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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수감된 마메틴 지하 감옥
마메틴 감옥은 바위를 정으로 쪼아 만든 지하감옥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유일하게 주먹 하나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으론 사형장 가는 길만이 보이게 되어 있다.
마메틴 감옥의 지하에 깊숙히 투옥된 바울은 누가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제 주에 이름으로 갈길을 힘치게 달려 이제 결승선에 도달하였음을 깨닫고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특히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같이, 제자같이,형제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로 루스투라에서 두 번째 전도여행 때 만난 후로 바울의 분신과 같은 동반자였는데 그 디모데가 못견디게 그리웠다.
감옥의 조그만 구멍 사이로 보이는 사형장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워 옴을 느끼는 길목에서
바울은 66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올 무렵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디모데후서이다.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다".
이 글을 쓰면서 바울은 뜨거운 정에 복받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디모데에게 강한 어조로 "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 며 복음의 진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바울은 이 서신을 유언으로 생각하며 인간적인 진솔함을 토하며 "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 고 적어 놓았다.
바울은 동역자들을 하나 둘씩 떠나 보냈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고, 에라스토는 고린도에 머물게 했고, 드로비모는 병이 들어서 밀레로에 남겨 두었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사랑하는 디도는 니고볼리에서 체포 될 때 달마디아로 보냈다.
그들을 떠나 보낼 때에는 외로운지 몰랐는데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배신하고 데살로니가로 떠난 것에 대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고 그 후론 외로움을 타기 시작하였다.
바울은 섭섭하고 외로운 마음을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고백을 하며 " 이 편지를 받은 즉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고 간청을 하였다
바울은 1차전도 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가버린 마가 요한이 신의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잘못 평가 하였지만 그후로 마가는 베드로를 도와 복음전파에 전념하고 날이 가면 갈 수록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특히 바울은 마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줄 알았으나 마가는 바울이 처음 로마 옥에 갇혀 있을 때 머나먼 로마까지 위문을 하러 찾아왔던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가의 손을 잡고 그를 안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로마로 올 때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맡겨 둔 두꺼운 겉옷과 함께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마가는 그 때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유대인의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마로 갈 수가 없었다. 마가는 아버지처럼 따랐던 베드로가 꺼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할 때도 로마로 가지 못하였다.
얼마 있으면 겨울이 닦아오고 바위를 쪼아 만든 지하감옥은 차디 찬데 노쇠한 바울이 그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두꺼운 외투가 필요하였고 그 동안 선교한 자료를 기록한 가죽 종이 서책은 앞으로 디모데가 목회사역을 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다.
디모데는 편지를 받고 즉시 에베소 교회를 잠시 두기고에게 맡기고 먼길을 걸어 드로아로 가서 가보의 집에 맡겨둔 바울의 두꺼운 외투와 가죽으로 된 서책을 가지고 로마로 향하였다.
로마에 도착한 디모데는 바울을 만나 외투와 함께 서책을 전달하고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전하여 준 따듯한 사랑으로 큰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다. 누가와 디모데는 바울을 보살피는 한편 여러 경로로 바울의 구명운동을 펼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 무렵(AD 66년)에 히브리서가 기록이 되였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군지 아직까지 정확히 모른다.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히브리서를 신약 27권으로 확정지울 때 히브리서를 성경에 포함해야 되는데 저자가 분명치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다가 바울을 저자로 하고 신약성경에 포함하게 되였다. 성경으로 확정된 뒤에는 바울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오늘날까지 히브리서의 저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로 거론되는 것을 살펴 보면 유명한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바울이 히브리어로 기록한 것을 누가가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 보고 있고 피크라는 학자는 브리스길라, 하르막이라는 학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에라스무스는 로마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과 누가의 저작이라고 하고 칼빈과 델리치도 누가의 저작이라고 하고 트툴리안과 베이스쨘, 고뎁트, 살몬, 그레고리 이들은 바나바의 저작이라고 말하고 루터, 알포드, 몰튼, 파르, 로봇트슨 이런 사람들은 아볼로가 저작자라고 주장하므로 학자들마다 견해가 엇갈려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일반화 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 보면 대체로 바울이 저자라는 것을 유추하여 알수 있고 시대적 상황이 그 증거가 된다.
