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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회 |
선교기지 |
세례 교인 |
학습교인 |
1. 1905 |
321 |
470 |
9,761 |
30,136 |
2. 1907 |
642 |
1,045 |
18,964 |
99,300 |
2/1의 % |
200 |
223.3 |
194.2 |
329.5 |
* C.S.Park,Protrstant Christians and Politics in Korea,1884-1980's, p.58
** 앞의 【표1】이
정확하다면 이 통계는 1년
전의 것인 듯하다.
백만명구령운동은 10만에 달하는 전도일수와
수백만권의 소책자,70만권의 마가복음이
투입된 거창한 전도운동이었다. 더구나 국가의 존망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백만명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만 한다면 국권을
보존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는 이 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운동이
진행되는 때에,대구 등지에서
매일 저녁 비기독교인 천명에
가까운 청중으로 예배당이 가득
차고 4,5백명의 개종자가 무더기로
생겨났다는 보고가 있었지만,이 운동은
"교회들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의 큰 성장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고 지적된다. 이는 백만명구령운동이 그 거창한 구호만큼의
양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앞서의
대부흥운동과 함께, 전도운동에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되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촉진시켰던 점은 간과할 수
없다. 한 연구에 의하면,1905년~1910년간에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미북감리회가
180%,미북장로회가 250% 성장하였음에 비해 미남감리회는
700%나 성장했다는 것이다.
3. 일제치하의 기독교회의
성장
3-1.1910년 8월,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무단통치'라는 그들 자신의 표현대로, 한국인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재판을 거치지 않고도 형벌을 가하는 등의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한편 토지조사사업(1912~1918)을 통해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인 토지를 강탈하고 상업 제조업 광업 수산업 등 한국인의 산업활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통제를 가하여 한국인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였다. 일제는 정치 행정 법률 경제의 분야와 역사 어문 풍습 등의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한국의 것을 폐지하는 대신에 일본의 것을 강제하여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한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국권이 강탈당한 후 한국의 정치 사회적 조직체는 대부분 와해되었고, 민족운동가나 지식인들은 요시찰인물로서 박해를 받거나 해외망명을 결행하였다.
일제의 강점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인들 중에는 '매국원흉제거'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민족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국교회의 주류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일제 통감부의 의도에 따라 정교분리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데다가 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인의 강력한 항일민족의식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교회는 비교적 조용한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장로교회만 하더라도 1907년에 노회를 조직하면서 7인의 한국인 목사를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으며 1912년에는 전국적인 총회를 조직하여, 비록 종교적인 기구이지만 식민통치하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체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비교적 교육받은 식자층이어서 어느 정도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고, 선교사들들과의 교감을 통하여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그 움직임에도 일정하게 기맥을 통할 수 있었으며 또 한말 이래 강열한 항일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강점 후 한국기독교계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일제 강점 후 한국기독교에 대한 첫 탄압은 '105인사건'이다. 이는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을 광범하게 투옥,고문한 사건으로 당시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져서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만행을 스스로 폭로한 사건이기도 하다.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교회의 설립과 교역자의 초빙에 정부의 허가를 받게 함으로 기독교의 전도를 방해하는 한편 같은 해에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여 장차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공부와 예배 등의 종교교육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당시 한국에서 광범위한 조직을 가지고 가장 강력한 항일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계산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일제의 이같은 기독교탄압정책은 1919년 3.1운동때에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라고 하는 측면에서도 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3-2.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우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이 둔화 내지는 퇴보했다는 지적 이 있다. 그러나 다음의 【표3】과【표4】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장로교 세력이 가장 강한 평안남북도의 이 시기의 성장율은 그 지적과는 다른 측면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왓슨(Alfred W.Wasson)박사가 교회성장과 관련, '정적(靜的)인 시기'라고 말한 1912∼19년의 기간에도 이 지역에서는 교회의 성장이 침체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일제초기의 기독교탄압에 대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국망(國亡)의 서름과 시련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전환시켜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제강점 후에 정교분리를 고수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정책 때문에 민족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낼 수 없었던 장로교 총회가 대대적으로 비정치적인 복음화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전도대조직과 축호전도(逐戶傳道)를 본격화시켰던 것도 이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 결과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직적으로 노력한 그만큼 개종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국망 이후의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교회부흥운동이 민족의식과 일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10년부터 싹이 터서 1915년부터는 매년 부흥회로 발전하여 1950년경까지 계속된 강화도의 마니산 부흥회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강화도가 "가장 성공적인 선교" 지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 부흥회를 통해서이다. 처음 이 부흥회는 옹암교회의 새벽기도에서 시작되어 정기적인 부흥회로 정착하였고, 차차 강화도내의 여러 교회들이 참여하여 자연스럽게 도내 교회들의 정기행사로 발전하였다. 이 부흥회의 마지막 날에는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남여를 불문하고 돌 하나씩을 가지고 마니산에 올라가 참성단을 보수하면서 부흥회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감리교의 마리산(sic) 부흥회는 단군의 건국정신 즉 '하나님 숭배'와 '홍익인간'정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참성단을 보수 재건하는 것을 도리어 기독교인의 마땅한 의무로 확신했던 것이다. 단군정신과 기독교 신앙의 공존지대로서는 마리산 부흥회를 제일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고 한 것은 퍽 흥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부흥회가 일제강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과 마지막 날에 마니산 참성단에서 부흥집회를 마무리했다는 것, 그리고 일제하의 전 기간을 통하여 계속되었다는 것은 이 부흥회의 민족의식적 측면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흥회를 통해 영적으로 각성된 기독교인들이 전도에 힘썼을 뿐아니라 '한 동네에 학교 하나씩'이라는 구호아래 각처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쓴 것도 바로 그들의 신앙이 민족의식에 기반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3-3.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은 한국의 일반백성들뿐만 아니라 기독교회에도 용솟음치는 기쁨과 거기에 비례할 정도의 고통, 샘솟는듯한 희망과 그 못지 않는 절망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민족 독립에 대한 기대가 컸던만큼 독립국가 재건 실패에 따른 좌절의 심도 또한 깊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고통과 좌절 속에 빠져있는 식민지 백성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3.1운동 후에, 한 때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감돌고 사회주의권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고 있어서 제도권교회의 사회적응능력에는 한계가 점차 들어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적 시련을 통해 '고난'의 의미를 체험하는 한편 복음화를 민족구원을 위한 새로운 사명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에 새로운 형태의 전도운동과 몇몇 특정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부흥운동,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한 교단차원의 전진운동이 한국기독교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
3.1운동은 복음전파의
새로운 통로를 제시하여 기독교가
"두번째 급속한 성장 시기"를
맞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우선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활략상과
관련이 깊다. 3.1운동 때,
기독교인들은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을 차지하였을 뿐아니라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곳곳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선교사들은
비록 정치적 중립이 요청되었지만
비무장 시위군중과 수감자들에 대한 일제의
대처방식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3.1운동에서 보여준 기독교계의
이같은 활동상은 많은 한국인들을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갖게 하였다. 때문에 복음전파는
벌써 옥중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3.1운동은
국가의 독립을 성취시켜 주지는
못했지만 복음전도의 문은 넓혀
주었다. 한 예로, 만세운동에
앞장 섰다가 투옥된 어느
목사의 옥중전도를 들 수
있다. 그는 옥중에서 전도하였고,
복음을 받은 개종자들은 출옥
후에 자신들의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개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주님의
기쁨을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
고향에 돌아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들은 감옥에 있는
동안 받은 교리, 학습과
게례에 관해서 이야기하였다. 감옥에서 집에 돌아온
어떤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개종자들이 옥중교회로부터 그들의 고향에 있는
교회로 교적을 이전해 줄
것을 요청하는 많은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 목사는
14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이 곳 저 곳의
감옥으로 일곱번이나 옮겨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거기서
많은 동료들을 얻게 외었던
것이다.
