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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한국 시문학의 일번지 해남
호남은 예로부터 예향(藝鄕)으로 일컬어져 왔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서사적(敍事的)인 성향보다는 서정적(抒情的)인 기류가 강하여 대체적으로 보아 시가문학(詩歌文學)이 융성했다.
그 중에서도 해남은 풍광이 아름답고 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으로 답사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최근에는 ‘남도답사 일번지’라고 하여, 해마다 50만명 이상의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이 땅을 가리켜 ‘삼재(三災)가 미치지 않으며 만년동안 파괴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옛부터 해남 땅에는 전란을 피해 찾아온 많은 문인들의 쉼터였고, 8도를 주유(舟遊)하던 윤선도도 제자인 효종이 수원에 지어준 녹우당(綠雨堂)을 옮겨 이곳에 터를 잡았다. 서산대사도 자신의 가사와 유품을 이곳 해남땅 대둔사에 맡겼다. 그리고 조선의 최고의 명필 김정희를 비롯해, 「동다송」을 지은 다성(茶聖) 초의선사 등 수많은 대가들이 이 땅을 찾아 해남의 아름다운 풍물과 산하를 노래했다.
그리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황석영, 김지하 등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 땅끝까지 내려와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으며, 지금도 많은 시인 작가들이 해남을 동경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해남은 유독 시인이 많은 곳이다. 현대문학사(現代文學史)에서 보면 해남은 ‘시인의 요람’, ‘한국 시문학의 일번지’ 라고 일컬을 만큼 걸출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여기서 그 많은 시인들을 다 언급할 수 없는 일이며, 편의상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거나, 당대의 평론가와 독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몇 몇 시인들만을 골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시외에도 소설, 수필, 희곡, 동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명을 얻고 있는 분들도 많지만 시간 관계상 오늘은 시인들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2. 해남이 낳은 시인들
1) 향토와 정한(情恨) 의 서정시인 - 이동주
해방 후 한국문학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심호(心湖) 이동주(李東柱)(1921~1979)는 새댁」, 「혼야」, 「강강술래」 등 우리 고유의 가락을 시적 운율로 잡아 미적 체험의 질료가 되도록 한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있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동주는 그 당시 시인치고는 시대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시의 눈길을 고향으로만 향한채 고향의 그늘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인생역정은 늘「타향살이」였다.
그는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천석의 거부(巨富)로 조부와 백종조(伯從祖)가 참판벼슬을 지내 해남일원에서는 「雨참판」댁으로 불리며 하늘을 찌를듯한 권세와 전설적인 영화를 누려왔다. 당시 그의 생가는 8백여평 부지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등 대궐같은 기와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가세를 뽐냈으나 부친의 방탕으로 5천석의 재산이 점점 기울다가 그가 열한두살되던 무렵 아주 영락해버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생가터는 대부분 일반농가가 들어서 있고 행랑채는 충주(忠州)박씨 문중에서 사들여 절반 가량으로 축소 개축해 제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 당시 영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는 이후 공주의 외가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1937년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이때부터 순탄치 않은 「가난한 시인」의 생활을 하게 된다.
공주고보를 졸업한 그는 모친이 염소를 팔아 마련해준 7원을 가지고 상경, 삶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기 위해 1940년 혜화전문(現 동국대 불교과)에 입학한다. 그 시절 이동주 시인은 현미떡팔이, 막노동, 백화점 선전문 작성, 심지어는 賣血까지해 2년 간 고학을 했다.
일제 강제징용이 있어 중퇴를 한 그는 고향에 내려와 목포시청에 잠시 근무하는데 이때 고향사람들을 위해 직무를 유기하고 징용을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그는 혜화전문 시절「朝光」에 작품을 이따금 발표하다 해방 이듬해에 4인시집「네동무」를 목포에서 간행했으며, 그는 이때 호남신문 목포주재기자, 문화부차장을 역임하고 1948년 상경, 신사조사(新思潮社)에서 근무하면서 조연현의 소개로 김영랑 서정주를 첫 상면한다. 이를 인연으로 50년 「문예(文藝)」지에 「황혼」「새댁」「혼야」등 작품이 미당 서정주(徐廷柱)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미당은 추천사에서 『그의 시의 체온의 방향은 범세계성이나 범인간성이나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먼저 그외 가장 가까운 조선(朝鮮)-그중에도 그와 제일 가까운 향리근처 사람들의 온갖 선미(善美)한 생활감정에 대한 공감과 그 동정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적었다.
