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學硏, 1999)」 122~127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박완)
사르후 전투(1619) (1)
(만주어 인명·지명을 가타카나로 음사한 것의 경우 번역이 부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리며 정정할 곳이 있을 경우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누르하치의 건국
명 제국의 요동진에 인접한 지역에는, 일찍이 12세기에 금을 건국하였던 여직(女直, 여진[女眞] - 이후 여진으로 통일[옮긴이 註])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건주여진(요동 부근)의 누르하치는, 1583년(23세)에 거병한 이래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병의 천재였다.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다른 모든 부의 여진족을 항복시켜 휘하에 포함시킨 누르하치는, 1616년에 「열국(列國)을 자애롭게 다스리도록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스레 겡기옌 칸(영명한[英名汗])」에 즉위하고서 대외적으로 금(金, 후금[後金])을 칭하는 여진족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후금과 명의 관계는 교역 문제와 국경 문제 때문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명의 지금까지의 도의를 벗어난 행위들을 하늘에 고발하고(칠대악[七大惡]), 요동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무순(撫順)을 공격하였다. 수비대장인 이영방(李永芳)은 항복하였고, 요동총병관 장승음(張承蔭)이 이끄는 구원군은 대패하였다. 양국의 장기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2.후금의 팔기 제도
후금의 통치 제도이자 군대 동원 제도는 「팔기(八旗)」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수렵민의 사회 제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민을 8개의 구사(固山, 기[旗])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8개의 군단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팔기는 깃발의 색깔에 따라 정황(正黃), 정홍(正紅), 양홍(鑲紅), 정남(正藍) (이상 좌익), 양황(鑲黃), 정백(正白), 양백(鑲白), 양남(鑲藍) (이상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양[鑲]’은 깃발의 테두리를 가리킨다).
팔기 제도의 최소 단위는 니루(牛彔, 좌익)라고 하며, 각 니루로부터 명목상 최대 300명의 갑사(甲士)를 동원할 수 있었다. 니루 다섯에 잘란 하나를 두고, 잘란 다섯을 모아서 구사 하나가 두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대로 되지는 않아서, 각 구사 휘하의 니루의 수가 반드시 25개였던 것은 아니었다.
니루에는 지도자로서 니루 어전(牛彔額眞)이, 잘란에는 잘란 어전(甲喇額眞)이, 구사에는 구사 어전(固山額眞)이 두어져 있었다. 이들은 행정의 장이면서 동시에 군대의 장교이기도 하였다. 또한 각 구사는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손자, 조카인 버일러(貝勒, 기왕[旗王])에게 속해 있었고, 버일러는 구사 하나의 병력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 군의 부사령관으로서 분견대를 지휘할 때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군대를 동원할 것인가는, 각 니루로부터 몇 명의 갑사들을 동원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명목상의 상한선은 300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건국 초기에는 각 니루로부터 50명의 갑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심양(瀋陽)·요양(遼陽) 전투 이후에는 100명의 갑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외에 구사의 버일러는 구사 휘하의 니루로부터 선발된 바야라 병(兵)이라고 불리는 100여 명의 정예 병사들을 친위대로서 보유하고 있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얼마만큼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1만 명에서 6만 명에 이르기까지 제법 편차가 있지만, 이 전역(戰役)에는 후금의 존망이 걸려 있었던 것만큼, 최대한의 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하나의 니루로부터 동원된 병사들의 수는, 동고로(路)에 배치된 500명의 병사들을 세 명의 니루 어전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00명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후금이 동원한 병력은 약 2만 몇 천 명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후금군은 아직 화기를 장비하고 있지 않았고, 냉병기(冷兵器)를 주 무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인 갑사는 중장기병으로 병사들은 갑옷을 착용하였고(마갑은 없었음), 활과 화살을 반드시 장비하였으며, 긴 무기로서 큰 칼과 창을, 짧은 무기로서 단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후금군이 장기로 하는 전술은 기병에 의한 포위 전술과, 화살을 연사하면서 기병 돌격을 실시하는 것이었지만, 누르하치는 명군이 사용하는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도보 전투 공병으로서 이용한다는 전술을 고안해 두었다.