민족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 이미 복음으로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확신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제 총독부가 그를 투옥시켜 이곳 저곳으로 옮긴 것은 그가 보통 때에는 갈 수도 없는 곳의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던 것이다.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때 한국인들 중에서 기독교에 대한 종래의 자세를 호의적으로 바꾸기도 하고 혹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3.1운동 때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민족의식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서명원(R.Shearer)이 이미 지적했듯이, 한국인들이 옥고를 치르는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복음에 대한 이 민족의 민감한 반응을 보여준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후 몇년 동안에 이루어질 신속한 교회성장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고도 하겠다.
3-4. 1920년대에 들어 교회가 성장한 또 하나의 계기는 부흥운동이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그 전 (1903년과 1907년의 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 과는 달리 특정한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영적 지도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전에는 부흥운동의 불길이 집단적 신앙체험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1920년대에는 장로교의 김익두(金益斗)와 길선주(吉善宙) 같은 부흥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 '신유(神癒)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 '내세지향적 부흥운동'을 불러 일으켰고, 이들보다는 뒤에 등장한 감리교의 이용도(李龍道)에 의해서는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 한국교회를 풍미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길선주, 이용도 같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그 전에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20∼30년대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체험이나 교회성장만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1920∼30년대 한국이 처한 민족적 시련을 딛고 일어서려는, 말하자면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기독교신앙의 한 표현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이 암울한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신앙적 표현형태였기 때문에 부흥집회에서는 눈물이 많았다. 이
때 눈물은 민족적 현실의
암울성과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아의 발견을 의미하며 동시에
눈물을 통해 카타르시스(淨化)시킴으로써
민족적인 식민지 현실과 죄악된
자기 한계를 역설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눈물과 고난의
종교적 시대적인 의미가 있다.
1920년 6월 평양, 김익두의
부흥회 광경이다.
사람들은 새벽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퍼서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였고 낮공부에 모이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이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 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 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또
울었다.
1920∼30년대에 부흥운동을 인도한 인물들은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외에 성결교회의 이명직과 정남수, 감리교회의 김종우, 유석홍, 신홍식, 장로교의 김인서 등이 있었다. 이 때의 부흥운동이 "암울한 민족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민중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말세'·'재림'을 강조하는 타계적·내세지향적 성격과 '회개'·'신생'을 주제로 한 내면적·신비주의적 성격은 당시 고양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적인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부흥회를 통해 정착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세지향적' '신비주의적' 신앙성격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의 존재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사실이다.
3-5. 지금까지 우리는 1920년대의 교회 성장에는 일제치하의 민족운동과 영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있었음을 보았다. 여기에 덧붙여 거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감리교와 장로교가 교단적인 차원에서 추진한 복음 전도운동이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교에서는 '부흥'이라는 용어 대신에 이를 '진흥'(振興,The Foward Movement ;전진운동)이라 하였다.
1918년 9월, 감리교(남)에서는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백년전진'의 개괄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1919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 '미국 감리교 선교협회'(the Methodist Missionary Society in America)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5개년계획과 관련이 깊다. 개괄적인 계획은 "각 회의, 기관, 땜워드 연맹, 주일학교 및 선교사집단을 발전시켜 교회의 영적 자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1)중보기도 (2) 생명과 물질의 청지기 정신 (3) 개인전도 (4) 자급 (5) 선교헌신(Missionary giving)으로 정했다. 이 계획은 3.1운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20년에 재개되었다.
장로교의 경우, 1919년 10월의 총회에서 '진흥부'를 신설하고 각노회에 3인씩 총 36인의 위원을 선정하여 진흥운동에 받차를 가하였다. 선교사 방위량(William N.Blair)이 책임자가 되어, 한국교회를 위한 새 생명활동으로 한국교회의 복음전파의 활동을 증가시키고 주일학교 교육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위량은 한 특별한 캠페인을 위해서 열권의 소책자(tracts)를 준비하였고 모든 장로교 선교지부를 여행하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거의 4천여개의 장로교회들은 '진흥운동'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1920년 한해 동안에 5,603명이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에 들어왔다. 이 숫자는, 신자의 수가 약간 줄어들었던 그 전해에 비해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등의 부흥(진흥)운동이 1차(1919∼25)와 2차(1929∼34)를 거치는 동안 연합운동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즉,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는 1933년 총회 때에 감·장 두 교단의 조직적인 진흥운동 추진을 위하여 "불신자를 상대로 하여 현대사조에 적절한 문제를 다룬 소책자 10종을 출판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할 것, 하기 휴가 때 순회전도 강연대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순회케 하되 강사는 현대사조의 전문가를 채용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강사 선정의 기준과 관련 이때 범교단적 진흥운동이 사회주의계열 등의 반기독교운동을 의식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이에 앞서 YMCA에서는 1926년 제5회 전국대회 때 "1927년에 평신도로 하여금 조선교회에 큰 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현재의 배 이상의 신자를 얻도록 힘쓸 것"과 "교파진흥 연구위원 선정의 건"을 결의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측면지원한 적이 있었다.
3-6. 이 기간의 교회의 부흥과 함께 주목되어야 할 점은 주일학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공부가 특별하게 행하여지지 않았는데 1920년대에 와서 주일학교 교육이 자리잡히게 되었다. 1925년 10월에는 '전조선 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어 정식대표 1천명에 참가자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회의 성장이 주일학교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지만, 반대로 주일학교 교육의 발전은 복음전도의 폭과 기회를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교회성장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3-7. 삼일운동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압박과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간의 성장율은 30%에 달하였고 세례교인도 69,000명에서 89,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34년도 감리교와장로교를 합한 교세는, 교회수 3,498, 한국인 전도인수 1,458, 선교사수 335, 교인총수 367,220(그 중 세례교인수 127,067, 세례아동수 33,102, 학습인수 44,692명이었다고 한다.)이었는데, 세례교인은 9년 전에 비해 거의 배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1930년 우리는 장로교 선교부가 제출한 다음의 보고를 접한다. "지난 해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은 선교 역사의 처음 이 삼십년 동안처럼 그렇게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세례는 줄어들었고 새로운 신자들은 이전처럼 많은 수효로 몰려들지 않았으며 교회들은 전국에 걸쳐서 전날처럼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교회의 질적 발전, 즉 교회가 그 조직과 자급(自給)과 진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1920년대 초에 보았던 것과 같은 활발한 양적 성장은 감지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가장 큰 교단으로 등장한 장로교회의 경우, 꾸준하게(steadily)는 아니지만,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전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핍박이 가속화되던 1938년 이후에는 그 성장이 저지되었고 2차대전이 발발하던 1941년 이후에는 세례교인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장로교의 경우 1939년에 세례교인 134,000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줄어들었고, 5,000개의 한국 개신교회 중에서 1,200개가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은 이를 잘 말해 주었다.
