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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파 유래
김관(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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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숙(文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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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沆) 저(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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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序) 위(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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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일(克一) 태일(兌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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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健) 김맹(孟) 용(勇) 순(順) 집(執) 현(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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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손(駿孫) 기손(驥孫) 김일손(馹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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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유(大有) 대장(大壯) 대축(大畜) 대아(大雅) 대장(大壯)
선조 계보와 묘지
삼국유사 "에 전해지는 신화에 의하면 42 년에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 졌는데 개의, 반나절 만에이 알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여 6 가야국의 왕이되었다고한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 척이나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되었다. 그는 금관 가야국의 왕이되어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 하였다.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 옥을 왕비로 맞았다고하며, 199 년까지 158 사는 동안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다고한다 세를.
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능은 경남 김해에있다
수로왕이 즉위 7 년에 아유 타국 (현재 인도 중부 지방의 고대 국가)의 공주인 허황옥 (许 黄玉, 33 ~ 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 남 2 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 (许) 씨 (태인 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7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 불이되었다고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 이라며 종친회도 '중앙 종친회'로 하였다 가락. 김해 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 세손인 김유신 (金 庾信) 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며 각간 (角 干) 인 김무력 (武力)이고, 아버지는 무열왕의 장인이며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 (舒玄), 어머니는 진흥왕 의 동생인 숙흘종 (肃 讫 宗)의 딸 만명 (万 明)이다.
[계파]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 종 파인 3 개파가 주류를 이루고있다 개파.
§ 경파 (京 派 - 영견, 영서, 영정, 영순) : 고려의 김목경 (牧 卿)을 중시조로한다.
§ 사군파 (四 君 派 - 극조, 완, 여수, 세기) : 목경의 동생 김익경 (益 卿)이 중시조다.
§ 삼현파 (三 贤 派 - 극일, 일손, 대유) : 김관 (管)을 중시조로 한다.
三 贤 派의 내력
삼현파 (三 贤 派 : 판도 판서 공파)의 일세조 (一 世祖) 인 관 (管)은 고려에서 판도 판서 (版图 判 书)를 역임하고 학교 (学校)를 건설하여 유학 (儒学)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 (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玄孙) 극일 (克 一)은 효행 (孝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당시 왕 (정종으로 알고 있음)이 선생의 칭송을 듣고 충절과 효성의 상징으로 절효 (节 孝) 란 호를 하사 하였음.
극일 (克 一)의 아들 맹 (孟)은 세종 (世宗) 때 문과 (文科)에 올라 집의 (执 义)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 (龍 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 (骏 孙) · 기손 (骥 孙) ·일손 (馹 孙)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 형제가 모두 빼어 나서 "김씨 삼주 (金氏 三 珠)"로 일컬어졌다. 1486 년 (중종 17) 식년 문과 (式 年 文科)에 급제한 일손 (馹 孙)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巨 儒) 김종직 (金宗 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 (金宏 弼) · 정여창 (郑汝 昌)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일손은 후사가 없었고, 일손의 장조카 (준손의 장남)이 삼족당 대유 (大有) 선생으로서 조선 시대 중기 문인으로서 널이 이름을 떨쳤고, 삼족당 문집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
삼족당 선생은 동시대 巨 儒 인 남명 조식 선생과 동문 수학을하였습니다.
김해 김씨 [삼현파의 유래]
20 조선 정종 (正宗) 대 대왕 (서기 1777 ~ 1800) 께서 金海 金 씨를 가리켜 삼한갑족 (三 韩 甲 族)이라 칭하시며 절효 (节 孝) 김극일 (金 克 一), 문민공 (文 愍 公) 김일손 (金 馹 孙), 삼족당 (三 足 堂) 김대유 (金 大有) 세 현인 (贤人)을 가리켜 삼현 (三 贤)이라 하였다. 한 집안에서 사대간 (四 代 间)에 삼현 (三 贤)이났다는 일은 과거나 앞으로 (古来)도 드문 일 인 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 (三 贤 派)로 定 한 것이다.
