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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연구[2]
유언장처럼 기록된 로마서
우리가 로마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이 로마서를 썼는지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방선교를 하면서 항상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해왔고(롬 1:15), 로마서를 쓰는 지금까지도 그것이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요 목표였습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선교의 최종적인 목표, 궁극적인 소망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울에게는 평생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최종적인 선교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울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의 끝, 땅 끝이 어디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에스파냐, 스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땅 끝인 에스파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요 기도제목으로 삼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중해를 세계의 바다로 보았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 끝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서쪽 끝은 에스파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에스파냐는 지중해 반대편 끝 쪽에 있는 땅 끝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특히 당시에 유명한 문필가들, 예술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문화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전도한 이후에 최종 목적지로 바로 그 에스파냐에까지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사도행전 19장 21절을 보십시오.
행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본문에서 알 수 있는, 바울이 전 세계를 전도하면서, 척박한 여러 이방의 땅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항상 가지고 있었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로마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도 한 번 봅시다.
행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본문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에게 극한의 환란과 어려움이 밀어닥쳤을 때, 즉 헌금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로마의 군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도착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는데, 그가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고 난 이후에 예루살렘에 가면 당할 일이었습니다. - , 주께서 바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주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담대하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반드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는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바울에게 반드시 그가 로마를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선교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를 선교한 이후에는 서바나, 에스파냐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3절, 28절을 봅시다.
롬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롬 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자신이 로마를 거쳐 서바나, 즉 에스파냐로 가기 원한다는 것을 로마서 결론 부분에서 두 구절을 통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서바나까지 가서,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의 깃발을 꽂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선교 다음은 서바나 선교였습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 매우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서바나는커녕 로마에 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의 이 상황을 우리가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로마서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로마서를 썼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분으로, 어떤 정황을 떠올리면서 이 로마서를 읽어야겠습니까?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하는 가운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고자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방문하기 직전에 고린도에서 약 3개월을 머물러 있었고, 그곳에서 로마서를 썼습니다(행 20:2-3).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어떻게든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던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외에 바울에 의해서 개척된 수많은 이방 교회들이 전 세계의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등의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발생한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서 극한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었습니다(행 11:27-30). 그래서 바울이 개척한 이방의 교회들은 헌금을 모으고 모아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힘과 위로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절, 고린도후서 9장 1절 등을 보면, 바울의 교회가 예루살렘교회, 베드로의 교회를 위해서 모금하는 일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록들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고린도라는 도시에 도착해 있었는데 - 고린도교회는 이방교회였던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바울이 개척한 도시들 가운데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가장 마지막 모금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 , 이제 이방의 교회들로부터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로마서를 쓰기에 앞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수리아와 갈라디아, 소아시아에서 한참을 나와서 아가야 지방(오늘날의 그리스)의 고린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 상황에서, 즉 고린도에서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바울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울의 마음에 굴뚝같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로마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장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로 나아가는 관문도시와 같아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면 바로 로마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로를 이용해서도 로마로 갈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로마를 거쳐 에스파냐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그곳이 세계의 끝이었습니다. 그곳은 구약의 요나가 가려고 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걷어서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고린도까지 나왔는데, 그리고 이제 로마를 거쳐 에스파냐까지 가야겠는데,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선교가 뒤로 크게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언제 다시 고린도까지 와서 로마로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바울이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예루살렘에 한 번 갔다가 다시 나오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과학이나 교통이 발전해 있지 않아서 예루살렘에서 고린도까지 오는 것이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에 그곳에서 바로 로마로 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간 이후에 다시 자신이 이전에 전도했던 도시와 교회들을 순회하며 고린도로 돌아와서 그곳을 통해 로마로 가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소요로 인해 예기치 않게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예루살렘에서 곧바로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울의 생각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반대하는 수많은 적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가고 싶었던,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 영원히 가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비록 로마에 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그곳에 가서 전하고 싶었던 복음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에 보내기를 원했고 - 바울이 로마로 가고 싶었던 이유는 로마를 관광하고 싶어서나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 이런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전에 유대교를 철저하게 신봉했고, 그런 유대교를 무너뜨리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바울이 갑자기 바뀌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이야기하던 자가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야기하고, 복음이 새로운 소식이며 율법보다 우월한, 더 우위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고 전하는 것으로 인해, 그것도 가장 일선에 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해 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과 신앙의 배반자요 원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일선에 나서면 나설수록, 복음의 선봉장이 되면 될수록, 그 미움은 점점 더해져 갔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그리고 유대교의 본산이었던 예루살렘에서는 얼마나 바울을 더 미워했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눈엣가시와 같았습니다. 그를 없애기 전에는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고린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에서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는 40인의 결사대가 결성되어 바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행 23:12-22).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죽이고자 이를 갈고 있었는지, 그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교회에서도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도 바울을 노리는 수많은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갈 1장). 다른 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바울의 교리와 신학(가르침),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바울의 권위와 자격에 대해서 공격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적대시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울의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당시에 바울은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들에 의해서 안팎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루살렘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 죽음의 소굴, 맹수들이 우글우글하는 광야나 정글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계 선교, 땅 끝 선교가 조금 지연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 되게 하고자 하는 에큐메니컬의 정신, 복음의 정신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 바울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모두 종합해보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자신이 개척한 여러 이방교회들을 돌아다니며 헌금을 모았던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린도에서도 헌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헌금을 가지고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예루살렘 행으로 인해서 도저히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이제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로마교회와 성도들에게 남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말씀이 될지도 모른다는 처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남긴 것이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한 예루살렘 행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잠시 털어놓으며 자신의 예루살렘 행을 위해서 로마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15장 30-3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롬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롬 15: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은 실제적인 로마서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이 “이방의 교회들이여, 특히 로마 교회여, 내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특별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의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마지막 당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록된 로마서에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에 쓰는 유언장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로마서를 썼는지 이제 분명하게 알겠습니까? 예루살렘에 가야겠는데, 그리고 그 이후에는 로마로 가야겠는데,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바울의 반대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후의 상황을 전혀 기약할 수 없어서, 심지어 순교를 당할 수도 있어서 바울은 어떻게든 이 서신이라도 써서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가지 못했던 로마에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증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문제, 율법과 복음, 특히 복음 안에 나타난 의, 그리고 죄와 구원, 자유 등의 주제에 대해서 로마서를 통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니, 비록 바울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대서를 통해서 쓴 것이지만, 로마서를 한 번 깊이 있게 읽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까? 앞에서 제시한 내용들을 통해서 로마서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조금이나마 더 깊이 알게 되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로마서를 공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기록 목적
그렇다면 바울이 왜 로마서를 썼을까요? 먼저, 바울이 로마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보냈다는 것은 기독교가 로마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대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에는 아주 인상적인 세 개의 도시가 있었는데, 그 도시들은 정치적 중심인 로마, 학문적 중심인 아덴(아테네), 종교적 중심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 운동은 종교적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 실제로는 갈릴리이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운동이 확장되고 확장되어 드디어 로마까지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정치의 중심, 세계의 중심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는 어떤 책입니까? 예수의 전기(傳記)입니다. 예수의 생애를 예수의 제자들이 신앙적으로 쓴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이 복음서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에 대한 가장 간결한 고백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을 같은 자리에 놓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예수 운동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확장되었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릴리->예루살렘).
그리고 복음서 다음에는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어떤 책입니까? 사도행전은 역사서인데,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내신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어받아서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확장시키려고 했던 사도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특히 로마까지 복음이 확장된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보면, 앞부분은 베드로의 전기이고, 뒷부분은 바울의 전기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진 기록을 볼 수 있고 - 북아프리카 선교와 핍박으로 인해 일어난 팔레스틴 지역으로의 교회 확장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 , 뒷부분에서는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방 선교가 크게 일어나 로마까지 복음이 전해진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항상 ‘복음이 로마까지 가야 하는데… 땅 끝까지 가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마 28:18-20; 막 16:15; 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평생의 소망이 아니었다면, 이런 유언을 남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예루살렘에 멈춰져 있었습니다. 그 역사를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로마로까지 끌고 갔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들고 어디까지 간 것입니까? 로마까지 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예수 운동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로마로까지 확장되게 되었습니다(예루살렘->사마리아->로마).
