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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하나님이 변화시키신다(막 10:27) 찬송 : 337장(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이 세상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높은 빌딩을 짓는 일이 발달했는데 아마도 바벨탑보다 몇 배가 더 높을 것입니다. 하늘로 오르는 일을 발전시켰는데, 비행기를 타고 오르는 것에도 만족하지 못해서 지구 밖 우주까지 오릅니다. 바다 속 깊은 곳을 갈 수 있고, 현미경으로 아주 작은 물체도 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소립자. 양성자니 해서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입자들의 개념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게다가 게놈프로젝트라고 해서 인간의 유전자염기서열을 발견하였고, 심지어는 체세포 복제까지 가능하다고 떠드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거의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뭐 돈을 주고 움직이게 하면 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혹은 마음을 담아 설득하면 된다고 해도 한 번 정도로 그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바뀌고 또 생각이 바뀌면 사람을 움직이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법이나 힘이나 돈이나 혹은 설득이나 등등 약간은 움직이게 하는 수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전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천국에 가려고 하지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인데 구원받는 것도 사람의 방법이나 힘으로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됩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구원은 물론입니다. 신앙생활도 우리 힘으로 잘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믿음의 승리를 이루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믿음 생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이 승리를 이루도록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힘을 달라고 합니다.
신앙뿐 아닙니다. 인간관계나 가정 생황 혹은 직장 생활에서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짜증도 납니다. 때로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내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다. 담담하게 참고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신앙생활의 모습으로 확장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앞에 나오는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 하는데, 자기 재물이 아까워 팔지도 못하고 고민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부자는 자기 재물 버리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욕심이 앞서기 때문일까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욕구를 억제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변화가 심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사람도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변하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고 배운 것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변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변합니다. 예수님이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우리 삶의 진보를 위한 변화도 내 힘으로 되기 어렵습니다. 내 힘으로 노력도 해야겠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의 변화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구원도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신앙의 승리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변화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축복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변화케 하시는 은혜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올 한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주시고 싶은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 맡기는 이 가정과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82. 받은 줄로 아는 기도(막 11:23-24) 찬송 : 450장(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님은 믿음 없는 오늘날의 세대를 바라보시며 탄식하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능한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 능력’의 결정적인 근원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의 숫자 적음,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능력의 부족함을 바라보고 원망하듯 함부로 말하지 말고, 또한 이런 것들만 채워 주시기를 기도하지 말고 “주님, 우리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생길 줄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라고 우리의 믿음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목적지를 향해서 갈 때 길을 알고 가면 쉽게 찾지만 길을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가게 되면 방황만 하게 됩니다. 어려움에 직면해서 없는 중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하는 성도는 많지만 자기가 간구하는 내용이 모두 응답되리라고 믿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그만큼 소원은 많지만 간구의 대상에 대한 신뢰는 많지 않은 것이 성도들의 솔직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 없는 기도는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고 주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는 바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의 바탕 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1. 모든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 근거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용이 무엇이냐 혹은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드려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기도의 대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것, 중요한 것을 구하더라도 그것이 응답되리라는 확신이 없을 때 그처럼 공허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한 것은 반드시 응답되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 기도는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적은 시간을 드려 간구했을지라도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가득 채워지게 되며 생활에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했습니다.