현종 (显宗) 원년 (1660 년)에 송준길 (宋 浚 吉) 선생 등 유림의 상소 (上 疎)에 의해 나라로부터 자계 서원 (紫 溪 书院)이라 사액 (赐 额)을 받았고, 절효 (节 孝) 김극일 (金 克 一), 문민공 (文 愍 公) 김일손 (金 馹 孙), 삼족당 (三 足 堂) 김대유 (金 大有) 선생의 위폐를 서원존덕사 (书院 尊 德 祠)에 봉안 (奉安)하고 유림 (儒林)에서 누세춘추 (累 世 春秋) 매년 2 월 8 일 中 정일 (丁 日)로 봉향하고 있고이 자계 서원 건물이 유형 문화재 제 83 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있다 .
삼현파 (三 贤 派 : 판도 판서 공파)의 일세조 (一 世祖) 인 관 (管)은 고려에서 판도 판서 (版图 判 书)를 역임하고 학교 (学校)를 건설하여 유학 (儒学)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 (功)을 세웠으며,
① 그의 현손 (玄孙) 극일 (克 一)은 효행 (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② 1486 년 (중종 17) 식년 문과 (式 年 文科)에 급제한 일손 (馹 孙)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巨 儒) 김종직 (金宗 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 (金宏 弼) · 정여창 (郑汝 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 (春秋 馆)의 사관 (史官)으로있을 때 전라 감사 (全 罗 监 司) 이극돈 (李 克 墩)의 비행을 사초 (史 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연산군 (燕山 君)이 등극하여 [성종 실록 (成 宗 实录)]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 (李 克 墩)이당상관 (堂上 官)으로 참여하여 사초 (史 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 直)이 쓴 조의 제문 (吊 意 帝 文 :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 (盧 思 愼) · 윤필상 (尹弼 商) · 한치형 (韩 致 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 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가되
어 이른바 무오사화의 수괴로, 권오복 (权 五福) · 권경유 (权 景 裕) · 이목 (李 穆) 등과 함께 참수 (斩首) 당하였다, 김종직 (金宗 直)은 부관 참시 (剖 棺 斩 尸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 (馹 孙)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 (中 宗 朝) 영의정 (領 议政) 남 곤 (南 衮)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 (濯 缨 : 김일 손의 호)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 (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 (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 '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③ 삼현 (三 贤)의 한 사람인 대유 (大有)는 일손 (馹 孙)의 조카이며 준손 (骏 孙)의 아들이다. 무오사화 (戊午 士 祸)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 당하자 부자 (父子)가 함께 호남 (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中 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 (志 节)로 살았 으며, 3 개월 간의 칠원 현감 (漆 原 县 监)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 (淸 道)의 운문산 (云 门 山) 속 삼족당 (三 足 堂)에서 73 세로 일생 (一生)을 마쳤다.
"일손 (馹 孙)의 증손 (曾孙) 언유 (彦 谕)는 고양 (高 阳)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 (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시 (诗)와 글씨에도 뛰어 났으며 특히 송설체 (松 雪 体)에 능하여 공사 (公私)의 비 (碑) ·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 (彦 谕)의 아들 현성 (玄 成)은 광해군 (光 海 君) 때 폐모론 (废 母 论)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시 · 서 ·화에 모두능했다.
김해 김씨 삼현파 (三 贤 派) 란
김해 김씨 판도판서공 휘관파 (版图 判 书 公 讳 管 派)의 별칭이며, 판도 판서 공 파란 중조 (中 祖) 관 (管) 할아버지 께서 조려 말에 판도 판서 (版图 判 书)라는 벼슬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이하 자손들을 판도 판서 공파 (版图 判 书 公 派) 또는 판도판서공 휘관파 (版图 判 书 公 讳 管 派) 라고함.
조선 정종 조에 김해 김씨를 삼한갑족 (三 韩 甲 族)이라하였고 절효공 휘극일 (节 孝公 讳 克 一), 탁영공 휘일손 (濯 缨 公 讳 馹 孙), 삼족당 휘대유 (三 足 堂 讳大有) 등 三人을 가리켜 청도 삼현 (淸 道 三 贤)이라 칭하였으며 한집안에서 4 대 (四 代)에 걸쳐 3 贤人이났다는 것은 고래 (古来)로 매우 드문 일이라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후손 (后 孙)들을 삼현파 (三 贤 派) 라 불렀음.
