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사람들
벡크만---등장 인물 중에 주인공
그의 부인---그를 이미 잊은
그녀의 남자 친구---그녀를 사랑하는
한 소녀---남편이 외다리가 되어 집에 온
그녀의 남편---무수한 밤을 그녀에 대해 꿈을 꾼
연대장---즐거움이 넘치는
그의 부인---따뜻한 방 안에서도 덜덜 떨고 있는
그의 딸---마침 저녁식사 중에 있던
그녀의 씩씩한 남편
카바레 지배인---용감한 듯하면서도 실은 비겁한
크람머 부인
노인---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매장업자---트림만 하는
도로 청소부---그뿐 아무것도 아닌
타인---누구나 알 수 있는
엘베
무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오래 떠나 있었다. 퍽이나 오래. 너무나 길고 긴 기간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는 떠날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변해서 돌아온다. 아니, 그는 들에 서 있는, 서서 새들을 쫓는 허수아비의 근사꼴이 되었다. 속사람도 역시--- 그는 수 없는 낮과 밤을 혹한의 벌판에서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차값 대신으로 종지뼈를 지불해야 했다. 그렇게 무수한 밤을 허허벌판 추위 속에서 지낸 뒤 그는 이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하나의 광몽(狂夢)의 영화(映畵)를 살았다. 그는 그런 기억에 젖을 때면 몇 번이고 자신을 꼬집어보는 것이었다. 생시(生時)인지 꿈인지를 분간키 위해. 허나 다음 순간, 그는 그의 주위에 어디에도 사람은 여전히 있고 한결같은 생활의 계속을 본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무언가 실감 있는 진실이 있어야겠다고. 그렇다, 그러나 그가 굶주린 배를 엄청나게 차디찬 발을 옮겨 결국 다시 거리에 섰을 때, 그를 맞이해 주는 것은 여전히 같은 영화의 되풀이, 너무나 상식적인 일상사(日常事)였다. 그것은 또한 독일로 돌아오는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으로 돌아오는 귀환 병사의 대열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의 집은 없어졌거나 또는 그들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은 저 문 밖, 그들의 독일은 저 밖의 폐허, 비가 내리는 거리의 밤, 밤인 것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독일인 것이다.
序幕(서막)
(바람이 신음을 한다. 엘베 강물이 폰톤에 찰싹인다. 저녁. 매장업자.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람의 실루엣.)
매장업자 (트림을 자주 하며 중얼거리듯) 그으욱! 그으욱! 파리 새끼처럼 죽어---그으욱---갔지! 파리 새끼들처럼 죽어 갔단 말야! 아, 저기 누가 서 있구나! 폰톤 위에. 제복을 입은 것 같은데. 응, 낡은 군복을 걸쳤군. 모자는 쓰지 않고. 머리가 구둣솔 같구나. 근데, 그는 아주 물 가까이 서 있다. 너무 가까운데, 수상해. 대개 어둠이 내린 강가에 서 있는 치들은 연인(戀人)들이거나 시인(詩人)이지. 혹은 만사가 귀찮아진 자(者)들 중에 어느 족속이거나. 그들은 곧잘 괴로운 짐을 던져 버리고 생(生)을 깨끗이 포기하거든. 필경 저기 저 치도 그런 족속 중에 하나일 거야. 물 가까이 아주 위험스레 서있군. 혼자 서 있는 걸 보면 분명 연인은 아냐. 연인은 늘 둘이지. 그렇다고 시인 같지도 않고. 시인들은 대개 머리가 길거든. 한데 폰톤 위의 사나이는 머리가 구둣솔이란 말야, 이상한 일이야, 폰톤 위에 서 있다니--- 정말 이상해---(한 번 둔탁하게 삐걱 소리가 나더니 실루엣 사라진다) 그으욱! 저런, 가 버렸구나! 물에 뛰어들었어. 그렇게 물가에 바싹 서 있더니. 그예 기권해 버렸군. 그예 사라지고 말았오. 그으욱! 한 인간이 죽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지. 바람은 여전히 불어 가고, 엘베 강물은 여전히 푸념을 하고, 전차(電車)는 여전히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나른해진 창녀는 여전히 하이얀 얼굴로 창가에 누워있고, 크람머 씨도 돌아누우며 여전히 코를 골 것이다. 그리고, 그저 그뿐, 시간의 강물은 그대로 흐를 것이다. 그으욱! 한 인간이 죽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니다. 잠시 거기 있었다는 듯이 동그란 파문(波紋)이 조금 일 뿐. 허나 그것도 이내 사라지고 만다. 잠잠해진다. 언제 그가 있었냐는 듯 자취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 가만 있자, 저기 누가 울고 있군. 이상한데. 웬 영감이 울고 섰구나. 영감님, 대체 무슨 일이슈?
노인 (별로 슬픈 기색도 없이 몸을 떨며) 얘들아! 얘들아! 나의 어린 양들아!
매장업자 노인 양반, 아니, 대체 왜 이러슈?
노인 어쩔 수 없기 때문야. 아, 난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
매장업자 그으욱! 용서하십쇼(트림을 해서)! 하여튼 안 됐군요! 그렇다고 소박 맞은 색시처럼 그러고 계실 필욘 없잖아요. 그으욱! 이거 트림을 자꾸 해서 미안해요!
노인 아--- 나의 어린 양들이, 나의 어린 양들이 다 그렇게 될 줄이야---!
매장업자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게?
노인 난 신(神)이야, 아무도 안 믿는.
매장업자 그런데 왜 그렇게 우십니까? 그으욱! 이거 미안해서---
神(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들은 총으로 쏴 죽고, 목매달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자살을 하고---오늘은 수백 명, 내일은 수천 명, 그들은 그렇게 죽는 거야. 그런데 난 어찌할 도리가 없지.
매장업자 암담하시군, 노인 양반. 참 암담하시겠어요. 그러나 문젠 당신을 아무도 이젠 안 믿는다는 겁니다.
神(신) 참 암담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는 신(神)야. 참 암담해. 난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나의 불쌍한 양떼들을 위해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저 암담할 뿐야.
매장업자 그으욱! 실례! 파리 새끼들처럼 죽어 갑죠! 그으욱! 아주 끔찍하게 말예요!
神(신) 그런데 왜 자넨 기분 산란하게 자꾸 트림만 하나? 아주 무섭기 짝이 없군!
매장업자 그러실 겝니다. 되게 무서울 겝니다. 일종의 직업병이죠. 매장업자니까.
神(신) 뭐, 죽음이라고? 자넨 좋겠군! 자네가 오늘의 새로운 신(神)일세. 자넬 그들은 믿어. 자넬 그들은 사랑하고 있단 말야. 자넬 두려워하면서도 불가피한 존재로 인정한단 말야. 이젠 아무도 자네에게 항거나 불평하질 않아. 그래, 이젠 자네 세상이군. 자넨 새로운 신(神)야. 자넬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넨 새로운 신(神)이며 죽음야. 그렇지만 너무 비대해졌네. 내 기억으론 자네가 그렇질 않았는데. 늘 초라하고 깡마르고 항시 배가 촐촐해 보이더니 지금은 그게 아니군. 아주 뚱뚱해지고 신수가 훤해졌어. 옛날의 죽음은 늘 출출해 보였지.
죽음 아, 네, 요즘에 와서 살이 좀 올랐죠. 사업이 잘 되어 가니까. 새로운 전쟁이 또 올 거고--- 파리새끼들처럼 또 죽어 가는 거죠! 지금도 사자(死者)들은 파리 새끼들처럼 이 세기(世紀)의 벽에 오물거리는 걸요. 그들은 깡마르고 마비된 채 파리들처럼 현대의 창살에 엎뎌 있어요.
神(신) 한데 트림은? 그 몸서리치는 트림, 왜 자꾸 하는거지?
죽음 과식을 했죠. 그저 그것뿐예요. 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으욱! 아이고, 용서하세요!
神(신) 얘들아, 얘들아! 난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얘들아, 나의 어린 양들아! (사라진다)
죽음 그럼, 노인 양반, 안녕히 가 주무세요! 조심하셔야 돼요! 잘못하다간 당신도 물에 빠져요! 거기서 방금 또 한 사람이 뛰어내렸단 말예요! 조심하세요, 영감님! 깜깜해요, 깜깜해! 그으욱! 영감님 집으로 곧장 가세요! 별도리 없는 거예요. 조금 전에 풍덩 해버린 자(者)에 대해 눈물 짤 필요도 없고요. 아까 그 자(者)는 군복을 입었더군요. 머리는 구둣솔 같고. 당신 죽을까 봐 나 울어요! 오늘 저녁 여기 물가에 섰던 사람은 연인(戀人)도 시인(詩人)도 아니었어요. 더는 살고 싶지도 않고, 살수도 없는 치들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지. 그러니까, 살 수 없으면 숫제 어느 저녁때쯤 강물로 슬쩍 뛰어드는 치 말이죠. 풍덩, 그리고 그만, 그대로 두는 수밖에. 통곡하실 하등의 필요가 없어요, 영감님. 당신 골로 가시거나 통곡하시든지--- 단 한 사람이었을 뿐예요, 더는 살 수 없다는 인간들 중에서, 그 수없이 많은 인간들 중에서 단 한 사람, 바로 단 한 사람---
꿈
(강가에서. 찰싹이는 물결 소리. 엘베. 벡크만.)
벡크만 내가 어디에 있어? 아니, 내가 어디에 있는 거야?
엘베 내게.
벡크만 내게라니? 넌 누군데?
엘베 요 애숭이야, 글쎄, 내가 누구일까? 네가 성 파울리 부두에서 뛰어내렸다면---
벡크만 엘베 강?
엘베 그렇지, 엘베 강이지.
벡크만 (놀라며) 네가 엘베 강야?
엘베 하하, 이제야 넌 그 유치한 잠을 깨는구나! 무슨 소리냐고? 넌 나를 하아얀 살결의 꿈꾸는 소녀일거라고 생각했지. 수선화(水仙花)를 품에 안고 긴긴 머리채를 늘인 오필리아일 거라고 말야. 넌 그 향기 그윽한 백합의 품 안에서 영원을 머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이봐, 그게 오산(誤算)이었어. 기실 나에겐 아름다운 꿈도, 달콤한 향기도 없거든. 언제나 묵묵히 흘러만 가는 강물---악취나는 오물(汚物)과 기름이 떠 있을 뿐이지. 그런데 뭘 구하겠다는 거야?
벡크만 안식을. 더는 저 위에서 견딜 수가 없어. 더는 지낼 수가 없단 말야. 안식을 원해. 죽고 싶어. 여생(餘生)을 죽어서 지내고 싶어. 편안히 자고 싶은 거야. 무수히 오고 오는 밤을 편안히 자고 싶은 거야.
엘베 도피하려는 거지? 요 애숭이야, 그렇지? 넌 지금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안 그래? 저 위에서 말야, 그렇지? 넌 이미 너의 인생을 다 살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어, 쨈바리 같으니라고 도대체 지금 몇 살이나 됐어? 일찌감치 기권해 버린 풋나기야!
벡크만 스물 다섯 살야. 그런데 난 편안히 자고 싶지.
엘베 이제 겨우 25세렷다. 그런데 여생을 편히 주무시겠다. 안개 자욱한 밤, 스물 다섯 살짜리가 강물로 뛰어든다. 이유인즉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렷다. 야, 인생 따라지야! 넌 도대체 뭘 참을 수 없다는 거지?
벡크만 모든 것을, 난 모든 것을 저 땅 위에선 참을 수가 없어. 더 이상 굶주릴 수도 없고, 이 이상 더 절름거릴 수도 없어. 내 침대 앞에서도 난 그저 멍청히 섰다간 그대로 절름거리고 나가야 되는 거야. 내 침댄 이미 딴 놈이 차지했거든. 나에겐 다리도 침대도 빵도 없어. 이 모두를 못 참겠단 말야! 알겠어?
엘베 안 될 말이지, 요 자살밖에 모르는 철부지야. 안 된단 말야! 넌 지금 네 부인이 널 차 버렸다는 것, 한없이 네가 절룩거려야 된다는 것, 그리고 뱃속에선 쪼르륵 소리밖에 안 난다는 것---그 정돌 갖고 여기 내 옷자락 속으로 기어든 모양인데, 아니, 그렇게 쉽게 강물로 뛰어든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 너 같은 놈은 다 빠져 죽겠다. 그리고 이 땅은 어느 가구점 주인 영감의 민대머리처럼 텅 빈 불모지가 되겠다. 한데 이봐, 젊은이. 그럴 수 없지. 내겐 그 정도의 구실론 통하지 않네. 난 가차없이 거절야. 그렇게 빽빽하게 낀 인생의 바지가 그렇게 쉽사리 벗어지는 줄 알아? 이봐 애숭이, 자네가 군대생활을 6년 동안이나 했다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절뚝거리는 사람 역시 어디 가나 있는 거야. 침대를 딴 놈이 차지했으면 넌 너대로 다른 걸 찾아봐야지. 난 너같이 아직 젖냄새 나고 가련한 인생은 원칠 않아. 자네 같은 건 내게 아주 하잘것없는 존재야. 어느 노파가 이런 말을 하더군---[우선 살고 보라. 한 발씩 나아가 보라. 다시 걸을려고 해보라!]고. 네게 주는 말야. 허나 이런 말까지도 염증의 대상이 되시고, 마비된 사지 역시 제멋대로 운동을 해댄다든지, 마음마저도 동시에 동서남북(東西南北)행(行)을 하신다면, 그땐 또 달리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자넨 지금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어, 그렇잖아? 재롱 씨, 이젠 슬슬 사라져 보실까. 내 신세까지 지기엔 자네 인생이 아직 요원해. 참아 봐. 자네 같은 건 내게 귀찮기만 한 존재야. 자넨 아직 젖먹이란 말야. 입꾹 다물고 꺼져요, 요 말썽꾸러기야! 자, 이리 귀나 바싹 대 봐. 몇 마디 소곤거려 줄 게 있어. 잘 들어 봐, 자네 따위의 자살엔 똥을 깔겨 버릴 테야! 넌 아직 햇병아리란 말야! 내가 늘 너를 지켜 볼 테니까 앞으론 조심해. (큰 소리로)어이, 젊은이! 이놈을 불랑케네제 모래사장에 던져 버리게! 이놈이 내게 약속한 대로 다시 한 번 노력해 볼 거야. 하긴 그놈 말이 자기 다리가 영 말을 안 듣는다나. 말썽도 많은, 여하튼 골치 아픈 놈야!
一景(일경)
(저녁. 블랑케네제. 바람과 물소리. 벡크만. 他人(타인).)
벡크만 거 누가 있소? 아닌 밤중에, 더우기 물가에. 여보쇼! 대체 누구요?
타인 나야.
벡크만 나라니! 나가 누구란 말야?
타인 난 타인(他人)이야.
벡크만 타인(他人)이라니? 어떻게 된 타인(他人)이란 말야?
타인 어제도 있었고, 그 예전에도 있었고, 항시 있는 타인(他人), 긍정자지, 해답자.
벡크만 예전에도 있었다고? 늘 있었다고? 그럼 넌 학교의 벤치에서도, 스케이트 장에서도, 그리고 우리집 난간에서도 있었던 타인(他人)인가?
타인 쉬몰렌스크의 눈보라 속에서도 있었고, 고로독크의 석탄 창고 속에서도 있었던 자(者)지.
벡크만 타인(他人), 그럼 넌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있었던 자인가?
타인 물론이지. 오늘 저녁에도 있고, 내일도 역시 있을 타인(他人)이지.
벡크만 내일, 내일이란 없어. 더우기 자네가 있는 내일이란 없네. 어디서 형체도 없는 녀석이---
타인 넌 나와 떨어져선 존재할 수 없어. 나는 늘 어디나 있는 자(者)지. 아침에도 오후에도 밤에 침대에도.
벡크만 꺼져! 난 침대도 없어. 난 지금 더러운 배설물 속에 누워 있을 뿐야.
타인 난 배설물 속에서도 있지. 늘 어디서나 있는 존재니까. 네가 날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벡크만 형체도 없는 놈이--- 어서 꺼져!
타인 넌 나를 벗어날 수가 없어. 난 수천의 모습을 가졌지. 난 누구나 알 수 있는 소리야. 나는 늘 어디나 있는 타인(他人)이야. 난 그런 타인(他人)이야, 해답자지. 난 네가 울 때 웃고 있는 자지. 네가 지쳤을 땐 힘을 넣어 주고 언제나 은밀히 있으며 때로는 성가신 존재자지. 나는 옵티미스트, 악에서 선을 보여주고, 캄캄한 어둠 속에선 등불을 켜주는 자며, 나는 신앙이고 웃음이고 사랑야. 그것이 나란 말야. 비록 절룩거려도 계속해 걸어가게 하는 자, 네가 부정할 땐 긍정하는 자---그래, 난 긍정자, 그것이 나야.
벡크만 너 좋을 대로 긍정해 봐. 난 네가 필요 없어. 나는 부정, 부정할 수밖에 없단 말야. 꺼져. 난 부정할 수밖에 없어, 알아듣겠어?
타인 알아.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지. 부정자(否定者)야, 대체 네 이름은 뭐지?
벡크만 난 벡크만야.
타인 부정자, 넌 세례명도 없나?
벡크만 그렇지 않아, 어제부터 그렇게 됐어. 어제부터 난 그저 벡크만이라고만 불려지게 됐어. 간단히 그저 벡크만이라고--- 마치 테이블을 테이블이라고 부르듯.
타인 누가 테이블을 부르듯 자넬 부르던가?
벡크만 내 아내가. 아니, 내 아내였던 여자가. 난 3년간이나 떠나 있었어. 러시아에 있었지. 그리고 어제야 겨우 집에 돌아온 거야.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었어. 3년간은 자네도 알겠지만 너무나 긴 기간이었거든. 내 아낸 그저 덤덤히 벡크만---하는 거였지. 단지 벡크만이라고. 마치 3년간이란 세월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주듯. 그녀는 테이블을 테이블이라고 말하듯이 벡크만---하는 거였지. 마치 벡크만이 무슨 가구(家具)의 일종이나 되는 것처럼 말야. 벡크만이 가구와 같을 바엔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은 거야. 이젠 알겠나? 나의 세례명이 없어진 것을 알겠어?
타인 그렇다 치고 이 밤중에 모래밭엔 왜 누워 있나?
벡크만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야. 실은 내 다리의 하나가 뻗장다리거든. 이런 기념품은 있어야 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전쟁을 쉽게 잊어버리지. 난 그걸 원치 않아. 그래야 아름답던 과거가 생각나는 법이지. 어린아이들을 보면 아름답던 과거가 생각나듯이, 그렇지?
타인 그래서 이 밤에 물가에 누워 있단 말야?
벡크만 난 떨어졌어.
타인 아, 떨어졌다고, 물 속으로 말이지?