사도행전은 바울이 복음을 들고 로마에까지 간 것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행 28장).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결론은 단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까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고백이기도 한데, 바울이 “내가 드디어 주께서 고대하셨던, 주께서 간절히 원하셨던 로마에 복음의 깃발을 꽂았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아니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이 시점에도 로마에는 이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주 기이한 일입니다. 로마보다 가까이 있는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통해서 겨우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는데, 그곳보다 더 먼 곳인 로마에는 복음이 전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기도 전에 이미 로마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전도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로마서를 읽고 공부하는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누가 썼습니까? 바울이 썼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를 전도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 이미 다른 전도자에 의해서 복음이 로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기도 전에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로마는 당시에 세계의 중심 도시였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아주 잦았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로마를 오고 가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이런 저런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까지 전해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청년 예수의 이야기, 그의 죽고 다시 산 이야기가 그 시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런 상황에서 로마서를 왜 썼겠습니까? 먼저 바울은 항상 로마에 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로마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서신으로나마 복음을 전해주고 하는 소망으로 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로마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많은 염려의 마음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이단도 많았고, 정치적인 핍박과 여러 가지 신앙적인 분쟁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신앙이 표류될 수 있고, 때로는 신앙이 다른 길로 빠져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갈등으로 인해서 찢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도 바울이 직접 전해주는 복음을 한 번도 깊이 있게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해 전해주어야 할 필요를 깊이 있게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해보자면, 로마까지 퍼져 나간 복음으로 인해서 로마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자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더 깊이 있게 가르쳐서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이 힘주어 증거하려고 했던 기독교 신앙의 핵심,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같은 바울의 믿음과 열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영적 병기창고
앞에서 로마서에는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 복음의 핵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27권의 신약성경 가운데 절반이 바울의 서신입니다. 전체 성경을 보더라도, 바울처럼 많은 성경을 쓴 저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우리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로마서는 바울의 모든 서신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학과 신앙의 총체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로마서를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로마서의 특성 때문인지 예로부터 로마서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병기창고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영적 병기창고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싸우다가 중간에 무기가 떨어지면, 병기창고를 열고 그곳에서 다시 무기를 꺼내서 싸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매 시대마다 로마서가 그런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영적 병기창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안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복음의 핵심이 온전히 담겨 있기 때문에 영적 병기창고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병기창고인 로마서를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로마서를 전하고 있는데, 미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왜 이곳에서 로마서 말씀을 보겠습니까? 미국은 로마의 영광을 현대적으로 이루려고 하는 나라입니다. 로마의 상징이 독수리였는데, 미국의 상징도 독수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로마와 같은 미국이 바울이 로마를 향해 보냈던 이 로마서를 깊이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로마서의 말씀을 바로 미국을 향해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특히 로마서 1-3장을 통해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로마의 죄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미국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국은 구원이 필요하고, 미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병기창고인 로마서를 통해서 미국과 미국인들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이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내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로마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망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미국 또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로마서를 깊이 있게 읽어보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가 먼 옛날의 이야기, 그 때 그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선교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보편적인 이야기, 그리고 오늘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여정 가운데서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몇몇의 대상이나 지역이 아니라 바울의 음성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모든 교회에, 온 세계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깊이 보고,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서 있는 어느 곳에서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일반적인 고대 서신의 구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로마서 강해에 들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고대 서신의 구조에 대한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편지에는 일반적인 형식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 편지의 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면, 다른 고대의 편지들을 읽는 것이 매우 쉬워집니다. 신약성경이 대부분 서신서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대 서신의 구조 가운데 하나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신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러한 구조로 서신들이 기록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1. 인사
2. 편지 받는 이의 건강을 기원함
3. 하나님께 감사
4.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말함 (본론)
5. 마지막 인사
로마서 또한 이러한 구조로 기록되어 있고, 많은 신약성경의 다른 서신들도 이와 같은 구조로 작성되었습니다.
고대에는 편지가 아주 중요한 연락과 정보교환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지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간단하고 편리한 이메일이 없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면,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착하기까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편지가 도착하는 동안 발신인이 죽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내는 편지가 상대방이 마지막으로 받아보는 편지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편지 발신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상대방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받는 자들 또한 아주 귀한 마음으로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마음으로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냈던 로마서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 강해
바울의 인사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롬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8장 분해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여러 나라와 도시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 곳을 순회하는 가운데 나라마다 시차가 너무 커서 지금 시간이 미국에서는 낮이지만 제 몸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영육 간에 아주 묘한 기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LA에서 열리는 이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멀리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보스턴, 뉴욕 등에서 왔지만, 앞에 있는 저는 그곳보다 조금 더 멀리서 온 불쌍한 목사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대부분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날아와서 여기까지 왔을 텐데, 그것이 헛되어지지 않도록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로마서를 보도록 합시다.
로마서 강해를 미국에서 하려고 하는데, 미국에 와서 많고 많은 성경 중에서 특별히 로마서를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면에서 미국이 이 시대의 로마와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당시의 세계 중심 국가였다면, 이 시대에는 미국이 세계 중심 국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시대에 있었다면, 로마서를 미국에 보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로마서를 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낸 이 로마서를 특히 많이 읽어야 할 사람들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전체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부터 8장까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로마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미국에서 모두 강의하고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가 소원하는 대로 잘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하도록 합시다. 짧은 시간 안에 로마서 8장을 다 본다는 것이 어렵지만, 어떻게 하던지 8장까지를 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부터 성경공부를 하면, 한 구절을 놓고 하루 종일 가르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章)을 가지고 며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마다 아주 깊이 있게 가르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전 수련회에서는 한국에서 산상수훈을 강해했는데,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강의해서 겨우 5장 1절부터 5장 8절까지 진도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하다가 언제 산상수훈 강해를 다 끝내려고 하시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참석한 분들에게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강의해서 반드시 마태복음 7장의 마지막 구절까지 다 읽고 강의를 끝내겠습니다”라고 약속했고, 실제로 마태복음 7장까지 다 살펴본 이후에 수련회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모임 가운데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3장을 다루는 데도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데, 하물며 8장을 다루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특히나 로마서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로마서의 한 장이나 한 구절을 가지고 수련회에서 강의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입니다. 그래도 로마서 8장까지 강의를 하겠다고 이곳에 왔기 때문에 어떻게든 로마서 8장까지를 다 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번에 만나고, 다음에 또 만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또 만나겠지요? 그래서 이번에 로마서를 어느 정도 하고, 다음에 만나서 지난번에 한 다음부터 계속해서 이어서 로마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는 1장부터 8장까지가 가장 중요한데, 로마서 1장부터 8장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8 - 4:25 하나님의 의의 역사적인 실현
로마서 5:1 - 8:39 하나님의 의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의 생(生)의 의미
로마서 1-8장까지를 로마서 1-4장과 로마서 5-8장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로마서 강해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려고 하면 항상 “목사님, 학교에서도 지겹도록 공부하다가 좀 쉬려고 교회에 왔는데, - 혹은 수련회에 왔는데, - 여기까지 와서 또 공부를 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공부와 성경공부는 완전히 다릅니다. (물론 세상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 없고, 공부해도 지루하고 무료하기만 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부하면 할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더 큰 쉼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세상이 줄 수 없는 아주 신비롭고 놀라운 영적인 평안과 쉼이 임할 것입니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로마서를 보도록 합시다.