2. 하나님 외에 진정한 믿음의 대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병행해서 섬겨도 좋은 만큼 보이는 신뢰의 대상이 대단히 많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양식은 하나님 이상으로 신뢰하고픈 대상입니다. 전쟁의 위협에 놓인 자들에게 군사력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픈 대상으로 돌변합니다. 억압받는 자에게 권세 가진 자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싶고 도움 받고 싶은 대상이 됩니다. 성도들은 이외에도 자기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며,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많은 기도를 하면서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이처럼 하나님과 병행해서 다른 무엇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로는 결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때 성도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처참한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사실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바라보는 데에는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불안감과 고독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런 경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세상 사람들은 다 비웃고 자신을 고립시킬지라도 하나님만은 인정해 주시며 도와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념으로 살아가지만, 신앙은 없습니다. 신념은 자기 자신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발소에서 면도를 할 때, 믿음이 있기 때문에 맡깁니다. 신앙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에, 반드시 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념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 신념에 받은 줄로 믿으라는 믿음을 더해서 2011년 만사형통하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83. 사랑을 위하여(막 12:33) 찬송 : 448장(주님 가신 길을 따라)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분명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 주님의 원하심을 이루는 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믿음의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내 기쁨을 위해서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큰 기쁨이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며,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즐거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서기관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대답합니다. 서기관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서기관의 대답이 지혜로워서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지혜로운 대답이 예수님께 칭찬을 듣습니다. 지혜로운 대답을 한다는 것은 그 안에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혜로운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대답의 내용은 사랑하는 것이 번제물이나 기타 재물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물질보다 낫습니다. 사랑이 예식보다 더 낫습니다. 사랑이 완벽한 행동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레위기와 신명기를 우리는 율법서라고 부릅니다. 율법서에는 어떻게 하라는 조항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에수님은 율법의 조항보다 율법의 정신을 먼저 강도하셨습니다. 서기관도 예수님이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시자 그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엽적인 조항보다 중심이 더 중요합니다. 중심을 잃으면 지엽적인 조항은 모두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외식이 되고 맙니다. 서기관이 이걸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칭찬하시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으니 이 서기관은 그야말로 예외의 경우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칭찬하신 서기관의 대답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첫째로, 사랑의 정신입니다. 사랑의 정신은 다하는 것입니다. 마음, 지혜,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다라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은 제한적이어서는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제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무제한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무제한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애서 내어 주셨습니다. 사랑은 다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균형입니다. 다하는 사랑이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모르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을 향하여 거짓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요일 4:20). 혹은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가 불문명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개념상으로 우선이지만 이웃 사랑과 병행되는 사람이 균형 잡힌 사랑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최상입니다. 서기관에게서 율법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율법의 조항에 대해 권위를 낮추고 있습니다. 사랑이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번제물을 드리는 조항을 잘 못 말하였다가는 동료들로부터 배신자, 이단자라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서기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최상의 권위에 놓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동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을 진짜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모두 사랑의 동기여야 합니다. 사랑의 동기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율법이 되고, 타종교의 믿는 행위와 비슷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사랑의 정신을 아는 것, 사랑의 균형을 갖추는 것, 사랑의 권위를 다른 행동의 조항보다 최고로 놓으면 우리 예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시간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과 교회 위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신앙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84. 예수님의 선물(눅 4:18-19) 찬송 : 185장(이 기쁜 소식을)
예수께서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가난에서 축복을, 질병에서 건강을, 고통에서 해방을, 피곤에서 쉼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천민의 대접을 받으면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포로들이었습니다. 영적인 포로 자들이었습니다. 미움에 눌린 자들이었습니다. 죄로 고통당하고 병으로 고생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어 자유를 허락해 주신 분이십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식주 해결도 아니요 성공과 실패의 문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접해야 평안이 있습니다. ‘내가 평안을 끼치려 왔노라’ 다시 말하면 포로된 너희 마음을 해방시켜 내가평안을 주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마귀의 공격대상이 되고 마귀에게 붙들려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어놓아도 그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별의 별것이 다 찾아옵니다. 낱선 사람들이 빈집에서 자기도하고 오물도 남기기도하고 벌레나 산짐승들이 들락날락 그리기도하고 그래서 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비어 있으면 더러운 것들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로마서 1장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그러니까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삶이 이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에 완전히 포로된 자를 의미합니다.
이런 더러운 죄인 된 삶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믿고 의로 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야 눌린 삶에서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눌린 자란 마음이 상한 자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차사고로 지금 육체를 제대로 쓸 수 없다면 과거가 지금 현재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약중독자를 생각해 봅시다. 중독이 되면 빠져나오기 힘이 듭니다.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끊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마셔야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기 때문입니다. 슬에 눌려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이 타면 물을 찾듯이 술을 찾게 됩니다. 물을 마셔야 목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술을 마셔야 해소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눌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눌림의 해방은 주님을 믿고 그 분 말씀대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은혜의 해는 율법에서 희년을 말하는데 모든 노예가 계약과 종속적인 관계에서 해방되는 해가 있습니다. 땅이나 노예나 7년이 되면 풀어주는데 이 7년이 7년이 되는 해 즉, 49년의 다음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대 희년이라 하여 모든 종을 다 풀어 줍니다. 빚도 다 탕감되고 묶였던 것이 다 풀어집니다. 이 날은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은혜를 전파한다는 것은 희년의 때를 몰고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희년을 선포하기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든 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희년은 즐겁고 기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때를 선포하셨습니다. 무거운 짐에서 고생하는 우리를 위해서 은혜의 때를 선포했습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은혜의 선포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극에서 극으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오자마자 어두움은 박살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한 이후부터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이외에 마귀에게 명령할 힘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자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하늘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마귀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은 우리가 감히 마귀에게 명령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신 그 권세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버린 권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하신 그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악한 영들과 싸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삶을 바꾸어 놓은 수 있는 능력자가 된 것입니다. 죄에서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 기쁜 예수님의 선물을 안고 감격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85. 사랑의 갚음(눅 6:35) 찬송 : 391장(오 놀라운 구세주)
우리의 믿음은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믿음이며 또 사랑의 표시입니다. 믿음과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깊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갚아도 그 사랑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냥 갚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갚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갚기 위한 목적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음이 감사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또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중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로 하나님이 아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알게 될까요? 사람을 사랑하되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고 하나님을 믿도록 이끄는 사랑일 때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중에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우선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사랑하되 친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실제로 잘 안 되는 일입니다. 게다가 원수를 사랑하면 내가 손해를 본 것 같고,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 사랑이 어려운 일이기에 원수를 사랑하면 그만큼 위대한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불려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내 감정이나 나의 이성으로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도록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앞에 있을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실제로 원수에게 대가와 보상과 기대를 가지면 갖는 사람이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로부터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해 너무 큰 환상을 갖는 것입니다. 원수를 돌이키는 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내 이성이나 의지로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봅니다. 예수님이 어떤 자세를 제시하셨을까요?