이후에 발표된 「강강술래」를 비롯하여 「등잔밑」「마을」「고향散見」「흥타령」「散調」등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고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그의 시풍을 가리켜 「情恨과 향토성의 미학」으로 분석하는 시인이 많다.
특히 초기작품에서 향토성이 서민적인 한(恨)과 토속적 정서를 토대로 애수 등을 그린 것이 많다. 또 그의 시의 형식의 특징은 여운(餘韻)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恨과 멋」이라는 글에서 말한 「시인은 번다하게 시를 뇌까릴 필요가 없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언어가 극도로 절제돼 사용되면서도 진솔한 바탕 위에 고전적인 여운이 살아있다. 특히 시어의 굴림과 삭힘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그의 많은 시들을 보면, 돌리고 굴리고 되풀이하는 형식이 그저 뜻을 강조한다거나 흥겨운 가락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되풀이가 몸속에 깊숙이 배어져 있는 소리를 시의 세계에까지 끌어올리는 승화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시집으로 『혼야(婚夜)』(1951), 『강강술래』(1959), 시선집에 『산조(散調)』(1979), 유고시집 『산조여록(散調余錄)』과 시선집『이동주시집』(1987) 등이 있으며, 수필집 <그 두려운 영원에서>등 1백여편의 수필과 <문인실명 소설집(文人實名小說集)> 등 50여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2) 관조적 이미지스트 - 박성룡
박성룡(朴成龍) 시인은 1932년 화원면 마산리 출신으로 일제시대 징용 간 순박한 농부의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시인의 나이 13살이었던 194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62년도에 작고하시어, 형님(16才차이)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광주서중, 광주고,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6년 [문학예술]에 「교외」, 「화병정경」 등으로 등단하였으며, ‘풀, 나무 등 자연 사물을 철저히 추구하여 이것을 서정성과 서경성이 유합되는 입장으로 표현’하면서 전통적인 서정시인과는 다른 신서정을 보여준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60년대 대표적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시집으로는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19696),『춘하추동』(1970),『동백꽃』(1977),『휘파람새』(1982), 『꽃상여』(1987),『고향은 땅끝』(1991) 등이 있으며, 1998년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선집 『풀잎』을 상재한 바 있다.
중학교 교과서에 詩 <풀잎>이 수록되면서(73년 이후) 널리 알려졌으며, 전남도 문화상(57년), 현대문학상(64년), 시문학상(82년), 호남문학상(86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문학상(1989)등 수상했다.
그리고 「사상계」, 「민국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등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시작에 전념하고 있다.
김종길 시인에 의하면 그는 시는 “조형성과 음악성이 균형과 조화”을 이루고 있으며, “「처서기(處暑記)」에 보이는 벌레소리의 묘사는 우리 시뿐만 아니라 세계 시를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절창이다”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는 등단작 「교외」 외에도 대표작으로 「꽃상여」, 「백목련」,「양귀비꽃」「동백꽃」 등이 있으며, 교과서에 실린 「과목」「풀잎」등으로 유명하다.
3) 조국과 민중을 사랑한 민족문학의 큰 별 - 김남주
김남주(金南柱)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8년이 지났다. 조국의 민주화 자주화 그리고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염원을 가득 안고 폭발적인 남성언어로서 세상의 잠을 깨우던 시인. 김남주!