일반적으로 강의를 할 때, 50분 강의한 후에 10분 쉬는 것이 과학적으로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일정표를 보니 오전, 오후, 저녁 시간에 각각 2시간씩 강의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더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2시간이나 강의를 한다는 것이 강의를 하는 자나 강의를 듣는 자 모두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9,105)라고 했습니다. 우리 또한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씀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시간을 소중하게 잘 보낼 수 있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랑
롬 1:1a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바울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하며 로마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설명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시작이 아주 근사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부터 7절까지는 바울의 인사인데, 가장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편지를 시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안부를 먼저 묻습니다. 즉 “000씨, 그동안 잘 있었습니까?”라는 식으로 먼저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수신자의 안부를 묻지 않고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런데 이 인사 안에 매우 깊은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에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직접 더 잘 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 나타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바울의 자기소개, 바울의 자기해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이라는 말로 사용된 헬라어는 둘로스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의 의미를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 둘로스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종’(servant)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노예’(slave)라는 말과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당시 로마의 노예들이 어떤 존재였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노예들은 노예들 중에서도 전함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혼신의 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 했는데, 만약에 제대로 노를 젓지 않는 것 같아 보이면, 사정없이 날아오는 날카로운 채찍에 맞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들의 양쪽 다리에는 아주 굵은 쇠사슬이 메여져 있었는데, 노예가 쇠사슬을 끊고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망가는 노예들이 너무 많아서 배를 운항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바다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면 노예들은 배 안에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노를 젓다가 체력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거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몸의 한계를 넘어서는 바람에 온 몸에 기가 빠져나가서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군의 배에 의해서 공격을 받아 배가 파손되어 바다 속으로 침몰할 때도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노예들은 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풀 수 없어서 배와 함께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전쟁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적군의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 노예가 되었습니다. 물론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노예들에게 있어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계속해서 노예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종들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당시의 노예는 자신의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인에게 완전히 매여 있는, 완전히 주인의 소유가 되어 있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을 의미하는 헬라어 둘로스의 반대말은 주인이라는 뜻의 헬라어 큐리오스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주인(큐리오스)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자신은 그분의 종(둘로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는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둘로스라는 종은 어떤 종이라고 했습니까? 주인에게 모든 것이 맡겨진 종입니다. 주인에게 완전히 소유된 존재로서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은 “주인에게 완전히 소유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소유된, 나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는 나 바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 부요한 자이시지만 가난해지셨던, 그리고 빌립보서 2장 6-9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를 위해 스스로 종이 되셔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낮추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바울, 그로 인해서 주인에게 완전히 붙들려지고 완전히 소유된 바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바울의 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당시의 세속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바울의 말 안에는 노예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받은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 또한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바울의 자기고백의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사랑입니다. 자신을 비우되 생명까지 모두 내어놓으시며 아낌없이 자신을 비우셨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그리고 먼저 사랑의 종이 되셨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나는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나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바울의 관계는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소유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되는 관계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사랑에 완전히 붙들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고백은 결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심으로 인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셔서 사도의 자리에 세우심으로 인해서 나왔던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체험함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으로 인해서 바울은 “그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는 변화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된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우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의 첫 대목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붙들려 있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소속되어 있는 자신에 대해서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겸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아주 겸손한 바울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에서 지극히 겸손하게 변화된 바울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다른 멋지고 근사해 보이는 이름을 자신에게 가져다 붙이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고상한 유대교 랍비였었던 나 바울”이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어떤 이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이름을 어떤 이름보다도 가장 고귀한 이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인사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에 대해 전혀 자랑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얼마나 자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편지의 상당 부분을 자기 자랑으로 도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드러내고 내세우고 높이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며 지극히 비우고 낮추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승에 의하면, 키가 작고, 코는 매부리코에, 머리는 조금 곱슬머리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외모에서 전해지는 아주 강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외모를 알지 못한다 해도 성경에 나타난 회심하기 이전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바울의 모습을 보면(사도행전 6-8장 참고), 바울이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아주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외모나 이전의 삶을 생각해보았을 때,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주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고 회심한 이후에도 우리는 회심하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무려 3차례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교를 할 수 있는 청년 이상의 놀라운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그 가운데 찾아오는 수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무서운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기질이 아름답게 승화되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러한 바울의 선교 여정에 있어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새롭게 임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러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이 바울로 하여금 더 그렇게 불꽃처럼 강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원래 이름을 생각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자기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 첫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행 7:58). 이 이름은 이스라엘의 첫 왕의 이름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왕은 베냐민 지파였는데, 바울 또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빌 3:5). 이런 것을 감안해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아마도 ‘우리 지파 중에서 사울이 나왔지! 그리고 나는 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나도 나중에 커서 사울과 같은 왕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꿈과 목표로 삼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가말리엘의 제자가 되었고 또한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바울이 갑자기 변화되어 사울과 같은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전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비운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서 - 고작 그 자리를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위해서입니까?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 그의 이전의 꿈과 소망을 모두 버렸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자로 변화되었고, 그로 인해서 그의 꿈과 소망까지도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왕이 아니라 종이 되는 길을 알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처럼 겸손한 자,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인생의 꿈과 소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이전의 자신이 흔적도 없이 모두 녹아지는 것을 체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바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변화된 바울의 모습에서 이전의 바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게,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바울은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습니다(고후 5:17).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안에 분명하게 일어난 변화였고, 복음의 놀라운 세계,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모든 체험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작은 자 바울
롬 1:1a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라틴어적인 표현인데, 원어로는 파울로스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작은 자’입니다.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자신에게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자기소개에서 뿐만 아니라 “바울”이라는 그의 이름 자체에서도 아주 동일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한 바울의 모습입니다.
