치에 대해서 이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zughandenheit -주객도식 속에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vorhandenheit -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해한다고 할 때, 선이해가 없을 때 이해할 수 없다.
전이해, 선이해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란 구조적 관계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후기 하이덱거
주로 언어를 가지고 다룬다.
-신해석학 -에벨링과 푹스 쪽으로 흘러갔다.
언어란 것은 존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언어이다. 인간이란 장소가 없이는 존재가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진리의 장소이다. 존재 자체가 진리인데, 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인간인데, 그 반응은 인간이 보이는 것이다. 언어는 Being의 집이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언어는 부패했다. 현대인의 언어는 계산적, 타산적, 기술적 언어로 되어 있다. 이런 언어의 질병의 원인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 속에 있다. 이것은 플라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 때문에 언어가 계산적이고 기술적이고 현금가적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언어가 타락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을 때, 정말이냐고 묻고,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언어가 왜 타락했는가? 하이덱거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가 부패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객도식만 해결되면 되는 것이다. 대존재와의 관계가 살아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어가 회복되는 것을 언어에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zur-Sprache-Kommen)
zur-Sprache-Kommen 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언어가 타락한 언어에서 본래 언어로 되는 것이다. 언어가 언어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언어가 언어가 되는가? 언어의 사건성이 될 때, 가능하다. 언어가 곧 사건이다. 예수님의 언어, 하나님의 언어가 사건적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으므로 언어가 곧 사건이다. 그런데 하이덱거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성 속에서 찾았다. 인간들은 사건성이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2.언어는 응집력이 있다. 되는 대로말하면, 분산시키는 언어가 된다. 진짜 언어는 모으는 것이다. 존재와의 연합 속에서 응집된다. 시가 바로 그렇다. 시 속에서는 언어가 응집되어 있다.(고지가 바로 저긴데. 대도무문) 감동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응집력이 있어야 한다. 생각하면서 말하는 사람이 응집력이 있다. 계속 생각하면서 설교하는 사람은 응집력이 있다.
3.응집을 시키고 사건을 시키려면 수용적 굴복성이 있어야 한다. 침묵속에서 듣는 것이다. 말하는 것 자체는 듣는 것이다. 무엇을 듣는가?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 하이덱거에서 강조하는 것은 명상이다. 이것이 바로 선불교와 통하는 것이다. 하이덱거는 수주키의 선불교에 대한 글을 읽고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모두 거기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하이데거의 입장에 대해서 말할 때, 전통적인 철학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던 것과, 들음에 대해서 무엇을 듣는가에 대해서 중요하다. 대상이 없이 명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한 대상,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건언어가 된다. 응집력이 있다.
사건언어- 사건언어, 말사건(에벨링),으로 나아갔다.
결국 하이덱거의 Being은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응하는 범신론적 신인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은 1세기의 신약세계와 20세기 현대인의 세계 간의 넓은 간격이 있다고 하였다.
불트만은 1세기 신약 세계관을 신화적 세계관이라고 보고 이것이 신약 전체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약의 케리그마(선포된 내용)는 신화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신화적 세계관을 현대인들이 보았을 때 그러한 세계관은 케케묵은 세계관이 된다는 것이다.
1세기의 세계관이 20세기의 세계관에 충격을 받음으로 더이상 1세기의 세계관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갔다. 과학의 발견으로,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으로 세계관이 바뀌어 갔던 것이다. 과학 이전에는 타율적이었지만, 과학시대는 자율적인 세계관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 속죄관들은 다 신화이므로 현대인들은 이것들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1세기의 세계관을 현대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현대인들이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약 전체를 비신화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1세기의 세계관으로 들어가 신화의 옷을 벗기고 20세기 세계관으로 다시 표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법>
실존주의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초기 하이덱거가 하였다. 하이덱거의 실존 분석을 보면 인간이 적절한 질문을 던져야 이해할 수 있다. 이 질문은 누가 던질 수 있는가, 그것은 본문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법문서에 대해 적절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법과 관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이해라고 한다. 이러한 전이해가 있어야만 질문이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관계없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트만의 입장이다. 따라서 모든 이해는 전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질문자가 그 본문의 주제와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제 없는 질문과 해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트만이 이런 질문을 할 때, 전제와 선판단을 구분했다.