일제하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에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우리가 일제하의 한국교회 전체의
정확한 통계를 갖지 못해
장로교만으로 말한다는 것은 속단의
위험이 없지 않지만, 장로교의
세례교인 수로만 따진다면 1910년에
39,384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나타나 32년간에
279.3%나 증가했던 것이다.
4.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
4-1. 해방은 한국민족에게 생존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제 하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던 한국교회로서는 신앙의 자유라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던 '옥중성도'들이 출옥하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면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그를 이은 이승만 정권은 해방 독립된 국가의 정부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이러한 실패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한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한국교회가 일제 식민지의 잔재라 할 신사참배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과거 부일(附日)했던 교권주의자들이 해방 후의 한국기독교계를 좌우하게 된 것은 해방정국의 저러한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4-2. 해방이 되기
전 옥중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출옥 후에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전도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도자를
양성할 것"이라는 복안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은
해방직후 신학교 설립과 전도운동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해방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자, 남과 북에서는
각각 교회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먼저 전도운동을 일으켰다. 1945년 12월 초에
열린 '이북 오도 연합노회'
는 6개항의 결의안을 통해
그 조직의 성격과 방향을
정했는데 그 중에는 해방을
기념하는 전도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도 있었다. 이것은 1934년경에 전개되었던 총회
차원의 희년기념 전도회와 같은
성격으로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하고 희년기념 전도회의 총무를
역임한 바 있는 전재선(全載先)
목사를 다시 총무에 임명하였다.
이 전도운동을 통하여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성과가 있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렸으나 감리교회의 재건을 주장하는
측의 퇴장을 계기로 각
교파의 환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어서
감리교는 재건·복흥파로 분열되었고, 장로교에서는 신사참배 회개문제와 '신신학'(新神學) 문제
등으로 고신(高神)과
기장(基長)이 각각
분열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전도운동이
구체적으로 계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긴 하지만,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교단분열이 교회성장의 한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1950년대의
한국교회의 분열을 두고 선교학자
맥거브란(Donald
A.McGavran)의 다음 지적은 분열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의
말이라고만 간주할 수 없다.
종종 교회는 찢게지고 찢겨진
부분들은 자란다.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비관론자들에 의해 암울한
날과 퇴보의 증거로서 폭넓게
인용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두개 보다
더 많이 분열된 한국의
장로교회는 수백개의 교회 건물들을
건립했고, 1960년대에는 그 땅에서
1950년대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교단의 분열조짐들이 들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계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외적인 분위기는 조성되고 있었다. 남한에서 미군정이 시행되고 그것을 이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것은 기독교계로서는 성장의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양 인식되어 왔었고, 이승만이 기독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해방직후에 기독교계는 한국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정부와 기관에 많이 등용되거나 교회를 포함한 기독교기관이 신앙의 자유에다 때로는 세속적인 특혜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일제하에 폐쇄된 학교를 비롯한 기독교 기관들이 비교적 쉽게 부활되거나 새로이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한국에 주재했던 미국 영국계 선교부와의 특수한 관계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승만이 이끄는 기독교적 정권의 등장은 그 후의 전도와 기독교 세력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4-3. 한국교회의 성장운동은 한국전쟁(1950∼1953) 중의 여러 부흥운동을 통해 이루어져 갔다. 전쟁 중에 기독교회는 구국봉사활동과 피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교파별로 전도 부흥운동도 전개하여 큰 성과를 올렸으며 따라서 전쟁중에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먼저 장로교의 경우, 총회는 1952년을 전도의 해로 정하고 교인들을 총동원하여 ① 1월부터 3월은 자체의 신앙부흥 ② 4월과 5월은 개인전도 ③ 집단전도 ④ 교회지도 등의 단계로 나누어 부흥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4년에 장로교회는 선교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전국 500 무교회 면(面)에 교회세우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교는 1953년 웨슬레 250주년 기념 대부흥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00교회 세우기운동을 실천했다. 성결교회도 1952년 3월에 대부흥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전쟁의 발발에서부터 1955년까지 장로교에서 1,200여개의 교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감리교 500, 성결교 250,기타교파 100여개 등 전체 약 2,050개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기독교회의 성장을 측면에서 도운 것은 군목(軍牧)제도와 기독교 방송, 그리고 기독교계에서 전개한 구제사업 등 특수선교를 들 수 있다. 군복음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군목제도는 1951년 2월 7일자의 대통령 특별령으로 시행되어 1955년 8월 현재 카톨릭의 22명을 포함하여 299명의 군목이 군종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49년 6월에 설립을 허가받은 '기독교방송'은 한국전쟁으로 1954년 4월 2일에야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기독교 방송'은 1956년 12월에 개국한 '극동방송'과 함께 전쟁에 지친 한국민과 해외에 산재한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매우 공헌했다. 구제사업은 전쟁이나 기근의 때에 복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 구호단체가 수많은 전상자와 고아, 미망인, 빈민들을 돌보았는데, 한 예로 1953년에 기독교계 고아원 영아원이 이미 440여개에 이른 것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 외국의 선교사와 연결된 것이기는 하지만,'스완슨 복음전도회'(1952), '세계기독교선명회'(1953), '홀트 아동복지회'(1955,주로 해외입양)와 한참 뒤에 설립된 '기독교 양자회'(1962,주로 국내입양) 등 여러 기독교 아동복지기관의 활동도 전도의 문을 넓이고 기독교를 알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범기독교세력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뒷날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에 반드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서구계 여러 교파가 전쟁구호물자와 함께 대거 이식되었던 것이다. 1958년경 '루터교회'의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을 전후하여, 1953년에는 '하나님의 성회', 1954년에는 '그리스도 교회'와 '나사렛교회' 및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1965년에는 '오순절교회'와 '하나님의 교회'가 각각 포교활동과 교단설립을 서둘렀다. 그 밖에 '모르몬 교회'와 '여호하의 증인' 등의 이단 외래종파도 들어왔다. 이런 교파들이 경쟁적으로 포교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수많은 교파들의 전시장으로 변화되어 갔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기존의 교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교리와 운동방법을 통해 전도운동을 활성화해 갔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예로,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이 종래 합리성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냉냉했던 장로교 중심의 한국 교회를 활성화시켜 한국교회의 급속한 외형적 성장을 가져오게 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4. 민족복음화운동과 대형집회; 한국교회의 대전도운동은 그 연원이 오래다. 앞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1900년대 초에 들어서서 시작된 '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 등의 대전도운동은 '한말'이라는 시대상황에 비추어 여러가지 해석과 의미를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대전도운동은 1920년대의 일제하에서도 이어져서 한국 전도운동의 맥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세계적인 부흥사들을 초빙하여 이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1949년 피얼스(B.Pierce)목사가 와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적이 있다. 이어서 한국전란 중인 1952년에 빌리 그래함(B.Graham)이 내한하여 전쟁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민에게 호소력 있는 메세지를 통하여 큰 감격과 위로를 안겨 주었고, 그 뒤 1956년과 197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내한하여 수백만명의 군중을 동원하는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같이 대형화된 집회는 CCC가 주최한 1974년의 '엑스폴로 74'대회와 1980년의 '세계복음화대성회'로 연결되었는데, "엑스폴로 때의 연인원은 655만명이며 한번에 가장 많이 모인 집회는 158만"이었고 "1980년 세계복음화대회의 회집은 1980년 8월 16일자 매일신문 기사에 의하면 연인원 1,500만명, 한번 집회의 최다수는 270만명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4.19혁명은 세계냉전질서 위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의 새로운 민족주의를 가능케 하였다. 미 군정 이래 정권에 유착하여 그 시녀노릇을 하던 한국교회, 또 외세의 조종과 자체의 지방색 등으로 분열과 파쟁을 거듭하던 한국기독교계는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한국교회의 새로운 각성은 그 때까지 민족 앞에 보였던 분열과 파쟁의 추태를 지양하고 단합된 모습으로 민족에 봉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교단 교파간의 연합(에큐메니칼)운동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하는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일치 정신을 고양시켜 나갔다.