회심하고 구원받은 이후에 바울은 항상 작은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스스로 가져다 붙였습니다.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쓸 수도 있었고, 그 외에 더 멋있는 새로운 이름을 자신에게 가져다 붙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심한 이후에 항상 바울이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는 사울, 회심한 이후에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이름의 변화가 아니라 바울의 존재와 삶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과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행 7,8,9장 - 사울 / 행 12:25절 이후 - 바울). (어떤 이들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 사울이었고 헬라식 이름이 바울이었으며, 나중에 바울이 이방 세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다 보니 바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름의 변화를 통해서 바울 안에 일어난 완전한 변화, 새로운 피조물로의 근본적인 전환에 보다 강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우 겸손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보면, 바울이 신앙의 신비, 복음의 신비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 우리의 자아가 - 강해지고 커지게 되면, 즉 우리의 힘과 능력을 드러내려고 하면, 하나님의 자리, 그리스도의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항상 처음에는 매우 큰 것 같지만(자신이 많이, 그리고 크고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나중에는 지극히 작은 자가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주 화려해보이지만, 나중에는 지극히 초라해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깊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이후의 바울은 항상 지극히 ‘작은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항상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낮추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신앙적이고 복음적인 삶일 뿐만 아니라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신앙의 신비, 복음의 신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비울 때, 자기를 낮출 때, 자기를 죽일 때,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철저하게 시인할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더욱더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리해보면, 바울은 그의 이름에서부터 매우 복음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에서부터 매우 복음적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얼마든지 다른 이름을 가져다 붙일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모든 이름들을 뒤로 하고 자신에게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하고 훌륭해 보이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고 싶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은 ‘바울’이라는 이름이 아주 큰 이름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평범한 불과한 이름이었습니다. 이런 이름을, 특히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기꺼이 자신에게 가져다 붙인 바울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국 자신의 이름도 위대한 이름이 되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이름과 작은 이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대한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이름도 위대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이름을 가지려고 하기보다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고 바울이라는 이름 안에는 바울의 존재와 삶의 방식이 매우 잘 드러나 있습니다. 즉,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했는지 그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극히 작은, 지극히 겸손한, 자신을 전혀 드러내거나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힘과 능력을 덧입는 삶을 살고자 ‘바울’이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단지 이름만 가져다 붙이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그 이름과 실제 그의 존재와 삶이 정확하게 일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 이름의 뜻대로 실제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름과 존재, 삶이 거의, 심지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정확히 일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처럼 그 이름과 인격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또한 바울처럼 항상 ‘작은 자’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바울과 같은 이름을 자신에게 기꺼이 붙일 수 있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즉 우리의 이름과 존재와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 신앙의 핵심
1절의 바울의 자기소개에 대해서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이 자기소개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깊은 영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바울의 자기소개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이 한 사람을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항상 자신에게 임한,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은혜와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살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 안에 있었던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은혜와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번에 로마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로마서 앞에 글을 하나 써놓았습니다. 항상 이것을 먼저 보고 나서 로마서를 공부하려고 써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뒤에서도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시작에서부터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가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로마서를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신앙의 핵심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 무엇을 베푸셨는가를 알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르치려고 했던 신앙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일대일의 등가적인 관계로서의 신앙, 즉 하나님과 인간이 일대일로 주고받는 관계로서의 신앙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행위와 공로를 드러내고 자랑했던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신앙과는 전혀 다른 신앙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열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은총을 먼저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인지를 기억하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초점을 두는 신앙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 강조했고, 그리고 우리가 다른 형제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은혜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놀라운 신앙의 세계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모자를 쓰고 덜렁거리며 살았지만, -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빵모자 같은 것을 쓰고 다녔습니다. -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신발을 신고 오직 그 사랑의 증거자로 나서기를 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만을 증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서 그 바울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바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많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살아간다면, 이러한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롬 1:1b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바울은 1절에서 로마의 교우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만 아니라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Apostolos입니다. 고대 서양에서는 전쟁이 나면, 적과 싸우기 위해서 여러 대의 큰 함대가 출항을 했습니다. 아포스톨로스는 그러한 함대에 붙여졌던 이름이었고, 그리고 그 함대에 탄 장수들에게 붙여졌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연상해보면, 사도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이 이후에는 교회 내에서 사용되게 되었는데, 바로 부활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붙여진 호칭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부르심과 택정함
롬 1:1c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 대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부르심’과 ‘택정함을 입음’이라는 말은 반복된 강조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근거가 다른 어떠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사랑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와 공로가 아니라 일방적인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사도라는 고귀한 직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부르심을 받다’, ‘택정함을 입다’는 표현을 사용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바울이 쓴 로마서를 보고 있는데, 로마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는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원래 주님의 제자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심지어 그들을 헤치고 죽이기 위해 공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께서 사랑하셔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일방적인 주님의 부르심과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왜 당연합니까? 바울은 사도가 되기 이전에 단 한 번도 사도가 되려고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꿈도 꿔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철저하게 그 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주께서 큰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로 사도로까지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안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정함에 대한 강한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아주 극악한 주님의 원수였던 사도 바울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즉 자신은 바울처럼 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름받고 선택받을만한 어느 정도의 자격과 공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도 모두 원래 주님께 원수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죄악된 마음과 생각과 행실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의와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막고 훼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실 가슴에 잘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이것을 아주 깊이 깨달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이 세계를 충분히 깊게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깊이 깨달을 때, 우리를 불러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놀랍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요한복음 15장 16절의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십시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선택의 은혜에 대해서 알려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먼저 당신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들이 자격이 되어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그들을 먼저 일방적인 은혜로 제자로 받아주시고 선택해주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깊이 깨닫게 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랑의 선택, 은혜의 선택의 깊은 세계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가슴이 촉촉해지고 따뜻해지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힘과 위로를 받아서 부름 받고 선택받은 제자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대부분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나에 대해서 ‘나로 말미암은 나, 내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나, 나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나’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신앙적인 인생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신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나로 말미암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은 나’에 대해서 깊이 아는 신앙입니다. 이 정체성이 사라질 때, 반드시 신앙에 위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 신앙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아주 인본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삶이 아닙니까?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선택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부름으로 말미암은 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선택받은 나”에 대해서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로마서 8장 29-30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8장의 끝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은, 특히 로마서 8장 29-30절은 구원론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예지예정, 부르심, 칭의, 영화에 이르는 구원의 전 과정을 논리적으로 압축해서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한 바울의 강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구원받은, 선택받은 우리의 인생이 종국에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신앙의 긴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즉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야 할 구원의 긴 여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요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절과 로마서 8장 29-30절을 통해서 우리는 로마서 구원론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는 것, 즉 구원의 시작과 끝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시작과 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은 신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아도, “나는 나로 말미암은 나가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나입니다. 나는 나로 말미암는 나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나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안에도 분명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입니다.
택정함을 입었으니: 구별
그리고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은 “나는 하나님께서 구별지어놓은 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나입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지금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를 보면 ‘바리새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지어놓았다. 구별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바로 ‘구별된 자’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구별된 자로 여겼고, 그래서 ‘바리새인’이라는 호칭을 자신들에게 스스로 가져다 붙였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신에 대해서도 바울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여전히 구별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서 구별된 자입니까? 바로 복음을 위해서 구별된 자입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율법’을 위해서 구별된 ‘바리새인’이었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구별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회심한 이후로 그의 신분과 소속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별된 자’라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별된 자라는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구별된 자답게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던’(마 24:38; 눅 17:27) 당시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음증거자로 아주 구별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구별된 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별된 나, 따로 떼어져 세움을 받은 나, 선택을 받은 나’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별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았고, 그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구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 하나를 위해서 집중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구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이 구별의 체험, 거룩의 체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룩의 체험이란 무엇입니까? 구별의 체험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거룩은 구별과 똑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별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구별되시는,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의 체험으로부터 진정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신앙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거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과 장소 등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존재들과 하나님을 구별하고(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다른 시간과 교회에서의 예배 시간, 성경공부 시간 등을 구별하고, 다른 장소와 교회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시간과 공간만큼은 일상적이지 않게, 아주 특별하게 구별된 다른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이런 구별로부터 신앙이 생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점점 성장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려지는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존재를 똑같다고 생각하고, 다른 시간과 교회에서의 시간도 똑같다고 생각하고, 다른 장소와 교회를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서 어떻게 진정한 신앙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더 깊은 신앙의 세계가 계속해서 열려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수련회에 와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 매우 굉장한 것입니다. 수련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을 초청해도, 모두가 여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매우 크고 굉장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온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구별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구별하시고, 또한 구별된 장소와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거룩의 체험, 구별의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에서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특별하게 선택을 받았구나. 구별되었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귀한 축복의 자리에 은혜로 선택하시고 불러주셨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신 것입니까? 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보게 하시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오시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시자 가장 먼저 밥상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가장 먼저 주의 발아래 앉아 주님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밥상을 차리고자 했고,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마르다는 밥상에 먼저 관심이 있었고, 마리아는 말씀에 먼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항상 이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 둘의 모습을 놓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상을 차리는 자도 중요합니다. 밥상을 차리기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수고도 매우 소중한 수고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어떤 것보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가장 우선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가 육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먼저 추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고, 그런 자들을 다른 어떤 자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영의 양식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가장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소중한 시간과 장소를 구별해야 합니다. 다른 많은 것들을 하기에 앞서 이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합니다. 이것이 때로는 쓸모없는 낭비 같지만 반드시 필요한 거룩한 낭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위해서 우리 또한 특별하게 구별하셨습니다.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구별하시고,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구별된 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자들만이라도 구별되었을 때, 이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진전시켜 나가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보다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서 우리를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을 알고, 복음을 위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초점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먹든지 자던지 입든지 그 모든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의 뜻을 따라서 복음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택정함을 입었으니: 순종