선판단이라는 것은 Vorurteil이라고 하는데, 이 선판단이라는 것은 교리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판단은 제거되어야 하고, 전제는 들고 들어가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전제는 실존적인 것이다. 삶의 관계(Lebenszusammenhang)가 바로 전제이다.
예를 들어, 부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실제로 부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불트만이 던지는 질문은, 그것은 단순히 신화적 사건이 아닌가? 그것은 신화적 사건이다로 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불트만은 이 질문 자체가 적절한 질문으로 보았다. 질문 자체에서 대답을 가지고 들어가 버렸다. 분명히 그것은 자명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불트만은 적절한 질문들이라고 보지만, 이미 이 질문들 속에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존적인 의미를 지닌 선판단이다.
"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포함하는 역사적 사실은 전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신약이 부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부활이 종말적(자아의 자연적인 역사 너머에 사는, 모든 자아 안에 개방되어 있는 실존적인 것을 의미함)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진행되는 것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현재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개방성으로써 진정한 존재를 위한 결단을 순간순간 내리게 촉구함으로써 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 '종말적'이다.
실존주의적 해석에 빠지게 되면,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게 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 사건으로 남아 있지 않고,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의 근거가 없는 부활 신앙으로 남아 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앙의 재기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부활 자체는 과거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
(부활을 부인하게 될 때, 기독교 신앙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불트만은 역사적인 부분에 의미를 주지 않고 실존주의적인 것에만 의미를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역사적인 부분에 의미를 주고 있다.
바울은 역사의 뿌리를 박은 실존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뿌리를 박지 않은 실존은 공허하다. 보수주의자일수록 역사를 말한다. 실존에 약하다. 설교에 있어서도 실존적인 부분을 터치해야 좋은 설교가 되는 것이다. 실존까지 들어가야 좋은 설교가 된다.
불트만의 이러한 비신화적 방법은 초기 하이덱거의 내용을 받았던 것이다. Dasein을 개념적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신약 케리그마를 재는 잣대로 삼았다. 그의 해석은 하이덱거의 사상을 신약 속으로 이전시킨 이석(eisegesis)이다.
신해석학
(1)폭스와 에벨링
역사비평의 분석자료들이 되었던 바로 그 본문들이 또다시 선포의 본문들이 될 수 있는가? 설교할 수 있는가? 본문을 놓고 설교할 수 있는가? 성경해석학의 문제가 설교까지 갈 수 있는가? 설교를 할 때, 불신자들에게 신앙을 야기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폭스와 에벨링의 관심은 말씀, 선포, 홈런타격, 신앙 네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신해석학의 관심은 강단적 관심(a pulpit concern)이다. 이것은 성경의 언어를 현대 세계에 적실성 있게 만드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 해석학은 그 범위가 넓다. 단순히 코멘타리가 아니라 생활까지 들어가서 이해시키는 것이다.
(성경과 성령)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현대 청중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사람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해란 언어이해(Sprachverstaendnis)이다. 이 언어이해는 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모든 이해는 한 이해(Einverstaendnis)에 기초한다. 사람이 한 이해가 없으면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 이해가 없는 것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예) 가정에서는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때문에 말한다.
예수님의 비유) 청중과의 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생활에 근거하여 설교하셨다. 예수님은 바로 이 세상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이해에 근거해서 이해를 유발시켰다. (말씀을 전할 때, 한이해에 근거하여 설교하라)
그래서 이미 단어가 발생한 곳에서만 단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질문된 문제에 관심이 있는 자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언어사건)
폭스는 언어는 사상에 선행한다고 보고 있다. 언어는 사건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았다.
언어는 신앙의 모음과 따라서 그리스도를 가져다 준다.
예) 형제여. 라고 말할 때, 상대방을 형제로 받아 들이게 한다.
폭스는 언어사건은 에벨링의 말사검과 같은 암시를 가지고 있다.