AD 66년 바울이 사형이 확정되기 전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접하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을 이루었던 유대파 할례당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그 옛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고 예루살렘 교회가 문을 닫게 되였다는 슬프고 애통한 소식을 접하고 바울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1차 전도여행 떠나기 전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연보를 모아 바나바와 함께 전달하였고 3차 전도 여행때에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마게도냐와 아가보 지방교회들이 연보한 것을 예루살렘에 전하다 유대인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가이사랴와 로마의 감옥에서 4년을 옥살이 하였는데 그 모든 수고와 애씀이 수포로 돌아 가고 있다.
바울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동족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간절했는데 이들이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바울은 넋을 잃었다.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문제로 수일을 먹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바울 옆에 있던 누가가 보다 못해 " 이방인 교회에는 편지를 써서 위로도 하고 말씀을 잘 가르치면서 자신의 동족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편지를 써서라도 안타까운 마음과 믿음을 지키라는 격려의 말씀을 전하라"는 권면을 받고 바울은 퍼득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바울은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의 예루살렘 교회의 회생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심혈을 기울여 히브리어로 서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서신이다.
히브리서 서신을 쓰고 있는 동안 AD67년 바울은 네로황제에 의해 사형 날짜가 잡히게 되였고 히브리서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서신의 미완성된 부분을 누가에게 부탁하였다. 바울이 사형판결을 받는 최종심문에서 디모데는 바울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수감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네로황제는 바울이 1차 투옥되어 심문할 당시 바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으므로 그를 기소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었다.
바울에 대한 네로 황제의 증오가 생긴 이유는 황제의 가족 중에서 명망있는 사람들이 바울의 1차 투옥시에 전도로 그리스도교인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두번째 투옥되었을 때에는 첫번 때보다 더욱 가혹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복음을 전할 기회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다. 네로황제는 웬만한 구실만 있으면 바울을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멀지 않아 그는 순교자의 무덤에 들어갈 선고를 받아야 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이었으므로 고문은 받지 않고 참수형을 선고 받았다.
로마 교외 오스치아가도 옆 톨레 파운타나 사형장으로 가는 길
사도 바울은 은밀히 사형 집행 장소로 끌려갔다. 그의 압제자들은 바울의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미친 것을 보고 놀라 그의 죽음을 구경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를 믿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까지도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을 끌고 간 완고한 군사들은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죽음 앞에서도 그토록 유쾌하고 즐거워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바울은 사형을 집행하는 형리들에 대한 용서와 최후 까지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목격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향기를 느끼게 하였다.
바울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직 기쁜 소망과 간절한 기대로 순교대에 서서 사형 집행인의 번쩍거리는 칼이나, 미구에 자기의 피를 받을 초록의 땅을 보지 않고 오직 여름날 고요하고 푸른 하늘 저편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바울은 "오 주여 주는 나의 위안이시요 나의 유업이십니다. 이제 주님의 품에 내가 안기리이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내가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
바울은 다메섹 회심 후 주님의 명령을 생명을 다하기 까지 순종과 충성으로 사명을 다하고 그토록 그리던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순교한 바울의 시신은 오스티안 거리에 있는 루치나 부인 가문의 소유지에 묻혔다
바울의 사형 집행 광경
사도 바울과 순교자들의 머리를 자를때 사용되어진 대리석 기둥
대리석 기둥 위에서 사도 바울의 목을 자르면서 잘려진 머리가 땅에 세번 튀며 튄 자리마다 샘물이 솟아났는데 이를 '트레폰타네" " 세개의샘"으로 불리며 아직도 샘이 솟아나고 있다.
바울 참수터교회 모습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성 헤레나가 빌라도의 법정계단을 옮겨다가 만든 무릎계단 교회의 모습.
마틴루터가 이 무릎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다가 성령의 역사로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수가 있다고 깨달아 종교개혁을
생각한 계단이기도 하다.
바울이 순교한 후 누가는 수감되어 있는 디모데를 찾아갔다. 디모데는 누가에게 지금 에베소 교회가 지도자가 없이 비어 있으니 저 대신 에베소 교회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누가는 바울의 유품들을 정리하여 에베소로 향하였다.
누가가 에베소에 와서 얼마 있지 않아서 네로 황제가 정적들에 몰려 자결하여 죽은 후 군 출신 갈바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다. 정권이 바뀌자 정치범으로 수감된 디모데는 무죄로 석방되였다. 디모데가 감옥에서 석방되자 석방의 소식을 누가와 에베소교인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로마에서 사람이 왔다.