1964년에 발기된 '한국복음화운동추진회'는 그 해 10월 김활란 박사의 주도로 75명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종합적이고 적극적인 민족복음화 방안을 검토"하고, 몇차례에 걸친 회합 끝에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운동표어를 정하였다. 그 해 12월 3일 YMCA에서 발기인 총회와 창립총회를 열고 천주교와 희랍정교까지 포함된 21개교단 300명의 복음화운동 전국위원 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5년부터 본격화된 이 운동은 지도자 훈련,전도집회, 월간지 간행 등에 힘쓰는 한편 당시 세계적 부흥사로 알려진 중국인 조세광을 초청하여 서울과 전국 중요도시에서 집회를 가졌다. 민족복음화운동은 그 해 11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의 전국신도대회와 12월 30일 서울 후암교회(각 지방은 지역별로)에서의 민족복음화운동 봉헌예배를 드림으로 한해 동안의 운동을 마감하였다.그 해에 동원된 인원은 1백만명이었다.
'민족복음화운동'과는 그 주최측이나 조직이 다르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전도대회가 있었다. 앞서 말한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와 '엑스폴로 74'가 그것이다. 특히 1973년의 전도대회는 '오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이는 1965년의 민족복음화운동 때에 내건 '삼천만'이 남한을 의식한 것임에 비해 이 때의 '오천만'은 남북한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내세운 표어에서 그만큼 '민족'의 폭이 넓지고 있었다. 이 대회 중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5일간 열린 여의도 집회는 연 320만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부산(29만 4천) 대구(13만 8천) 광주(32만) 대전(87만 5천) 전주(25만 5천) 춘천(4만 3천)까지를 합하면 총 442만 5천이 넘었으며, 결신자도 서울의 37,455명을 비롯하여 부산(5,233) 대구(1,161) 광주(3,082) 대전(1,178)) 전주(3,452) 춘천(1,339) 등 54,158명이 나오게 되었다. 한번 설교에 3천명이나 회개하던, 초대교회 베드로의 설교 때와 같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1977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 민족광장에서 '77민족복음화를 위하여'라는 대전도집회가 열렸다. 1965년과 1973년의 것이 외국인 부흥사들을 초빙하여 거행한 것이라면 이 전도대회는 한국인 강사진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지 70년이 되는 이 해에 우리나라에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하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이 집회를 계획토록 하였다. 발기취지문에서 그들은, 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명령에 따라 ② 복음전도만이 우리 민족을 살리는 길이므로 ③ 한국인이 주도하는 데에 의의가 있으므로 이 '민족성회'를 개최한다고 하였다.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 아래 연 인원 150만명이 동원되었던 이 집회는, "첫째 일체 외국의 도움이 없이 이 집회를 치루었고, 둘째 금식을 선포하고 밤낮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은 교인이 수십만명이었으나 한건의 사고도 또 환자도 발생치 않았으며, 셋째 8만명의 결신자가 있었고, 넷째 상설 국제선교 협력기구가 탄생했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1960∼70년대 한국교회 성장의 배경에는 이러한 대형 전도집회의 영향이 있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형집회가 정권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대형집회가 가능했던 이면의 당시 사회경제적 상황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때는 박정희가 군사독재정권을 강화하고 있던 시기로서, 억압받는 많은 민중들이 호소할 곳을 찾고 있었고, 경제개발정책으로 많은 빈곤층과 소외계층이 생겨나고 있었다. 거기에다 1975년 월남의 공산화는 그러지 않아도 오랜동안 공산위협에 세뇌되어 떨고 있던 한국인들을 더욱 불안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무렵에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여하튼 이 무렵의 한국교회에는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적절한 기회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4-5.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 1984년경, 종래의 선교사(宣敎史)적 개념에 따라 한국기독교가 '선교 100주년'이 된다고 하고 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이 천만에 이른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당시의 통계가 보여주는 것도 그 수치에 가까왔다. 한 연구자는 1960∼70년대에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급격히 성장했음을 지적하면서, "1960년대에는 연평균 약 10만명씩 성장하여 1970년에는 2,197,336명으로 200만명을 넘어섰다. 1970∼78년에는 연 평균 약 20만명씩 신도수가 증가하여 1978년에는 3,758,930명이 됨으로써 400만명대에 육박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78년부터는 매해 평균 약 100만명씩 급성장하였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5】기독교와 천주교의 교세 (1977∼1981) 단위:천명 / 신도수
+-------+------------------------+---------------------------+
| | 개 신 교 | 천 주 교 |
|연 도+----------+-------------+------------+--------------+
| | 교 당 | 신 도 | 교 당 | 신 도 |
+-------+----------+-------------+------------+--------------|
| 1977 | 19,457 | 5,001 | 2,308 | 1,094 |
+-------+----------+-------------+------------+--------------+
| 1978 | 20,109 | 5,294 | 2,339 | 1,144 |
+-------+----------+-------------+------------+--------------+
| 1979 | 21,115 | 5,981 | 2,332 | 1,184 |
+-------+----------+-------------+------------+--------------+
| 1980 | 21,243 | 7,175 | 2,342 | 1,315 |
+-------+----------+-------------+------------+--------------+
| 1981 | 23,346 | 7,637 | 2,353 | 1,439 |
+-------+----------+-------------+------------+--------------+
<동아연감,983,p.638>
【표6】 한 국 기 독 교 교 세
연도 |
교단 |
교당 수 |
교직자수 |
신 도 수 |
참 고 |
1982 |
--- |
--- |
7,567,830 |
기독교문사 집계,1982 |
|
1985 |
--- |
--- |
6,489,282 |
정부통계,1985,11,1 현재 |
|
1987 |
74 |
30,321 |
48,334 |
10,337,075 |
기독교문사 집계,각교단 제출자료 |
1989 |
87 |
29,820 |
55,989 |
10,312,813 |
종교단체제출자료 집계 1989,6,30 |
1990 |
35,689(교회수) |
56,286 |
12,091,837 |
문화부 <한국의 종교,1990.12> 및 각 교단 제출자료 종합 |
위의 표에서 우리는 먼저 통계의 신빙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1982년과 85년, 87년과 89년의 신도수를 비교할 때 감소현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수치는 신도수의 감소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사기관이나 취합한 자료의 신빙성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1987∼89년 어간에 1천만을 돌파한 것은 거의 틀림없다고 보인다. 이와같은 성장은 앞서 말한 민족복음화대회 등 대부흥집회가 그 선도적 역할을 감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밖에도 다음에서 지적할 몇가지 성장의 잠재적 및 실제적 배경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각 교단들이 취했던 교회성장 정책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에서는 1970년에 이미 5천교회 150만 신자 확보를 목표로 하는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 운동은 매년 3백교회를 새로 개척,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74년에 639,605명이던 신자가 1977년애는 811,737명으로 증가하였는데 3년간 172,132명이 늘어 매년 평균 57,377명의 새 신자가 생겼던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에서도 1975년에 교세확장을 위해서 1만교회 증설을 목표로 한 10개년 계획을 수립한 바 있었는데, 이 계획 실행시기는 그 3년전인 1972년에 607,870명이던 신자수가 1975년에는 668,618으로 불어나 매년 평균 20,249명의 신자가 증가되고 있던 때였다. 예수교장로회측의 이런 교회성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성장이 뒤지고 있던 감리교측도 1975년 총회에서 '5천교회 100만신도' 운동을 제창하고 나서게 되었다.