벡크만 아니야, 그게 아냐! 내가 나를 밀어뜨렸지. 고의로 말야. 더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비틀거려야 되는 것도, 절뚝거려야 되는 것도, 그리고 내 아내였던 여자와의 문제도. 그 여자는 테이블을 테이블이라고 말하듯이 겨우 벡크만---하고 마는 것이었어. 그뿐인가, 그녀와 같이 있던 놈은 날 보더니 히죽이 웃는 거였지. 참을 수 없는 건 또 그뿐이 아냐. 이 폐허의 거리와 붕괴된 집, 여기 함부르크에선 물론이고 어디를 가나 내 아이가 무너진 벽돌 틈에서, 물구덩이에서 흙투성이가 된 채 내 앞을 가로막는 거야. 그 애는 내가 떠날 때 겨우 한 살이었어. 그리곤 아직껏 못 봤지. 그런데 요즈음 밤마다 꿈에서 나타나는 거야. 돌무더기 속에서 나타났다간 돌부스러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거였어. 정말 그것은 더더군다나 견딜 수 없더군. 결국 나는 빠져 버릴 결심을 했지. 아주 간단하고 쉬우리라 생각했어. 폰톤 위에서 뛰어내려 풍덩! 하고 나면 그만--- 그것으로 그뿐,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 계속되고---
타인 풍덩 하면 그것으로 다 그만이라고? 흥, 꿈을 꿨구나. 넌 지금 모래사장에 누워 있단 말야.
벡크만 꿈을 꿨다고? 그래 꿈을 꿨다, 속이 너무 비어서 말야. 난 꿈을 꿨을 거야. 엘베 녀(女)께서 나를 뱉아 버리시더군. 그 고리타분한 엘베 녀(女)가 나같은 건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거였어. 또 말하길, 이런 일을 한 번쯤 시도해 볼 순 있지만 내겐 그럴 만한 정당성이 결핍됐다나, 아직 풋나기라고 내 인생이 똥을 눠 버리겠다고도 했지. 글쎄 귓속말로 하는 말이, 나 같은 자살엔 똥을 깔겨 버리겠다는 거였어. 똥을 깔겨 버리겠다! ---이렇게 어물 시장(魚物市場)의 어느 노파처럼 욕지거릴 하는 거였어. 엘베 녀는 또 인생은 아름다운 거라고 말하는 것이었지. 난 이렇게 파편이 널려 있는 블랑케네제 모래사장에 누워 있는데, 난 이렇게 추워서 떨 뿐인데 말야. 난 언제나 추워 떠는 거야. 러시아에 있을 땐 정말 추웠어. 끝없는 추위만이 내 양식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이 엘베 강이, 저주스럽고, 고리타분한 엘베 강이--- 그래, 난 꿈을 꾸었던 거야. 속이 너무 비어서 말야. 근데 저게 뭐지?
타인 누가 오는군. 소녀이거나--- 하옇든 그런 유(類)의 누구일 거야. 곧 알게 되겠지.
소녀 누가 거기 있어요? 방금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여보세요, 누가 있어요?
벡크만 그렇소. 여기 사람이 누워 있소. 여기 물가에.
소녀 거기서 무얼 하시는 거예요. 아니, 왜 안 일어나시죠?
벡크만 보시다시피 난 이렇게 누워 있지. 반은 물에 잠긴채.
소녀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일어나 보세요. 처음 저는 시체(屍體)인가 했어요. 언젠가 이 물가에서 어둠에 덮인 송장을 봤을 때처럼.
벡크만 참 그렇군. 까만 어둠에 쌓인 송장--- 나도 그거나 마찬가지지.
소녀 이제 보니 참 재미있으신 분이군요. 사실 저녁이면 이 물가에 종종 죽은 사람이 누워 있어요. 이따금 보는데 그것들은 퉁퉁 불어 있거나 물에 촉촉히 젖어 있더군요. 그리고 얼굴은 해골처럼 창백하고요. 전 그때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천만다행으로 살아 계시군요. 그러나 당신의 몸도 아마 홈빡 젖어 있을 거예요.
벡크만 나 역시 그래. 진짜 시체들처럼 싸늘히 젖어 있어.
소녀 이젠 그만 일어나세요. 뭐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어요?
벡크만 있지. 난 종지뼈를 뺏겼어. 러시아에서 말야. 지금 난 뻗장다리로 내 인생을 절뚝거리며 가야 되는 거야. 늘 이런 느낌이 들더군. 앞으로 걷는데 실은 뒤로 가는 것 같은. 어딜 올라간다는 것은 아예 당치도 않은 소리야.
소녀 그렇지만 이제 가 보세요. 제가 도와 드릴 테니. 안 가시면 당신은 차츰 물고기가 될 거예요.
벡크만 확실히 뒤로 가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준다면 일어서 보겠지만--- 됐어. 감사해.
소녀 자, 보세요. 당신은 분명히 지금 앞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한데 너무 젖어 있군요. 얼음처럼 차디차고. 제가 그냥 여길 지나쳤더라면 당신은 분명히 물고기가 됐을 거예요. 그리고 그대로 침묵만을 지키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거예요. 이런 말 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바로 저기 살아요. 집에 마른 옷이 있는데! 저하고 같이 가 주시겠어요? 네? 제가 당신을 말려 드린다고 기분 상하실 건 없겠죠? 당신은 지금 반 물고기예요. 축축히 젖은 몸에 죽음 같은 정적만이 깃든 물고기란 말예요!
벡크만 정말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
소녀 물론이죠, 당신만 원하신다면. 그러나 그건 당신이 너무 젖어 있다는 이유만으로예요. 당신과 나는 헤어져야 돼요. 냉정하게. 그래야 제가 당신을 데리고 온 것에 후회가 없죠. 전 단지 그 이유만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너무 젖어 있다는, 너무 추울 거라는, 아시겠어요? 그리고 또 이유가 있다면---
벡크만 또 이유라니? 무슨 이유지? 없을 거야. 내가 춥고 몸이 젖어 있다는 이유 외엔, 그 외엔 아무런 이유도 없을 거야.
소녀 아녜요, 또 있죠. 당신의 음성은 너무나 절망과 슬픔에 차 있어요. 한없는 불안과 고통에 차 있는 음성이란 말예요. 아, 괜한 소릴 지껄였나 보군요, 그렇죠? 어서 가기나 하세요, 가엾은 물고기님.
벡크만 잠깐, 당신의 걸음이 너무 빨라. 내 다리가 말을 잘 안 듣는군, 천천히 가 줘.
소녀 참, 그렇죠. 천천히 가요. 마치 젖은 몸으로 추위에 떠는 태초의 물고기 한 쌍처럼---
타인 그들은 지금 가고 있다. 두 발 가진 자와 함께 가고 있다. 세상엔 참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는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도 죽음에 집착하여 강물로 뛰어들더니, 야릇하게도 두 발 가진 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고 그 사람은 코우트를 걸치고 긴긴 머리채와 젖가슴을 가졌다. 그런 다음 인생은 갑자기 달콤한 맛이 돌기 시작한다. 아무도 죽으려 들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지 살고 싶어한다. 그 치렁치렁한 머리 한줌 때문에, 하아얀 살결과 그 살 내음 때문에--- 하여 그들은 죽음에서도 일어난다. 2월의 동산을 무수히 달리는 사슴의 무리들처럼 건강을 느낀다. 하다못해 물 속에 잠겼던 반시체(半屍體)까지도 다시 일어나고, 고통의 황량한 들판에서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다던 자들도 일어난다. 그렇다, 물 속의 시체까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맑은 눈동자 때문에, 은은히 숨차오는 정겨운 마음 때문에, 부드러운 손길과 하아얀 목 때문에--- 물속의 시체까지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발 가진 자와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다. 참 이상한 사람들도 있어, 세상엔---
二景(이경)
(실내. 저녁. 삐걱 하며 열리고 닫히는 문. 벡크만. 소녀.)
소녀 자, 이 등불 밑으로 가까이 오세요, 물고기님. 어디, 자세히 좀 보고 싶어요. 아니---! (웃는다)이것이 대체 뭐예요.
벡크만 뭐? 그건 내 안경야. 물론 우습겠지. 허나 그것이 내 안경인 걸 어떻게 하지.
소녀 이걸 안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부러 웃기실려고 그러는 거 같은데요.
벡크만 틀림없는 내 안경야. 하지만 당신 말도 옳긴 옳아. 아마 당신한텐 이것이 우습게 보일 테니까. 유리를 빼놓고는 귀에 거는 것까지 모두 회색 아연판으로 됐지. 이렇게 우린 얼굴까지도 회색 유니폼을 걸치게 됐어. 생철로 된 로보트 얼굴처럼 말야. 그러나 사실 이것은 방독면 안경이지.
소녀 방독면 안경이라니요?
벡크만 방독면 안경이라고 있어. 군인들에게 준 것인데 방독면에 안경이 붙어 있지. 방독면 속에서 내다볼 수 있도록.
소녀 그건 그렇다 치고, 왜 그것을 끼고 헤매시는 거죠? 다른 적당한 것이 없어서 그러세요?
벡크만 아냐, 있었어. 그런데 파편에 맞아 부서졌지. 뭐,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어. 그래도 이 정도나마 또 가졌으니 다행한 일야. 얼마나 보기 흉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뿐만 아니라 이 안경은 사람들이 나를 조소할 때마다 앞이 흐려지곤 해. 허나 결국은 다 마찬가지지. 이것은 이제 내게 있어 불가결한 존재야. 이것 없인 눈앞이 캄캄해서 꼼짝도 못하겠는 걸.
소녀 정말 그래요? 그것 없인 꼼짝도 못하세요? (재미있다는 듯, 그러나 다정하게) 그렇지만 그 흉칙한 것 어서 이리 주세요. 무슨 소리냐고요? 아녜요, 가실 땐 도로 드릴 텐데요 뭐. 당신은 그것이 없으면 꼼짝 못하신다고 했지만 저에겐 오히려 그게 편할 것 같아요. 아주 훨씬. 당신도 그 안경을 벗으면 보이는 게 아주 다를 거예요. 그 흉측하기 짝이 없는 방독면 안경을 통해 보셨기 때문에 이제껏 모든 것이 괴롭고 우울한 인상만을 주었다고 전 생각해요.
벡크만 지금 난 모든 것이 몽롱하게만 보여. 그 안경을 도로 줘야겠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걸. 당신까지도 아물아물 흐릿해. 아주 뿌우옇단 말야.
소녀 참 희한한 일이군요. 저한텐 그게 더 좋아요. 당신에게도 이 상태가 더 좋을 것 같아요. 그 안경을 끼고 계시면 당신은 꼭 유령 같아요.
벡크만 아마 난 유령인지도 모르지. 어제의 유령, 오늘에와선 누구나 외면해 버리는 존재. 전쟁이 낳은 유령을 평화의 상징으로 급변조(急變造)시킨 망령이지.
소녀 (정겹게) 당신이 그 무서운 유령이라니! 당신은 마음속에도 방독면 안경이 있는 것 같아요, 임시 물고기님. 그 안경을 그대로 두세요. 하루 저녁쯤 모든 것이 모호해 뵌다고 뭐 나쁠 거 없잖아요. 그 바지나 맞나 보세요. 아, 꼭 맞으시는군요. 그럼 자켓도 한 번 입어 보세요.
벡크만 허, 기가 막혀! 나를 물 속에서 끌어내더니 도로 처넣은 격이군. 이건 틀림없이 운동 선수의 자켓인데. 어떤 거체파 것을 훔쳐 왔어?
소녀 제 남편은 거인(巨人)이에요. 아니, 제 남편이었던 사람은.
벡크만 당신 남편이라니?
소녀 그럼 제가 남자 옷장순 줄 아셨어요?
벡크만 그럼 어딨나?
소녀 굶주리고 동상에 걸려 쓰러져 있더라는 것---제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것뿐예요. 스탈린그라드로 떠난 이래 감감 무소식이에요. 벌써 3년이나 됐어요.
벡크만 (놀라며)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란 말이지--- 그래, 그래 거기 퍽 많이 쓰러져 있었어. 그러나 돌아오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지. 그들은 오지 못할 사람들의 옷을 벗겨 입고 있었어. 그리고 이 옷의 주인이며 네 남편이었던 그 거인도 거기 쓰러져 있었지. 그런데 난 이렇게 돌아와서 그의 옷을 지금 입고 있군. 멋있는 일이지? 정말 멋있지 않아? 그런데 옷이 하도 커서 꼭 익사하는 기분야. (말을 서두른다) 난 이것을 도로 벗어야겠어. 내 젖은 옷을 입어야겠어. 이 자켓을 입으니까 꼭 죽을 것만 같아. 이것이 날 죽일 것만 같아. 이 옷을 입고 있다간 꼴불견이 되고 말거야. 전쟁의 부산물인 아주 괴기하고도 유치한 광대 말야. 난 이 옷을 벗어야겠어.
소녀 (걱정스러운 듯이) 가만히 계세요, 물고기님. 제발 그대로 입고 계세요. 제겐 당신이 얼마나 멋있게 보인다고요, 그 웃기는 구둣솔 머리에도 불구하고 그 머리도 러시아의 기념물이겠죠? 안경과 다리와 구둣솔 머리까지 합쳐서 말예요. 제 생각엔 그래요.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심 안 돼요, 물고기님. 당신은 너무나 슬프고 가엾고 우울한 망령처럼 보여요. 그런 머리에 그런 다리로 그 큰 자켓을 입고 있으니--- 그러시지 마세요, 물고기님. 그대로 입고 계세요. 제가 비웃으려고 자꾸 그러는 게 아녜요, 물고기님. 당신이 너무나 슬퍼 보이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우울하고 불안에 찬 눈으로 저를 보실 때마다 전 울음이 콱 치밀 것 같아요. 통 말씀을 안하시는군요. 말씀 좀 해보세요, 물고기님. 뭐든 말씀 좀 하세요. 무의미한 말이라도 좋으니 말씀 좀 하세요. 세계가 온통 무서운 정적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요. 무엇이든 말해 보세요. 그러면 덜 외로울 거예요. 입을 여세요, 물고기님. 온 밤을 그렇게 서 계시겠어요? 이리로 오세요. 제 옆에 와 앉으세요. 그렇게 멀리 있음 싫어요, 물고기님. 안심하고 이리 오세요, 제가 잘 안 보이겠지만. 차라리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어서 와서 아무 얘기나 좀 해보세요. 이 무서운 심연의 정적이 안 느껴지세요?
벡크만 (몽롱한 소리로) 난 당신을 똑똑히 좀 보고 싶어. 그렇지, 당신을 말야. 근데 난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불안해지는 거야. 꼭 뒤로 가는 것만 같아.
소녀 아이 참, 당신도! 뒤로 가든, 앞으로 가든, 위로 가든, 그게 지금 무슨 상관예요. 어쩌면 우린 내일쯤 하이얀 얼굴로 강물 속에 누워 있게 될지도 몰라요. 그 차가운 침묵 속에 말예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서로의 가슴 속에 있는 거예요. 적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말예요. 무슨 얘기든 좀 하세요, 물고기님. 아무래도 당신이 오늘 밤 저에게서 헤엄쳐 나갈 수는 없을 거예요. 가만히 계세요. 당신을 못 믿겠어요. 차라리 문을 잠궈 버리는 게 낫겠어요.
벡크만 그냥 놔둬. 난 물고기가 아냐. 문까지 잠글 필욘없어. 아니지, 난 고기가 아니라 하얀 신(神)이지.
소녀 (진정으로) 당신은 물고기예요. 물고기, 헤엄치는 우울한 망령이에요.
벡크만 (실성한 사람처럼) 무엇이 나를 엄습하고 있어. 물이 목에까지 차 오르고 있어. 질식할 것만 같아. 불길한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 거야. 희미한 안개 속에서 무엇이 나타나듯. 근데 그것이 내 목을 조르는 것 같군.
소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벡크만 (점점 불안해 하며) 난 이제 슬슬 사라져야 할까 봐. 안경을 이리 줘. 빨리. 눈앞이 하도 아물거려서 통 분간을 못하겠어. 당신 뒤에 누가 서 있는 것 같아! 아까부터 한 거인(巨人)이, 스포츠맨 같은 사람이 말야, 근데 안경을 안 써서 그런지 다리가 하나뿐인 것 같군. 그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어. 두 개의 목발을 짚고 말야. 텍---톡---텍---톡---하는 소리가 들리지? 목발이 내는 소리 말야. 지금은 당신 뒤에 서 있어. 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안경이나 이리 줘. 더 이상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당신 등 뒤로 바싹 다가섰어!
소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문이 삐걱 하며 열리더니 닫힌다. 텍---톡---텍---톡---하는 목발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벡크만 (중얼거리듯) 바로 그 거인이구나!
외다리가 된 者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이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내 옷까지 입고 내 자리에서, 내 아내 옆에서, 응?
벡크만 (좀 질린 듯이) 네 옷이라고? 네 아내라고?
외다리가 된 者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벡크만 (말뚝처럼 서서 힘 없는 소리로) 나도 어젯밤 어떤 놈에게 그런 물음을 했는데. 그놈도 내 셔츠를 입고 내 침대에서 내 아내와 있었지. 나도 그때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었어. 그런데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그대로 누워 버리는 거야. 그리곤 하는 말이, 나 여기서 뭣 좀 해---하는 거였지. 그게 그의 대답의 전부였어. 결국 나는 내 침실 문을 닫고 나와 버렸지. 아니, 불부터 껐군. 그 다음 난 밖에 서 있었어.
외다리가 된 者 어디 얼굴이나 좀 알자. 등불 가까이 와. 이리 바싹. (둔탁하게) 벡크만이구나!
벡크만 그래, 나야, 벡크만야.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외다리가 된 者 (조용한 어조에 원망이 섞인다) 벡크만이었군, 벡크만, 벡크만---
벡크만 (괴로운 듯) 그만! 제발 그 이름 좀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이 이젠 싫어. 부르지 마!
외다리가 된 者 (느리게) 벡크만이었군, 벡크만---
벡크만 (외치듯) 그건 내가 아냐! 난 그 이름으로 있기 싫어! 더는 벡크만으로 존재하기가 싫단 말야. (밖으로 뛰쳐나간다. 문이 삐걱 하며 닫힌다. 정적이 깔린 길. 바람 소리. 발걸음 소리)
타인 벡크만, 거기 좀 서.
벡크만 누구야?
타인 나야, 타인(他人)야.
벡크만 넌 벌써 여기 와 있었나?
타인 늘 어디서나 있는 걸, 벡크만. 난 언제든지 있어.
벡크만 그래, 용건은 뭐야? 날 그냥 가게 둬.
타인 안 돼, 벡크만. 이 길은 엘베 강으로 가는 길야. 자, 이리 와. 이 윗길로 들어서야 돼.
벡크만 그냥 가게 내버려 둬. 난 엘베 강으로 가겠어.
타인 안 돼, 벡크만. 이리 와. 넌 이 길로 가야 돼.
벡크만 그 길로 가라고? 더 살란 말야? 더 계속해 가야된단 말야?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자고 그렇게 하라고?
타인 자, 어서 벡크만.