판도판서공 휘관파 (삼현파)는 5 세 (世; 차례) 절효공 (节 孝 공 휘극일 (讳 克 一)의 6 형제로부터 군수공휘건파 (讳 建), 집의공휘맹파 (讳 孟), 한림공휘용파 (讳 勇), 진사공휘순파 (讳 顺), 녹사공휘인파 (讳 韧), 진의공휘현파 (讳 铉) 등 6 개 지파 (支派)로 크게 나뉘어져 있으며, 그 외 군수 공 휘익파 (郡守 公 讳 益 派), 통덕랑공 휘무파 (通 德 郞 公 讳 武 派)가 있음.
20 조선 정종 (正宗) 대 대왕 (서기 1777 ~ 1800) 께서 金海 金 씨를 가리켜 삼한갑족 (三 韩 甲 族)이라 칭하시며 절효 (节 孝) 김극일 (金 克 一), 문민공 (文 愍 公) 김일손 (金 馹 孙), 삼족당 (三 足 堂) 김대유 (金 大有) 세 현인 (贤人)을 가리켜 삼현 (三 贤)이라 하였다.
한 집안에서 사대간 (四 代 间)에 삼현 (三 贤)이났다는 일은 과거나 앞으로 (古来)도 드문 일 인 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 (三 贤 派)로 定 한 것임.
현종 (显宗) 원년 (1660 년)에 송준길 (宋 浚 吉) 선생 등 유림의 상소 (上 疎)에 의해 나라로부터 자계 서원 (紫 溪 书院)이라 사액 (赐 额)을 받았고, 절효 (节 孝) 김극일 (金 克 一), 문민공 (文 愍 公) 김일손 (金 馹 孙), 삼족당 (三 足 堂) 김대유 (金 大有) 선생의 위폐를 서원존덕사 (书院 尊 德 祠)에 봉안 (奉安) 하고 유림 (儒林)에서 누세춘추 (累 世 春秋) 매년 2 월 8 일 中 정일 (丁 日)로 봉향하고 있고이 자계 서원 건물이 유형 문화재 제 83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음 호로.
(자계 서원 :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 번지)
삼현파 (三 贤 派 : 판도 판서 공파)의 일세조 (一 世祖) 인 관 (管)은 고려에서 판도 판서 (版图 判 书)를 역임하고 학교 (学校)를 건설하여 유학 (儒学)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 (功)을 세웠으며,
① 그의 현손 (玄孙) 극일 (克 一)은 효행 (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② 1486 년 (중종 17) 식년 문과 (式 年 文科)에 급제한 일손 (馹 孙)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 (巨 儒) 김종직 (金宗 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 (金宏 弼) · 정여창 (郑汝 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 (春秋 馆)의 사관 (史官)으로있을 때 전라 감사 (全 罗 监 司) 이극돈 (李 克 墩)의 비행을 사초 (史 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연산군 (燕山 君)이 등극하여 [성종 실록 (成 宗 实录)]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 (李 克 墩)이 당상관 (堂上 官)으로 참여하여 사초 (史 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 直)이 쓴 조의 제문 (吊 意 帝 文 :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 (盧 思 愼) · 윤필상 (尹弼 商) · 한치형 (韩 致 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 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가되어 이른바 무오사화의 수괴로, 권오복 (权 五福) · 권경유 (权 景 裕) · 이목 (李 穆) 등과 함께 참수 (斩首) 당하였다, 김종직 (金宗 直)은 부관 참시 (剖 棺 斩 尸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 (馹 孙)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 (中 宗 朝) 영의정 (領 议政) 남 곤 (南 衮)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 (濯 缨 : 김일 손의 호)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 (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 (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 '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③ 삼현 (三 贤)의 한 사람인 대유 (大有)는 일손 (馹 孙)의 조카이며 준손 (骏 孙)의 아들이다. 무오사화 (戊午 士 祸)에 숙부 (叔父) 일손이 참수 당하자 부자 (父子)가 함께 호남 (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中 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 (志 节)로 살았 으며, 3 개월 간의 칠원 현감 (漆 原 县 监)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 (淸 道)의 운문산 (云 门 山) 속 삼족당 (三 足 堂)에서 73 세로 일생 (一生)을 마쳤다.
"일손 (馹 孙)의 증손 (曾孙) 언유 (彦 谕)는 고양 (高 阳)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 (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시 (诗)와 글씨에도 뛰어 났으며 특히 송설체 (松 雪 体)에 능하여 공사 (公私)의 비 (碑) ·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 (彦 谕)의 아들 현성 (玄 成)은 광해군 (光 海 君) 때 폐모론 (废 母 论)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시 · 서 ·화에 모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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