첫째는,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선하게 대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나를 악하게 대했어도 나는 선하게 대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악하게 대했다고 나도 악하게 대하면 나도 똑같이 악한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선하게 보여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하게 대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할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둘째는,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거저 주라는 말씀과 똑 같습니다. 원수에게 빌려줄 때는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남에게 무엇을 빌려줄 때는 돌려받을 생각하면 서로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그냥 줄 수 있다면 그냥 주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원수에게조차도 그냥 주는데,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더 많습니다. 돌려받을 것은 바라지 말고 빌려주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셋째는,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사랑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지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 사랑도 인정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가능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차원 높은 사랑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아멘! 186. 넘치는 복을 받으려면...(눅 6:38) 찬송 : 314장(네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이 세상에는 내가 인정하든 안하든지 간에 분명한 법칙이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우리가 믿든지 안 믿든지, 인정하든지 부정하든지 간에 작용되는 확실한 진리가 있습니다.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볼 수도, 보거나 들을 수 없지만 우리는 냄새와 맛을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도 똑같은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받고 사는가? 주고 사는가 입니다. 주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대접을 받기를 다 원합니다.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칭찬 받기를 원합니다. 도움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는 다 원하고 있는데 그 원하는 마음은 갖고 있으면서 남에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주면 줄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실 뿐만 아니라 후히 주신다고 합니다. 눌러 주고 또 흔들어 준다고 합니다. 넘치도록 주신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런 복이 2011년 우리에게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복 받고 날마다 기쁨의 감사를 노래하는 한 해를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할까요?
1.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됩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영과 육신,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영적인 생활을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위주로 하게 되면 천사의 경지를 넘어서서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대로 사는 영적인 생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 고 하셨던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대로 먼저 주면 됩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입니다.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줄 것이 넘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줄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섬김의 은사, 재능적인 은사도 나눌 수 있습니다. 칭찬의 말 한마디, 따뜻한 사랑의 말 한마디는 건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거둘만큼 심으라!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거둘 것이니라!”는 말씀을 따라 풍성히 심으면 심는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줌으로서 더 많은 것을 받게 되고, 감사함으로 받아 거둔 축복을 받게 됩니다.
3. 하나님 말씀대로 물질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복의 약속을 받았으니 복된 사람입니다. 믿음의 복을 나누는 사람이 곧 복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아까워서 다른 이에게 나누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아까움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충만함이 있습니다. 은혜의 충만함, 사랑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충만함이란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충만함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만함을 안겨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충만함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나를 은혜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누게 하십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이 가지게 하십니다. 나는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지만, 예수님이 내게 충만함으로 갚아 주십니다. 얼마나 멋진 축복입니까?
우리가 준 것을 계산하려 한다면 예수님의 은혜가 감소됩니다. 사랑은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계산하지 않을수록 은혜가 더욱 더 커집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값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롬 3:24). 이 은혜를 이웃과 나누어 보십시오. 날마다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로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고 또 주시고 줄 것이 없자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분이십니다. 지금 가진 것이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욕심 때문에 나눌 수 없지만, 내 것이 아닌 보관자라는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누고 비워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나는. 그리고 우리 가정은 주는 쪽인가? 아니면 받고 사는 쪽인가? 주어야 복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187. 복 있는 자(눅 11:28) 찬송 : 285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우리는 복을 받아 살고 싶습니다. 넉넉하고, 건강하며, 사이좋고, 화목하고 잘 되는 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바람은 누구나 갖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소원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환경에 나타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에서의 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자체가 복입니다. 복된 사람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진 사람,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서도 바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시편에서도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복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33: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고 기록합니다. 거룩한 백성은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방법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동행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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