김남주 시인은 1946년 해남 삼산면 봉학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일대기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살펴보면, 고등학교 시절(광주일고)에 입시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 반대하여 2학년 때 자퇴했으며, 1969년 24세 때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시절에는 3선 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지를 제작했다. 그리고 전국적인 반유신투쟁 전개를 위해 지하신문 ‘고발’지를 제작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8개월만에 석방되었다.(이 해 전남대에서 제적)
그 이듬해인 1974년 29세에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진혼가」「잿더미」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때의 모습을 당시 『창비』의 주간이었던 염무웅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사무실에 나타난 당자의 인상은 그의 시의 펄펄 뛰는 생동감과 자뭇 거리가 있었다. 그의 시는 김수영, 조태일, 김지하 같은 앞세대 시인들의 선행업적을 충분히 숙독한 흔적 즉 날카로운 현대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사람됨은 도무지 때가 벗지 않는 투박함 그것이었다”
그후 1977년에는 훗날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되는 ‘해남농민회’를 결성 했으며,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8년 상경하여 ‘남민전’에 가입하였고, 1979년 구속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9년째 복역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리고 6년 후 1994년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살아 생전 본인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 민족문학사에 가장 우뚝 선 ‘민족시인 최고봉’으로 기억하고 있다.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를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다’라고 어느 평론가가 말했듯이 아무도 그가 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남주 시인의 시가 다른 시와 구별되는 특징이나 특질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모순(矛盾)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진실하고 힘찬 어조로 노래했다는 것일 게다. 또한 문학적 표현수단에 있어서도 우리의 민중문화의 전통과 하이네, 브레이트 ,네루다 등 외국의 저항시인들에서 볼 수 있는 반어와 풍자, 알레고리를 탁월하게 활용하여 높은 문학성을 획득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김남주 시인의 시를 접하게 된 것은 1978년 『창비』봄호에 실린 「아우를 위하여」와 「편지」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생 시절이었는데 문학에 관심이 많아 대학생이던 사촌형 집 있는 창비를 빌려보곤 했다. 그 때 내 소감은 김남주 시인이 김준태 시인의 시를 읽고 느낀 그런 감정이었다.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김남주가 누구인지는 잘 알 지 못했다. 그러다 훗날 대학생이 되어서야 ‘필사본’으로 옥중시를 읽으면서 김남주 시인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학살」 같은 시를 암송하면서 전율을 느껴야 했다.
1984년에 첫시집 『진혼가』는 70년대 후반 5년간 발표한 스물댓 편 시들을 모아 출간되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비로소 70여 편의 옥중시가『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리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조국은 하나다』가 출간되었다. 그후 출감 후에 1989년 시선집『사랑의 무기』와 『솔직히 말하자』가 나왔으며, 1991년 『사상의 거처』와 시선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산문집 『시와 혁명』이 출간 되었고, 1992년 『이 좋은 세상에』와 옥중 시선집 『저 창살에 했살이1.2』가 나왔다. 그리고 1995년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시인의 마지막 작품집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98년에 「옛마을을 지나며」」「별」같은 그의 서정시들을 모아 낸 시선집 『옛 마을 지나며』가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의 발문에서 소설가 황석영은 “지금 와서 살피니 더욱이나 90년대 초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반성과 전향의 제스처나 엄살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 그는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엄살과 행세에 비하면 그의 시들은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동시처럼 맑기까지 하다”고 말하며 너무 일찍 간 시인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어디 황석영 뿐이겠는가.
나는 김남주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그가 단지 ‘투사’나 ‘전사’가 아닌 ‘사랑의 시인’임을 알았다. 「사랑은」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가질 줄 안다’고 노래했듯이, 그는 고향과 민족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개동벌레 하나」에서 “개똥벌레야 나는 네가 이슬로 환생했다고 / 노래하는 시인으로 살련다 / 먼 훗날 하늘나라에 가서” 라고 노래했듯이, 그는 영원히 우리 곁에 시인으로 남을 것이다.
4) 여성해방 문학의 기수이며, 고독한 수도자 - 고정희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과 여성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요, 여성해방운동가로 알려진 고정희(高靜熙) 시인은 1948년 해남 삼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나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중 불의의 사고로 43세의 짧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고독한 수도자처럼 순결한 삶을 살다 갔다.