이제는 부르심과 택정함과 관련해서 또 다른 주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순종이라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일방적인 은혜로 부르시고 택해주시지만, 그 부르심과 택하심에 응답하는 것,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순종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순종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도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택하셨고, 그래서 우리가 그 부르심과 택하심에 반드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의 뜻이 온전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순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실 수는 있으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그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하도록 하실 수는 없습니다. 순종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와 사랑의 결단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8장 29,20절에서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실제로 바울의 증언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한 자들은 모두 역사에 길이 남는 영화로운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항상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미국에 오기 전에 여러 나라와 도시를 순회했는데, 순회 중에 한 도시에도 잠시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르심과 택하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최근에 지체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을 헌신해서 개척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여러 도시에 30개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척을 나갔던 사람들이 제가 그 도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도시에 다시 모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척을 나간 지 3개월 만에 모두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요나서 1장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요나서는 요나의 이방선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원래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을 피해보려고 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바울처럼 부르심과 택하심에 순종해서 사명의 길, 선교의 길, 특히 이방선교의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방의 땅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당신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자리로 부르셨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의 정반대편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항구에서 배가 떠날 때, 요나가 얼마나 크고 신나게 환호성을 질렀겠습니까? 배에 탄 요나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마도 하늘을 쳐다보고 손을 흔들며 “하나님, 안녕~”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 하나님께서도 나를 어떻게 하실 수가 없으시구나. 그래, 그 누구도 나의 자유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 이제야 나는 나의 자유를 완벽하게 쟁취했어”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떠나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게 된 자신으로 인해 마음이 아주 편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드디어 진정한 자유, 완벽한 자유를 가지게 된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배에 탄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평탄한 바다 위를 배가 항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에 광풍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탄 배가 광풍으로 인해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평탄하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인생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요나와 함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이방인 선원들은 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심각한 상황에서 요나는 배 밑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광풍으로 배가 파선의 위기에 처하자 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버렸던 선원들 안에 있는 생각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물건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천하보다 귀한 것이 바로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선원들의 생명 또한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배에 타고 있던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전에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물건들까지도 아낌없이 모두 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요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이방인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고, 죽어 마땅한 자들이며, 죽어서 지옥의 불쏘시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의 생명을 물건만도 못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생각, 요나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고 악한 것입니까? 거짓되고 잘못된 종교가 인간을 얼마나 악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 요나 안에 있는 죄가 이방인들을 통해서 심판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두 바다에 버렸던 이방인 선원들은 그래도 광풍이 잠잠해지지 않자, 어떻게 했습니까? 그 때부터 자신의 신들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의 구원을 놓고 신적인 존재에게 간절히 간청한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들 안에 신앙의 마음, 즉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참 신, 참 하나님을 알려주어야 할 사람, 즉 절망과 죽음 앞에서 구원의 길을 찾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을 소개해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요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요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이방인 선원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 요나보다 더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생명처럼 여겼던,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것들을 모두 내어버리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던 요나의 모습은 얼마나 불경건하고 비신앙적입니까? 그는 심각한 인생의 위기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깨울 때까지 계속해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은 영적 침륜, 영적 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선원들이 아무리 짐을 버리고 간절히 기도해도 광풍은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선원들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제비를 뽑았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타지 않아야 할 사람이 배에 타서 문제가 된 것이라고 선원들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광풍이 일어난 것, 그리고 아무리 기도해도 광풍이 잠잠해지지 않는 것은, 광풍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광풍을 잠재워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결코 응답될 수 없는 문제가 자신들 안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문제를 찾고, 그것에 대해서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요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이방인 안에 얼마나 신앙적인 모습이 있습니까? 요나의 이야기를 놓고 믿지 않는 자 안에 있는 경건과 믿는 자 안에 있는 불경건에 대해서, 즉 불경건한 자 안에 있는 경건과 경건한 자 안에 있는 불경건에 대해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매우 도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나서의 면면에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결국 누가 뽑히게 되었습니까? 요나였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제비를 뽑을 때, 아마도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제비를 뽑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긴장된 마음으로 제비를 뽑고 나서 자신이 제비에 걸리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 깊이 안도하며 “난 아닙니다”, “난 아닙니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딱 걸렸습니다. “꽝” 하고 요나가 제비에 당첨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나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이방인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요나서 1장 10절입니다.
욘 1:10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 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선원들이 요나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두려운 일을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조용합니다. 앞에서 말한 그 도시에서도 요나서 1장 말씀을 전하는데, 성령께서 깊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것은 “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는 고발에 대한 침묵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함께 나누며 우리 안에 있는 소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 앞에서 “하나님께서 저를 오라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과 사명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그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그리고 위대한 흔적을 남겼던 사역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사역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사야가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에게 떨어졌을 때, 그것이 비록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성으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불순종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 부르심을 담백하게 수용했습니다. 바울 또한 그런 면에서 위대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런데 바울은 특히 1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택정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복음 증거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입은 이유를,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택하신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의 시작에서부터, 1장 1절에서부터 ‘복음’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계속해서 깊이 있게 살펴볼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1장 2절부터 4절까지를 통해서는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로마서 1장 16-17절, 로마서 3-8장을 통해서는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 구원의 서정(혹은 구원의 질서 - 칭의, 성화, 영화)의 관점에서 -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입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선택받은 것이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받으려고 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 자격과 공로가 있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것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승전보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2-4절을 통해서 그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우리가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복음이라는 말의 언어 자체적인 의미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독일어로는 에반겔리움)인데, 뜻은 “이겼다”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승전보를 전하는 병사가 그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가면서 외쳤던 소리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내의 도시 국가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매우 잦았습니다. 이 전쟁은 개인과 국가의 생사와 존망이 걸린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은 집이나 안전한 대피장소에 숨어서 가슴을 졸이며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승전보를 전하는 병사가 승리의 벅찬 감격과 기쁨, 흥분을 가지고 먼 거리를 달려가면서 승전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유앙겔리온(이겼다), 유앙겔리온(이겼다)”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승리의 소식들은 들은 사람들은 한꺼번에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환호성을 지르고, 신나게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는데, 원래 올림픽에서는 다른 모든 경기를 다 끝내고 나서 올림픽의 가장 마지막 경기로 마라톤을 했습니다. 이것은 승전보를 전했던 고대의 병사의 외침을 기념하고, 동시에 사람들이 마라톤 주자가 전하는 인류의 승리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것처럼 하며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앙겔리온(에반겔리움)이라는 이 단어는 ‘복음’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Gospel(가스펠)의 어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리해보면, 복음의 헬라어적인 표현인 유앙겔리온은 원래 “이겼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승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을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복음이라는 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신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주께서 이기셨다. 주께서 승리하셨다”는 승전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언어 자체적인 의미로 본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주께서 이기셨다. 주께서 승리하셨다”는 승전보를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주께서 무엇을 이기셨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 싸움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께서 사단과의 싸움, 사단이 쏘는 죄와 사망의 권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류가 사단의 권세,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승리의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기에 힘썼고, 사람들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물러가고 의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단순히 관념적이고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실존과 역사 안에서 분명하게 승리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그 전쟁에서 패배한 도시나 나라의 왕과 백성들은 모두 한 순간에 상대국가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빼앗기고 졸지에 종의 신세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비참한 종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 인류의 역사 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특히 아담은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사단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함으로 인해, 즉 사단의 죄의 유혹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짐으로 인해 이전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비참한 죄의 노예, 사단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이전의 모든 영광을 잃어버리고 죄의 종노릇, 사단의 종노릇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모든 사람들이 이 마성적인 힘에 붙들려 자신도 원치 않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에 의해서 모든 인간들이 완벽하게 억눌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의 노예된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적 싸움은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이 치열한 영적 싸움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려 다시 자신이 노예로, 죄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사단이 지금 이 순간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5:8). 이러한 사단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 마음과 생각을 통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치열한 선악간의 싸움,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선악간의 치열한 싸움이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겪게 되는 영적 싸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싸움을 원치 않는다 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가는 한 이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사단이 시도 때도 없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수많은 영적인 공격들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참한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더 강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치열한 영적 전쟁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항상 마치 바람 앞에 있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패배의 역사, 죄악의 역사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사단의 권세, 죄와 사망의 권세가 그리스도 앞에서 완전히 패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이제 완전히 역류하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거꾸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새로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의 결정적인 싸움, 정규전에서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싸움의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류는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와 사망의 권세,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내쫓고 결박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이었던 인류의 역사 가운데 이 놀라운 세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이 놀라운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승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와 저주의 사슬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단의 죄와 사망의 권세가 패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인생이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이 복음을, 그리스도의 승리의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 복음이 승리의 소식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은 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깊이 맛본 자였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강렬한 복음의 능력에 완전히 감전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의해서 그는 완전히 변화된 자가 되었습니다. 사단의 죄와 사망의 권세 앞에 항상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던 그가 그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위대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다 떨어진 밧데리가 전기에 의해서 충전되는 것처럼, 그는 다메섹에서 하늘로부터 임한 빛으로 인해,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한 복음으로 인해 아주 새로운 힘과 능력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그의 삶은 온통 승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가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한다면, 로마서 7장에 기록된 것처럼 항상 비참한 패배를 거듭해야 했던 영적인 싸움에서도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모든 사단의 권세를 완벽하게 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에서 바울은 사단이 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마음껏 조롱했습니다(고전 15:55-56).