각 교단의 교회성장정책은 때로 그 실행면에서 목사후보자들의 강인한 훈련과 성취욕을 요구하였다. 예를 들면, 1980년대를 전후하여 몇몇 교단은 내규에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후보생이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간의 단독목회 경력을 요구하는 의무조항을 두었다. 이러한 의무조항은, 단독목회를 할 수 있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 못한 상황에서 때로는 목사후보생들을 격려하여 개척교회를 설립하여서라도 단독목회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이곳 저곳에 개척교회가 많이 일어나게 되어 교회성장에 전기를 마련한 점도 없지 않다.그러나 이 정책은 훈련되지 않은 목회자들과 자립적 토대가 튼튼치 못한 교회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 경제개발과 급격한 도시화의 추세에 따라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을 때, 한 아파트 단지에 수십개의 교회가 경쟁적으로 설립되는 현상도 비일비재하였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외형적 교세는 확충되었을런지는 모르나,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와 목회자 윤리는 말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교회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출현으로 비판세력이 전면적으로 봉쇄당하는 상황에서 종교심의 내면화와 보수화의 경향이 짙어지고 있었던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자들은 아파트군을 찾아 들어가, 이제는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구축했을 중산층 가정주부들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활성화시키고 다양한 교재를 개발하여 심령의 공허를 메꾸어 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이들의 현실도피적 종교심리를 해외선교의 열심으로 집중시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의 학원내의 파라처치(parachurch)운동과 보수,복음주의 계통에 의해 끈질기게 추진되어 온 학원 성경공부운동도 범기독교 세력의 성장에 공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와서 1970∼80년대에 진보,보수로 양분화되어 갔던 한국 기독교계를 두고, 당시 진보계통이 인권보호와 반독재투쟁 등 사회구원적,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보수측이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힘썼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980년대에 한국교회의
성장을 설명하는 데에 빼놓아서는
안될 요소가 있다. 그것은
'오순절'계통의 성령운동이다. 1950년대 6.25전쟁의 때에 소개된
오순절계통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60년대로서 그것이 한국교회에 불러
일으킨 역할은 과소 평가할
수 없다. 기존의 한국기독교계에는
감리교의 '뜨거움'도 있었지만
대체로 장로교 세력이 강하여,
장로교가 갖는 합리적이고 경건한
분위기 때문에,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는 것은 비교적 덜
강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다소
냉냉하다고도 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이런 분위기 속에
성령의 역사와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신앙이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들의 성령운동은 뜨거움을
바탕으로 신유의 은사와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경제적 번영과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과 매력을 주고
있었다. 한편 6.25전쟁의 참상을 어느
정도 벗어난 후 1960년대
초에 군부정권이 '조국근대화'를 부르짖으며
경제부흥을 목표로 성장정책을 추구할
그 때에 기독교계에서 성령운동이
본격화되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듯 싶다. 왜냐하면 기독교계의
성령운동은, 그 무렵 한국
사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고취했던 "하면 된다"라고
하는 새로운 신념을 격려하는
한편 그것을 확산, 심화시키는
종교적 열정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했던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5.교회성장의 한
요인; 한국 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을 중심으로
5-1. 한국에서 교회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성장의 진행과정을 역사적으로 개관해 보았다. 그 개관에서 어렴풋이 드러났듯이, 한국의 교회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들은 다원적이며 복합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그 요인들을 먼저 열거해 보겠다.
첫째, 교회성장의 외적 요인으로서 기독교의 수용과 함께 전개된 한국의 복잡, 다기한 위기적 상황들이 선교 및 교회성장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근대 한국사에서 봉건말기의 구조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이 겹치게 되면서 위기의식이 고양되고 종말사상이 확산되어 갔는데, 그러한 상황전개가 계속적으로 이러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노일전쟁, 일제의 한국 강점과 의병투쟁, 3.1운동과 국내외 민족독립운동, 일제 말기 신사참배강요와 기독교탄압,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군사쿠테타와 독재정치, 산업화에 따른 빈부격차와 소외현상 등 한국의 근대사는 위기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외적 요인들의 전개가 다음에 열거하는 기독교 내부의 교회성장의 요인들과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선교사의 입국 전부터 번역, 출판된 성경이 국내에 널리 보급되고 뒤이어 사경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한국의 복음화사업은 중추적인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장의 다음 절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셋째, 한국의 선교 초기부터 제시된 선교원리로서의 Nevius정책과 그것을 구체화하여 추진한 일련의 선교과제들, 또 교육 의료 등의 연계된 선교사업들은 교회성장과 기독교세 확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점과 관련, Nevius정책을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로교계가 그렇지 않은 감리교계보다 교회성장이 뚜렷한 것은 우리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넷째, 복음화를 위한 한국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교회성장의 초석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을 목격하면서 민족독립과 민족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갖고 시작한 새벽기도운동은 오늘날까지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한국기독교인이 산재한 세계 각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 기도운동은 복음화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운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국교회의 성장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의 토대 위에서 복음화를 위한 전도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호별방문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축호(逐戶)전도를 비롯하여 각 교회와 교단들이 개별 혹은 연합적으로 전개한 여러번의 전도운동(예를 들면 100만명구령운동과 농촌계몽운동 및 전진운동 등)은 전도의 사명감을 고양시키는 한편 많은 개종자를 얻게 하였다.