시인의 본명은 고성애(高聖愛), 5남 3녀의 장녀로서 거의 독립적으로 성장, 19세 때 『새농민』지에 작품을 발표한 바가 있으며, 20대에는 『새전남』, 『주간 전남』 등의 기자와 광주 YWCA 간사로 일했다.
1975년 27세 되던 해에 『현대시학』에 「연가」「부활과 그 이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31세 때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그녀는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를 거치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게 되었고, 초기에는 「아우슈비치」 같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들’을 써왔다.
그 후, 그는 5.18 광주항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무하는 「초혼제」등 장시들을 잇달아 발표했으며,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1984년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창립 동인으로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여성해방문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1989년에는 여성해방을 지향하며 창간된 여성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주간을 맡기도 했고,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89)와 『여성해방출사표』(1990)에서는 여성의 삶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여성사 연구」연작 등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남긴 시집은 『누가 홀로 술틀을 밝고 있는가』(1979), 『실락원』(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89), Sister's We ARE ter Path and ter Light(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출사표』(1990),『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뱀사골에서 쓴 편지』(1991),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등이 있다.
고정희 시인의 문학적 삶을 살펴보면 우리 모두가 겪어 왔던 1980년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한 편으로는 당시의 민족민주 운동의 물결을 타고, 다른 한 편으로는 새롭게 일기 시작한 여성해방 문학의 물결을 일으키며, 그 시대 누구보다도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살다 갔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또한 고정희 시인은 일생동안 수천 장의 편지를 썼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고정적으로 한 두 친구에게 서신을 계속 보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상 속에서도 민중과 민중 문학에 대해서, 그리고 여성과 여성 운동에 대해서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했다.
그러나 나는 고정희 시인의 삶과 시를 살펴보면서, ‘그는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그는 외롭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신도 시집 『지리산의 봄』자서에서 그런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고 있었다.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터인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그는 「사랑법 첫째」,「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같은 시를 남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했고,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고정희 시인! 그는 지리산을 무척 좋아했고, 끝내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지리산과 하나가 되어버렸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즐겨 불렀던 외로운 사람, 그러나 만인에게 사랑의 노래를 남기고 간 우리 고향의 시인, 그를 나는 '가슴이 따뜻한 우리 시대의 큰누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5) 대지의 생명력을 노래하는 낭만적 리얼리스트 -김준태
김준태(金準泰) 시인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민중항쟁의 역사로 기록될 80년 5월, 그 광주민중항쟁의 슬픔과 분노와, 희망을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로 노래하여 광주의 비극을 세계에 최초로 알린 시인으로 유명하다.
김준태(金準泰) 시인은 1948년 생으로 해남 화산면이 고향이다. 그는 1969년 대학생 신분으로 조태일 시인이 간행한 [詩人]이라는 잡지에 김지하 시인과 함께 「머슴」,「서울驛」「시작(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등으로 등단하였으며, 첫시집 『참깨를 털면서』(1977)는 신경림 시인의 『농무』, 이시영 시인의 『만월』과 더불어 70년대 리얼리즘 시의 한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70년대 이후 민족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의 시적 향기를 어느 정도는 맡았다고 해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남주 시인도 어느 자리에선가 그에게 받은 영향(?)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시의 맛을 재미있게 본 것은 1970년 『창작과 비평』여름 호에 실린 김준태의 시에서였다. 그 때 내가 먼저 떠올린 생각은 ‘야,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쓰겠는걸’이었다”, 그 때 김남주 시인이 읽은 시는 「산중가」,「보리밥」등이었다.