그리고 바울은 이 놀라운 능력을, 이 놀라운 승리의 소식을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놀라운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 세계를 뛰어다녔습니다. 거룩한 복음의 세일즈맨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지 복음의 전파자는 세상의 세일즈맨들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승리의 소식을 듣고 자신처럼 구원을 얻는 사람들, 자신처럼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놀랍게 변화되는 사람들을 전 세계에서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한지도 모르고 전 세계를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흥분과 감격에 젖어서 위대한 승리의 소식인 복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되었다는 것, 선택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명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큰 기쁨과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이런 사명을 위해 선택받았고, 그 사명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가장 먼저 1절에서 “나는 놀라운 구원과 변화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고 선택받은 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복음은…
1)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바울은 2절부터 4절까지를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해주고 있는데, 2절을 보면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이것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을 가장 먼저 언급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오래전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셨던 것이라고, 즉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셨던 ‘야훼의 날’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던 그 날이 지금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날이 왔노라”고 로마의 교우들에게 힘차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2) 그의 아들에 관하여, 이 아들로 말하면
롬 1:2a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바울은 2절에서 복음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아들’(his Son, the Son of God)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입니다. 즉, 복음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진리는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의 아들에 대한 것,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로, 인격으로, 삶으로 나타나지 않은,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복음, 진리는 진정한 복음, 진정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3,4절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이라고 하면서 야훼의 날의 성취로 오신, 약속의 성취로 오신 ‘이 아들’에 대해서,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3-4절은 바울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이것을 깊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2-4절을 통해서 복음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복음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를 원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리고 더 나아가 바울은 4절에서 ‘그의 아들’이,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고 아주 분명하게,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특히 당시의 사람들,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분의 그리스도 되심,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분명하게 인정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신 그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4절을 통해서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해 아주 극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2-4절에서 복음,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방식은 연극을 연상해보면 더 쉽게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소개해주는 한 연극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연극에서는 그 사람이 올 것이라고 하는 과거의 예언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예언대로 이 땅에 온 그 사람의 삶에 대해서, 그 가운데서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기대감이 최고조가 되어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좋겠다. 그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 인물이 바로 이 분이라고 하면서 연극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주인공을 무대 앞으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2-4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리고 온 인류가 그토록 고대해 온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즉, 모든 죄와 사단의 권세를 파하고 인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4) 십자가와 부활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바울은 3-4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그의 아들이, 즉 그리스도가 어떻게 인류의 역사 가운데 그 날, 약속하신 그 날, 야훼의 날, 구원의 한 날, 승리의 한 날이 오게 했느냐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예수가 어떻게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 본문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서에서, 더 나아가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단의 권세를 파한, 그래서 죄와 사망, 저주의 역사를 끊어내고 새로운 의와 생명, 구원과 축복의 역사를 열어낸 그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할 수 있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이것을 깊이 깨닫고 알아야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승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왜 그리스도이신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3-4절을 통해서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이 땅 가운데 승리의 역사를 열어내신 것은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아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인데,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에 나타나 있는 글의 전개를 세심하게 살펴보면, 바울이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예수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해 아주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아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었고, 복음으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것을 정확하게 알게 될 때, 진정으로 복음을 온전히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어내고 승리의 역사, 의와 생명의 역사를 열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부활절 수련회를 하고 있는데, 수련회 마지막 날이 부활절입니다.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는 고난주간의 가장 핵심이 되는 성금요일에서부터 부활절까지의 3일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셨는데, 그 중에 3년은 공적 사역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33년의 생애를 30년의 사생애, 3년의 공생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30년 보다 3년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3년의 공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3일입니다. 3년보다 3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3일은 단순히 숫자적인 3일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3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희생이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생명, 사랑으로 말미암은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서는 부활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을 모르고서는 생명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아주 깊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눅 24:15-16). 그러나 그들이 떡을 뗄 때, 즉 수난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눅 24:30-31). 떡의 찢어짐, 그것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의 핵심은 그들이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나서야 진정으로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왜 엠마오로 가고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그들이 원래 살았던 곳이 어디였겠습니까? 엠마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원래 예수의 꿈을 따라서 예수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생각하고, 깊은 좌절에 빠져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께서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가르쳐 주시고, 부활의 주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해보면,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영광과 생명을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는 희생이요 수난이요 사랑인데, 그 수난에 대해 우리가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만큼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단의 권세,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가 완전히 힘을 잃고 흔적도 없이 끊어지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치열한 씨름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빈 무덤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4절에서 바울은 특히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라고 하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십자가를 딛고 부활에 이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빈 무덤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이 무엇입니까? 모든 생명 있는 자의 무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것이 최후의 감옥이 아닙니까? 누구든지 거기에 갇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무덤을 열어내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모든 사단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열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승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빈 무덤의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빈 무덤을 보장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빈 무덤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런 자들은 죽음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 그리고 그 죽음이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문이 됩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깊이 깨닫는 자들만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고, 부활의 놀라운 역사, 빈 무덤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복음의 진리, 십자가의 진리, 사랑의 진리는 우리에게 비우면 채워지고, 낮아지면 높아지고, 죽으면 다시 살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역설의 진리가 낯설 수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진리, 고상한 진리입니다(빌 3:8).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부활로 이어집니다. 비워짐은 비워짐으로 끝나지 않고 사르밧 과부처럼 반드시 채워짐을 경험하게 됩니다(왕상 17:8-16). 그리고 낮아짐은 낮아짐으로 끝나지 않고 낮아짐으로 지극히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반드시 높아지는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빌 2:6-11).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요 12:24). 그러나 이것은 우리 안에 믿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결코 실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맛보게 됩니다.