3.명의 누르하치 토벌 작전
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지원군을 지휘하였던 양호(楊鎬)를 병부시랑 겸 요동경략으로 기용하여 대 후금 전쟁의 총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해, 양호는 요동이나 조선에서의 작전 경험이 있는 두송(杜松), 유정(劉綎), 이여송(李如松), 관병충(官秉忠), 시국주(柴國柱) 등과 같은 노련한 장수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나 예정된 10만 명의 병력은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집결할 수 있었다. 양호는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조선과 여허(南關, 누르하치에 적대적인 여진 부족)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대해서는 화승총 부대가, 여허에 대해서는 기병 전력이 기대되었다.
군대가 모이자 양호는 요동총독 왕가수(汪可受), 요동순무 주영춘(周永春), 순안어사 진왕정(陳王庭)과 작전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결정된 작전은, 47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전군을 4개 집단으로 나누어 반원형의 4개 경로로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포위하는 식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하는 명군은 8만 8천 명, 조선군은 1만 3천 명, 여허군은 2천 명으로서, 총 병력은 예정된 10만 명에 달하였다. 각 군의 부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다(명군의 병력은 추정치임).
①좌측 북로군
사령관은 개원총병관 마림(馬林), 감군(監軍)은 개원병비첨사 반종안(潘宗顔)이었다. 좌측 북로군은 개원로의 요동병을 주력으로 하는 약 2만 명의 병력에, 여허의 지원군 2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전군은 3개 부대로 나뉘어져서 제 1진은 마림이, 제 2진은 반종안이, 여허군을 포함하는 제 3진은 유격 두영징(竇永澄)이 지휘하였다. 주력인 좌측 중로군과 사르후 부근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②좌측 중로군
사령관은 산해관총병관 두송, 감군은 광녕병비사 장전(張銓)이었다. 좌측 중로군은 산해관이나 보정 등 계진(薊鎭)의 각 부대와, 조몽린(趙夢麟)이 이끌고 온 고원(固原), 감주(甘州), 섬서(陝西)의 지원군 등 약 3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력은 두송과 보정총병관 왕선(王宣), 원임총병관 조몽린이 지휘하였고, 제 2진은 유격 공염수(龔念遂), 이희필(李希泌)이 지휘하였다. 이 부대가 전군의 주력으로서, 무순을 출발하여 사르후를 경유한 뒤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③우측 중로군
사령관은 요동총병관 이여송, 감군은 요동병비참의 염명태(閻鳴泰)였다. 우측 중로군은 요동진의 약 2만 5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부총병 하세현(賀世賢)이 부장이었다. 이 부대는 청하(淸河)로부터 아골관(鴉鶻關)을 나선 뒤 후란로(路)를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④우측 남로군
사령관은 총병관 유정, 감군은 해개병비부사 강응건(康應乾)이었다. 우측 남로군은 산동(山東), 절강(浙江)의 지원군과 관전(寬奠), 진강(鎭江), 애양(靉陽) 등의 요동병으로 이루어진 약 1만 3천 명의 병력에, 조선의 지원군 1만 3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주력은 유정, 강응건이 지휘하는 명군이었고, 여기에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지휘하고 명의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감독하는 조선군이 뒤를 이었다. 이 부대는 관전에 집결한 뒤 동고로를 따라 진격하여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외에 원임총병관 관병충이 요양에, 총병관 이광영(李光榮)이 광녕(廣寧)에 예비 병력으로서 주둔하고 있었고, 양호는 심양에 머무르면서 총지휘를 맡았다.
명측의 움직임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점령하고 있던 성곽과 요새를 포기한 채 명군의 주 침공 경로상에 있는 사르후와 자이피안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내선(內線)의 이점을 살리는 각개격파였고, 항복한 명의 장수인 이영방은 명군이 복수의 경로를 취할 경우, 병력을 집중시켜 그 중 하나의 경로만을 두들기면 된다고 누르하치에게 진언하였다...
사르후 전투(1619) (2)
4.사르후 전투
침공 예정일은 2월 21일이었지만, 폭설로 인하여 출발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력을 지휘하는 두송은 전공을 탐낸 나머지, 다른 부대와 연계하지 않고 먼저 행동을 개시하였다. 두송은 북쪽 변방에서 공적을 세운 장군으로서,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문관의 통제를 듣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었다.
3월 1일 두송의 부대가 접근하자, 후금의 축성 부대는 자이피안 산에서 철수하였다. 두송은 물이 불어난 혼하(渾河)를 건널 수 없는 차영(車營)을 후방에 남겨둔 채, 차가운 강을 건너 사르후 산을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한 번 혼하를 건너 자이피안 산을 공격하였다. 후금의 호위 부대는 저항하면서 후방의 키린하다로 후퇴하였다.