광주항쟁 이후 그는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1981), 『국밥과 희망』(1984), 『넋통일』(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칼과 흙』(1989),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1994) 등 통하여 ‘대지의 주인인 사람이 대지 위에서 꿈꾸고 싸우며 피흘리는 삶들을 노래’ 해 왔다. 그는 5월 정신을 대지의 사랑으로 승화시켜 노래한 시인이다. 특히, 『칼과 흙』에 실린「밭시」연작은 대지의 건강한 생명력과 뜨거운 사랑이 배어 있다. 그의 흙에 대한 사랑은 ‘산업화 이면에서 소외당한 농촌에 대한 아픈 사랑’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김준태 시인은 눈물이 많은 시인이다. 어느 시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에게서는 남도 끝 그의 고향 해남의 보리밭 냄새가 물씬 난다. 고향집의 토담과 살구꽃, 보리밥, 참붕어, 고무신, 물꼬싸움 그리고 황토바람에도 백년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장승의 냄새가 난다. 그는 고향의 것이면 구정물통이나 풀벌레 한 마리라도 보듬고 감격해서 울어버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역사 의식과 동물적 기백의 순발력을 지닌 시인으로서 비극적인 민족 현실에 대해 거센 목소리로 혹은 고요한 서정으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김준태 시인, 하면 우리는 「감꽃」을 잊을 수 없다. 이 짧은 시 한 편으로 우리의 역사를 이처럼 극명하게 노래할 수가 있을까?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문명사적 전환기인 요즈음에도, 그는 기술문명으로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낭만적 리얼리스트답게 그는 식지 않는 정열로 이 땅의 현실과 역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노래할 것이다.
3. 나오면서
이제까지 우리는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문학사에 빛나는 우리 고향의 시인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았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80년대『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등과로 최근에 발표된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로 널리 알려진 80년대의 ‘풍자적 모더니스트’ 황지우 시인과 『대청봉 수수밭』이라는 통일시로 시작하여 『사진리 대설』『성에꽃 눈부처』등에서 격조 높은 선(禪)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고형렬 시인까지를 소개하고 싶었으나 시간의 제약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황지우 시인은 북평면이 고향이고, 고형렬 시인은 삼산에서 출생하여 강원도 속초에서 성장하였지만 해남 출생으로 문학사에 남을 인물들이다. 물론 이 외에도 우리 지역에서 출생한 수많은 시인, 작가들이 있다. 특히 수필가로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법정스님, 시조시인으로 문명이 높은 윤금초 시인. 「서울로 간 허수아비」로 유명한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 그리고 근래에 「어른들도 길을 잃는다」로 만해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박정효 등도 해남이 낳은 기억할 만한 작가들이다. 이들을 이 자리에서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지만, 모두 우리 지역의 문화적 유산이며 재산이다. 그들이 남긴 문학적 발자취와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늘 새로움과 신선함을 던져주고,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안겨 줄 것이다.
바야흐로 문을 연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말한다. 문화의 수준이 삶의 질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우리 지역 출신 문학인들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져 널리 알려 질 수 있기를 바라며, ‘문학지도 제작’ ‘문인들의 생가 복원 및 정비’ ‘문학관 건립’ 등 같은 사업이 이루어져 해남을 찾는 여행자들이 우리 지역 출신 문인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참고자료 1] 해남출신 대표 시인 연보
● 이동주(李東柱 : 1920 ~ 1979) 시인. 아호는 심호(心湖)
1920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 출생 / 혜화 전문 학교 중퇴.
1940 <조광(朝光)>에 '귀농'(1940. 6.), '상렬'(1943. 8.) 시를 발표하기 시작
1950 <문예>에 '황혼', '새댁', '혼야' 등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 / 이후, 원광대학교 서라벌 예술대학 등의 교직을 거쳐, 말년에는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겸하기도 했던 그는 월간문화종합지 <글남문화>, 동인지 <신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현대문학>, <자유문학>의 중견 시인으로 문명을 날렸으며 현대문학상, 자유문학상 등을 수상.
1979 암으로 세상을 떠남. 두륜산 도립공원 구주차장 길편에 그의 대표적인 시 '강강술래'가 새겨진 시비가 1980년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해남지부 회원 등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에 의해 세워짐.