벡크만 그 이름은 부르지 마라. 난 이젠 벡크만이 싫어. 이제부터 난 아무런 이름도 없는 거야. 날 보고 계속해 살라고? 저렇게 한 다리만 남아 돌아온 자가 있는데, 그것도 나 때문에 한 다리가 됐는데. 그때 난, 마우엘 병장! 무조건 최후까지 네 위치를 지켜라.---이렇게 말했던 거야. 이래도 내가 살아야 돼? 그는 외다리가 되어 돌아왔어. 그리곤 자꾸 벡크만, 벡크만만 불러 대고 있는 거야. 한없이 벡크만만 불러 대고 있어. 마치 무덤을 부르듯, 죽음을 부르듯, 강아지를 부르듯--- 그럴때마다 그 소린 세상은 망한다, 암담하다, 목을 누른다, 절망이다---하는 소리로 내게 들리는 거였지. 이래도 계속해 살아야 된다는 거야? 난 밖에 서 있어. 다시 밖에 서 있는 거야. 어제 저녁에도 난 밖에 서 있었어. 오늘도 난 밖에 서 있는 거야. 나는 늘 밖에 사는 거야. 문은 어디나 닫혀 있고, 난 거기에 상하고 피로한 다리를 이끌고 섰는 자지. 피까지 얼어드는 추운 어둠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인간, 그것이 나야. 외다리가 된 자는 끝없이 나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밤마다 난 한잠도 못 이루는 거지. 이봐, 그래 내가 갈 곳이란 어디야? 날 그냥 가게 내버려 둬.
타인 자, 벡크만, 이 길로 가자. 누굴 좀 만나보는 게 좋겠어. 그리고 그것을 그치에게 돌려주자.
벡크만 무엇을?
타인 책임을 말야.
벡크만 만날 사람이 누군데? 하옇든 좋아, 그렇게 하기로 해. 책임을, 책임을 누구에게 넘겨 준다고---좋아, 그렇게 하자. 제발 하룻밤만이라도 편안히 자 봤으면 좋겠어. 책임을 어느 놈에게 넘겨 주고서 말야. 그렇지, 그에게 책임을 넘겨 주자! 사자(死者)들까지도. 그에게 말야! 그래, 어서 그 사람을 만나러 가자. 그치는 따뜻한 방 안에서 살고 있을 거야. 이 도시에서, 아니, 어느 도시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지. 지금 그 사람을 방문하는 거다. 그리고 그에게 선물도 좀 해야지. 일생을 맡은 바 자기 의무에 충실한 그에게 말야.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의무였지. 몸서리치는 의무였어! 자, 가자! 가!
三景(삼경)
(실내. 저녁. 삐걱 하며 열리고 닫히는 문. 연대장과 그의 가족들. 벡크만.)
벡크만 식욕이 좋으시군요, 연대장님.
연대장 (언성을 높여) 뭐라고요?
벡크만 먹성이 좋으시단 말씀입니다, 연대장님.
연대장 저녁식사를 방해하겠다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무슨 중요한 물건이라도?
벡크만 아닙니다. 단지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서지요. 내가 오늘 밤 물에 빠져 죽었는지, 혹은 살아 있는 것인지를. 설사 제가 살아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느낄 수가 없거든요. 그저 전 낮이면 무엇이 자꾸 먹고만 싶고 밤에는, 밤에는 그저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니 말예요.
연대장 거 거, 좀더 솔직한 표현으로 말해 줄 수도 있지 않소! 군인이었소?
벡크만 아닌데요, 연대장님.
연대장 아니라니? 당신은 지금 군복을 걸치고 있지 않소.
벡크만 (차분한 말씨로) 그렇습니다. 6년 동안이었읍니다. 그러나 제가 10년 동안 우편배달부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제가 우편배달부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딸 파파, 무슨 용무로 왔는지 그걸 물어 보세요. 그는 제 접시 위를 뚫어져라 보고 있어요.
벡크만 (차분한 어조로) 밖에서 보니 당신의 창은 퍽 따사롭게 보이더군요. 전 다시 한 번 알고 싶어졌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 안에서,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런데 아시겠어요? 그 따사함으로 볼을 밝히는 창 밖 어둠 속엔 웬 한 사나이가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어머니 (미워서라기보다 무서워서) 여보, 그 안경 좀 벗으라고 해요. 쳐다볼 때마다 등골이 다 오싹해져요.
연대장 여보, 그게 소위 방독면 안경이라는 거요. 1934년 군사력 강화 때 군인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 그건 그렇고, 왜 그 궁상바가지를 여태 벗어 버리지 못했소? 전쟁도 끝났는데.
벡크만 그래요, 그래요, 전쟁은 끝났어요. 보통 그렇게들 말하죠. 허나 전 아직 그 안경이 필요해요. 전 근시거든요. 이 안경이 없으면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알아 볼 수가 있죠. 지금 여기서도 당신 테이블 위에 무엇이 있는지 다 보여요.
연대장 (말을 중단시키듯이) 그 밤송이 같은 머리에 대해서 뭐 그럴 듯한 에피소드라도 있소.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포로가 됐었소? 얼고 상한 밥도 먹어 봤소? 유격전도 해봤소? 어디서 해봤소? 적을 어떻게 잽싸게 해치웠다든지--- 하여간 좀 들어 봅시다.
벡크만 물론이죠, 연대장님. 유격전도 해봤죠. 스탈린그라드에서. 허나 그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읍니다. 우리는 체포되고 말았읍니다. 그러기까지 우린 3년 간을 싸웠죠. 그 수십 만의 젊은이들이 다---한데 우리의 지휘관은 사복 차림에 식사는 알젖 조림이었읍니다. 3년 간을, 4년간을 내내 그는 통조림 식사를 하는 것이었읍니다. 모든 병사들은 말 없이 눈[雪]에 쌓여 있었읍니다. 우린 기껏해야 맹물을 마시는 정도였읍니다. 입 속에선 모래만 으지적 소릴 내고 있었읍니다. 허나 우리의 우두머린 알젖 조림만 먹는 것이었죠. 3년 동안을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머리를 깎이는 신세가 됐어요. 목덜미까지 박박 말예요. 차라리 목을 잘라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통조림이 먹고 싶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사위 (분격하며) 저 말을 인정할 수 있어요? 네? 어떻게 저 말을 인정해요?
연대장 젊은 양반, 당신은 모든 사실을 터무니없이 의곡 설명하고 있구료. 우린 독일 사람인 것이오. 무엇보다도 독일적인 진실에 살아야 되는 것이오. 클라우제비츠는 말하기를, 진실을 존중하는 자가 언제나 가장 전진하고 있는 자라고 했소.
벡크만 옳은 말씀입니다, 연대장님. 거 참 훌륭한 말이군요. 저도 그런 진실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배부르게 잘 먹을 수 있다면 연대장님, 우리가 아주 배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새 셔츠를 입을 수 있고, 아니, 단추 하나 떨어진 데가 없고 누덕 누덕 기운 데도 없는 옷을 입을 수 있을 때 말이죠. 그리고 난로도 물론 피울 수 있고, 최소한도 찻주전자는 올려 놔야 하니까, 연대장님. 그리고 또 커튼쯤은 제치고 들어가 침상에 파묻힐 수 있어야죠. 아니, 피냄새가 아닌 아내의 살내음과 향수 냄새쯤은 맡을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연대장님, 그렇지 않아요? 진정 둘만을 위한, 마치 두 남녀를 소중한 내용처럼 보드라운 살결로 감싸주는 침대에서 즐길 수도 있어야죠. 침실은 늘 우리를 기다리며 언제든 하아얗고 보드라운 감촉으로 존재하고 말입니다. 그땐 나도 진실을 존중하는 자가 될 겁니다. 그 훌륭한 독일적인 진실 말입니다, 연대장님.
딸 저 사람, 미쳤나 봐요.
사위 술이 취했나 봐.
어머니 여보, 그만 중단 좀 시키세요. 저 사람 땜에 온통 몸이 떨려 죽겠어요.
연대장 (그저 덤덤하게) 내가 당신한테서 지금 받은 두드러진 인상은 당신도 이 별것 아닌 전쟁으로 인해 모든 관념과 이성이 혼탁해진 시시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오. 왜 장교가 되지 않았소? 그러면 제반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집도 여전히 있을 테고, 부인도 그대로 있을 거고, 당신까지도 딴 사람이 돼 있을 텐데. 그래, 왜 장교가 되지 않았소?
벡크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연대장님. 목소리가 너무 작기 때문이었어요.
연대장 그렇소, 당신은 마치 피로에 지친 사람들처럼 다 죽어 가는 목소리요. 그렇지 않소?
벡크만 맞았어요, 연대장님. 그런 거예요. 지치고 지치고 지쳐서 목소리가 안 나와요. 연대장님. 전 사실 잠도 못 자요. 밤마다 연대장님. 그래서 전 여길 온 거예요. 당신이 도움이 돼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연대장님, 이제 와서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편안히 잠들고 싶은 것뿐예요. 그 외에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편안한 잠, 전 깊이 잠들고 싶을 뿐예요.
어머니 여보, 여기서 자라고 해요. 불안해 죽겠어요. 이 사람 땜에 온 몸이 얼어드는 것 같아요.
딸 쓸데없는 소릴, 어머니도. 괜히 생떼를 부리러 다니는 사람예요. 염려할 것 없어요.
사위 정말 거만한데, 상관한테.
연대장 (점잖게) 얘들아, 나 하는 대로 가만히들 있어. 군인들 중에 이런 형을 난 잘 알아.
어머니 아이고 저런! 글쎄 서서 자나 봐요.
연대장 (위엄을 보이며) 자긴 뭘, 명상을 좀 하고 섰을 뿐이지. 나 하는 대로 가만히들 있어요.
벡크만 (좀 떨어져서) 연대장님!
연대장 그래 용건이 뭐요.
벡크만 (좀 떨어진 채) 연대장님!
연대장 왜 그러쇼? 나 듣고 있는데?
벡크만 (잠꼬대처럼) 듣고 계시단 말씀이죠? 그럼 됐어요, 연대장님. 듣고 계시다면 말예요. 실은 연대장님, 제가 꿈 얘길 해드릴려고요. 지금 말하려는 그 꿈을 전 매일 밤 꿨어요. 그러단 으례 어떤 비명에 깨곤 했지요. 근데 그 비명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아세요? 저 자신예요, 저 자신이란 말예요, 연대장님. 우습죠? 그 다음부터는 전 으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매일 밤을, 연대장님.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뜬 눈으로 지새우는 매일 밤을, 연대장님. 해서 전 지치고 말았어요. 이렇게 말할수 없이 피로해졌읍니다, 연대장님.
어머니 여보, 여기서 자게 해요. 무서워 죽겠어요.
연대장 (흥미있다는 듯이) 그럼 당신은 그 꿈 때문에 잠을 깬단 말이오?
벡크만 아닙니다. 제가 외치는 소리 때문이죠. 그 꿈 때문이 아녜요, 소리 때문에.
연대장 (여전히 흥미가 생겨) 결국 그 꿈이 그 소릴 내게 한 거 아니오?
벡크만 따지자면 그렇죠, 네. 그 꿈이 나로 하여금 그 소릴 내게 했어요. 그런데 문젠 그 꿈이 너무나 이상야릇하다는 겁니다. 그럼 얘기를 그대로 계속해보겠어요, 연대장님. 들어 보시겠죠? 여기 한 사람이 실로폰을 치고 있어요. 그는 광적인 리듬을 치고 있어요. 땀을 찔찔 흘리며. 살이 보통 찐 게 아니거든요. 그가 치는 실로폰은 또 굉장히 큽니다. 해서 칠 때마다 실로폰 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수선을 떨어야 해요. 글쎄 땀을 뻘뻘 흘리며. 순 살덩어리니 말예요. 한데 그게 또 아니란 말예요. 이상하게도 그건 땀이 아니란 말예요. 그는 피흘리고 있는 거예요. 냄새나고 거무스름한 그 피는 두 줄기로 그의 바지를 흘러내리는 거예요. 좀 떨어져서 보면 마치 장군의 옷장식처럼, 무슨 장군의 군복처럼 말예요. 아니, 글쎄 장군처럼, 다혈질의 비대한 장군처럼 말예요! 그는 퇴역 장군임에 틀림없어요. 양팔이 없으니 말예요. 그래서 그는 실로폰을 의수(義手)로 치고 있어요. 꼭 수류탄 손잡이 같은 의수로 말예요. 참 이상한 음악가도 다 있죠. 아니, 장군도. 더우기 그의 실로폰은 나무로 된 게 아니니 말예요. 전혀 아니죠. 연대장님, 믿어 주시겠어요? 꼭 믿어 주셔야 해요, 그것은 모두 뼈다귀로 만들어진 거예요. 연대장님, 제 말을 믿으세요, 그것은 모두 뼈다귀로 됐어요!
연대장 그대로 믿겠소. 뼈다귀로 됐다는 것을.
벡크만 (여전히 최면에 걸린 듯이, 음산하게) 그래요, 나무가 아니고 뼈로 됐어요. 희디흰 뼈들로 말예요. 두개골 덮개, 견갑골, 무명골, 그리고 고음(高音)을 위해서는 팔꿈치 뼈와 다리뼈. 그 다음으로 수없는 조골들이 조립돼 있고, 고음부(高音部)를 지나 맨 끝으로 손가락 뼈와 발가락 뼈, 그리고 이빨들이 있는데, 그래요, 제일 끝으로 이빨들이 있어요. 이러한 실로폰을 장군복을 입은 뚱뚱한 사람이 치고 있는 거예요. 이 장군 참 괴상한 음악인이죠?
연대장 참 우습소. 아주 참 괴상하군.
벡크만 그래요, 그런데 본론은 이제부터죠. 이제부터가 진짜 꿈입니다. 물론 인간들의 뼈로 된 실로폰 앞에서 말입니다. 그 거대한 실로폰 앞에 서서 장군은 그의 의수(義手)로 행진곡을 치기 시작합니다. <프러시아의 영광>이나 <바텐봐일러>를 말예요. 아니, 그는 대개 옛 전우들과 용사들의 행진곡을 치곤했죠. 연대장님, 기억나세요? 옛 전우들 말예요.
연대장 아, 물론, 물론 기억나지.
벡크만 그런데 그들이 지금 오는 거예요. 열을 지어가며 옛 전우들이, 옛 용사들이--- 공동묘지에서 일제히 그들은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하여 그들의 썩은 피의 악취는 하이얀 달에까지 기어오르고, 밤은, 밤은 고양이 똥같은 악취로 가득 찹니다. 내의에 묻은 월경처럼 빨갛게 물이 듭니다. 이러한 밤 속에서, 숨막히는 밤 속에서 우린 입맞출 아무런 임도 없이, 마실 브랜디도 없이 그대로 질식하는 거예요. 연대장님, 달에까지, 하얀 달에까지 썩는 피의 악취가 서리고 있어요. 사자(死者)들이 오고 있어요, 피에 절은 사자(死者)들이---
딸 저 사람 미치지 않았어요? 꼭 하이얀 달, 하이얀 달, 이라고만 말하잖아요?
연대장 (점잖게) 엉터리 소리요! 달이 노랗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고 있소. 마치 꿀빵처럼, 에그 프라이처럼 말요. 달은 언제나 노랗소.
벡크만 아, 아닙니다, 연대장님. 아녜요! 현대의 밤엔, 사자(死者)들이 걸어나오는 현대의 밤엔 야위고 창백한 달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그것은 개천에 빠져 죽은 임신한 처녀의 아랫배처럼 창백하면서도 동그래하죠. 연대장님 말씀은 틀렸어요. 현대의 밤엔, 사자(死者)들이 걸어나오는 현대의 밤엔 달은 그저 창백하고, 썩은 피의 악취가 마치 고양이 똥 냄새처럼 그 하이얗고 동그래한 달의 코를 찌를 뿐예요. 피, 피, 사자(死者)들은 썩은 붕대와 피에 절은 군복을 그대로 걸친 채 공동묘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간 갑자기 또 바다에서, 황야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숲에서, 폐허에서 일제히 그들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황야에서 그들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눈이 멀은 채, 이빨이 빠진 채,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외다리가 된 채 말입니다. 또 더러는 꿰져나온 내장을 그대로 너덜대며, 또는 두개골과 양손이 다 달아난 채, 먼 눈으로 악취나는 만신창이의 몸을 끌고 오는 것입니다. 무서운 파도에 밀려오듯 수없이 그들은 밀려오고 또 오는 것입니다. 한없는 고통의 물결을 헤엄치며 말입니다. 이렇게 밀려오는 사자(死者)들의 무서운 물결은 그들의 묘지의 언덕을 넘는 것이었죠. 그리고 온 세계를 휩쓸 듯 뒤덮어 버리는 것이었읍니다. 그런 다음 붉은 줄무늬 옷의 장군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벡크만 하사, 책임을 자네가 넘겨 받게, 적당히 분배하잔 말야!] 그 다음 전 텅 빈 웃음을 흘리는 듯한 무수한 해골들 앞에 서게 됐읍니다. 책임을 지고, 또 그것을 분배하기 위해 뼈다귀들 앞에 섰단 말입니다. 그러나 전우들은 일제히 거부하는 것이었읍니다. 턱뼈만 무섭게 흔들어댈 뿐 거부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장군은 기합으로 토끼뜀을 열 다섯 번씩 뛰게 하는 것이었죠. 그러자 그 엉성한 뼈들이 우두둑 소릴 내며 서걱대기 시작했읍니다. 허파에선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나기 시작했읍니다. 그래도 그들은 거부하는 것이었읍니다. 연대장님, 그것을 반항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노골적인 반항이지요?
연대장 (중얼거리듯) 물론이지, 노골적인 반항이오!
벡크만 그렇게 그들은 끝까지 분배를 거부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대오(隊伍)를 형성하고 나서 대화식(對話式) 합창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읍니다. 천둥처럼 무섭게 울려퍼지는 대화식 합창을 말예요. 연대장님, 그들이 무어라고 포효하는지 아세요?
연대장 (중얼거리듯) 모르겠소.
벡크만 그들의 포효는 벡크만을 부르는 소리였어요. 벡크만 하사! 벡크만 하사!---자꾸 벡크만 하사만 부르고 있었어요. 그 포효하는 소린 점점 커지며 마치 짐승들의 소리나 신(神)의 울부짖음같이 괴상하고 우렁찬 소리로 울려퍼지는 것이었어요. 하옇든 그 포효하는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커지며 밀어닥쳤단 말예요! 그 다음 그 포효의 소린 천지를 질식시키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전 외마디 소릴 치는 겁니다. 밤의 고막을 찢는 소릴 치는 거예요. 정말 무서워서---그리곤 전 잠에서 깨곤 했어요. 매일 밤을. 밤마다 그 뼈다귀들로 된 실로폰 연주회가 열리고, 매일 밤을 그 대화식 합창이, 매일 밤을 그 무서운 소리가 저의 잠을 깨우는 것이었읍니다. 책임을 그대로 제가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 때문에, 그래요, 제가 지고있는 책임 때문에 말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연대장님을 찾아온 거예요. 제발 단 하룻밤만이라도 푹 자고 싶어서, 단 하룻밤만이라도 푹 자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온 거란 말입니다. 단 하룻밤만이라도 편히 자고 싶어서요. 단 하룻밤만이라도---
연대장 그래 나에 대한 용건은 뭐요?
벡크만 그것을 당신에게 돌려주려고요.
연대장 그것이라니?