다섯째, 1960년대 이후의 성령운동이다. 이 운동은, 같은 시기의 민족복음화운동과 같은 대형전도운동과 학원내의 파라처치 운동, 그리고 경제성장으로 여유를 갖게 된 중산층(아파트촌의 주부, 직장인 등)을 상대로 한 성경공부와 함께,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한편, 한국이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였다고 하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세속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한 교회들은 물질적 욕구와 세속적 지위를 축복과 관련시키고 중산층의 기득권 확보와 정치권의 야심을 기독교신앙으로 값싸게 담보하면서 '삼박자구원'의 논리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기도 했다. 빗나간 성령운동이 이러한 비(非)복음적 신앙행태를 부채질하기도 하였다. '복음화'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교회는 이들 세력에 의해서도 외적인 성장을 이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 1970년대 즈음하여 부쩍 늘어난 개척교회가 교회성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개척교회 설립이 무엇보다 교단의 교세확장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각 교단들은 일정수 이상의 교인과 교회수에 대해 신학교를 인가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한 때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목사후보생에게 일정기간 단독목회의 경험을 쌓아야만 목사로 안수하겠다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정책은 개척교회 설립을 부채질했고,한 때 교단의 지원을 받으며 그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 교파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심화시켰고, 심지어는 한 아파트 상가에 여러개의 교회들이 난립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필요한 교파대립과 교회난립의 개탄할 현상은 현재 러시아 등 선교지에서도 가끔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교세의 실속없는 성장을 의미할지는 몰라도 진정한 '복음화'일지는 의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한국 교회성장의 요인들은 서로 유기적 연관성을 띄고 있다. 비록 그 요인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종합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날까지의 성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지면을 통해 우리가 그 작업을 서둔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만 그 분석의 한 예로서, 한국 에반젤리즘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비교적 덜 알려진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앞(2∼4)에서 이미 약간 언급한 적도 있지만, 다음에 다시 언급할 기회를 갖는 것이 좋겠다.
5-2.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 한국기독교사는 외국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보급되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이 점은 한국기독교의 그
후의 성격을 규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성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성경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인식한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렀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기독교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성경은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양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말 일제하에서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한국 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인 성격은 지속되었고 또한 교회 성장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교회가 자랄 수 있는 영적인 토대는 바로 성경이 한국사회에 널리 보급되고 교인들 사이에서 공부되는 과정을 통해 마련되어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성경의 번역과 보급 및 공부가 진행된 과정들을 간단하게 살펴봄으로써 성경이 한국교회 성장에 어떻에 기여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5-2-1.성경의 번역과
간행; 성경이 한국의 복음화에
크게 공헌한 점을 이해하자면
먼저 성경의 번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한 바 있는
만주의 성경사업은 1887년 신약성경을 완역하여
「예수셩교젼셔」를 간행하였고, 이수정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한글성경번역사업은 1885년초에 마가복음을 간행한
바 있다. 한글성경은 초기
복음선교사의 입국에 앞서서 한국에
보급되었지만, 미국계 선교사들은 이미
번역된 성경에 의의를 제기하고
새번역을 고집하였다. 한국인들은 오래전 불교
유교의 시대부터 경전을 중요시하고
애독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수용되었을 때에도 성경에
대해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새 번역을
추진하는 선교사들에게 그것을 서둘러달라고 "울부짓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성경번역을 재촉하는 한국인들의 이같은 요구는
복음선교사를 파견한지 5년밖에 되지
않던 1891년의 미 북감리교
선교부의 연례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한국인들의 간절한 요구가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1900년에 ≪신약전서≫가 번역, 간행되었고 1911년에 ≪구약전서≫가 출판되었다. 이어서 개역에 착수하여 1936에 ≪개역 구약전서≫를 ,1937년에 ≪개역 신약전서≫를 완성하고 이를 묶어 1938년에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개역 성경전서≫를 펴냈던 것이다. 성경의 번역은 우리말을 한글(문자)로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글을 대중의 글로 만드는 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층민(노동자)과 부녀자를 그들의 주요 선교대상으로 했던 장로교(개신교)는 민중의 문자로 번역된 한글성경을 가짐으로 이제 복음전도에서 한국민중들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그 전에 한국에 들어왔던 불교 유교 등과는 달리 그들의 선교대상인 한국민중을 쉬운 언어와 문자를 매개체로 하여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성육신(成肉身)'사건이었다. 1893년 미 남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소위 Nevius방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정책으로, 모든 문서에서 한글을 전용하자는 것과 "조속한 시일내에 정확한 말로 성경을 번역"하자는 것을 채택한 것은 성경 말씀을 민중 속에 파고 들게 하려는 선교정책 차원의 노력이 얼마나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찌기 민중의 언어로 성육신되어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생동하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의 씨앗이 '복음화'의 열매를 맺어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게 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5-2-2.성경의 보급과 권서; 선교사의 도래에 앞서 번역, 출판된 성경은 일찍부터 한국의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882년 3월과 5월에 각각 3천부씩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중 1천부씩은 동경(東京)에 있는 스코틀란드성서공회(NBSS)를 통하여 1883년에는 부산(釜山)과 원산(元山)에서 판매되기 시작하였고, 나머지는 김청송(金靑松)을 통하여 압록강 북쪽의 만주 지역에 보급되어졌거나 백홍준(白鴻俊) 서상륜(徐相崙) 등을 통하여 의주와 서울 등지에 반포되었다. 이렇게 뿌려진 성경을 통하여 1884년 경에 만주 지역에서 한꺼번에 75명과 25명의 수세자가 나왔고, 서울에서는 늦어도 1885년 초까지 70여명의 수세(受洗) 희망자가 나왔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1885년 4월 5일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입국에 앞서 이같이 수세 희망자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의한 '복음화'의 기적이 이미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가 1896∼1940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성경은 총 2,062만여권으로
이는 매년 458,255권이 반포된 셈이며,
미국성서공회(ABS) 한국지부가 1901∼1919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것은 총 266만권으로
매년 140,455권을 반포한 셈이다. 이러한 반포량은, 다음의
【표7】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당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반포된 수자와 비교해
볼 때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표7】은 당시
성경반포사업을 가장 활발하게 벌이고
있던 영국성서공회의 1917년도 연례보고서가 제시한
것으로, 통계연도 기간동안 한국은
중국 다음으로 많은 양을
반포하고 있었다.
