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아이’로 기르기
<히라이 특강1> 오늘은 가정의 달, 5월에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 아이로 기를 수 있는지를 안내해 주신 일본의 심리학자 히라이 노부요시를 모셔서 그 분의 이야기를 듣기로 하겠습니다.(문기정)
‘좋은 아이’로 기르기 히라이 노부요시 <진정 순진한 어린이란?> 나는 45년에 걸쳐 어린이를 상대로 연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하고자 하는 의욕」과 「사고력」을 길러주면 훌륭한 청년이 된다고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다는 것은 어린이와 함께 놀거나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놀이와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이에 대한 연구로서 이것 이상 좋은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이야기 해 온 「아이에게서 배운다.」라는 말을 실감한 것입니다. 노년기에 들어가 있는 나는 많은 아이들과 즐겁게 놀 기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언제나 달리고 있다고 말하여도 좋은 존재입니다. 때문에 어린이와 놀기 위해서는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손자가 여덟이나 되어서 내 주변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을 필두로 초등학교 2학년까지 손자들이 연년생 이어서 그 연령에 따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전혀 나무라지 않기 때문에 손주놈들은 내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있는 그대로의 기분이나 모습을 표현하는 아이들을 나는 「순진한 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거짓을 둘러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 말에 잘 따르는 아이를 순진한 아이라고 말하고 있고 어머니, 아버지 되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한 어린이들 가운데는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거짓을 둘러쓰고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꾸지람을 많이 듣는 아이들은 지나치게 거짓말을 하게 되어 사춘기가 되면 괴로운 문제들이 확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신과 거짓을 둘러 쓴 자신과의 갭을 느끼게 됨으로써 괴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손주놈들이 내 앞에서 거짓스럽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 행동 때문에 내가 곤란을 당한다하더라도 기쁜 일입니다. 다만, 나와 손자와의 사이에는 정서적인 끈이 단단히 매어져 있기 때문에 손자는 나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할아버지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생각함」의 마음을 발전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곤란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을 발전시켜 갑니다. <3세 미만의 버릇들이기는 어린이의 의욕 키우기에 역효과> 그런데, 하고자 하는 마음, 즉 의욕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손자의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손자의 부모(나의 장남 부부)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어린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젊은 부부는, 물론 우리들에게 아이들을 맡길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육소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반대하였습니다. 나는 1949년부터 도쿄의 보육소에서 도와주기도 하고 협력 연구도 하여 왔지만, 3세 미만의 어린이의 보육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르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장난질」을 할 기회가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몇몇 종류의 장난감은 만질 수 있지만 가정에서처럼 어린이가 맘껏 장난질하는 가재도구가 부족한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어린이들은 주위에 있는 가재도구를 차근차근 장난질하면서 「하고자 하는 마음」을 스스로 키워 가는 것이며, 그와 함께 가재도구가 어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즉, 경험학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학습을 하는 가운데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여 갑니다. 두 번째로, 쓰레기통이나 티슈페이퍼 등은 어린이 손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통을 뒤져서 흩어 놓으면 틀림없이 보모의 뒤처리가 따르게 되며, 티슈페이퍼를 끄집어내면 쓸모없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그 당시에는 이상하게도 「버릇주의」 보모들의 그룹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 세운 것이지요. 1세의 보육의 목적에 「흘리지 않고 먹기」라는 것이 있어서 식사시간에는 큰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그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팔꿈치를 붙이고 먹게 하는 버릇을 들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보모를 만나게 되면 하나의 패턴만을 강제 당하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라지 않게 됩니다. 만약 흘리기라도 하게 되면 나무람을 당합니다. 점차로 「하고자 하는 의욕」에 압력이 가해지는 꼴이 되겠지요. 어린아이들은 밥을 흘리기도 하고 그릇을 뒤집기도 하면서 점차 능숙하게 되어지는 경험을 하여야 합니다. 특히 실패의 체험은 어린이의 발달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결의가 생겨나기도 하고, 그러기 위하여 기술을 향상시키려고 합니다. 실패를 하게 되면 반드시 뒷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싫은 어머니들은 손을 써서 과보호하게 되고 「하고자 하는 의욕」을 빼앗아서 어른에게 의지하려는 기분(의뢰심)을 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실패했을 때 성질을 내는 어머니들이 의외로 많은 것은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꾸짖지 않는 교육의 실천> 아무래도 인생 초기에 「버릇주의」보모에게 보육되는 것은 「하고자 하는 의욕」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손자를 보육소에 넣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나는 낮 동안의 보육은 내가 맡겠다고 말을 꺼내었습니다. 처는 어린애들이 우리 집으로부터 떠나간다면 누군가의 아이들이라도 맡아서 기르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던 참입니다. 그것이 우리 집의 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처는 은사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 나와 같이 「꾸짖지 않는 자녀 양육」을 실천해 왔기 때문에 좋은 보모(보육할머니)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노후에는 두 사람만의 즐거운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손자를 맡아 기르게 되자 그러한 즐거움은 예치해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보육하는 데서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정이 있게 되자, 맨 처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것은 「장난질」을 중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장난질」이란 아동심리학에서는 「탐색 욕구에 기초한 행동」이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탐색 욕구란 어른들의 말로 바꾸자면 연구심 내지 탐험심이기 때문에 연구심이 왕성한 성인이 되게 하려면 「장난스러움」을 충분히 인정해 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탐색 욕구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장난질」을 하기 전이라도 침상의 갓난아이가 손을 응시한다든지 눈이 시계추를 따라 간다든지 천정에 그려진 그림을 쳐다보는 일 등 혼자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지 않으니 하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갓난아이가 귀여운 나머지 혼자놀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안아 주고 얼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간신히 몸을 이동할 수 있게 되면 어린애는 「장난질」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실을 ‘보육실’이라 이름 짓고 우리가 쓰는 주요한 액자나 장식물을 정리한 다음 위험한 물건을 제거하여 충분히 「장난질」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여도 절대로 꾸짖지 않기로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큰 피해를 입은 일은 미닫이를 부순 것과 벽이나 문짝에 매직잉크로 ×를 그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도 어린이다운 생각에서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난질로 할아비가 곤란하다는 것을 정서적으로 호소하였습니다. (2010. 5.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