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의 과음과 수면 부족 때문이어서인지 버스에서 깜박 졸은 모양이다.
누군가가 깨우는 손길에 눈을 뜨니 차장 아가씨가 여기에서 내리라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발 아래의 신작로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니 5월의 햇살에 반짝이는
길가의 미류나무 잎사귀에 눈이 부신다.
부대를 확인하고 근처 이발소에 들어가니 그 아까운 긴머리는 이발사의 무표정 하고도
능숙한 손길에 발아래 수북히 쌓여지고, 거울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몰골은 털 뽑힌
장닭 모양 말이 아니다.
술에 흠뻑 취해 나의 손을 잡으시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니가 군생활 어찌 하겠노?
아무쪼록 건강히 군 생활에 충실하라"시며 끝내 눈물을 보이시던 아버님.
대문 앞에서 어머님과 누나와 작별을 하고 마을을 지나 동구밖 성녕거랑까지 배웅나온
친구들과 손을 흔들며 이별을 하고 버스를 타던 일들이 아련히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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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생소하고 낯설다.
하지만 곧 익숙 되겠지.
- '77년 5월 3일
새벽에 용산역에 내려 103보충대와 동해경비사령부로 떠나는 전우들과 이별하고
용사의 집에서 내어주는 메마른 건빵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서울역을 거쳐 화전이라고
적힌 기차역에 내렸다.
<환영>이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 아래서 군악대가 마중나와 '돌아와요 부산항'을 연주
하며 우리들을 맞이해 주었다.
따블백을 둘러맨 채 트럭에 나눠타고 부대로 들어오니 공기부터가 심상치 않다.
후반기 4주 교육이 있을 이곳은 전반기 때의 창원보다 훨씬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인간은 환경의 동물.
어떠한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적응할 수 있는게 인간이 아닌가.
지금까지 모든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고향 친구들이 무척 생각나던 하루..
- '77년 6월 18일.
제 29주년 국군의 날 (1977년 10월 1일, 여의도 광장) ..
맨 앞에서 두번째 중간쯤에 나의 모습이.. (보이시는지?)
이 하루, 아니 몇 시간을 위해 석 달을 연습했다... ;;;
이곳에서 흘린 땀을 모두 모은다면 아마도 몇 드럼은 될 듯.
행사가 끝나면 10일 간의 특별휴가가 주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행사가 끝나고 자대로 복귀하고 나니 휴가는 커녕, 지금까지 밀린 교육, 전투력 측정 등이
줄줄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휴가를 가지 못한 것이 지금껏 통한(痛恨)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창원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받은 아버님의 편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그런지 내 이름을 형님의 이름으로 오기(誤記)하셨다.
훈련서에서 보내온 의복과 돈을 받으시고 보내셨다.
군에서 아버님으로부터 모두 다섯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 편지는
돌아가시기 꼭 한 달 전에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부치신 편지다.
아버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귀대하던 부산역 앞 광장에서.. (용우, 나, 허말남, 김소자, 허영자)..
"용우야, 그날 친구가 사준 자장면과 탕수육,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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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중부전선 xx고지..
대대 전술훈련 마지막 날..
늦은 시간 주먹밥으로 저녁을 때운 후, 이번 훈련에 처음 참가하는 신병을 대동하고
매복하러 나섰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길을 따라 우거진 풀숲을 지나는데 이 풀이 낭떠러지 꼭대기에 매달려 있던 풀이었다.
서너바퀴 굴렀다..
신병은 목뼈와 이빨, 갈비뼈 몇개가 부러지는 중상,
나 역시 격렬한 통증 속에 왼쪽 무릎이 으깨어졌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뒤 아침이 되자 부어 오른 다리 때문에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귀대 후 중대, 대대, 연대, 사단 의무대를 거쳐 의정부 어느 군병원에서 후송 판결을 받았다.
머슥함과 동료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한 채 서울의 국군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
정형외과 병실 하나에 입원 환자 120여명..
병실 안은 하루종일 돗대기 시장을 방불케하고..
특전사 하사관들 설쳐대는 꼴이라니..