【표7】영국성서공회의 성경반포 / 1917년 BFBS 통계에 근거함
1914 |
1915 |
1916 |
||||
권서수 |
총반포량 |
권서수 |
총반포량 |
권서수 |
총반포량 |
|
중국 |
365 |
2,495,409 |
333 |
2,246,393 |
392 |
2,199,903 |
한국 |
184 |
661,493 |
165 |
707,470 |
161 |
688,294 |
인도 |
157 |
314,534 |
159 |
292,342 |
157 |
324,422 |
러시아 |
64 |
175,205 |
50 |
215,848 |
38 |
179,324 |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이미
성경의 보급만으로 개종의 기적이
일어났던 한국에, 이같이 많은
양의 성경의 반포가 곧
전도와 개종을 촉진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보급됨으로
그것은 읽혀지고 암송되었고, 또 "말씀은
이 생기없고 영감없는 백성들의
뼈와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으며, 그들을 반드시
새로운 남자와 여자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가 전파된 이래
경전적 전통을 이미 갖고
있던 한국인에게 "문서(성경)없는
종교는 그들 속에서 거의
성공할 수 없었"는데
,이는 "한국인들은 글을 읽는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의 4년간이나 BFBS
한국지부에서 성경반포사업에 종사했던 베시 목사는
성경이 한국의 복음화에 끼친
결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오늘날 한국에는 성경이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성경은 교도소와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 도박판, 아편소굴
그리고 궁궐과 가게를 통과했다.
성경은 추악한 거지소굴과 산중의
절간, 가난한 초가집, 어부의
거룻배와 뱃사공의 나룻배 그리고
학교와 대학에까지 들어갔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모든 곳에서부터 거듭난
사람(twice-born
men)이 나타나고 있다.遁
그런데 한국의 성경 반포사업이 그렇게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이면에는 권서(colporteur)들의 숨은 봉사활동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권서는 성서공회 혹은 선교사의 감독을 받으며 성경을 판매, 보급하는 활동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그것을 보급하고 그 내용을 전하기에 희생적으로 헌신했던 분들이다. 이들의 활동에 관해서는 이미 필자의 자세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1940년까지의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는 성경보급의 약 85%를 권서들에 의존하였고, 1913∼1918년의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성경보급의 약 98%는 권서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따라서 한말과 일제하의 성경의 반포는 권서들의 '복음짐'과 부르튼 발에 의해 대부분 이뤄졌던 것이다. 성경의 활발한 보급이 한국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면, 적어도 한말 일제하 한국의 복음화에 기여한 공로는 이들 권서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선교 10여년에 225개의 교회와 기도소에 3,545명의 신자들을 얻게 된 미국 남감리회가 이러한 공로를 전적으로 권서들에게 돌린 사실이나, 한국 주재 개혁교회 선교회 소속의 10여만명 신자들의 7할이 권서들의 사역을 통해 이뤄졌다고 하는 지적은, 이들 권서들이 성경의 보급과 말씀의 전파를 통하여 한국복음화에 얼마나 공헌하였는가를 증언하는 것이다.
5-2-3.사경회와 말씀의 흥왕; 성경이 광범하게 반포되자 한국의 초대 기독교공동체에서는 성경을 읽기 위해서 '국문공부'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경회 운동은 1903년과 1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도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고, 해방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한국교회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88년 스크렌튼(Mary Scranton)의 성경공부반과 1890년 언더우드(H.G. Underwood)의 성경연구반에서 본격화된 한국의 성경학습은, 1891년에 각 선교부가 성경학습과정을 선교부세칙에 삽입함으로 각 지교회에까지 널리 시행하게 되었다. 사경회는 초기에 선교사와 그 부인들, 한국인 조사와 장로들 및 권서들이 인도하였으나, 뒷날에는 주로 한국인 지도자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사경회를 겸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1908년 미 북장로교 선교구역에서만 800여회의 사경회에 5만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이 무렵에는 신자들의 60% 정도가 매년 사경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사경회에 참석한 신자들의 열심들에 관한 감동적인 기사들은 이러한 열심의 증거들이다. 1901년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는 입록강 가의 삭주 창성 지방의 자매들이 행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0리 길을 걸어왔고, 그 이듬해 평양에서 열린 '사나이'사경회에는 멀리 전라도의 목포 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형제들이 있었다. 1909년 10일간의 성경공부를 위해 한 자매는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300마일을 걸어왔고, 다른 이들은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업고 왔는데 그들은 손때묻고 닳은 성경책을 갖고 있었다.
일제 치하 신앙의 자유가
제약당하던 상황 속에서도 줄기차게
계속된 사경회는,
<사도행전>
기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말씀의 흥왕'(행 6;7, 12;24)을 의미했고 그것을
통해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그것을 현실적으로
목격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사경회의
열심이 한국교회를 성장시켰다고 다음과 같이 자주
고백했던 것이다. 그 고백은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찾아내야 하는 오늘날의
교회사가의 식견과 평가를 대신해
주고 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성경은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분명하다.…성경공부와 성경공부반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들 속에서 신앙과
지식의 기초를 놓아 왔다.
성경은 한국에서 제일 공부가
많이 되는 책이다. 교회생활의 매우 뚜렷한
특징은 성경공부에 있다. 성경공부반은 겨울에 열흘에서 2주일 동안 중심지에서
열린다. 겨울마다
족히 12만
5천명의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목적은 단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배운 것을 출신교회에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때문이라는 것이 충분히
관찰한 사람들의 확신이다.