벡크만 (엄숙하게) 책임을 말입니다. 책임을 돌려 드리겠어요. 그때의 일을 아주 잊으셨읍니까? 연대장님, 2월 14일을 잊으셨어요? 고로독크에서의 일 말예요. 42도의 추위였죠. 그때 연대장님은 우리의 진지로 오셨읍니다. 그리고 [벡크만 하사!] 이렇게 저를 부르셨죠. 저는 큰 소리로 [네, 여기 있읍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그러자 당신은 털목도리에 고드름이 달린 채, 지금도 기억이 또렷또렷합니다. 당신은 아주 좋은 털목도리를 두르고 말입니다. 제게 이렇게 말하시는 것이었죠. [벡크만 하사! 자네가 이 20명에 대한 책임을 지게. 그리고 고로독크 동쪽 숲을 수색해서 가능한 한 적군을 생포하게, 알았나?] [네, 알았읍니다, 연대장님.] 저는 그때 그렇게 대답했읍니다. 그런 다음 우린 그곳을 떠나 수색전에 들어갔죠. 제가 책임을 지고 말입니다. 밤새껏 수색전을 벌이고 우리 진지로 되돌아오기까지 남은 사람은 모두 9명뿐이었읍니다. 물론 책임은 제가 지고 말입니다. 네, 그것뿐이에요, 연대장님.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요. 이제 전 푹 잠들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책임을 돌려 드려야겠어요. 전 이 이상 그것을 지고 있을 수가 없네요. 이젠 돌려 드려야겠단 말입니다. 연대장님.
연대장 친애하는 벡크만 씨,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구료. 전혀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벡크만 (침착하게) 그렇지만, 그렇지만 연대장님, 제 생각이 옳을 겁니다. 책임이란 한갓 낱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이 어두운 지구의 살갗을 밝고 따뜻한 인간의 살갗으로 변하게 하는 화학 공식도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의 공허한 관념어에 의해 피살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처에서 우린 책임으로 인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자(死者)들은 이제 말이 없읍니다. 신(神)도 아무런 대답이 없읍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者)들은 끝없는 물음을 던집니다. 매일 밤 그들은 질문하여 온단 말입니다. 연대장님.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그들은 어느 새 와서 묻는 것입니다. 미망인이, 한없는 슬픔에 잠긴 미망인들이 말입니다. 연대장님. 백발의 할멈 이 갈퀴 같은 손을 떨며, 젊은 미망인은 외로움에 지친 눈으로, 그리고 어린애들, 어린애들까지 말입니다, 연대장님. 그들은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듯 이렇게 묻는 것이었읍니다. [벡크만 하사, 우리 아빤 어디 있어요?][벡크만 하사님, 저의 남편들은 어디 있지요?][벡크만 하사, 내 아들은 어디 있는 거요?][벡크만 하사, 우리 형님은 어디 계신겁니까?][벡크만 하사님, 저의 약혼잔 어디 있어요?''벡크만 하사님, 어디 있어요?][어디 있어요?][어디 있는 거요?][어디 있는 겁니까?]---이렇게 밤이 샐 때까지 그들은 중얼거리듯 묻는 것이었죠. 부인은 11명이었읍니다. 제게 나타난 부인은 11명이었다는 말입니다. 연대장님. 그런데 연대장님, 당신은 몇 명이나 됩니까? 1천 명? 2천 명? 잠이 잘 오세요? 그러면 연대장님, 당신의 그 2천 명에다 저의 11명에 대한 책임쯤 첨가시켜도 괜찮겠군요. 연대장님, 그래 잠을 이룰 수가 있으세요? 밤이면 몰려드는 2천 명의 망령들을 못 보셨어요? 좌우간 그냥 살 수 있으세요? 아니, 단 1분이라도 그냥 살 수 있느냐 말예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연대장님. 그래 연대장님, 매일 밤 잠이 잘 오세요? 그래요? 당신은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저도 이젠 편안히 잠잘 수 있어요. 당신이 그것을, 책임을 기꺼이 돌려받겠다면 말예요. 저도 이제야 비로소 편안한 영혼의 잠을 잘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영혼의 안식, 그것뿐입니다. 그래요, 영혼의 안식이 필요한 거예요, 연대장님. 하나님이여! 이젠 편히 자겠읍니다!
연대장 (불쾌한 기분. 그러나 불쾌감을 감추느라고 일부러 웃음을 보이다간 더욱 기분이 좋은 것처럼 광적인 서글서글함으로 횡설수설한다) 여보쇼 젊은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 난 통 모르겠는 걸. 혹시 당신은 숨은 평화주의자 아니오? 약간은 퇴폐적인, 그렇지 않소? 그러나---(어설픈 웃음을 떠나 대뜸 프러시아 기질을 드러내며 껄껄 웃는다) 여보쇼, 사랑하는 친구! 당신은 꼭 생떼 쓰는 익살꾼 같소, 그렇지 않소? 그런데 어떤 익살꾼이란 말이오. 당신은 참 속속들이 아는 것도 많소! 아니, 이건 의미 심장한 유우머요! 알고나 있소? (웃음을 뚝 그치며) 지금 당신의 꼴이 얼마나 가관인지 알고나 있소? 이렇게 최고급으로만 걸치고 어디 무대에라도 서 보겠다는 거요? 그렇게 해 가지고 배우나 돼 보겠다는 거요? (모욕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는 벡크만의 꿈 얘기까지도 하나의 익살로만 알 정도로 상식적이고 완고한 군인이다) 그 둔중한 안경하며 우스꽝스런 머리---그 모든 것을 다 음악을 위해 가져오신 거겠지! (웃음) 아찔한 것은 그 백만 불짜리 꿈이렷다! 실로폰 음악에 맞춰 토끼뜀, 토끼뜀이라니! 그게 아니야! 당신은 배우가 되려는 게 틀림없어. 숭고한 인간 정신께서 웃고 계시오, 일그러진 웃음을 흘린단 말이오! 하나님 맙소사! (너무 웃어 눈물까지 글썽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난 처음 당신이 왜 그런 괴상한 물건을 걸치고 왔나 하는 것을 통 이해할 수가 없었소. 틀림없이 당신은 머리가 약간 돌았으리라 생각했소. 당신이 코미디언인 줄 미처 모르고 말요. 그건 그렇다 치고, 하옇든 친구, 당신은 우리에게 사실상 드릴 있는 만찬을 베풀어 줬소. 응분의 보상을 받아 마땅한. 그 보상이 무언지 알고 싶소? 내 운전수한테 가 보시오. 가서 따뜻한 물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수염도 깎으시오. 인간을 닮아 보시란 말요. 그리고 운전수가 내 헌옷 몇 가지를 줄 거요. 내 최대의 성의를 표시하는 거요! 제발 그 너덜너덜한 넝마는 집어치우고 내 헌옷으로 갈아입으시오. 아마 당신을 아늑하게 해줄 거요. 그런 다음, 사랑하는 친구, 이제부턴 인간이 되시오. 제발 이젠 인간이 되란 말이오!
벡크만 (눈을 번쩍 뜬다. 냉정을 잃은 채) 인간? 인간이 되라고요? 나보고 이젠 인간이 돼야 한다고요? (언성을 높여) 인간이 돼야 한다고요? 그런데, 당신들은 뭐죠? 인간이에요? 어떤, 무슨? 어때요? 당신들은 인간이란 말예요? 그래요?
어머니 (비명을 지르며 안절부절 못한다, 무엇이 엎어진다) 아녜요! 우릴 죽이려나 봐요! 아, 아니에요! (공포에 질린 비명, 가족들 서로 아우성이다)
사위 램프를 꼭 잡아!
딸 어쩌면 좋아요! 불이 꺼졌어요! 어머니가 램프를 밀어뜨렸어요!
연대장 조용히들 해라!
어머니 어떻게 불 좀 켜 봐!
사위 아니, 램프가 어디로 갔죠?
연대장 아, 여기 있지 않아.
어머니 아이고 이젠 살았어요, 불을 켰군요.
사위 그런데 그치가 없어졌군요. 그 친구 제가 보기엔 뭐 별다른 감정이 있어 서 온 것 같진 않더군요.
딸 하나, 둘, 세엣, 넷, 다 그래도 있군요. 접시만 깨졌어요.
연대장 제기랄, 그건 그렇고, 뭐 다른 건 안 없어졌어?
사위 아마 눈이 나빠서 그랬을 거예요.
딸 무슨 소릴 하세요! 럼 주(酒)병이 없어졌어요!
어머니 아이고 여보! 당신이 좋아하는 럼 주(酒)병이 없어졌대요!
딸 그리고 빵 반쪽도 없고요!
연대장 뭐, 빵이?
어머니 빵도 가져갔단 말야. 그 빵을 대체 뭘 하려고 가져갔을까?
사위 먹으려는 거겠죠. 안주를 하거나. 오히려 그 정도로 끝나길 다행이에요.
딸 아마 먹으려고 가져갔을 거예요.
어머니 그렇겠지, 그러나 그렇게 바짝 마른 빵을---?
(문이 삐걱 하며 닫힌다)
벡크만 (路上(노상). 병이 꼴랑꼴랑 소릴 낸다) 다들 옳은 말씀야. (점점 취기가 오른다) 복 있을진저, 추움을 모르는 자들이여! 아니지, 다들 옳은 말씀야! 사자(死者)들은 우리의 머리 위까지 울창한 숲을 이룬다. 어젠 천만, 오늘은 벌써 3천만. 내일은 또 그 위에 땅을 펴는 자(者)가 나타날 것이고, 그 다음주에는 10그램의 독으로써 7초 안에 전 인류를 살해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자가 생길 것이다. 이래도 우린 슬퍼해야 되는 건가? 복 있을진저, 나는 지금 우울하다. 언젠가는 다른 떠돌이별을 찾아 우린 떠나야 될 것이기 때문에. 복 있을진저! 다들 옳은 말씀야. 나는 지금 서커스 단으로 간다. 모두들 기막히게 옳은 말씀야. 연대장도 파안대소(破顔大笑)하셨겠다! 그는 내게 무대에나 서라고 했지. 이렇게 절뚝거리며 이 외투에다 이 쌍판을 하고, 아니, 구둣솔 머리에 이런 안경을 걸치고 말야. 연대장 말도 옳아, 숭고한 인간 정신께서 고소(苦笑)를 금치 못하신다고! 복 있을진저! 연대장님, 성수무강하옵소서, 그는 나를 구원했지. 만수무강하옵소서, 연대장님! 복 있을진저, 피의 만세! 사자(死者)에 대한 조소여, 만세! 나는 서커스 단으로 간다. 피와 사자(死者)들의 공연(公演)으로 대성황을 이룰 때 사람들은 일그러진 웃음을 흘리리라. 자, 술병아, 한 방울만 더 나와라, 복 있을진저! 술은 나의 구세주, 술에 익사해 버린 나의 이성(理性)이여! 복 있을진저! (만취되어) 술과 침대와 계집을 가진 자는 이 밤 최후의 단 꿈을 꿀 것이오! 내일이면 늦으리니! 이 밤 달콤한 노아의 방주를 짓는 자, 한잔 거나한 기분으로 노래하며 저 영원한 어둠과 공포의 물결 너머로 배를 저을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과 절망의 파도에 익사하리니, 술을 가진 자에게 구원 있을진저! 복 있을진저! 피의 연대장이여, 성수무강하소서! 책임도 만수무강하옵소서! 나는 서커스로 간다! 서커스 만세! 지상최대의 서커스여!
四景(사경)
(실내. 카바레 지배인. 술이 덜 깬 벡크만.)
지배인 (아주 설교조로) 여봐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예술을 위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줄 아는 젊은이일 것이오. 용감하고 비정적인, 젊은이 말이오.
벡크만 (혼자 중얼거리듯) 비정적인, 그렇죠, 아주 비정적인 청년이라야 되겠죠.
지배인 즉 혁명적인 청년이지. 우린 지금 20명의 도적을 만든 실러의 정신이 필요한 거요. 우리에겐 지금 그랍베나 하이네가 필요하단 말이오! 그러한 천재적 반역 정신이 필요하단 말이오! 아주 비정적이고 실제적이며 의지가 강한 청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음지까지도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예리한 눈으로 투시하는 그런 청년이. 그렇지, 그런 젊은이, 그런 세대(世代)가 필요한 거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랑할 줄 아는. 그들은 진실을 존중하고 계획과 이념이 확고하지. 뭐 심오한 지혜 같은 건 하등의 필요가 없는 거요. 무슨 완전한 것이라든지, 완성, 또는 정확성 따위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저 입으로 떠들거나 마음속으로 혼자 그렇게 외칠 수는 있지. 문제는 희망과 배고픔이란 말이오!
벡크만 (중얼거리듯) 배고픔, 그렇죠, 우린 배고픈 거예요.
지배인 그러면서도 젊은인 어디까지나 젊은이다와야 하고 정열적이고 용감해야 하는 거지. 특히 예술에 있어서 말이오! 내 경우를 생각해 보오. 난 17세부터 카바레 무대에 나섰소. 어른 행세를 하다, 결국 담배로 몸을 망쳤지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전위 정신이오. 고뇌에 찬 회색빛 오늘의 얼굴을 그려 낼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벡크만 (중얼거리듯) 네, 네, 언제든지 그려 내죠. 그 얼굴들을, 무기들을, 망령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려 내겠읍니다.
지배인 마침 얼굴 소리가 나왔으니 말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런 무시무시한 것을 얼굴에 걸치고 다니는 거요? 대체 어디서 난 거요? 누가 당신을 보면 무서워서 딸꾹질이라도 나겠소. 거 참 코 위에다 괴상한 것도 다 걸쳤소.
벡크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 저의 방독면 안경이죠. 군대에서 받은 거예요. 이 안경을 써야 방독면 안에서도 적을 알아보고 또한 무찌를 수 있는 거죠.
지배인 그러나 전쟁은 이미 끝나지 않았소! 오래 전부터 우린 평민의 생활로 들어가지 않았으냔 말이오! 그런데 여태까지 군복 차림으로 다니다니.
벡크만 그렇게 경솔한 속단을 내리심 곤란합니다. 전 그저께야 비로소 시베리아에서 돌아왔읍니다. 그저께냐고요? 네, 그저께라니까요!
지배인 시베리아? 아주 혼나지 않았소? 혼 좀 났겠군. 하여간 그놈의 전쟁 때문에! 그러나 안경, 그 안경쯤이야 다른 걸로 낄 수도 있었을 텐데?
벡크만 이런 거라도 전 가졌으니 다행입니다. 지금은 이 안경이 제게 수호신이죠. 이 안경이 없이는 전 아무런 구원도 기대할 수 없읍니다.
지배인 아니, 친구, 그래 그렇게 대우가 나빴소?
벡크만 어디요, 시베리아에서요?
지배인 물론 시베리아 말이지. 그 정떨어지는 시베리아! 그런데 보시다시피 나도 안경을 쓰고 있는데---문젠 머리가 좋아야 한단 말야! 나는 최고급 뿔테 안경을 셋씩이나 갖고 있거든. 황색빛은 작업용으로, 또 외출용으로 검고 묵직한 뿔테 안경 하나, 어떻소, 친구 양반, 멋있지 않소?
벡크만 그런데 전 당신에게 내뵐 만한 게 없군요. 당신이 하나 선물하신다면 모르지만. 보시다시피 이건 임시변통적인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멋대가리 없이 보이는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어떡합니까? 하나 주실 수 없으십니까?
지배인 여보쇼 친구, 거 무슨 망발이쇼? 그 중에 하나만 없어져도 나의 곤란함이란 말할 수 없소. 무엇에 대한 나의 착상과 활동도, 그리고 나의 기분 여하도, 모두 이 안경들에 의해 좌우된단 말이오.
벡크만 물론 그러시겠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언제나 화주(火酒)를 찾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술이 완전히 없어진다면 인생은 납과 같고 지루하며 우울하고 무미할 테지만. 제 말은 그래서 오히려 무대에선 이 무섭도록 흉한 안경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는 거죠.
지배인 거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벡크만 전 그렇게 생각해요. 훨씬 웃길 겁니다. 사람들이 저의 안경을 보는 순간 폭소를 금치 못할 거예요. 거기에다 이 머리와 외투까지 보면 말입니다. 글쎄 얼굴을, 내 얼굴을 머릿속으로 한 번 생각만이라도 해보세요! 모두 다 즐거워 온통 미칠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지배인 (어이가 없는 듯) 즐거워한다고? 아니, 즐거워한다고? 여보쇼, 웃음이 목구멍까지 나오다가 기절을 하겠소. 그들은 당신 꼴을 보면 공포에 질려 온몸에 식은땀까지 솟을 거요. 황천에서 온 망령을 보고 그들은 기겁을 해서 나자빠질 거요. 어디까지나 사람들은 참다운 예술을 즐기는 가운데 자신을 승화시키며 형성하려 들지 당신 같은 음산한 망령을 보려 들진 않을 거요. 아니지, 그렇다고 당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물론 천재적이고 특이하고 쾌활한 자라야 하지만. 긍정적인 친구, 긍정적인 인간 말이오! 괴테를 한 번 생각해 보쇼! 모짜르트를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요! 오를레앙의 소녀를, 리카르드 와그너를, 쉬멜링, 셔리 템플을 말요!
벡크만 그런 이름과는 전 거리가 멉니다. 전 그저 벡크만일 뿐입니다. 전철(前綴) B에 eckman이 붙어 있을 뿐이죠.
지배인 벡크만? 벡크만이라고? 카바레 같은 데선 단박 잊어버릴 이름이군. 혹시 다른 익명으로 일해 본적 없소?
벡크만 없읍니다. 이제 처음인 걸요. 풋나기예요.
지배인 (펄쩍 뛰며) 풋나기? 이봐요, 친구 양반, 세상 일이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오. 당신은 너무 경솔히 생각하는 것 같소. 나한테야 별 상관 없지만 대중은 경력을 중시한단 말이오! 우리 기업가들의 책임감을 그렇게 과소평가해선 안 되는 거요! 풋나기를 등용시킨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오. 대중은 이름을 찾는단 말이오!
벡크만 괴테, 쉬멜링, 셔리 템플---이런 식의 이름 말이겠죠?
지배인 맞았소. 이제 풋나기라든지 신인(新人), 무명자(無名者) 따위가 곤란한 걸 알겠소? 대체 지금 몇 살이나 됐소?
벡크만 스물 다섯 살입니다.
지배인 젊은 친구,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사회의 찬바람 좀 맞아 봐야겠소. 당신은 이제 겨우 인생 입구에 있단 말이오. 그래, 지금까진 뭘 했소?
벡크만 한 거 없죠. 전쟁에 나가 굶주리고 꽁꽁 얼며 총이나 쐈을 뿐, 전쟁 외엔 아무것도 한 거 없어요.
지배인 그 외엔 없다고? 그래, 그게 뭐요? 전쟁터에서도 자기의 인생을 개척해 나갔어야지. 무엇이든지 하란 말요. 그래서 이름을 떨치란 말요. 그러면 우리도 그땐 당신을 대환영할 것이오. 세상을 배워 익힌 다음 그때 다시 오시오. 남자처럼 돼 보란 말요!