(본문과 선포)
언어 사건은 본문과 동일할 때 일어난다. 설교는 본문을 집행시킨다. 그래서 설교가 폭스와 에벨링의 신해석학에서 중요하다. 본문의 언어는 선포를 통해서 오늘의 언어로 옮겨진다. 성경은 설교될 때, 해석된다고 보았다. 설교가 바로 되면 성경해석이 바로 된 것이다.
(신앙)
생동화된 예수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대로 일하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이란 부딪히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역사에서 신앙을 찾지 않고 실존적인 부딪힘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사죄의 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체험이 중요하다. 기도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체험이 중요하다. 기도의 의의는 기도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신해석학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
1세기와 20세기의 간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간격을 메꾸어서 홈런타격을 할 것인가?
한 해석학을 통해서 해야 한다.
(그때와 지금)
역사적인 간격을 의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본문을 놓고 그 의미가 떠오르는 것이 본래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방지한 측면에서 좋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능력은 같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공통적인 점은 무시하고 차이점만 강조하였는가? 그래서 신해석학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렇게 큰 간격은 없다. 물론 간격이 있긴 하지만.
바울 사도 당시에 상황을 달리하는 사람들 -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말씀을 적실성있게 전할 것인가? 바울은 두 지평을 융합하였다. 원리적으로 보았을 때, 바울의 진리와 받아 들이는 사람 둘 다 의식을 하고 어떻게 하면 바로 이해시켜 구원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융합을 시켰는데 바울은 어떻게 하였는가? 불트만처럼 융합시켰는가? (논쟁을 할 때, 상대방의 진영에 들어가 그들의 용어로 싸워야 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에 대해서 그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신화화란 바로 현대의 과학지상주의와 자율이 신화화 작업임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 해석자가 현대의 지평의 간격을 너무 강조할 뿐 아니라, 두 지평을 융합한다고 하면서 혹은 성경으로 현대 청중에게 홈런 타격을 가한다고 하면서 결국 현대의 세계관으로 성경의 세계관을 뜯어 고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언어사건)
언어는 사건적이다. 이것은 명상적 들음에서 드러난다. 본문이 바로 선포될 때 드러난다. 일단 Yes하고 그 다음에 No한다.
신해석학의 강조한 점을 배워야 한다.
신해석학이 잘 한 점은 본문의 소리를 우리가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나를 해석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No를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본문을 가지고 들을 때, 무엇을 가지고 듣는가 하는 것이다. 결과적 산물, 그렇게 들어서 나온 것이 무엇인가? 신해석학의 경우에는 실존주의 철학이 나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어떤 그릇으로 듣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제가 중요하다.
불트만의 전제는 실존주의 철학이 전제였다.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선판단으로 규정하고 왜 제거해 버리는가? 그것이 벌써 잘못된 것이다. 불트만이 말한 선판단은오히려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불트만이 말하는 전제는 비성경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듣는다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세계 내적 존재로 들어가야 한다.
불트만은 자기의 실존주의 전제는정당한 것이라고 했는데, 전제 없이 성경에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나름의 전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들어가자는 것이다. 내 전제는 성경에 의해서 바꾸어져야 할 전제이다. 만약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신해석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해석학적 원이 생긴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나선형이 생성된다. 본문과 나와의 사이에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
불트만이나 신해석학자들이 자기가 이해한 것을 what is true for me = what is true 라고 하는 잘못을 범했다. 신해석학에서는 독창적, 창조적 이해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신해석적 흐름은 주관주의적 흐름이었다. 이 주관주의적 해석이 옳은가? 객관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관주의, 상대주의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어떤 해석이 옳은가?하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역사와 실존을 공존시키고 있다. 성경은 역사에 근거한 실존이다. 만약 역사에 근거한 실존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와의 관계는 바로 실존이다. 그런데 신해석학은 역사를 배제시킨 것이 문제가 된다.
신해석학이 주관주의적 함정에 빠졌다.
어쩔수 없이 우리도 상대주의적 부분이 있지만 성경과 해석자 사이의 나선적 상승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