6. 남은 말:
한국교회 성장의 반성과 과제
우리는 지금까지 흔히 거론되어 오던 한국교회의 성장을, 몇가지 시기구분을 통해 그 과정과 성장요인을 살피는 한편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교회 성장의 한 특수한 요인으로 지적된 바 있는 한국교회의 '성경기독교'적인 성격에 대하혀 살펴 보았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세계 선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빨리 상징하였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이 한국사회에 남긴 영향력을 두고 볼 때, 한국의 교회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한국교회 성장의 긍정적 및 비판적 성격을 살펴보고 나름대로 앞으로의 과제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6-1. 그 긍정적 성격;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되고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한국사회에 미친 긍정적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글문화를 민중 속에 정착시키는 등 한국의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데에 기독교가 앞장 섰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말 일제 하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보전하고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한, 말하자면 민족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이 긍정적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성장과 거기에 따른 '복음화'는 이보다 훨씬 근원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십계명적 윤리관, 노동직업관, 재물소유관, 축복관 등)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의 기존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거기에다 기독교가 갖는 신관(神觀)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훨씬 크다고 본다.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그 절대성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유일적 신관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상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파장은 한국인의 가치관 형성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또 기독교적인 인간관은 혈통신분제를 부정하고 남여의 평등을 주장하는 윤리적 근거를 제공하였을 뿐아니라 천부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확립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기독교가 한말 일제하에서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하에서도 인권운동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섰고 기독교적인 보편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예언자적 역할을 그런대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6-2. 그 비판적 성격 ; 한국교회의 성장과 '복음화'는 긍정적 성과와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식자들에 의하여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복음화'가 교회성장과 거의 동일시되고 또 한국의 교회성장의 큰 몫이 한국교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위 보수교단에 의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교회성장에 대한 비판은 곧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보수측에 대한 비판 그것으로 대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의 초점은 주로 한국의 교회성장의 지수라 할 기독교인의 수치가 한국인 전체 인구의 25%를 상회하는 1,000만명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거기에 상응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확립이나 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적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에 집약되고 있다. 이 점은 한국기독교계의 지도자들과 지성인들도 시인하면서 오래동안 고민하며 자체비판을 거듭하고 있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한국의 교회성장이 사회적 적응력을 갖지 못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다.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기독교진리와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생활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연결,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개인화·사회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과 행위가 분리되게 된 이유를 두고, 기독교수용 이전에 있었던 한국의 전통적 성리학사상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이단시하고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하는 주자학을 정통시함으로써 사실상 '지행분리'(知行分離)를 고집하는 사상적 풍토를 조성하게 되어 한국기독교에도 그같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한국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행위를 신앙에서 분리시키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혹은 그 이유를 전적으로 신자개인의 실천의지와 관련시키는가 하면, 사회의 구조악에다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한다. 하여튼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이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는 한국기독교의 이원론(二元論)적 신앙형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사상적으로 이원론적 사고구조를 뿌리깊이 갖고 있는 한국사회에 접목되면서 복음 자체가 이원론적으로 해석된 부분도 없지 않다. 특히 인간의 몸을 영과 육으로 이분하는 인간관과, 하나님의 일과 세속적인 일로 구분하는 노동·직업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나라와 구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속사에서 일정하게 제한시키는 등의 사상에서 한국교회의 이분법적 신앙형태는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구조 하에서는 기독교진리를 사회화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구조하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학문, 노동, 직업, 전문기술이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극기독교사에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근본주의적 보수신앙 전통과 관련되어 심화,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교회성장이 대부분 보수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추세로 본다면, 이원론적 신앙이 한국교회를 거의 지배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교회성장이 진정한 '복음화'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의문의 여지마저 갖게 할 뿐아니라, 비록 진보측에 의한 견해이긴 하지만 한국의 '복음화'가 개인구원에 역점을 둔 나머지 사회변혁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교회성장을 주도한 보수교회가 사회변혁에 거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것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정교분리론과 관련이 깊다. 한말 일제하에서 구미의 선교사들은, 극동에서의 일제의 역할을 두둔하는 본국 정부를 고려하여, 선교지 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역할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지도하였고,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도 기독교에 대해 정교분리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정책은 기독교가 "인간성과 민족의 생존권을 말살하려는 전제적 통치권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에 그 본질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정교분리론은 한국교회 보수진영에 의해 면면히 전승되어지면서 최근에는 편의주의적으로 오용되는 실정마저 보였다. 즉, 정부에서 협력을 요청할 때나 어떤 정권에 지지와 박수를 보낼 때에는 정교분리론에 구애됨이 없이 행동하던 자들이, 반대로 비판해야 할 때나 투쟁해야 할 때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표리부동하게 불간섭주의로 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교분리론'에도 합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 외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정교분리론은 보수교회들을 권력에 아부하는 집단으로 만들어가는 최면제 구실을 해 왔고 한국사회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인 소리를 막는 재갈 구실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한편 성령운동에 의한 한국의 교회성장이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인 종교로 타락시켰다고 비판한다. 성령운동이 냉냉한 한국교회를 뜨겁게 하여 1960년대 이후의 교회성장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내세운 '삼박자 축복(구원)론'은 기독교적인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대치, 변질시켜 버렸고 기독교 자체를 기복적인 종교로 타락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성장이 삼박자 구원에서 주장하는 '축복관'에 힘입어 그와 병행하여 이룩되어 갔다고 한다면, 한국 기독교는 교회성장이 하나님의 교회를 '바알의 전당'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는 비판에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 몇가지로 제시한 비판적 견해들 외에도 뒤에서 언급할 앞으로의 과제들은 곧 비판적 견해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의 유례없는 성장에 자만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보다 진정한 '복음화'를 실천해 가야 할 사명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6-3.교회성장과 복음화의 과제; 앞에서 언급한 몇 가지만 보더라도 한국교회에는 진정한 복음화를 위한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우리는 앞으로 수행해야 할 한국 교회성장의 복음화적 과제를 몇개 열거함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문화, 상황을 바탕으로 한 신학과 기독교문화를 창건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아직도 교회성장에 걸맞는 자기의 신학과 문화를 갖지 못했다. 지기성장에 걸맞는 신학이란 한국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개성적인 성격을 띄게 되겠지만 기독교적 보편성을 결여해서는 안된다. 그 신학을 바탕으로, 고난과 기쁨을 같이 나눈 한국교회가 공유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고, 지금까지 백여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가꾸지 못한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수립해 가야 한다.
둘째, 현재 교회성장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대형·부자·모우는 교회 지향의 정책을, 소형·가난함·나눠주는 교회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즉, 초대교회 중 예루살렘형 교회에서 안디옥형 교회로 전환시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교회간 교파간의 불필요한 대립을 해소하고 연합, 협력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춰 가야 한다. 이 작업은 해외선교에도 시급히 적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제는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진보와 보수 사이에도 서로 개방과 협력을 시급히 도모하도록 확대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이제 닫힌 진보, 닫힌 보수를 지양하고 열린 진보, 열린 보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지역간 계층간의 벽을 허물고 사랑과 일치를 추구하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족분단을 해소하는 민족사적 사업을 적극 선도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
넷째, 한국교회에 오늘날과 같은 성장이 이룩된 섭리사적 의미를 숙고하면서, 그것이 민족통일을 대비하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식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결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퉁일이 막상 이뤄졌을 때 오랜동안 심화된 고통과 갈등을 해소할 책임은 한국교회가 솔선적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그동안 제일세계가 담당했다가 현재 거의 공백상태에 처하게 된 세계선교는 그 대리적 담당자가 마련될 때까지만이라도 한국교회가 겸손히 담당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성장시킨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끝으로, 앞의 비판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현존성을 그 미래성과 함께 확신하면서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기독교의 신앙과 진리를 우리들의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 적용,실천하는 '복음화'의 과제를 싸 안고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후기】 이 글은, 원래 필자가 지난 1년간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과 복음운동에 관하여 소개해 달라는 미국장로교회(PCUSA)의 요청에 따라 초한 것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의 이상현 교수가 "EVANGELISM IN KOREA: A Brief History and Assesment" 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지난 3월에 모인 미국장로교회의 한 모임에서 Mahn Yol Yi and Sang H. Lee의 공동이름으로 발표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