벡크만 (조용조용하던 말투가 바뀌며 흥분하기 시작) 어디 가서 뭘 하란 말입니까? 어디 가 뭘 해요? 그런 기회를 주는 데라곤 한 군데도 없는데. 어딜 가도 풋나긴 풋나기였지 별 수 있읍니까? 러시아에서도 이런 따위의 찬바람을 맞아 본 일은 없어요. 다만 쇠조각, 그 뜨거운 쇠조각에는 수없이 맞아 봤어도. 어디 가서 어떻게 뭘 하라는 거예요? 어디가서 말예요? 결국 어디 가서든지 풋나기고 젖먹이지 별 수 있느냐 말예요?
지배인 그런 것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지 않소. 내가 당신들을 시베리아에 보낸 게 아니오. 내가 아니란 말이오.
벡크만 아니죠, 아무도 우릴 시베리아에 보내질 않았겠죠. 우리가 전부 자원해 간 걸로 돼 있으니까. 전부들 자원한 걸로 돼 있으니까 말예요. 여기저기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던 사람들도, 눈이나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사람들도 말예요. 그들은 그렇게 개죽음을 하게끔 돼 있었던 거겠죠. 그러나 저러나, 우린, 지금 어디를 가도 할 일이 없읍니다. 어디를 가도 말예요.
지배인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어디 한번 시작해 보시지. 저기 가 서시오. 하고 싶은 걸 해보시오. 너무 오래 끌진 말고. 시간은 금과 같으니까. 자, 어서 해보시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걸 한 번 시작해 보란 말이오. 더 없는 기회를 주는 거요. 무한한 행복으로 생각하시오. 내가 잘 경청해 주겠소. 무엇인지, 어디 발표해 보시오. 젊은 양반, 어서 내가 발표해 보라 하지 않소! (잔잔한 실로폰 음악, <용감한 병사의 아내>의 멜로디가 흐른다)
벡크만 (노래라기보다는 차라리 낭독에 가까운 소리, 멍청한 표정으로 단조롭게)
[노래시작]
작은 키이지만 용감한 병사의 아내---
나는 아직도 그 노랠 잊지 못하겠네,
그 감미로운 노래를.
그러나 사실 이젠 모든 게 똥만도 못하여라!
후렴---세계(世界)는 웃는데,
나는 울부짖네.
모든 것은 밤안개 속에 사라지고 달만이 이젠 남아
어둠을 사르며 눈물에 젖어라!
조국이라고 돌아와 집엘 가 보니 내 침대엔 벌써 딴 놈
이 있었네.
나에겐 자살도 허용되지 않아 이렇게 퇴짜만 맞고 밀려
다니는 신세여라!
후렴---세계(世界)는 웃는데---
한밤중이면 알지 못할 소녀가 와서
나에게 따뜻한 미소로 대하곤 했지만,
독일에 대해선 한 마디 말도 없었네,
독일에 대해선 한 마디 묻는 일도 없었네.
그러다 밤은 짧고 새벽이 되면
문간에 이미 누가 와 서 있었네,
외다리가 된 그녀의 남편이,
아침 네 시면 언제나.
후렴---세계(世界)는 웃는데---
할 수 없이 난 다시 밖을 서성거리고
그 노래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네,
창녀의 노래가
창녀의 노래가
부정(不貞)한 병사의 아내의 노래가.
[노래끝]
(실로폰 소리 서서히 사라진다)
지배인 (수다스럽게) 그렇게 나쁘진 않군, 별로 나쁘진 않은데. 퍽 대담한 데가 있소. 풋나기 치곤 퍽 발랄한 편이오. 그런데 친구 양반, 전체적으로 봐서 사상적인 면이 약하오. 그리고 단조롭소. 확 눈을 끄는 광채가 결여돼 있소. 물론 그것이 문학 작품이 아닌 줄은 아오. 그렇지만 거기엔 무드도 살아 있지 않은 데에다가 간통을 다루는 데 필수적 요소인 짜릿한 색정적 묘사가 결여돼 있소. 대중은 관능적인 자극을 원하지 풍자적으로 꼬집는 듯한 얘긴 싫어하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에 비해 퍽 대담한 데 있소. 윤리적인 면과 심오성 같은 것의 미흡을 앞에서 지적은 했지만 하옇든 풋나기 치곤 예상 외요! 그런데 너무 플래카드 같소, 너무 노골적인---
벡크만 (자신에게 다짐하듯)---너무 노골적인.
지배인 너무 목소리가 큰 데에다가 너무 직접적이오, 알겠소? 그리고 당신에겐 젊은이다운 요소가 결여돼 있소.---
벡크만 (자신에게 다짐하듯) 젊은이다운 요소가.
지배인 그리고 침착성과 긍지가. 우리 문학의 거성(巨星)괴테를 생각해 보시오. 괴테는 한때 그의 대공(大公)과 함께 전쟁터엘 간 일이 있소. 그리고 야영지 모닥불 앞에서 그는 오페레타를 썼소.
벡크만 (자신에게 다짐하듯) 오페레타를.
지배인 그것이 천재란 말이오! 그것이 우리와는 다른 위대한 점이란 말이오!
벡크만 물론 저도 그것은 인정하고도 남습니다. 정말 그것이 위대한 차이점이죠.
지배인 그러니 친구 양반, 한 일 년만 더 기다려 봅시다.
벡크만 기다리라고요? 전 배가 고프단 말입니다! 무엇이든 해야 돼요!
지배인 그렇소, 그러나 예술은 끝없는 연마를 통해서 성숙시켜야 하오. 당신의 것은 멋도 없고 경험 부족이라 안 되겠소. 너무 음울하면서도 노골적이오. 당신으로 인해 관객을 잃을 순 없소. 하옇든 관중에게 딱딱한 흑빵을 먹일 수는 없단 말이오.
벡크만 (자신에게 다짐하듯) 딱딱한 흑빵이라.
지배인 그들은 비스킷을 원하는데 동물의 사료 같은 것을 줄 수야 있소? 여하튼 더 참고 기다리시오. 그리고 스스로 끝없는 연마를 통해 자신을 성숙시키시오. 아까도 말했듯이, 그것이 퍽 대담한 데는 있어도 예술이 되기엔 아직 멀었소.
벡크만 예술, 예술?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까?
지배인 물론 진실이지, 그러나 진실만으로 예술이 될 수는 없단 말이오!
벡크만 (자신에게 다짐하듯) 아니죠.
지배인 더우기 그런 진실은 진취적이 못 되오.
벡크만 아닐 겁니다.
지배인 진실만 찾아 괜히 자신을 망치지나 마오. 모두가 다 진실만을 외치고 나온다면 우린 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아오? 대체 오늘날 누가 진실을 찾으려 들겠소? 누가? 이 엄연한 사실을 꼭 명심해 두시오.
벡크만 (괴로운 듯) 네, 네, 알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겨우 알겠군요. 네,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이죠. (목소리가 차츰 거칠어진다)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이에요! 진실은 진취적이 못 된다고요! 진실만 찾다가 자신을 망치고 말 뿐이라고요! 오늘날 누가 진실을 찾느냐고요! (큰 소리로) 네, 이제야 차츰 알겠군요. 그 엄연한 사실을 말입니다!
(벡크만, 인사도 없이 나간다. 문이 삐걱 닫힌다)
지배인 어이 젊은 양반! 왜 그렇게 감정적이쇼?
벡크만 (실의에 찬 소리로)
[노래시작]
술독이 동이 났네
세계는 회색
피부처럼
늙은 창녀의 피부처럼.
[노래끝]
엘베로 가려면 이 길로 곧장 가야지.
타인 벡크만! 거기 좀 서! 길은 여기야! 이 위야!
벡크만 그 길은 썩은 피의 악취가 나지. 나는 엘베 강으로 가야겠네. 엘베로 가는 길은 이 아래 있단 말야.
타인 벡크만, 이리 와, 그렇게 절망할 필욘 없잖아! 진실은 살아 있어!
벡크만 진실이란 도시의 유명한 창녀와 비슷하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래서 대낮에 길에서 만나게 되면 누구나 질색할 노릇이지. 재미는 밤에들 몰래 숨어서 보고 말야. 낮의 창녀란 창백하고 보기 싫고 귀찮을 뿐야. 창녀를 일생을 두고 사랑하는 예란 거의 없어.
타인 벡크만, 이리 오지, 어디든지 문은 열려 있어.
벡크만 그렇다, 괴테에겐. 셔리 템플이나 쉬멜링 같은 사람들에겐 말야. 그러나 난 그저 벡크만야. 안경도 우스꽝스럽고 머리칼도 우스꽝스런 벡크만야. 절뚝거리는 다리와 몸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외투를 걸친 벡크만일 뿐이지. 나는 전쟁의 사생아인 괴상한 익살꾼이며 어제의 망령이지. 내가 그저 벡크만인 이상, 모짜르트가 아닌 이상 문은 닫혀 있어. 두드려도 두드려도 난 밖에 서 있어. 아무리 두드려도 말야. 언제나 문을 두드리지만 난 언제나 밖에 서 있을 뿐이지. 거기다 풋나기라고 나를 받아주는 데는 어디에도 없고. 목소리가 너무 작다고 나는 장교도 못 되었어!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관중들이 무서워한대요, 한 가닥 양심은 남아 있어 밤이면 사자(死者)들 때문에 외마디 소리를 치게 되고, 그 때문에 연대장한테 들렀다가 인간이 되라는 설교만 들었지. 옷까지 얻어 걸치고.
[노래시작]
술독이 동이 났네
세계는 회색
피부처럼
늙은 창녀의 피부처럼.
[노래끝]
거리엔 썩은 피의 악취가 흐른다. 학살당한 진실로 인해. 그리고 모든 문은 닫혔다. 집으로 가야지, 허나 길마다 캄캄한 어둠이다. 단지 환한 길이라곤 엘베로 가는 길뿐. 아, 그 길만이 저리도 밝을 줄이야!
타인 거기 서! 벡크만! 네 길은 여기 있어. 이것이 집으로 가는 길이야. 벡크만, 넌 집으로 가야 해. 너의 아버지가 방 안에 앉아 널 기다리고 있지. 어머닌 벌써 문에 서 계시고. 너의 어머닌 너의 발걸음 소리를 단박 알아들을 거야.
벡크만 아니, 뭐라고! 집엘 가? 그래, 사실 난 집으로 가고 싶은 거야. 어머니한테로 가고 싶어. 결국 난 어머니한테로 가고 싶은 거야. 나의 어머니한테로---
타인 자, 이 길로 가자. 결국엔 가야 할, 마지막엔 누구나 찾게 되는 곳이지.
벡크만 그래, 집으로 가야겠어. 어머니가 계신, 나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五景(오경)
(집. 문. 벡크만.)
벡크만 우리집이 그대로 서 있구나! 문도 그대로 있고. 저 문은 나를 위해 있는 거겠지. 어머니도 거기 계실 거고, 내게 문을 열어 주며 들어가라고 하시겠지 우리집이 그대로 있다니!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릴까. 저것이 우리집 문이지. 아버지께선 아침 8시면 그 문으로 나오시고 저녁이면 그 문으로 들어오시지. 일요일만은 예외지만. 또 그는 문을 잠그러 갈 때나 열러 갈 땐 언제나 열쇠 꾸러미를 흔들며 무얼 혼자 중얼거리시지. 그렇게 매일을, 일생 동안을. 어머니도 역시 그 문으로 드나드시고. 세 번, 일곱 번, 열 번을, 일생을, 그 긴긴 생애를 말야. 부엌문은 여전히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낼까. 시계도 여전히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을 숨차게 재잘댈까 내가 앉았던 낡은 의자며, 내가 타고 놀던 자전거는 다 어떻게 됐을까. 여전히 그대로 있을까. 아버진 늘 큰 기침을 하셨지. 낡은 수도꼭지에선 언제나 트림 소리가 나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한창 바쁘실 땐 그릇들의 잴그락 소리도 굉장하더니. 그런데 저것이 우리집 문이라! 그 속에서의 생활이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늘 엎치락뒤치락이었지. 30년 간을 늘 그런 생활이었어. 그러면서 생활수준은 조금씩 나아져 갔지만. 그러자 이 문에도 한바탕 전쟁이 스쳐갔지. 그런데도 파괴된 흔적 하나 없이 그대로 건재하군. 그놈의 전쟁이 눈이 멀었을까. 하옇든 저기 나를 위한 문이 있어. 나를 들여보내 주겠지. 다시는 난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없을거야. 집 안에서 지내게 될 거야. 그래, 저 문이 칠은 벗어지고 편지통은 찌그러져 있던 우리집 문야. 또 그 문엔 흔들거리는 초인종의 하얀 단추와 놋쇠로 된 문패도 달렸었지. 어머님은 매일 아침 벡크만이라 새겨진 그 문패를 닦으셨어. 아니, 그런데, 놋쇠 문패가 없는 게 아냐? 도대체 놋쇠 문패가 어디로 갔을까? 누가 우리집 문패를 훔쳐간 건가? 아니, 누런 종이 카드는 왜 붙었지? 이건 또 무슨 생똥 같은 이름이야? 여기 크람머가 살다니! 이 문에 왜 우리집 이름이 없지? 30년 동안이나 이 문에 붙어 있었는데 그렇게 간단히 남의 이름을 떼어 버리고 딴 것을 갖다 붙일 수 있나? 도대체 우리집 문패는 어디로 간 거야? 다른 집은 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유독 왜 벡크만만 없어진 거지? 30년 동안이나 벡크만의 이름이 붙었던 자리에 그렇게 간단히 딴 이름을 못 박아 버릴 수 있어! 대체 크람머란 누구야! (초인종을 누른다. 문이 삐걱 하며 열린다)
크람머 부인 (음산한 인상, 억지 친절을 보이며) 무슨 일이시죠!
벡크만 네, 안녕하십니까, 전---
크람머 부인 무슨 일인데요?
벡크만 저, 저의 집 놋쇠 문패가 어디 갔죠?
크람머 부인 저의 집 문패라니요?
벡크만 이 문에 달렸던 것 말입니다. 30년 동안이나---
크람머 부인 전 모르겠어요.
벡크만 그럼, 저의 부모님들은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크람머 부인 누군데, 당신이 대체 누구신데요?
벡크만 벡크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태어났죠. 이 집이 우리집이에요.
크람머 부인 (점점 더 뻔뻔스러워진다) 틀리신 말씀인데요. 이 집은 우리집예요. 여기서 당신이 태어난 거와 저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하옇든 이 집이 당신네 집은 아녜요. 우리집이란 말예요.
벡크만 그래요? 그럼 저의 부모님들은 어디 계십니까? 어디들 사시냐 말예요!
크람머 부인 당신이 벡크만 씨네 아드님이란 말이죠? 벡크만이시라고 그러셨죠?
벡크만 물론이오. 전 벡크만입니다. 이 집에서 태어났죠.
크람머 부인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옇든 이 집은 우리 거예요.
벡크만 그럼 부모님들은? 저의 부모님들은 어디로 갔어요? 어디들 계신지 말해 줄 수 없습니까?
크람머 부인 그걸 모르신단 말예요? 금방 그분들의 아들이라고 말하고서, 아니, 그것도 모르신다면 어떻게?
벡크만 하옇든 그분들은 어딨어요? 노인네들 말예요! 여기서 30년 간을 살으셨는데 갑자기 여기 없다니! 어떻게 된 일이죠? 그분들은 어디 계시냐 말예요!
크람머 부인 내가 아는 바론 카펠레 5번지예요.
벡크만 카펠레 5번지라니요!
크람머 부인 (할 수 없다는 듯이) 올스돌프에 있는 카펠레 5번지 말예요. 올스돌프를 아시겠어요? 공동 묘지예요. 올스돌프가 어딨는지 아시겠어요? 훌스빗텔 옆에 있어요. 그 위가 함부르크 발 기차의 종착역이죠. 홀스빗텔 하면 감옥소, 알스터돌프 하면 정신병원, 올스돌프 하면 묘지로 유명하죠. 당신의 양친은 거기에 있어요. 거기서 살고 있어요. 그리로 떠나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알고 싶으세요?
벡크만 그래, 거기서 뭘 하신단 말입니까?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사셨는데. 어딜 가야 자초지종을 알 수 있죠? 전 3년 동안이나 시베리아에 있었어요. 3년 동안이나 말예요. 왜 돌아가셨을까요? 바로 이 집에 살고 계셨는데 제가 돌아오기도 전에 돌아가실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모두들 건강엔 별 이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해수병이 있었을 뿐. 늘 기침을 하셨죠. 어머닌 냉증이 좀 있었을 뿐예요.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 사람이 죽진 않아요. 그런데 어째서 돌아가셨을까요?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렇게 허무하게 말 없이 가시다니!
크람머 부인 (퍽 친숙한 듯이, 수다를 떨며) 아마 효자이신가 보죠? 아들 치곤 당신은 괴상한 아들이에요. 하옇든 지난 일을 깨끗이 잊도록 하세요. 시베리아 3년 간의 일도 역시 당신에겐 농담으로 넘길 정도의 일이 아니겠지만. 몸으로 딩굴고, 무릎으로 기고,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옇든 당신의 부친 벡크만 씨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어요. 당신도 짐작이 가겠지만 제 3제국의 희생물이 된 거죠. 그런 노인네를 무엇 때문에 군에서 붙잡아 뒀는지. 유태인을 못 살게 굴었어요. 그러니 유태인은 당신 아버질 벼르고 있을 밖에요. 결국 그것이 더 당신 아버지의 분노를 사고 말았어요. 모든 유태인들을 자기가 손수 팔레스티나로 추방하겠다고 호통 호통을 쳤으니까요. 방공호 속에서도 공습이 있을 적마다 오히려 유태인에게 저주를 퍼부었어요. 너무 과격했지요, 당신 부친은 나찌스의 화려한 희생물이 된 거죠. 그와같이 나찌스가 판을 치던 시대가 지나가자 당신 부친에 대한 유태인의 증오가 노골화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유태인을 못살게 군 때문이죠. 왜 입을 못 다물고 계셨는지 부친 벡크만 씨는 정말 약간 과격했어요. 그렇게 세상이 뒤바뀌자, 유태인들은 당신 부친이 아직도 어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나를 뒤로 알아봤지요. 물론 이젠 아무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자, 그럼 당신 코에 걸친 그 희귀한 안경에 대해 해보세요. 무엇 때문에 당신은 얼굴에다 그런 울타릴 쳤죠? 뭐 그게 미래형 신식 안경이라는 건 아니겠죠? 다른 건 없나요? 젊은 양반---
벡크만 (얼른) 없읍니다. 이건 방독면 안경이죠. 군대에서 얻은 거예요.
크람머 부인 나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 같으면 그런 걸 못 쓰고 다닌다는 거죠. 집구석에만 붙어 있으면 모를까. 글쎄, 우리 아버님한테 어울릴까요. 그러나 우리 아버님도 당신을 보신다면 대뜸 [이봐 젊은이, 그 다리의 난간 같은 것 좀 얼굴에서 제발 걷어 치우게!] 이러실 거예요.
벡크만 아까 얘기나 계속하세요. 아버지에 대한 얘기 말예요. 계속해 주세요. 몸이 떨리는군요. 크람머 부인, 어서 계속해 주세요!