자기를 채우는 자는 비워지고, 자기를 비우는 자는 채워집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마 23:12; 눅 14:11, 18:14).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게 되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게 됩니다(마 10:39, 16:25; 막 8:35; 눅 9:24, 17:33). 주님은 이 진리를 가르치셨고, 이 진리대로 사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역설적인 십자가의 진리,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감으로 주님과 같이 부활의 영광, 빈 무덤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단의 권세,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파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빈 무덤의 역사,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 깊은 세계를 알고,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롬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은 승리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축복과 영광에 대해서 5-6절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와 “사도의 직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놀라운 승리의 역사로 인해 우리가 얻은 것이 바로 “은혜”와 “사도의 직분”입니다. 마치 전쟁의 전리품처럼 이것을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값으로 치르고 살 수 없는 아주 값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의와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라는 축복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임하기까지 어떠한 피 흘림이 있었는지, 어떠한 고귀한 희생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임한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을 수 있고, 사도의 직분 또한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사도의 직분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5-6절에서 우리가 모든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는,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 앞에 순종하게 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며, 로마의 성도들 또한 동일하게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7절에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의 서신에서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3;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바울은 자신의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은혜와 평강을 축복으로 빌어주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은혜와 평강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신앙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그래서 그들이 넘치는 평화를 맛보며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인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항상 평강이 먼저가 아니라 은혜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평강은 은혜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 영혼 깊은 곳에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평강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항상 영혼 깊이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1장 8-17절 강해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롬 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 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롬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롬 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의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사와 기도
롬 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 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8절부터 17절까지는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통해서 로마의 교우들에게 자신의 로마 방문 계획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에 먼저는 8절과 9절을 통해 로마의 교우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성도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로마의 교우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8-9절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이 서신을 통해 가장 먼저 로마의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격려해주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로 인해서 로마 성도들은 마음이 매우 따뜻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바울처럼 항상 가장 먼저 상대방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바울은 10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얻고자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로마에 가려고 하는 바울의 간절한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자신에게 열리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기 원하노라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왜 로마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 위해서라고 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나누어주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참 부자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이들에게 주고 또 주어도 끝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령한 은사였는데,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물질적인 축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부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던 영적인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넓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이 너무 많아서, 즉 항상 영적인 충만함 가운데 있어서, 특히 풍요로운 말씀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고 자신의 삶과 목회와 선교 사역 가운데 체험했던 은혜의 역사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전할 것들이 항상 차고 넘쳤습니다. 바울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었던 사람, 할 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자 하는, 즉 자신에게 임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또한 자신처럼 배부르고 행복하고 풍성하게 해주려는 후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고 훈훈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사람과 세상을 신령하게, 거룩하게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이 가진 신령한 은사를 로마의 성도들과 나누기를 원했을까요? 바울 안에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본질적인 이유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게 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이 혼자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은, 그리고 기쁨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은폐하게 되어 있지만, 꿈과 기쁨이 있으면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 또한 자신에게 임한 신령한 은사를 많은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꿈을 가지게 되면, 그 꿈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꿈을 생각하기만 해도 너무 가슴이 벅차고 흥분되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꿈을 전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꿈에 동참시키고 싶습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비전쉐어링Vision Sharing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쁜 소식을 가지게 되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대학에 합격한다면, 그 합격 소식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학 합격의 소식은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매우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꿈과 기쁨이 가진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특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쁜 소식 중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소식입니다. 새로운 생명 탄생의 소식보다 기쁜 소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 소식은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서 전화가 가장 불이 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산부인과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은 기쁜 소식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생명 탄생의 소식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하고 싶어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때, 새로운 생명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때 가장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전하면서 기뻐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기쁨이 있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진정한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고 또 주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 것이 끊임없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셨던 예수님처럼(요 7:37-38) 바울 안에도 항상 넘치는 영적인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라고 항상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신령한 은사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무엇보다 신령한 은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돈과 물질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가진 신령한 은사,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줄 수 있다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고의 것을 준 것입니다. 이 신령한 은사, 영적인 은사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수련회에 왜 모인 것입니까? 바울처럼 신령한 은사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령한 은사가 없는 사람, 영적인 축복을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의 사람이라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신령한 은사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서 로마의 성도들을 영적으로 견고케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신앙을 도와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스스로의 힘과 의지를 가지고 인위적으로 견고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은사를 나눌 때, 신령한 은사를 주고받을 때 견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서로 신령한 은사를 나누며 신앙 안에서 깊은 교제를 나눌 때,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그런데 12절에서 바울은 로마의 교우들과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피차 안위함을 얻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로마에 가서 자신 안에 있는 신령한 은사를 로마의 교우들에게 일방적으로 나누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고 얻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의 인사 속에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된 바울의 인품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 있을수록,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가르치려고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보다 신앙이 어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자신이 배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고자 했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간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훌륭한 세계를 열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울
롬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13절에서 자신이 그동안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고, 또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서 가려고 여러 번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길이 막혀서 로마에 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도 자신이 로마에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었는데, 13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로마에 방문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로마에 가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1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로마에 가서 로마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특히 자신이 헬라인이나 야만인,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 빚진 마음으로 인해서 모든 자들에게, 특히 로마의 교우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조적인 표현입니다.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라는 말은 우리가 쉽게 대조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라는 말이 대조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헬라인은 문명인, 그 외의 사람들은 야만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시에는 헬라어를 읽는 사람은 문명인으로, 헬라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조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즉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무엇을 빚을 졌겠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말입니까? 왜 우스꽝스러운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자신이 선행을 하면 공책 같은 곳에 그것을 빠짐없이 모두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공책에 많은 선행의 리스트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보면서 ‘나는 이만큼 하나님께 받을 것이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는 그런 선행을 행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입니까? 그래서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빚진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반대로 바울이 자신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이만큼 받을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이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선행을 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하나님께서도 다 아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 밖에 없는 야만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는 수많은 공적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빚을 진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언젠가 다 갚아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는 선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에게 많은 빚을 졌고, 그러므로 앞으로 하나님께 받을 것이 많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빚진 자입니다”라는 바울의 고백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유대인들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을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듭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이런 생각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라 할지라도, 이미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서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행위와 공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는 그것을 조금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빚진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들 안에 있어야 할 고백입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깊은 겸손의 모습,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빚을 진 자입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빚진 자입니다. 그 큰 사랑의 빚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즉 받은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의 법을 많은 자들에게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주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우리가 아무리 갚으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갚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은혜 받은 자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15절에서 자신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과 연결해서 보면,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은 내가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받은 사랑은 내가 지금까지 한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이미 받은 그 사랑에 항상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빚을 결코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있는 빚진 자의 마음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서 1) 빚진 마음 때문이라고 앞에서 말했고, 16절에서는 2)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3) 복음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6절에서 말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복음의 길을 걷는 자들은 항상 좁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거칠고 험하며,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너무나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고, 그 역사에 참여한 자들 또한 너무나 보잘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복음 증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심지어 멸시와 천대, 조롱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질그릇 같지만 그 안에 아주 소중한 보화가 있었던 것입니다(고후 4:7). 그리스도인들은 이 보화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때는 그 능력과 영광에 완전히 사로잡혀, 완전히 압도되어 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없어도, 그 보화만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 만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들에게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러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가진 보화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 핍박을 받으면서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화까지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로마의 성도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의 성도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에 대제국 로마의 수도였던 로마가 얼마나 화려하고 엄청난 도시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살아갔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화려함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로마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자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놀림거리와 부끄러움거리가 되기 쉬웠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의 성도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항상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축복과 영광만을 누리면서 살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4장 9-13절을 봅시다.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때로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 없이 살았고, 수고하여 손으로 일하지 않으면 사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욕을 먹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기도 하고, 비방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자로만 읽고 지나치지 말고, 이것들을 하나 하나 장면까지 구체적으로 연상해가면서 읽어보십시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처참한 고난의 기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 바울 또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다른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은 얼마든지 심각할 정도로 존재가 구겨지고 오그라들고 찌그러질 수 있었습니다. 