8시경, 명군이 침공해 왔다는 보고를 받은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집결한 주력에 출격을 명하였다. 후금군은 다이샨의 정홍·양홍기를 선두로 하여 속속 팔기의 각 부대가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누르하치가 사르후와 키린하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레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다이샨과 버일러, 그리고 중신들은 키린하다를 구원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키린하다에 증원 부대로서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들의 작전을 들은 누르하치는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하면 다른 명군도 동요할 것이라고 보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한다고 결정하였다.
사르후 공격 부대는 좌익의 4기에 우익의 2기(양황, 양남)를 더한 것이었고, 정백과 양백의 2기는 자이피안의 명군을 감시하였다. 6기의 장병들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것을 틈타, 사르후 산을 습격하였다. 사르후의 명군은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데다 시계가 저하된 시간대에 습격을 받았기에, 화기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근접전에 말려들어 괴멸되고 말았다.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한 뒤, 사르후를 공격하였던 6기와 감시를 맡았던 2기, 그리고 키린하다의 부대가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합동 공격하였다. 세 방향에서 기병의 습격을 받은 두송의 부대는 혼하를 두 번이나 건너면서 전투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상태였고, 어스름한 어둠 중에는 역시 화기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괴멸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두송, 왕선, 조몽린 등 간부들도 전사하였다.
5.샹갼하다 전투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을 무렵, 마림의 부대는 샹갼하다로 진출해 있었다. 마림은 명장 마방(馬芳)의 아들로서 요동총병관을 맡은 경험이 있었지만, 시나 글씨에 뛰어난 문인으로서 알려진 장군이었다. 반종안은 마림이 겁쟁이이기 때문에 다른 장군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양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마림의 용병술은 신중하고 견실하였기에 이 점이 반종안에게는 다른 맹장들에게 비교해 보았을 때 겁쟁이라고 비쳤던 것이었겠지만, 마림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강적과 맞선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2일 북로군의 접근을 알게 된 후금군에서는, 다이샨이 300명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마림은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날 밤의 숙영지까지 후퇴하였다. 그 곳에서 3중의 참호를 파고 호 밖에는 대포를 배치하였으며, 그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배치하여 사방 어디로부터의 습격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엄중한 진형을 펼쳤다. 이와 같이 엄중한 포진을 본 다이샨은 누르하치에게 지원군을 계속 요청하였다. 제 2부대를 지휘하는 반종안은 1.6Km 정도 떨어진 피에훈 산에 진형을 펼쳤다.
그 날 아침, 혼하를 건너지 않았던 좌측 중로군의 공염수, 이희필이 이끄는 차영과 기병 등 약 2천 명의 부대가 와훔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은 마림의 부대와 맞서게 한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정백기)와 함께 1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이 부대를 급습하였다.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여 수비를 단단히 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공병으로서 투입하여 전차의 방어선을 돌파하도록 하였고, 그 뒤를 이어 기병으로 습격하여 중로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다이샨으로부터의 급보를 받은 누르하치는 병력을 뒤에 남겨둔 채 소수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왔다. 누르하치는 명군의 진형을 관찰한 뒤, 근처의 산을 점령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를 알아챈 마림이 병사들을 그 산으로 이동시키면서 양군이 격돌하기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좌익의 2기를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지만, 명군의 움직임이 빨랐기에 다이샨은 말에 올라탄 채 명군에 대하여 돌격을 감행하였고, 전투는 격렬한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승패를 판가름한 것은 증원군이었다. 후금군의 경우 6기가 대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전장에 도착하는 자부터 속속 전장에 투입된 것에 반해, 명군의 경우 지원군이 없었고 피에훈 산의 명군은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패주하였고, 극심한 추격을 받았다. 마림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유격 마암(麻岩) 등 다수의 장수와 병사들이 쓰러졌다.
반종안은 용기는 있었지만 장수로서의 자질이 없었고, 교전 중의 마림군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산 속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은 채 단지 전차를 늘어세운 방어진만을 펼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력을 재집결시킨 뒤 피에훈 산을 공격하였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먼저 나아가게 하고, 말을 탄 병사들이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전차 뒤에서 사격을 퍼붓던 명군에 대하여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돌입하여 전차를 제거하였고, 그 곳으로 기병들이 돌입하여 반종안의 부대를 섬멸하였다.