크람머 부인 더 얘기할 것도 없어요. 너무나 뻔하지 않아요? 퇴직금도 못 타고 떨려난 건 물론이고, 거기다 집마저 압수당했죠. 간신히 남비 정도를 가질 수 있었을 뿐. 참 비참한 일이었어요. 노인네들의 여생마저 그대로 두질 않았으니까. 더 이상 살게 두질 않았단 말예요. 그분들도 더 살고 싶어하질 않았고. 참, 마지막 판엔 나찌스 당을 스스로 탈당까지 했는데도. 이 정도가 당신의 부모님에 대한 자초지종의 전부예요.
벡크만 그분들이 스스로 어떻게 했다고요?
크람머 부인 (괜히 열을 띠며) 탈당을 했어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그랬지만 당신의 양친은 보복을 받고야 말았어요. 어느 날 아침 당신의 부모님들은 부엌에서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뒤틀려 있었죠. 저의 아버님은 그때의 일을 하도 끔찍해서 볼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우리까지도 한 달 동안이나 그 가스 때문에 속이 뒤집혀서 혼났어요.
벡크만 (실성한 사람처럼, 그리고 협박하듯이) 그만 문을 닫으세요. 그게 좋겠어요. 빨리 문을 닫으세요. 어서 들어가 문을 잠궈 버리세요. 빨리 문을 닫아 버리라고 그랬잖아요. 어서 닫아요!
(크람머 부인 신경질적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는다. 삐걱하며 닫힌다)
벡크만 (실성한 사람처럼) 이젠 정말 참을 수가 없구나! 참을 수가 없어! 견딜 수가 없어!
타인 벡크만, 그게 아냐! 참을 수 있어!
벡크만 아니야, 참는 데도 한도가 있어! 꺼져! 너 같은 모순적인 긍정자는 꺼지란 말야!
타인 아니야, 벡크만, 이 윗길로 가자. 자, 이리 와, 벡크만. 넌 아직도 앞길이 창창해. 어서!
벡크만 넌 순 돼지 같은 놈야! 물론 다른 사람들은 잘들 참겠지. 그 거리에선 잘들 참으며 그대로 살아갈거다. 수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살인을 범하면서도 사람들의 숨소린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자(者)도 없을 거야. 잘들 참겠지. 그러나 두 주검, 오늘 이 두 주검을 해명해줄 자는 누구란 말야!
타인 조용히 해, 벡크만. 이리 와, 어서!
벡크만 그 두 주검이 너의 부모였더라면 너도 가만힌 못있겠지. 노인네라고? 하필 가스로 돌아가시다니 그 가스 때문에 한 달 동안이나 속이 뒤집혀서 혼났다고?
타인 벡크만, 내 말이 안 들려? 이리 와, 너를 위한 길이 기다리고 있어.
벡크만 그래, 안 들린다. 그 거리에선 난 또 울부짖고 싶고 살인을 범하게 될 뿐야. 이 비참한 자식은 그저 또 살인이나 할 수 있을 뿐이란 말야! 난 엘베의 꿈 깊숙이 묻혀 편안히 잠들고 싶어, 알겠어? 아무리 외쳐도 듣는 사람 하나 없지. 이 아래에서도, 이 위에서도 말야. 두 노인네가 올스돌프 묘지로 가버렸는데도. 어제는 2천 명, 그저께는 7만, 내일은 또 4천 또는 6백 만 명이 될지 모르는데도. 그렇게 세계의 공동묘지로 떠나는데도 말야. 그런데 그 이유를 누가 물어도 들어 주는 이라곤 없지. 이 아래의 인간의 귀도, 이 위의 신(神)의 귀도. 신(神)은 곤히 잠들고, 우리에겐 그저 사라지는 나날이 있을 뿐야.
타인 벡크만! 벡크만! 내 말이 안 들리나? 넌 지금 모든 걸 방독면 안경을 통해 보는 거야. 모든 것을 의곡시켜 보고 있어. 잘 들어 봐, 벡크만. 이런 일도 그전엔 있었지. 알래스카에서 두 소녀가 동사(凍死)한 기사를 케이프 타운의 어느 신문 독자가 읽고도 깊은 한숨을 짓던 때가 말야. 한땐 보스톤의 어린애 유괴 사건을 함부르크의 어느 사람이 읽고 밤잠을 못 이룬 적도 있어. 파리에서 한 기구(氣球)조종사가 떨어져 죽은 것을 샌프란시스코에서까지 슬퍼하던 때도 있었단 말야.
벡크만 그전에라니, 한때라니, 그게 언제란 말야! 몇 천년 전이란 말야? 오늘날은 수천 수백 만씩 죽어가고 있어. 그래도 이젠 슬퍼하는 사람도 잠 못 이루는 사람도 없지. 침대 하나만 있으면 그들은 깊숙이 잠들어 버린단 말야. 그들은 서로 타인(他人)들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묵묵히 오갈 뿐야. 꾸부정한 몸에, 깡마르고 꺼칠한 얼굴에,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야. 그들의 배는 숫자로 채워지고 있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숫자로 말야. 숫자란---
타인 벡크만, 내 말 좀 들어 봐.
벡크만 듣고 있어. 왜 숨이 넘어가나? 그 숫자란 하도 길어서 헤아릴 수도 없지. 즉, 그 숫자란---
타인 내 말을 들어!
벡크만 듣는다니까! 그 숫자란 사자(死者)들의 숫자지. 유탄에 맞아 죽은 사람, 파편에 맞아 죽은 사람, 얼어 죽은 사람, 폭탄이 터져 죽은 사람, 굶어 죽은 사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실종된 사람---그 밖에도 뭐라 이름 할 수 없는 죽음으로 끝이없지. 우리의 손가락으론 도저히 계산이 불가능한 숫자란 말야!
타인 벡크만, 내 말 좀 들어. 너를 위한 길이 기다리고 있어. 자, 어서!
벡크만 아니, 너, 넌 어디로 가겠다는 거야? 우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여태 그 자리야? 땅도 그대로 그 땅인가? 우리의 피부가 혹시 짐승의 가죽으로 변하진 않았어? 혹시 우리 몸에도 짐승의 꼬리나 맹수의 이빨이, 아니, 맹수의 발톱이 솟아나진 않았어? 지금도 우린 두 다리로 걷나? 어이, 이봐, 이 길이 어느 길이지? 어디로 가는 것이지? 대답해 봐, 타인(他人)이야, 긍정자야! 대답해봐! 자칭 영원한 긍정자야!
타인 벡크만, 넌 지금 너 자신을 기피하고 있어. 자, 이 위로 와. 너의 길은 여기야. 길은 밑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고, 위로 올라가는 길도 있게 마련이지. 길이 내리막길이라고, 너무 어둡다고, 그렇게 넉두릴 늘어놀 필욘 없잖아. 길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고, 어디든지 가등은 있게 마련야. 태양도, 별도, 여자도, 창문도, 가등도, 활짝 열려진 문도 어디든지 있어. 불과 몇 분 동안을 안개 속에 서 있다고 잠깐 밤의 어둠 속을 외로이 서성거린다고 그렇게 소란을 피울 필욘 없어. 다른 세계가 널 기다리고 있지. 자, 이리 와, 기운을 내! 저 달콤한 실로폰 소리가 안 들리나? 안 들려?
벡크만 안 들리냐고? 그게 나를 위한 대답의 전분가? 그게 쓰러진 수백 만의 사자(死者)들에 대한 해답인가? 기껏 그거야? 들리지 않느냐고? 자신을 기피한다고? 거리는 회색 안개 속에 심연으로 빠져 들고 있는데. 이렇게 우린 중도에서 추운 밖을 서성거리는데. 굶주리고 피로한 몸으로 끝없이 절뚝거리며 울부짖는데 말야! 엘베 강마저도 상한 음식처럼 나를 뱉아 버렸지. 엘베마저도 나의 단점을 그대로 두질 않았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거겠지? 살아야 한다고? 그렇다면 대답해 봐. 무엇 때문에야? 누굴 위해서야? 그래 무엇을 위해서야!
타인 너를 위해서지. 너의 일생을 위해서야! 너의 길이 기다리고 있어. 가도가도 가등(街燈)이 마중나오는 길 말야. 하나의 가등과 가등 사이의 어둠을 못 참고 그렇게 불안에 몸서리칠 필욘 없잖아. 가등을 보고 싶나? 어서 이리 와, 벡크만, 다음 가등까진 얼마 남지 않았어.
벡크만 나는 너무 굶주렸어. 춥고 떨린단 말야. 난 이제 서 있을 수도 없어. 피로해 죽겠어. 문을 열어 줘. 난 배고프단 말야. 길은 캄캄하고 문마다 입을 다물었어. 긍정자, 이젠 그만 좀 떠들고 입 좀 닥쳐라. 난 집이 그리워, 어머니가 그리운 거야! 흑빵이 먹고 싶은 거야! 비스킷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한 조각의 흑빵과 따슨 양말 한 켤레만이라도 내게 주실 수 있었던들, 아니, 연대장만큼만이라도 따슨 방 안에서 배부를 수 있었던들 나도 푹신한 의자에 묻혀 도스토예프스키나 고리키를 읽고 있었겠지. 따뜻한 방에서 배부르면서도 타인(他人)의 고뇌를 읽으며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훌륭한 일이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지금 눈이 자꾸 감기고 있어. 난 지금 너무나 너무나 피로한 거야. 뒤통수까지 찢어지는 개의 하품이 나오고 있어. 난 이젠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는 거야. 피로해 죽겠어.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단 말야. 한 발자국도 더는 걸어걸 수가 없어. 단1밀리미터도---
타인 벡크만, 쓰러지지 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널 기다리고 있어. 자, 벡크만, 어서!
벡크만 실은 도스토예프스키도 읽고 싶지가 않지. 나 자신의 불안과 고통으로도 벅차. 난 못 가겠어. 난 너무 피로해. 안 되겠어, 난 못가겠어. 난 그저 편안히 잠들고 싶을 뿐야. 나의 문 앞에서, 우리집 문간 계단에서 편히 잠들고 싶단 말야. 이 모든 집들이 다 무너지는 날까지, 다 삭아서 부서지는 날까지. 아니, 제2의 창세기가 도래하는 날까지 말야. 난 지금 이 세계의 긴긴 하품처럼 피로한 거야.
타인 기운을 내, 벡크만. 살아 봐!
벡크만 이러한 삶을?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낫지.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어. 무슨 소리냐고? 너나 먼저 가. 이 작품은 틀림없이 끝까지 멋있게 상연될 테니깐. 종막이 내리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지. 우리가 어느 컴컴한 골목에 있는 것으로 끝날지, 어느 여자의 보드라운 젖가슴 위에 있는 것으로 끝날지. 궂은 날씨만 계속되는 이 5막 극이 말야!
타인 벡크만, 나를 따라와. 인생은 살 만한 거야. 함께 살아 보자!
벡크만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인생은 이런 거야.---
1막--- 회색 하늘. 한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한다.
2막--- 회색 하늘. 그는 다시 고통을 당한다.
3막--- 어둠에 내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4막---점점 어두워진다. 저만치 문이 하나 보인다.
5막---밤이다, 깊은 밤. 그리고 문은 닫혀 있다.
그는 밖에 서 있다. 문 밖에 서 있는 거지. 엘베 강가에 서 있는 거지, 세느 강가에, 볼가 강가에, 미시시피 강가에도 서 있는 거지.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멍청히 서 있는 거지. 그러다간 갑자기 물에 뛰어든다. 그리고 수면(水面)엔 잠시 동그란 파문이 일다간 사라지고 막은 거기서 내리지. 그런 다음 수중(水中)에서는 물고기와 물벌레들의 환영 파티가 열리지. 이렇단 말야! 그래도 사는 게 낫다고? 좌우간 난, 난 더 이상 못 가겠어. 나의 하품이 온 세계를 찰락이고 있어!
타인 벡크만, 자면 안 돼! 넌 더 가야 돼.
벡크만 그 길도 나의 이 피로한 발걸음엔 못 당할 거야. 왜 그렇게 자꾸 가는 거지? 난 이젠 정말 못 따라가겠어. 정--말--, 알--겠--어--? (긴 하품)
타인 벡크만! 벡크만!
벡크만 으음---(잠이 든다)
타인 벡크만, 정말 자는 거야?
벡크만 (잠 속에서) 응, 난 자고 있어.
타인 벡크만, 어서 눈을 떠! 살아야 해.
벡크만 아냐, 난 이제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난 곧 꿈을 꿀 거야. 무지하게 아름다운 꿈을.
타인 또 꿈을 꿔선 안 돼. 벡크만, 넌 살아야 해.
벡크만 살라고? 아 저런, 난 곧 죽는 꿈을 꿀 텐데.
타인 일어나란 말야! 살아야 해!
벡크만 아냐, 난 이젠 일어날 수도 없어. 나는 곧 아름다운 꿈을 꿀 거야. 나는 지금 거리에 누워서 죽어가는 거야. 다리도 팔도 허파도 이젠 말을 안 듣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아. 벡크만 전체가 말을 안 듣는 거야. 아주 노골적인 명령 불복이지. 벡크만 하사는 이젠 말을 안 들어. 미쳤냐고?
타인 일어나, 벡크만, 더 가야 돼.
벡크만 더 가자고? 밑으로 말이지? 더 밑으로 말야! 불어로 bas라고 하지. 죽는 게 이렇게 감미로운 줄은 미처 몰랐어. 죽음을 난 굉장히 견디기 힘든 것으로 알았지. 한 번 간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어. 그것은 죽음을 다시 맛보기 싫어서지. 그런데 죽음이란 굉장히 감미로운 것 같은데, 삶보다 말야. 난 벌써 하늘에 있는 기분야. 별다른 감정도 의식도 없어. 그저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일뿐야. 근데 저기 웬 노인네가 오는군, 사랑하는 하나님 같은데. 그렇군, 사랑하는 하나님처럼 생겼어. 근데 너무 신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데에다가 울상이군. 정말 사랑하는 하나님일까?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이세요?
神(신) (울상이 되어) 그렇단다, 내가 그 사랑하는 하나님야. 나의 불쌍한 어린 양아.
벡크만 아---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이군요. 그런데 사랑하는 하나님, 누가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인간인가요? 혹은 당신 자신이 그랬나요?
神(신) 인간들이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였어.
벡크만 거 이상하군요. 거 참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읍니다. 당신을 그렇게 부르다니. 그런 사람들은 아마 부러울 것 하나 없이 행복한 사람들이었거나,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항상 양지(陽地)에 살면서 사랑하고 배부르고, 하여 더 없는 만족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거나, 어두운 밤 속에서 한없는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나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사랑하시는 하나님!'하고 불렀을 거란 말예요! 그러나 난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못 부르겠어요. 난 당신이 뭘 사랑한다는 건지 모른단 말예요!
神(신) 나의 어린 양, 불쌍한---
벡크만 사랑하는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언제 사랑하셨죠? 한 살 난 제 아이가 폭탄에 날라갔을 때도 사랑하고 계셨어요? 그 애가 숨이 끊어질 때도 사랑하셨나요? 사랑하는 하나님, 그랬나요?
神(신) 내가 그 애를 죽인 건 아니야.
벡크만 물론 아니겠죠. 당신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뒀을 뿐이죠. 그 애가 비명을 지를 때, 폭탄이 터질때, 당신은 귀를 막고 있었을 뿐이죠. 사랑하는 하나님, 그럼 폭탄이 터지던 그때에 당신은 어디 계셨읍니까? 그럼 당신은 내가 인솔하고 나간 수색대원이 9명밖에 안 남았을 때도 사랑하고 계셨나요? 사랑하는 하나님께선 11명의 생명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군요. 당신은 그때 거기 계시지 않았어요. 분명 11명은 그 포위된 숲에서 당신을 큰 소리로 찾았을 거지만 거기에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하나님, 당신은 스탈린그라드에 있을 적에도 사랑하셨나요? 어떻게? 도대체 당신은 언제 사랑하셨다는 겁니까? 하나님, 언제예요? 언제 우리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라도 하신적이 있으세요?
神(신) 이젠 나를 아무도 안 믿는 걸. 자네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야. 나는 믿는 사람이 없는 신(神)일세. 이제 그들은 나에 대해서는 무관심야. 자신들을 문제삼을 뿐이지.
벡크만 하나님께서도 신학(神學)을 연구하셨군요? 누가 누구를 문제삼는다고요? 당신도 참 낡았군요. 하나님, 당신도 낡았어요. 당신까지도 한없이 늘어만 가는 사자(死者)들과 그 불안엔 못 당하시는군요. 우리도 이젠 당신을 알 필요가 없어졌어요. 당신은 이제 동화책에서 나오는 신(神)이에요. 오늘날은 새로운 신(神)을 요구하고 있어요. 아시겠어요? 우리의 불안과 고뇌를 위해서는 새로운 신(神)이 필요한 겁니다. 아주 새로운 신(神)이. 우린 당신을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잿더미가 된 폐허에서, 폭탄이 터진 웅덩이 속에서, 무수한 밤을 말입니다. 당신을 불렀죠, [하나님!] 하고. 우린 당신을 향해 끝없이 울부짖었읍니다. 저주도 했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하나님은 그때 어디 계셨죠? 오늘 저녁은 또 어디 계신 겁니까? 우릴 배반하신 겁니까? 고색창연한 당신의 교회에 숨어 버리신 겁니까? 저 깨어진 창문 사이로 터져나오는 우리의 울부짖음이 안 들리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神(신) 나의 아이들이 나를 배반했지. 내가 그들을 배반한 게 아냐. 당신들이 날 배반했어, 당신네들이. 난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신(神)이 됐어. 당신들이 나를 배반한 거야.
벡크만 영감님, 어서 꺼지시죠. 당신은 나의 죽음에 방해만 될 뿐이에요, 꺼져요! 당신에겐 질질 짜는 신학밖엔 없어요. 말을 그렇게 슬슬 돌리고만 있지 말아요. 누가 누구를 문제삼는단 말예요? 누가 누구를 배반했단 말예요. 너희들이 나를?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 당신은 죽었어요. 살아 있으란 말예요. 추운 밤 정적 속에서 외로움과 굶주림에 허덕일 때 당신은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란 말예요. 어서 꺼져요, 당신의 신학은 자기 기만과 위선 뿐이에요. 꺼져요, 당신은 질질 짤 줄이나 아는 노틀이란 말예요!
神(신) 어린 양, 나의 불쌍한 어린 양.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난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벡크만 물론 그러시겠죠. 별 도리가 없으시겠죠. 그러니 우리도 이젠 당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당신은 낡았어요. 신학은 당신을 노틀로 만들고야 말았어요. 당신의 바지는 너덜너덜 떨어지고, 당신의 구두창은 구멍이 숭숭 뚫어지고, 당신의 목소린 모기 소리가 됐단 말입니다. 이 시대의 천둥 소리에 비해 당신의 목소린 너무도 작단 말예요. 우린 당신의 소릴 들을 수가 없어요.
神(신) 그래, 아무도 못 들어, 아무도. 너희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니까.
벡크만 그러니 당신의 목소리가 작긴 작다는 말씀입니까? 당신의 혈맥 속엔 위선의 피가, 아니, 신학적인 위선의 피가 더 많다는 겁니까? 영감님, 어서 꺼지세요. 신학이 당신을 교회에 묻어 버렸으니 당신의 소리가 우리 귀에 들릴 리 없지요. 어서 가세요. 그러나 이 말만은 명심하고 가세요. 당신이 모든 책임을 회피해 버린 이상, 지금 가다 보면 당신은 불안한 어둠의 골짜기 앞에서 구덩이나 새옷 한 벌, 또는 어두운 숲을 만나게 될 거예요. 길은 험준하고 어둡고 해골 천지인, 영감님, 가다 넘어지지 마세요. 정신 바짝 차리세요. 그런 다음엔 잠이나 자는 게 좋겠죠, 영감님. 잠이나 실컷 주무세요. 안녕히 가세요.