시집으로 <혼야(婚夜)>(1951), <강강술래>(1959), 시선집에 <산조(散調)>(1979), 유고시집 <산조여록(散調余錄)> 등이 있으며, 수필집 <그 두려운 영원에서>등 1백여편의 수필과 <문인실명 소설집(文人實名小說集)> 등 50여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 박성룡(朴成龍: 1932~ )시인, 호는 남우(南隅)
1932년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출생 /중앙대 영문과 수학.
1956년 『문학예술』에 「화병전경」등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 시작.
박희진, 박재삼 등과 함께 {60년대 사화집} 동인 활동
1969년 첫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간행 후, 『춘하추동』(1970) 『동백꽃』(1997) 『휘파 람새』(1982) 『꽃상여』(1987) 『고향은 땅끝』(1991), 시선집 『풀잎』(1998) 등 간행.
1964년 현대문학상, 1982년 시문학상, 1989년 국제펜 한국본부 문학상, 1992년 한국시협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함.
●노향림(盧香林 :1942~ ) 시인
1942년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서 출생하여 목포에서 성장,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1987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k읍기행』(1977),『연습기를띄우고』,『눈이 오지 않는 나라』(1987),『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1992),『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1998) 등이 있다
●윤금초(尹今初 :1943~ )시조시인
1943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갑길리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및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詩壇에 나왔다. 「어초문답」(1977) 「해남 나들이」(1993) 「땅끝」(2000)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조 짓는 마을」(1998), 수필집 「갈봄여름 없이」(1980)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의 사랑」(1992) 등을 출간. 정운시조문학상(1986), 민족시가문학대상(1991), 중앙시조대상(1993), 가람시조문학상(1999)을 수상했다. 현재 오늘의 시조학회 회장, 중앙문화센터 우리 시조 쓰기 교실 출강, 작가회의 자문위원, 경기대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김남주(金南柱:1946 ~ 1994) 시인
김남주 시인은 전남 해남군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964 (18) : 광주일고 입학, 입시위주의 획일적 교육제도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 / 1969 (24) :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영문과 입학.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끔. 지하신문 '함성'지 제작 / 1973 (28) : 전국적인 반 유신투쟁을 위해 지하신문 '고지'지 제작. 반공법 위반 혐으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투옥 8개월만에 석방됨.전남대서 제적./ 1974 (29) :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음.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 1975 (30) : 광주에서 사회과학 서점 '카프카' 개설 / 1977 (32) : 농민들과 함께 '해남농민회'결성. (한국 기독교 농민회의 모체). 광주에서 황석영, 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개소./ 1978 (33) : 상경하여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 남민전 전위대 전사로 활동. 수배중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청사)번역출간. / 1979 (34) : 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 구속되어 투옥됨. 이듬해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1984 (39) : 첫시집 <진혼가>(청사)출간. / 1987 (42)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출간. 일본에서 시집<농부의 밤> 일어판 출간/ 1988 (43) :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하이네․네루다․브레히트 시선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출간. 12월 21일 형 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8개월만에 출소 / 1989 (44) : 1. 29 광주 문빈정사에서 박광숙과 결혼. 옥중 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삼천리) 출간. 시선집<사랑의 무기>(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풀빛) 출간. / 1990 (45) :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한마당) 출간. 92년 12월까지 민족문학 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 1991 (46) : 제5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 비평사)출간. / 1991 (46) : 제5시집<사상의거처>(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상'받음. 시선집<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출간. 산문집<시와 혁명>(나루)출간. 하이네 장치 풍자시집2<아타 트롤>(창작과 비평사)번역 출간. / 1992 (47) : 제6시집 <이 좋은 세상에> (한길사) 출간. 옥중 시선집<저 창살에 햇살이 1․2> (창작과 비평사)출간. 제6회 단재 문학상 수상. / 1993 (48) : 윤상원 문학상 수상.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문학의 밤' 개최. / 1994 (49) :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췌장암으로 별세. /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음.
