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1_더 이상 직통계시는 없습니다 (계 2:18~29)
2013-10-15(화) 새벽기도회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양쪽 극단이 있는데 하나는 자유주의이고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자유주의는 너무 차가운 사상이고 신비주의는 너무 뜨거운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결국 다 인본주의라는 면에서 통합니다. 신비주의는 매우 영적인데 왜 인본주의라고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사람이 더 뜨겁게 종교행위를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까지 조종하고 하나님을 지배하려고 하는 면에서 인본주의가 맞습니다.
버가모교회가 현대주의에 빠진 교회라면 거기서 기껏 64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아디라교회는 신비주의에 빠진 교회였습니다. 순교의 피를 흘리며 믿음을 지킨 서머나교회에서도 두아디라는 56킬로미터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신약 시대의 모든 교회를 대변할 모든 상황과 문제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은 현대주의의 모습을 더 많이 보이고 있지만 수십년 전에만 해도 신비주의의 모습을 많이 가졌고 아직도 신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외국으로부터 약간 세련되어 보이는 신비주의가 흘러들어왔는데 일명 신사도운동입니다.
저는 이 새벽 짧은 설교에서 신사도운동이 무엇이며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 제가 하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더 이상 직통계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됨으로 계시는 끝난 것도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무나 꿈을 꾸고 환상을 보았다고 그것이 다 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와 선지자가 받은 것 만이 계시인데 이 시대에도 뭔가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국 뭔가를 보았다는 사람들에 의해 뒤죽박죽이 되겠죠. 그러니 신비주의가 인본주의가 아닙니까?
직통계시파 광신주의에 빠진 두아디라교회는 바른 지식이 없다는 면에서 버가모교회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세벨 이단에 빠진 것이 문제였는데 이세벨은 버가모교회의 니골라당과는 달리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단의 무리 가운데는 항상 그 속에 자칭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4 종류의 교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이 있었습니다(20절). 둘째는 아직 이세벨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이세벨과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이 있었는데(22절) 주님은 이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셋째는 이세벨을 철저하게 따르는 이세벨의 자녀들이 있었는데(23절) 주님은 그들을 심판하고 죽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24절). 이렇게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26)와 철장을 주실 것입니다(27). 이 말씀은 시편 2편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철장 권세를 주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시 2:8-9)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마지막으로는 새벽 별을 주겠다고 하셨는데(28) 새벽 별은 무엇을 뜻할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성급하게도 결론을 중간에 자꾸만 누설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배려입니다. 계시록 22:16에서 하실 말씀을 여기 2:28에서 미리 말씀하신 것인데 새벽 별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우리가 이겨야 할 원수는 꼭 믿음을 반대하는 핍박자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 우리보다 신앙생활을 더 뜨겁게 더 잘하는 척 하면서 그들이 보았다 하는 것으로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도 원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성경을 벗어나게 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새로운 교훈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유일무이한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이것입니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