神(신) 새옷 한 벌, 또는 어두운 숲이라고? 나의 불쌍한, 불쌍한 어린 양, 사랑하는---
벡크만 어서 가기나 하세요, 잘 가세요.
神(신) 나의 불쌍한, 불쌍한---(사라진다)
벡크만 아주 난감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군. 우린 모두 밖에 서 있는 거야. 신(神)까지도 밖을 서성거리지. 그에게 문을 열어 주는 자는 없거든. 죽음, 결국 죽음만이 우리를 위한 출구(出口)인 거야. 난 그리로 가는 도중에 있지.
타인 죽음의 문을 기다릴 필욘 없어. 삶은 수천 개의 문을 가지고 있단 말야. 죽음의 문 뒤엔 더 나은 게 있다고 누가 보장하던가.
벡크만 그럼 삶의 문 뒤엔 무엇이 있다는 거야?
타인 또 삶이 있지. 그게 삶 자체란 말야! 일어나 봐, 더 가야 돼.
벡크만 난 더는 못 가겠어. 허파에서 나는 이 [크흐--크흐--]하는 소리가 안 들려?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어.
타인 넌 갈 수 있단 말야. 너의 허파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벡크만 나의 허파에서 지금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말야. 무슨 소리가 이렇지? 들어 봐. [크흐--크흐--]하는 소릴. 무슨 소리가 이렇지?
타인 길을 쓸고 있는 빗자루 소리야. 여, 여기 도로 청소부가 오고 있단 말야. 지금 우리 옆을 지나가고 있어. 빗자루가 포도 위에서 천식병자의 소릴 내고 있어. 네 허파에서 나는 소리가 아냐. 안 들리나? 그 소린 빗자루가 내는 소리란 말야. 잘 들어 봐, 빗자루가 [크흐--크흐--]하는 소릴 내고 있어.
벡크만 도로 청소부의 빗자루 소리가 [크흐--크흐--]소릴 낸단 말이지, 숨 넘어가는 소리처럼. 근데 저 청소부 바지에 빨간 줄무뉜 뭐야! 전직이 장군이었었다나. 전직이 독일의 장군이었던 청소부라. 그가 비질을 하는데 숨 넘어가는 소리처럼 [크흐--크흐--] 소릴 낸다? 도로 청소부!
도로 청소부 난 도로 청소부가 아닌뎁쇼.
벡크만 도로 청소부가 아니라고? 그럼 당신은 대체 뭐란 말이오?
도로 청소부 쓰레기와 오물을 치러 다니는 장의사(葬儀社)종업원이죠.
벡크만 그럼 당신도 죽음이군! 그런데 행세를 한단 말이오?
도로 청소부 오늘만 도로 청소붑죠. 어젠 장군이었읍죠. 구태여 죽음이라 칭하실 필욘 없어요. 어디 가나 사자(死者)들로 웅성대니깝쇼. 오늘도 이 거리에 사자들이 즐비했었는뎁쇼. 어젠 전쟁터에 그렇게 즐비하게 자빠져 있었지만, 제가 죽음의 장군으로 실로폰 반주를 할 때 말입죠. 그런데 오늘은 이 거리에도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읍죠. 죽음의 빗자루는 이렇게 [크흐--크흐--] 소릴 내게 마련입죠.
벡크만 죽음의 빗자루는 [크흐--크흐--] 소릴 낸다. 장군이 도로 청소부로 전락을 했다. 으음--- 시체들은 다 제대로 묻었소?
도로 청소부 묻혔읍죠, 묻혔어요. 장례식도 없이, 조종(弔鐘)의 울림 소리도 없이, 조사(弔詞)도 없이, 묻혔읍죠, 묻혔어요. 그리고 이 빗자루는 이렇게 [크흐--크흐--] 소릴 내고---
벡크만 그냥 지나가시는 겁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날 데려가 주세요. 죽음, 죽음, 당신은 날 잊으셨습니까?
도로 청소부 난 아무도 잊질 못합죠. 나의 실로폰은 아직도 옛 전우들을 노래하고 있고, 나의 빗자루는 여전히 [크흐--크흐--] 소릴 내고 있읍죠. 난 아무도 잊질 못합죠.
벡크만 그렇다면 내게 문을 열어 달란 말예요.
도로 청소부 나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읍죠. 언제든지, 아침에도, 오후에도, 밤에도. 청명한 날에도, 안개낀 날에도, 언제든지 나의 문은 열려 있읍죠.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나의 빗자루는 [크흐--크흐--]소릴 내고 있읍죠. 헤헤-- (점점 작아지는 [크흐--크흐--] 소리와 함께 죽음 사라진다)
벡크만 [크흐--크흐--] 하는 소리가 아직도 내 허파에서 나는 것 같지? 도로 청소부의 빗자루 소리 같은 게 말야. 도로 청소부는 내게 죽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고 갔지. 죽음이라는 도로 청소부가 말야. 그의 빗자루 소리는 내 허파에서 나는 소리처럼, 고물 시계의 목쉰 소리처럼. [크흐--크흐--] 소릴 내고 있었어.
타인 벡크만, 일어나, 아직도 시간은 있어. 크게 심호흡을 해봐, 어서!
벡크만 그러나 내 허판 벌써 그 소릴 내고 있는 걸---
타인 그 소린 네 허파가 내는 게 아냐. 빗자루 소리였단 말야. 그 사람은 시청 청소과에서 나온 인부에 불과해.
벡크만 청소과에서 나온 청소부라고?
타인 그래, 그는 벌써 멀리 가 버렸어. 자, 어서 일어나, 심호흡을 해봐. 수천 개의 가로등과 수천 개의 활짝 열려진 문을 갖고 있는 삶의 길이 널 기다리고 있어
벡크만 하나로 충분한, 언제 어디서나 나를 위해 열려진 문이 있다고 그랬는데. 하나의 문이---
타인 어서 일어나자, 넌 죽음의 꿈을 꾸고 있을 뿐야. 넌 꿈에서 죽을 뿐야. 일어나 봐!
벡크만 아냐, 난 여기 누워 있어야겠어. 이 문 앞에. 죽음의 문은 열려 있다고 그는 말했지. 난 여기 누워 있겠어. 일어나야 한다고? 안 돼, 난 또 근사한 꿈을 꿀 거야. 아주 굉장히 아름다운 꿈을 말야. 나는 모든 것이 끝나는 꿈을 꿀 거야. 도로 청소부가 지나가며 자기가 죽음이라 했지. 그의 빗자루는 나의 허파처럼 죽음의 소릴 내고 있었어. 그리고 내게 열려진 하나의 문을 약속했지. 도로 청소부는 참 멋있는 친구야. 죽음처럼 멋있더군. 그러한 도로 청소부가 이리로 지나갔단 말야.
타인 벡크만, 넌 정말 꿈을 꾸고 있어. 악몽을 꾸고 있단 말야. 그 꿈을 깨고 살아야 돼!
벡크만 살아야 된다고? 난 이렇게 거리에 쓰러져 있는데, 모든 것은, 모든 것은 다 끝나가는데. 난 아마 이미 죽었을 거야. 모든 게 사라지고 있어. 난 확실히 죽은 거야.
타인 벡크만, 벡크만, 살아야 돼! 모두들 살고 있어. 네 주위의 사람들은 말야. 다른 사람들은 다 살고 있단 말야! 그런데 넌, 넌 뭘 하는 거야? 살아야 돼, 벡크만! 모두들 살고 있어!
벡크만 다른 사람들이라구? 누구란 말야? 연대장? 지배인? 크람머 부인? 그들과 같이 살라고? 난 이렇게 죽어 버렸는데, 그들은 여전히 살아간단 말이지? 난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아. 그들은 살인자란 말야.
타인 벡크만,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벡크만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그들이 나쁘지 않단 말야? 좋단 말야?
타인 넌 인간을 몰라.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지.
벡크만 아---참, 좋은 사람들이었던가. 좋은 사람들이라서 이렇게 날 죽였던가. 그래서 조소를 하며 나를 문 밖으로 쫓았군. 그렇게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라서 말야. 그들이야말로 자기 도취의 꿈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지. 자기 도취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어. 그들은 그 깊은 잠에 취해 나의 시체쯤은 아무 것도 아니거든. 그저 먹고 웃으며 노래하고, 잠자고, 먹는 것을 또 소화시키고--- 나의 시체쯤은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지. 나의 죽음쯤 그들에겐 아무 것도 아냐.
타인 벡크만,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벡크만 긍정자야, 어쨌든 그 사람들은 나의 시체쯤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래서 시체들은 심심해 하고 섭섭해 한단 말야.
타인 벡크만, 그들은 너의 죽음을 방관만 하진 않았어. 그들에게도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있단 말야. 단지 그들은 얼른 자고 싶은데 네가 너무 오래 밤길에 있을 뿐이지. 그들이 그대로 지나친 게 아냐.
벡크만 긍정자,---아니었어. 그들은 그대로 지나쳐 버렸단 말야. 그래서 시체들은 몹시 불쾌해 하지. 그들은 그냥 얼른 지나쳐 버렸거든. 코를 꼭 쥐고 눈도 감은 채.
타인 그들은 그렇게 안했어. 죽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아낌없는 동정을 보냈지.
벡크만 잠깐만. 저기 누가 오는데. 저 사람 기억나? 연대장야. 그는 그의 헌옷을 주면서 나보고 새 인간이 되라고 했지. 연대장님! 연대장님!
연대장 제기랄! 아니, 다시 거지가 생겼나! 그전처럼.
벡크만 그래요, 연대장님. 그전 꼭 그대로죠. 거진 언제나 거지지 별 수 있읍니까. 그러나 전 거지가 아녜요. 연대장님. 전 물귀신예요. 물 속으로 도피한거죠. 전 아주 피로에 지친 병사였거든요. 연대장님. 어제까지는 벡크만 하사라고 불리었죠, 연대장님. 기억나세요? 병약해 보이던 벡크만 말예요. 기억나세요? 물론 전 내일 저녁이면 퉁퉁 부어 블랑케네제 모래사장으로 밀려나올 겁니다. 연대장님, 무섭죠? 저도 당신의 계산서에 올려 줄 수 있겠읍니까? 연대장님, 무서우세요? 2천 11명에다 2천 12명의 밤의 망령이라! 하하하!
연대장 여보쇼, 난 통 당신을 모르겠는데. 벡크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기억도 없고. 계급이 뭐였소?
벡크만 그러나 연대장님, 당신의 마지막 살인은 기억나실거예요. 방독면 안경을 쓰고 죄수 머리를 한 뻗장 다리의 사나이 말에요. 벡크만 하사 말예요, 연대장님!
연대장 참, 그렇구료! 그 사람이시군! 아시다시피 계급이 낮은 사람은 못 알아보는 수가 많소. 당신은 불평불만자였고 평화주의자이며 물귀신 지망자였지. 그래 물 속에 실컷 빠져 봤소? 그래 맞아, 당신은 전쟁에서 머리가 약간씩 돈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어. 약간 비인간적이고 군인정신이 희박한 사람이었지. 하고 다니는 꼴도 꽤는 흉하고---
벡크만 그렇습니다, 연대장님.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이렇게 물귀신 꼴을 하고 다니죠. 그렇지만 당신은 살인자라는 걸 아셔야 해요. 연대장님, 당신 말예요! 연대장님, 살인자란 말을 듣고도 가만히 계실 수 있으세요? 연대장님, 살인자가 된 소감이 어떠세요?
연대장 뭐? 뭐라고요? 내가?
벡크만 그래요, 연대장님. 당신은 사경(死境)에 있는 나를 비웃기만 했죠. 당신의 웃음은 온 세계의 죽음보다도 잔인했어요. 연대장님. 당신의 얼굴이 죽을 상이 되도록 웃어 댔단 말예요!
연대장 (통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니, 내가? 그랬다 치고---하여간 당신은 이미 금간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었을 뿐이오. 그럼 난 그만, 잘 계시오!
벡크만 연대장님, 안녕히 가십쇼! 추도사까지 해주셔서 감사해요! 긍정자, 인간의 친구! 들어 봤어? 익사한 병사에 대한 조사(弔詞)말야.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보내는 에필로그 말야.
타인 벡크만, 넌 꿈을 꾸고 있어.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인간은 누구나 선한 거야!
벡크만 흥, 낙천적 테너 음(音)을 제대로 뽑고 있군! 왜, 말문이 막혀? 그렇다 그래, 인간은 선한 거다. 그런데 나쁜 몇 몇 사람을 어쩌다 만나게 될 뿐이지. 그러나 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나쁜 건 아니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을 뿐야. 나도 긍정해 볼까. 인간은 선한 거야. 놀라우리만큼 각계 각층의 인간이 있을 뿐이지. 별의별 사람이 다 있을 뿐야. 연대장도 하나의 인간인 이상, 그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이 또 있게 마련이지. 연대장은 배부르고, 건강하고, 양털바지를 입었고, 저녁엔 침대에다 부인까지 있는가 하면---
타인 벡크만, 이제 꿈은 그만 꿔라! 어서 일어나! 너의 꿈은 비비 꼬였어!
벡크만 또다른 사람은 배고프고, 절뚝거리고, 속 셔츠 하나 제대로 못 입고, 밤에는 다 떨어진 소파에 쓰러져 광 속에서 천식 앓는 쥐가 보내는 소리를 아내의 베갯머리 속삭임으로 삼고 잠을 이루지. 아니야, 인간은 선한 거야.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서로들 기막힌 차이가 있을 뿐야.
타인 인간은 선해. 그들은 단지 앞일을 모르고 살 뿐야. 언제나 앞일을 모르고 살지. 그러나 그들의 마음만은 선해. 그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봐. 그들의 본래의 마음은 선하단 말야. 생활이 그런 마음을 방해할 뿐야. 근본 마음은 누구나 선하다는 걸 알아둬.
벡크만 물론 그래, 근본에 있어선. 그러나 근본적이라는 것은 대개 미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함축성 말야. 하옇든 그래, 근본 마음에 있어선 누구나 선하지. 단지 사는 데 차이가 있을 뿐야. 어느 누군 신수가 훤하고, 어느 누군 꺼칠하고, 어느 사람은 아래 바지를 잘 입었는가 하면 어느 사람은 또 못 입고. 근데 그 바지없는 사람이 비극의 주인공인 바로 나야. 퇴역 하사며 물귀신인 벡크만과 그의 옛 전우들이란 말야!
타인 벡크만, 넌 꿈을 꾸고 있어. 어서 일어나. 살아야 해! 자, 사람들은 선한 거야.
벡크만 그런데 그들은 나의 시체 옆으로 지나치면서도 무엇을 씹고, 웃고, 뱉고, 먹은 것을 또 소화시키지. 그렇게 나의 죽음 옆을 지나가는 거야. 그 선하고 선한 사람들이---
타인 눈을 떠! 넌 악몽을 꾸고 있어. 벡크만, 빨리 일어나!
벡크만 알아, 나는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아, 저기 또 카바레 지배인이 오는군. 대답자, 저 사람하고도 인터뷰를 해야 되나?
타인 자, 일어나, 벡크만. 살아야 돼. 내가 말하는 길엔 가로등이 죽 들어서 있지. 모두가 살고 있어. 자, 그들과 살아 봐!
벡크만 같이 살라고? 누구와? 연대장과? 건 안 될 말야!
타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벡크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 봐.
벡크만 지배인하고?
타인 물론 그 사람하고도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벡크만 좋아, 지배인하고도랬지. 여보세요, 지배인님!
지배인 어! 아니, 누구요?
벡크만 절 기억하시겠읍니까?
지배인 모르겠는데--- 잠, 잠깐만. 가만 있자, 방독면 안경에 구둣솔 머리, 군인 외투라---아! 창녀의 샹송을 부른 그 풋나기시군! 당신 이름이 뭐더라?
벡크만 벡크만이죠.
지배인 아---참, 그렇지, 그런데 웬일이쇼?
벡크만 당신은 저를 살해하셨죠, 지배인님.
지배인 아니? 친구, 거 무슨---?
벡크만 당신의 그 속물 근성이, 그 진실에 대한 당신의 배반이, 저를 죽였단 말입니다. 당신이 이 풋나기에게 영 일 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즉 저를 엘베강 속으로 추방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전 일하고 싶었읍니다. 배고팠읍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죠. 엘베 강으로 추방해 버렸어요, 지배인님.
지배인 아주 감상적인 소년이시군! 엘베의 품으로 뛰어들다니! 그 축축한---
벡크만 축축한 엘베의 가슴이었죠, 지배인님. 전 썰물에 말려들어갔어요. 아주 배가 땡땡 불 때까지. [한 번 배부르더니 그 때문에 죽었네!]---이거 어때요? 지배인님. 비극적인 멋이 있죠? 무대에 한 번 써먹을 만하지 않아요? 현대의 샹송으로 말예요. [한 번 배부르더니 그 때문에 죽었네!]---
지배인 너무 끔찍스럽소. 하긴 그때도 당신은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었지만. 하옇든 그땐 시기적으로 보나 장소로 보나 모두 맞지 않아 그만뒀던 거요. 거기다 당신은 진실에 대해 너무 열을 올리고 있었소. 진실에 대한 지나친 광신자였단 말씀야! 그때 당신의 노랠 관중들이 들었더라면 모르긴 하지만 부들부들 떨었을 거요.
벡크만 하옇든 그때 당신은 제 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읍니다. 그 다음 전 엘베 강 물 속에 누워 버렸죠, 지배인님.
지배인 그래서 엘베 강에, 아니, 늙은 창녀의 품으로 뛰어드셨다--- 인생의 강을 건너 버리려고, 덕택에 물살에 실려 이리저리 여행도 좀 했고--- 그리곤 한 번 배부르더니 그 때문에 죽으셨다--- 그것도 좋지,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감상적일 수만 있다면 오죽 좋겠소!
벡크만 지배인님, 그 얘기가 아녜요.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감상적일 수는 없지만---
지배인 하여간 모르겠소. 당신도 그 수백 만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으니까. 물에 빠져 버린다 해도 일생을 즐거운 듯이 절뚝거리며 살아야 할 운명의 사람들 말이오. 그런 사람들이란 엘베 강으로 가든, 스프레 강으로 가든, 템즈 강으로 가든, 다 마찬기지지. 오히려 그런 데선 안식을 못 찾게 마련이지.
벡크만 당신은 지금 내가 뛰어내릴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겁니까?
지배인 무슨 소릴! 누가 그렇게 말했소? 당신은 숙명적으로 좀 비극의 주인공이란 말이지. 어쨌든 그때의 그 작품은 너무나 지나친 거였소. 차라리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방독면 안경을 쓴 물귀신]---이런 제목의 작품이 더 낫었겠지. 미안하오, 그런 작품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요. 미안하오---(퇴장)
벡크만 지배인님, 재미나 보며 푹 쉬십쇼! 야, 들어 봤어? 이래도 연대장과 같이 살라고? 지배인하고 같이 살라고?