지뢰사고로 두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발가락이 가렵다고 고래고함을 쳤다..
입원한지 보름쯤 지났을 때 군의관이 날 보자고했다.
인사카드를 보니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 반갑다면서(3회 선배였다..) 이곳에 있지말고
대구나 부산으로 가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때까지 치료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밤 10시경, 영등포역에서 부산행 군용 후송열차에 올랐다.
부산..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새벽녘에 한기(寒氣)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열차는 어느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아침의 맑은 공기와 이슬을 머금은 들판은 5월의 풋풋한 싱그러움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이때 차창을 휙 스치는 이정표 하나..
진영 42Km..
진영..
아아.. 여긴 남쪽이구나..
불어오는 바람마저 포근한 남쪽이구나..
만발한 아카시아꽃이 지나는 열차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따블백을 어깨에 매고 한쪽다리를 절룩거리며 부산역을 빠져 나왔다.
혹시 고향사람이 없을까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는지 다리는 고사하고 오히려 고개가 아팠다.
국군부산통합병원..
의무요원이 내어주는 푸르죽죽한 환자복을 갈아입고 병실로 향했다.
모두들 누운채 호기심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지정받은 침대에 올라가 누우니 맞은편 벽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띠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이에게 평화。
- '79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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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우리 10중대 2소대 2분대원..
맨 처음 실시된 연대 최고의 분대를 뽑는 선봉분대 평가를 앞두고 중대장이
중대 대표로 우리 분대를 지명하였다.
한 달여 동안 피나는 연습 끝에 전투력 측정에 참가한 18개 분대 가운데 1위를 차지하여 분대원 전원이
꿈에도 잊지못할 10일간의 포상휴가를 다녀왔다.
그때 전우신문에 인터뷰도 하고 그랬는데.. (자랑이 좀 지나치나ㅁ..요?)
중대 ATT 도중 식사 중인 2분대원들.
꿀 맛인들 이보다 더 할까?
대대 전술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 동두천 부근에서..
M-79 유탄발사기 대회를 앞두고 한 번 땡겨보고 있는 중..
병영(兵營)에도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고..
휴일이면 양지밭에 모여서 온갖 이야기들을 나눴다.
아마 휴가 가는 이야기가 제일 많지 않았나 싶네요.
제대 말년 무렵 내무반 안에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군대지만, 그래도 빼치카 옆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빛난다.
빼치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겨울에 난로 생활도 해봤고,
스팀 시설이 있는 막사에도 있어봤지만 그래도 빼치카가 제일 나았다.
밤늦게 보초 서고 내무반에 들어와 언손을 비비며 끓여먹는 라면 맛은
이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맛이었고,
추운 겨울밤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노라면 벌겋게 달아오른 빼치카 방열판
위의 주전자 물끓는 소리에
갖가지 상념들이 머리를 스치곤 하였다..
년말이면 빼놓을 수 없는게 하나 있다.
다름아닌 학생들이 보내 온 위문편지가 그것이다.
위의 위문엽서는 선생님의 지시로 마지못해 쓴 것이겠지만 그래도
문학소녀 다운 면이 여러 곳에서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대 특명이 드디어 도착했다.
이제 한 달 후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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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가장 듣기 싫은것 중의 하나가 남자들 군대 이야기라고 합니다만,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라 어쩔수 없이(?) 또 잠깐 군 시절이 생각나네요.
이제 우리 2세들 세대가 우리가 지나 온 저 시절의 주역들이고 보니 그 동안 참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군대란, 이제껏 보고 또 자라 온 것과 너무나 급격히 변해버린
환경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또 당황하기도 하지만 어느듯 시간이 지나
면서 차츰 모든 것에 적응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한번 놀라기도 합니다.
오늘 그때 써 놓았던 일기장을 펼쳐보니 고향 바다 이야기가 가장 많은것 같습니다.
아마도 고향이라는 멍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소월의 시(詩)에도 있죠.
즘생(짐승)은 모르나니 고향이지만 사람은 못잊는것 고향입니다.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