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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 가난 때문에 집 잃고 길거리로 쫓겨남 1818년 - 어머니의 사망 1831년 - 첫 사업 실패 1832년 - 주 의회 선거에서 낙선 1832년 - 법률학교 입학 실패 1833년 - 두 번째 사업파산 (이 때 진 빚을 갚기 위해 17년 동안 고생함) 1834년 - 의회진출 성공 1835년 - 약혼녀의 갑작스런 사망 1836년 - 신경 쇠약으로 입원 1838년 - 주 의회 의장선거에서 패배 1843년 - 하원의원 선거 낙선 1846년 - 하원의원 선거 당선 1848년 - 하원의원 재선거 낙선 1855년 - 상원의원 선거 낙선 1856년 - 부통령 후보 지명전 낙선(100표차) 1858년 - 상원의원 출마 낙선 1860년 - 대통령 출마 당선 |
조금만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1809.02.12
켄터키주 하젠빌(Hodgenville, Kentucky)의 통나무집에서 출생.
아버지 토머스 링컨, 어머니 낸시 행크스,
두 살 위인 누나 사라(Sarah)와 함께 생활함.
1815. 누나 사라와 함께 몇 주 동안 학교에 다님. 그리고 21세 때까지
정규 교육은 1년도 못 받았고(less than a year of formal education),
어머니의 홈 스쿨을 통해 빌려온 책과 성경책으로 교육을 받았다.
(home school, using borrowed books and the Bible)
1818.10.05.
어머니 낸시 행크스의 죽음을 경험(풍토병으로 소천, 링컨 나이 10세).
그 후 링컨 나이 20세에 누나 사라가 출산시의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 떠나자, 친한 피붙이를 보내는 가슴 쓰린 슬픈 경험을 하게 됨.
1831년
22세 되어 일리노이주(Illinois. 1831) 뉴 세일럼(New Salem)으로 이주.
독학에 의한 자기계발 교육으로 문법, 역사, 수학, 법률 등의 실력을 쌓음.
(self-education by borrowing books and teaching himself
subjects such as grammar, history, mathematics, and law).
그리고 상점 두 곳에서 동시에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store clerk in two different general stores).
1832년
Black Hawk War(인디언 추장 블랙 호크와 500명의 전사들이 일리노이에
쳐들어 온 전투)에서 3개월 동안 자원입대 참전한 후 7월에 제대. 일리노이주
하원 선거에 휘그(Whig) 당으로 출마 후 낙선. 윌리엄 베리와 잡화상 동업 시작.
1833년
봄에 링컨ㆍ베리 상점 파산. 베리가 죽자 링컨은 빚 더미에 오름.
뉴 세일럼 우체국장이 됨.
1834년
휘그 당으로 일리노이주 주 의원에 당선되어 8년간 일함.
이때 측량기사의 일도 함께 함.
1835년
링컨 27세 때, 약혼녀 앤 메이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 떠남.
1842년
메리 토드(Mary Todd)와 결혼.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1843년(August 1, 1843)
첫 아들 로버트 토드 출생(Robert Todd Lincoln-
four sons, only one of which survived to manhood).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로버트는 1926년 7월 26일에 사망.
1846년(March 10, 1846)
둘째 아들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Eddie" Baker Lincoln) 출생.
그러나 에디는 3년 10개월의 어린 나이로 1850년 2월 1일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휘그당의 미국 하원 후보로 공천되어 당선됨.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남.
1850년(December 21, 1850)
셋째 아들 윌리엄 월리스(William "Willie" Wallace Lincoln) 출생.
월리스는 링컨이 대통령 시절이었던 1862년 2월 20일에
11살의 나이로 생명을 마쳤다.
1853년(April 4, 1853)
넷째 아들 토마스(Thomas Tad Lincoln) 출생. 링컨은 태드라고
애칭을 불렀는데, 태드는 1871년 7월 15일에 사망하였다.
1860년 미합중국 16대 대통령에 당선.
1861년 4월 남북전쟁 발발.
1863년 1월 1일노예해방령 선포.
1863년 11월 19일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Gettysburg) 방문. 전사자 국립묘지 봉헌식 참석.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발표.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널리
천명한 구절은 역대 최고의 연설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는 명연설문이다.
1864년 11월 8일 대통령 재선.
1865년 4월 14일 워싱턴 D.C.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보던 중,
존 부스(John Wilkes Booth)에게 암살당하여 4월 15일 사망함.
링컨의 일화를 보면서 성공으로 이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한다면 큰 잘못이다. 위에서 보듯 연속적으로 실패한
외적 현상들에 의하여 심한 괴로움을 받았지만...
내적인 면에서도 네 자녀 중 두 명의 죽음을 눈 앞에서
경험하게 된 사실 자체가 아이들과 뛰놀고 돌보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억장이 무너지는 괴로움이었다.
특히 남북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중에 발생한 아들의 죽음...
1862년 2월에 윌리와 태드가 독감에 걸려 고열로 밤새
한 잠도 못 자고 몸부리치는 일화는 눈물이 핑도는 이야기이다.
동생 태드는 병세가 호전되어 회복되었지만, 가장 사랑하던 윌리가
사경을 헤맬 때, 링컨 부부는 밤새 간호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무기력한 부모의 위치가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윌리는 마치 죽음을 예감한 듯, 심방와서 위문 기도를
해주시는 목사님과 부모님께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세요. 그리고 엄마, 아빠!
그동안 내가 모아 둔 헌금을 목사님께 전해 주세요.
많지는 않지만 우리 주일학교를 위해서
꼭 써 주세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사랑해요.”
걸리 목사와 링컨 부부는 가슴이 아파옴을 느꼈다.
그리고 윌리는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링컨은 윌리의
죽음 앞에 흐느끼다가 드디어는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내 기특하고 착한 아들,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던 윌리! 이 세상에서 살기엔
너무 깨끗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셨겠지? 그러나
아빠는 견딜 수 없구나.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윌리야, 사랑하는 윌리야!”
링컨에게는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느라 자녀들의
죽음이 결코 마음에 사무치는 것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위 내용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남북전쟁을 끝낸 후...
남북의 모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대통령의 입장에서
함께 포용하고 위대한 미국을 건설해가도록 이끌어 간 것이다.
자녀의 죽음이라는 아픈 기억은 언제 어느 때고 간에
문득 찾아오는 병과 같다. 갑자기 생각나면 어찌할 수 없는
그 아픈 충동은 글로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링컨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마음으로 함께 눈물을
흘린다. 우리 주변에 자녀나 가족을 먼저 잃고 상심하는
분들이 있다면, 추스리기 어려운 마음을 정성껏 위로하면 좋겠다.
<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피에타 조각상 >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주검을 안고 있는 자애로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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