타인 벡크만, 넌 꿈을 꾸고 있을 뿐야. 눈을 떠!
벡크만 내가 꿈을 꾼다고? 이 엉터리 방독면 안경 때문에 모든 것을 삐뚜로 본다고 그들은 다 괴뢰라고? 그로테스크하게 희화시킨 인간 괴뢰들이라고? 살인자가 나의 죽음에 주는 추도사를 못 들었어? 인생 젖먹이에게 주는 에필로그 말야. [당신은 그런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뿐---]이라고 하는 말들 말야. 타인(他人), 그래도 나보고 살아야 한다고? 이 거리에서, 그런 사람들 곁에서, 계속 절뚝거려야 된다고? 그들은 한결같이 무관심하고 냉담한 표정이었어. 무엇을 한없이 떠들다가도 내가 긍정(肯定)을 구하면 기껏 창녀들의 긍정의 표시처럼 벙어리나 바보의 표정을 짓는 거였지. 그렇게 그들은 비겁했어. 우릴 배반한 거야. 엄청난 배반야. 그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전쟁을 겪었다면서 우리가 성장하자 전쟁 얘기를 늘어놓곤 했지. 아주 열을 띠어 가며 말야. 그러더니 우리가 다 크자 우리에게 새로운 전쟁을 마련해 주는 거였어. 우릴 전쟁터로 보냈던 거야. 아주 열광적인 환송을 하며, 아주 열광적인. 근데 우리가 떠나 버리자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어. 너희들은 지옥으로 간 거라고 말해 주는 이도 없었어. 그렇게 행진곡을 울리며 대대적인 환송을 해주던 사람들이. 그렇게 야단스레 전황(戰況) 보고와 행군 계획을 발표하고, <용사의 노래>와 <피의 훈장>을 부르며 열광하던 그 사람들이 말야. 그렇게 우릴 보낸 사람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다른 말이라곤 없었어. [잘 싸운다!][잘 싸운다!] 소릴 몇 마디 지껄였을 뿐. 결국 우릴 배반한 거야. 너무나 기막힌 배반이었어. 지금 우린 그들의 문 밖에 버려져 있는 거지. 선생님도, 지배인도, 판사님도, 의사 선생님도, 모두 그랬어. 이젠 아무도 우릴 보내주는 사람이 없지. 아무도 보내주는 사람이 없어. 우린 모두 그들의 문 밖에 있는 거야. 그들은 문을 단단히 잠궈 버리고, 우린 그 문 밖을 서성거리는 거지. 그들은 교단에서, 혹은 안락 의자에서 우릴 보자 손을 내저을 뿐야. 이렇게 그들은 우릴 배반했어. 어마어마한 배반야. 그리고 지금 그들은 자기들 때문에 피살된 시체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어. 그들 때문에 피살된 시페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단 말야!
타인 벡크만, 그들은 그렇게 지나기지 않았어. 넌 괜히 과장만 하고 있어. 넌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들의 마음 속을 봐, 벡크만. 그들은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단 말야. 그들은 선하단 말야.
벡크만 그러나 크람머 부인은 나의 시체를 그냥 지나치고 있어.
타인 아냐, 그녀도 선한 마음을 가졌어!
벡크만 크람머 부인!
크람머 부인 네?
벡크만 크람머 부인, 당신도 선한 마음을 가졌어요? 당신이 나를 죽일 때 당신의 선한 마음은 어디 있었죠? 여하튼 당신은 고(故)벡크만 씨의 아들을 죽인 사람이에요. 또한 그의 양친 살해에 공범자예요. 크람머 부인, 그 밖에 뭐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준 게 뭐 있어요? 저의 인생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 그렇죠? 당신은 그 아들을 엘베 강으로 추방했단 말예요. 그때 당신의 마음은 어땠죠?
크람머 부인 아니, 그 괴상한 안경을 쓴 채 엘베 강으로 가셨단 말예요? 미처 생각 못 했던 일인데요. 참 우울한 얘기군요. 엘베 강으로 가시다니, 옹졸한 양반이시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벡크만 그럴 수 있죠. 당신이 그렇게도 친절히, 아니, 알뜰하게 저의 양친의 피살을 알려줬기 때문이죠. 당신의 집 문이 마지막 문이었습니다. 저는 당신 때문에 또다시 문 밖에 섰던 거예요. 얼마나 그 문을 그리워하며 무수한 낮과 밤을 시베리아에서 보냈는데 살인을 방조하고 말았어요. 그렇죠?
크람머 부인 (침착하려고 애를 쓴다) 당신과 같은 불행을 겪은 사람은 또 얼마든지 있어요. 당신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뿐예요. 시베리아니, 방독면이니, 올스돌프니, 다 생각하면 끔찍스럽고, 저도 거기에 동정이 가지만, 당신처럼 모든 사람이 없어진다든지 슬퍼만 한다면 그것 또한 큰일 아녜요? 젊은 양반, 심술장이처럼 그렇게 찌푸리고만 있지 마세요. 오히려 빵에 버터를 바른 거나 마찬가지 일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갖고 그렇게 생투정 하실 필욘 없잖아요. 그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물속으로 뛰어들다니--- 다 경험인 거예요. 그 정도의 일은 언제나 있어요!
벡크만 네, 네, 크람머 부인, 안녕히 가세요. 들어 봤어, 타인(他人), 나이깨나 든 부인이 한 젊은이에게 보내는 값싼 동정의 추도사를. 대답 없는 대답자, 들었지?
타인 벡크만, 눈을 떠 봐---
벡크만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졌는데. 먼 곳에 있나 보군.
타인 벡크만, 넌 악몽을 꾸고 있어. 눈을 떠! 살아야 해! 그렇게 고집만 부리지 마. 매일매일 죽어 가는 건데, 언제까지 질질 짜는 소리만 하고 있을테야? 살아야 해! 너의 버터빵을 먹어 보란 말야. 살란 말야! 인생은 수천의 산봉우리지. 자, 땅을 짚고 일어서 봐.
벡크만 그래, 일어서야지. 나의 아내가 오는데. 내 아낸 좋은 여자지. 아니? 웬 남자 친구와 같이 온다! 하옇든 그전엔 좋은 여자였어. 제기랄, 내가 왜 3년간이나 시베리아에 가 있었는지, 내 아낸 그 3년간을 눈이 빠져라 하고 기다렸을 거야. 난 그걸 알고도 남아. 그전에 얼마나 내게 잘해 줬다고. 잘못은 내게 있지. 그 여잔 좋은 여자였어. 그런데 오늘도 그럴까?
타인 한 번 시험해 봐. 살란 말야!
벡크만 여보! 놀라진 말아요, 나요, 나! 날 좀 봐요! 당신 남편야. 나 벡크만야! 그런데 여보, 난 자살하고 말았어. 당신은 다른 사람과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난 그래도 당신만을 생각했는데. 내 말이 통 안 들리오? 여보!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러나 슬퍼할 건 없어요. 난 지금 괜찮으니까. 죽었으니까. 당신 없이는 난 살고 싶지 않았어! 여보! 날 좀 봐요! 여보! (벡크만 부인, 남자 친구와 팔짱을 꼭 끼고 못 들은 체 그냥 서서히 지나간다) 여보! 당신은 나의 부인이었잖아! 날 좀 봐요. 당신도 날 죽였으니까 차마 볼 수 없다는 거요? 내 말이 안 들려? 날 죽여 놓고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기요? 여보! 왜 내 말을 그렇게 못 듣지? (부인, 남자 친구와 그냥 사라져 버린다) 당신까지도 내 말을 못 알아듣다니! 당신까지도 날 몰라봐! 내가 죽은 지가 그렇게 오래 됐나? 죽은 지 이제 하루만인데. 그녀는 벌써 나를 잊었겠다, 좋아, 좋아,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거다! 그런데 야! 긍정자야! 왜 말이 없어? 어디로 꺼졌나? 나보고 더 살아야 된다고? 이런 꼴 당하려고 시베리아에서 돌아왔나? 더 살아야 된다고 넌 말했지? 거리의 문마다 모두 입을 다물었는데. 불 꺼진 가등만이 서 있을 뿐인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다 무엇에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야. 나보고도 더 미련을 가져 보라고? 내가 이제 와서 더 미련을 가져볼 만한 게 뭐 있어? 이 벙어리야, 어딜 자꾸 가는 거야? 이 어둠 속에 나를 위한 등불이라도 있어? 말해 봐, 뭐든지 아는 것처럼 지껄여댔잖아!
타인 소녀가 오고 있어. 너를 엘베 강에서 데리고 나와 너의 몸을 녹여 주던 소녀 말야. 네 돌대가리에 키스해 주려던 소녀 말야. 그 여자는 너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야. 너를 삼지사방으로 찾아다녔거든.
벡크만 천만에! 그 여자가 날 찾아다녔을 리가 없어! 나를 찾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어! 이젠 그런 거 생각조차도 하기 싫어. 또 실망할 순 없단 말야! 나를 찾는 사람은 없어!
타인 저 소녀가 너를 찾아다녔다니까!
벡크만 긍정자야,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 제발 좀 꺼져!
소녀 (벡크만을 보지 못한 채) 물고기님! 어디 계세요? 추운 물고기님!
벡크만 나? 난 죽었어.
소녀 아니, 죽으셨다고요? 당신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맸는데.
벡크만 나를 찾다니!
소녀 왜냐고요! 가엾은 망령인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돌아가셨다고요? 당신에게 얼마나 키스해 주고 싶었다고요, 물고기님!
벡크만 그렇다고 가야 되는 건가? 일어나 가야 돼? 소녀가 나를 찾아다녔다고, 소녀가 부른다고---
소녀 물고기님, 네?
벡크만 내가 지금 죽지 않았다면?
소녀 아, 그럼 저하고 같이 집으로 가는 거죠. 저의 집으로요. 추운 물고기님. 우리 같이 살아요, 네?
벡크만 살라고? 정말 나를 찾아다녔소?
소녀 항상 당신을, 당신만을, 이제껏 당신만을 찾아다녔어요. 아--- 그런데 왜 죽으셨어요? 가엾은 유령님, 저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으세요?
벡크만 그래, 그래, 같이 살고 싶어. 같이 가고 싶어. 나도 당신과 살고 싶어!
소녀 아--- 나의 물고기님.
벡크만 나 이제 일어나겠어. 당신은 나를 위해 타고 있는 등불야. 오직 나를 위해. 이제 우린 같이 사는 거야. 이 어두운 밤길에서 우린 가장 가까이서 살 닿으며 살아가는 거야. 자, 이제 우린 같이 사는 거야, 아주 가까이서---
소녀 네, 전 이 어두운 밤길에서 당신만을 위해 타오르는 등불이에요.
벡크만 분명히 나를 위해 타오르는 등불이라 했지?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야? 온통 도로 캄캄해지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디 있어!
(외다리가 된 자의 목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녀 들리죠? 저 괴상한 소리가 말예요. 전 가야겠어요, 물고기님. 전 가요, 가엾은 유령님!
벡크만 어디를 가는 거야? 이리 와! 갑자기 이렇게 캄캄해질 수가 있어! 등불, 나의 등불! 불을 다시 켜! 누가 내는 소리지! 텍--톡--텍--톡--하는 게 누구야! 누가 텍--톡--텍--톡--하고 있는 거야! 점점 커지네! 점점 가까와지는데! 텍--톡--텍--톡(놀라는 소리) 아! 그 거인이구나! (중얼거리듯) 그 거인이구나, 한 다리가 없어져 목발을 짚고 다니는. 텍--톡--텍--톡--점점 가까이 오는군! 텍--톡--나한테로 오는구나! 텍--톡--텍--톡--!
외다리가 된 者 (또박또박 뚜렷한 목소리로) 벡크만!
벡크만 (힘없이) 응, 나야.
외다리가 된 者 넌 여태 살고 있군? 살인을 범하고도. 벡크만, 넌 여전히 살고 있어.
벡크만 난 아무런 살인도 범하지 않았어.
외다리가 된 者 아니지, 벡크만. 우린 매일같이 살인을 하고 있어. 우린 매일같이 살인을 범하는 거야. 우린 매일같이 살인의 방조자가 되는 거지. 넌 나를 살해하고 말았어, 벡크만. 벌써 넌 잊었나? 벡크만, 난 3년 동안이나 시베리아에 있었어. 어제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나의 자리엔 벌써 딴 놈이 있더군. 그게 바로 너였어. 벡크만, 네가 내 자리에 있었단 말야. 그래서 난 엘베 강으로 갔지. 바로 어젯저녁으로 말야. 벡크만, 별 수 없잖아? 엘베는 참 춥더군. 그러나 곧 익숙해질 수 있었어. 그러니 난 지금 죽은 사람이지. 벡크만,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나? 살인을 범하고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다니. 그리고도 그렇게 악착같이 따라다닐 줄은 몰랐어, 벡크만. 물론 잘못을 내게 있을 거야. 아예 집으로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을. 그러나 그것은 네가 내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 벡크만, 난 지금 너를 원망하려는 게 아냐. 우린 매일 낮 매일 밤을 살인을 범하고 있어. 그러나 우린 우리의 희생자를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순 없어. 우린 우리 때문에 피살된 자를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단 말야. 벡크만, 그런 거야, 넌 나의 자리를 빼앗아 간 자야. 내가 3년간이나 꿈 속에서 그리워하던 소파에 넌 나의 아내와, 나의 아내와 같이 있었어. 시베리아에서 밤이면. 못 견디게 그립던 그 소파에 말야! 벡크만, 잘 들어 봐, 집에 가보니 사나이가 있었지. 내 옷을 입고 말야. 그런데 그 옷은 그에게 너무나 너무나 큰 것이었어. 그렇지만 그는 그 옷을 입은 채 나의 아내와 몸을 녹이고 있었지. 그 사나이가 벡크만, 바로 너란 말야! 그래 나도 곧 뛰쳐나와 엘베 강으로 갔지. 참 춥더군. 그러나 곧 익숙해지는 거였지. 난 지금 만 하루 죽어 있는 거야. 그런데 넌 그 살인을 벌써 잊었지. 벡크만, 그래선 안 돼. 살인을 쉽게 잊을 순 없는 거야. 악인이면 몰라도. 근데 넌 나를 잊었지. 벡크만, 그렇지? 나의 죽음을 잊지 못한다고 말해 주지 못하겠어?
벡크만 나는 너를 잊지 않아.
외다리가 된 者 벡크만, 그게 너의 좋은 점이로군. 그럼 난 이제 편히 죽을 수 있지. 적어도 한 사람, 아니, 나의 살인자가---때때로 혹은 밤마다 날 기억해 준다면 말야. 벡크만, 네가 잠을 이룰 수 없다면 말야. 난 아주 이제 편히 죽을 수 있어---
벡크만 (눈을 번쩍 뜨며, 독백조로) 텍--톡--텍--톡! 내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꿈을 꿨나? 도대체 산 건가? 그럼 여태까지 난 죽지 않았었나? 저 텍--톡--텍--톡--소린 삶을 누비는 소리? 저 텍--톡--텍--톡--소린 죽음을 누비는 소리? 텍--톡--텍--톡-- 저 괴상한 소리가 안 들려? 나, 나보고 살라고? 매일 밤을 나의 잠자리에 한 사나이가 지키고 섰을 텐데. 텍--톡--텍--톡--하는 그의 발소리가 쇠사슬처럼 나를 묶을 텐데. 안 돼, 안 될 말야! 이게 인생야!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독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절뚝거린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집에 온다. 그의 침대엔 이미 딴 사람이 들어있다. 문은 닫히고 그는 밖을 서성거린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소녀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에겐 남편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다리가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는 끝없이 하나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 이름은 벡크만이다. 문은 닫히고 그는 밖을 서성거린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사람을 찾아간다. 그런데 연대장은 그에게 조소를 보낸다. 문은 닫히고 다시 밖을 서성거린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일자릴 찾는다. 그런데 지배인은 비겁하고 인색하게 군다. 문은 닫히고 다시 문 밖을 서성거린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는 그의 부모를 찾는다. 그런데 크람머 부인은 가스 푸념만 한다. 문은 닫히고 그는 밖을 서성거린다 한 사나이가 독일로 돌아온다! 그런데 텍--톡--텍--톡--소릴 내며 외다리의 사나이가 나타난다. 그는 말끝마다 "벡크만, 벡크만---" 한다. 그는 숨을 쉬어도 벡크만, 코를 골아도 벡크만, 잠꼬대를 해도 벡크만, 소릴 칠 때도 벡크만, 저주를 해도 벡크만, 기도를 해도 벡크만---그의 텍--톡--텍--톡--하는 발소린 살인자의 일생을 누벼 버리는 거였어. 그런데 그 살인자가 나란 말야! 내가? 난 피살잔데, 내가 살인자라고? 살인자가 아니라는 걸 누가 증명한다? 우리는 매일 살인을 하는 거야. 우리는 매일 살인을 범한단 말야! 우린 매일 살인을 방조하고 있어! 그래서 살인자 벡크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살인 당하는 것도 살인자가 되는 것도. 그래서 그는 세계의 정면에다 이렇게 울부짖지, "나는 죽겠다!"고. 그리고 길가에 아무 데나 쓰러져 죽는다. 독일로 돌아온 사나이가 말야. 담배꽁초나 사과 껍데기, 또는 휴지 나부랑이나 떨어져 있는 길바닥에서, 글쎄 인간이 말야. 그런데 그 정도는 또 아무 것도 아니지. 도로 청소부가 와서는, 붉은 줄무늬의 독일 장군복을 입은 도로 청소부가 와서는, 상표 쪽지나 오물 취급을 한단 말야! 굶주리고 동상에 걸려 쓰러져 있는 것을. 20세기의 노상(路上)에서, 독일에서 말야. 거기다 사람들은 죽음 옆을 지나면서도 한 사람 거들떠보는 이가 없지. 그들은 무관심하고 귀찮고 지루한 듯이 그냥 지나쳐 버린단 말야! 그러면 사자(死者)들은 깊은 꿈속에서 죽음도 삶도 다 마찬가지라고 느끼는 거야. 다 똑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야. 그런데, 넌, 넌 나보고 더 살아야 한다고 말했지? 왜? 누굴 위해서? 무엇을 위해? 난 죽을 권리도 없어? 아, 난 자살할 권리도 없는 건가? 나보고 더 피살당하란 말야? 더 살인을 하란 말야? 어디로 가란 말야? 누구와? 무엇을 위해? 도대체 이 세상 어디로 가란 말야? 배반을 당할뿐야. 무서운 배반을 당할 뿐이지. 타인, 지금 넌 어디 있어? 아직도 여기 있나? 긍정자, 넌 지금 어디 있어? 어서 대답해 봐! 대답자, 난 지금 네가 필요해! 도대체 넌 어디 있는 거야? 갑자기 어디로 꺼졌어? 대답자, 어딨어? 나의 죽음을 빼앗아 가지고 넌 어디로 간 거야? 신(神)이라고 하던 할아범은 또 어디 있지? 그는 왜 말이 없어? 대답을 해봐! 왜 아무 말이 없어? 왜? 아무도 대답이 없는 거야?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거야? 아무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