복음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결코 구겨지거나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힘을 바로 복음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압도하게 하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에 완전히 붙들려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버린다면 현재 자신을 우겨 싸고 있는 많은 고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복음으로 인해 받는 고난조차도 큰 영광으로 여기며 살아갈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9-13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선교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복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때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를 이러한 상황에까지 내몰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에게 이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다면,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없었다면, 그리고 복음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결국은 이러한 많은 고난들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항상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고 고백하며 다시 힘 있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고 바울이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으로 인해서 바울이 항상 놀라운 영광과 축복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서 수많은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었기에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로마의 성도들이 자신들이 복음 증거자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움츠려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당당함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성도들은 날마다 엄청난 로마의 영광을 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영광에 비추어 보면, 로마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로마 안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하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했는데, 이것이 고린도를 포함한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었고, 로마교회의 성도들 또한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고백이 결코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복음으로 인해서 큰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일어났던 아주 작고 사소한 핍박이나 박해들을 모두 제외한다 하더라도 기독교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대박해가 무려 10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시대만큼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았던 시대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살펴보아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심각하게 멸시와 조롱을 당해왔습니다. 심각한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도 -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기에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진정으로 복음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 삶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이 받았던 핍박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동일하게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힘듦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제대로 사는 그리스도이면 일수록 세상으로부터 더욱더 심한 핍박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세상의 핍박을 받는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장대 끝에 매달려진 것처럼 되었고, 그래서 세상의 조롱감과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진정으로 복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던 바울조차도 이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바울처럼 참 신앙을 가지고 올바로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분명히 알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신앙의 길을 가면 그 길 끝에 오직 찬란한 축복과 영광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결코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고난이 전혀 없으며 오직 장밋빛 길, 쉽고 평탄한 길만이 계속된다는 생각도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람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환영하고 반겨주는 일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가장 크고 결정적인 장애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길을 가는 가운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처럼, 자신의 신앙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셨거나 버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며, 그 문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협착하고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7:13-14). 십자가 후의 부활, 고난 후의 영광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면, 의와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와 생명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헌신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생각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놀리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특히 풀타임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일수록, 즉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쳐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더 심각하게 놀림과 핍박을 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향해서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 네가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 길을 가려고 할 수가 있느냐? 왜 쉽고 편한 길을 두고 사서 고생하려고 가느냐?”라고 합니다. 특히 그토록 믿고 사랑했던 부모와 친구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믿음의 길, 헌신의 길에 나서고자 하는 우리를 끝까지 막고, 핍박합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일수록 더 심하게 멸시하고 천대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선교의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우리가 전도할 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전도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들을 살리려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전도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이 땅 가운데 오셨을 때,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따뜻하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1). 그리고 그분이 전하는 복음도 즐겨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복음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멸시와 천대와 조롱, 핍박을 피하게 해달라고, 그것이 나를 비켜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어떠한 멸시와 천대와 조롱, 핍박이라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더 큰 사랑을 달라고, 그리고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올바른 역사의식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앞에서 길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극히 약하고 초라했던 자들, 만물의 찌끼 같고 세상 사람들의 구경거리와 같았던 자들, 그리고 심각하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핍박을 받았던 자들이 나중에는 로마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3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가 되어서 세상의 조롱거리였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오히려 로마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희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서 대제국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까?
우리가 복음의 길을 걸어갈 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얼마나 외소하게 보입니까? 화려하고 크고 장대해 보이는 세상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억눌려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살아보면, 세상은 크고 하나님 나라는 작아 보이기만 합니다. 세상의 영광은 영원할 것 같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죄악된 세상은 영원하고 하나님 나라는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바울 안에는 복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신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는 로마가, 더 나아가 온 세상이 결국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이라는, 그리고 하나님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미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로마가, 온 세상이 복음으로 인해서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가장 놀랍게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능력은 한 때 원수와 같았던, 죄인 중의 괴수였던(딤전 1:15) 자신까지도 바꾸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은 전 세계의 수많은 자들 또한 변화시켜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결국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후에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여 강조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말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 안에는 매우 분명한 역사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타락한 세상은 순간적인 것이며 반드시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흐르고 흐르면 결국 타락한 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즉, 이전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해서 타락한 세상이 의의 나라,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의식이란 죄는 반드시 심판 받고 패망하며, 의는 영원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길을 따라가는 자는 패망하며, 의의 길을 따라가는 자는 영원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성서적인 역사관,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는 완전히 망하고 말았지만, 남겨진 몇몇 유적들 외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역사 속의 로마가 되고 말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이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자라서 결국 온 세상을 뒤덮을 것입니다(마 13:31-32). 또한 그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역사의식이 분명하게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이 그 누구보다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힘써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이 때로는 낯설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면 전할수록, 세상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핍박과 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일수록 우리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했던 바울의 고백을 더욱더 분명하게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b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앞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만이 모든 자들을, 그리고 온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그 사랑을 아는 자들에게, 그 놀라운 사랑과 은사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우리가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물론 복음의 문제일 때도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 왜곡된 복음을 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여러 차례 강조할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즉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구원’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병자를 병이 나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자를 물에서 건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능력을 가진 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죽을 병에 걸린, 불치병에 걸린 환자와 같고,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조롱한다 할지라도, 복음은 바로 그런 너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능력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로마서를 통해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왜 바울이 로마를 향해, 로마의 사람들을 향해 구원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역사를 연구해보면, 바울이 살았던 그 시대보다 부패한 시대를 역사상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보다 부패한 나라, 로마보다 부패한 도시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부패했냐면, 당시에 로마의 곳곳에는 사창굴이 만연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아리나라는 광장에는 사창굴에 있는 창녀들이 낳은 후에 버린 아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 가운데 여자 아이들은 누군가가 주워가서 기른 후에 다시 창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고, 자식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총체적인 성적 타락이 로마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서 등을 돌리면, 그 아들이 그대로 길에 버려지는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로마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윤리적인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아무리 좋은 해결 방법들을 제시해준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결책들도 로마와 로마의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심각하게 병들고 썩어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고, 손을 댄다고 해도 이미 때가 너무 늦어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참혹한 죄악들이 가득했던 시대가 바로 로마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시대만큼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는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만큼 구원이 필요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힘주어서 “너희가 아무리 욕한다 할지라도,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병든 로마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은 복음 밖에 없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 밖에 없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로마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교우들을 향해서 “너희가 아무리 손가락질을 당한다 할지라도, 아무리 놀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이 복음 외에는 병든 로마를 회복시켜 낼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그리고 너희는 그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이것을 힘차고 당당하게 전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롬 1:17a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바울은 복음은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에, 구원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힘, 새로운 능력입니다. 이것은 어떤 로마의 군대도 가지지 못했던 놀라운 힘과 능력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던 놀라운 힘과 능력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높이 치켜들고 “이것을 보라. 이것을 보면,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로마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새로운 능력이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새로운 능력인 복음,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으로 로마서의 구원론을 통해서 더욱더 깊이 있게 살펴볼 것입니다. 로마서는 바로 이것을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여기에서 한 번에 다 다룰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 1:17a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리고 바울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의로 말미암는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꾸 자꾸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핍박 속에서도 이것은 계속해서 퍼져나갑니다. 아니, 핍박하면 할수록 더욱더 퍼져나갑니다(출 1장, 행 8장).
믿음을 가진 자는 믿음을 낳고, 믿음을 가진 자는 또 믿음을 낳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이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핍박으로도 이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결론도 “금하는 자가 없었더라. No one can stop”(행 28:31)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번성시키시고 창대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며 그런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한 사람의 믿음이 그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이어져서 영원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결코 헛된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믿음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우리는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b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는데,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다른 말로 하면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은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던 신령한 은사입니다(롬 1:11).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 은사, 현존 체험입니다. 알 수 없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미 내 안에 있는, 망해가고 썩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무조건적인 축복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능력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물입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값비싼 소중한 은총에 대해서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값비싼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그 고귀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났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일찍이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그 예언의 한 날이 지금, 오늘 이 시대에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죄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 받는 것으로 인해서, 즉 부조리한 세상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서 깊이 고뇌하며 힘들어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선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죄악의 세상 가운데서 깊이 절망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의인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한 때가 되면, 이러한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믿음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 놀라운 역사의 한 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리 가운데 이미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교우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아픔과 눈물을 씻기시는 한 때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의인인 우리는 세상에서는 항상 고통을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라도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우주적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의인들이, 모든 사람들이 회복된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바로 이런 자리에 서 있게 되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것을 기억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