1995년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간행 / 2000. 5. 20 광주 중외공원에 김남주 시인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고정희 (高靜熙 :1948~ 1991) 시인
고정희는 1948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고양동씨의 5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성애(聖愛)다. 1969년 목포지역의 젊은 문인들로 이루어진 ‘흑조’동인으로 활동,
1970년 『새전남』,『주간전남』기자, 1974년 광주 YMCA 프로그램부 간사로 활동.
19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1979년 한국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시집으로는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 1979), {실락원}(인문당, 1981 절판),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눈물꽃}(실천문학사, 1986), {지리산의 봄}(문학과 지성사, 1987),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창작과 비평사, 1989),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0), {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 1991),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 1992) 등이 있으며,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수상했다.
그는 5.18 광주 항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무하는 장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1984년 대안 문화 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에 참여, 이후 적극적인 동인 활동과 함께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1989년에는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창간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주간을 맡아 1년간 그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으며,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90)에서는 여성의 삶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91년 6월 8일,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정립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또 하나의 문화] 월례 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 혁명"을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평소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 등반을 감행, 이튿날 뱀사골에서 실족, 43세를 일기로 불타던 삶을 마감하였다.
● 김준태 (金準泰 :1948~ ) 시인
전남 해남군 화산면 대지리 출생 /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조선대 사범대학 독어과 졸업
1969 『전남일보』『전남매일신문』에 각각 「재기」「이 봄의 교향악」이 당선 ,『시인』에 「머슴」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며, 1977 시집 『참깨를 털면서』(창작과 비평사) 간행, 1980 광주민중항쟁 당시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를 『전남매일신문』에 발표하여 해직되었으며, 1981 시집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국밥과 희망』(1984)을 펴낸 이후 『불이냐 꽃이냐』(1986)』 『넋통일』(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 『오월에서 통일로』, 『칼과 흙』(1989), 『통일을 꿈꾸는 색주가』(1991),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1994), 『안녕, 20세기』(1999),『지평선에 서서』(2000) 등의 시집을 계속해서 내 놓았다. 이밖에 평론집, 수상집, 명시해설집 등 10권의 저술이 있다. 또한 그는 1996년에 중편 '시인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로 "문예중앙"을 통해 소설가로서 데뷔하기도 했다. 1983년에 광주문학상과 현산문학상을, 1995년에 전라남도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전남일보와 광주매일에서 부장을 거쳐 편집부국장으로 종사했고,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광주․전남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 초빙교수로 있다.
●황지우 (黃芝雨: 1952 ~ ) 시인
1952년 전남 해남군 북평면 배대리에서 태어나 1956년 광주 이사,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고형렬(高炯烈 :1954~ ) 시인
1954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에서 출생하여 강원 속초에서 성장. 1979년『현대문학』에「莊子」등을 발표하여 등단. 시집『大靑峯 수박밭』『海靑』『서울은 안녕한가』『사진리 大雪』『마당 식사가 그립다』『성에꽃 눈부처』 등과 장시『리틀 보이』장편산문『은빛 물고기』동시집『빵 들고 자는 언니』를 간행함. 현재 '시인들이 함께 만드는 계간 시평' 편집인. 창작과비평사 시선 기획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이지엽(李志葉: 1958~ ) 시인
1958년 해남군 마산면 은적골에서 태어남 (본명: 李景瑛), 1972년 해남중학교 재학 중 가족들의 상경으로 서울로 이전, 성균관대 영문과를 거쳐 동대학원 국문학과 마침/ 1982년 한국문학 백만원 고료 신인상에 시 「촛불」外 당선,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일어서는 바다」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시집으로『샤갈의 마을』, 『다섯 계단의 어둠』『씨앗의 힘 』, 시조집으로『떠도는 삼각형』,『해남에서 온 편지』 등이 있으며, 주요평론:「존재와 성찰의 시학」,「형식의 자유로움과 그 틈새의 세상읽기」, 「순수와 화해와 자존의 내면 풍경」등 많은 시와 시조 관련 평론 발표 / 현재 『열린시조』편집주간,『시와 사람』편집위원,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