누가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히브리서를 헬라어로 번역하고 마지막 부분을 아주 조심스럽게 권면하는 말로 히브리서를 마감 하였다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
누가는 이 서신을 완성 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하다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편지를 받으면 보지도 않고 찢어버릴 공산이 크다고 생각하고 인사도 중요하지만 편지 내용을 읽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함으로 바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편지 첫 부분에 있던 문안 인사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추축할 수 있다. 그런 연유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리무중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아 바울과 누가가 저자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후 AD 70년에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흔적도 없이 멸망 당하였고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떠돌이 디아스포라가 되여 2000년을 방황하였는데도 지금도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사도 바울은 주의 사명을 받고 달리고 또 달렸던 길이 로마에서 로마의 선교를 위해서 관재로 드려졌다.
관재는 제물의 수를 붓는 제사인데 바울이 자기 몸인 목을 잘라서 그 피를 로마라는 그 제물 위에다 관재로 드린 후 그로부터 이백 년이 채 안된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 자유령을 선포하였고,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굳게 믿었던 복음의 능력으로 바울은 자신의 목을 쳐 사형시킨 로마를 예수의 이름 아래 꿇게하였고 치욕스럽던 십자가를 인류 구원한 위대한 징표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조선에 전파되었던 시기는 1784년으로 본다. 그외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로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예수회의 전교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국의 천주교는 이승훈(세례명 : 베드로)이 북경에서 로마 카톨릭 영세를 받은 이후 선교사나 성직자의 선교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례는 조선이 유일하다.
1885년 개신교회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선교사가 선교하기 시작하여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지금 전세계에 기독교 인구는 2011년도 자료로 21억8천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누가의 성화
사도 바울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위대한 동역자 누가는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생한 이방인이였다.
누가(빛을 주는자 라는 뜻)는 바울로부터 감화를 받아 새롭게 거듭난 후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병든 영혼에 치료의 광선을 전해주는 의사로 변화되었고 의료활동을 통하여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박차고 바울을 따라 나선다. 이때로 부터 누가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행 하며 그의 주치의가 되고 친구가 되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동행하며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돕는 자로서 살았던 누가는 병약한 몸으로 고독한 감옥 생활을 하는 바울의 곁을 지켜주는 참된 동반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기도에 힘쓰는 성령의 사람으로서 자신이 받은 달란트와 은사를 개발하고 활용하였다. 특히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누가는 의술 훈련을 쌓는 가운데 정확한 관찰력과 학식을 갖추어 그가 알고 있는 역사와 진리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이방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고 누가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의 4권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문학적인 책으로 인정받는 [누가복음]과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 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두가 데오빌로라는 특정인에게 보낸 개인적인 글이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누가의 손끝을 통해 기록된 이 생명의 말씀들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계속하여 확장시켜가는 천국의 복음을 밝힘으로써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불멸의 진리로 남아 있다. 육신은 물론 영혼의 질병까지 치료하던 누가는 의료선교의 길을 최초로 열어놓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 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 세상에서의 자랑과 명예를 초월한 숭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항상 말없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업에 전력한 누가는 장성한 신앙인의 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누가는 성경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교회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AD87년경 감람나무에 목 매달려 순교를 당했는데 후에 사도요한이 시무하던 에베소 교회 밖에 장례되었다고 한다.
누가의 묘는 고대 도시 에베소의 유적지에 들어 가는 입구 주차장 뒤 쪽에 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다. 건물에 누가의 묘지임을 알려 주는 황소의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성지 보존협회에서 한글로 설명문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누가의 묘
누가의 묘임을 밝혀준 소 그림 (누가복음을 송아지 복음으로 말한다)
바울의 사역이 후대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누가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누가는 지금 우리를 향해 따스한 미소로 이 세대에 복음의 진보를 이루라고 격려하고 있다.
글을 쓰고나서
부족한 제가 사도바울을 따라가며 복음의 행적을 더듬어 사도바울의 일생을 조명하여 보았습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혹여 이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글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욱 깊히 알고 성경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 들였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이 글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을 중심으로 성경 호크마 주석과 서적 그리고 인터넷에서 발췌한 자료를 활용하고 성지순례길에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실과 근접하게 기록할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012년 8월30일 속초 조양감리교회 최 효 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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