여허의 지원군은 중고성(中固城)까지 진출한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서 철수하고 말았다.
6.아부다리·후챠 전투
북로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누르하치가 병력을 재집결시키고 있을 무렵, 명군이 동고·후란로를 따라 진격중이라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누르하치는 전군을 허투알라로 철수시킨 뒤 다음 목표를 남로군으로 잡았고, 우측 중로군에 대응하기 위해 허투알라에 4천 명의 정예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측군의 괴멸을 알게 된 양호는 우측의 양군에 대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로군을 이끌고 있던 유정에게는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임진왜란이나 사천(四川) 지역의 반란 진압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무게가 120근(약 72Kg)에 달하는 큰 칼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도(劉大刀)」라는 별칭을 가진 맹장이었다. 유정이 평소에 구사하는 전술은 부대에 녹각목(鹿角木)을 보유하도록 한 뒤 순간적으로 녹각목을 늘어세워 적의 습격을 저지하고, 이렇게 하여 벌어둔 시간에 배치한 화기를 사용하여 적의 전위 부대를 격파한 뒤 기병으로 역습을 가한다는 것으로서, 그는 화기의 운용에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였다.
남로군의 이동 경로는 다른 부대와 비교할 때 길었고, 유정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조선군의 보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기에,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유정의 부대는 마을을 불태우며 전진하였고, 2일에는 동고로에서 토보 등이 이끄는 후금의 경계 부대 500명과 교전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거둔 뒤, 두송이 허투알라로 앞서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두송이 전공을 독차지하지 않을까 하고 유정은 초조해 했고, 4일 녹각목을 버린 채 포위 공격 장비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강응건의 부대, 강홍립의 조선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무렵 다르한 히야(정황기)가 이끄는 후금군의 선발대가 토보의 패잔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서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과 만났고, 유정은 조금 후퇴한 뒤 아부다리 언덕 위에 포진하고서 다른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 다이샨은 홍타이지(정백기)에게 우익의 지휘를 맡긴 뒤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로부터 아부다리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자기 자신은 좌익을 이끌고 서쪽으로부터 진격하였으며, 후방으로부터는 다르한 히야의 복병이 습격을 가해 왔다. 명군은 삼면으로부터의 돌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전멸하였고, 유정은 전사하였다.
유정의 부대가 전멸하였을 무렵, 강응건의 부대는 조선군과 함께 후챠 들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다이샨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홍타이지를 선두로 하여 후챠로 나아갔고 강응건의 부대와 대치하였다. 강응건의 부대는 명군과 조선군의 혼성 부대로서, 장창(낭선[狼筅])과 화기가 층을 이룬 채 포진하고 있었다. 명군의 화기 사격이 시작되었을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고, 화약 연기가 명군에게 불어 닥쳤다. 이것을 호기로 삼은 후금의 기병들이 화살을 연발하면서 돌격하여 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강응건은 수백 기를 이끌고 달아났다. 누르하치는 아민(양남기)과 다르한 히야(정황기)로 하여금 교일기가 감독하는 조선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광경을 조선측의 사료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기 속에서 적(후금)의 기병의 대군이 들이닥쳤고, 양 날개로 갈라져서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오면서 좌영(左營)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강홍립은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하면서 좌영과 함께 진을 펼쳤다. 간신히 대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적의 기병이 빠르게 돌격을 감행하여,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대포와 총을 한 번은 사격할 수 있었지만, 다음 탄환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이 진 안으로 들어왔고 순식간에 좌·우영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좌영의 장수인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는 선전한 뒤 전사하였고, 우영의 장수 순천군수 이일원(李一元), 교일기는 조선군의 중영으로 달아났다. 중영의 5천 명밖에 남지 않게 된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협의한 뒤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였다. 절망한 교일기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우측 남로군도 소멸되었다.
7.사르후 전투의 결과
양호가 내린 퇴각 명령은 이여송에게는 도달하였다. 부장 하세현은 남로군을 구원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이여송은 퇴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여송의 부대는 후금의 초계 부대 20명을 보고 도주하는 등 동요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온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군의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누르하치의 내선을 이용한 교묘한 작전 지휘로 인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후금의 전과는 명이 공식 발표한 것만 하더라도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 무기의 손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고 한다. 명과 후금의 최초의 결전은 후금의 대승리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